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모티브로 한 무늬, 간결함에 위트를 더한 감성적인 디자인의 패브릭과 의류, 디자인 소품과 인테리어로 유명한 ‘미나 페르호넨’ 창업주이자 디자이너 미나가와 아키라의 삶과 일에 대한 철학을 담아냈다. 미나가와 아키라는 능숙하지 못한 패션 일을 선택했지만 열등감보다는 발전할 수 있다는 믿음을 소중히 여기며, 일시적으로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쓰일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 100년 이상 이어갈 브랜드로 키워가고 있다.
트렌드를 따르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을 만들어주는 옷은 무엇일까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하며 미나 페르호넨을 이끌어온 과정을 통해 만들고, 일하고,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속도와 효율만을 중시하는 시대에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미나가와 아키라의 모습은 ‘일하는 기쁨’,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해나가는 힘’, ‘협업을 통한 유연한 창작 태도’ 등에 대해 구체적이고 생생한 모델이 되어준다.
■ 저자 미나가와 아키라
1967년 도쿄에서 태어났고, 문화복장학원에서 패션 공부를 했다. 핀란드와 스웨덴을 여행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모습과 그들의 삶에 녹아 있는 디자인의 관계성에 매료되어, 이후 디자인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995년 ‘미나(mina)’를 설립했으며, 2003년 브랜드 이름을 ‘미나 페르호넨(mina perhonen)’으로 변경했다.
직접 그린 도안으로 만든 독자적인 디자인의 옷과 소품, 생활용품과 인테리어 등 일상에서 사용 가능한 제품을 발표하고 있으며, 각종 공연의 무대의상을 만들고, 아사히신문과 니혼게이자이신문의 연재물에 삽화를 그리기도 한다.
무인양품의 POOL 프로젝트 감수를 비롯하여, 영국?스웨덴?덴마크의 섬유회사, 이탈리아의 도자기회사 등 국내외 업체들과 연계하여 제품의 개발과 생산을 활발히 이어가고 있다.
2004년 파리 패션위크에 처음 참가한 이후, ‘미나 페르호넨/미나가와 아키라 지속하다’전시회 등을 통해 미나 페르호넨의 작품과 거기에 담긴 정신을 알리고 있다.
■ 역자 김지영
2007년 동국대학교 교육학과에 입학했으나, 대학 내 방송국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그 후 방송국 현장에서 조연출로 근무하면서 만드는 것이 일하는 즐거움으로 이어지는 경험을 한다.
2015년 릿쿄대학에 입학해 일본문학을 전공하면서 책이라는 아날로그적 플랫폼의 사회적?시대적 역할에 대한 깊은 흥미를 느낀다.
2019년 한국서적전문 북카페 ‘책거리’에서 한국과 일본을 잇는 서적 관련 영상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다. 만드는 일이 삶의 충족으로 연결되는 일을 하던 중 미나가와 아키라의 《살아가다 일하다 만들다》에 큰 울림을 느끼며 기쁜 마음으로 번역했다.
■ 차례
1. 어린 시절
찰흙 구슬 만들기 11
학생회장이 되다 15
육상선수를 꿈꾸며 21
아버지와 어머니 24
일상의 중심, 육상부 29
여자친구 34
2. 여행을 떠나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수입가구상 39
파리행, 그리고 외할아버지의 죽음 44
파리, 루브르 49
패션쇼를 돕다 52
스페인으로 58
귀국 63
3. 배운다는 것
문화복장학원 야간반 69
봉제공장에서 73
생애 첫 핀란드 77
마리메꼬(marimekko) 82
학교 축제 패션쇼 87
니시아자부(西麻布)의 주문제작 모피 전문점 91
4. 미나의 시작
‘미나(min?)’의 시작 97
첫 매상 옷 10벌 101
시장에서 참치를 손질하다 106
어시스턴트의 등장 110
중고차로 영업하기 117
5. 직영점을 오픈하다
유럽에서의 영업 145
아사가야(阿佐ヶ谷)의 작업실 151
시로카네다이(白金台)의 직영점 155
잔고 5만 엔 161
‘스파이럴’에서 열린 전람회 168
적어도 100년은 계속되기를 171
6. 일본에서 옷을 만드는 이유
신념과 비즈니스 철학 179
책임을 다하는 브랜드의 가치 185
비평하는 눈 189
천사의 힘과 책임감 193 D to C의 시대 197
지속 가능한 힘 201
7. 브랜드를 키우다
‘쇼피스’는 만들지 않아 207
미나의 새로움을 담은 공간, 교토(京都) 직영점 217
놀라움을 안겨준 마츠모토(松本)점과 오래된 민가를 개조한 가나자와(金?)점 221
일상생활로의 확장 227
외국 스태프와의 만남 232
8. 좋은 기억을 만드는 일
일하는 기쁨 239
스페셜리스트(specialist)와 제너럴리스트(generalist) 244
이해와 공감 247
좋은 기억 251
디자인의 계승 257
옷과 사람의 몸 263
미나 페르호넨의 미래 267
9. 살아가다 일하다 만들다
‘나’와 ‘미나가와 아키라’ 275
내게 결여되어 있는 것 278
부가가치라는 사고방식 283
몸과 정신 288
어떻게 살아갈까 293
파문(波紋)처럼 298
미나가와 아키라 / 미나 페르호넨 연표 301
자연을 모티브로 한 무늬, 간결함에 위트를 더한 감성적인 디자인의 패브릭과 의류, 디자인 소품과 인테리어로 유명한 ‘미나 페르호넨’ 창업주이자 디자이너 미나가와 아키라의 삶과 일에 대한 철학을 담아냈다. 미나가와 아키라는 능숙하지 못한 패션 일을 선택했지만 열등감보다는 발전할 수 있다는 믿음을 소중히 여기며, 일시적으로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쓰일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 100년 이상 이어갈 브랜드로 키워가고 있다.
살아가다 일하다 만들다
여행을 떠나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수입가구상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고베와 도쿄에서 수입가구상을 운영하셨다. 외할아버지는 원래 학교나 시청, 재판소 등에 의자를 납품하는 일을 했다. 공공기관에 의자를 납품했기 때문에 일 자체는 꾸준하고 안정감이 있었다. 다만 리스크가 낮은 반면 다양한 가구를 취급하는 즐거움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외할아버지는 친한 친구가 경영하던 도산 직전의 가구상을 이어받기로 했다. 가구상을 인수받은 건 일본의 고도경제성장기가 절정을 이루던 시기였다. 백화점에서는 기존의 가구와는 별개로 수입가구 판매도 시작하던 때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외할아버지의 새로운 일은 시대의 바람을 타고 순조롭게 궤도에 올랐던 것 같다.
매장에서 일하시는 외할아버지의 모습은 지금도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당시 외할아버지의 모습이나 표정으로 추측하건대 수입가구상 일을 꽤나 즐거워하신 것 같다. 점포와 창고는 외할아버지의 고향인 고베와 도쿄 고탄다에 자리 잡고 있었다. 거래처는 북유럽 가구점 프리츠 한센과 이탈리아 가구점 카시나 등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수입가구를 주로 취급하는 한편 오동나무로 만든 장롱이나 옻칠한 가구처럼 일본 전통가구 중에서도 퀄리티가 높은 상품을 판매하기도 하셨다. 백화점을 주 거래처로 하는 도매입이지만 고탄다에 있는 TOC(도쿄도매센터) 8층에서 일반 고객을 상대로 한 판매도 하셨다.
당시로선 꽤 키가 크신 외할아버지는 늘 깔끔하게 다린 고급 수트에 모자를 쓴 멋쟁이셨다. 외할머니는 언제나 기모노를 곱게 차려 입고 계셨다. 반가이 맞이해주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만나는 일, 그리고 새 가구가 늘어선 공간을 찾아가는 일은 어린아이인 내게도 즐거웠다. 가구에서는 언제나 좋은 냄새가 났다. 외할머니는 나를 가죽 소파에 앉히고는 “이건 버팔로 가죽이란다다", "이건 카프라고 하는데 어린 송아지 가죽을 가공한 거야. 부드럽지?" 하며 알려주시곤 했다. "옻나무는 오래 간단다";, "오동나무로 만든 장롱은 낡아도 다시 깎아내면 새로워질 수 있어" 하던 외할머니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나는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만나면서 오랜 시간 쓰여온 것들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파리행, 그리고 외할아버지의 죽음
나는 고등학생 때까지 육상만 했기 때문에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이후였다. 그럼에도 내게 그림은 어쩐지 마음에 드는 일이었다.
발목 골절로 일본체육대학에 갈 수 없게 되고 모든 희망이 사라진 그때 프랑스에 애콜 데 보자르라는 국립고등 미술학교가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불현듯 프랑스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학교는 도대체 어떤 곳일까 궁금해졌다. '일본에서만 공부를 해야 하는가' 하는 의구심도 점점 커져 어찌됐든 일단 프랑스에 다녀오자는 쪽으로 마음이 더욱 굳어졌다.
아버지와는 여전히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 나에게 어떠한 기대도 없는 것 같았다. 뭐랄까. 마치 나에 대해 애정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어떤 말을 해도 관심을 받지 못할 거란 사실을 깨달은 나는 프랑스에 가겠다는 계획을 어머니에게만 말씀드렸다. 유학 비용을 조금은 지원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모자랐기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부터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웨이터 아르바이트를 했다. 낮에는 물론 심야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파리로 떠나는 날이 다가올수록 홀로 뒤처지고 있다는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도 일본을 떠나기만 하면 그런 마음쯤은 저 멀리 날려버릴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패션쇼를 돕다
내가 다니던 어학교에 ‘준코 코시노(JUNKO KOSHINO)’의 전 사원으로 어학 연수를 온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회사를 퇴사하고도 ‘준코 코시노’의 파리 컬렉션을 돕고 있었다. 어느 날 그녀는 일손이 부족하다며 내게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매일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이 수석 패턴사와도 가까워졌다. 지금도 '준코 코시노'에서 활동하는 그와는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아르바이트 때부터 30년이 넘게 이어진 인연이다. 미나 페르호넨의 전시회가 열릴 때마다 부부가 함께 방문해준다. 그는 "패션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면 문화복장학원의 야간반도 있으니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면 어떨까. 혹시 우리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다면 언제든 와도 좋아"라고 말해주었다. 아마 그는 별 생각 없이 권유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한마디가 안으로 들어와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내 속에 스위치가 딱 하고 켜진 듯한 기분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패션을 공부하거나 컬렉션 현장에서 일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바느질은 잘하지 못했다. 잘 못하는 일이기 때문에 제대로 기억하기도 어려웠다. 능숙해질 때까지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렇기에 내가 오랫동안 해나갈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능력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지속할 수 있지 않을까. 조금 이상한 사고방일지도 모른다. 스킬이나 경력 면에서 잘 못하는 일을 고생해서 하는 것은 비효율적인 데다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다. 얻을 수 있는 것도 많지 않다. 이것이 일반적인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잘하지 못한다는 것이 오히려 이 일을 오랫동안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거라는 사고방식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배운다는 것
마리메꼬(marimekko)
핀란드 여행에서의 경험은 앞으로 내가 해나갈 디자인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헬싱키에서 마리메꼬 매장에도 들렀다. 조부모님의 매장에서 취급하던 마리메꼬, 게다가 본고장의 마리메꼬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가게 안에는 천과 깔끔한 양복이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었다. 그 색과 모양에 둘러싸여 있는 것만으로도 풍요로워지는 기분이었다.
미나의 이념과 운영 스타일은 마리메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한다. 일시적으로 소비되는 디자인이 아니라, 오래전에 만들어진 것이라도 좋은 물건이라면 변형하지 않고 계속 생산해낸다. 그것이 마리메꼬 디자인에 담겨 있는 생각이다. ‘그러한 철학이 있다면 나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해보고 싶다.’ 이러한 생각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숨쉬고 있다. 그리고 그 씨앗을 뿌린 것이 바로 핀란드 여행이었다.
미나의 시작
‘미나(mina)’의 시작
독립해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금을 마련하고, 작업실을 빌리고, 원단을 조달해야 했다. 판매를 부탁할 가게도 찾아야 했다. 준비할 것도 해야 할 일도 많았지만, ‘독립하면 모든 시간을 투자할 수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생각했다. 되돌아보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당시의 나는 그렇게 독립을 결심했다.
방 하나를 작업실로 꾸미기 위해 재봉틀과 고무판을 깐 작업용 테이블을 놓았다. 자 같은 도구들은 이미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옷을 디자인하고 본을 떠 샘플을 통제하는 일만 남았다. 옷을 만드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옷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이 일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도내에 작은 공간을 빌려 첫 전시회를 열었다. 이를 통해 직접 디자인한 옷을 만들고 전시해서 주문을 받을 수 있다. 전시 작품은 셔츠, 원피스, 블라우스, 세 종류였다. 그전에 브랜드 이름도 정해야 했다. 당시엔 디자이너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아키라 미나가와(akira minagawa)’는 왠지 내키지 않았다.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적어도 100년은 계속 이어나갈 브랜드를 만들고 싶었다. 다시 말해, 창업한 디자이너가 없어도 오래도록 지속될 브랜드이길 바랐다. 그렇기에 나의 이름으로 브랜드명을 짓는 것은 스스로 그리는 미래와 어울리지 않았다.
핀란드어로 뭔가 좋은 말을 찾다가 당시 제국호텔 안에 있던 핀란드 관광국을 찾아갔다. 핀란드어 사전을 빌려 몇 시간이고 사건을 뒤적였다. 어렵게 후보들을 골라내 그 의미와 발음을 찾아보았다. 그러다 ‘미나(mina)’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핀란드어로 ‘나’라는 의미였다. 단순한 철자와 짧은 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옷을 만드는 것도 한 사람의 ‘나’. 옷을 입는 것도 한 사람의 ‘나’. 나라는 자아가 옷을 만들고 나라는 자아가 옷을 입는다. 따지고 보면 패션은 ‘나’다. 옷과 한 사람의 마음이 만나는 공간. 그렇게 ‘미나(mina)’가 탄생했다.
직영점을 오픈하다
‘쇼피스’는 만들지 않아
미나를 창업한 지 8년이 지난 2003년, 브랜드 이름을 ‘미나 페르호넨’으로 바꾸었다. 돌아보면 브랜드명을 새롭게 생각한 때가 2003년인 것은 아주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우리 브랜드의 특징은 무엇일까?
우선 옷에 그래픽을 도입한 것을 들 수 있다. 몸에 두를 만한 그래픽한 무늬를 자연계에서 가져온다고 한다면 가장 먼저 나비가 떠오른다. 어떤 옷은 입으면 마치 나비가 날개를 펼치고 있는 듯한 이미지도 있다. 게다가 나비의 날개 무늬는 놀라울 정도로 다채롭고 저마다의 멋이 있다. 나비의 날개를 두른 듯한 느낌을 옷에 담을 수 있다면 멋지리라 생각했다.
브랜드를 만드는 방법이나 생산자와의 거래 방식도 마찬가지로 내게는 나비가 날아다니는 이미지와 그 길을 함께한다. 나비는 꽃에서 꽃으로 나풀나풀 옮겨간다. 우리도 사람과 사람을 잇는 옷을 만들어 이를 사람으로부터 사람에게 전한다. 부지런히 움직이지만 제비처럼 직선적인 속도감은 없다. 8,000미터가 넘는 히말라야를 넘어가는 줄기러기 같은 부지런함도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북미와 멕시코를 가로질러 3000킬로미터나 되는 먼 거리를 날아가는 제왕나비도 있다. 그렇게 나비는 거뜬히 멀리 날아가기도 한다.
나비는 핀란드어로 페르호넨(perhonen)이다. 발음할 때의 동그란 느낌과 귀에 닿는 소리가 기분 좋다. 그래서 2003년부터 브랜드명은 ‘미나 페르호넨(mina perhonen)’이 되었다.
파리 컬렉션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는 쉽게 말해 경영적인 판단 때문이다. 파리 컬렉션에 참가하기 위해 드는 비용과 인력은 상당하다. 실제로 옷을 만드는 비용과 노력을 비교했을 때 우리가 가진 한정된 자원을 고려하면 역시 옷 만들기에 중점을 두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무심코 머리로 셈을 하게 되는 건 내가 디자이너인 동시에 경영자이기 때문이다. 미나를 처음 시작할 무렵부터 출자자가 따로 있어 디자인만 했다면 돈을 들여서라도 파리 컬렉션에 나가고 싶었을 것이다. 젊은 디자이너들은 패션계에서 큰 상을 받거나 인기 브랜드에서 독립하면 대부분 처음부터 쇼를 개최해 빠르게 성장하길 바란다. 그리고 점차 옷을 만드는 것 이외의 경비를 늘리고 이를 감당하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한 옷을 만들면서 고객과는 멀어진다. 이런 악순환 끝에 브랜드를 접는 경우도 결코 드물지 않다.
반면 미나 페르호넨은 만들기로 결정되면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 직물을 생산하고 옷을 만든다. 트렌드와는 무관하다. 우리는 적어도 100년은 이어나갈 브랜드를 만들고 싶은 것이다. 할 수 있는 만큼의 수고는 아끼지 않는다. 이것은 이것대로 힘들지만 행복한 일이기도 하다.
브랜드를 키우다
일상생활로의 확장
브랜드가 성장하면 세컨드 라인의 브랜드를 하나 더 출시하는 확장 방식이 있다. 가격을 조금 낮게 설정하고 많은 고객이 찾을 수 있도록 자매 브랜드를 만들면 그 저변이 확대되어 브랜드 전체적으로도 새로운 성장을 수 있다. 이는 패션 업계가 자주 채용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저변을 확장하겠다는 목적과 달리 오히려 저가 브랜드가 중심이 되어갈 것은 뻔한 일이다. 자수 같은 세심한 디테일에 비용을 들여 브랜드를 지키고 키워왔는데 저가 생산에 집중하면 미나 페르호넨의 세계관이 약해질 수 있다. 디자인의 초점도 흐려진다. 따라서 가격을 낮추는 확장 방법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조금 더 특별하게 옷을 브랜드의 축으로 삼아 다양한 디테일을 제안해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했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에서 멋을 내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며 일상이야말로 힘을 북돋아줘야 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일상을 위해 미나 페르호넨에서 제안할 수 있는 것을 고민했다. 그 결과 평소에 사용하는 생활필수품을 만들어 그 영역을 넓힌다면 브랜드의 본체인 옷에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2016년 우리 브랜드 이외에 북유럽을 중심으로 다양한 나라에서 찾아 모은 빈티지 제품이나 수공예품을 파는 카페 레스토랑 겸 편집숍 ‘콜(call)’을 오픈한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새로운 시도였다.
낡은 것, 오랜 시간 사용해 손때가 묻은 것, 긴 세월 이름을 지켜온 것들에 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역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장인의 대대로 내려오는 기술 자체가 그 물건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기도 한다. 시간을 건너온 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대량생산 제품에는 없는 만든 사람의 개성이나 손길이 남아있는 물건을 우리 매장에서 보고 만지고 손에 넣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러한 염원을 담아 새로운 가게 ‘콜(call)’이 탄생했다. 크리에이터인 지인도 참여했다. 내장 공사를 담당해준 랜드스케이프 프로덕트의 나카하라 신이치로 씨를 비롯해 미타니 류지 씨, 쓰지 가즈미 씨, 안도 마사노부 씨 등 많은 사람의 힘을 빌렸다. 식재료는 이와테(岩手)에서 무농약 농사를 짓고 있는 누나가 보내주기로 했다. 전국 각지에서 직접 주문해 맛있다고 생각한 것들만 선별하여 파머스 마켓처럼 진열해두었다.
‘콜’에서 시도한 다른 한 가지는 스태프를 모집할 때 나이 제한을 두지 않는 것이었다. 우선 나이가 많은 사람은 경험이 풍부하다. 골동품이나 식재료에 대해 우리가 모르는 지식이 있을지도 모른다. 손님에게도 연륜이 깊이 묻어나는 접객을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드시 풀타임 근무일 필요도 없다. 시간제로 일주일에 며칠 혹은 오전 근무만 해도 괜찮다. 젊은 스태프와의 교류에서도 서로에게 좋은 자극을 줄 것이다. 일을 한다는 것은 원래 창조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손님의 입장에서도 그러한 스태프가 있다면 쇼핑을 통해 얻는 경험의 질이 바뀐다. 그때 맛본 기분이나 시간은 스태프와 손님 모두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이 될 것이다.
좋은 기억을 만드는 일
이해와 공감
어디까지 달릴 수 있는가는 일하는 기쁨이 있는지 없는지에 달려 있다. 일하는 기쁨이 그 조건을 능가할 정도로 크다면 오셀로 게임의 검은 돌은 흰색 돌로 바뀔 수 있다. 물론 인간의 존엄성을 잃을 정도로 강제적인 노동이라면 검은 돌은 그대로일 것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일하는 기쁨 역시 생기지 않는다. 반면 아무리 근로조건이 좋아도 일하는 기쁨이 없으면 흰색 돌은 그냥 흰색인 대로다.
돌이 뒤집혀 색이 바뀔 때에야 기쁨이 생긴다. 설령 흰색 돌이라고 하더라도 흰색인 채로 계속 변하지 않는 것 또한 허무할 것이다. 흰색이 검은색이 되고 검은색을 다시 흰색으로 바꾸는 과정과 변화에 기쁨이 있다. 손을 움직이고 머리를 굴리다 보면 무언가가 뒤집히고 어느새 잘할 수 있게 되는 순간이 온다. 뿌린 씨가 어느덧 싹이 트는 것이다. 일을 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젊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불행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것에 대해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어떤 시대를 살아가든 강제노역이 아닌 한 직업을 선택하고 그만둘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다. 전쟁 같은 불가항력의 상황을 제외하면 자신의 인생의 사소한 부분까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또 하나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다시 한 번 검토해보기를 바란다. 지금 하는 일을 적어도 블랙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상상력을 발휘하여 긍정적인 부분을 발견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그럴 여지조차 없다면 그 직장에서 일하는 것을 재고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비록 작은 가능성이라 해도 그 안에서 나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줄 만한 일을 할 수 있다면 일하는 기쁨은 반드시 생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만드는 어려움과 기쁨, 그 상반된 감정은 언제나 나의 양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다. 건축가든 요리사든 우리의 일에 공감하는 사람을 만나면 ‘우리가 그 공감에 걸맞게 제대로 일을 하고 있을까’라는 걱정이 들어 갑자기 긴장이 될 때도 있다. 나는 그런 자극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믿는 일을 계속하고 있으면 생각지도 못한 만남 또한 기다릴 것이다. 미나 페르호넨이 적어도 100년은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브랜드로 통하는 창문과 문은 낮고 넓은 곳에 열어두어야 한다. 새로운 바람은 언제나 그곳으로 불어들어오기 때문이다.
살아가다 일하다 만들다
파문(波紋)처럼
물 속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퍼진다. 그 돌이 단단하고 큰 것이라면 톡 떨어뜨리기만 해도 파문은 멀리 강기슭까지 닿는다. 확실한 신념을 지닌 큰 돌을 자신이 서 있는 강가에서 제대로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오래 이어질 깨끗한 파문을 만들고 싶다.
호수 밑바닥으로 가라앉은 큰 돌은 수면에 번지는 역광 속 파문을 그저 잠자코 바라보고만 있을까. 파문을 일으킨 것이 돌, 자신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었을까.
사물은 좋은 기억을 만들기 위한 계기다. 그러니까 대상 그 자체에는 너무 얽매이지 않는 것이 좋다. 무엇을 할지 생각할 땐 분야나 사업의 종류에 구애되지 않고 어떤 ‘좋은 기억’을 만들고 싶은지 그것만 신중하게 생각하면 된다. 해야 할 일이 무엇이든 좋은 기억이 된다는 것만 잊지 않는다면 자연스럽게 해야 할 일이 보인다. 그것이 기쁨일 때는 사물에서 빛이 사라지는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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