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살아있다
 
지은이 : 이병욱
출판사 : 학지사
출판일 : 2018년 01월




  • 어머니의 존재는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 동시에 방향타 노릇을 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이 순간에도 여전히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남아 오염된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믿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오염된 세상일지라도 스스로 험한 세파를 홀로 헤쳐 나가는 연습에 힘쓰면서 지금의 나로 거듭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어머니는 살아있다


    독신을 고수한 사람들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벗어나본 적이 없는 칸트

    철학적 대저 《순수이성 비판》과 《실천이성 비판》으로 18세기 독일 관념 철학을 대표하는 거장으로 우뚝 선 위대한 철학자 칸트는 80년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매우 경건하고도 금욕적인 삶을 누리며 살았는데, 일생동안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쾨니히스베르크를 한 번도 떠나본 적 없다고 한다. 시계처럼 정확하고 규칙적인 생활로 유명해서 그의 산책 시간을 보고 시민들이 시계를 맞출 정도였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모든 면에 철저했던 그에게 유일한 낙이 있었다면 그것은 커피와 담배뿐이었다.


    가난한 마구 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매우 청교도적인 삶을 살았던 부모 슬하에서 자라면서 어릴 적부터 경건한 삶의 태도를 몸에 익혔으며, 교육도 어머니와 친분이 있던 신학자 슐츠의 도움으로 종교적 훈련을 강조하는 김나지움에서 받았다. 하지만 그가 13세때 어머니를 잃고 대학을 졸업한 22세 무렵에는 아버지마저 사망함으로써 졸지에 고아가 된 칸트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가정교사 노릇을 하면서 홀로 철학적 연구를 계속해나갔다.


    한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철학적 사색으로 일관한 칸트는 자신의 고향일 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태어난 곳이기도 했던 쾨니히스베르크를 죽을 때까지 벗어난 적이 없는데, 그것은 곧 어린 시절에 잃어버린 어머니의 곁에서 떨어지기를 거부한 몸짓이 아닐까 한다. 그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중얼거리듯 남긴 말은 “그것으로 족하다”라는 말이었다고 하는데, 물론 그동안 자신이 이룩한 철학적 업적에 만족해서 한 말이기도 하겠지만, 평생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성을 넘보지도 않고 어머니의 고향을 굳건히 지킨 아들의 자부심을 드러낸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일찌감치 어머니의 존재를 상실한 아픔이 매우 컸던 칸트는 그런 고통스러운 감정의 세계를 철저한 이성의 탐구와 사변의 세계로 극복하며 한평생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강박적인 인물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바로 감정적 교류를 회피하고 전적으로 이성적 합리적 사고의 세계에 몰입함으로써 자신의 심리적 균형을 유지해나간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 햄릿이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읊조리며 깊은 사색에 치우치기만 할 뿐 오필리아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과도 흡사하다. 칸트 역시 젊은 시절 한때 약혼까지 했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었다고 하는데, 덴마트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도 비슷한 과정을 밟고 독신으로 생을 마쳤다.


    봉사활동에 일생을 바친 제인 에덤스

    미국의 사회운동가이자 사회사업가로 1931년 미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제인 애덤스는 20대 후반에 이미 시카고에 미국 최초의 대형 정착 시설인 헐 하우스를 세워 본격적인 사회 활동에 뛰어들었다. 1915년에는 국제 여성 평화 자유연맹 이사장에 선출되어 평화 운동의 활동 범위를 전 세계적으로 확대시켰다. 여성참정권 운동의 지도자로도 활동한 그녀는 반전주의 및 반제국주의를 내세워 미서 전쟁을 통한 필리핀 합병에 반대했으며,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도 거세게 비난했다.


    비록 그녀는 사회사업가라는 새로운 직업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녀가 보여준 활동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사회사업 활동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단순히 사회복지에 힘쓴 것만이 아니라 여성들의 모성적 기능을 통해 세상 전체에 대한 책임감과 보살핌으로 세계평화 및 사회정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오히려 평화주의 사회운동가로 보는 게 마땅할 것이다. 제인 애덤스의 그런 신념은 그 후 UN 창설의 정신에도 깊은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이처럼 인권 운동 및 도덕적 삶에 대한 그녀의 남다른 관심은 상원의원으로 활동한 아버지 존 애덤스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저명한 정치가로 인권 문제에 깊이 관여했던 아버지를 깊이 존경한 그녀는 그런 아버지를 닮기 위해 일찌감치 사회봉사 활동에 뛰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태어난 직후 만 두 살 때 어머니를 잃고 계모 밑에서 성장한 그녀는 자신의 이상적인 모델로 여기고 의지하던 아버지마저 21세 때 잃게 되면서 졸지에 고아가 되고 말았으나 다행히 계모와는 사이가 좋은 편이어서 그 후에도 계속 함께 살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43세라는 늦은 나이에 제인 애덤스를 낳고 불과 2년 뒤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로부터 5년 후 아버지의 재혼으로 계모가 들어올 때까지 그녀는 전적으로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으며 지냈다.


    그러나 4세 때부터 앓기 시작한 척추 결핵으로 평생 고생한 그녀는 척추 이상으로 다리를 절게 되면서 제대로 달리기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 어려움을 겪어야 했으며, 어린 시절 내내 극심한 열등감에 빠져 지내야 했다. 더군다나 아버지의 격려에 힘입어 신체적 장애를 극복하고 힘겹게 록퍼드 대학을 졸업한 바로 그 해에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뜨게 되자 평범한 삶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그 후 그녀는 빈민들을 위한 의료봉사에 뜻을 품고 필라델피아 여자의과대학에 진학했으나 척추기형으로 수술을 받는 등 건강이 뒷받침되지 못해 도중에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자 한동안 극도의 절망감에 빠지기도 했따.


    결국,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빈민구제 사업에 헌신하기로 마음을 바꾸어 사회봉사 업무에 뛰어든 그녀는 29세 때 동료 엘렌 게이츠 스타와 함께 손잡고 시카고에 미국 최초의 대규모 정착 시설인 헐 하우스를 세워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시작했다. 그곳은 유치원과 야간 학교, 음악 학교를 포함해 식당, 도서관, 미술관, 극장, 체육관, 수영장, 목욕탕, 카페, 어린이 클럽, 직업소개소, 숙소 등을 갖춘 대규모 시설이었다. 이처럼 대대적인 사회사업에 일생을 바친 그녀는 74세 나이로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생을 마감했다. 물론 신체적 장애 탓도 있겠지만, 어머니의 이른 죽음에 따른 모정의 결핍을 오히려 자신이 나서서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상대로 모성적인 역할을 베푸는 일로 승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미지의 세계를 찾아 나선 사람들

    청각장애인의 아버지 알렉산더 벨

    가장 먼저 전화를 발명한 인물로 알려진 미국의 발명가이자 사업가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은 원래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태생으로 그의 집안은 조부 때부터 알렉산더 벨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발성법 연구와 교육에 기여한 가문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말수가 적고 내성적이었던 벨은 기계에 많은 관심을 지니기도 했지만, 어머니의 격려에 힘입어 피아노를 배우는 등 예술적 감각도 익혔으며, 특히 음성학자인 아버지로부터 발성법을 배워 성대모사와 복화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12세 무렵부터 어머니가 청력을 잃기 시작해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보이게 되자 크게 충격을 받은 벨은 곧바로 수화를 배워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독자적인 대화술을 개발해 어머니와 소통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어머니의 이마에 직접 자신의 입을 대고 발음을 전달하는 방법이었다.


    어머니가 청력을 잃게 된 사건은 그 후 벨이 일생동안 청각장애인을 위해 헌신하게 된 가장 큰 동기가 되었다. 또한 나중에 청각장애인 여성을 아내로 맞아들인 사실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다른 무엇보다 그가 전화의 발명에 그토록 힘을 쏟은 이유로 그가 사랑했던 두 여성, 어머니와 아내가 청각장애로 고생한 인물들이었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청년 시절 벨은 아버지의 격려에 힘입어 형 멜빈과 함께 자동음성장치 개발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게 자신을 포함한 삼형제가 모두 결핵에 걸려 몸져눕게 되는 곤경을 맞이하게 되었다. 비록 벨은 회복되어 연구를 계속해나갔지만, 두 형은 얼마 가지 않아 세상을 뜨고 말았다. 당시 큰형 멜빈은 25세, 작은형 에드워드는 19세였다. 더군다나 아버지 건강도 여의치 않게 되자 마침내 벨 일가는 캐나다 이주를 결심하게 되었다.


    캐나다에 정착한 이후 아버지는 미국 보스턴 농아학교에 교사로 초빙되었으나 건강상태가 좋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 대신 아들 벨을 보내 일하도록 했다. 그곳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자신감을 얻은 벨은 얼마 가지 않아 보스턴에 자신의 독자적인 농아학교를 세웠는데, 그때 그의 나이 불과 25세였다. 하지만 지나치게 발성법에 치중한 나머지 수화의 사용을 최소화시킨 그의 교육방식에 반대하는 여론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 후 벨은 보스턴 대학 교수가 되어 연구를 계속해 나갔는데. 당시 그가 개인적으로 지도했던 15세 소녀 메이블 허버드는 다섯 살 때 성홍열을 앓은 이후 농아가 된 여성으로, 19세에 이르러 10년 연상인 벨의 아내가 되어 죽을 때까지 헌신적인 내조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벨이 어려서부터 청력을 상실한 어머니 때문에 발성법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면, 역시 청각장애자였던 아내 메이블은 전기통신 연구에 박차를 가하게 된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게 두 여성은 벨의 일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이라 할 수 있는데, 벨의 어머니는 1897년에 88세로 사망했으며, 아내 메이블은 벨이 숨을 거둔지 불과 5개월 만에 남편의 뒤를 따랐다. 벨은 1886년에 당시 6세 소녀 헬렌 켈러를 의뢰받아 잠시 개인지도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1876년 벨이 가장 최초로 전화기 발명 특허를 얻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원래 전화의 발명은 이미 20년 전에 이탈리아 출신의 발명가 안토니오 무치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벨의 특허 소식을 듣고 무치는 즉각 소송을 제기했으나, 사업 파산으로 병석에 눕게 된 무치가 얼마 가지 않아 사망하는 바람에 그 문제는 흐지부지 넘어가버렸다. 하지만 그 후 엘리샤 그레이가 개발한 아이디어를 벨이 도용한 사실도 알려지게 되면서 무려 120년이 지난 2002년 미국 의회는 마침내 가장 최초의 전화기 발명자로 안토니오 무치를 공식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새로운 물질의 세계를 탐구한 퀴리 부인

    방사능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두 번씩이나 노벨상을 수상한 퀴리 부인은 라듐 발견의 공로로 1903년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하면서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되었다. 1906년 남편이 교통사고로 일찍 사망한 이후에도 단독으로 연구를 계속해 1911년에도 노벨 화학상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녀의 딸 이렌과 사위 프레데릭 역시 1935년에 노벨 화학상을 공동 수상하게 되면서 한 가족에서 4명이나 노벨상을 타는 진기록도 남겼다. 하지만 그녀는 오랜 기간 방사능에 노출된 탓에 악성 빈혈에 시달리며 고생하다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인류 최초로 새로운 물질의 발견에 일생을 바친 퀴리 부인의 삶이 그렇게 순탄하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가 본명인 그녀는 당시 러시아의 지배하에 있던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부부 교사의 5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녀가 10세 무렵에 결핵을 앓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아버지가 러시아 당국에 의해 실직당하고, 큰언니 조피아마저 장티푸스로 일찍 죽는 등 집안에 불행이 계속 이어지면서 그녀는 몹시 혼란스럽고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힘겨웠던 일은 어머니의 죽음이었는데, 독실한 가톨릭신자였던 어머니의 뒤를 이어 언니마저 잃게 되자 그 후로 그녀는 가톨릭 신앙을 버릴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런 충격을 딛고 일어선 그녀는 고등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할 정도로 머리가 매우 명석했으나 당시 폴란드의 대학에서는 여학생을 뽑지 않았기 때문에 한동안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다.


    다행히 먼저 파리로 유학을 떠나 의사자격을 따고 결혼까지 한 언니 브로니스와바의 초청으로 마침내 부푼 기대를 안고 파리 유학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때 그녀 나이 23세였다.


    성차별이 없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소르본 대학에 들어가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한 그녀는 졸업 후 자상한 인품의 물리학자 피에르 퀴리와 결혼해 프랑스 시민이 되었다. 매우 검소했던 이들 부부는 결혼식도 종교적 의식 없이 간소하게 치렀을 뿐만 아니라, 그녀는 웨딩드레스가 아닌 평상복 차림이었으며, 신혼여행도 부부가 함께 자전거를 이용할 정도로 소박했다.


    그들이 결혼한 1895년은 독일의 과학자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하고 프로이트가 《히스테리 연구》를 발간한 해로 과학과 심리학 분야에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진 해라고 볼 수 있는데, 특히 그 이듬해 우라늄 광석의 특이한 성질이 발견되어 퀴리 부인의 호기심을 자극하게 되었다. 결국 남편 피에르의 도움으로 오랜 각고의 노력 끝에 새로운 원소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한 그녀는 노벨상의 영예를 부부가 함께 안는 기쁨을 누렸다. 하지만 불과 3년 뒤 남편이 마차에 치어 숨을 거두면서 어릴 적 어머니의 죽음 이후로 가장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더욱이 미망인이 된 후에도 그녀의 성공을 시기한 국수주의적 언론에서 그녀가 남편의 제자였던 물리학자 폴 랑주뱅과 불륜관계라는 악의적인 보도를 퍼뜨리는 바람에 성난 군중이 그녀의 집 앞에 몰려와 가정을 파괴하는 비열한 유대인이라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물론 그녀는 유대인이 아니었지만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게 된 퀴리 부인은 한동안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우울상태에 빠져 지내야 했다.


    당시 폭언을 퍼붓는 군중을 피해 어린 두 딸을 데리고 황급히 친구 집으로 피신까지 해야 했던 퀴리 부인이었지만, 그런 어이없는 소문에도 불구하고 스웨덴 한림원은 그녀에게 두 번째 노벨상의 영예를 안겨주는 의연함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두 딸 아렌과 이브 역시 어머니를 모욕한 대중의 어리석음을 비웃기라고 하듯이 이렌은 어머니처럼 과학자가 되어 노벨상을 탔으며, 음악가로 활동한 이브는 국제기구 운동에 뛰어들어 그 공로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훈장까지 받았다. 특이한 점은 이브의 남편 헨리 라부이스도 1965년 유니세프 대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사실 퀴리 부인의 일가에서는 무려 5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나온 셈이다. 그것도 물리학상, 화학상, 평화상을 휩쓴 것이다. 어머니가 숨을 거둘 때까지 곁에서 돌본 이브는 그 후 어머니의 생애를 다룬 전기 《퀴리 부인》을 써서 출간했으며, 102세까지 장수한 뒤 2007년에 뉴욕에서 사망했다.



    예술적 승화의 달인들

    도스토옙스키의 상실과 구원

    톨스토이와 더불어 19세기 러시아문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대문호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뿐 아니라 세계문학사에 길이 빛나는 위대한 소설가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몹시 불행한 삶을 누리며 선과 악의 모순되고 혼란스러운 감정에 휘말려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매사에 심각하고 웃음이나 유머 감각이 부족했던 그는 늘 우울하고 고독했으며, 특히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서 그에게는 항상 곁에서 자신을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다. 물론 그것은 일찍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탓일 수도 있겠지만, 난폭하기 그지없는 주정뱅이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도 그를 우울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5세에 어머니를 잃고 큰 상처를 받았으며, 17세에는 아버지마저 뇌졸중으로 사망했는데, 한때 농노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당시 그 농노들은 법원에서 무혐의로 풀려났다. 졸지에 고아가 된 그는 설상가상으로 그 무렵부터 간질 증세까지 보이기 시작하면서 전적으로 한 살 위인 형 미하일에게 의지하게 되었는데, 작가가 된 후에도 출판업을 하는 형에게 항상 돈타령이나 늘어놓으며 졸라대는 매우 의존적인 태도를 보였다.


    《가난한 사람들》로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한 후 승승장구하던 그는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모임에 가담했다가 당국에 체포되어 사형까지 선고받고 처형장으로 끌려갔으나 총살이 집행되기 직전 특별 사면으로 감형되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다.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극한적 상황을 경험한 그는 그 후 4년간 옴스크 감옥에서 수감 생활을 하는 동안 성서를 접하면서 사회주의를 벗어나 기독교 휴머니즘으로 사상적 전향을 이루게 되었는데, 그런 일련의 과정은 소설 《백치》, 《죽음의 집의 기록》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출옥 후 인근 수비대 근무 중에 알게 된 젊은 과부 마리아와 혼인했으나 거듭되는 간질 발작 증세와 가난 때문에 그 결혼은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어쨌든 10년에 걸친 유형 생활을 마치고 가까스로 귀환한 그는 여전히 궁핍했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도박의 악습에 빠져 좀처럼 헤어나지 못했다. 그런 곤경 속에 힘겨운 나날을 보내던 그는 43세 무렵 그동안 그나마 자신을 챙겨주던 유일한 두 사람, 아내 마리아와 형 미하일이 연이어 사망하면서 성인이 된 이후 가장 큰 시련을 맞고 말았다.


    원래 그는 볼품없는 외모와 작은 체구뿐 아니라 간질병 등으로 열등감이 심한데다가 성격마저 소심하고 매우 신경질적이어서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보였으며,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홀로 서지 못하고 독립적인 판단도 거의 하지 못하는 성품의 소유자였는데, 부모에 이어 아내와 형까지 잃게 되면서 극심한 정서적 불안정과 우울증에 빠지고 말았다. 사실 그동안 그의 아내 마리아는 어머니의 상징적 대리인이요, 형 미하일은 아버지 역할을 대신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상징적 부모가 한꺼번에 사라졌으니 매우 의존적인 그로서는 무척이나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결국, 그는 속기사 안나 스니트키나의 도움으로 그의 대표작 《죄와 벌》, 《도박꾼》 등을 단숨에 완성해 발표할 수 있었는데, 그 후 45세 무렵에 안나와 재혼함으로써 그녀의 헌신적인 보살핌으로 비로소 심리적 안정을 되찾았다. 말년에 이르러 시력을 거의 잃은 도스토옙스키는 전적으로 그녀의 도움에 힘입어 최후의 걸작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집필할 수 있었다. 도스토옙스키가 59세 나이로 사망했을 당시 안나는 35세에 불과했지만, 그 후에도 재혼하지 않고 혼자 지냈으며, 남편이 도박으로 진 빚도 그녀가 다 청산했다. 자신의 일기와 회상록을 저술해 유명해진 그녀는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한 그 이듬해에 얄타에서 세상을 떴다.


    드스토옙스키의 삶에서 부모의 존재는 사춘기 시절에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는 적절한 애도 과정을 겪지 못하였다. 그만큼 상실의 문제는 그에게 매우 중요한 화두였던 셈이다. 따라서 그는 부모를 대신해서 주로 여성들과 형에게 의지했으며, 돈은 그런 상실감을 메워줄 수 있는 유용한 매개자 노릇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오랜 기간 도박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도 그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만성적인 공허감에 시달려야 했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선악의 구분이나 사랑과 미움에 대한 그 어떤 확신도 없었기 때문에 그런 불확실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으로 무조건 믿고 따르는 쪽을 택한 것으로 본다. 그만큼 구원에 대한 갈망은 그를 사로잡은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된 것이다. 세속적인 모든 가치관에서 아무런 해결책도 찾지 못한 그는 자신의 내면에 악의 뿌리가 만연해 있음을 감지하고 오로지 신의 구원에 의지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감지한 악의 뿌리란 결국 오늘날 우리가 무의식적 욕망과 환상이라고 지칭하는 세계가 아닐까.


    도스토옙스키의 작중 인물들은 항상 간음과 살인, 도박과 간질, 광적인 충동 등에 시달리는 불행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런 악마적인 속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결국 신앙에 귀의하는 길 뿐이라고 그는 가르친다. 물론 그 자신 스스로가 이해할 수 없었던 자신만의 고유한 화두 역시 고질적인 도박과 살인에 대한 충동, 하늘에서 내려준 천벌과도 같은 간질병, 이유를 알 수 없는 상실감과 우울증, 죄의식 등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런 모든 질곡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구원의 길을 과연 어디서 찾느냐 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주된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현대인들은 정신과 의사나 정신분석가를 찾아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기도 하지만, 그가 살았던 19세기 러시아에는 적절한 치유책이 없었던 시대였기에 도스토옙스키는 오로지 신앙심과 창작활동을 통해 그 나름대로의 치유법을 찾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동시대의 사람들보다 너무도 시대를 앞서 간 대가를 톡톡히 치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의 위대성과 비범함이 돋보이는 것은 그가 제시한 해결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프로이트 이전에 이미 인간 심리의 근저에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반도덕적 욕망과 환상의 세계가 분명히 존재함을 생생한 묘사로 증언했다는 점에 있다.


    그런 점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연상에 가까운 심리현상을 문학적 기록으로 남긴 최초의 인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비록 그 자신은 모순투성이의 삶을 살았지만, 그가 보여준 세계는 인간 심리의 불완전성뿐 아니라 보편적인 악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가 일생동안 매달렸던 작업은 자신의 내면에 자리 잡은 악마적 속성을 극복하기 위한 구도의 과정인 동시에 불완전한 인간 심리의 내막을 증언하는 용기 있는 고백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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