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위안
 
지은이 : 보에티우스(역:박문재)
출판사 : 현대지성
출판일 : 2018년 06월




  • 고대 로마 제국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던 보에티우스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먼 곳으로 유배 보내져 감옥에서 처형당할 날을 기다리는 동안,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과 위안을 전합니다.


    철학의 위안


    보에티우스와 철학의 여신

    보에티우스와 철학의 여신

    [보에티우스가 자신이 유배되어 감옥에 있게 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시를 읊고 있을 때, “여인”으로 표상된 영적인 존재가 찾아오고, 그 여인은 자신의 옷과 용모를 통해 자기가 누구인지를 그에게 암시해 주지만, 그는 이 여인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다. 한편, 시의 여신들이 보에티우스에게 먼저 와서 비가들로 그를 달래 주고 있었는데, 이 여인은 그들을 엄하게 질책한 후에 그의 곁에서 쫒아내 버린다.]


    변덕스러운 운명의 여신이 미소를 짓고 내게 다가와

    거짓된 행복의 삶을 주었을 때부터

    슬픔과 비탄의 시간은 이미 내게 준비되어 있었도다.

    이제 암운이 찾아와

    행복의 탈을 벗겨놓으니

    나의 삶에는 고달프고 지친 나날들만이

    끝없이 기다리고 있구나.


    이렇게 적막 속에서 지난날을 곰곰이 생각하며 눈물겨운 탄식을 철필로 긁적이고 있을 때, 내 머리맡에 한 여인이 서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 여인의 용모는 위엄이 가득했고, 두 눈은 불꽃처럼 빛나서 인간의 능력을 초월해서 무엇이든 꿰뚫어볼 수 있는 투시력을 지녔으며, 얼굴은 생기가 넘쳐흘렀고,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오랜 세월을 살아 온 것 같았는데도 그 힘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어떤 때에는 보통 사람만큼 작아졌다가도 순식간에 하늘에 닿을 정도로 커졌고, 머리를 들었을 때에는 하늘조차도 뚫고 올라갔기 때문에, 이 여인의 신장을 가늠하고자 한 사람들은 종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시의 여신들이 나의 침상 옆에서 내게 탄식의 말들만을 넣어주고 있는 모습을 보고서는 잠시 흥분해서 사나운 눈빛으로 불타올라 쏘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미혹시켜서 얼빠지게 만드는 이 여자들을 누가 이 병든 사람에게 가까이 오게 하였느냐. 이 여자들은 슬픔과 비탄에 잠긴 사람들을 치료해서 고통을 덜어주고 힘을 주기는커녕, 겉으로는 달콤하지만 실제로는 독이 든 사탕을 주어 슬픔과 비탄을 도리어 더 키워주는 자들이 아니던가. 이 여자들은 감정이라는 열매 맺지 못하는 가시들을 사용해서 이성을 질식시켜서 이성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어 거두는 것을 가로막아서, 사람들의 정신을 질병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람들의 정신에 만성적인 질병을 심어 주는 자들이다. 너희가 철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속물들을 유혹해서 끌고 간다면, 나는 그들을 위해 수고한 것이 없어서 나의 수고가 헛된 것이 되는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 너희가 그들을 어떻게 하든 내가 굳이 참견할 일이 아니지만, 엘레아학파와 플라톤학파의 철학 지식으로 갈고 닦은 이 사람을 그런 식으로 유혹하려고 찾아온 것은 도리가 아니지 않느냐. 사람을 멸망으로 유혹하는 세이렌들아, 이 사람은 내게 맡기고 너희는 썩 물러가라! 내가 이 사람을 돌보고 치유하리라.”


    철학의 여신을 알아보다

    [보에티우스는 마침내 철학을 알아보고 기운을 차리게 된다. 철학은 과거에 다른 철학자들에게 그랬듯이 이번에도 보에티우스의 곁을 지키며 그를 돌보고 치료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나는 근심의 구름이 내게서 흩어져서 비로소 다시 숨을 제대로 쉴 수 있게 되자, 나를 치유해 준 여인의 얼굴을 제대로 보려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나는 그 여인이 나를 어릴 때부터 시작해서 오랜 세월 동안 키워 주었던 나의 보모 “철학”이라는 것을 알았고, 즉시 이렇게 물었다.


    “모든 미덕을 주관하는 분이신 당신이 무슨 이유로 하늘 위로부터 강림하여 내가 유배 와서 쓸쓸히 있는 이곳까지 왕림하신 것입니까.”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떻게 내가 어릴 때부터 키워 온 너를 버릴 수 있겠느냐. 사람들이 내 이름에 앙심을 품고서 내가 키운 너에게 지운 무거운 짐을 어떻게 내가 함께 짊어지지 않겠느냐. 분명한 것은 철학은 죄 없는 자가 홀로 외롭게 길을 가도록 결코 내버려 둔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무고와 중상모략이 마치 새삼스러운 일이라는 듯이 두려워 떨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지혜가 후안무치한 사람들에 의해 위협과 위해를 당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우리는 이 세상이라는 바다 속에서 온갖 풍파를 겪는다고 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사악한 자들과 대립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숙명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악한 자들의 무리는 그 수가 아무리 많을지라도 무시해 버리는 것이 좋다. 그들은 철학의 참된 지도원리를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각자가 이런저런 오류에 사로잡혀서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도처에서 중구난방으로 소동을 벌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 무리가 자신들의 세력을 결집하여 더욱더 강한 힘으로 우리를 압박한다면, 우리의 지도자도 자신의 군대를 자신의 성채 안으로 불러들일 것이기 때문에, 무수히 많은 그들이 아무리 광분하여 날뛴다고 하여도, 우리는 어리석은 폭도들이 감히 무너뜨릴 수 없는 성채 안에서 안전하게 보호를 받으며 성벽 위에 올라가서, 그들이 너무나 쓸데없고 무가치한 것들을 약탈하느라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며 그들을 비웃게 될 것이다.”



    운명의 여신과 참된 행복

    운명의 여신의 속성

    [보에티우스의 병은 그가 이전에 운명의 여신이 그에게 준 부귀영화를 지금 잃어버리고서 비통해하고 억울해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는 지극히 변덕스러운 것이 운명의 여신의 속성임을 기억했어야 했다고 따끔하게 일침을 놓고서, 그가 그토록 변덕스러운 여신을 향해서 불평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는 것을 지적한다.]


    “너는 네가 이전에 누렸던 것을 행복이라고 여기고서 거기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너의 과거를 그리워하며, 운명의 여신이 너를 완전히 버렸다고 생각하여 슬퍼하는 일에 네 모든 힘을 소진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네가 운명의 여신이 지금까지 해온 행태를 잘 모르고서, 네 스스로 착각에 빠져 평안을 잃어버리고 심란해하는 것일 뿐이다. 나는 그녀가 자신의 천만 가지 얼굴을 사용해서 사람들을 어떤 식으로 속이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갖고 놀고자 하는 사람들을 고른 후에는, 먼저 아주 친근하게 다가와서 온갖 선물 보따리를 풀어놓고 혹하게 만들어놓고 나서는, 그들이 거기에 젖어 안심하고 지내면서 자신들의 몰락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때, 갑자기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떠나버림으로써, 인간으로서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을 그들에게 안겨 준다.


    네가 운명의 여신이 어떤 존재이고 어떤 식으로 행하며 과연 사람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너는 그녀가 네게 찾아 왔을 때에도 진정으로 귀하고 소중한 것을 결코 얻은 적이 없었고, 그녀가 네게서 떠나갔을 때에도 그런 것을 결코 잃은 적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녀가 너의 곁으로 와서 온갖 좋은 것들을 선물하고 온갖 좋은 말들로 네게 아양을 떨었을 때, 이미 너는 나를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내게서 배웠던 가르침들을 제시하며 의연하고 당당하게 그녀의 그런 행태를 강하게 질책하곤 했기 때문이다.


    운명의 여신은 그런 존재라는 것을 감안해서, 그래도 그런 그녀가 좋다면, 너는 그녀의 행동방식을 불평하지 말고 잘 이용하는 법을 찾으면 되고, 그녀의 변덕이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끔찍하게 느껴진다면, 그녀가 네게 다가와 온갖 것으로 유혹할 때, 그것이 너를 파멸시키기 위한 것임을 직시하고 그녀의 제안을 멸시하고 그녀를 내쫓아 버리면 된다.”


    참된 행복

    [철학은 참된 행복은 운명의 여신이 좌지우지하는 물질적인 것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데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물질을 기반으로 한 행복은 죽음으로 끝나지만, 정신은 육신이 죽은 후에도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덧붙인다.]


    “진리를 소중히 여기는 이시여, 내가 정말 어린 나이에 출세가도를 내달렸고 부귀영화를 누렸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나의 그러한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더 큰 고통이라는 것을 당신은 모르십니까. 운명의 여신이 가져다주는 모든 불행 중에서 가장 큰 불행은 이전에 자기가 행복했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네가 그것을 고통으로 여기고 거기에서 가장 큰 고통을 느끼는 것은 순전히 너의 오해와 착각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네가 지금 그런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해서, 네게 지난날 주어졌던 지극히 큰 행복을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이 가장 바라는 것은 생명을 보존하는 것인데, 생명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너의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은 너의 복이고, 네가 얼마나 행복한 자인지를 보여주는 것임을 너는 알아야 한다.


    자신의 삶이 너무나 완벽하게 행복해서 자신의 처지와 형편에 추호의 불만도 없는 그런 사람이 어떻게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겠느냐. 운명의 여신이 자신에게 전해 준 운명에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아직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지 못하고, 겪어 본 사람은 몸서리를 치는 사연이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다. 게다가, 모든 일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어서 늘 행운만을 누리며 행복에 젖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은 역경에 전혀 단련되지 않아 다치기가 아주 쉬워서 아주 작은 일에 쓰러지는 법이다.


    오, 언젠가는 죽게 될 인생들아, 행복은 너희 안에 있는데, 어찌하여 밖에서 찾는 것이냐. 내가 너희에게 이 땅에서의 최고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간단하게 말해 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너희 자신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너희는 그런 것은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따라서 네가 네 자신을 다스리는 자가 된다면, 너는 결코 잃어버리지 않을 것, 즉 운명의 여신이라도 결코 네게서 빼앗아갈 수 없는 것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참된 행복과 최고선

    참된 행복의 정의

    [철학은 이제 모든 사람이 열망하는 참된 행복을 정의해서, 참된 행복은 모든 선을 그 자신 속에 담고 있는 완전함이라고 말하고, 사람들이 부나 높은 관직이나 정치 권력이나 명성이나 육신적인 쾌락 속에서 자신들의 선을 추구할 때, 그러한 선의 추구는 자연의 법칙에 부합하는 것임을 지적한다.]


    “사람들은 이런저런 많은 것들을 이루기 위해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추구하고 애쓰지만, 인간의 그러한 모든 노력들은 궁극적으로는 오직 하나의 동일한 목적, 즉 행동이라는 목적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도일 뿐이다. 행복이라는 것은 사람이 일단 그것을 얻게 되면 더 이상 다른 것들을 원하지 않게 되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모든 선하고 좋은 것들 중에서 최고의 것이어서, 그 자신 속에 모든 선하고 좋은 것들을 다 담고 있다.


    이제 네 눈 앞에는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모두 진열되어 있는데, 부, 명예, 권력, 영광, 쾌락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너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 상태가 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존경받아 마땅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냐. 결코 그렇지 않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얻으려고 애쓰는 것이 악하고 멸시받을 만한 것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권력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냐. 뛰어난 최고선이 힘도 없는 나약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냐. 명성도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냐. 하지만 가장 탁월하고 뛰어난 것들이 가장 유명한 것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한, 사람들은 아주 작은 것들을 갖거나 향유할 때에도 거기에서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행복은 걱정이나 괴로움도 없고 고통이나 화나는 것도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분명히 그런 것들은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 것들이고, 그들이 부와 높은 관직과 권세와 영광과 쾌락을 원하는 것은 그런 것들을 통해서 만족과 존경과 명성과 기쁨을 얻게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그토록 천차만별의 시도와 노력을 통해서 추구하는 것은 ‘선’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본성의 힘이 얼마나 크고 강력한지를 금방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생각과 추구는 천차만별이지만, 그들이 모두 ‘선’을 사랑하고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최고선의 존재

    [불완전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불완전한 선들의 존재는 완전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완전한 선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저 완전한 선은 신 안에 있고 신과 동일하다. 행복은 최고선이기 때문에, 신과 행복도 하나이고 동일하며 서로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사람들이 완전한 행복에 도달하게 되면, 신의 신성에 참여하게 된다. 사람들이 만족과 권력과 존경과 명성과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신이라는 최고선을 열망하는 것이다.]


    “모든 선의 원천인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불완전한 선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완전한 선에서 어떤 것이 부족해서 불완전하다고 여겨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으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은 어떤 종류의 사물에서 불완전한 것이 존재한다면, 그 동일한 종류의 사물에는 완전한 것도 존재해야 한다. 완전한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사물이 불완전하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만물은 처음부터 미완의 불완전한 것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온전히 완성된 것에서 시작해서 점점 그 힘이 다하여 소멸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멸되어 없어지게 될 불완전한 선한 것들 속에 불완전한 행복이 존재한다면, 영원하고 완전한 행복도 존재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너는 만물의 아버지인 신이 자신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저 최고선을 외부로부터 받았다거나 본성적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신이 소유한 행복의 실체와 행복을 소유한 신의 실체가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으로서, 전자의 경우에는 우리가 신이 만물 중에서 가장 낫고 우월하다고 고백하면서도, 외부로부터 선을 받은 신보다 외부에서 신에게 선을 준 어떤 존재가 더 낫고 우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모순이 생기고, 후자의 경우에는 선이 본성적으로 신 안에 내재하지만 서로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어서, 누가 이 서로 다른 것을 결합시켜 놓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본성상 최고선과 다른 것은 그 자체가 최고선일 수 없는데, 만물 중에서 가장 낫고 우월한 신에 대해서 최고선일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 자체가 불경이다.


    모든 것을 추구하는 원인이 선이라면,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선이라고 해야 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건강을 위해 말을 탄다면,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말 타는 것이 아니라 건강이라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들이 선을 얻기 위해서라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그들이 추구하는 그 모든 것이 아니라 선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그 모든 것을 원하는 이유가 행복을 얻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오직 행복이다. 이것은 선과 행복의 실체가 하나이고 동일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신의 섭리와 자유의지

    섭리와 자유의지에 대한 서론-우연

    [보에티우스는 우연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지, 있다면 그런 우연은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에 대해 가르쳐 줄 것을 요청한다. 철학은, 우연이라는 것은 섭리에 의해 주도되고 운명에 의해 실행되는 여러 요인들의 예기치 않는 결합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정의와 예시로 대답한다.]


    “당신은 우연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지, 만일 존재한다면 어떤 것이 우연인지를 알고 싶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학>에서 간략하지만 거의 진리에 가까운 말로 이미 그것을 잘 설명해 놓았다. 그는 어떤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일을 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원래 의도했던 것과는 다른 일이 일어났을 때에 그것을 우연이라고 정의하고서, 그런 예로 어떤 사람이 밭을 갈기 위해 땅을 팠는데, 땅속에 묻혀 있는 금덩이를 발견한 경우를 들었다. 그런 경우에 사람들은 이를 우연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일이 무에서 생겨난 것은 아니다. 이 일은 분명히 여러 원인들이 결합되어서 일어난 일이지만, 사람들은 원인들의 그러한 조합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일은 우연이라고 부른 것일 뿐이다. 만일 그 사람이 자신의 밭을 갈기 위해 땅을 파지 않았거나, 금덩이를 거기에 파묻어둔 사람이 그 금덩이를 바로 그곳에 숨겨두지 않았다면, 금덩이가 발견되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것들은 그 사람이 금덩이를 발견하게 된 일의 원인들이고, 이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은 그 사람의 의도 때문이 아니라 이 원인들의 조합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목적을 위해 행해진 일에 여러 가지 원인들이 결합되어서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우연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모든 원인들은 섭리와 거기에 따른 질서에 의해서 서로 만나고 결합된다. 즉, 섭리라는 원천에서 나온 질서가 섭리와의 필연적인 연결 관계 속에서 모든 것을 섭리에 따라 고유한 장소와 시간에 안배할 때, 모든 원인들은 거기에 따라 모이고 흩어져서 서로 일정한 결합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신의 섭리와 자유의지의 관계

    [인간은 시간의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반면에, 신은 영원하다. 따라서 신의 지식은 시간의 세계를 초월한다. 신은 미래의 일들이 필연성에 의거해서 일어나든 그렇지 않든 모든 일을 자신의 눈앞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로 바라본다. 자유의지의 주체가 자유롭게 자신의 결정을 바꾸는 것들도 섭리에 의한 예지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의지의 자유,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행위들에 대한 상벌, 미래의 복들을 구하는 신을 향한 기도는 모두 유효하다.]


    “모든 인식 주체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자신의 본성에 따라 인식하고, 신은 항상 영원하고 현존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신의 지식은 시간의 모든 운동을 뛰어넘어서 신의 단일한 현재 안에서, 미래와 과거의 모든 무한한 시간 전체를 포괄하여, 그 안에서 일어났거나 일어나고 있거나 일어나게 될 모든 일들이 마친 현재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단일한 인식 행위를 통해 아는 지식이다.


    따라서 너는 신이 모든 것을 아는 것을 예지라고 하지만, 사실은 신의 예지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아는 것이 아니라, 결코 지나가지 않는 현재 속에서 모든 것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네가 너의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사물들을 확실하게 보는 것처럼, 신도 자신의 영원한 현재 속에서 만물을 그렇게 확실하게 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의 예지는 사물들의 고유한 본성을 변화시키지 않고, 단지 시간 속에서 미래의 어느 시점에 일어나게 될 일들을 현재적으로 보는 것일 뿐이다.


    너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어떤 일들을 계획하거나 그 계획을 바꾸는 것이 전적으로 나의 능력 안에 있는 것이라면, 신의 섭리가 미리 알고 있는 것들도 얼마든지 내 마음대로 바꾸어 버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섭리를 무력화시킬 수도 있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대한 나의 대답은 너는 네가 이미 세워 둔 계획을 너의 뜻대로 이리저리 바꿀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신의 섭리라는 진리는 네가 그렇게 계획을 바꿀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네가 어떤 구체적인 일에서 그런 식으로 계획들을 바꿀 것인지, 바꾼다면 어느 방향으로 바꿀 것인지를 모두 다 현재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네가 신의 예지를 바꾸거나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네가 너의 자유의지로 어떤 일에 대한 계획을 이리저리 바꾸어서 행한다고 할지라도, 언제나 네가 하는 그 일을 현재적으로 보고 있는 너의 눈을 속이거나 피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같다.


    모든 것을 자신의 현재 안에서 한 번에 즉자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신의 예지의 본성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신의 예지가 미래에 일어나게 될 모든 일들의 기준이 되기는 하지만, 그 자신은 미래에 일어나게 될 그 어떤 일들로부터도 제한이나 영향을 받지 않고, 신의 예지도 모든 것들의 본성 자체를 제한하거나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의지의 자유가 신의 예지에 의해 훼손됨이 없이 고스란히 존재한다. 따라서 모든 필연성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인간의 의지에 상이나 벌을 부과하는 법은 부당하지 않다. 신은 모든 것을 미리 아는 관찰자에 늘 머물러 있기 때문에, 신이 영원 안에서 모든 것을 현재적으로 보고 있는 것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자유의지로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 선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상을 받을 수도 있고 악인들에게 주어지는 형벌을 받을 수도 있는 가능성은 서로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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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