나를 바꾸는 인생 심리학
 
지은이 : 황시투안 (지은이), 정은지 (옮긴이)
출판사 : 미디어숲
출판일 : 2023년 11월




  • 무슨 일이든 잘 풀리는 사람과 달리 불행한 이들은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릴수록 더 깊은 악순환에 빠져듭니다. ‘고난, 결정, 행동, 결과’라는 네 가지 요소의 악순환을 끊고 진정한 나를 찾고,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돕습니다.


    나를 바꾸는 인생 심리학


    ‘시각’의 변화로 더 나은 자신을 발견하다

    영원히 오지 않을 내일을 기다리는 아둔함

    오지도 않은 미래 때문에 현재를 희생하다

    시멘트로 발라진 도시에 살든, 전원 농가의 시골에 살든, 인간은 영원히 지금 현재에 만족하지 못한다. ‘좋은’ 미래를 위해 악착같이 돈을 아끼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컴퓨터 바탕화면의 아름다운 풍경 사진만 보면서 여행은 엄두도 못 낸다. 수입이 많지 않은 젊은 사람이라면 그렇게 절약하는 것에 동의하겠지만, 내가 아는 지인 중에는 억대 기업인도 그렇게 생활한다. 그들은 누리는 것을 적대시하며 ‘즐거움’의 문턱만 건드리다가 이내 발길을 돌린다. 수입이 많아도 당장 돈을 쓰지 못하고 은행 계좌의 예금 액수만 늘리는 데 혈안이 돼 있다.


    왜 동물은 배부르게 먹고 나면 현재 상황을 누리며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데,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현생의 인류는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늘 분주하게 움직이는가?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10만 년 전 지구에는 여러 강한 동물들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왜 약해 보이는 인간이 먹이사슬의 맨 꼭대기에 서게 된 것일까?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인간이 진화하면서 두뇌가 엄청나게 발전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뇌의 기능 중 하나는 미래를 계획할 줄 알고, 추운 겨울이 다가오거나 재난이 닥치기 전에 예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뇌는 미래를 걱정할 줄 알게 해 주고, 그래서 인간은 더 강한 생존력을 갖게 됐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일장일단이 있게 마련이다. 인류는 ‘생존 능력’을 갖추는 동시에 점점 ‘삶의 능력’을 잃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전쟁과 역병, 기근에서 벗어나 편안한 문명도시에서 살아가고 있음에도 우리의 뇌는 생존을 추구하고 있다. 우리가 생존을 추구할 때, 초점은 언제나 미래에 있기 때문에 미래의 여러 불확실한 요소들은 불안감을 느끼게 하며, 현재의 아름다움을 보기 힘들게 만든다. 이것은 우리가 현재에 집중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변화한다’는 사실 뿐이다. 미래는 원래 무수한 미지와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미래의 불확실한 요소들이 얼마나 많은가. 미지의 생존 환경, 국제 정세, 경제 여건, 의료 수준…. 이런 요소들이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지 않도록 강력한 두뇌는 우리가 생존을 미리 준비하게 한다. 이렇게 끊임없이 생존을 위해 지금 소중히 여겨야 할 모든 것을 버리고 있다. 그럼 현재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이쯤 되면 우리가 뇌에 ‘속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는 뇌가 미지를 예견하고 위험에서 벗어나 안전하게 생존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그러나 휘영청 밝은 달도 어두운 뒷면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미래의 아름다운 삶을 위해 노력하는 도중에 현재를 간과하기 쉬워진다.


    현재뿐 아니라 삶 전체를 희생하게 된다

    깨달음은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 깨달음을 얻으면 스스로가 어떻게 생존을 추구하는지 패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름다운 삶에 대한 갈증도 볼 수 있고, 스스로가 현재에 소홀해지는 것도 볼 수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선택의 여지가 생긴다.


    우리의 삶이 정말 위험에 처했을 때는 잠시 현재를 희생하는 선택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어떠한 미래도 현재를 희생할 수 없다. 인생은 현재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현재를 기분 나쁘게 보내면 결과는 무의미해진다. 언젠가는 분명히 비록 현재를 희생했지만 반드시 아름다운 미래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 희생하는 것은 현재뿐만 아니라 어쩌면 자신의 삶 전체일 수도 있다.


    미리 앞으로의 일을 준비하려는 것은 인류의 천성이다. 나는 그 천성이 되려 우리의 인생을 통제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을 뿐이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추구하지 말라고 권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를 위해 애쓰기보다 현재 가진 것을 즐기면서 물질적 부를 축적해 미래를 대비하기보다 스스로의 능력과 자신감을 높여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충분할 때 미래가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하든지 자유자재로 대처할 수 있다.



    ‘사고’의 변화로 비로소 나로 살아가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젊었을 적 막일을 다녔을 때 나는 공장 옆 낡은 기숙사에서 살았었다. 벽을 한번 툭 치면 흙이 주르륵 떨어지기 일쑤였다. 내가 살던 곳의 멀지 않은 곳에는 2층짜리 건물이 있었는데 총 건축 면적이 100제곱미터를 넘지 않았다. 당시에 나는 내 평생에 이런 건물 한 채만 있다면 인생이 헛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행히 하늘은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지 않았다. 만약 내가 그 공장 일을 떠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아마 그 소원하던 그 건물에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생의 목표가 100제곱미터 남짓한 작은 건물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말이다.


    누구나 마음속에 품고 있는 바람은 현재의 자신의 환경과 사고 구조에 영향을 받는다. 만약 걸인에게 지금 당장 원하는 걸 해결해주겠다고 하면 그는 인파가 많아 돈을 많이 구걸할 수 있고, 비바람도 막아낼 수 있는 육교 밑을 차지하고 싶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의 바람이 해결된다면 생활은 좀 나아질 테지만, 아무리 상황이 좋아져도 그는 여전히 걸인일 것이고, 사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지금 자신의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자신이 앞으로 살아갈 삶이 최고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대부분이 비는 소원은 실상 걸인의 소원과 별 차이 없이 현재의 습관이나 사고에 의해 제한받는다. 그렇기에 ‘현재 시야로 보이는 범주’에서 ‘마음이 바라는 것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의미가 없다. 우리의 시야가 그저 그때 세운 목표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우리는 평생 하나의 목표를 위해 분투한다. 어느 날 그 목표에 도달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별로 재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집을 사고 싶어 했는데 막상 사서 들어가니 은행에 빚을 지고 사는 것 말고는 인생에 큰 변화는 없는 것 같다. 게다가 소원을 이루기 위해선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소모된다. 그렇기에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때론 우리가 동경하고 좇는 것이 꼭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내 소원을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 마음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져 축복해 줄 만한 소원은 무엇일까?


    내 강의 중에는 목표 설정을 돕는 강의가 있다. 대부분 수강생이 설정한 목표는 돈을 많이 벌고, 큰 집에 살고, 외제차를 운전하고, 큰 사업을 하든지 아니면 세계여행을 하거나, 좋은 아내 혹은 남편을 만나거나, 일은 조금 하면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장을 찾는 것이다.


    나열한 목표를 보면 모두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사람’이나 자신의 성장에 맞춰진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것이다. 모든 일은 ‘사람’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발견하는 사람도 적을 것이다. 일은 사람에 의해 진행된다!


    진정한 목표는 자신의 성장에 있다

    목표는 우리가 머릿속에서 설정한 미래이자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미래 청사진이다. 그러나 사실 각자의 우물 안에서 살고 있기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미래는 영원히 현재의 틀과 시각에 갇혀 있을 뿐이다. 현재 우리의 미래에 대한 기대와 구상들은 솔직히 상상하는 데 한계가 있다. 자기 자신도 모르고, 자신의 맹점이나 잠재력도 모르기 때문에 설정한 목표는 쉽게 일종의 한계가 되고 만다.


    인생에서 추구해야 하는 목표는 스스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다음은 현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목을 넓히고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에 우리의 세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내재한 규제나 한계 말고도 외적인 어려움도 있다. 현재 우리가 서 있는 높이에서는 반드시 많은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고 어려움 앞에서 적당히 타협할 것이다.


    따라서 소망이란 자시의 능력을 속으로 헤아려 보는 약간의 상상일 뿐이다. 어려움은 마치 큰 산이 앞을 가로막는 것과 같다. 우리의 목표는 아마도 산 앞의 작은 공터 수준이다. 큰 산이 시야를 가렸기 때문에 눈앞의 작은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산은 계속 자라지 않는다. 큰 산을 발아래로 밝고 어려움을 뒤로 따돌릴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질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성장해야 한다. 예를 들면, 초등학생에게 수업시간은 꽤나 큰 어려움일 수 있고, 선생님이 내주신 문제도 풀기 힘들다. 그러나 중학생이 되고 나면 초등학생 때 어려웠던 수업은 모두 식은 죽 먹기처럼 쉬워진다. 자신이 성장하고 능력이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어려움은 우리를 더 높은 곳으로 이끈다

    내가 광저우 대도시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태어난 작은 시골에 100제곱미터짜리 2층 건물을 소유하길 원했던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운명은 나를 끊임없이 가르치고 성장시켜 내가 서 있는 곳의 위도와 고도를 넓히라고 강요했다. 내 능력과 높이가 높아졌을 때 이전에 갖고 싶어 했던 물질적 부는 자연스레 따라왔다. 그때의 나처럼 수동적으로 운명의 핍박을 받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초점을 변화시키고, 바깥의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며, 자신의 시야를 넓히고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끊임없이 성장할 때 이전의 어려움은 우리를 방해하지 못한다. 물론 각자의 어려움은 다르겠지만 모든 어려움은 결국 우리를, 더 높은 곳에 도달하도록 돕는다.


    제한된 상상력으로 자신의 인생을 한정시키기보다는 스스로 더 높이, 더 멀리 볼 수 있도록 방향을 틀어보아라. 목표 없는 배 판척은 바다에서 어떤 바람이 불어도 순풍이 아니다. 하지만 목표가 정해지면 바람이 어느 쪽에서 불어도 돛의 각도를 잘 조절하기만 하면 사방에서 부는 바람이 모두 순풍이 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일단 성장의 목표가 세워지면,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고난이 우리의 성장을 돕기 위해 온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니 올해의 새해 소원은 ‘자신의 성장’으로 해 보자. 매일매일 성장하는 한, 시간이 흘러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더라도 그보다 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인생은 두리안을 도전해 보는 것!

    인간은 생존을 위해 항상 자신의 안전을 최대한 확보하기 때문에 자신의 몸에 밴 편안한 공간에서 살아간다. 새로운 것을 만날 때면 그것을 시도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잠재의식은 자연스레 그것이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해 거부하게 된다. 그래서 절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안전에 기초한 잠재의식은 평생 일정한 패턴 안에서 살게 한다.


    이것이 바로 울타리를 돌파하기 어려운 이유다. 이런 결과는 당연히 우리의 생존 확률은 확보하지만, 인생이 풍요로워질 가능성도 박탈한다.


    같은 것을 추구하고 다른 것을 배척하며 외부와 단절되는 것은 앞으로 인생에 펼쳐질 무한한 가능성을 차단한다. 세상은 변한다. 산천과 강, 초목과 꽃, 그리고 열매는 모두 저마다 다른 삶의 방식이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자신과 다른 관점들을 항상 틀렸다고 여기지 마라. 영원히 옳은 관점은 없다. 세상의 다른 점이 있음을 인정해야 다른 각도로 볼 수 있고, 우리와 성격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여야 우리의 울타리가 넓어지고 기회가 늘어난다. 그리고 울타리를 무너뜨릴 수 있다.


    신념은 대부분 윗세대와 전통문화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일단 신념이 잠재의식에 자리 잡으면 행동으로 드러나게 된다. 생활 속에서 울타리의 고착화는 사실 본질적으로 신념의 고착화이므로 울타리를 부수는 것은 ‘내적 신념’을 바꾸는 데서 시작할 수 있다. 신념의 겉모습은 습관적인 행동이기 때문에 가장 간단하고 효과적인 돌파법은 다음과 같다.


    ① 시각 돌파: 평소에 입지 않던 옷을 입어 보고, 과거 스타일과 전혀 다른 헤어스타일로 바꾸고, 좋아하지 않는 영화(당연히 고전 영화를 선택하고, 조잡한 불량 영화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하라)를 보러 가는 것도 한 번쯤 시도해 보자.


    ② 청각 돌파: 평소에 좋아하지 않는 장르, 예를 들면 교향악 같은 장르를 들어보자. ‘듣기 싫다’는 결론을 급하게 내리지 마라. 유명 음악가의 작품이 많은 사람에게 인기를 끄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신과 다른 관점을 들어 본다. 반박을 서두르지 말고 호기심을 가지고 찾아라. 다른 사람의 관점에도 흥미로운 점들이 많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③ 미각 돌파: 이전에 시도해 보지 못했던 음식을 먹어 보자. 예를 들어 두리안, 취두부, 낫토 등 이런 음식이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④ 행동 돌파: 이전에 하지 않았던 일들을 해 보자. 당연히 합법적이고 합리적이며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다.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다른 지방과 다른 민족의 문화를 이해해 보자. 시야가 넓어지면 자연히 내면의 세계도 열릴 것이다.


    이러한 작은 것에서부터 자신의 틀을 열어 볼 수 있다면, 점점 더 다양한 사람들을 받아들이게 되고 그들의 관점과 가치관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세계와 다른 관점, 다른 목소리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인간관계도 자연스레 열린다.



    ‘마음’의 변화로 고통에서 벗어나다

    충돌을 피해 당혹스러움을 받아들여라

    우리가 아는 것은 대부분 과거 경험을 기반으로 한다. 사람들이 두 가지 이상의 관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뇌가 서로 다른 관점에 직면할 때 충돌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충돌이란 뇌 속에서 찬반의 관점이 몸부림치는 것으로, ‘아마 과거처럼 그럴 것이다’와 ‘현재 이처럼 될 것이다’ 사이의 불일치이며, ‘내가 맞다’와 ‘다른 사람이 맞다’ 사이에 일어나는 다툼이다. 충돌은 사람 사이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 안에서도 꽤 자주 일어난다.


    예를 들어 ‘나는 모른다’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나는 모르지만 그래도 알아야 한다’는 것은 문제가 된다. ‘나는 모르지만 알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충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나는 충돌을 당혹스러움으로 바꾸는 방법을 사용한다. 당혹스러움은 ‘과거에는 그랬다’와 ‘이처럼 될 것이다’ 간에 불일치가 일어날 때 생긴다. 즉, 오늘 발생한 사건과 자신의 과거 인식 사이에 일어나는 불일치이며, 현재와 과거의 충돌이다. 과거와 현재를 구분할 수 있게 되면 당혹스러움은 다루기 쉬워진다.


    ‘아마 그럴 것이다’가 반드시 옳은가? 만약 나의 ‘아마 그럴 것이다’가 과거에 그랬을 뿐이라면? 같은 맥락에서 자신이 줄곧 견지해 온 ‘내가 옳다’는 것 또한 과거의 사례에서만 그랬을 뿐이다. 우리의 많은 인식은 과거의 경험 위에 세워져 있고, 우리가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근거는 과거의 모습에 근거한 것이다.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가고, 상황은 시시각각 변하는데 이전의 관점이 지금도 시의적절할까?


    이 안에 시간 프레임이 있다. ‘당혹스러움’은 서로 상충되는 두 가지 관점을 서로 다른 시간의 프레임에 놓는 데서 발생한다. 우리가 견지하는 ‘아마 그럴 것이다’라는 것을 ‘과거’의 시간의 프레임에 놓으면 우리는 이전의 관점에 집착하지 않고 다른 관점을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열 수 있다.


    충돌과 당혹스러움의 가장 큰 차이점은 충돌은 다른 관점, 다른 인식을 하나의 시간 프레임, 즉 현재에 둔 반면, 당혹스러움은 두 개의 시간의 틀, 즉 과거와 현재의 틀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충돌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배척하기 때문에 자만에 빠질 수 있다. 반면 당혹스러움은 미지의 세계로 발을 내딛게 하여 새로운 답을 찾게 한다. 과거의 인식을 고집하지 않을 때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다.


    마음을 열고 관용할 때 나의 세계는 더 넓어진다

    우리는 자신과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자각하라. 자신의 인지를 '과거'에, 상대방의 인지를 '현재'에 두어야 한다고 자신을 일깨워라. 하나의 관점을 과거 기준이라고 하고, 다른 관점은 현재나 미래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지금의 관점이 꼭 맞는 것은 아니더라도 뇌가 저장할 공간을 열어 두면 이전의 충돌은 당혹스러움으로 바뀔 것이다. 누군가가 만약 마음속에 당혹스러움이 있다면 그는 가서 이해하고 배우고 성장하는 계기로 삼아라. 당혹스러움이 점차 해결되면서 우리의 세계도 점점 커질 것이다. 이는 수소와 산소를 제한된 공간에 같이 보관할 경우 불을 붙이면 폭발하지만 서로 다른 공간에 두면 괜찮은 것과 같은 이치다.


    물론 때론 두 가지 생각이 충돌해야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는 경우도 있다. 대개 충돌은 갈등을 증폭시키고, 당혹스러움은 우리를 끊임없이 성장시킨다. 개방하고 포용하면 세상이 더 넓어진다. 뇌의 개방과 포용하는 능력을 의식적으로 단련하고, 자신과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우리와 전혀 다른 사람들의 세계를 알아가고 포용심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영원히 걸어가야 할 마음 성장의 길

    마음의 성장, 어디로 가야 할까?

    심리학은 인간의 성장을 크게 ‘기생기, 의존기, 반항기, 성숙기’의 단계로 나눈다. 만약 단계마다 충분한 심리적 영양분을 얻을 수 있다면, 마음도 영양을 공급받고 건강하게 성장하며 자연히 다음 단계로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의 절대다수는 성장환경 및 부모 교육의 영향으로 인해 순조롭게 나이에 상응하는 단계로 진입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심심찮게 퇴직한 후에도 누군가에게 절절매며 평생을 순종하며 사는 사람을 본다. 또 어떤 사람은 30~40대가 되도록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못해 심리적으로 계속 ‘기생기’에 머물기도 한다. 반대로 자신과 다른 관점이나 권위에 부딪히면 무조건 대항하는 사람이 있는데, 전형적인 ‘반항기’ 모델이다.


    진정으로 성숙한 사람은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다른 관점과 개성을 포용하며, 서로 다른 성격의 사람들과 즐겁게 어울린다. 자신과 주변인까지 배려하면서 전체와 사회를 배려한다. 충돌 앞에서는 중립적으로 자신의 관점을 전달하여 유쾌하게 협업을 이루어 간다. 심리학자 버지니아 사티어는 이런 능력을 ‘일치성 소통’이라 부른다.


    인류 역사와 개인의 마음 성장이라는 두 그림을 함께 놓고 보았을 때 나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인류 역사나 개인의 마음과 지혜의 발전은 공자가 말한 “군자는 조화하되 동화되지 않는다.”의 방향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즉, 다양한 관점을 존중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우호적으로 협력하며, 자연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마음이 성장하는 방향이라는 것이다. 이런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대략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쳐야 한다.


    1단계. 억압에서 자아 되찾기

    보통 사람들은 생존 스트레스로 인해 많은 일에 타협하며 어쩔 수 없이그것을 위해 즐거움을 포기하고 항상 자신을 억압한다. 이는 심리적으로 기생하거나 의존하는 단계다. 이 단계를 성공적으로 넘어서려면 다시 자아를 되찾고 자신의 진실한 욕구를 존중해야 한다.


    2단계 성숙한 자아

    자아를 되찾을 때 남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남을 존중할 줄 모르고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자아가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사람이다. 반대로 한 사람이 진정으로 자신을 존중할 줄 알면, 그는 자신을 존중하는 것처럼 남을 존중할 줄 알게 된다.


    마음의 성장과 내면의 성장 법칙을 알고 나면 어디로 가야 할지 분명히 알게 된다.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는 것과 같은 인격 전환 과정을 통해 새로운 것을 섭취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사실 ‘의존기’에서 ‘반항기’로, 그리고 ‘성숙기’로의 도약을 위한 준비를 마친 것이고, 사티어가 말한 바와 같이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에너지를 축적’하는 것이다.


    방향만 맞으면 길이 멀어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내면의 갈망을 좇아 앞으로 나아갈 때면 마음의 성장 지도를 먼저 내면에 놓아라. 그러면 길을 잃지 않는다. 마음의 성장은 하나의 길로, 우리는 영원히 그 길을 걸어야 한다. 우리가 일시적인 깨달음을 고착화하고 이것으로 충분하고 완벽하게 깨달았다고 생각할 때 성장은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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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