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행복론’은 논쟁이 필요 없는 당연한 명제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전제에서 모든 불행이 생겨난다고 말한다. 그는 ‘행복은 꿈일 뿐, 고통은 현실이다.’라고 말하며 ‘행복하게 산다’의 본래 의미는 ‘덜 불행하게’ 즉 참고 견디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인생의 지혜를 이 책을 통해 전한다. 누구나 행복의 자질을 타고났지만 소유물이나 외면에 따른 행복만을 좇느라 불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행복에 대한 편견을 특유의 냉소적인 문체로 하나씩 부정하며 우리가 추구해야 할 행복은 무엇인지 고찰한다.
이 책은 1851년 출간된 저자의 ‘소품과 부록(Parerga und Paralipomena)’ 중 소품 부분에 해당한다. 독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던 ‘소품’은 독일어로 ‘삶의 지혜에 대한 격언(Aphorismen zur Lebensweisheit)’으로 번역되어 따로 출간되기도 했는데 행복한 삶에 대한 그만의 유쾌한 문체와 언어가 돋보이는 책이다.
독일어 원전을 최대한 살린 이 책은 지적 교양을 쌓는 동시에 현대인에게 부족하다고 언급되는 철학적 사고의 부재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이해 정도와 인식의 한계 내에서만 세상을 바라볼 뿐이다.’라는 책 속의 문구처럼 이 책을 읽고 난 후 세상을 바라보는 척도가 완전히 바뀌는 것을 경험하길 바란다.
■ 저자 쇼펜하우어
저자 쇼펜하우어는 독일의 철학자이자 사상가로 1788년 유럽의 항구 도시인 단치히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실존 철학은 물론 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19세기 서양 철학계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칸트의 사상을 올바르게 계승했다고 확신하며 당시 최고의 철학자로 평가받던 헤겔, 피히테 등을 비판하였다.
흔히 염세주의자로 알려졌지만 인간 삶의 비극적 면면을 탐구한 사상가이며, 그의 철학은 근대 철학가들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외에도 바그너, 톨스토이, 아인슈타인 등이 그의 철학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니체 역시 21세 때 쇼펜하우어에 빠져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서양에서 최초로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의 유사성을 연구한 철학자이자 무신론자인 그의 수많은 말들은 어록이 되어 여러 사상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809년 독일 괴팅겐대학에 입학하여 자연과학과 철학을 전공하다가 1811년 베를린대학으로 옮긴 쇼펜하우어는 1813년 여름 루돌슈타트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하여 예나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쇼펜하우어의 사상은 독창적이었으며, 니체를 거쳐 생의 철학, 실존철학, 인간학 등에 영향을 미쳤다. 말년에는 집필한 책들을 마무리하는 일로 시간을 보냈으며, 1860년 9월 21일, 72세의 나이로 프랑크푸르트에서 생을 마감했다.
주요 저서로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소품과 부록’,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 등이 있다.
■ 역자 박제헌
역자 박제헌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를 졸업했다. 독일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며 다양한 통역, 번역 활동을 하다가 번역이 매우 잘 된 번역 작품을 계기로 번역 작가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현재 베네트랜스에서 출판 번역 리뷰어로 활동하며 다양한 도서들을 읽고 있다.
옮긴 도서로는 ‘명상 살인’, ‘버려야 할 것, 남겨야 할 것’,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별글클래식 파스텔 에디션 23’, ‘변신, 소송-별글클래식 파스텔 에디션 18’, ‘볼 빨간 로타의 비밀 2-풉, 어린 양 클럽?’, ‘볼 빨간 로타의 비밀 15-범고래에게 자유를!’ 등이 있다.
■ 차례
서문
1. 기본 분류
2. 개인의 본질
3. 개인의 소유물
4. 개인의 외면
5. 권고와 격언
- 1. 일반적인 것
- 2.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
- 3. 다른 사람에 대한 태도
- 4. 세상사와 운명을 대하는 태도
6. 나이의 차이에 대하여
누구나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행복론’은 논쟁이 필요 없는 당연한 명제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전제에서 모든 불행이 생겨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행복에 대한 편견을 쇼펜하우 특유의 냉소적인 문체로 하나씩 부정하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행복은 무엇인지를 고찰합니다.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
기본 분류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생의 자산을 세 가지로 나누었다. 그것은 바로 겉으로 보이는 외면의 자산, 정신의 자산 그리고 육체의 자산이다. 나는 여기서 셋이라는 숫자만을 빌려와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의 운명의 차이를 만드는 부분을 말하겠다. 이는 내가 만든 세 가지 기본 규정에 따른 것이다.
1. 개인의 본질: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인격이다. 여기에는 건강, 힘, 아름다움, 기질, 도덕적 특성, 지능과 교육 수준이 포함된다.
2. 개인의 소유물: 모든 범위 내에서 재산이나 소유물로 인식하는 것들이다.
3. 개인의 외면: 이 단어 속에는 익히 타인의 생각, 즉 인간이 타인에게 보이는 모습이 들어 있다. 개인의 견해에 따라 이것은 명예, 지위, 평판으로 세분된다.
첫째 규정에서 살펴볼 차이는 인간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다른 두 가지 규정보다 첫째 규정이 더 본질적이고 정교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자연이 인간의 행복과 불행에 관여하는 바는 단순히 인간이 규정한 소유물이나 생각 같은 규정에서 나타나는 차이보다 크기 때문이다. 위대한 정신이나 마음가짐을 지닌 진정한 인격적 우수성은 지위, 출생 신분, 심지어 고귀한 왕가의 핏줄이나 부유함에 견줄 수 없다. 이들의 차이는 연극무대 위의 왕과 실제 왕의 관계와 비슷하다. 일찍이 에피쿠로스의 수제자 메트로도로스는 ‘행복의 원인은 우리 내면에서 나오며, 이는 사물에서 비롯된 행복보다도 크다’는 제목의 글을 썼다.
물론 인간의 행복, 즉 인간의 본질이 존재하는 전반적인 방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 내면에 이미 있거나 그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임은 명백하다. 유쾌함이나 불쾌함은 감정, 의도, 사고의 결과이며 내면에만 머물지만, 그밖에 외부의 모든 것은 간접적인 영향을 끼칠 뿐이다.
그래서 똑같은 외부의 사건이나 조건이라도 사람마다 다른 영향을 끼치고, 모든 인간은 같은 환경 속에서도 각기 다른 세상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개인의 사상, 감정, 의지의 동요 정도만이 인간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부의 사정은 사상, 감정, 의지 등을 초래하는 선에서만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각자의 견해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이 견해에 따라서 사람은 세상을 불행하게 바라볼 수도, 진부하고 단조롭게 바라볼 수도, 또는 풍요롭고 재미있으며 유의미하게 인식할 수도 있다.
무대에서 누군가는 영주, 누군가는 자문가, 또 다른 누군가는 신하, 군인이나 장군 역할을 한다고 가정하자. 이들의 차이는 그저 겉모습에 불과하다. 외관을 파고들어 핵심에 다다르면 누구나 고통과 빈곤에 시달리는 희극인인 점은 매한가지다.
인생도 이와 같다. 지위와 재산이 개인적 역할에 차이를 만들지만, 그 역할이 내적인 행복이나 즐거움을 좌우하진 않는다. 오히려 개인의 이면에는 고통과 빈곤에 시달리는 가여운 인간이 숨어 있다. 사람마다 고통과 빈곤의 형태는 다를지 몰라도 그 본질은 거의 같다. 어느 정도 본질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처한 상황이나 재산 수준에 따른 역할의 차이는 행복을 좌우하는 전부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존재하고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인간의 의식 속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의 성질에 주목하는 게 아주 중요하다.
자기 개성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다양한 상황에 부닥치는 동물도 자연이 본성을 거스를 수 없도록 만든 한계를 절대 벗어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사랑스러운 동물을 행복하게 만들려는 우리의 노력도 동물의 본성과 의식에 그어진 협소한 한계 내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각자의 개성에 근거하여 누릴 수 있는 행복의 한도가 정해져 있다. 특히 정신력의 한계는 높은 수준의 향락을 누릴 수 있는 지점을 최종적으로 확정한다. 정신력의 한계선이 낮으면 인간의 행복을 위해 외부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거기까지 다다를 힘이 없다. 이런 인간은 반쯤은 동물적 감각에 따른 행복과 즐거움을 넘어선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면 인간은 감각적 쾌락, 친밀하고 밝은 가족 관계, 저급한 사교 모임 또는 통속적인 소일거리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데 그친다. 심지어 교양을 갖춘다 해도 한계 영역을 다소 넓힐 수 있을 뿐, 큰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지속해서 다양하게 깊은 만족을 느끼는 일이 중요한데, 젊은 시절에는 이 깊은 만족감을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깊은 만족감은 정신력이 좌우한다. 정신력을 보면 행복이 우리의 본질, 즉 인격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는지 확실해진다. 대다수 사람은 우리의 소유물이나 외면에 따라 결정되는 운명만을 고려하는 데 그친다. 물론 운명은 나아질 수 있다. 한편 내면이 풍요로운 자는 바라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 반면에 멍청이는 끝까지 멍청이로, 바보는 끝까지 바보로 남는다. 이들이 천국에서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그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괴테는 이렇게 말한다.
시민, 노예, 정복자
그들은 모두 매 순간 고백한다,
인간의 지상 최대 행복은
오로지 인격에 달린 것이라고.
- 서동 시집
첫째 규정이 다른 두 가지 규정보다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에서 부를 축적하려 노력하기보다 자신의 건강을 유지하고 능력을 키우는 교육을 받는 편이 더 현명하다. 그렇다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어느 정도의 수입을 확보하는 일에 소홀해도 된다고 잘못 해석하면 안 된다.
하지만 실제적인 풍요, 즉 넘치는 부는 우리의 행복에는 별다른 쓸모가 없다. 많은 부자가 불행한 이유는 지적 교양이나 지식이 없어서 심리적인 만족감을 선사하는 기반이 되는 어떤 객관적 관심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필요 이상의 부유함은 현실의 자연스러운 욕구를 채우는 일 외에 인간의 참된 행복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오히려 과도한 재산을 유지하느라 발생하는 불필요한 수많은 근심은 만족스러운 삶에 방해물이 된다.
인생의 자산에서 다른 두 가지 규정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늘날 재산의 가치는 너무나 보편적으로 인정받고 있으므로 특별히 여기서 더 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셋째 규정은 둘째 규정에 비하면 단순히 다른 사람의 의견에 따라 형성된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명예, 즉 좋은 평판을 얻고자 하지만 지위를 얻는 사람은 공무를 행하는 자들뿐이며, 이 중에 명성을 얻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다. 명예를 가장 고귀한 자산으로 여기기 때문에 명성은 선택받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값진 황금 양털과 같다.
지위가 재산보다 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들뿐이다. 둘째와 셋째 규정은 소위 상호 작용 관계에 있다. 페트로니우스가 말한 대로 재산이 있으면 평판이 좋아진다. 반대로 다른 사람의 호평은 어떤 형태로든 자산을 불리는 데 도움이 된다.
권고와 격언
일반적인 것
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 7권에서 말한 문장이 인생의 지혜를 말하는 최고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현명한 자는 즐거운 것을 추구하지 않고 고통 없는 상태를 추구한다.’ 이 문장을 독일어로는 ‘이성적인 사람은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 없음을 추구한다.’거나 ‘이성적인 사람은 향락이 아닌 고통 없음을 추구한다.’고 번역할 수 있다. 이 문장은 모든 향락과 행복이 부정적인 성질을 가졌지만, 고통은 긍정적인 성질을 갖는다는 진리를 말하고 있다. 후자의 명제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나의 주요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1권에 실려 있다. 이 책에서는 같은 주제를 두고 매일 관찰할 수 있는 사실을 바탕으로 설명하겠다.
인간은 전신이 건강한데 몸 한 곳에 상처를 입었거나 그밖에 아픈 곳이 있으면 전신의 건강은 의식에 들어오지 않고, 다친 곳의 고통에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이며 생명력이 주는 만족이 상쇄되어 버린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일이 생각대로 흘러가도 자기 의도에 어긋난 단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중요하지 않아도 계속해서 머리에 맴돈다. 인간은 그런 것을 자주 생각하는 반면에 뜻대로 진행되는 더 중요한 것들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뜻대로 되는 일이든 안 되는 일이든 의지가 침해당한다는 점은 사실이다. 한쪽은 객관화되어 인간의 신체가 된 의지고, 다른 한쪽은 인간의 노력으로 객관화된 의지다. 어느 쪽이든 의지의 충족은 언제나 부정적인 작용을 해서 직접 느껴지지 않고, 느껴진다 해도 반성의 과정을 거쳐 의식에 도달한다. 반면에 의식의 억제는 긍정적이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모든 향락은 오로지 이 억제를 제거하고 억제에서 벗어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어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칙은 인생이 주는 향락과 안락에 매여 있지 말고 인생의 수많은 재앙을 되도록 피하라는 데 주안점을 둔다. 이 방법이 올바르지 않다면 볼테르의 이 말도 틀린 게 되어버릴 것이다. 진실인데도 말이다. ‘행복은 꿈일 뿐이고 고통은 현실이다.’ 행복론의 관점에서 보면 자기 인생의 성과를 거두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이 누린 기쁨을 계산하지 말고, 그가 잘 피한 악을 따져야 한다.
행복론이라는 명칭 자체가 미화된 의미를 담고 있기에 ‘행복하게 산다’의 본래 의미는 단지 ‘덜 불행하게’ 즉 참고 견디며 살아가라는 교훈이다. 물론 인생은 실제로 즐기기보다는 극복하기 위해 존재한다. 라틴어로는 ‘삶을 영위하고, 삶을 완수하다’, 이탈리아어로는 ‘그럭저럭 헤쳐나가다’, 독일어로는 ‘반드시 헤쳐나가야 한다’ 또는 ‘그는 어떻게든 세상을 헤쳐 나갈 것이다’로 표현한다. 노년에 위로가 되는 사실은 인생의 여러 가지 일을 모두 끝마쳤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심각한 고통 없이 인생을 보내는 사람이지 활기 넘치는 기쁨이나 최고의 향락을 맛본 사람이 아니다. 활기 넘치는 기쁨이나 최고의 향락을 인생의 행복을 가늠하는 잣대로 삼으려는 사람은 잘못된 기준을 택했다. 그 이유는 향락은 언제나 부정적 결과를 가져오고, 향락으로 행복해진다는 말은 시기심이 자기 자신을 벌하려고 품는 망상이기 때문이다.
반면 고통은 긍정적 결과를 가져온다고 느껴지므로 고통의 부재가 행복의 척도가 된다. 고통 없는 상태에서는 지루함도 없다. 이것으로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기 위한 중요한 요소는 모두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외의 것은 허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절대 고통으로 향락을 얻거나 고통의 위험을 안고 향락을 가져선 안 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렇지 않으면 부정적인 결과, 즉 허상에 대한 값을 긍정적이고 실제적인 걸로 치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고통을 피하고자 쾌락을 희생하면 이익을 본다.
이 두 경우 모두 고통이 향락 뒤에 오든 앞에 오든 상관없다. 될 수 있으면 고통 없는 삶을 사는 대신 향락과 즐거움을 목표로 삼는 일은 많은 인간이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다. 차라리 음울한 시선으로 이 세상을 지옥 같은 곳으로 간주하고 지옥 불에도 타지 않을 방 하나를 만들려는 인간이 훨씬 덜 착각하는 자다.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
건물을 세우는 일을 돕는 일꾼은 전체 설계를 알지 못하거나 그 설계를 항상 염두에 두지는 않는다. 인간도 하루하루 살아가며 자기 인생의 시간을 보내면서 삶의 이력과 그 특성에 대해 이런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삶이 품위 있고 유의미하고 계획성 있으며 개인적인 성격을 띨수록 인생의 축소판인 평면도, 즉 설계를 종종 눈앞에 떠올려보는 일은 필요하고 또 유익하다.
물론 그러려면 작은 일이라도 시작하기에 앞서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되새겨 자신이 실제로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기 행복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그다음으로 둘째와 셋째로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직업, 역할, 세상과의 관계를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이때 직업, 역할, 세상과의 관계가 의미 있고 웅대하다면 인생 설계를 축소된 기준으로 보는 일이 인간을 강인하게 만들어주고, 격려가 되고, 분발하게 만들고, 행동하는 데 필요한 원기를 주며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준다.
방랑자는 일단 높은 곳에 이른 다음에야 비로소 자기가 걸어온 구불구불한 길을 속속들이 살펴보고 인지할 수 있다. 인간도 인생의 한 주기가 끝날 때나 인생이 완전히 끝났을 때 자신의 업적과 작품의 결과, 인과관계, 심지어 그 가치까지 인식할 수 있다. 일하는 동안에는 언제나 단지 인간 고유의 특성이 지닌 자질에 따라 동기의 영향을 받고, 능력의 정도에 따라 행동한다. 그래서 인간은 매 순간 필요에 따라 적절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할 뿐이다.
오직 성공만이 그 결과를 보여주며 이후 전체 맥락을 되돌아보면 일이 어떻게, 무엇을 통해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가장 위대한 행위를 성취하거나 불멸의 작품을 창조하는 동안에는 결과를 의식하지 않고 그저 현재의 목표에 적합하며 당시의 의도와 일치하고 지금 타당한 사실에만 집중한다. 그러다 나중에 전체 맥락을 살펴보면서 인간의 특성과 그의 능력이 뚜렷해진다. 이후에 일어난 일을 하나하나 보았을 때야 어떤 영감이 스쳐 잘못된 길 수천 갈래 중에 수호신의 도움으로 올바른 길 하나를 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일은 이론적인 분야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분야에도 적용되며 반대로는 나쁜 데나 그릇된 데에도 적용된다.
모든 삶의 범위에 제한을 두면 행복해진다. 인간의 시야, 활동이나 접촉 범위가 좁을수록 인간은 더 행복해지고, 범위가 넓어질수록 더 자주 괴롭거나 두려워진다. 범위가 넓어지면 걱정, 욕망, 끔찍한 일도 더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님도 비장애인이 선험적으로 생각하는 만큼 불행하지는 않다. 장님의 얼굴에 드리운 부드럽고 밝아 보이기까지 한 평화가 그 증거다.
풍부한 내면의 가치를 지닌 사람은 확실히 만족감을 느끼므로 다른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는 데 필요한 중대한 희생을 치르거나 명백하게 자신을 부정하면서까지 공동체를 이루려 하지 않는다. 이와 반대의 사례는 평범한 인간의 경우인데 이들은 매우 사교적이고 순응적이다. 그들은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을 견디는 게 더 쉽다. 세상에서는 진짜 가치 있는 것이 존중받지 못하고 세상에서 존중받는 것은 가치가 없다. 존경받는 사람이나 탁월한 인재가 은둔을 택하는 사실이 이에 대한 증명이자 결론이다. 이 모든 사실을 종합하면 삶의 지혜란 자기 자신에 대한 어떤 권리라도 가졌다면 필요할 때 자기 욕구를 제한하여 자신의 자유를 지키거나 확대하고, 세상에서 다른 사람과 어쩔 수 없이 관계를 맺어야 하면 잠시나마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자신에게 만족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에 대한 태도
세상을 헤쳐나가려면 신중한 태도와 관용을 베푸는 마음을 넉넉하게 가져야 한다. 신중하면 손해와 상실을 막을 수 있고, 관용을 베풀면 논쟁과 다툼을 피할 수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자는 자연이 만든 본성이 그러하다면 어떤 개성도 무조건 거부해서는 안 된다. 그 개성이 아무리 최악이거나 한심하거나 우스꽝스러워도 상관없다. 도리어 이런 개성을 변할 수 없는, 영원하고 형이상학적 원칙의 결과로써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라 로슈푸코가 누군가를 깊이 존경하는 동시에 매우 사랑하기 어렵다고 한 말은 적절하다. 이 말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사람의 사랑을 얻을지 아니면 타인의 존경을 받을지를 선택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사랑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지만, 그 속성은 언제나 이기적이다. 거기다 사랑을 얻는 수단에는 인간이 자랑스러워할 만한 방법만 있는 게 아니다. 인간이 다른 사람의 정신과 마음에 많은 요구를 하지 않고, 멸시에 뿌리를 둔 관대함이 아니라 가식 없이 진지하게 대하면 충분히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을 것이다.
프랑스 계몽기의 유물론 철학자 엘베시우스의 진심에서 우러난 잠언 ‘우리를 기쁘게 하는 데 필요한 지성의 정도는 우리가 가진 지성을 보여주는 상당히 정확한 척도다.’에서 앞서 언급한 사랑을 얻는 조건들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인간의 존경은 사랑과 정반대이다. 존경은 인간의 의지에 반하여 강요하는 면이 있으며, 바로 그래서 존경심을 대부분 숨긴다. 그래서 존경은 내면적으로 훨씬 더 큰 만족감을 준다. 존경은 인간의 가치와 관련이 있다. 이 부분이 인간의 사랑에는 직접 적용되지 않는다. 사랑은 주관적이고 존경은 객관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에게는 사랑이 더 유용하다.
인간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버릇없이 키우면 무례한 자가 된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너무 쉽게 동조하거나 과한 호의를 베풀면 안 된다. 돈을 빌려달라는 청을 거절해서 친구를 잃는 일은 없지만, 돈을 빌려주면 친구를 아주 쉽게 잃고 만다.
마찬가지로 오만하고 다소 소홀하게 친구를 대한대도 쉽게 친구를 잃지 않는다. 하지만 지나치게 친절하고 예의를 차리는 바람에 상대가 너무 거만해져서 참을 수 없게 되어 사이가 벌어지는 일이 자주 있다. 특히 인간은 자신이 상대에게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면 가만히 있질 못한다. 이런 생각 때문에 자만하고 거드름을 피우게 된다. 어떤 사람은 그저 다른 사람과 잘 사귀고 종종 친밀한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 자신이 상대에게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수가 있다. 그런 생각이 들면 타인이 자신을 마음에 들어한다고 여겨 예의의 한계를 넓히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러므로 더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에 적합한 사람은 거의 없으니 특히 자신을 저급한 본성에 맞춰 친구를 사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누군가를 내가 필요한 것 이상으로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 상대는 그 즉시 내게 무언가를 도둑맞은 듯 느낄 것이다. 그래서 이에 대한 복수로 무언가를 내게서 되찾으려고 할 것이다. 교제에서 우월함은 한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과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데서 발생한다. 이에 따라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상대방 없이도 잘 지낸다는 인상을 주어야 바람직하다. 이럴 때 우정은 굳건해진다. 대부분은 때때로 업신여겨도 별다른 상처를 입지 않는다. 오히려 무시할수록 그들은 우정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한다.
세상사와 운명을 대하는 태도
인간의 삶이 나타나는 형태는 달라도 삶의 요소는 항상 같다. 따라서 오두막이든 궁정이든, 수도원이든 군대든 본질에서는 모두 똑같은 삶이 펼쳐진다. 인생의 사건, 모험, 행운과 불행이 아무리 다양해도 이는 설탕 과자와 같다. 여러 형태나 다채로운 색을 띠고 있어도 결국 한 반죽 덩어리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게 일어난 일은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일과 유사하다. 후자가 전자의 말을 듣고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비슷하다. 인간이 살면서 겪는 일도 만화경 속 그림과 같다. 통을 돌릴 때마 다 다른 그림이 보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눈앞에 항상 같은 것을 두고 본다.
옛말에 세상을 지배하는 힘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바로 현명함, 힘, 운이다. 나는 이 중에 운이 가장 강력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생애는 배의 항로에 비유할 수 있다. 운명, 즉 행운이나 불행은 바람의 역할을 해서 인간을 빠르게 멀리 보내거나 저 멀리 뒤쪽으로 되돌려 버리기도 한다. 여기서 개인의 수고나 노력은 별 소용이 없다. 인간의 노력은 사실상 노의 구실을 한다. 오랜 시간 노를 저어 앞으로 나가면 갑자기 돌풍이 불어 인간을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낸다. 하지만 순풍이 불면 노가 필요 없을 정도로 나아갈 수 있다. 스페인 속담은 이런 운의 힘을 독특하게 표현한다. ‘당신의 아들에게 행운을 주고 그를 바다에 던져버려라.’
우연은 인간이 될 수 있으면 적게 의존해야 하는 사악한 힘이다. 인간은 모든 걸 베푸는 이에게 어떤 권리도 요구할 수 없이 그저 받기만 할 수 있다. 인간이 이렇게 받는 이유는 그가 자격을 갖추어서가 아니라 베푸는 자의 전적인 호의와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앞으로도 과분한 선물을 겸손히 받는 즐거운 희망을 품게 하는 유일한 존재는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우연이다. 우연은 그것이 지닌 총애와 은혜 앞에서 인간의 모든 공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히 일깨워 주는 대단한 기술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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