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지은이 : 주광첸(역:이화진)
출판사 : 쌤앤파커스
출판일 : 2018년 11월




  • 동북아를 대표하는 ‘100대 한중일 고전’ ≪시론時論≫의 저자이자, 오늘날 중국 현대 미학계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미학자 주광첸의 책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가 86년 만에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은 일본의 중국 침략이 노골화되었던 1932년, 주광첸 선생이 청년들을 위해 쓴 열다섯 통의 편지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그는 복잡한 시대 상황에 갇혀 괴로워하는 청년들에게 진심을 담아 인생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바둑의 수는 구경꾼이 더 잘 안다 : 예술과 삶의 차이

    내가 느꼈던 몇 가지 재미난 사실에 혹시 독자 여러분도 공감할지 모르겠다. 예전에 살던 집 뒤편에 라인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작은 시내가 있었다. 저녁이 되면 종종 그곳으로 산책을 나가곤 했다. 그런데 동쪽 연안을 따라 걸을 땐 서쪽 연안의 풍경이 더 아름다워 보이고, 서쪽 연안을 걸을 땐 오히려 동쪽 연안이 더 아름다워 보였다. 그냥 평범하게만 보이던 나무가 시내에 거꾸로 비치자 마치 새로운 세계를 열어놓은 듯 신비롭게 보였다.


    중국 북부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중국 남부에 위치한 호수 시후를 보았을 때, 또 평지에 살던 사람이 처음으로 어메이산을 보았을 때, 비록 미학에 문외한인 촌부라 한들 그 경이로운 풍경에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시후나 어메이산을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그곳 사람에게는 그저 명승지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을 제외하면 시후도 어메이산도 그저 그런 자연 풍경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처음 본 곳이 익숙한 곳보다 참신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밭을 가는 농부는 글을 읽는 서생을 부러워하고, 글을 읽는 서생은 밭을 가는 농부를 부러워한다. 대나무 광주리 옆에 대롱대롱 매달린 표주박 속 탁주와 으리으리한 대궐 같은 저택에서 즐기는 산해진미도 실제로 먹고 마시는 사람보다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이 더 진한 맛을 음미할 수 있다.


    아마 현재와 과거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당시엔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게 여겨졌던 상황들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느새 달콤한 추억들이 되어버리니 말이다. 아마 이러한 경험을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런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일까? 바로 시각과 태도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사물이 지닌 본연의 아름다움을 보고자 한다면 실용적 태도와 시각을 벗어던져야 한다. 아름다움은 현실의 삶과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따라서 사물 본연의 아름다움을 보려면 현실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볼 필요가 있다.


    한편 도덕적 관점에서 예술을 다루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들은 한유의 문이재도를 시작으로 오늘날의 혁명문학, 즉 문학을 선전 도구화하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예술을 실용적 태도로 접근한다. 도덕적 관점에서 예술을 평가하는 사람들은 도덕의 잣대가 현실 속 삶의 규범임을 간과한다. 예술은 현실과 분명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데 말이다. 사실주의는 인생과 자연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 한다. 만약 예술이 인생과 자연을 그대로 담아내기만 한다면, 예술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은 현실 속으로 되돌려버리고 말 것이다. 실물을 그대로 담은 사진을 보면 현실 속에 있는 것처럼 실용적인 태도로 그것을 대하게 된다. 하지만 조각과 그림 같은 예술 작품은 대상을 어느 정도 이상화, 이미지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다소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현실의 일부분이 아닌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예술은 모두 주관적이다. 작가의 생각과 느낌이 가감 없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객관성은 분명히 지녀야 한다. 예술에는 감정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감정만 있다고 모두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에 꼭 필요한 감정은 조잡하고 투박한 것이 아니라 오랜 반성을 거치면서 나온 산물이다. 예술가가 자신의 감정을 글로 옮길 때는 그때의 감정을 극복하고 사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주체할 수 없이 북받치는 감정, 손에 꼽을 수조차 없을 만큼 다양한 경험을 한들 무슨 소용인가? 그것만으로는 결코 예술을 창조할 수 없다.


    그리스 여신 조각상과 생기발랄한 처녀 : 미감과 쾌감

    미감은 ‘직감으로 이미지를 찾아내는 과정’이다. 미감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 눈앞에 보이는 이미지 대상과 실제 인생에 거리를 유지한다. 우리는 독립적으로 절연한 이미지를 감상하는 것일 뿐 그와 다른 사물의 관계가 어떠한지, 또 인간에게 어떠한 효용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검토하지 않았다. 둘째, 이미지를 감상할 때 물아일체의 경지에 달할 때까지 정신력을 집중한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이 사물에 투영되고 이미지화된 사물의 형상이 다시 나 자신에게 유입되기도 했다. 이처럼 적극적인 자유 행위는 감상 또는 창조의 결과물로 나타났으며 결코 타고난 것이 아니었다.


    먼저 ‘쾌락주의 미학’ 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아름다움은 보상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향긋한 술 한 잔을 마시고 “뷰티풀” 이라 외칠 수 있다. 젊고 예쁜 여성을 보고 “아름답다!” 고 외칠 수 있다. 시 한 수, 조각상 한 점을 감상하며 또 “아름답다!”를 외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얼마나 감동적이어야 아름답다고 칭할 수 있는가? 평범한 일반 사람들은 ‘미’ 의 기준은 몰라도 ‘즐거움’이 무엇인지는 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이란 대게 ‘보기 좋다’, ‘기분이 좋아진다’ 는 의미를 지닌다.


    미감과 쾌감은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쾌감은 미감의 깊이를 따라올 수 없다. 하지만 이를 어설프게 구분하다 보면 사실을 벗어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미감은 실용적인 행위와 전혀 관련이 없다. 하지만 쾌감은 ‘만족’ 이 따라야 한다. 목이 마를 때 물이 마시고 싶어진다. 물을 마시면 쾌감을 느낀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싶다. 밥을 먹고 나면 역시 포만감, 쾌감이 생긴다. 이 모든 행위는 ‘목적이 있는 행위’ 로 ‘목적이 없는 행위’, 즉 어떤 이미지 자체를 감상하기 위해 발생한 행위가 아니다.


    생기발랄한 처녀를 바라볼 때 그 생동감으로 미감이 자극될 수도 있고 또 자극되지 않을 수도 있다. 만약 처녀를 보고 마음에 들어 아내로 삼고 싶어진다면 그때 느끼는 처녀의 아름다움은 성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필요조건에 불과하다. 만약 성욕을 느끼지 않고 그 처녀가 갖고 있는 이미지만 보인다면 그것은 조각상이나 그림을 볼 때 느끼는 감정과 같다. 미감이 따르는 행동에는 의지가 깃들어 있지 않다. 따라서 소유욕도 생길 리 없다.


    여기에서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의 이론을 예술에 응용해보기로 하자. 잘 알려진 대로 프로이트는 예술을 ‘성욕의 구현’ 이라고 보았다. 억제된 욕망은 기회가 될 때마다 만족되기를 호시탐탐 노린다. 예술은 꿈과 같아서 가면 속에 욕망을 숨겨두고 이성의 감시를 회피하려 한다. 일반적으로 아들은 어머니를 특별히 사랑하고 딸은 아버지를 특별히 더 사랑한다. 프로이트는 이것도 하나의 성욕 발현으로 보았다. 수많은 예술품들을 전부 이러한 관점으로 본다면 모두 억압된 성욕이 교묘하게 표출된 것이라 말한 수도 있다.


    그런데 나의 원칙에서 보자면 프로이트 역시 쾌감과 미감을 혼동하고 있다. 예술적인 필요와 현실적인 필요를 헷갈리고 있는 것이다. 미적 경험은 직관적이며 따지지 않는다. 예술품에 정신을 집중하다 보면 자신마저 망각하게 된다. 만약 쾌감을 느꼈다면 그것은 직관적 감상이 아니라 무수한 생각이 반복과 성찰을 거듭해 형성된 ‘반성’의 감정이 변질된 것이다.


    예술은 자연을 모방하여 구현되는 것인가? : 사실주의와 이상주의의 착오

    미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연미’는 서로 모순되는 단어다. 일반적으로 자연미라고 말할 때 쓰이는 ‘미’자에는 또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예술미’라고 할 때의 ‘미’ 자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자연은 본래 모두 하나로 섞여 있는 상태로 구분이나 분류가 이루어져 있지 않다. 자연에 대한 구분은 사람의 관점에서 시작되었다. 사람의 관점을 떠나 자연음 진위가 무의미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관점을 떠난 자연은 미추(美醜)가 무의미하다. 자연계에서 유일한 구분이 있다면 정상 상태와 변화된 상태의 구분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자연미는 사물의 정상 상태를 가리킨다.


    자연미의 가장 일반적인 특징은 ‘전체적’이라는 데 있다. 각각의 독립된 형태로 보면 보편적 성향에 속하는 것이 많아도 모아 놓으면 전체적으로 모두 보편적인 성향에 속하는 것은 많지 않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아도 보편적인 상태에 속하면 이를 이상적이라 하고 아름답다고 칭한다. 모든 자연 사물에 대한 미추 개념도 이와 같다. 미인을 아름답다고 할 때 ‘너무’ 어떠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단 ‘너무’ 라는 말이 붙으면 추하다는 뜻이다. 사람과 사물 모두 ‘정상’ 일 때 아름답다고 한다.


    그렇다면 예술의 미추가 갖는 의미도 이와 같을까? 보통 사람들은 자연미와 예술미가 대상과 원인은 달라도 아름다움은 같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보편적 오해가 형성된 데는 예술사에서 표면적으로는 상반되나 실제로는 똑같은 우를 범하고 있는 두 가지 학설의 영향이 크다. 바로 사실주의와 이상주의이다.


    사실주의는 자연주의를 계승한 학파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루소로부터 탄생한 자연주의는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해 본래는 모두 아름답고 선하던 것이 인간의 개입으로 망가지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자연은 본래 아름다우므로 가장 똑똑한 예술 행위는 자연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라 여겼다. 영국의 예술 비평가 러스킨은 예술은 원래 자연을 모방하면서 기원한 것으로 인류는 하늘의 수풀이 있는 자연의 품에서 살다가 집을 짓기 시작했고, 집은 수풀과 하늘을 모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표면적으로 볼 때 이상주의와 사실주의는 상반된 개념처럼 보인다. 하지만 기본적인 주장은 서로 같다. 이들은 모두 자연 가운데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것을 예술가적 의무로 모방했다. 예술미는 자연미의 모방을 통해 구현된다. 사실주의와 이상주의가 서로 다른 점이 있다면 사실주의는 아름다움이 자연 전체에 있다고 여겨 그저 조롱박이기만 하면 모두 그림의 모델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이상주의는 조롱박 가운데 가장 조롱박다운 대표 조롱박을 선정해 그려야 한다고 주장한 것뿐이다. 엄밀히 말해 이상주의는 사실주의의 더욱 정제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예술미’를 말할 때 ‘미’ 자에는 오직 한 가지 의미만 있다. 사물의 본질은 직감에 의해 형상화된다는 것이다. 사물의 본질이 직감에 의해 형상화되려면 그 외형과 내용이 반드시 하나로 융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아름다움은 모두 창작되어 나오는 것이지 처음 탄생할 때부터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자연미’를 말할 때 ‘미’ 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사의 상태’를 가리킨다. 또 하나는 ‘미’ 가 사실은 ‘예술미’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자연을 감정화, 예술화한 것이다.



    성인은 어린아이의 마음을 잃지 않는다 : 예술과 놀이

    감상 중에 창작의 영감이 떠오를 수 있고 창작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감상이 이루어질 수 있다. 감상과 창작은 한 집안 식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창작과 감상은 상상과 감정을 바탕으로 이미지를 만들고, 이 이미지를 통해 일종의 경지를 보여준다.


    잔뜩 찌푸린 산봉우리,

    어스름한 노을 사이로 비라도 불러올 듯.


    남송의 문인 강기가 지은 시의 한 구절로 풍부한 정감의 최고경지를 엿볼 수 있다. 그가 자연 속에서 이런 경지를 발견한 그 순간이야말로 감상을 하면서 창작이 이루어진 순간이라 말할 수 있다. 내가 이 사를 읽는 동안 이 구절은 하나의 부호에 지나지 않는다. 이 부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상력과 감성을 발휘하고, 강기가 사로 표현하기 전에 느꼈던 그 순간의 감흥까지 경험해야 한다. 마침내 그 감흥을 경험하는 순간, 나는 감상을 하면서 창작까지 하는 경지를 경험한 것이다.


    시 한 수가 지어지고 나면 독자들은 아무런 노력 없이 가만히 앉아서 그 시를 감상할 수 있다. 마치 자연의 풍경을 감상하듯 자신만의 상상력과 감성을 동원해 시와 교류를 한다. 독자들이 얻어가는 소득의 크기는 자신이 발휘하는 상상력과 감성의 크기와 비례한다. 시를 읽는 행위는 시를 다시 짓는 것과 같다. 독자들은 시인의 시를 재생산하는 공장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모든 예술 작품이 다 마찬가지다. 창작이 없으면 감상은 불가능하다. 창작은 감상을 포함하고 있지만 감상이 창작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 감상은 단지 하나의 느낌을 보여주는 것이다. 창작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느낌을 외부로 표출해 구체적인 작품을 만들어내야 한다. 타고난 재능과 상당한 실력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놀이는 창작과 감상, 두 가지 심리 상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모든 사람이 예술가일 수는 없지만, 사람에겐 누구나 어린 시절이 존재한다. 어린 시절 놀이를 해본 경험은 다 있을 것이다. 이렇게 평범한 놀이 속에서 놀이와 예술의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놀이는 예술처럼 자기가 느꼈던 감정을 객관화시켜 구체적인 장면을 연출해낸다. 둘째, 놀이는 예술처럼 행위 자체를 매우 당연하게 생각한다. 셋째, 놀이도 예술처럼 감정이입이 생긴다. 어린아이는 사물도 자신처럼 생명이 있고 감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의인화’는 어린아이들 특유의 사물 인식 방법이다. 넷째, 놀이도 예술처럼 현실 세상과 다른 또 하나의 이상의 세계를 만들어 위로를 준다.


    놀이와 예술은 다음의 중요한 세 가지 차이점을 보인다. 첫째, 예술은 사회성을 갖는 반면 놀이는 사회성이 없다. 둘째, 놀이는 사회성이 없고 감상의 대상을 표현하기만 한다. 셋째, 예술가가 작품에 그의 감정과 생각을 담아 이를 세상에 전달해 사람들이 함께 공감해주기를 바란다면, 전달에 필요한 기술을 연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술의 내용과 형식은 제대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러한 조화가 바로 ‘미’, 아름다움이다.


    예술은 놀이에서 비롯되었지만 동시에 사회성을 지닌다. 예술은 이미 놀이의 수준을 벗어나 놀이와 상당한 격차를 벌이며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놀이가 예술의 발걸음을 좇기에는 엄청난 무리가 있을 만큼, 이미 그 차이는 현저하게 벌어진 상태다.



    시를 잃을 것인가, 나를 잃을 것인가? : 창작과 모방

    창작과 율격, 격식의 관계처럼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부분이 바로 창작과 모방의 관계다. 사실 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모방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예술에서의 모방은 격식을 떠나 그 기교가 가장 중요하다. 기교는 크게 전달 방법과 매개 지식 두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먼저 전달 방법상의 기교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창작과 감상은 모두 하나의 느낌과 생각을 찾아내는 과정이다. 감상은 느낌과 생각을 찾아내 보는 것에서 멈추지만 창작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느낌과 생각을 외부로 표출해 구체적인 작품으로 완성한다. 방금 아름다운 야경이 떠올랐다고 가정해보자. 멋진 정자가 있는 정원, 꽃, 호수와 산, 바람과 달, 이처럼 멋진 풍경들이 모두 생생하게 머릿속에 떠오르지만 그대로 그려낼 수 없다면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그림 솜씨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손과 팔 근육을 조종할 수 없다는 뜻이다.


    모든 예술이 저마다의 특수한 기교를 필요로 한다. 한 분야의 예술을 배우고 싶다면 먼저 그 예술 분야가 어떤 근육의 기교를 필요로 하는지 알아두어야 한다. 그렇다면 근육의 기교를 익히기 위해 어떤 방법을 활용할 것인가? 그 첫 단계가 모방이다. ‘모방’ 과 ‘학습’ 은 본래 별개의 것이었다. 어린아이가 글자를 익힐 때 먼저 점선을 따라 쓰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 다음에 인쇄된 글자를 보고 그것을 모방해 따라 쓴다. 이러한 방법은 이미 다른 사람이 써놓은 글자를 본보기로 삼아 손 근육의 훈련을 통해 기교를 습득하는 과정이다.


    시를 짓는 행위는 근육의 기교와는 무관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원리는 동일하다. 시문은 감정과 사상을 담고 있다. 감정은 근육의 활동을 통해 생성된다. 시문은 감정과 사상을 담고 있다. 감정은 근육의 활동을 통해 생성된다. 언어는 혀와 목의 근육과 떨어뜨려 놓고 생각할 수 없다. ‘호’ 자를 쓸 때 자신도 모르게 혀와 목 근육이 ‘호’ 하고 소리를 내는 경우가 있다. 이는 행동심리학에서 주장하는 독특한 견해였는데 지금은 심리학자들의 전반적인 공감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고금 이래 위대한 예술가는 젊은 시절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모방에 할애했다. 미켈란젤로는 인생의 절반을 그리스 로마시대 조각을 연구하며 보냈고, 셰익스피어 역시 인생의 절반을 선인들의 희곡을 모방하고 각색하며 보냈다.


    예술가들은 모방에서부터 시작한다.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고, 테니스 선수가 처음 자세를 배우고, 발레리나가 스텝을 먼저 익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모방은 단지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모방의 단계를 거치지 않거나 모방의 단계에서 멈추면 창작이라고 보기 어렵다. 창작은 옛 경험을 새롭게 종합하는 과정이다. 옛 경험을 대부분 모방이고 새롭게 종합하는 과정은 스스로의 능력이다.


    예술가는 절반은 시인이요, 절반은 장인匠人이다. 시인의 오묘한 언어와 장인의 솜씨가 함께 발휘되어야 한다. 장인의 솜씨만 있고 시인의 언어가 없다면 창작이 불가능하다. 또 시인의 언어만 있고 장인의 솜씨가 없다면 완벽한 창작이라 하기 어렵다. 오묘한 언어는 영감에서 비롯되며 솜씨는 모방에서 비롯된다. 장인이 시인보다 신분이 낮은 것 같아도 절대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청년 작가들은 종종 이러한 사실을 간과하곤 한다.



    삶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은 그만큼 열정적으로 살아간다 : 예술과 인생

    인생은 여러 분야의 요소가 한데 어우러진 조화의 결정체다. 굳이 나누자면 실용적 행위, 과학적 행위, 심미적 행위로 나눌 수 있겠지만 이는 명분에 따른 분류일 뿐이며 서로 충돌하는 일이 없다. 오히려 이 행위들이 고루 발전해야 완벽한 삶에 가까워질 수 있다. ‘현실적 삶’은 인생을 다소 편협한 시각으로 본 것이다. 현실적 삶이 인생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예술과 현실적 삶은 서로 동떨어져 있다고 여기며 자신의 삶에서 예술에 큰 가치와 비중을 두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예술의 가치와 지위를 보호하려는 사람들은 예술을 억지로 현실적 삶 속에 끼워 넣으려 한다. 이는 모두 예술을 오해하고 인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행위이다.


    엄격히 말해 인생을 떠난 예술은 무의미하다. 인생은 넓은 의미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삶의 역사는 그 자신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예술일 수도 있고 예술이 아닐 수도 있다. 같은 돌을 갖고도 위대한 조각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는 사람이 있다. 이 둘의 차이는 돌의 성분과 돌을 다루는 사람의 소양에 달려 있다. 삶을 사는 것은 글을 쓰는 것과 같다. 올바른 삶에는 훌륭한 문장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인간은 저마다의 개성이 있고 사물도 사물의 개성이 있다. 개성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변화하고 발전한다. 같은 사물, 같은 풍경도 어느 때에 보느냐에 따라 매 순간 특수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누가 언제 보느냐에 따라 느끼는 감정과 생각이 완전히 다를 수 있다. 끊임없이 왕성하게 생겨나는 감정을 통해 생명의 탄생과 번성을 찾아낼 수 있다. 이러한 생명력이 언어와 문자에 드러나게 하면 좋은 문장이 탄생하고, 생명력이 말과 행동에 드러나면 아름다움이 충만한 인생이 된다.


    예술가가 보는 사물의 가치는 사물이 전체의 조화를 이루는 데 기여하는 가치로,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 기준을 벗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보통 사람들이 소홀히 여기는 것을 예술가는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다. 어떤 사물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면 강한 집착을 보인다. 하지만 스스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과감히 떨쳐버린다. 예술의 능력은 취하는 것보다 버릴 줄 아는 데 있다.


    인생은 한 편의 작품이다. 논리적 관점에서 보자면 선악의 구별이 있고 예술적 관점에서 보자면 미추의 구별이 있다. 그렇다면 선악과 미추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좁은 의미에서 논리의 가치는 실용적이고 심미의 가치는 실용성을 초월한다. 논리적 행위는 ‘목적이 있는 행위’고 심미적 행위는 ‘목적이 없는 행위’ 다. 인仁義, 충忠, 신信등은 모두 선의 개념이다. 이들이 왜 선의 개념이냐고 묻는다면 ‘인류의 행복’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게 된다. 세상에 오직 한 명의 사람만 살아나게 되었다면 그는 도덕적 행위를 할 필요가 없다. 웃어른이 있어야 ‘효’를 행할 수 있고 친구가 있어야 ‘믿음’을 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은 감정 행위이다. 따라서 예술적 삶은 감정이 풍부한 삶이다. 사람도 감정이 풍부한 사람과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 있다. 감정이 풍부한 사람은 모든 사물에 흥미를 갖고 이를 즐기려 한다. 감정이 메마른 사람은 모든 사물에 흥미가 없다. 그저 평생 배부른 돼지가 되려 할 뿐 흥미를 추구하지 않는다. 감정이 풍부한 사람은 예술가이며 감정이 메마른 사람은 속인이다. 감정이 풍부한 사람은 삶이 아름답고 풍요롭다. 인생의 예술화란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을 추구하는 자세다. ‘흥미롭다’는 이 자체가 감상이다. 삶을 알고자 한다면 주변의 수많은 사물을 느끼고 감상하라. 감상은 목적이 없는 행위를 즐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감상을 할 때 사람은 신처럼 자유롭고 부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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