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꾼 100책
 
지은이 : EBS 독서진흥 자문위원회 (지은이)
출판사 : EBS BOOKS
출판일 : 2023년 12월




  • 과학자 최재천과 김상욱, 서양 고전학자 김헌 등 철학, 과학, 문학, 경제학, 사회학, 예술 6개 분야의 학자들이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사조의 전환을 일으킨 100권의 책을 선정해, 심도 깊은 해설을 달았습니다.


    역사를 바꾼 100책


    도덕경(道德經)

    노자 老子 (기원전 510년경)

    이분법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자의적으로 부당하게 편집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런 단점이 있지만 이분법은 모든 문제를 단순화해서 사태를 명쾌하게 인식하게 해주는 장점이 있다. 이렇게 장단점이 공존하다 보니 이분법은 폐해가 있음에도 사람의 사고를 안내하는 지침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노자는 춘추시대에 이분법이 사태를 왜곡하고 사람을 병들게 한다고 아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예컨대 시대가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추구하면서 부유(富裕)와 강성은 추구할 방향인 반면에 그 반대편에 있는 빈궁(貧窮)과 유약(柔弱)은 탈출할 지점이 되었다. 빈과 약은 존재할 만한 어떠한 가치를 지니고 못하고 부정해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다. “키가 크고 몸매가 날씬한 게 좋다”라는 강박 관념이 사회에 널리 퍼지면서 대와 소 그리고 날씬함과 뚱뚱함은 단순히 분류의 차이가 아니라 이항 대립의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키에서 대는 긍정적인 가치를 갖지만 그것에 상대되는 소는 부족하고 모자란 상태가 된다. 또 몸매에서 날씬함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지만 뚱뚱함은 다이어트를 해서 몸무게를 줄여야 하는 신호로 여겨진다.


    노자는 춘추시대가 이항 대립의 사고로 사람이 오로지 부와 강의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내몬다고 보았다. 이에 사람들은 왜 빈과 약의 상태에서 탈출해 부와 강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도 정확하게 모른 채 우르르 몰려다니게 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노자는 이항 대립의 사고가 얼마나 비정상적이고 허망한지를 밝히면서 이항 균형이 세계에 편재한다는 점을 일깨우고자 했다. 산에는 큰 나무도 있고 작은 나무도 있으며, 동물에는 빨리 달리는 종도 있고 느리게 달리는 종도 있으며, 사회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다.


    사람이 이항 대립의 이분법에 빠지면 세상은 흑색 아니면 백색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총천연색 세상이 흑과 백으로 나뉘게 된다. 이는 시지각의 문제에만 그치지 않고 인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어떤 사태와 현상에 대해 객관적이고 공정한 판단은 존중되지 않고 ‘내 편 아니면 남의 편’이라는 편 가르기가 진행된다. 나아가 사람들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무언의 압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때 사람은 사태와 현상을 사실과 합리적 추론으로 구성하지 않고 자신의 확증편향에 따라 재배치하게 된다. 여기서 사람이 사태와 현상을 확증 편향에 따라 재배치할 때 숱한 조각 정보와 채색된 사례를 수집하게 된다. 노자는 이를 ‘지’라고 했다. 우리가 실제로 도덕경』을 읽다 보면 ‘무지’라는 표현을 만나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노자가 지에 대한 부정적 태도, 즉 반지성주의를 보인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예컨대 검은색과 흰색 사이에 회색이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회색의 농담은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편차를 보일 수 있다. 흰색에 가까운 회색이 있고 검은색에 가까운 회색이 있다. 이분법에 따르면 회색은 회색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흰색에 가까우면 흰색이 되고 검은색에 가까우면 검은색이 되는 것이다.


    이때 회색을 흰색 또는 검은색이라고 주장하려고 모은 조각 정보와 채색된 사례가 바로 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노자는 분명히 지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도덕경』을 보면 결코 앎 일반 또는 모든 앎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비춰주고 현상을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조망하는 앎을 긍정하고 또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바로 ‘명’이다. 이렇게 보면 노자는 이분법에 동원되는 지의 삶을 부정하지만 이분법에서 벗어나 사물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전체로 보는 명의 앎을 긍정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도덕경』의 첫 문장을 살펴보면 그 의미가 좀 더 분명하게 다가온다.


    “뭐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 소국과민은 시대의 수레바퀴를 과거로 돌리려는 돈키호테와 같은 시도를 하는 게 아니다. 소국과민은 부국강병의 수레바퀴가 할퀴고 지나가는 신음과 비명이 더는 들리지 않게 하는 인간적인 삶의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도덕경』은 5000여 자 분량으로 되어 있으며 운문으로 된 철학시의 특성을 지녔다. 이처럼 노자는 그리 많지 않은 분량으로 시대의 문제를 포착하고 미래의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탁월한 시인이자 철학자의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고 할 수 있다.



    장자(莊子)

    장자(기원전 369~기원전 289?)

    『장자』에서는 개념을 의인화해 논의를 진행하거나 다양한 역사적 이야기를 우화 형식으로 풀어낸다. 특이하게 장자는 자신의 책에 공자와 그 제자 안연까지 단골로 등장시켜서 『논어』에 나올법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장자가 할 말을 대신하게 하기도 한다. 이처럼 『장자』의 기법과 용어는 문자적 의미로만 접근하면 암호처럼 여겨져 이해하기가 어렵다. 비유와 상징 등 다양한 문학적 장치로 다가갈 때 우리는 장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장자』는 물고기 곤이 붕새로 바뀌어 머나먼 남명의 바다로 날아가는 변신 이야기로 시작한다. 처음 이 이야기를 읽고 나면 “이게 뭐지?” 하는 반문이 든다. 왜 변신하는지, 왜 남명으로 날아가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냥 그렇게 이야기해놓고 별다른 설명도 없이 끝이다.


    독자는 ”장자가 읽기에 꽤 불친절하구나!“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장자』 전체 내용에서 처음에 나오는 변신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많은 실마리를 풀어낼 수 있다. 장자가 살아가는 시대에는 중앙집권적 관료 국가가 등장해 백성을 호적에 등재하고 세금과 부역 그리고 징집 등 여러 가지 의무를 부과했다. 이러한 삶의 조건은 이전 자급자족의 생활 공동체와 판이하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갓 결혼했는데 징집되어 전쟁터로 나가야 하고, 한 해 농사를 마치고 조금 쉴 만한데 성을 보수하는 공사에 배치해 일을 시키고, 한 해 농사 수확이 좋지 않은데 세금을 꼬박 내라고 한다. 이런 일은 자급자족의 생활공동체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지만 중앙집권적 관료 국가 아래에서는 공권력의 힘으로 강제되었다.


    우리도 힘들고 괴로운 일이 연달아 생기면 한 번쯤 ‘투명 인간’이 되어 누구도 나를 찾을 수 없다면 어떨까 상상하기도 하고, 내가 다른 존재로 ‘변신’해서 생활하지만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면 좋겠다고 상상하기도 한다.


    장자는 국가가 백성의 삶에 수시로 개입해 사람이 자기 삶을 스스로 계획하고 결정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때 나라는 존재는 국가에서 의무를 부과하는 대상으로 등재되고 관리되며 의무를 수행하는 인력이 된다. 이러한 삶의 조건에서도 영웅이 생겨나고 성공 신화도 등장한다.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평민이 귀족이 되어 농토를 넓히고 성공하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즉 이전에 없던 계층 상승의 욕망은 부국강병의 시대에 더욱 활개를 치며 사람들을 더 모험적이고 더욱 위험한 곳으로 뛰어들게 만들었다. 이러한 시대에 장자는 과연 내가 있을 곳이 어디인가,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평온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했다. 그 고민이 변신 이야기가 되어 자유를 위한 탈출을 감행한다.


    부국강병의 현실은 간혹 영웅과 성공의 신화를 부각한다. 우리는 이런 신화에 쉽게 도취되어 영웅이 된 자신을 그려볼 수도 있다. 하지만 전쟁이 터지고 징집 명령서가 내게 도착하면 그간 애써 눌러왔던 불안 과 공포가 최대로 커지게 된다. 이때 스스로 ‘이번에 전쟁터에 나가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지만 아무도 아무런 대답을 들을 수 없다. 사실 기원과 희망을 말할 수는 있지만 당사자만이 아니라 아무도 자신 있게 뭐라고 말할 수 없다.


    일군의 병사가 징집되어 전쟁터로 떠날 때 이들을 위로하는 환송회가 벌어지면 흥겨운 잔치가 되기를 바란다고 해도 사실 눈물바다가 되기 쉽다. 이런 자리를 유유히 돌아다니며 아무런 걱정이 없는 사람도 있다. ‘지리소’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지리소는 글자 그대로 사지가 잘 붙어 있지 않고 성긴 사람을 가리킨다. 이는 실제 이런 사람이 있다기보다 장자가 자기 이야기를 하려고 만들어낸 인물이다. 지리는 징집 대상에서 늘 제외되므로 전쟁이 일어나도 징집 걱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장애인으로 등재되어 국가로부터 생필품을 지원받기도 한다. 여기서 장자는 지리소를 통해 부국강병에 호응하지 못하더라도 행복하고 평온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지리소라는 인물은 부국강병의 시대에 성공은 물론 영웅이 되기를 꿈꾸는 사람에게 위험의 실상을 직시하게 해줄 수 있다. 지리소가 아닌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장자는 유가에서처럼 사람이 인륜 관계에 덕목과 예의를 실천해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길이 아니라 요구하지도 강요하지도 않는 무위의 자연을 닮은 도와 함께하는 삶을 제시했다.


    유가에서는 특정한 규범과 제도만 진리로 보고 나머지는 비인간적인 길로 배척한다. 심하면 ‘금수와 같다’거나 ‘야만스럽다’는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 장자는 자신만이 옳다고 보고 다른 사람의 길은 인정하지 않는 유가를 비판했다. 즉 유가도 사회적 명예와 도덕적 영웅(성인聖人)을 기획한다는 점에서 부국강병의 영웅과 다르지만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장자는 세상을 향해 열어놓은 감각의 창과 끊임없이 욕망을 일으키는 마음의 문을 닫고, 주위에서 주워들은 성공담과 영웅 이야기와 기억을 쏟아내라고 주문한다. 그 대신 기억과 감정의 생채기를 남기지 않는 기와 어디든 자유롭게 드나드는 신()의 흐름에 호흡하면서 스스로 그렇게 되는 자연(自然)의 삶에 보조를 맞추라고 제안한다. 이 제안은 추론과 사유의 인문학적 삶에 어긋나지 않지만 영감 속에서 창조적 삶을 사는 예술의 삶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의무론(키케로)

    키케로 Marcus Tullius Cicero (기원전 106~기원전 43)

    우리가 서양 고전 문명이라고 하는 문명에는 뚜렷한 지역적 중심이 두 곳 있다. 하나는 아테네이고 다른 하나는 로마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문명적 성취라는 측면에서는 단연 아테네를 기반으로 하는 그리스 문명이 독창적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나 소포클레스의 비극,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조각과 건축으로 대표되는 뛰어난 업적들이 서양문명의 원천을 이룬다.


    이 문명적 성취는 로마를 근거지로 삼아 나중에 제국으로 성장한 정치공동체에서 계승해 중세와 근대를 거쳐 현재의 유럽을 구성하는 나라들의 문명적 자양분이 된다. 언어적으로는 그리스어로 작성된 문학, 역사, 철학의 고전들이 라틴어로 번역되거나 번안되는 과정을 거쳐 이후 세계에 전달되는 것이다.


    문학에서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가 호메로스의 서사시 전통 속에서 자신들의 역사적 경험과 세계 이해를 담은 작품으로 또 하나의 고전이 되었다면, 철학에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 속에서 성장한 당대의 대표적 철학 유파들과 토론을 거쳐 키케로의 『의무론』이 탄생한다. 제목이 같은 그리스어 작품이 상당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의무론』은 키케로가 이전에 없던 새로운 논의의 형식과 지평을 열었다기보다는 로마적 맥락에서 적절히 변형하고 새롭게 획득한 자의식을 불어 넣은 작품으로 이해하는 쪽이 옳을 것이다.


    한편으로 행복한 삶을 목표로 하는 개인의 도덕적 선택의 문제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공동체에 대한 이해와 공동체 구성·운영원리에 관한 정치철학적 문제와 이런 원칙들을 국제관계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는 물론 더 나아가 그러한 이해의 밑바탕에 있는 법적 판단의 원칙에 이르기까지 윤리학, 정치학, 국제정치, 법학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문제를 명확한 구조와 목적 아래 다루었다. 표면적으로는 아테네에서 유학하는 아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글이지만, 공직에 나아가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고 싶은 로마의 모든 귀족 자제가 반드시 읽고 소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이 역사를 바꾸었다고 평가되는 이유는 아마도 로마 귀족들의 지성과 세계관 형성에 지속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리라. 키케로 자신은 로마 공화정이 몰락하고 제정으로 넘어가는 혼란한 시대에 최후의 공화주의자로서 죽임을 당했지만, 그의 책은 유덕한 시민, 건전한 정치공동체가 지켜야 할 원칙이 무엇인지, 그런 원칙의 궁극적 근거가 무엇인지를 그리스 철학의 논변과 로마의 역사적 사례를 적절히 배합해 잘 설파했으니 말이다.


    부동산 거래와 같이 사인 간 거래에서 지켜야 할 법도를 얘기하면서 국가 간 전쟁에서 지켜야 할 법도까지 확장하는 대목을 읽노라면, 수많은 전쟁 과정에서 성장한 로마가 자신의 역사적 경험을 이 정도까지 지적으로 소화하는 데 성공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그렇게 자주 등장하지 않는 전쟁 얘기들은 그리스 철학 전통에서 성장했으나 그리스적이지 않은 역사적 경험을 소화하는 경지에 이를 때 가능한 철학적 지평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독특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가능하게 한다.


    이 작품을 읽는 로마 귀족의 자제들은 자신의 일상과 사적 거래는 물론 자신들이 전쟁 지휘관으로서 곧 수행하게 될 역할, 일반 정무직으로서 하게 될 공무에서 어떤 도덕적 원칙들을 채택할지, 자신은 그 넓은 주장들의 스펙트럼에서 무엇을 어떤 이유로 취하는지 반성할 기회를 얻게 된다. 이에 정확히 상응하는 그리스 원본이 없는 상황에서 라틴어로 쓰인 이 작품은 이후 세계에서, 심지어 중세 이후 세계에서까지 거의 유일한 서양판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교과서라고 할 정도였다. 이 책이 이런 문제들에 대한 최초의 오리엔테이션이자 대체할 작품이 없는 최종 해답집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루는 문제들이 거의 고전적 주제이고 접근 방법도 고전적이라 현대 독자들은 애초에 이런 문제들이 어떤 맥락에서 제기되고 어떻게 다뤄지는지를 일차로 배울 수 있지만, 동시에 나는 과연 이 논의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지 점검하는 기회도 얻을 수 있다. 도덕과 이익의 충돌 여부를 다루는 의무론』제3권의 논의 대부분이 그러한 성격을 잘 보여주는바, 예를 들어 내 부동산 거래에서 집의 단점들을 구매자에게 다 알려주어야 하는가와 같은 문제들이 그러하다.


    위조된 유언장처럼 불의인 것을 알지만 내가 말하지 않으면 돌아올 유익이 있는 경우 혹은 전략적으로 유리하지만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방법으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경우 등 구체적일뿐더러 역사적 사례에서 가져오는 많은 문제와 문제들에 대한 기존의 주장, 키케로가 최종적으로 선택하는 주장과 논변을 읽다 보면, 이런 문제들에 대한 최초의 방향감각을 얻게 된다. 현재 법학에서 중요한 메타 원칙으로 이해되는 신의성실의 원칙이 과연 어떤 문맥에서 등장했는지, 왜 이런 논의가 필요했는지, 키케로가 어떤 대목에서 공공성의 약화를 한탄했는지 잘 이해하게 된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지와 같이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부딪치는 문제들에 한편으로는 상식적인 답을 얻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의 포로가 된 레굴루스가 로마에 파견된 이후 귀환하면 죽임을 당할 것이 뻔한 상황에서도 신의를 지키고자 귀환한 사례와 같은 역사적 모범이 될 만한 사례도 듣게 된다. 최고선에 관한 논의뿐 아니라 일상적 삶의 규칙들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에 걸맞게 곳곳에서 깨알 같은 지침을 주기도 한다. 친절에서도 우리의 친절을 받을 사람의 가치(dignitas)를 고려해야 하며, 농담도 아무 농담이나 하면 안 되고 왜 자유인에 어울리도록 해야 하는지도 논의한다. 또한 대화하다가 주제가 엉뚱한 쪽으로 흘러가면 왜 본래 화제로 되돌리려고 노력해야 하는지도 설명한다. 이런 매우 구체적인 지침들과 규칙들이 올바른 삶의 원칙에 대한 체계적 고찰들 사이사이에 적절히 조직되어 녹아든 점이 이 책을 로마가 배출한 최고 문장가가 쓴 최고의 수양서 혹은 도덕 교과서로 만든 이유다.


    많은 사람이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삶을 분리해서 생각하기 쉽고, 국내 질서와 국제질서가 별개 원칙에 따라 작동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쉬운 마당에 개인의 삶과 공동체적 삶이 이토록 긴밀하게 연결되고, 여기서 확인된 원칙이 로마가 국제관계에서 취했거나 취해야 할 태도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원리로 관통함을 관찰하는 일은 시공간적으로 키케로의 로마에서 한참 떨어진 사람들에게도 커다란 정신적 성숙의 원천이 되어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존재와 시간(마르틴 하이데거)

    마르틴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1889~1976)

    하이데거가 전개하는 사유의 스타일과 스케일 그리고 그 내용의 본래성은 그를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기에 충분하다. 텍스트와 삶, 역사와 현실을 자유롭게 왕래하는 그에게는 통시성과 공시성이, 이론과 실천이 하나의 끈으로 이어져 있고 서로 관통한다. 그가 문제 삼는 수많은 화두와 고전들의 해석은 모두 존재라는 하나의 대주제와 연결되어 있다. 그처럼 다작인 사상가가 그리고 그처럼 광범위한 화두를 많이 거느린 사상가가, 거기에다 2500년 서양 철학사 전체를 망라하는 엄청난 스케일의 사상가가 그렇게 철저한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일관성을 유지하는 하나의 방법은 반복이다. 다작인 하이데거에서도 반복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의 반복은 늘 새로운 면모를 함께 생성한다. 그런 점에서 그가 사용하는 반복은 주제와 변주로 진행되는 대편성 교향곡의 작곡 기법을 연상시킨다. 주제는 언제나 존재이지만 이를 새롭고도 다채로운 변주로 풍성하게 풀어내기 때문이다. 그의 사유가 지닌 혁명성은 통념에 대한 전복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철학사를 지배해온 대전제와 통념들을 근원에서부터 뒤집어 다시 사유하라고 요청한다. 이 사유 혁명의 내용이 그의 대표작 『존재와 시간』의 주제가 된다.


    하이데거가 독일의 메스키르히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1889년은 하이데거와 함께 현대철학계를 풍미한 비트겐슈타인, 하이데거의 인생 역정에 뚜렷한 각인을 한 히틀러가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20세기의 세계사와 철학사를 뒤흔든 이들 동갑내기 삼총사의 관계는 (이들은 모두 독일어가 모국어다)그 자체로 흥미로운 화젯거리가 아닐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는 실업학교 동창이고, 하이데거는 한때 히틀러의 나치즘에 깊이 관여했다. 아울러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는 서로에 대해 짧지만 의미 있는 논평을 남겼다.


    1913년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은 하이데거는 1919년부터 1923년까지 후설의 조교로 있으면서 그와 함께 연구했다. 1927년 후설의 주선으로 출간한 『존재와 시간』으로 일약 세계적 철학자로 발돋움했고, 이듬해 그의 후임으로 프라이부르크대학 교수로 취임했다. 히틀러가 권좌에 오른 1933년에는 같은 대학의 총장에 선출되었고 이어서 바로 나치에 입당해 나치즘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한편 하이데거는 스승 후설에게 바쳤던 『존재와 시간』의 헌사를 삭제했고(유대인 후설은 나치 치하에서 어떠한 활동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후설의 장례에도 불참했는데 그의 이러한 일련의 행보는 그 자신의 구구한 변명에도 불구하고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1945년 연합군의 승리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하이데거는 대학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그는 197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주로 슈바르츠발트의 산장에서 사색과 집필에 전념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전통 철학은 구체적 현상 세계의 괄호 침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현상계 탈출을 사명으로 삼으면서부터 세계는 더는 우리에게 '현상'하지 않게 된다. 현상되어야 할 세계의 존재가 억압되고 망각된 역사가 곧 철학사다. 그러나 그가 볼 때 이것은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엄청난 본말의 전도다. 그를 좇아 존재 망각이 지닌 이 두 가지 측면을 각각 살펴보자.


    호흡은 인간 행위의 생리적 원천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우리는 호흡장애를 겪을 때야 비로소 호흡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또한 우리는 빛 때문에 세계의 사물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빛은 보이지 않는다. 빛의 중요성은 빛이 제거되었을 때야 비로소 우리에게 알려진다. 물속에 사는 물고기나 흙 속에 사는 지렁이에게는 물과 흙이 그러할 것이다.


    존재는 우리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현상을 체험한다. 현상이란 상과 현재(現在)라는 시간적 계기의 합성어다. 즉 현상은 상이 시간성을 통해 드러난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가 체험하는 사건이 바로 드러남의 사건이다. 그러나 일상에서 우리는 그 드러남 혹은 드러남을 가능케 하는 존재사건을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드러난 존재자만을 혹은 그것과 우리 사이에 마련된 의미 연관성만을 인식할 뿐이다. 우리는 존재(Being)가 진행형(Beting)의 사건임을 망각할뿐더러 존재를 존재자로 대상화해서 생각한다. 그러나 존재는 대상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존재가 곧 무()라고 주장함으로써 존재를 대상화하는 인식을 부정한다. 존재가 무(Nothing)라 함은 곧 존재가 대상이 아님(No+Thing)을 함축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언어에서 존재와 그 드러남의 사건에 해당하는 ‘be’를 별도로 주목하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 흔할뿐더러 다양하게 사용된다.


    ‘be’의 그리스어 어원인 ‘einai’는 ① 계사로서 ‘이다(be)’, ② 양화사(量化詞)로서 ‘있다(exist)’, ③ 동치(同値)로서 ‘…와 같다(is the same as)’, ⓐ 진리서술로서 ‘..는 참이다(is true)’ 등의 방식으로 다양하게 사용될 수 있는 다의어다. 요컨대 ① 서술, ② 존재, ③ 동일성, ④ 진리의 이념은 하나의 언어, 하나의 뿌리에서 연원한다. 다만 우리가 이러한 다양한 드러남과 그 원천을 의식하지 않을 뿐이다.


    하이데거가 지적하는 존재망각은 이처럼 우리의 일상에서도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그의 용어를 빌리면 존재는 자신을 드러내는 동시에 은폐한다. 그리고 그것은 존재의 숙명이기도 하다. 존재의 지평이 우리 손에 잡히기 어려운 까닭은 그것이 어떤 심오한 경지에 놓였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초점과 관심을 거슬러 올라가는 데서 열어 밝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초점과 관심의 해체로서 내맡김(Gelassenheit)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내맡김은 무관심의 관심, 무관점의 관점, 무용(無用)의 용(用)과 일맥상통한다. 하이데거의 해체는 공시적으로는 문제 되는 담론이나 주장의 영역에 한계를 긋는 울타리 치기 작업이고, 통시적으로는 그 담론이나 주장의 종지부와 출발점을 양방향의 시제로 추적해보는 비판적 계보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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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