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3월 2주차

BOOK SUMMARY
 인문 

런던에서 온 평양여자

저자 오혜선 (지은이)
출판 더미라클
출간 2023.01
한 평양 시민의 여정과 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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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 온 평양여자


행운아

빨치산 가문과 아버지

북한에서는 좋은 토대가 성공의 지름길이다. 토대는 태어날 때부터 운명처럼 정해져 있다. 다행히 우리 집안은 북한에서 핵심계층이라고 하는 빨치산 가문이었다. 증조할아버지 오봉삼은 독립운동가였고 아들 여섯 형제도 모두 반일 운동에 참여했다. 나의 할아버지는 둘째 오도현이었고 반일운동에 나섰다가 해방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큰형님, 넷째 동생과 함께 만주 광야의 무주고혼이 되고 말았다. 셋째인 오백룡은 중국 만주에서 김일성과 동북항일연군에 참전했고, 해방 후에는 북한 내무성 부상, 김일성의 호위 총국장,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군사부장을 지냈다.


아버지 오기수는 1932년 8월 11일 중국 길림성 왕청현에서 오도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고 만주에서 고생하다 해방을 맞으며 김일성의 부름을 받고 평양으로 들어와 만경대혁명학원에 입학했다.


만경대혁명학원은 1947년 10월 김일성이 이전 빨치산 시절 희생된 전우들의 유자녀들을 위해 자신의 고향 만경대에 설립한 기숙학교였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아버지는 만경대혁명학원 유자녀들로 조직된 최고사령부 친위부대에 입대했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모스코바로 유학을 떠났다. 전쟁에서 유자녀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전후 복구 건설의 골간으로 키우려는 김일성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소련에서 공부를 마치고 아버지는 유학 시절에 결혼한 고려인 아내와 딸을 데리고 귀국하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곧 큰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온 사회에 유일적 영도체계 수립을 시도하고 있던 때, 고려인 아내를 두었다는 이유로 아버지는 당 조직으로부터 불신을 받게 된 것이었다.


빨치산 가문의 명예를 지켜 김일성에게 충성하느냐 아니면 고려인 아내, 딸과 함께 현재의 삶을 포기하느냐 하는 갈림길에서 아버지는 충신의 길을 선택했다. 정부적 차원에서 소련에서 나온 사람들을 돌려보내는 조치를 취할 때, 아버지는 아내와 딸을 다시 소련으로 돌려보냈고 이것이 결국 그들과의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는 어린 딸과 헤어지면서 영영 다시 못 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셨던 것 같다. 딸에 대한 그리움에서인지, 아버지는 소련을 남달리 사랑하셨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떠나보낸 가족에 대한 아버지의 죄스러움과 그리움의 표현이었던 것 같다. 소련에서 온 무관 대표단과 만날 때면 아버지는 늘 밤늦게 술에 취해 귀가하셨고 그 모습은 어머니를 더 가슴 아프게 했다.


나는 아버지의 딸로 태어난 것을 행운 중의 가장 큰 행운으로 늘 감사해하며 살았다. 빨치산 가문 부모님의 그늘 밑에서 편하게 사는 것이 나의 평생 운명인 줄 알았다. 그리고 김일성 일가의 운명이 곧 나의 운명이라고 믿었다.



두 아들의 엄마

시댁 생활

23살에 나는 태씨 집안의 맏며느리가 되었다. 시집은 시아버님이 모란봉구역 개선동에 새로 지은 아파트 7층이었다. 침실이 세 개 달린, 그만하면 널찍한 집이었지만 정말 변변한 가장집물 하나 없었다.


결혼 후 몇 년 동안은 내가 가장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남편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직장에서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받는 월급으로는 고기 한 근 구하기 어려웠고 시아버님은 이미 연로하여 은퇴하신 후라 그나마 도움을 받을 데라고는 친정 부모님들뿐이었다. 아버지도 내가 결혼한 후로는 나를 도와줄 경제적 여력이 없었지만, 퇴근길에 호박이나 감자 같은 채소를 들고서라도 우리 시집에 종종 들러 시아버님과 술상을 마주하곤 하셨다.


결혼 생활을 하면서 배고픔도 알게 되었다. 그나마 배급이라도 있어 다행이었다. 남편과 나는 직장인 7급 대상으로 하루 공급량이 700g, 시부모님은 부양가족 대상으로 3급 300g이었다. 그마저 이런저런 명목으로 15% 공제하고 남은 것을 또 다시 입쌀과 잡곡 7대3 비율로 나누어 공급받다 보니 늘 입쌀이 그리웠다.


그 어려운 시집 살림에도 내 옆에 아버지같이 믿음직한 남편이 있어 견딜만 했다. 남편은 항상 열심히 살았다. 누구보다 먼저 사무실에 출근했고 밤이면 가장 늦게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문을 잠갔다. 나는 나 자신에게 묻곤 했다.


‘그전처럼 다시 잘 살 수 있을까.’ 그러면 답은 하나였다. ‘그런 날이 꼭 올 거야. 남편은 할 수 있어. 저렇게 노력하는 데 꼭 성공할 거야. 아니, 혹시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난 남편을 원망하지 말아야지. 그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부족한 엄마

결혼하면서 당연히 자식은 둘은 낳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듬해에 첫 아기를 가졌다. 아마도 그때가 내 삶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아닌가 싶다. 아버지는 전승기념관 1 부관장으로 옮겨가시면서 실권을 잃고 뒷전으로 물러나셨다. 본가집도 이전의 경제적 자유를 잃게 된 것이다.


양수가 터져 급히 산원으로 떠나는 날, 반복된 진통으로 밤새 시달리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아기를 낳았다. 우리의 첫 아이 주혁이였다. 산모, 아기 다 건강하니 병원에 더 있어 봐야 무의미하다고 어머니와 병원 측을 설득하고 산후 3일 만에 퇴원했다. 그런데 이틀째 되는 날부터 아기가 보채기 시작했다. 아기는 계속 울었고 어머니와 나는 기저귀를 자꾸 들췄다. 결국 아기가 똥을 누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시간에 맞춰 젖을 먹이는데 온종일 기저귀는 깨끗했고 소변의 양도 적었다.


의사의 진단은 너무 뜻밖이었다. 변비가 아니라 아기가 온종일 굶었다고 했다. 젖이 나오지 않는 것도 모르고 빈 젖을 물리면서 똥을 누지 못한다고 소동을 피웠던 것이다. 주혁이에게 먹일 분유를 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결국 남편은 중국과 소련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부탁해 주혁이의 분유를 해결했다. 그 시절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것에 항상 속상했지만, 그렇다고 불만을 가질 수도 없었다.


고립된 사회주의 제도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국방력을 강화해야 한다. 탄알을 만들자면 화약이 필요하고 화약을 만들자면 인민 생활과 밀접히 연관된 목화, 설탕, 콩기름이 대량 들어간다. 그러니 나라를 지키려면 오늘은 굶더라도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는 것이 언젠가 들은 항간의 설명이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북한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가난한 삶을 살고 있었다.


주혁이를 살려야 한다

주혁이가 세 살이 되던 어느 일요일, 시집의 먼 친척뻘 되는 큰 아버님이 평양에 오셨다가 우리 집에서 며칠 묵어가게 되셨다. 유능한 의사였던 그 분은 주혁이를 눈여겨보시더니 꼭 병원 검사를 받아보라고 당부하고 떠났다. 이후 여러 검사를 신중하게 분석하고 나서 주혁이가 신장증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린이 10만 명당 한 명씩 걸린다는 그 드문 병이 왜 하필 우리 주혁이에게 찾아왔을까. 애통한 생각은 늘 죄책감으로 이어지곤 했다. 신장증은 약을 끊는 것이 치료였다. 약을 가능한 한 적게 쓰기 위해 재발 시기와 회복 시기의 투입량을 정확히 기록하면서 조금씩 감량을 시도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혁이의 병을 치료하는 모든 시간은 아이와 함께 나 자신도 성장해가는 순간들이었다. 주혁이 때문에 양가 부모님들도 고생을 많이 하셨다. 아이 때문에 고생이 많다며 직장 선배들과 친구들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아직 뚜렷한 치료방법이 없다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가끔 우리 주혁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살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곤 했지만 곧 머리를 흔들어 털어버렸다. 결론은 늘 같았다.


‘주혁이를 무조건 살려야 한다’


자유를 알게 되다

런던 주재 북한 대사관

영국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 가족의 오래된 꿈이었다. 런던에 출장을 다녀온 후, 영국에 대한 남편의 집념은 더 강해졌다. 어려서부터 고생하고 있는 큰 애의 병을 고치자면 무조건 영국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영국에서는 주재국 외교관들도 무상치료제의 혜택을 받고 있으니 영국에만 가면 덴마크와 스웨덴에서처럼 큰 애의 치료비와 약 값을 마련하느라 고생하지 않아도 병원 치료를 무료로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북한은 외교관들에게 의료비와 자녀들의 교육비를 부담해 주지 않는다. 대사관 예산에 그런 항목 자체가 없다. 북한에서는 외교관을 해외에 파견하기 전에 신체검사라는 것을 진행하며 병에 걸릴 확률이 있는 사람은 원천적으로 해외 파견에서 배제한다.


남편은 영국 주재 북한 대사관에 보충 인원 파견을 요구하는 문건을 상부에 제기했고 보름 만에 김정일의 ’친필 문건‘이 내려왔다. ‘친필 문건’은 북한의 어떤 법보다도 최상위 효력을 갖는다. 드디어 2004년 5월 초, 남편은 영국으로 발령받았다.


북한은 대사관 안에서 모든 가족이 단체로 함께 생활한다. 쉽게 말하면 업무공간과 개인집 사이에 공간 구분이 모호했다. 대사도 침실에서 나오면 바로 사무실이고 공사도 집 부엌에서 나오면 바로 사무실이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들어갈 공간이 더는 없어서, 대사관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아담한 셋집이 마련되었다.


소환장

어느 날, 영국 주재 북한 대사관 앞으로 친전, 즉 외무상이 직접 보내는 전보가 내려왔다. 둘 이상의 자녀들을 데리고 외국에 상주하고 있는 외교관들은 한 아이만 남겨놓고 모두 평양으로 돌려보내라는 김정일의 ‘친필 지시’였다. 이 친전의 진짜 목적은 자식을 인질로 외교관들의 이탈을 막자는 것이었다. 일생에서 가장 어려운 선택을 해야 했다.


남편은 인편을 통해 평양의 지인에게 연락을 띄웠다. 만기가 되어오니 소환장이 나올 때까지 아이들을 둘 다 데리고 있다가 평양으로 함께 귀국할 수 있는지, 가능하면 눈 감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하지만 곧 어렵다는 대답이 왔다. 김정일의 친필 지시가 내려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라 누구도 감히 나서려 하지 않았다.


우리는 둘째를 들여보내겠다고 대사에게 보고했고, 남편의 소환 시기도 다가오고 있으니 우리 부부는 무작정 뻗치기로 했다. 그렇게 4개월이 지나자 남편의 소환장이 떨어졌고 온 가족이 함께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행복했던 런던 생활과 이별해야 한다는 생각에 슬프기 그지없었다.



버림받은 사람들

새 독재자의 출연

2008년 가을, 갑자기 김정일이 사라졌다. 그의 존재와 권력의 힘을 매 순간 느끼게 해주던 ‘보고 문건’과 ‘친필 지시’가 몇 달째 올라가지도 내려오지도 않았다. 북한의 모든 사업이 정지되었다. 남편은 김정일이 심하게 앓고 있는 것 같다고 귀띔해주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드디어 자유 세상이 오는 건가?


하지만 혹시나 했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그렇게 간절히 김 씨 일가의 독재가 끝나기를 기다렸지만, 또 누군가 우리 위에 군림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또 누군가 우리 아이들의 운명과 미래를 거머쥐고 흔들려 하고 있었다. 불안은 현실로 다가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일성의 모습을 판박이한 그의 손자 김정은의 모습이 미디어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정일은 평생 하지 못했던 현지 지도를 다 하려는 듯 매일 방방곡곡을 찾아다녔고 그의 곁에는 늘 젊은 김정은이 동행했다.


그러던 2011년 12월, 북한은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와 꼭 같은 방법으로 김정일의 부고를 세상에 알렸다. 김정은 시대가 다시 열리자 북한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에, 아니 태어날 때부터 자아를 잃어버린 듯 맹목적으로 김정은에게 복종하기 시작했다. 혹시나 새로운 젊은 지도자는 좋은 군주이기를 마음속으로 기대할 뿐이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당원들에 대한 당 위원회의 권한과 통제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의 상황은 최악에 이르렀고 어느 하루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날이 없었다. 김정은은 선친들을 능가하는 독재자였다. 늙고 병든 아버지와 달리 젊은 혈기로 여기저기 ‘현지 지도’를 한다며 들쑤시고 다녔고, 문제가 생기면 인내하지 못하고 즉석에서 간부들을 처벌했다.


마지막 겨울, 그리고 작별

2012년 겨울에 들어서면서 북한의 전기 사정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일주일 내내 정전되는 날들이 잦아졌다. 석탄 부족과 설비 노후로 화력발전소들은 정상 가동을 멈추었고 그 속에서도 전기를 먼저 공급해야 할 특수 단위들은 늘어만 갔다. 최고 권력기관인 중앙당과 인민 무력부는 이미 전국적인 전력 공급망인 국선과 분리된 별도의 전기 공급망을 확보했다. 위력을 과시하듯 온 평양 시내가 캄캄해도 그 주변은 훤히 밝았다.


우리 집도 정전으로 고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언제면 전기가 올까 하루하루 간신히 버티곤 했다. 문제는 겨울 난방이었다. 전기가 와야만 시동하는 보일러는 오랫동안 작동하지 못해 나중에는 동파되었다. 북한 주민들은 열악한 주거환경과 추위와 배고픔에 하루하루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지만 북한 당국은 주민들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 힘든 시기에 시어머니께서 하늘나라로 떠나가셨다. 먹고살기 위한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나는 점점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북한은 무법천지 강자들의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북한 사회에 대한 반감이 쌓여 갈수록 순응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한편 두려웠다.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북한의 현실로부터 탈출하고 싶던 그 시기, 남편이 다시 런던으로 발령받는 일이 일어났다. 하지만 주혁이는 평양에 남게 되었다. 한 번도 아이들과 헤어져 본 적이 없었기에, 이번 영국행도 함께 가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평양을 출발하는 날, 열차에 몸을 싣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과 따로 떨어진 멀리 열차 앞쪽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주혁이가 눈에 띄었다. 나는 애써 웃음을 짓고 주혁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눈물을 훔치고 천천히 열차 칸 안으로 들어섰다. 둘째 금혁이는 침대 위에 등을 돌려 앉은 채 헉헉 어깨를 떨고 있었고, 남편은 안경을 벗고 손수건으로 두 눈을 닦고 있었다.



기적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런던에 도착한 지 그럭저럭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그동안 돈을 모으려고 부지런히 살았다. 점점 자본주의적으로 변해 가는 평양에서 살아남자면 돈이 있어야 했다. 이번이 외국으로 나오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우리 가족의 런던 생활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흘러갔다. 웃음이 사라졌고 누구나 바빴다. 말은 하지 않았어도 누구나 주혁이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주혁이와 헤어진 지 꼭 1년이 되어 오던 어느 날, 아프리카에서 공관 생활을 하고 있던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에 의하면 재정 사정으로 국가가 유학생들을 보낼 수 없는 실정에서 현재 국내 대학에서 재학 중인 외교관의 자녀들을 본인 부담으로 외국에 데리고 나가 공부시키도록 하는 김정은의 방침이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서둘러야 했다. 방침이 언제 어떻게 다시 변할지 모를 일이었다.


불안한 아이들

큰 애가 런던에 도착한 후 우리 가족은 다시 즐거운 일상으로 돌아왔다. 주말이면 온 가족이 함께 테니스를 치러 동네 테니스장으로 나가곤 했다.


어느 날 남편이 식탁 위에 놓고 간 강연 제목을 본 나는 화가 치밀었다. ‘모두 다 장군님을 목숨으로 옹호 보위하는 총 폭탄이 되자!’라는 제목이었다.


“아니, 사람을 보고 자기를 위해 총 폭탄이 되라는 게 말이 돼?”


자유를 향한 갈망

외국에서 공부한다 해도 친구들과의 수학여행이나 관광은 절대 불가능했다. 방학이 끝나고 개학하는 날이면 친구들은 여름이나 겨울 방학을 어디서 어떻게 보냈다고 여행 이야기를 풀어놓곤 했지만 오도 가도 할 수 없는 우리 아이들은 낄 수가 없어 자괴감을 느끼곤 했다. 런던 생활에 적응해갈수록 아이들은 점점 더 자유를 누리고 싶어 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북한인의 한계를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아 뭐든 할 수 있다고 대답하곤 했지만 엄마의 약속은 나중에는 꼭 거짓말이 되곤 했다.


늘 우리 애들도 영국 애들처럼 자유롭게 살게 하는 것이 나의 소망이었다. 자유로운 세상에서 마음껏 공부하고 평온하게 일할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 성장한 아이들에게 다시 북한의 무조건적인 복종과 충성을 강요하는 것은 부모로서 할 짓이 아니었다.


선택

2015년 10월 어느 날, 저녁 시간이 되어 식사 준비를 한창 하고 있는데 주혁이가 대학에서 온 메일을 들고 사색이 되어 방에 들어갔다. 대학 과정 기간이 당겨져 다음 해 6월까지로 예정했던 실습 기간을 12월 말로 완료한다는 대학 학장의 공식 메일이었다. 이는 주혁이가 겨우 다음 해 초까지나 런던에 체류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선택할 순간이 온 것 같았다. 먼 훗날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발등의 불로 떨어졌다. 아이들에게 한 그 많은 약속과 꿈을 저버릴 수 없었다. 남편은 탈북하려는 내 결심이 확고하냐고 물었다. 이미 남편과 자유에 대한 생각을 나눈 지는 오래되었지만 정작 그의 입에서 탈북이라는 말을 듣고 나니 가슴이 철렁했다.


“너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다시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을 자신이 있냐고. 나는 괜찮아. 부모님은 이미 떠나가셨고 형제들은 평생 인생 막바지에 살았으니 고생을 견뎌낼 수 있겠지만 너희 형제들은 다르잖아?”


그 순간 어머니와 형제들의 얼굴이 번갈아 지나갔다. 나로 인해 하루아침에 온 가족이 지방으로 쫓겨날 생각을 하니 숨이 턱 막혔다. 어린 딸을 잃고 평생 고생하셨던 아버지 생각도 났다. 사랑하는 딸을 버리면서 김 씨 일가를 선택했던 아버지는 충성을 선택했지만 결국 불행한 인생 말년을 보내야 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결혼 후 집을 떠나던 날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었다.


“이젠 집을 잊고 남편과 애들을 잘 키워라. 물이 내리흐르듯 사랑도 내리흐른다. 네가 애들을 잘 키우고 잘 사는 게 어머니에게 효도하는 길이다”


그 당시에는 무심히 들었던 어머니의 말씀이 나의 선택을 결정했다.


“후회하지 않겠어요.”


아이들의 꿈과 미래를 지켜줄 수만 있다면 그 무엇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수많은 고심의 나날 끝에 탈북은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왔다. 남편은 한국행을, 나는 영국에 남을 것을 고집했다.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들이 그나마 피해를 덜 받자면 한국행은 가능한 피해야 했다. 하지만 남편의 생각은 달랐다. 남편은 탈북을 결심하면서부터 형제들과 친척들, 자기를 믿어준 지인들은 물론 인간으로서 지나온 과거의 모든 것을 잃게 된 것을 애통해했다. 설사 형제들에게 피해가 가더라도 여생을 조용히 살 수는 없다고, 그럴 바에는 차라리 탈북을 하지 않는 편이 낫다며 한국에 가서 김정은 정권에 대항해 싸우겠다고 했다. 죽는 순간까지 북한과 가까운 한국에 가서 통일 운동을 하겠다는 것이 그의 굳은 의지였다. 결국 남편을 믿고 우리는 한국행을 선택했다.


진정한 자유인

고마운 대한민국

북한에서 살 적에는 나를 국민으로 받아줄 대한민국이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 내가 생각하는 대한민국은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철천지원수’였고, 어른이 되어서는 늘 부러운 ‘아랫동네’였다.


하지만 세상은 자유를 찾아가는 우리 가족의 편이었다. 탈북 과정은 고마움의 연속이었고 대한민국은 우리 가족이 안전하게 정착할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대한민국에 도착한 첫 순간부터 우리 가족은 기대하지 못했던, 분에 넘치는 크나큰 사랑과 환대를 받았다.


대한민국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남편은 오늘도 꾸준한 열정과 헌신으로 자신의 꿈을 실현해나가고 있다. 그는 늘 하루가 너무 짧다고 한다. 지칠 줄 모르는 그의 힘과 도전의 원천은 아마도 대한민국 국민들로부터 받은 사랑과 믿음일 것이다.


언젠가 나는 남편에게 왜 그렇게 열심히 사는가 하고 물어본 적이 있다.


“너를 위해 열심히 살지.”


이전에는 천진한 소녀처럼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만족해있지만 지금은 그 말의 의미를 안다. 나를 위해 산다는 그 말속에는 북한에 두고 온 친척들과 지인들, 북한 주민들을 향한 미안함과 함께 한국인들의 사랑과 믿음에 대한 보답, 자유로운 대한민국의 무한한 발전을 바라는 마음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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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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