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마다 ‘중산층’을 정의하는 기준이 다르다. 미국의 공립학교에서는 중산층을 “자신의 주장에 떳떳하고, 사회적인 약자를 도우며, 부정과 불법에 저항하는 사람. 그리고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비평지가 있는 계층”이라고 가르친다.
프랑스는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이 제시했던 ‘삶의 질’ 공약에서, “외국어를 하나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하고,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있으며,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고, 남들과는 다른 맛을 낼 수 있는 요리를 만들 줄 아는 사람, 그리고 사회적 공분에 의연히 참여하고 약자를 도우며 봉사활동을 꾸준히 할 것”을 그 기준으로 내걸었다.
우리는 어떤가? 직장인 대상 한 설문조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답변이 나왔다. “부채 없이 30평 이상의 아파트 소유, 월 급여 500만 원 이상, 2000cc급 이상의 중형차 소유, 통장 예금 잔고 1억 원 이상, 1년에 1회 이상 해외여행.” 물론 공식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슬프게도 우리에게는 상당히 익숙한 얘기다.
핵심은 저기는 정신적인 가치를, 우리는 숫자를 내세운다는 것이 아니다. ‘성공’이나 ‘행복’이라고 했을 때 그 기준이 자기 안에 있지 않고 모두 내 밖에 있다는 사실이 문제다. 내가 얻어내도 행복하지 않을 기준을 억지로 내면화하려다 보니, 자신과 맞지 않는 옷을 오랫동안 입고 있는 모습이다.
에피쿠로스가 활동하던 시대도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처럼 그리스 도시국가 내외로 큰 변화가 있던 혼란기였다. 제1~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해 아테네의 국력이 쇠퇴하고, 알렉산드로스가 이끌던 마케도니아가 전 세계를 휩쓸던 때였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융성하던 안정과 평화의 시대는 지나고, 헬레니즘이 문화 코드로 자리하던 시대에 개인은 각자도생과 자존을 배워야 했다. 사회적 혼란과 불안감으로 더 이상 이전의 철학적 기반과 사상이 도움을 주지 못할 때 탄생한 철학이었다.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게 해줄 만한 실존주의적인 철학이 필요했다.
에피쿠로스는 바로 이런 시대에, 그런 사유가 가능한 철학을 했다. 그는 등장 후 500년간 지중해에서 가장 주목받았지만, 동시에 가장 멸시받은 철학자이기도 했다. 그만큼 파격이었고, 그만큼 새로운 사유의 길을 열어주었다. 혁명의 철학자 마르크스도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를 박사 학위 논문 제목으로 정하고, 그의 철학 안에 담긴 역동성을 깊이 받아들였다.
서양의 노자, 에피쿠로스를 통해 배우는 평정심을 키워 행복에 이르는 길
“진정한 행복은 방탕과 욕망 충족이 아니라 모든 정신적·육체적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에 있다!”
에피쿠로스의 사상을 두 단어로 요약하자면 ‘아타락시아’(마음이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평정한 상태)와 ‘아포니아’(몸 고통의 부재)이다. 이렇듯 마음의 평정 상태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쾌락’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삶을 누리기 위해 야심과 경쟁으로 마음의 평정을 해칠 수 있는 삶을 멀리하고, 모든 고통과 두려움에서 벗어났을 때 얻어지는 최고의 쾌락을 인생의 유일한 본성적인 목적으로 삼아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살고자 했다. 또한, 최고의 쾌락 상태인 ‘아타락시아’를 누리는 데는 현세의 삶만으로 충분하므로 내세나 영생을 바랄 필요가 없고, 실제로 인간 영혼과 육체는 모두 물질적인 것이므로 결국은 해체되어 죽음을 맞이하고, 내세나 영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주는 원자와 허공으로 이루어져 있고, 천체들과 신들과 인간 영혼을 비롯한 만물은 원자로부터 생성된다고 보았다. 오직 원자만이 영원히 변하지 않고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물질이므로, 모든 것은 원자에 의해 생성되었다가 다시 원자로 돌아간다. 에피쿠로스가 원자론적인 우주관과 세계관, 자연학에 대한 방대한 집필을 한 것도 그러한 지식이 우리를 두려움과 불안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특히 여전히 신화 속에서 신과 연결되어 살아가던 시대에 과감히 신으로부터 독립해 나에게 주어진 것에 자족하며 살아가는 삶을 강조했던 그의 사상을 음미하다 보면, 현대의 마음챙김, 미니멀리즘, 소확행을 낳은 ‘쾌락주의’의 시원(始原)을 만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의 방대한 사상 체계는 ‘쾌락주의’ 하나로 정리되지만, 뻗은 가지를 따라가 보면 자연주의 철학과 과학적 사고법의 시조로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 저자 에피쿠로스
에피쿠로스(Epicurus, 기원전 341~270)는 기원전 341년에 에게해 근방에 위치한 사모스 섬에서 태어나 18살에 아테네로 오기 전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문법학교 교사 네오클레스로 아테네 시민이었다. 14세 때 철학을 접했는데, 문법학교 교사들이 기원전 8세기 그리스 시인 헤시오도스의 글에 나오는 ‘카오스’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철학에 입문, 데모크리토스의 책들을 읽으며 철학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18살 되던 해 아테네로 온 에피쿠로스는 상당 기간 자신의 철학을 정립하고 나서, 아나톨리아의 람프사코스에서 학교를 열었다. 32살에는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거기에 있는 “정원”(κ?πο?, ‘케포스’)에서 철학 토론을 하며 오랜 세월 자신의 독자적인 사상을 전파했다. 에피쿠로스 철학은 처음부터 인기가 대단했다. 그리스 본토를 넘어 지중해 세계 전체로 급속도로 퍼져 나갔고, 로마의 정치가이자 대중연설가 키케로(기원전 106-43년)는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이 폭풍처럼 로마를 집어삼켰다”라고 한탄했다.
주요 사상인 ‘쾌락주의’를 통해 진정한 행복은 방탕과 욕망 충족이 아니라 모든 정신적·육체적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에 있음을 강조하여 자연주의 철학과 마음돌봄 조류의 선구자가 되었고, 관찰과 추론에 대한 확고한 주장으로 과학적 사고법의 시조로 인정받는다. 그는 이후 500년 동안 지중해에서 가장 존경받으면서도 동시에 가장 경멸받는 철학자였다. 에피쿠로스학파는 600년 정도 지속했고, 그가 죽은 후에도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거의 그대로 보존되었으며, 현대의 자연철학과 평등주의, 미니멀리즘 사상에도 정신적 배경이 되어주는 등 그 영향력은 여전히 견고하다.
에피쿠로스는 방광에 돌이 생겨 14일 동안 앓았으며 72세(기원전 270년)에 죽었다. 그의 학교는 고대 그리스 철학 학파들 중에서 공식적으로 여성을 받아들인 최초의 학교였다. 학교 정문에는 “나그네여, 이곳에서 우리의 최고선은 쾌락입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 역자 박문재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와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독일 보쿰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또한, 고전어 연구기관인 비블리카 아카데미아Biblica Academia에서 오랫동안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익히고,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 원전들을 공부했다. 대학 시절에는 역사와 철학을 두루 공부했으며, 전문 번역가로 30년 이상 인문학과 신학 도서를 번역해왔다.
역서로는 『자유론』(존 스튜어트 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막스 베버), 『실낙원』(존 밀턴) 등이 있고, 라틴어 원전을 번역한 책으로 『고백록』(아우구스티누스), 『철학의 위안』(보에티우스), 『유토피아』(토머스 모어) 등이 있다. 그리스어 원전에서 옮긴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과 『소크라테스의 변명·크리톤·파이돈·향연』,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이솝우화 전집』 등은 매끄러운 번역으로 독자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 차례
01. 에피쿠로스의 생애
02. 헤로도토스에게 보낸 서신
03. 피토클레스에게 보낸 서신
04. 현자론
05.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낸 서신
06. 주요 가르침들
07. 에피쿠로스 어록
08. 에피쿠로스 저작들의 단편
해제 | 박문재
에피쿠로스 연보
‘아타락시아’와 ‘아포니아’를 인간의 최고선으로 여긴 에피쿠로스, 마음과 몸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 평생 평정심을 누리며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길이라고 강조한 그의 사상과 만나보세요.
에피쿠로스 쾌락
에피쿠로스의 생애
네오클레스와 카이레스트라타의 아들 에피쿠로스는 아테네의 가르케투스 구역 필라이다이 가문 출신이다. 헤라클레이데스는 ‘소티온 요약집’에서 아테네인들이 사모스를 식민지로 개척했는데, 에피쿠로스는 그곳에서 자랐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다고 한다.
에피쿠로스는 18살 때 아테네로 왔는데, 당시에는 크세노크라테스가 아카데메이아를 담당하고 있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칼키스에 가 있었다. 에피쿠로스는 콜로폰에서 한동안 머물며 제자들을 모으다 아낙시크레테스가 아르콘으로 있던 때에 다시 아테네로 돌아왔다. 다른 철학자들과 함께 활동했지만, 얼마 후에는 자기 이름을 딴 학교를 세우고 자신의 독자적인 사상을 전파했다.
에피쿠로스에게 적대적이었던 스토아학파 철학자 디오티모스는 50통의 음란한 서신을 에피쿠로스가 썼다고 조작해 그를 가장 신랄하게 비방했고, 어떤 자는 크라시포스가 쓴 것으로 보이는 서신들을 모아 에피쿠로스가 썼다고 나열하기도 했다.
그들은 에피쿠로스가 ‘인생의 목적에서 “맛을 통한 쾌락을 제거하고, 성애를 통한 쾌락을 제거하고, 들리는 것과 아름다운 형태를 통한 쾌락을 제거한다면, 나는 선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겠다”라고 썼다고 말한다. 에픽테토스는 에피쿠로스를 음탕한 말을 늘어놓는 자라고 부르며 맹렬히 비난했다.
하지만 에피쿠로스를 비난한 자들은 미친 자들이다. 모든 사람을 배려하고 공손하게 대하는 것에서 에피쿠로스는 누구보다도 뛰어났다는 것을 증언해줄 사람이 차고 넘치고, 그의 조국은 그의 동상을 세워 그를 기렸으며, 친구들은 모든 도시에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그의 제자들은 모두 황홀할 정도로 매혹적인 그의 교리를 끝까지 고수했기 때문이다.
또한, 에피쿠로스는 부모에 대한 감사, 형제들에 대한 친절, 집안 노예에 대한 배려심이 두드러졌다. 특히 집안 노예에 대한 배려심은 그의 유언에서, 그리고 집안 노예들이 그와 함께 철학을 했다는 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에피쿠로스에게는 모든 사람에 대한 인간애가 있었다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많은 책을 쓴 작가였다. 그가 쓴 책들의 권수는 두루마리로 300개 이상이었으므로 양적으로도 모든 사람을 능가했다. 그의 책들에는 다른 사람의 글을 인용한 것이 하나도 없었고, 자신이 한 말만 들어 있다.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느낌이 쾌락과 고통, 이렇게 두 가지라고 말한다. 느낌은 모든 살아 있는 것에서 생기는데, 본성에 고유한 것은 쾌락을 낳고, 본성에 이질적인 것은 고통을 낳는다. 쾌락과 고통에 근거해 선택과 회피가 결정된다. 탐구하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은 실재와 관련되고, 어떤 것은 단지 말과 관련된다. 이것이 철학의 구분과 진리의 기준에 관한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의 기본 입장이다.
헤로도토스에게 보낸 서신
에피쿠로스가 헤로도토스에게 문안 인사를 전한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들의 원인을 정확히 알아내는 것이 자연학의 과제이고, 행복은 천체 현상을 알고 거기에 비추어 천체의 본질을 알며, 이것을 정확하게 아는 데 필요한 그 밖의 다른 것을 아는 데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천체 현상들과 관련해 원인이 여러 가지일 수도 있고 다르게 일어날 수도 있지만, 의심이나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본성적인 불멸이나 완전한 축복에 절대로 포함될 수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 지성은 이것이 절대적으로 사실임을 안다.
그러나 천체의 뜨고 짐, 일식과 월식, 그 유사한 현상 같은 개별적이고 세부적 탐구에 몰두하는 일은 지식이 가져다주는 행복과 관련해 어떤 가치도 없다. 도리어 어떤 사람이 모든 세부적인 것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천체의 본질이 무엇이고, 천체 현상을 주관하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이 현상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만큼이나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아니, 사실 그 사람이 느끼는 두려움이 더 클 수도 있다. 천체 현상들을 알고서 깜짝 놀랐는데도 그 천체 현상이 무엇이 주관하는지 몰라서 그 놀람을 해소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북회귀선과 남회귀선, 천체들이 뜨고 지는 것, 일식과 월식, 그 유사한 현상이 일어나는 여러 원인을 발견했는데도, 이 지식으로 우리가 평정심과 행복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은 이 현상을 충분히 정확하게 탐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천체 현상들의 원인과 감각으로는 인지할 수 없는 모든 것의 원인을 발견할 때, 우리는 그 유사한 현상이 주변에서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멀리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오직 한 가지 방법으로만 존재하거나 생성되는지 아니면 여러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인지에 무지하고, 게다가 평점심이 어떤 상황에나 가능하고 어떤 상황에서 불가능한지를 알지 못하는 자들을 무시해야 한다.
어떤 현상이 여러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음을 알고, 그 여러 방식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어서 그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그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평정심을 찾을 수 있다.
마음에서 가장 큰 혼란과 괴로움이 생기는 이유는 사람들이 합리적인 사고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어떤 비이성적인 사고 속에서 천체들이 축복받은 불멸의 존재라고 믿으면서도, 그런 천체들이 불멸의 존재에 어울리지 않게 반대되는 의지와 행위와 동기를 지니고 있다고 믿고, 신화 또는 죽어서 감각이 없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 천체들이 영원한 재앙을 줄 것을 예상하거나 상상하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그런 예상이나 상상에서 생기는 두려움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이런 천체 현상에 대해 막연한 생각을 가진 사람과 동일하거나 더 큰 혼란과 괴로움을 겪는다. 반면 평정심이 있으면 보편적이고 가장 중요한 원리들을 확고하게 기억함으로써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는 인류 보편적인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내적 느낌과 외적 감각을 비롯해 참인지 거짓인지를 판단하는 각각의 분명한 기준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을 주목한다면, 우리는 정신과 마음에 혼란과 괴로움과 두려움을 일으키는 것이 어디서 오는지를 제대로 추적할 수 있고, 천체 현상을 비롯해 종종 인류 전체에 극심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그 밖의 모든 현상의 원인을 밝혀내 사람들을 그런 혼란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피토클레스에게 보낸 서신
에피쿠로스가 피토클레스에게 문안 인사를 전한다.
천체 현상을 다룰 때 우리는 설명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갖다 붙여 어떤 현상을 설명하려고 해서는 안 되고, 인간의 삶에 관한 여러 이론이나 그 밖의 다른 자연 현상과 관련된 문제를 설명하는 데 사용한 것과 같은 탐구방식을 써서도 안 된다.
자연학을 탐구할 때는 근거 없는 전제들과 미리 정해놓은 법칙들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현상들이 소리치는 것을 따라야 한다. 우리는 소란 없는 삶을 살아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인간의 삶에 비이성적인 것과 근거 없는 생각을 비워내야 하기 때문이다.
천체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명해줄 단서들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들 속에 있다. 천체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우리는 볼 수 없지만,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은 볼 수 있다. 천체 현상은 여러 원인으로 생긴다. 하지만 우리는 각각의 천체 현상이 우리 감각에 제시한 것을 고수하면서도 이렇게 인지된 것과 부합되는 모든 설명 중에서 우리가 경험한 것으로 반증되지 않는 여러 설명을 찾아내야 한다.
해와 달과 그 밖의 다른 별들이 뜨고 지는 것은 불이 켜지는 것과 불이 꺼지는 것에 따르는데, 이 천체들이 뜨는 곳과 지는 곳에서는 이 각각의 결과를 일으키는 환경이 조성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현상들에서는 이것을 반증하는 아무것도 없다. 또는 이 천체들이 뜨고 지는 것은 지구 위로 나타났다가, 다시 지구가 앞에서 그 천체들을 가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우리가 아는 현상들에서는 이것을 반증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달이 기울었다가 다시 차는 것은 달이 회전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대기 환경 때문일 수도 있으며, 다른 천체가 달을 가리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달의 빛은 달 자신에게서 생긴 것일 수도 있고, 해로부터 온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사는 지구에서도 어떤 것의 빛은 자신에게서 생겼고, 어떤 것의 빛은 다른 것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월식과 일식이 일어나는 것은 해와 달의 불이 꺼지기 때문일 수도 있고 지구 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다른 천체가 해나 달의 앞을 가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 잘 들어맞는 여러 설명 방식을 함께 고려해야 하고, 여러 원인이 동시에 작용하는 일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고려해야 한다.
어떤 별들이 뜨거나 지지 않고 제자리에서 회전하는 것은 누군가가 말했듯 우주의 그 부분은 정지해 있고, 나머지 부분들이 그 주위를 회전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공기의 회오리바람이 그 부분을 에워싸고 있어 그 별들이 다른 별들처럼 뜨거나 지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별들이 뜨고 지는 데 필요한 연료가 그 별들이 머물러 있는 그곳에만 있고, 주변에는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밖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다른 여러 원인이 있을 수 있고, 현상과 일치하게 추론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원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피토클레스여, 너는 이 모든 것을 기억해두라. 그렇게 해야만 많은 경우에 신화에서 벗어나, 여기서 말한 것과 비슷한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현자론
사람들로부터 받는 해악은 미움, 시기, 경멸에 따라 생기는 데, 현자는 이성적으로 극복한다. 사람이 일단 현자가 되면 그는 더 이상 지혜와 반대되는 성향을 지니고 있지도 않고, 스스로 그런 성향을 자기 속에서 만들어내지도 않는다. 그는 느낌들에 더 민감해지지만, 그것은 그의 지혜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
오직 현자만이 자기 옆에 친구들이 있든 없든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말과 행위로 자신의 그런 마음을 나타낸다. 또한 현자는 사람들 앞에서 탁월한 말솜씨를 발휘하지 않는다.
현자는 재산과 미래를 계획하고, 조국을 사랑하며, 재산상의 이득 앞에서 결코 친구를 버리지 않는다. 현자는 자기가 멸시당하지 않기 위해 평판에 신경 쓰지만, 딱 그 정도로만 그렇게 한다. 현자는 남의 동상을 세우지만, 자신의 동상이 세워지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낸 서신
에피쿠로스가 메노이케우스에게 문안 인사를 고한다.
내가 네게 끊임없이 말해온 것을 잘 살게 하는 기본적인 요소들로 받아들여 행하고 실천하라.
현자는 삶에서 도피하려고 하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삶을 걸림돌로 여기지 않고, 죽음을 재앙으로 여기지도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음식을 고를 때 오로지 양이 많은 것이 아니라, 더 맛있고 즐거움을 주는 것을 고르듯, 현자는 가장 긴 시간을 누리려는 게 아니라, 가장 즐거운 삶을 누리려고 한다.
우리 욕망들 중 어떤 것은 본성적이고 어떤 것은 공허하며, 본성적인 욕망들 중에서 어떤 것은 필수적이고 어떤 것은 그저 본성적일 뿐이며, 필수적인 욕망들 중에서 어떤 것은 행복을 위해 필수적이고 어떤 것은 몸의 평정을 위해 필수적이며, 어떤 것은 생존을 위해 필수적임을 알아야 한다.
이런 것을 관찰해 확실하게 알아두면, 행복한 삶의 목표인 몸의 건강과 평정심을 얻기 위한 모든 선택과 회피를 제대로 할 수 있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고통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이것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만 하면, 마음에 휘몰아치던 폭풍우는 사라진다.
쾌락의 부재로 고통이 존재하면 우리는 쾌락을 필요로 하지만, 고통이 존재하지 않을 때는 더 이상 쾌락을 필요로 하지 않는 까닭에, 살아 있는 존재가 마치 어떤 것이 자기에게 결핍되어 있듯 헤맬 필요도 없고, 마음과 몸의 좋은 것을 충족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다른 어떤 것을 찾아다닐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쾌락을 행복한 삶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쾌락을 가장 으뜸가는 선이자 선천적으로 주어진 선으로 인식하고, 모든 선택과 회피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모든 선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느낌을 사용할 때는 결국 쾌락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쾌락이 우리의 목표이자 목적이라고 말할 때, 이는 우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우리 생각에 동의하지 않거나 악의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이 떠올리는 것과는 달리 방탕한 자들이 추구하는 쾌락이나 어떤 것을 즐길 때 생기는 쾌락을 의미하지 않고, ‘몸에 고통이 없고 마음에 괴로움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쾌락의 삶을 만드는 것은 끊임없이 술 마시고 흥청거리는 것도 아니고, 동성애나 이성애를 통해 애욕을 채우는 것도 아니며, 사치스러운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생선 요리 같은 것을 즐기는 것도 아니고, 오직 맑은 정신으로 이상적으로 추론하여 모든 선택과 회피를 위한 근거들을 찾아내고, 마음에 가장 큰 소동과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잘못된 생각들을 몰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이자 가장 큰 선은 사려 깊음이다. 그런 까닭에 사려 깊음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소중하다.
주요 가르침들과 에피쿠로스 어록
“어떤 쾌락도 그 자체로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어떤 쾌락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쾌락보다 훨씬 더 많은 괴로움을 가져온다.”
“사람들로부터의 안전은 그러한 공격을 막아주는 어떤 힘이나 부로서 어느 정도 얻을 수 있지만, 가장 온전한 형태의 안전은 많은 사람에게서 물러나 고요히 사는 것으로 얻는다.”
“현자의 생애 전 기간에 걸쳐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일들은 이성이 주도해왔고 주도하고 있으며 주도하게 될 것이다.”
“사려 깊고 아름다우며 정의로운 삶 없이는 쾌락의 삶도 없고, 쾌락의 삶 없이는 사려 깊고 아름다우며 정의로운 삶도 없다. 예컨대, 아름답고 정의로운 삶이지만 사려 깊지 않다면, 세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라도 없는 삶은 쾌락의 삶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준비하느라 일생을 바친다. 우리는 태어날 때 죽음의 약을 마셨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삶을 포기하기 위한 그럴듯한 변명을 많이 가진 사람은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다.”
“충분한 것을 적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것도 충분하지 않다.”
“가장 큰 부를 소유하거나, 대중으로부터 명예를 얻고 존경을 받거나, 그 밖의 다른 끝없는 욕망과 관련된 무수히 많은 원인에 따라 생기는 어떤 것으로도 마음의 소란은 제거되지 않고 진정한 기쁨을 얻을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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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