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바꾼 49가지 실수
 
지은이 : 빌 포셋(역:권춘오)
출판사 : 생각정거장
출판일 : 2019년 08월




  • 세상이 어떤 공식에 의해 의도적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하는가? 알고 있던 이야기 속에 숨겨진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나 보자. 세계사의 흐름을 만든 여러 사건이 찰나의 실수, 어리석은 판단, 잘못된 믿음에 의해 생겨났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따라가면서도 재미를 놓치지 않는 한 권의 책으로 세계사를 제대로 파악하고, 미래를 대비하는 현명한 판단과 다시 실수하지 않는 방법을 배울 시간이다.


    세계사를 바꾼 49가지 실수


    찰나의 실수가 바꾼 역사(B.C. 1350 ~ A.D. 1400)

    야망과 미신의 결합이 만든 결과 _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15)

    아테네의 권위는 권력을 가진 자들의 실수로 무너졌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벌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많은 군사적, 정치적 실수를 내포한 전쟁이다. 기원전 418년, 만티네아 전투 이전까지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는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점치고 있었다. 하지만 만티네아 전투에서 스파르타가 승리하자 몇몇 도시들은 아테네가 주도한 델로스 도시국가 동맹에서 탈퇴했다.


    기원전 415년, 아테네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기발한 계획을 하나 떠올렸다. 바로 시라쿠사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스파르타 군대에 보급품과 선박을 판매했던 도시국가 시라쿠사는 그리스가 아닌 시칠리아 섬에 위치해 있었다. 이 근교에는 그리스 식민지로 시작해 도시국가로 발전한 도시들이 있었고 당시 아테네만큼 번영했던 시라쿠사는 매력적인 장소였다. 아테네의 지도자들은 이곳을 자신들의 거점지로 삼으면 텅 빈 곳간을 채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시라쿠사가 아테네 산하로 들어오게 되면 델로스 동맹을 탈퇴한 도시들도 돌아올 가능성이 높았다. 다만 이 전략에는 위험 요소가 하나 있었는데 시라쿠사를 빨리 무너뜨리지 못하면 이를 본 다른 도시국가들이 스파르타의 편을 들 가능성이 높았다.


    아테네의 일부 지도자들은 이 계획에 강한 반기를 들었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도시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또한 민주주의가 발달한 이 도시를 침략하는 것은 정당성 면에서도 문제가 있어 보였다. 그럼에도 아테네 지도부는 시라쿠사를 공격해야 할 만큼 절박했다. 당시 아테네의 지도자인 알키비아데스는 원로원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고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그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시라쿠사 공격 필요성을 꾸준히 설득했다.


    기원전 415년, 9,000명의 아테네 전사들이 시칠리아에 도착했다. 시라쿠사 지역 근처에 도착한 아테네 군인들은 주둔을 요청했지만 전부 거절당했다. 당시 시라쿠사는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알키비아데스는 바로 시라쿠사를 공격하지 않았다.


    당시 아테네는 정치적 문제가 불거졌다. 알키비아데스는 신성모독죄로 아테네 재판정에 서야 했다. 하지만 재판은 열리지 않았다. 재판을 피하고 싶었던 알키비아데스가 스파르타로 도망쳤기 때문이다. 아테네 군대의 지휘권은 시라쿠사 원정을 반대했던 니키아스에게 돌아갔다. 그는 시라쿠사를 공격하지 않고 위협만 가하며 시라쿠사군을 카타나 주둔지로 유인하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아테네는 승리했지만 승리하지 못했다.


    이듬해 니키아스는 시라쿠사 주변의 길을 모두 차단해 물자 보급을 끊으려 했다. 양측 모두 오랜 전쟁으로 지칠 때쯤 스파르타의 장군 길리포스가 시라쿠사에 도착하며 사기를 북돋웠다. 기원전 413년, 시라쿠사는 7,000명의 용병을 새로 충원하며 전쟁을 착실히 준비했다. 이를 본 니키아스는 개인 사정을 핑계 삼아 전쟁 계획을 철수시키려 들었다. 하지만 아테네 본국에서는 두 번째 함대와 5,000명의 시민 보병군을 충원하며 도박에 가까운 전쟁을 치르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이 병력조차도 시라쿠사를 꺾을 수 없었다. 니키아스는 패전의 기운을 느끼고 모든 원정대를 철수해 아테네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그는 실패가 재앙으로 번지는 것을 막았다. 하지만 이렇게 훌륭한 결정도, 그 이후의 연속된 실수가 훌륭한 결정을 무용지물로 만들었고 그 때문에 역사는 다시 바뀌고 말았다.


    아테네 사람들이 철수하며 배에 오르던 시기에 일식이 시작되었다. 니키아스 역시 당시의 그리스인들처럼 미신을 믿었기에 이를 어떤 신호로 여겨 철수를 중지했다. 그들은 신의 노여움이 폭풍우로 나타난다 믿었으므로 자연현상을 매우 두려워했다. 그들은 “9일이 3번 지나가길 기다리라”는 예언자의 말을 그대로 믿어버렸다.


    그동안 시라쿠사 군인들은 배를 사슬로 묶어 항구를 봉쇄해 아테네 함선들을 한곳으로 몰아넣고 기습 공격을 가했다. 당시 세계 최고라 일컬어지던 아테네 군인들을 무찌른 시라쿠사 군인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미신을 믿었던 아테네 군대는 첫 패배를 겪어야 했다.


    경제 파탄을 일으키다 _ 로마의 인플레이션(A.D. 55)

    현대의 지도자들도 이런 실수는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다. 바로 ‘빚을 갚기 위해 인플레이션을 이용하는 것’이다. 종이돈이 등장하기 전까지 모든 돈은 금속으로 만들어진 동전이었다. 오늘날의 동전은 안정된 화폐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 하지만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럼 이 실수는 왜 그토록 자주 반복될까? 유혹이 너무 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정부가 얼마든지 돈을 통제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양적완화가 쉬운 선택지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화폐가 역사적으로 그리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그럴까?


    제1차 세계대전 후 바이마르공화국은 마구 돈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이에 영향을 받은 독일 마르크화의 가치는 계속 하락했고, 사실상 화폐 가치가 사라지는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일어날 때까지 돈 찍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바이마르 정부는 물러났고, 시민들은 경제를 안정시키겠다고 말한 정당에 표를 주었다. 그렇게 나치가 등장했다. 바이마르공화국의 화폐 정책이 나치를 양산한 셈이다. 로마 역시 다르지 않았다. 본래 로마의 장점은 토지에서 비롯되었다. 많은 지역을 정복할수록 더 많은 영토에서 더 많은 물품을 생산했고 로마는 점점 부유해졌다. 로마 황제의 금고도 더 부유해졌다. 그들은 정복 지역의 주민들을 노예로 팔아 그 이득을 취했다. 로마가 더 이상 영토를 확장하지 않기로 결정했을 때도 이미 대부분의 영토가 로마의 소유지였다. 더 이상 팔 노예가 없자 정부는 세금으로 이를 충당해야 했다.


    네로 황제가 통치하던 시기부터 로마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로마는 더 이상 부유하지 않았다. 새로운 수입 창출원이 없어지면서 로마는 서서히 쓰러지고 있었다. 네로는 이제 빈민층에도 세금을 부과하고자 했고 이는 로마의 성장을 더욱 둔화시켰다. 그때, 대형화재가 발생해 네로의 인기는 더욱 추락했다. 네로가 여기에서 멈췄다면 지금의 폭군 이미지는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당시에도 값비쌌던 대리석으로 궁을 재건하려 했고, 모자란 돈은 화폐를 추가로 찍어내며 은 순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이제 로마의 인플레이션은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졌고, 이전에 제작된 순도가 높은 은화들이 더 높은 가치를 지니기 시작했다. 268년에는 은화의 은 함량이 1퍼센트에 불과했다. 악순환이 계속되면서 로마제국은 더 많이 민중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악화 주조가 로마 제국 멸망의 직접적 원인은 아니었지만 분명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화살 하나가 바꾼 역사 _ 야만의 시대가 태어나다(A.D. 378)

    로마 멸망에 관해서는 학자마다 다른 의견을 내놓곤 한다. 중요한 사건은 여러 원인이 뭉쳐 있다 하나의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터지는데, 로마 멸망 역시 멸망의 불씨를 당긴 화살이 있었다.


    모든 일은 아시아의 한 초원에서 벌어졌다. 당시 기마민족들이 그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중 고트족은 동유럽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그곳에서 살았다. 그들은 거칠었지만 그들보다 더 센 훈족의 등쌀에 못 이겨 동유럽으로 슬금슬금 이주하고 있었다. 훈족은 한 세기 이후엔 전 유럽을 혼란의 도가니로 빠뜨린 민족이다. 당시 고트족은 로마 접경지대에 거주하며 로마인으로 살고자 했다. 당시 고트족은 크게 동고트족과 서고트족으로 나뉘어 있었다. 서고트족은 정착하기까지 식량을 지원하겠다는 로마의 약속도 받은 상태였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로마 영토로 편입됐다. 완전하게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동고트족 역시 훈족의 공격이 무서워 로마 접경지대로 옮겨가고 있었다. 하지만 곧, 로마의 식량이 그리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굶주리던 서고트족은 바로 약탈자로 변신했다. 소수의 고트족과 로마군 사이에 매일 싸움이 일어났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로마는 협상을 제안했지만 그 이면에는 협상을 빌미로 고트족 지도층을 암살하려는 계략이 숨어 있었다.


    하지만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서고트족 리더들이 달아났고, 동고트족 군대의 힘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고트족은 합심하여 자신들의 세를 불려 다시 로마를 공격해오기 시작했다. 여러 달 동안 양측 기마부대가 기습과 매복 공격을 주고받았고, 보병부대가 로마 시내와 도시를 방어하면서 국경지대가 위험하다고 느낀 로마는 황제를 선두로 한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고, 황제를 본 고트족은 화평을 제의했다. 이번엔 로마가 거절했다. 사실 이 시기 고트족은 로마인들과 비슷한 교육을 받았고, 문맹률도 낮았다.


    고트족 지도자들은 로마의 화평 거절에 분노했지만 계속되는 전쟁에 지쳐가고 있었다. 이런 힘겨루기가 득보다 실이 많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고트족이 원한 것은 안전한 정착지였다. 그들은 로마가 싫었지만 여전히 훈족이 두려웠다. 훈족에 대항해 싸울 미래의 동맹이 무너지도록 만들 필요는 없었다. 이 사실은 80년 뒤 훈족을 제압한 마지막 로마군과 고트족이 동맹한 사실로 입증되었다.


    고트족은 회담을 제의했고, 긴장을 풀지 않은 채 회담 장소에 모였다. 물론 양측 기마대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공격 태세를 갖춘 상태였다. 그런데 그만 로마 병사 한 명이 긴장한 나머지 실수로 화살 한 발을 고트족에 쏘았고, 그 때문에 양측은 전투 태세가 되고 말았다. 고트족 호위대가 이에 대항해 공격했고, 이를 본 로마 기병대는 공격 진영을 갖춰 고트족을 공격했다. 하지만 로마 기병대는 좌우 숲 속에 숨어 있던 고트족 기병대의 존재를 알지 못했고 로마 기병대가 진군하자마자 고트족 기병대가 이들을 공격했다. 뒤따라오던 로마 보병대도 같은 위험에 처했다.


    이 전투로 4만 명의 로마 군인이 전사했으며 로마 병력은 그대로 무너져버렸다. 이제 ‘로마의 위풍당당한 보병대’는 옛말에 불과했다. 로마는 그때 이후로 두 번 다시 이탈리아 전역을 지배하지 못했고, 이후 100년 내 두 번 함락됐으며 이민족 오도아케르를 황제로 앉히는 굴욕을 맛봐야 했다. 화살 하나를 잘못 쏘는 실수만 하지 않았더라면 두 나라 군대는 화평 조약을 맺었을 가능성이 크다. 두 군대 모두 관심사가 동일했고, 서로 ‘적이 아닌 동맹’이라는 개념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서로 양보할 의사가 있었다. 이들이 화평을 맺었다면 로마는 더욱 강성한 국가가 되었을 것이고 서고트족은 로마의 수준 높은 문화와 지식을 습득했을 것이다. 어쩌면 다음 세기, ‘야만의 시대(The Age of Barbarian)’도 오지 않았을 수 있다.


    고양이에 관한 미신 _ 흑사병의 시작(A.D. 1348)

    흑사병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으로 꼽힌다. 흑사병은 몽골에서 처음 발병해 중국으로 확산되었고 무역선을 통해 유럽에 유입되었다. 이 병은 대량학살 사건의 원인이기도 했다. 고양이가 흑사병의 숙주라는 말이 돌면서 사람들이 고양이를 무차별적으로 죽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늘 그렇듯 공황 상태에 빠진 시기에는 루머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훗날 고양이들은 수백만 명의 유럽인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복수에 성공한다.


    고양이가 숙주라는 루머는 가톨릭교회가 주도해 퍼뜨렸다. 고양이가 사라진 도시에는 쥐가 우글거리기 시작했다. 흑사병이 창궐한 기간에 퍼진 림프종페스트는 가장 흔한 형태의 전염병이었다. 쥐를 숙주로 삼은 벼룩이 사람에게 옮아갔고 쥐는 쥐대로 인간을 물어 연쇄 감염을 일으켰다. 당시엔 살충제나 항생제가 없었으므로 벼룩과 쥐의 공격에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1348년부터 1352년까지 유럽 인구의 절반이 사라졌다. 병에 걸린 사람들은 가슴에 검은 반점이 나타났고 겨드랑이와 등에 검은 부종이 부어오르곤 했다. 림프절과 임파선이 부어오르다 검게 변했고, 고름이 나오면서 피가 흘렀다. 감염자 80퍼센트가 일주일 이내에 사망했다.


    원래부터 고양이를 이토록 사악한 존재로 여긴 것은 아니었다. 고대 이집트에선 쥐가 곡물을 먹지 못하도록 고양이를 두었으며, 이집트 사람들과 같이 주택에 살았고 신과 동급 대우를 받는 숭배의 대상이었다. 이집트에서 고양이를 살해하면 사형에 처해졌다. 로마인들은 고양이를 유럽에 데려와 키웠다. 로마는 고양이를 반려동물로 키운 최초의 유럽 국가다. 그러나 이교도 로마인들이 고양이를 숭배하는 것을 본 가톨릭교회는 이교도를 뿌리 뽑기로 결정한 후, 이교도 근절 방법으로 고양이 살인도 포함시켰다.


    교황 그레고리 9세는 최초로 고양이와 악마를 연관시켰다. 또한 이 시기에는 누군가가 마녀로 몰리면 화형에 처해지곤 했는데 마녀로 몰린 사람이 키우던 고양이 약시 함께 화형대에 올랐다. 마녀로 몰리는 것을 두려워한 사람들은 기르던 고양이를 없애거나 버렸고, 유럽 내 고양이는 자취를 감췄다.


    물론 일부 귀족들은 이런 미신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고양이는 훌륭한 쥐 사냥꾼이었다. 그 귀족들은 쥐가 사람에게 병을 옮긴다는 사실을 몰랐지만 고양이를 키운 집은 어쨌든 질병을 막는 좋은 파수꾼을 둔 셈이었다. 그나마 귀족들이 계속해서 고양이를 키운 덕분에 이 정도에서 피해가 멈춘 것일 수 있다. 그 고양이들마저 전부 없애버렸다면 유럽은 인구의 절반이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수도 있다.



    어리석은 판단이 바꾼 역사(A.D. 1401~ A.D. 1915)

    사냥꾼의 이기심이 환경 파괴를 이끌다 _ 호주에서 가속화된 토끼의 번식(A.D.1788) 121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 위해 호주에 도착한 영국 출신 운동선수 토마스 오스틴은 매우 실망했다. 그는 영국에서 꿩, 메추라기, 자고새, 그리고 그가 좋아하는 토끼 사냥을 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호주에는 토끼가 없다는 점이 그에게 실망을 안겼다. 그래서 오스틴은 영국에 있는 조카에게 자신이 지내던 남부 빅토리아 주의 바원 파크에 사는 스물 네 마리의 토끼를 배편으로 보내 달라는 편지를 썼다. 이 스물 네 마리의 작은 토끼가 곧 호주에 피해를 가져왔다.


    호주로 토끼를 이주시키려는 시도는 예전에도 있었다. 1788년에 처음으로 한 무리를 데려왔지만 태즈메이니아 주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번식하지 못했다. 빅토리아의 다른 거주민들 역시 “토끼 몇 마리가 온다고 별다른 변화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토끼 덕분에 고향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이며 토끼 사냥을 하게 될 것이다”라는 오스틴의 말에 현혹되었고, 그의 말을 새겨들었다. 그렇게 들여온 토끼로 인해 사냥이 유행했고, 오스틴은 사냥 사업으로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7년 뒤 오스틴은 총 1만 4,253마리의 토끼를 사냥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토끼의 엄청난 번식력 때문이었다. 토끼의 개체 수는 빠르게 증가해 200만 마리를 총이나 덫으로 사냥할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도 토끼의 개체 수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급격한 번식으로 호주 사람들은 토끼에 대한 생각이 180도 바뀌었다. 토끼를 들여온 지 50년이 채 지나지 않아 토끼는 뉴사우스웨일스주를 거쳐 퀸즐랜드주, 그리고 서부와 북부까지 호주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토끼는 막대한 피해를 끼쳤다. ‘고향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존재가 되기는커녕 끔찍한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 엄청난 확산으로 호주는 지금까지도 회색으로 덮인 대륙, 그레이 블랭킷이라 불린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확산에 크게 기여한 이들은 바로 사냥꾼들이었다. 사냥은 토끼 종의 증식 억제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토끼들이 사냥이라는 위협을 피해 보다 덜 위험한 지역을 찾아 떠나게 했다. 이것이 호주 전역으로 토끼가 퍼지게 된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호주는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토끼의 공격을 받았다. 자연이 파괴되었고 이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고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이 불청객은 완전히 대륙을 장악했다. 물리적 방법을 이용해 토끼의 개체 수를 제한하는 데 몇 번 성공하기도 했지만, 상당한 비용과 노력이 들었다. 이기적인 사냥꾼들의 사소한 실수로 시간과 돈, 환경 파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룬 것이다.


    미국의 운명을 결정한 무능함 _ 노예제 분열과 남북전쟁 발발(A.D. 1850)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10년 전, 미국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감당하지 못한 3명의 대통령에 의해 통치가 이루어졌다. 주권과 연방 사법체제 안에 놓인 노예제도 문제는 1850년대 미국의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국은 현대에서 노예 제도가 여전히 합법인 마지막 국가였다. 당시 영국, 프랑스, 그리고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노예제도를 폐지한 상태였다. 1860년, 링컨이 당선되기 전까지 3명의 대통령이 보여준 태만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살펴보자.


    밀러드 필모어(미국의 제13대 대통령)가 대통령에 취임할 수 있었던 이유는 12대 대통령 재커리 테일러가 어리석었기 때문이다. 1850년 7월 4일, 테일러 대통령은 워싱턴 메모리얼 기념식에 참석하느라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백악관으로 돌아온 그는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시고 커다란 그릇에 든 체리를 먹고 차가운 우유를 마셨다. 문제는 당시 워싱턴 D.C에 치명적인 콜레라가 발생한 데 있었다. 콜레라는 오염된 물을 통해 전염된다. 당시 사람들은 끓이지 않은 물을 마시지 말고, 수돗물로 씻은 과일을 먹지 말고, 수돗물로 만든 얼음이 함유된 음식을 먹지 말라는 주의를 들었다. 테일러는 이 세 가지 주의사항을 모두 무시했고 4일 뒤 사망했다. 부통령이었던 밀러드 필모어는 임기 중 사망한 대통령을 대신해 국가의 수장이 되었다.


    하지만 필모어는 전임 대통령만큼 결단력 있는 지도자가 아니었다. 필모어는 테일러가 반대한 ‘클레이 타협안’을 필요한 해결책으로 여겼다. 클레이 타협안은 캘리포니아를 자유 주(州)로 인정하고 도망 노예의 송환에 있어 북부 지역에서 그 법을 엄격하게 적용한다는 것에 대한 합의였다. 하지만 도망노예송환법은 노예제 폐지론자가 많았던 북부에서 잘 실행되지 않았다. 이에 남부에서 심한 배신감을 느꼈지만 필모어는 어떤 결단도 내리지 않았고, 결국 그는 1852년에 당에서 제명되었다. 2년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등장한 프랭클린 피어스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35표를 얻어 지명된, 급조된 후보였다. 당시 민주당은 노예제를 찬성하던 남부 의원들과 맹렬한 노예제 폐지론자들로 나뉘어 있었는데 하필 피어스는 ‘줏대 없는 사람(노예제를 찬성한 북부 의원)’이었다. 피어스는 공천을 받고 13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무능함을 여실히 드러냈다. 노예 문제 처리에 있어 어떤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피어스는 주로 술을 마시고 비평과들과 논쟁을 벌였고, 임기 말에는 외교를 망치며 부족한 결단력을 허세로 대신하는 습관까지 생겼다. 결국 그는 자신이 속한 당에서도 소외되었다. 1856년 민주당 전당대회의 모토는 ‘피어스 빼고 아무나’였다. 제임스 뷰캐넌이 당선된 후 당원들 중 누구도 피어스를 대통령 취임식 퍼레이드에 초대하지 않았다. 피어스가 이끈 미국은 4년 동안 더 분열되고 말았다.


    훌륭한 변호사였던 제임스 뷰캐넌은 이미 많은 돈을 번 상태였다. 그 역시 미국 최악의 시기를 타개할 수 없었다. 노예 문제가 다른 모든 문제들을 완전히 뒤덮고 국가를 분열시키기 시작했을 때, 뷰캐넌 역시 옳은 방향을 제시하지 못했다. 뷰캐넌은 대통령이 되자 우유부단한 태도로 일관했고, 노예제 찬성론자들과 폐지론자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양측을 중재하는 데 실패했다. 미국이 분열된 그 순간에도 그는 어떤 일도 하지 못했다. 오늘날을 기준으로 봐도 어떤 분야에서든 뷰캐넌이 이룬 업적을 찾기 어렵다.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 목록에는 미국의 1850년대를 책임진 3명의 대통령이 상위 랭킹에 올랐다. 어떤 사람들은 제임스 뷰캐넌이 최악이었다고 주장하지만, 또 어떤 역사가들은 프랭클린 피어스를 단연코 최악으로 꼽는다. 분명한 것은 세 명 모두 당시 가장 긴급한 문제를 대처하는 데 있어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무능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두 손 놓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미국은 에이브러햄 링컨이 뷰캐넌의 뒤를 이어 대통령직에 오를 때까지 계속 분열 상태를 유지했고,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남북전쟁을 겪었다.



    잘못된 믿음이 바꾼 역사(A.D. 1916 ~ A.D. 2010)

    짧은 생각이 먼지를 일으키다 _ 먼지 풍작(A.D. 1917)

    유럽은 굶주리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치열하게 전개됐고, 수많은 유럽의 농부들이 군대로 징집되었으며 토지에 사용해야 할 비료인 질산염은 이제 탄약에 사용되고 있었다. 이런 유럽의 상황이 미국에게는 기회이기도 했다. 미국이 내린 결정은 더 많은 농작물을 재배하는 것이었다. 더 많은 농작물을 생산해내기 위해 유휴토지였던 곳을 경작해 밀이나 옥수수를 더 심는 방법이 사용됐다.


    농업 장려 정책은 미국식품관리국(USFA)에서 관여했다. USFA는 1917년 8월 10일 식품.연료관리법이 통과된 후 식량 생산과 농산물 유통을 관리하기 위해 설립된 기관이다. USFA는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가장 전통적인 방법을 썼다. 밀과 옥수수를 심는 이들에게 토지 면적에 비례하는 특별수당을 지급했다. 특별수당은 불모지에서도 옥수수 경작으로 수익을 얻을 수 있을 만큼 상당한 액수였다. 사람들은 비옥하지 않은 건조한 지역의 땅에도 밀을 심었다. USFA는 높은 가격을 보장하면서 캔자스, 오클라호마, 텍사스, 뉴멕시코와 같은 주의 새로운 경작 토지에 보조금을 지급했다. 이러한 주들의 토양은 밀을 심기에 너무 건조했지만, 그해 이례적으로 많은 비가 내린 덕분에 상당한 양의 밀을 수확할 수 있었다. 이 정책은 많은 비가 내리던 시기에 시행됐다. 수많은 불모지를 생산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곧 강수량이 줄어 불행한 일이 벌어졌다.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보조금 지급이 중단됐다. 일부 농장에서는 품질 좋은 밀이 생산됐지만 다른 수많은 농장이 차례차례 폐쇄되었고,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소수의 농장만 남게 되었다. 농업을 장려하던 시기에 목장주가 자신의 토지를 경작지로 바꿔 농부가 되었을 때처럼, 시간이 지나 그들은 다시 소와 말을 키우는 목장주가 되었다. 경작지가 된 토지의 흙은 억세고 천천히 자라는 잔디 뿌리로 뭉쳐 있었기에 농부들은 그 풀을 모두 갈아엎을 수밖에 없었따. 토지가 다시 목장이 되었을 땐 가축들은 더 이상 발굽이 풀로 보호받지 못하는 땅에 서게 됐다.


    1934년 강한 바람이 남서부 지방을 강타했다. 수백만 에이커의 땅에서 이미 가루가 된 흙이 먼지로 바뀌었고, 검은 폭풍 혹은 모래 폭풍이라고 알려진 먼지구름이 온 하늘을 뒤덮었다. 먼지구름이 사라졌을 때, 한때 조금이나마 비옥했던 땅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강풍이 불어 닥친 시기에 생겨난 황폐해진 토양이 이룬 건조 지대는 1950년대 말까지 계속 확장되었다.


    미국은 수년 동안 미국산 밀로 보병들과 동맹군에게 식량을 지급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밀 수확의 대가로 수백만 평에 달하는 목초지가 사라졌다. 수만 명 농부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이후 대공황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러한 실수는 오늘날에도 되풀이되고 있다. 많은 식량이 필요한 중국에서는 북부 사막과 인접한 토지를 개간했는데, 오늘날 그곳의 사막은 매년 3750제곱킬로미터씩 그 면적이 증가하고 있다. 베이징을 뒤덮은 먼지는 지금보다 더 심각해져,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을 정도가 될 것이다. 인류는 이 실수를 계속해서 저지르고, 반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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