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분 철학
 
지은이 : 앤 루니(역: 박광순)
출판사 : 생각정거장
출판일 : 2015년 07월




  • 철학이라고 하면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이 많습니다. 철학은 어렵고 난해하며 현실과는 무관한 학문이라는 편견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기우에 불과합니다. 22가지 흥미로운 질문으로부터 출발해 다양한 철학사상을 쉽고 재밌게 풀어낸 이 책과 만나보세요!


    15분 철학

    생각 THOUGHT
    기계 속에도 유령이 있을까?
    육체와 정신의 경계선
    세계적으로 여러 문화권에서 인간이 되는 것이란 정신이 거주할 육신을 얻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해왔다. 어떤 사람들은 신성처럼 종교적으로 특별한 정신이 영혼의 모습이라 생각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요소가 없는 마음이나 의식에 좀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정신은 영원할 수도 있고, 육신이 죽을 때 사라질 수도 있다. 혹은 유령으로 배회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영혼과 육체로 구분지어 생각하는 방식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플라톤은 영혼이 몸속에 있을 때에는 영혼이 ‘형상의 세계’에서 유배되어 육체 속에 갇혀 있어, 영혼의 잠재적 능력이 제한되어 있다고 믿었다. 독실한 신자의 영혼은 덕이나 신을 동경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육체적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천박한 충동에 의해 타락한 ‘육체 속에 갇힌 죄수’ 모습의 영혼이 더 많다. 영혼은 항상 육체보다 고귀한 위치에 있어왔다. 육체와 영혼의 위치는 둘의 관계가 어떤가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계몽주의 시대의 역학과 과학에 대한 늘어나는 관심에 자극을 받은 데카르트는 ‘신체는 정신이 통제하는 복잡한 생물학적 기계’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데카르트의 이론은 나중에 ‘기계 속의 유령’으로 불리게 되었다. 얼핏 보기에 이것은 아주 직관적인 것 같다.

    우리는 생각하고 꿈꾸고 희망하고 경험하는 정신의 존재를 느끼고 있으며, 또 정신이 숨을 쉬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움직이는 신체로부터 독립되어 있다고 느낀다. 이렇게 우리는 육체적인 부분과 정신적인 부분으로 분리되어 있다고 보는 이론을 ‘이원론’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직관적인 분리에는 문제가 있다.

    물리적인 것과 비물리적인 것
    신체는 명백히 정신 혹은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 기분이 상하면 눈물이 나거나 호흡이 가빠지는 등 신체적 징후가 나타난다. 만약 심각한 상해를 입으면 고통으로 인해 마음속에 있는 모든 생각들이 밀려날 것이다.

    신체의 움직임은 의식적인 행동과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나눌 수 있다. 혈액을 내보내는 심장과 아이를 껴안는 선택된 행동에는 차이가 있다. 다만 뇌와 신경계의 어떤 부분들이 혈액을 내보내거나 껴안는 데 관여하는지는 알지만, 우리로 하여금 아이를 껴안고 싶어 하도록 만드는 부분이 어디에 위치하는지는 우리는 모른다.

    데카르트는 자신이 뇌 안 깊숙이 파묻혀 있는 송과선에서 ‘정신’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데카르트는 송과선을 통해 육체와 정신이 교감한다고 생각했다. 데카르트가 송과선을 발견한 최초의 인물은 아니다. 고대 중국인은 송과선을 ‘천상의 눈’이라 불렀고, 힌두교에서는 이것을 ‘브라흐마의 창’이라 불렀다. 
    아무튼 송과선의 발견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는 완전히 비물리적인 영혼이 어떻게 물리적이니 신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이것이 데카르트 이원론의 문제로 남았다. 물질적으로 현존하지 않는 영혼의 과연 어떻게 물리적인 영향을 미치거나, 혹은 물리적인 것의 영향을 받을까?

    육체와 정신은 구분될 수 있는 걸까
    단순히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혹은 많은 사람이 믿는다고 해서 반드시 참된 것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육체와 영혼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이 있다고 쉽사리 판단해선 안 된다.

    20세기의 프랑스 철학자 모르스 메를로 퐁티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구분과 비슷한 이론은 모두 부정했다. 그 대신 그는 인간의 실재 전체를 순수하게 생물학적인 것으로 보았다. 버트런드 러셀의 경우 마음은 단순히 기억이나 생각, 경험처럼 심적인 사건들의 집합체로 이루어진다고 말하며 영혼의 존재를 부정했다. 

    영국의 철학자 길버트 라일은 정신과 육체 사이에 경계선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단지 우리가 언어를 이용해 신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따로따로 묘사하는 방식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철학자 대니얼 데닛은 정신이 특별한 것이 아니며 육체로부터 독립된 것도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성격이나 생각, 인격, 의식의 모든 측면이 전적으로 뇌와 신체의 생화학에 의해 결정되고 창조되는 신경학의 결과라고 보고 있다. 정신이 육체와 특별히 구분되지 않는다는 건, 인간에게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것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데닛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생물들에게는 특별한 것이 전혀 없다고까지 말했다. 데닛의 입장에서는 두뇌가 명석해 보이는 컴퓨터는 실제로 똑똑하다. 말그대로 ‘기계 속의 유령’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유령이 아니고 인공물에 지나지 않지만 말이다.

    개에게도 영혼이 있을까?
    윤회사상
    불교는 인간만이 유일무이한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모든 생물에게 보편적인 영이 있다고 본다. 바루크스피노자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가졌다.

    그는 단 하나뿐인 자연의 영혼이 모든 생물 안에 거주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 견해는 이단으로 간주되었고 이로 인해 그는 유대교에서 추방되었다. 불교와 스피노자의 견해는 인간과 개에게 각각 보편적인 영의 작은 조각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조각은 어떤 자주성이나 의미 있는 독립적인 존재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영혼의 윤회를 믿는 사람들은 개에게도 영혼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입장에서 영혼은 단지 한 종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같은 영혼이 이번 삶에는 인간으로 살았다가 다음 삶에는 개나 천산갑, 말벌의 생을 살 수 있다. 

    기원전 5세기에 헤로도토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집트 사람들은 인간의 영혼이 모든 유형의 동물로 다시 태어나고 3,000년 뒤에 다시 인간 형태로 돌아오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전했다. 

    플라톤과 피타고라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의 일부 철학자들은 영혼이 짧은 기간 동안만 신체에 거주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신체가 죽자마자 영혼의 세계에 재합류한 뒤 이윽고 인간이든 동물이든 다른 신체로 들어가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이 체계에서 보자면 개와 인간은 유형도 같고 질적 수준도 같은 영혼을 갖고 있는 것이 된다.


    행동 DEED
    마음껏 쇼핑하면 행복해질까?
    물건을 소유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당신은 어떨 때 행복해지는가? 칵테일을 마시며 해변에 누워 있을 때? 음악을 연주할 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도와 줄 때? 행복의 추구는 인간의 영구적인 목표이다.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걸까?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손에 넣을 수 있을까?

    논의를 진전시키기 전에 먼저 행복이란 무엇인지부터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 철학에는 ‘행복’의 의미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있다. 하나는 행복이란 웰빙, 즉 ‘잘 사는 삶’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훌륭한 삶을 살았다고 반드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두 가지가 항상 동시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애비게일은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돕는 자선 단체를 위해 일한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삶을 복원시키는 일을 도우며 나날을 보낸다. 그녀는 생활형편이 어렵다. 재난을 목격하고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상태로 기진맥진한 채 잠자리에 드는 일도 잦다. 하지만 그녀는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일을 바꾸지 않을 생각이다.

    프랜신은 텔레비전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즐겨 시청한다. 그녀는 소파 위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며 아주 좋아하는 음식인 도넛을 먹는다. 그녀는 마음 내키는 대로 쓸 수 있을 만큼 돈이 많다. 그녀는 절대로 배를 곯지 않을 것이며 일을 할 필요도 없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겪는 곤궁함에 대해 생각지 않고 밤마다 만족스런 기분으로 잠자리에 든다.

    두 사람 중 과연 누가 행복할까? 누가 멋진 삶을 살고 있을까?

    행복을 향한 세 가지 길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 물음은 일반적으로 일순간 폭발적인 기쁨을 즐긴다는 뜻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만족스럽게 불편 없이 잘 살고 있다고 느끼며 삶을 살 수 있는가, 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행복은 매우 주관적이다.

    행복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생각은 사람들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기쁨으로 가득 찬 삶이 반드시 잘 사는 삶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철학의 땅에는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적어도 세 가지는 있다. 먼저 ‘쾌락주의적인 방법’은 즐거운 경험을 최대한 많이 하는 것이다. ‘삶의 만족’이라는 방법은 자신의 생활이 영위되고 있는 방식에 만족하는 방법이다. ‘감정 상태’라는 방법은 감정을 확인받고 정서적으로 풍성해지는 방법이다.

    만족스러운 삶을 위하여
    행복을 바라보는 또 다른 방법은 ‘욕망의 만족’이다. 즐거운 경험을 하는 것도 만족에 포함시킬 수 있지만 그것과는 다르다. 만약 누군가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직장을 찾지 못하거나 원하는 인간관계를 맺지 못해 항상 낙담하고 있다면, 그 사람이 행복할 가능성은 없다.

    그가 쾌락주의적인 경험으로 생겨나는 일시적인 행복을 얼마나 맛보았을지도 모르지만, 전반적인 생활에 대해 만족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두가 같은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어떤 사람의 경우 다른 사람들은 싫어하는 삶에 굉장히 만족하기도 한다. 현재의 삶에 대한 만족 여부를 알고, 또한 만족을 하기 위해선 자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신이 주신 생명
    “사느냐 죽느냐?” <햄릿>의 유명한 대사다. 이것은 자살이 정당화되거나 용인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고민하거나 자살하는 것이 ‘한층 더 고상한 행동’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것은 실제로는 압도적인 개인적 위기의 순간에 맞붙는 문제가 아니라 보다 사색적인 분위기를 위한 문제이다.

    종교적 신앙의 경우 자살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주지 않는다. 당신이 믿는 종교가 자살을 금지하고 당신이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살인하지 말라’는 하느님의 명령은 자멸을 금지하는 것으로도 받아들여야 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자, 언제나 실제로 자살을 야기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있고, 그것이 신앙인에게 중요할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이 기꺼이 그리고 고의로 자신을 죽이려는 목적의 행동을 시도하는 것이 자살 행동의 합리적인 정의일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가까운 곳에 머물도록 내버려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의사에게 치사량의 약을 투여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자살일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아이를 구하길 바라고 불타오르는 건물 속에 뛰어들었다가 그 결과 죽는 것은 자살 행동이 아니다. 우발적으로 처방약을 과다 복용하는 것은 자살이 아니지만 고의로 과다 복용하는 것은 자살이다. 고의로 과다 복용하지만 너무 적게 복용해 죽지 못하는 것은 자살 행동이지만 성공적인 자살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에 애매한 영역이 있다. 이따금 사람들이 그보다는 오히려 자살극인, 상당히 양면적인 자살시도를 할 때가 있다. 그들은 실제로 죽길 바라고 있을까? 어떤 자살들은 아마도 연극이 서공하지 못하고 죽음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실패한 자살극일 것이다. 의도와 지식, 결과 등이 모두 하나로 합쳐져야 한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 때문에 자살을 비난하는 것은 비단 종교 신자들뿐만 아니다. 생명이 언제나 특별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거기에 아무리 많은 괴로움이 수반된다 하더라도 어떤 살인이든 다 금지되도록 주장을 펼쳐야 한다. 

    거기에는 사형이나 다른 사람들을 위협하는 무장한 범죄자에 대한 사살, 전쟁터에서의 대량 학살, 고통 받는 사람이 원할 경우 인위적으로 수명을 연장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죽음의 상태에 이르도록 손을 쓰는 것도 포함된다. 기꺼이 그리고 완전하게 비타협적인 입장에 설 용의가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회 SOCIETY
    인공지능도 하나의 인격으로 볼 수 있을까?
    로봇에 대한 원초적 공포
    인공지능 로봇들이 세계를 장악하고 인간을 말살하는 SF영화와 소설이 많이 있다.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을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그냥 방치해야 할까?

    ‘로봇’이라는 말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작가 카렐 차페크의 <로섬의 만능 로봇>이라는 희곡에서 맨 처음 사용되었다. 이 희곡에서 원래 노예로 제작된, 자가증식하는 로봇 군단이 반란을 일으킨 뒤 인류를 말살하려고 한다.

    즉 로봇들이 세계를 장악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로봇 자체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됐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생각지도 못할 일인 것 같지만 실제로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

    인공지능의 특이점
    1993년 미국의 수학자이자 과학 소설 작가인 버너 빈지가 인공지능이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수준의 우수하고 강력한 자체 버전을 설계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선 지능에 곧 이를 수 있는 ‘특이점’이라 불리는 사건을 제시했다. 

    인간의 시대가 종말을 고할 것이다라고 하는 특이점은 SF 작가들이 기계들이 세계를 접수하고 인간을 멸망시키거나 노예로 이용하거나, 혹은 인간이 그 안에서 살 수 있도록 낙원을 만든다고 상정하는 출발점이다. 

    그 기계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존재보다 더 지능이 높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무슨 일을 할지 예상할 수 없다. 무턱대고 찔러 보는 것 중에서 가장 나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합할 최고 수준의 예측에 따르면 이 특이점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시기는 2025~2045년이다. 이 예측은 컴퓨터의 능력이 발달하는 경향에 기반을 두고 있다.

    지능이란 무엇인가?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지능에 대한 정의는 없다. 그래서 인공지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말하기 어렵다. 지능에는 학습하거나 창조적인 도약을 하거나 연결 고리를 만들어 내거나 명확하지 않는 관련성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 포함된다. 

    인간의 지성은 농담과 은유를 만들어 내거나 음조나 의미의 미묘한 차이인 뉘앙스를 포착하고 그것을 사용하거나 맥락을 해석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낸다.
    이론적으로는 인공지능을 갖춘 로봇 의사가 인간 의사보다 더 신속하고 정확하게 진단을 내릴 것이다. 로봇 의사는 수백만 개에 이르는 질환의 세부적인 사항을 데이터로 축적하고 질환과 증세를 서로 연관시켜 가며 치료법을 추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 의사는 위가 아프다고 하소연하는 환자가 실제로는 우울증에 걸려서 그런 증상이 나타나는 건 아닌지, 혹은 당황스럽거나 겁이 나서 증상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지 등을 알 수 있지만 컴퓨터는 이것은 포착하지 못할 것이다.

    “기계가 인간처럼 똑똑하게 행동한다면 그것은 인간처럼 지능이 높을 것이다.”
    앨런 튜링

    우리는 감시당하고 있을까, 아니면 보호받고 있을까?
    당신은 찍히고 있다
    소도시든 대도시든 당신이 갈 수 있는 곳 중에 당신을 응시하는 CCTV가 없는 곳은 거의 없다. 여기에 이메일이나 전화 통화, 문자 메시지, 인터넷 활동에 대한 정부 기관들의 감시와 사찰을 추가해 보라. 우리의 생활은 거의 모든 것이 공개되어 있는 것과 다름없다.

    전 국민 혹은 상당수의 국민을 광범위하게 감시하는 무차별 대량 감시가 어떤 유용한 일을 하고 있을까? 그것은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우리는 보호와 프라이버시 사이에서 균형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CCTV 카메라는 억제와 탐지라는 전혀 다른 두 가지 목적으로 사용된다. CCTV는 해당 지역에서 벌어지는 활동을 기록하고 범죄가 저질러졌을 경우 경찰 수사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적절한 증거를 제공한다. 또한 카메라가 기록할 수 있는 곳에서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막아준다. 

    CCTV 카메라들이 실제로 범죄를 감소시키는지 여부는 논쟁의 대상이다. 어떤 전문가들은 단지 가로등의 밝기만 높여도 그만큼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또한 다른 형태로 ‘가시성’을 높이는 것일 뿐이므로 어느 면에서는 CCTV와 유사하다. 

    처벌을 모면할 수 있을 것 같으면 경우에 따라 당신도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지 않을까? 큰 범죄는 아니라도 진입용 도로를 지름길로 사용하는 것과 같은 작은 범죄는 저지르지 않을까?

    만약 경찰관이 진입로 도로 끝에 서 있으면 귀찮은 일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도로로 들어갈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 날마다 경찰관이 서있을 가능성은 적다. 다음번에 경찰관이 없으면 사람들은 다시 지름길로 사용할 것이다.

    이번에는 경찰관이 가만히 서 있지 않고 도로를 따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다음번에 경찰관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정말로 경찰관이 없다고 확실한 수 없다. 어쩌면 경찰관이 도로 저 아래쪽까지 내려가 안 보이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지름길로 차를 몰고 내려가면 여전히 귀찮을 일을 겪게 될 것이다. 

    따라서 당신은 다른 길을 택할 것이다. 경찰관이 서 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은 좋은 억제책이다. 다른 경우에는 경찰관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억제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재정이 열악한 지방 정부 당국은 순찰 경찰관을 이용해 여러 개의 도로에서 억제자 역할을 시킬 것이다. 그는 여기 저기 나타날 필요 없이 여러 곳의 도로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감시의 정당화
    미국의 철학자 엠리스 웨스타콧은 감시의 도덕성은 다음과 같은 것들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 정당한 이유가 있는지 여부
    - 사용 수단
    - 감시와 침해의 정도가 감시가 그로부터 지키기로 되어 있는 위험과 균형을 이루고 있는지의 여부

    이런 요소들에 더하여 감시당하는 시민은 수집된 정보의 보안과 정확성, 그것이 악용될 가능성 여부를 염려하고 있다. 모든 카드가 당국의 손안에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정부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국민의 신뢰를 받아야 한다. 불신 받고 존중받지 못하는 국민들은 그 답례로 정부를 신뢰하거나 존중하지 않는다. 감시가 정당하다고 느껴지는지 어떤지, 그래서 기꺼이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을 용인할 것인지에 대해 평가할 때, 사람들은 맨 먼저 누가 보호받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감시에 대해서는 무척 관대하다. 이것이 미국과 영국의 당국이 추진해 온 노선, 즉 감시의 수준을 높이면 일반 국민의 안보가 강화된다는 노선이다. 

    간혹 감시가 정부를 보호하는 데 목적을 둘 때가 있다. 최악의 경우에는 정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데 그 목적을 둔다. 이런 점에서는 국민들은 공정한 거래가 아니기 때문에 일반 국민은 사생활이 없어지는 데서 거의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하며, 사생활의 침해라는 의견에 조금도 공감할 것 같지 않다.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