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5월 3주차 |
BOOK SUMMARY | ||
가구, 집을 갖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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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지수 출판 싱긋 출간 202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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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의문에서 출발한 리빙 인문학의 세계! | ||
도서요약 보기가구, 집을 갖추다 리빙 이케아는 가구 브랜드가 아니다 이케아의 창업주 캄프라드는 1943년 시계, 스타킹 등을 파는 1인 우편 판매 업체로 장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1948년 판매 품목에 가구를 추가함으로써 명실공히 가구 중심의 스토어를 시작했다. 그가 가구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유럽 가구 시장의 변화에서 어떤 통찰을 얻었기 때문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새로운 수요에 대한 예측이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가구를 대대로 물려받아 쓰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였다. 그래서 값비싼 원목에 앤티크 장식이 수놓아진, 화려하다 못해 고리타분한 스타일의 가구가 변함없이 대를 이어 집안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전후 20세기 중엽부터 가파른 속도로 발전하는 도시화로 인하여 제3세계 노동자와 유학생들이 밀려들자 값싸고 이동이 용이한 가구에 대한 수요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그가 착상한 방식이 바로 플랫팩(Flat-Pack) 형태다. 쉽게 말해서 소비자가 직접 조립하도록 완제품이 아닌 부품들을 납작한 상자에 포장해놓은 것이다. 이렇게 하면 재고 보관 비용이 대폭 낮아지니 소비자 가격 역시 저렴하게 책정할 수 있다. 게다가 소비자가 매장에서 직접 자기 차에 실어나르니 배송비 또한 절감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가격 경쟁력의 우위를 가지면서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물론 저렴한 조립식 가구의 이미지를 탈피하고자 세련되고 심플한 북유럽 디자인을 반영한 트렌디한 제품으로 젊은층의 감성까지 훔쳤다. 물론 단점도 만만치 않다. 이케아 제품을 조립해본 사람이라면 대부분 공감할 텐데, 이게 손쉽지가 않다. 혼자서 조립하기에 벅차기도 하고 매뉴얼대로 차근차근 진행한다 해도 한 시간 이내에 끝나지 않는 것들도 허다하다. 특히 국내의 경우는 서구처럼 일반 가정에 픽업 차량이 있거나 직접 조립하는 DIY 문화가 보편적으로 자리잡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난제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단점은 고난 끝에 완성된 서랍장, 옷장, 화장대 등 제법 크기가 크고 무게가 나가는 가구들의 내구성이 형편없다는 점이다. 제품 전체 무게를 경량화하기 위하여 주로 쓰인 소재가 합판이기 때문에 두꺼운 MDF와 원목으로 완성된 가구와 비교하면 쉽게 흔들리고 만듦새의 볼품도 떨어진다. 아무리 세련된 디자인으로 치장해도 싼게 비지떡이라는 옛말이 틀린 것이 아닌 셈이다. 그럼에도 이케아가 글로벌 공룡이 된 이유가 무엇일까? 아무리 내구성이 떨어져도 어차피 몇 년 뒤에 더 좋은 가구로 바꿀 테니 그나마 외양상 깔끔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디자인에 의지해서 참고 살아보자?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색다른 주장을 하고 싶다. 이케아는 가구 스토어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가 아니다. 플랫팩 방식의 가구가 돋보여서 이케아를 주로 가구 브랜드로 많이 이야기하지만 공식적으로는 홈 퍼니싱스(Home Furnishings) 스토어가 이케아의 정체성이다. 국내에서는 아직도 홈퍼니싱스라는 단어가 매우 낯설다. 이 용어는 집을 꾸미기 위하여 필요한 가구와 인테리어 용품은 물론 여타 다양한 리빙 제품들을 총망라한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비슷한 의미로는 홈데코, 홈리빙 인테리어 등의 단어가 있다. 못 믿겠다면 이케아 매장에 직접 가보면 된다. 국내 이케아 광명점에만 가봐도 홈퍼니싱스가 큼지막하게 한 벽면을 장식한다. 이케아 매출에서 가구의 비중은 40%대라고 한다. 이는 국내외 모두 비슷하다. 나머지 60%는 인테리어 소품과 기타 품목이 차지한다. 가구도 세분화하면 의자, 침대, 소파 등은 거의 완제품에 가깝고, 조립이 어려운 가구들은 대부분이 수납과 관련된 제품들이다. 따라서 복잡한 조립에서 비롯되는 난관은 총매출에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국내에는 조립 및 배송 대행 서비스 업체도 우후죽순 생겨났다. 이들 업체가 제시하는 비용이 이케아에서 제시하는 비용보다 싸다. 참 재미있는 세상이다. 살아남을 놈은 어떡해도 살아난다. 앤티크와 빈티지, 레트로, 클래식은 이렇게 다르다 빈티지(Vintage)는 라틴어로 와인을 뜻하는 ‘Vinum’과 수확을 뜻하는 ‘Demere’의 합성어에서 유래됐는데, 와인의 생산 연도를 나타낸다. 같은 브랜드의 와인이라도 당해 연도의 작황 상황에 따라 맛과 품질이 다르기 때문에 생산 연도를 표기하는데, 이를 ‘00년산 빈티지’라고 부른다. 하지만 패션, 리빙 등의 라이프스타일 분야에서는 대략적으로 30~60년 전에 나온 상품이나 오브제를 가리킨다. 낡고 오래되어서 오히려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구분되는 셈이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미드 센추리 모던 시대인 20세기 중반의 가구, 소품 등을 그렇게 부른다. 따라서 빈티지 트렌드에 발맞춰 재생산된 ‘빈티지 스타일’의 상품들을 뚝 잘라서 빈티지 제품이라고 부르면 곤란하다. 앤티크(Antique)는 대략 80년 이상 된 오브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빈티지보다 형님인 셈이다. 20세기 초반, 서구 근대 끄트머리의 생활양식에 쓰였던 모든 물품까지 허용된다. 쉽게 생각해서 예전에 골동품이라 불렀던, 화려하고 요란한 장식과 구부러진 다리를 가진 앤티크 가구들을 연상하면 된다. 레트로(Retro)는 레트로스펙트(Retrospect)의 약어로 복고나 회상, 추억을 의미한다. 빈티지, 앤티크처럼 특정 시기의 제품을 말하는 물리적 개념이 아니라 당시의 스타일을 복원하거나 재현하는 행위나 성향을 말한다. 패션 분야의 히피룩, 탑골패션 등을 포괄하는 레트로룩이 대표적인데, 리빙 분야에서는 빈티지 스타일과 거의 유사하게 쓰기도 한다. 예를 들어, 미드 센추리 모던 스타일의 레트로 가구 또는 빈티지 가구라는 용어가 혼용된다. 클래식(Classic)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히고 높게 평가되어 시대를 초월하는 명작으로 간주되는 문학이나 예술 작품을 의미한다. 지금은 대중 소비재와 라이프스타일의 다양한 제품들 가운데 오랫동안 최고의 사랑과 인정을 받은 것들도 클래식이라고 하는데, ‘코카콜라 클래식’을 예로 들 수 있다. 참고로 앤티크 가구를 쓰던 17~19세기 시절의 음악을 클래식이라 부른다고 해서 앤티크와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그렇다면 왜 빈티지, 레트로 같은 트렌드가 생겨난 것일까? 첫째는 옛날 소비재들이 희소가치를 획득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20~30년대에 지금의 PC처럼 흔했던 코로나(Corona) 타자기는 현재 수집가들의 표적이 되어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LP 음반은 어떠한가? 1970~90년대 초중반에 음악을 즐겨 듣던 사람들에게는 라디오, 카세트테이프와 더불어 매우 흔하고 친근한 물건이다. 그러다 CD에 밀리고 MP3의 등장과 함께 영원히 사라질 것 같았지만, 다시금 부활했다. 물론 과거만큼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빈티지 또는 뉴트로의 영예를 획득했다. 결국 빈티지의 덕목인 희소성은 인간의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공급의 상대적 빈곤에서 나온 것이다. 두번째 요인은 날것에 관한 미학적 정서가 있기 때문이다. 트렌드와 유행은 그 시대의 정서와 문화를 먹고 사는 생물이다. 그래서 영속적이지 않고 변화무쌍하다. 상업적인 리빙 공간에 있어서 노출콘크리트와 에폭시 바닥으로 정의되는 빈티지 스타일은 대략 2005년 전후부터 서서히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모든 스타일 유행의 출발점인 강남 도산대로 주변과 강북 홍대 주변의 트렌드를 주도하는 카페들이 이런 스타일의 인테리어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일부 프랜차이즈 떡볶이 분식집과 고깃집까지도 노출콘크리트 인테리어를 갖춘다. 그만큼 대중화되었다. 노출콘크리트가 멋스럽다고 인식하게 만든 드라마가 있었는데, 바로 2007년 방영된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이다. 국내 주택의 경우, 벽면을 벽지로 마감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지금도 대다수가 그렇게 한다. 그런데 극중 주인공의 리빙 공간은 벽이 죄다 노출콘크리트로 이루어졌다. 자유분방한 한량 기질이 다분하고 세련된 문화를 향유하는 주인공의 캐릭터와 결합되니 시크한 힙스터의 집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인테리어 요소로 돋보인 것이다. 사물 화장대가 허영의 테이블로 불리게 된 까닭 화장대는 영어로 드레스 콘솔(Dress Console)이라 불린다. 얼핏 생각하면 코스메틱 테이블 또는 메이크업 콘솔로 쓸 것 같은데 드레스라니? 의아하다. 여성들이 자주 입는 드레스? 맞다. 그 드레스. 이 단어는 ‘준비하다’, ‘정리하다’의 의미를 지닌 프랑스 고어 Drecier에서 나왔다. 외모를 단장하기 위해서 화장품을 바르거나 머리를 매만지는 행위인 화장은 물론, 액세서리와 의상으로 단장하는 것을 드레스 업(Dress Up)이라고도 부른다. 화장대에서 얼굴을 매만지고 거울을 보며 옷의 핏과 액세서리와의 조화도 살피는 것을 생각하면 왜 드레싱 테이블(Dressing Table)로 불렸는지 이해가 된다. 그런데 허영의 테이블(Vanity Table)이라는 다소 치욕적인 이름도 얻었다. 드레스 업이 자기 분수에 넘치고 실속 없는, 필요 이상의 겉치레란 말인가? 화장대는 거울이 발명된 이후 본격적으로 발전한다. 14세기에 유리가 발명되고 거울은 16세기가 되어서야 일반화되었다. 그때부터 등받이 없는 의자인 스툴과 작은 서랍을 갖춘 테이블에 거울까지 장착된,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의 화장대가 보급된다. 하지만 개인의 미를 위한 화장에 대한 욕구와 문화는 14세기 말 르네상스 시대의 서막과 더불어 비로소 시작된다. 르네상스의 기치인 ‘신보다 인간’, 즉 인간 중심 문화는 사람다움에 관한 모든 관심사를 깨치게 했다. 스스로를 아름답게 꾸미는 일도 그중 하나였다. 그리하여 인간이 바라보는 미를 기준으로 한 세련된 예술, 건축, 생활양식이 르네상스 진원지 이탈리아에서 출발하여 영국과 프랑스 등에 전해진다. 화장법 역시 그 안에 포함되었다. 화장으로 미를 완성하고자 하는 욕구는 화려하고 세련된 각종 색조 화장술을 등장시켰고, 동시에 화장을 위한 자신만의 공간까지 만들어냈다. 17세기 귀족과 상류층 여성들이 그 주역이었다. 이때부터 화장은 여성 고유의 문화이자 여성성이 되었으며, 화장대 역시 자신만의 이름을 가지게 된다. 17세기에는 로보이(Lowboy) 화장대가 등장한다.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형태인데, 일반 탁자 높이에 적당한 크기의 테이블이 놓였고 하단에 작은 서랍들이 몇 개 달려 있다. 거울만 얹으면 흔히 앤티크 스타일이라 부르는 화장대와 흡사하다. 로보이라고 부른 이유는 톨보이(Tallboy)라고 불렀던 큰 높이의 옷장, 장식장 등에 비하여 낮았기 때문이다. 18세기 중반에는 토일렛 테이블(Toilet Table)이 등장한다. 직역하면 화장실 탁자인데, 뭔가 이상하다. 이름과 관련해 여러 가지 설들이 있지만 다음 이야기가 유력하다. 유럽에서는 오래전부터 화장실에 화장대를 놓았다. 초기에는 얼굴을 꾸미는 목적보다 주로 위생과 청결을 위한 용도로 썼다가, 얼굴 화장은 물론 온몸을 치장하기 시작하면서 화장대를 침실로 옮기게 된다. 이때의 명칭이 그대로 이어져 토일렛 테이블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토일렛 테이블은 과거 화장대들과 달리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외양을 가졌다. 서랍의 형태, 다리 모양, 전체 모양새 등 구조적 차이보다는 신흥 부르주아계급의 사치스러운 문화와 미적 취향이 잘 투영된 화장 전용 가구라는 점에서 차별성을 가졌다. 19세기와 20세기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영국에서는 공작부인이라는 뜻을 지닌 더치스(Duchess) 화장대가 인기를 끌었다. 웅장하고 디테일이 뛰어났으며 거울 일체형이 많았다. 19세기에 전성기를 누렸던 화장대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그 수요와 공급의 황금기를 맞이한다. 그런데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화장대는 이때부터 허영의 테이블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기 시작한다. 누가 어떤 이유로 언제부터 이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사료는 찾기 어렵다. 다만 추정하자면, 1800년대 말부터 1914년 1차대전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시기를 ‘좋은 시절’을 뜻하는 벨 에포크 시대라 부르는데, 당시 유럽은 20세기로 넘어오면서 급속한 자본주의의 발달과 팽창으로 인하여 예술, 문화의 풍요가 범람하던 시기를 누리게 된다. 자연스럽게 근대 부르주아 여성들을 위한 화장과 패션 관련 사치품들 역시 마구 양산되었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성장은 새로운 시민계급에 속한 신여성들에게 세속적인 욕망을 심어주었을 것이고,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남성 또는 계몽적 인물들이 허영의 테이블이라고 작명하지 않았을까? 조선왕과 대한제국 황제의 가구는 뭐가 다를까? 조선 왕실의 생활공간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화려함보다는 우아함을 강조했으며, 유교국가답게 기품 있는 법도와 예절에 따라 재료와 색상, 장식 문양에 차이를 두었다. 가구들을 살펴보면 삼층장과 이층농은 붉은 색상의 옷을 입었다. 옻칠에 수은 성분의 붉은 가루를 섞어서 칠하는 주칠 기법을 쓴 것이다. 장식의 디테일에는 나전칠기와 화각기법이 사용되었다. 나전칠기는 옻칠한 가구에 광택이 나는 조개껍질을 용, 십장생, 박쥐, 팔보문 등의 다양한 문양으로 만들어 입힌 전통 기술을 말한다. 왕실의 식사는 어땠을까?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듯 수라간과 소주방에서 공들여 만든 산해진미를 침대만한 큰 상에 차려놓은 삼시 세끼였을까? 의외로 소박했다. 일명 수라상이라 불리는 궁중의 밥은 주로 원 형태의 소반에 올려졌다. 소반은 전통 가구로 잘 알려져 있는데, 지역, 생김새, 쓰임새 등에 따라 그 종류가 매우 다양했다. 왕실의 것도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붉은 주칠이 들어간 것은 왕실, 검은색에 가까운 것은 양반, 검거나 아예 색이 없는 것은 일반 백성의 소반이었다. 왕실 가구와 공간 내부의 특징은 대한제국으로 넘어오면서 큰 변화를 보인다. 1897년 현재는 덕수궁으로 불리는 옛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임금에서 황제가 된다. 궁에서 쓰던 가구와 물품들 역시 새롭게 바뀌었다. 임금 시절과 뭐가 달라졌을까? 이름하여 서구 양식을 기반으로 하는 물질적 근대화를 맞이한다. 서구화된 생활문화, 즉 좌식에서 입식으로의 전환이 이뤄졌다. 좌식 가구는 자취를 감추고 입식 가구들이 들어섰다. 대표적인 것이 의자다. 외빈을 접대하는 응접실의 안락의자부터 황제 집무실 책상의 사무용 의자까지 다양한 것들이 출현했다. 그동안 용은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특권적 상징이었기 때문에 각 제후국의 수장인 왕들은 함부로 쓸 수 없었는데, 더이상 제후국의 왕이 아니므로 원 없이 용 문양과 장식을 쓰게 되었다. 대한제국 당시 신위를 봉안하는 신좌 뒤에 설치된 병풍은 각 모서리마다 용이 등장한다. 봉황과 십장생을 벗어난 것이다. 더 많은 황실 가구들을 보고자 한다면 경운궁의 석조전에 가보면 된다. 그곳에는 고종황제가 썼던 화장실의 세면대, 다이닝룸의 식탁은 물론 침실의 침대까지 포함한 서구식 입식 가구가 전시되어 있다. 그래서 서구식 입식 리빙 스타일의 완전체를 국내에서 제일 처음으로 시작한 인물이 고종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서구식 가구인 테이블과 의자는 국내에서 직접 만들었을까? 그렇진 않고 기성제품을 사용했는데, 미국의 메이플(MAPLE)이라는 가구 회사가 주로 납품을 했고 거의 덕수궁의 석조전에서 썼다고 한다. 조지 윌리엄 길모어가 쓴 ‘서울풍물지’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궁궐의 가구들은 대부분 미국과 유럽에서 들어온 것이다. 왕의 처소에는 값비싼 서구풍의 가구들이 갖추어져 있다. 그리고 왕이 주재하는 연회를 열기 위해 궁궐에는 서구풍의 식탁과 주방설비도 갖추어져 있다.” 모조리 서구의 앤티크 가구라서 그랬을까? 조선 왕실의 단아하고 절제적이었던, 심지어 소박했던 좌식 가구들이 대한제국 황실에서 입식으로 거듭나면서 무척 화려해졌다. 앉아서 쓰지 않고 서서 쓰는 형태이다 보니 크기가 커졌고, 책장이나 찻장 역시 의자 높이에 맞게 웅장한 모습으로 높아진 것이다. 공간 로미오와 줄리엣은 테라스에서 만난 것이 아니다 “줄리엣, 창문을 열어주오!”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의 000 장면에서 그 유명한 로미오의 대사이다. 영화 속 장소는 실제로 있는 곳이다. 이탈리아 베로나시의 카펠로 거리 27번지에 위치한 줄리엣의 집이다. 담쟁이 넝쿨, 황갈색 벽돌,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치와 창틀 등 유럽 고택 특유의 아름다운 외관과 영화 속 장면이 연상되는 000을 보기 위해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방문한다고 알려져 있다. 위의 000에 들어갈 단어는? 1. 베란다 2. 발코니 3. 테라스 건축 전문가가 아닌 이상 이 세 가지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정답은 2번 발코니다. 테라스와 베란다, 발코니 세 가지의 공통점은 실내와 실외의 중립적 공간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실외라고 볼 수도 있는데 천장과 측면이 외부로 개방되었기 때문이다. 차양과 울타리를 갖추기도 하지만 이 세 가지는 전적으로 천장과 측면을 폐쇄시키지는 못하는 일종의 부대시설이다. 그렇다면 어떤 점이 다를까? 건축법에 따라 정확한 구분을 하자면, 테라스는 건축물과 접한 하부를 목재, 석재 등의 소재로 꾸민 공간을 말한다. 베란다는 하부 층의 천장이 상부 층의 바닥으로 이루어진 외부 공간을 말한다. 1980~90년대의 양옥식 2층 단독주택을 연상하면 이해가 쉽다. 그런데 이런 구조는 기본적으로 아래층보다 위층의 실내 면적이 작을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해, 5층짜리 건물에 층마다 베란다가 설치된다면 5층의 실내 면적은 1층에 비하여 턱없이 작아질 것이며 건물은 측면에 사선을 친 사다리꼴 형태가 될 것이다. 베란다와 자주 헷갈리는 발코니는 벽으로부터 돌출되어 하중을 스스로 지탱하는 구조물을 말한다. 건축법상 거실을 연장하기 위해 밖으로 돌출시켜 만든 공간으로 규정되며 건축 면적에 포함되지 않는다. 따라서 로미오와 줄리엣이 만난 장소는 발코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다수의 아파트에 있는 것은 베란다일까, 발코니일까? 형태로 봐서는 측면과 천장이 아파트 내부에 귀속된 폐쇄형 베란다로 보이나 법적으로는 발코니로 구분된다. 그렇다면 더더욱 이해하기가 어렵다. 밖으로 돌출되지도 않았으며 집의 내부에 있지 않은가? 초기 아파트에는 발코니의 의미대로 천장이 없고 돌출된 형태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기후상 잦은 호우와 폭설로 인하여 발코니 공간의 쓸모와 위험성에 대한 이슈가 많아지면서 일종의 편법으로 마치 집안 공간처럼 둔갑한 것이 지금까지 관행처럼 이어졌다. 그래도 법적으로는 아파트 면적에 포함되지 않는 발코니로 취급을 받는 공간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만난 발코니는 베란다, 테라스와 더불어 감성적 프리미엄을 갖고 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하늘이 열려 있어 이슬을 맞을 수 있는 곳, 즉 노천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는 젊은 남녀뿐 아니라 대부분의 인간 모두가 선호한다. 물리적으로 갑갑하지 않고 시야가 탁 트인 곳에서 평화롭고 안락한 느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안방 문화는 여기에서 시작되었다는데 안방은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조선시대에도 이미 안방이라는 명칭을 가진 공간이 있었다. 당시 신분제는 양반과 상민으로 이루어진 반상제였는데, 조선시대 가옥 역시 신분과 마찬가지로 서민 가옥인 민가와 양반 가옥인 반가로 나뉘었다. 먼저 양반들의 저택 구조를 살펴보면, 바깥 마님이라 불렸던 집의 가장은 대문에서 가까운 사랑채를 주로 이용했다. 그곳은 일종의 손님맞이용 응접실의 용도로서 대외적인 곳이었다. 대내적으로 가장과 더불어 집의 남성들 모두가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이른바 남자들의 아지트였다. 반면에 안채는 부인의 공간이었다. 그 안채의 중심 공간이 안방이었다. 가장 폐쇄적인 곳이며 주택의 제일 안쪽에 위치했다. 안방마님은 실내 생활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으며 안살림이 이루어지는 본부 같은 곳이었다. 옛말에 시어머니한테서 집안 곳간 열쇠를 이어받는다는 말이 있는데 바로 안채의 광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민 가옥인 민가는 어땠을까? 평민들은 양반에 비하여 대부분 작고 협소한 주거 공간에서 지냈지만 그들 사이에서도 재산의 규모에 따라 집의 크기와 방의 수가 달랐다. 따라서 비록 농가라 할지라도 소박하게나마 안방과 사랑채를 가진 집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들은 양반과 달리 엄격한 유교 문화에 따르기보다는 농사라는 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공간 구성을 우선적으로 생각했기에 남녀유별에 따른 별도의 공간을 엄격하게 지키지는 않았다. 즉 엄격한 규범과 질서보다는 실용주의적 생활에 길들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또한 경제력 역시 풍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양한 공간 분리는 언감생심이고, 간소한 형태임에도 생활과 작업이 동시에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던 것이다. 따라서 민가의 안방은 우리네 1970~80년대 안방의 정서와 비슷하게 가족구성원들이 다 함께 모였던 공동 공간의 역할도 했다. 양반들의 반가에는 서민들의 민가와 같은 안방의 정서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이들은 오히려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출현한 도시 한옥에 거주하면서 그러한 안방의 정서를 느끼게 된다. 그런데 안방은 고질적인 문제가 있었다. 전통적으로 안방이 놓인 위치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이다. 예를 들어, 서울 지방의 전통 한옥은 소위 경기형 민가의 ㄱ자형 평면 구성을 따르는데 부엌, 안방, 대청, 건넌방 이 차례로 배열되는 구조였다. 대청은 남향이고 안방은 ㄱ자로 꺾이는 모퉁이에 위치했다. 따라서 안방은 전후면이 막힌, 채광이 좋지 않은 위치에 놓인 것이다. 196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부엌과 안방의 위치가 서로 바뀌게 되었다. 즉 안방이 남향이라는 좋은 위치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안방은 그제야 비로소 공용공간의 중심이 되었다.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 이층 양옥에 사는 경우에는 버젓한 응접실과 남편의 거실이 별도로 조성되었으나 단층으로 조성된 어지간한 서민 주택의 경우, 마루라고 불리는 곳이 응접실로 사용하기에 비좁은데다가 난방의 문제 때문에 안방이 가족들의 공동 장소로 이용되었다. 이후 안방 문화는 1970년대 말까지 우리 주거 공간의 주연 역할을 지속한다. 1980년대 들어서 양변기가 있는 욕실, 식탁을 곁에 둔 부엌, 소파가 있는 거실을 갖춘 서구형 주택이 정착한다. 고정형 가구가 목적성을 가진 공간들의 정체성을 만들어줌으로써 좌식 문화가 사라진 것이다. 더불어 이때부터 안방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부부 침실이 등장한다. 안방이 가진 공존의 문화는 거실로 이동한다. 1990년대 들어서 아파트 보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각 공간의 기능이 명확하게 지켜졌다. 개인 침실과 가족의 공동 생활 공간이 더욱 명확하게 분리된 것이다. 가족구성원들은 각자 자기 방을 얻게 됨으로써 자기만의 사생활과 사유를 가지게 되었다.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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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윤태 출판 성안당 출간 202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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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사로잡는 말센스의 비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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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장차오(역:하은지 ) 출판 미디어숲 출간 2023.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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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보다 특별한 여섯 번째 감각, 말센스의 비밀과 만나다 | ||
도덕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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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노자 출판 현대지성 출간 201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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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 오브 마케팅(Journal of Marketing)’ 저널에 발표된 이 연구에서 연구팀은 매장을 돌아다니기 전에 무료로 제공된 카페인 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