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스토아철학자의 글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일기장에, 세네카는 편지에, 에픽테토스는 강연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이 책은 스토아철학을 12가지 키워드로 나누어 스토아철학자들의 원전을 주제에 따라 엮어냈다. 그다음 철학을 단지 배우고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닌, 삶을 살아가며 실천할 수 있는 방향으로 해석을 이끌어낸다.
이 책이 다루는 철학자는 대표 스토아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네카, 에픽테토스뿐 아니라 쇼펜하우어, 몽테뉴, 애덤 스미스, 니체까지 다양하다. 실존주의자인 쇼펜하우어의 말 속에서도 스토아적인 이야기가 등장하고, 몽테뉴는 부분적으로 스토아철학을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애덤 스미스 또한 그의 책 『도덕 감정론』에서 상당 부분 스토아철학에 대해 언급하며 그 가치를 이야기한다. 고대 철학자부터 현대 철학자까지, 스토아철학이 관통하는 본질을 짚어내는 저자의 12가지 키워드는 그동안 흩어져 있었던 스토아철학을 완전하게 집약하고, 이해하기 쉽게 나누었으며,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철학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현대인의 삶과 2000년 전 스토아철학의 가르침을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법학자이자, 법학대학원 교수인 저자는 오래된 스토아학자들의 이야기를 묶고, 가끔은 해명하며 또 해석하면서 스토아철학이 삶에 다가가는 가장 정확한 방법을 제시한다. 실천하는 스토아주의자인 동시에 스토아철학의 정수를 정확하게 해석하려는 저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 철학으로 삶을 바꾸는 것이 무엇인지, 이 책을 통해 알게 될 것이다.
■ 저자 워드 판즈워스
텍사스 오스틴 법학대학원 교수이자 W. 페이지 키튼 학과장이다. 웨슬리언 대학교를 졸업하고 시카고 법학대학원에서 법학전문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연방대법원 앤서니 M. 케네디 대법관과 연방제7항소법원 리처드 A. 포스너 판사의 재판 연구원으로 일했으며, 헤이그 이란-미국 청구재판소의 법률고문으로도 일했다. 보스턴 대학교 법학대학원에서 15년간 가르치며 부학장을 지냈고, 2012~2022년까지 텍사스 법학대학원 학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법률 분석가The Legal Analyst』, 『고전에서 배우는 영어 수사학Classical English Rhetoric』, 『소크라테스의 방법The Socratic Method』 등이 있다. 법경제학과 헌법, 법률해석, 법리학, 인지심리학을 다룬 여러 논문을 발표했다.
■ 역자 강경이
영어교육과 비교문학을 공부했다. 옮긴 책으로 『문학의 역사』, 『불안의 변이』, 『불안한 날들을 위한 철학』, 『컬러의 시간』, 『길고 긴 나무의 삶』 등이 있다.
■ 차례
서문 삶에 답이 보이지 않을 때 스토아철학을
책에 등장하는 철학자들
일러두기
1 판단
2 외적인 것
3 관점
4 죽음
5 욕망
6 부와 쾌락
7 타인의 생각
8 가치 판단
9 감정
10 역경
11 덕
12 배움
13 스토아철학 다시 생각하기
정리 스토아주의자의 생각법
인생의 분기점에서, 삶의 역경과 장애물을 만나 비틀거릴 때 철학이 건네는 인생 해법 어떠신가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네카, 에픽테토스부터 쇼펜하우어, 니체, 몽테뉴까지 철학자의 말과 글에서 삶의 답을 얻습니다.
해법 철학
판단
스토아철학의 기본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사건에 반응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건에 대한 우리 판단에 반응하며 판단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이 장에서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어떻게 이런 생각을 전개했는지 살펴봅니다. 우선 대표적인 표현을 봅시다.
어떤 외적인 것 때문에 힘들다면, 네가 힘든 이유는 그 외적인 것 때문이 아니라 너의 판단 때문이다. 그리고 네게는 지금 그 판단을 없앨 힘이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8.47
달리 말해, 스토아주의는 우리가 기쁨과 슬픔, 욕망, 두려움 등을 느낄 때 두 단계가 아니라 세 단계를 거친다고 주장합니다. 그냥 사건과 반응(reaction)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일어나면 그 사건에 대한 판단이나 견해(opinion)가 생기고, 그다음에 (그 판단이나 견해에 대한) 반응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우리 과제는 판단이나 견해가 생기는 중간 단계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 중간 단계가 종종 비합리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이성을 끈기 있게 사용해 비합리성을 통제해야 합니다.
이 장은 우선 알아차리기부터 다룹니다. 이후 장들에서 비합리성을 다루며, 그것을 통제하는 법을 조언합니다. 중간 단계를 알아차리는 일부터 출발하는 이유는 그것이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스토아철학
이 말하는 나머지는 대부분 이를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모든 것의 출발점은 세상에 대한 우리 경험이 우리 신념과 견해, 사고를 통해 만들어진다는 생각입니다. 한마디로, 판단을 통해 경험이 구성된다는 것이지요.
스토아철학을 공부하는 많은 사람은 처음에는 이 말이 직관에 어긋난다고 느끼지만, 차츰 납득하게 되고 결국 당연한 말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마음이 우리에게 이와 어긋나는 인상을 끊임없이 전달하는 데다, 그런 인상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 일에 대한 우리 반응은 대개 중간 단계 없이 직접적이고 저절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요. 조금이라도 판단과 관련이 있거나, 우리가 그 상황에서 다르게 판단할 만한 가능성이 있다고 보이지 않습니다.
스토아주의는 이 모든 것을 착각으로 여깁니다. 이런 착각을 없애기 어려운 이유는, 마음은 우리 반응의 근원에 대해 믿을 만한 해설을 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우리가 마음 그 자체가 아니라, 저 밖에 있는 외적인 것들에 반응하고 있다고 우리에게 말하지요. 마음은 자신의 역할을 더욱 정확하게 보고 묘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스토아철학은 우리가 우리 생각에 대해 더 잘 생각하도록, 우리 마음이 마음을 이해하도록, 물고기가 물을 더욱 의식하도록 돕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직접 가해진 공격에 반응할 때 가장 이해하기 쉽습니다. 누군가 당신을 모욕한다고 가정해보세요. 그 모욕은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떠나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당신이 불쾌하다고 느낀다면, 그건 분명 당신이 그 모욕에 신경을 쓰기 때문일 겁니다. 그게 곧 판단입니다. 대신에 당신은 신경 쓰지 않겠다고 결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 모욕은 당신에게 더 이상 모욕이 아닐 겁니다. 우리를 짜증스럽게 하는 모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란한 이웃, 나쁜 날씨, 교통 체증. 이런 일 때문에 화가 난다면, 이에 대해 당신이 내리는 판단 때문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나쁘다는, 중요하다는, 화를 낼 만하다는 판단이지요. 사물과 사건은 이런 생각을 당신에게 들이밀지 않습니다. 당신만이 들이밀 수 있습니다. 더 큰 좌절도, 욕망과 두려움을 비롯한 온갖 정신적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늘 우리가 세상의 이런저런 일에 반응한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자기 내면의 일에 반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끔은 세상을 바꾸려 애쓰는 것보다 나 스스로를 바꾸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합리적일 때가 있습니다.
신체적 고통이나 쾌락을 느낄 때는 우리 마음이 우리 반응을 만들어내는 것을 알아차리기가 더 힘듭니다. 고통과 쾌락은 우리 생각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 불변의 사실처럼 보이니까요. 그러나 그때조차 스토아철학은 그런 감각을 우리가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따라 우리 경험이 달라진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고통은 고통입니다. 우리가 그에 대해 무엇이라 생각하든 여전히 존재하는 감각입니다. 하지만 그 고통이 우리를 얼마나 괴롭힐지, 우리가 그것에 얼마나 많이 관심을 쏟을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인지는 모두 우리 판단이고 우리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고통과 쾌락은 그에 대해 우리가 스스로에게 어떻게 말하는지에 따라, 또는 아주 깊은 곳에서 이루어져 명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 자신의 것인 판단에 따라, 더 커지기도 하고 더 작아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판단을 거의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 힘을 과소평가합니다. 스토아주의자들은 이런 판단을 알아차리지요.
'판단'을 모두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것으로만 본다면, 우리 반응이 우리 판단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무척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판단은 많은 형태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거미가 위험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려도 여전히 거미를 무서워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두려움이 우리가 거미에 대해 갖는 견해와는 상관없다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서로 상충하는 판단들을 한다는 뜻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거미는 안전하다는 판단과 안전하지 않다는 판단이지요. 두 번째 판단을 틀린 것으로 결정한 뒤에도 그것을 뿌리 뽑기까지 시간이 걸립니다.
달리 말해, 우리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에 불과한 판단은 고치기 쉽습니다. 그러나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깊숙이 뿌리박힌 판단들이 있습니다. 스토아철학은 우리가 세상과 만날 때 내면에서 끄집어내는 모든 것을 '판단'에 포함시킵니다. 이를테면 식욕도 판단에 들어가지요. 식욕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어떤 요리가 맛있게도 맛없게도 보입니다. 평생에 걸쳐 우리가 접하는 교육과 환경도 비슷한 효과를 냅니다. 이런 판단은 바꾸기가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스토아철학을 실천하기란 어렵고, 누구도 이 일에 완벽할 수 없습니다. 어떤 반응은 우리 것이면서도, 딱히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일 수 있습니다. 또는 이론적으로는 우리에게 달려 있지만, 그것을 변화시킬 심리적 힘이 우리에게 없을 수도 있지요.
요즘의 우리였다면 아마 판단이 가질 수 있는 온갖 형태를 의식적 견해나 무의식적 태도, 조건화된 반응, 화학적 기질, 유전적 성향 등으로 구분했을 테지만 스토아철학은 이런 형태를 구분하지 않았고, 그중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변화시키기 쉬운지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신체에 기반한 몇몇 반응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고 말하긴 했습니다. (9장 '피할 수 없는 감정'). 세네카는 우리가 갖고 태어난 기질적 특성은 바꿀 수 없다고 인정합니다(10장 '예측'). 그러나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일상적 반응은 대체로 연습을 통해 통제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이런 생각을 완벽하게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누구든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이 끔찍이 좋아하는 것과 끔찍이 싫어하는 것을 생각해보세요. 생각을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해도 그 취향을 뒤집는 일은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스토아철학은 우리의 취향이 무엇인지 신경 쓰지 않으며, 우리의 혐오와 욕망을 뒤집으라고 요구하지
도 않습니다. 다만 그것들로부터 초연해지기를 요구하지요.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훨씬 더 실현 가능한 일입니다. 아무튼 우리 판단을 의식하고, 할 수 있는 한 통제하는 것이 스토아철학의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우리 능력에 한계가 있을 수 있음을 우리는 이제 고대인들보다 더 잘 이해합니다.
정신질환을 겪는 사람이 에픽테토스를 한 번 읽었다고 해서 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스토아철학은 이런 한계를 인정한다 해도, 생각을 바꿈으로써 경험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고 말할 것입니다. 스토아철학이 우리에게 알아차리라고, 다시 생각해보라고 권고하는 판단은 대체로 그 뿌리가 그다지 깊지 않습니다. 그저 습관과 관습일 뿐이지요.
스토아철학은 이런 주장이 무조건 받아들여지리라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논증으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가끔은 앞에서 언급한 ‘모욕’처럼 쉬운 예를 들기도 합니다. 모욕은 우리가 호들갑을 떨 일이라고 결정할 때만 그런 일이 된다는 것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지요. 그러나 더욱 불가피한 반응처럼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비교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다양한 상황과 시대, 장소에서 사람들이 같은 사건에 다르게 반응한 사례를 살펴보는 방법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두려워하는(그리고 두려워하지 않기를 상상할 수 없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기꺼이 목숨을 걸 만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일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엄연한 사실로 보이는 고통이나 슬픔이 다른 상황과 문화에서는 다르게 경험되기도 합니다. 분명 우리 반응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어쨌든 그것은 우리 행동이며, 우리 판단에 달려 있고, 따라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지요.
외적인 것
스토아철학은 많은 부분 외적인 것에 대한 공부라 할 수 있습니다. 외적인 것은 무엇이고, 우리는 그것들을 어떻게 잘못 판단하는지, 어떻게 그것들에 노예처럼 예속되곤 하는지를 탐구합니다. ‘외적인 것’이란 우리 자신 바깥, 또는 능력 너머에 있는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외적인 것 자체에 대한 스토아철학의 두 가지 가르침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스토아철학의 주요 목표는 외적인 것을 집착 없이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우리가 에너지를 쏟으며 호들갑을 떠는 결정과 일들에 영향을 미칩니다. 스토아철학이 일상의 문제를 다룰 때 두드러진 특징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일을 걱정하거나, 그 일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부나 타인의 칭찬 같은 외적인 것을 얻거나 피하는 일에 자신의 행복이 좌우되게 놔두지 않는 태도를 뜻하기도 합니다.
단서를 하나 달자면, 방금 언급한 부나 타인의 칭찬을 비롯한 그 외 외적인 것들과 관련해 누구나 ‘선호하는 것’이 있을 겁니다. 스토아주의자는 재산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을 좋아할 테고, 고난을 겪지 않는 것을 선호할 겁니다. 그러나 선호와 집착은 구분해야 합니다. 선호와 집착의 차이는 그것들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어떤 느낌인지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무척 원했는데 얻지 못했지만, 그 결과에 지나치게 속상해하지 않는 상황을 상상해보세요. 이것은 (단순한) 선호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선호하는 것을 갖게 되면 즐겁고 갖지 못하면 실망스럽지만, 그 때문에 평정심을 잃지는 않습니다.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던 일이 일어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엎질러진 물일 뿐이고, 스토아주의자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모든 일을 대체로 그렇게 보려고 합니다. 집착은 당신의 행복을 대상에 의존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당신은 집착에 이리저리 휘둘리지요.
외적인 것에 대한 스토아철학의 두 번째 가르침은, 우리가 그것을 정확하게 보는 게 어렵다는 점입니다. 외적인 것이 우리를 기만하거나, 아니면 그것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를 기만합니다. 스토아철학은 이런 기만을 꿰뚫어볼 방법을 제안합니다. 겉보기에 황홀하거나 무시무시해 보이는 외적인 것을 있는 그대로 보거나,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도록 부분으로 쪼개어 보기도 하지요. 스토아주의자들은 사물뿐 아니라 사람도 이렇게 보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나 명성을 가지고 있어서(또는 나쁜 평판이 따라붙었거나 부유하지 못해서) 우리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기도 하지요. 스토아학파는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합니다.
앞선 1장의 가르침은 이번 2장과 연결할 수 있습니다. 1장은 우리에게 달린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번 장은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1장에서는 우리가 어떤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해 우리가 내린 판단에 영향을 받는다는 주장을 소개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경험을 통제할 힘이 생각보다 더 많이 있는 것이지요. 2장에서 다루는 것은 1장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고 상상하지만 실제로는 통제할 수 없는 외적인 것에 집착하며, 자신을 습관적으로 기만합니다. 이는 우리를 불행하고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습관입니다. 그래서 1장과 2장은 사실상 상황을 반전시킬 것을 제안합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은 일에 에너지를 낭비하면서, 실상 자신에게 달린 일은 거의 의식하지 못합니다. 스토아철학은 이런 상황을 뒤집고 우리 무게중심을 더 유용한 장소에 두려고 합니다.
타인의 생각
이 장에서는 다른 사람의 생각, 곧 타인의 인정과 비난에 대한 스토아학파의 관점을 살펴봅니다. 인정은 우리가 가까운 사람들에게 받는 칭찬일 수도 있고, 많은 사람에게 얻는 인기일 수도 있습니다. 비난이란 험담이나 오명일 수 있겠지요.
이것들은 사회생활과 관련이 있으며, 사회적 지위와 다른 사람들의 좋은 평판을 바라는 욕망입니다. 많은 사람은 돈이나 쾌락을 좇는 것만큼 이것들을 열심히 좇으며 잃지 않기 위해 열심히 노력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스토아철학의 첫 번째 규칙은 순응(conformity)을 경멸하고, 다수의 의견에 개의치 않으며, 무엇을 바라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생각할 때 다른 사람들을 살피는 습관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문제의 뿌리는 깊습니다. 많은 사람의 말과 생각, 행동의 대부분은 관습의 산물입니다. 관습의 힘은 저항하기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면 호감을 살 수 있기 때문이지요. 여기에서 이탈하면 기대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실행하기를 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응징이 즉각 떨어집니다. 하지만 진실을 알고, 진실에 따라 행동하며, 그에 따르는 결과를 우아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은 스토아철학의 큰 부분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스토아주의자들은 칭찬받고 싶은 욕구가 좁게는 순응, 넓게는 모든 인간 행동의 주요 원인 중 하나라고 봅니다. 스토아철학은 이 욕구를 길들이려고 합니다. 우선, 그다지 존경할 만 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생각하는지에 우리가 신경 쓰는 이유를 묻습니다. 그다음, 대중의 판단을 불신하고, 대중의 마음을 끄는 사람과 사물에 의혹을 품으라고 제안합니다. 대중의 의견 대신 스토아학파는 자신의 의견을 더 존중하고, 사물이나 사건의 가치를 평가할 때 남들의 생각보다 그것들의 실제 모습에 주목하려 합니다.
이 장에서 다룰 주제의 이면에는 비난과 모욕이 있습니다. 물론 스토아주의자들은 이런 것들에 무관심해지길 권유합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것들이니까요. 하지만 이런 공격에 대해 생각하고 반응하는 구체적 방법도 제안합니다. 한 가지 방법은 다른 사람들의 경멸을(또는 다른 사람들 자체를) 경멸하거나, 옳은 일을 했을 때 받는 경멸을 환영하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두려워하는 태도보다 낫습니다. 왜냐하면 일단 그런 식으로 두려워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으니까요.
또 다른 종류의 반응은 겸손과 용서와 관련됩니다. 스토아주의자들은 어떤 비난이든 아마 자신들의 진짜 잘못에 비하면 가벼우리라 생각하며, 모욕을 대체로 유쾌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조롱하는 일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으므로 그에 다른 사람들의 조롱까지 더해져도 개의치 않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비난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난받아 마땅하다면, 비난을 받아들이고 달라져야 합니다(또는 비판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우리가 부당하게 비난받는다면, 비난하는 자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니 그들을 연민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들은 좋은 의도로 비난했거나, 적어도 그들의 좁은 시야에서는 올바르고 최선이라 여겨지는 바를 말했으니까요. 어쨌든 우리나 그들이나 머지않아 사라질 사람들입니다.
순응, 또는 사회적 관습
스토아 철학자들은 우리 행동과 어리석음의 많은 부분이 사회적 기대에 대한 순응에서 생긴다고 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흉내 내고, 합리적으로는 추천할 이유가 없는 삶의 방식을 따라 합니다. 스토아철학의 관점에서 관습은 단지 무의미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오류의 보고이자 잘못된 판단의 동력이며, 우리가 저항하는 법을 배워야할 압력의 원천입니다.
세네카의 말을 들어봅시다.
우리가 겪는 많은 문제는 우리가 정해진 방식대로 살며, 이성에 따라 우리 삶을 계획하는 대신 관습에 미혹된다는 사실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네카, 『서한집』 123.6
대부분 여행길에서는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으려면 길을 좀 알아보고 현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됩니다. 하지만 이 여행에서는 가장 많이 다니는 길이 가장 기만적인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무엇보다 양처럼 자기 앞을 가는 양 떼를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가야할 곳이 아니라, 그들이 가야할 곳을 향하고 있으니까요.
세네카, 『행복론』 1.2~3
모두에게 좋거나 나쁘다고 생각되는 그 무엇도 현자는 남들이 보는 것과 동일하게 보지 않는다는 점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는 다른 사람들이 부끄럽고 불쾌하다 여기는 것에 개의치 않습니다. 그는 무리와 함께 걷지 않습니다. 행성이 하늘의 소용돌이를 거슬러 길을 가듯 현자는 세상의 의견을 거슬러 나아가지요.
세네카, 현자의 일관성에 대하여 14.3-4
가치 판단
이 장은 우리 자신을 제물로 삼는 잘못된 판단을 다룹니다. 현재를 과소평가하기, 시간을 과소평가하기, 그 밖의 무형의 것들을 과소평가하기, 우리 자신을 과대평가하기, 우리 결함을 타인에게 투사함으로써 그들을 잘못 평가하기 등이 그런 것들입니다. 서로 나란히 놓고 다룰 수밖에 없는 문제들이지요.
이 장에 다루는 문제는 일종의 가치 판단 오류입니다. 스토아철학의 몇몇 가르침은 다른 전통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그중에서 두드러진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합니다. 그중 하나는 현재를 살아가기입니다. 스토아학파는 과거와 미래에 대한 집착을 고치려 합니다. 기억과 소망, 두려움에 시간을 쏟아붓는 것을 대체로 낭비라고 생각합니다(앞으로 보겠지만, 물론 항상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들은 우리가 시간 자체의 가치를 깨닫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시간을 아무렇지 않게 쓰며, 돈을 낭비할 때보다 더 거리낌 없이 시간을 낭비합니다. 따지고 보면 시간이 더 중요한데도 말입니다. 시간에 대한 스토아학파의 생각은 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비용과 이득을 바라보는 더 일반적인 관점과 비슷합니다. 이 장은 이런 관점에 대해서도 다룹니다. 우리는 돈을 과대평가하고 시간을 과소평가합니다. 마찬가지로 물질적 재화와 타인의 인정을 과대평가하는 반면, 그것들을 포기함으로써 우리가 얻는 이득은 과소평가합니다. 스토아학파는 많은 것을 이렇게 바라봅니다. 무언가 나쁜 일이 생길 때는 조용한 보상이 따라올 때가 많습니다. 이에 반해, 우리를 신나게 했던 기회는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었음을 깨닫게 되곤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결과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결과를 파악하고 나면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을 깨닫는 일은 나쁜 상황에서든 좋은 상황에서든 스토아주의자가 침착함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가치 판단의 오류는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도 일어납니다. 자신의 잘못은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잘못은 쉽게 눈에 띄지요. 이를 알고 나면 용서할 힘이 생깁니다. 당신을 짜증스럽게 하는 다른 사람의 행동도 아마 당신이 언젠가 했던 행동보다 더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알아차리기 쉽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비난하는 타인들의 특성은, 바로 우리가 끔찍이 싫어하지만 스스로는 볼 수 없는 우리 안의 것들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다른 이들에게 투사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스토아주의자는 자신을 알기 위해 애쓰며 자신의 약점을 털어놓길 주저하지 않습니다.
투사
자기애가 지나치면 타인의 험담과 결함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스토아학파는 특히 이런 태도의 한 가지 특징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바로, 나에게도 있는 바람직하지 않은 결함에 대해 타인을 비난하는 경향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비슷한 잘못을 성찰하지 못하고 타인을 비난하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는 비난하는 사람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할 수 있거나, 다른 면에서 나쁘거나, 더 나쁜 일을 저지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누군가의 잘못에 불쾌감을 느낄 때마다 곧 자신을 돌아보며 가장 비슷한 결점을 찾아보라. 이를테면, 돈이나 쾌락이나 명성 등에 대한 집착 같은 것을. 이런 결점을 찾으면 곧 화를 잊게 될 것이다. 그 사람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행동했으리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 사람이 달리 어떻게 할 수 있었겠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10.30
얼마나 자주 자신이 부당하게 의심받았는지, 얼마나 많은 자신의 선행이 우연히 악행으로 오해받았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한때 미워했다가 사랑하게 됐는지 기억한다면, 누구든 성급한 분노를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기분 나쁜 일이 일어날 때마다 우선 스스로에게 조용히 "나도 이런 죄를 저질렀던 적이 있다”라고 말한다면 말입니다. 어디에서 그렇게 공정한 판관을 찾겠습니까?
세네카, 『화에 대하여』2.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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