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노벨상 부부의 아들이었다
저   자 : 얀 뮈르달(역:조경실)
출판사 : 테오리아
출판일 : 2016년 10월

도서정보

■ 책 소개

노벨경제학상 군나르 뮈르달, 노벨평화상 알바 뮈르달, 그리고 그의 아들 얀 뮈르달
특별한 부모가 아닌, 보통의 부모를 원했던 열세 살 소년의 탈출기!

 

《나는 노벨상 부부의 아들이었다》는 스웨덴의 작가이자 칼럼니스트인 얀 뮈르달이 열두 살에서 열세 살이 될 때까지의 추억을 소년의 시각과 언어로 묘사한 자전소설이다. 그런데 그의 작품이 여느 자전소설과 다른 점은, 책의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그의 부모가 노벨상 수상자라는 데 있다.

 

그의 아버지 군나르 뮈르달은 스웨덴식 복지국가 실현의 핵심 담론을 제공한 경제학자로 1974년 영국 경제학자 F.A.하이에크와 공동으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또한 그의 어머니 알바 뮈르달은 사회학자이자 스웨덴 외교관으로 스웨덴 정부가 핵 보유 의지 포기선언을 공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공로로 198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이처럼 부모 가운데 한 명도 아닌, 부모 모두가 노벨상을 받은 집안. 그러한 집안의 자식이라면 어떤 환경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을까.

스웨덴의 작가이자 칼럼니스트인 얀 뮈르달은 1982년부터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린 소설 삼부작을 통해 궁금증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삼부작은 저자와 부모간의 갈등, 더 나아가 저자 입장에서 본 그들의 위선적인 삶 등이 여과 없이 묘사되어 있어 발간되자마자 스웨덴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삼부작 가운데 마지막 작품인 《나는 노벨상 부부의 아들이었다》에서 저자는 열두 살에서 열세 살이 될 때까지의 추억을 소년의 시각과 언어로 묘사했다.

 

■ 저자 얀 뮈르달
스웨덴의 작가, 칼럼니스트이다. 소설, 시, 희곡을 비롯하여 정치·사회 평론, 예술·문학 비평, 학술 서적 등 수십 권이 넘는 책을 출간했다. 또한 미술 전시를 기획했고, 장편영화 및 다수의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제작에도 참여했다.

1960년대 중국의 한 마을에 직접 살며 그 공동체적 경험을 서술한 그의 대표작 《어느 중국 마을에서의 보고서Report from a Chinese Village》는 마오쩌둥 시대의 혁명에 대한 수준 높은 인류학적 보고서로 당시 서구사회의 학계와 언론으로부터 커다란 찬사를 받았다. 또 다른 대표작 《어느 불량한 유럽인의 고백Confessions of a Disloyal European》은 “자주적이고, 학식 있고, 교양 있는 유럽인의 중추 신경을 건드렸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출판된 해 뉴욕 타임스로부터 주목할 만한 열 권의 책 중 하나로 선정됐다.

일찍부터 자신의 부모와 결별하고 급진적인 사회참여 지식인의 길을 걸어온 그는, 지금도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활발한 논객 활동을 펼치고 있다.

 

■ 역자 조경실
역자 조경실은 성신여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산업전시와 미술전시 기획자로 일했다. 현재 바른 번역 소속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 차례
1장 뉴욕에서 다시 스웨덴으로 ... 7
2장 스톡홀름 기자회견장에서 ... 55
3장 피터슨 하우스에서 그들을 기다리며 ... 87
4장 할머니 집으로 가는 길, 기차는 멈추고 ... 135
5장 할머니 집으로 가는 길, 기차는 다시 출발하고 ... 179
6장 나 홀로 스웨덴에서 ... 207

도서요약
나는 노벨상 부부의 아들이었다


1장 뉴욕에서 다시 스웨덴으로

1940년 5월 7일 수요일 새벽, 나는 마틸다 토르덴호에 타고 있었다. 배가 뉴욕 어퍼 만에 정박한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핀란드 해운사 소유의 그 배는 핀란드로 군수물자를 실어 나르는 듯했다. 지난 수개월 동안 핀란드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온 듯했지만 지금은 다시 전쟁이 시작될 모양이었고, 남은 물자는 스웨덴으로 갈 예정이었다. 목재로 된 대형 상자 속에는 비행기로 가득했는데 우리가 배에 오르기 전에 이미 배에 실려 있었다.


비행기와 함께 우리 차도 실렸다. 8기통 엔진이 달린 커다란 허드슨 자동차였다. 아빠 군나르는 작년에 그 차를 싸게 사들였다. 배에는 핀란드에서 일어날 새 전쟁이 쓰일 폭약 통들이 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마틸다 토르덴호는 더 이상 부두에 머물 수 없었다. 통이 배 안에 선적되는 걸 보면서 나는 여동생 시셀라에게 구명정 타는 훈련 따윈 안 해도 되겠다고 말해 주었다.


“어뢰나 부유기뢰로 공격할 필요도 없겠어. 독일 잠수함 선장이 갑판 위에 있는 폭약 통에 그냥 구멍 하나만 내면 될 테니까. 저기에 총알 한 방이면 다 끝날걸. 피융! 쾅! 부웅! 온몸은 산산조각이 나서 손톱만큼도 안 남고 딸꾹질 한번 할 새도 없이 우린 모두 죽을 거야.” 우리가 탄 배가 바로 그런 배였다.


“얀!” 엄마 알바가 소리쳤다. “그런 얘기하지 마라. 애가 겁먹었잖니.” “하지만 진짜잖아요. 엄마, 아빠가 체면, 명성 이런 거 지키려고 우리를 이 배에 태운 거 다 알아요. 엄마는 인정 안 하시겠지만, 어차피 다 아는 사실인걸요.”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나는 평소대로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스웨덴으로 돌아갈 계획 따윈 없었다. 여름방학을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온 후, 가을학기를 시작하면서 나는 증기기관으로 인해 일어난 산업혁명과 철도 전성시대에 대한 연구 과제를 진행하고 있었다. 지난 학기에 공부한 화산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철도모형은 만들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이 가방을 싸라고 말했을 때 나는 그저 책 몇 권만 되는 대로 쑤셔 넣을 수 있을 뿐이었다. 나머지는 그냥 내버려 둬야 했다. 수업시간에 만들기 시작했던 산업 도시 모형은 제대로 건드려 보지도 못했다.


일주일 전 저녁, 갑자기 군나르가 나를 불러 세웠다. 군나르는 우리 가족 모두가 며칠 안에 스웨덴으로 갈 수 있도록 필요한 준비를 마쳤다고 말했다. “이제 짐을 싸는 게 좋겠다.” “스웨덴에는 왜 가는데요?” 나는 물었다. “지금은 말할 수 없지만, 너도 차차 알게 될 거다.” 군나르는 말했다.


내 생각에 그들은 이곳을 떠날 수 있지만 나는 이곳에 남아 학교를 다녀야 했다. “저는 여기 있을게요. 제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내가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고 그냥 내가 시킨 대로 해.”


처음에는 항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이 바뀌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대답하지 마라!” 군나르는 이렇게 말할 게 뻔했다. 항상 이런 식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순간이었고, 내 인생이 걸린 문제였다. 그는 내가 무슨 얘기라도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화를 내려고 내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짐 싸기를 거부한 채 그들이 무슨 말, 무슨 행동을 하든 상관없이 이곳에 머무르겠다고 한 번 더 말했다. “당신이 알아듣게 얘기 좀 해봐요.” 그날 저녁 알바가 군나르에게 말했다. “물론 네가 여기 혼자 남을 수도 있고 우리는 그럴 만한 경제적 여유도 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란다.” 군나르는 말했다. “이건 도덕의 문제야. 농민의 후손인 우리는 나라가 위험에 처했을 때 도망가선 안 된다. 이런 전시에 우리가 너를 미국에 남겨 놓고 간다면 보기에 안 좋지 않겠니. 너를 여기 남겨 두는 일은 도덕적으로 옳지 못해. 사람들은 우리가 특혜를 누린다고 생각할 거다.”


군나르는 사회민주주의자로서 귀족적 특권을 누리거나 자식에게 이득이 되는 입장을 취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알바는 많은 스웨덴 국민들이 우리 집을 우러러보고 있으며 우리를 모범적인 가정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내 기억에 두 사람은 늘 그렇게 얘기했었고, 어렸을 때는 나도 그 말을 믿었었다. 비록 다른 친척들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나도 그들이 얘기하는 그 모든 게 어떤 건지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고, 책임감을 가지며 서민처럼 행동하라는 말. 그건 쇼를 하란 말과 다름없었다. 그들이 무대 위에 있지 않을 때 어떤 행동을 하는지 다른 사람이 알게 해선 안 된다는 뜻이었다.


그렇다. 사람들이 우리 가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은 위선자였다. 알바와 군나르는 스웨덴에서 데려온 카르나와 잉그리드에게 정말 적은 임금만 주고 일을 시켰는데, 뉴욕의 반 친구들 부모님 가운데 누구도 그런 식으로 사람을 부리는 집은 없었다. 대부분 가정부나 보모가 따로 없었다. 미국에서는 교수나 그 정도의 직업을 가진 사람도 가정부를 둘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군나르는 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돈을 벌기는 했다. 하지만 알바가 잉그리드에게 주듯 그렇게 한달에 25달러만 준다면, 다른 집들도 가정부를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스웨덴인 가정부를 어떻게 대우하는지 이웃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는 부끄러워졌다. 심지어 엘리베이터 보이까지 그 얘길 했다. 하지만 그들 자신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알바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그저 좋은 친구 사이에요. 주인, 하인 그런 관계가 아니고요. 그 애들은 공부해서 자기 능력을 기르려고 이곳에 온건데, 집안일도 좀 도와주고 있어요. 외국에 자리 잡은 작은 스웨덴인 공동체라고나 할까요. 우리는 서로 돕는 동료지만, 집안일에서 각자 맡은 역할이 좀 다른 것뿐이에요.”


하지만 지난 가을 일이었다. 알바가 메이시 백화점에서 쇼핑한 뒤, 한껏 신나고 들뜬 목소리로 부엌에 들어와 모델처럼 빙그르르 돌며 카르나에게 새 옷을 보여 주었다. 카르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돌보느라 바쁜 척했다. 그러나 잠시 후, 알바가 자기 방으로 가고 우리끼리만 남게 되었을 때, 얼굴이 하얘져서 이렇게 말했다.


“네 엄마는 전문직 종사자라 연구를 도와줄 비서들도 있고, 아침마다 내가 침대 머리맡에 커피를 가져다주며 깨워주지. 하지만 나는 아침 6시부터 저녁 8시까지 일하고 한 달에 고작 33달러를 받아. 이래서 대학 공부를 시작할 시간이 언제 생기겠어? 네 엄마는 화려한 옷을 하는 데 한 번에 800달러나 쓰면서 정작 자기 아이들을 돌볼 시간은 전혀 없는 모양이야. 그러고선 일하고 있는 내 앞에 와서 값비싼 새 옷 자랑이라니.”


그러면서 카르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내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방금 내가 한 말 신경 쓰지 말. 네 잘못도 아닌데. 벌써 식사 준비할 시간이네. 그냥 네 부모님의 그 번지르르한 말뿐인 행동에 오늘 좀 짜증났을 뿐이야.”


카르나의 말이 옳았다. 이제는 나도 알고 있다. 사람들이 그들의 행동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 자신들만 모르고 있을 뿐이다.


뉴욕의 맨해튼을 바라보며 난간 옆에 서 있는 지금, 이제는 모두 끝이었다. 해는 벌써 바다 위로 솟아 있었다. 마치 첨탑과 성채로 이루어진 동화 속 마을처럼 도시가 아침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2장 스톡홀름 기자회견장에서

건물 바깥은 스톡홀름이었다. 나는 미소를 띠고 앉아 있었다. 내가 앉아 있는 곳에서는 창밖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마음속으로 바깥 경치를 그려 보아야 했다. 일어서서 창가로 갈 수도 없었다. 나는 지금 노르말름스토리의 호텔 방 안에서 군나르, 알바, 시셀라, 카이와 한 줄로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고국에 돌아온 뮈르달 가족은 이곳에서 곧 첫 기자 회견을 시작하려는 중이었다.


우리가 탄 마틸다 토르덴호는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 사이를 지나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노르 곶 위쪽 북극해에서 북동쪽으로 항해하여 핀란드의 항구, 페트사모에 닿았다. 우리는 안전 통행증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우회해서 와야만 했다. 하지만 스톡홀름까지는 배나 기차를 타고 오지 않아도 됐다. 페르알빈 총리가 비행기를 타고 올 수 있도록 조치를 해놓았기 때문이다.


알바와 군나르는 기자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항상 서로를 여보라고 하며 다정하게 불렀다. 그들은 지적 동반자로서 젊고 유능하고 행복하며 서로에게 애정이 넘치는 부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입장에서는 가족 모두가 미련하지 않고 유능해 보여야 했다. 그런데 살도 찌고 시력도 나쁜 내 외모는 그 자체로 수치가 아닐 수 없었다.


이번에는 사진기자들이 우리 가족의 모습을 찍기 시작했다. 군나르는 사진기자가 함께 있으면 늘 하던 방식대로 눈빛과 앞머리를 가다듬고 내 어깨에 계속 손을 올려놓은 채 자신을 향해 있는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기자들은 사진을 몇 장 더 찍었다. 군나르는 다시 모자를 썼다. 마치 콧수염이 없는 영화배우 윌리엄 파월인 척하는 모습이 미국인 같았다. 나는 카메라를 향해 웃고, 웃고 또 웃었다.


나는 그곳에 앉아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절대, 절대 다시는 저 사람들, 저 가족들과 함께 사진 찍는 일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절대, 절대 다시는 이 가족이 기자들을 만나는 자리에 참석하지도 않으리라 속으로 곱씹었다.



3장 피터슨 하우스에서 그들을 기다리며

일 분 일 분이 너무나도 느리게 흘러갔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일찍 온 모양이었다. 나는 엘사 고모에게 말했었다. “엄마, 아빠는 아직 안 일어났을 거예요. 그죠?” 하지만 엘사 고모는 자기도 출근 준비에 바빴기 때문에 나보고 제시간에 나갈 수 있도록 서두르라고만 했다.


잠시 후 안에서 그들이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뭐라고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스웨덴에 온 이후로 거의 일주일째 스톡홀름 인근의 솔나 지역에 위치한 엘사 고모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엘사는 군나르의 여동생이었다. 예스타 고모부는 군대에 징집되어 섬 지역 어딘가에 가 있었고, 가끔 휴가를 받아 집에 오곤 했다. 엘사와 예스타는 둘 다 선생님이라 나 같은 남자아이를 잘 다루었고, 그 집에도 애가 둘이 있어 내가 사촌들과 잘 지낼 거라고 군나르는 생각했다.


나는 예전에도 고모와 함께 지낸 적이 많았다. 어렸을 때 게스타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는데, 할머니가 바쁘거나 힘드실 때 가끔 엘사 고모가 나를 돌봐주곤 했었다. 스웨덴에서 지낼 때 군나르와 알바가 멀리 휴가를 가거나 일 때문에 바쁘면, 자주 친할아버지 댁이나 외할아버지댁, 고모 집, 이모 집, 아니면 다른 친척 집에 맡겨지곤 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오래전부터 그래 왔다.


군나르와 알바에게는 지금이 특히 중요한 시기라 우리 때문에 방해받는 일 없이 작업에 집중해야 했다. 그편이 나에게도 좋았다.


알바와 군나르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방안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미국에서 가져온 플랜터스 상표의 땅콩을 씹으며 그들을 기다렸다. 옷 가방은 엘사 고모가 싸주어 현관에 가져다 놓았지만, 기차표와 여름내 쓸 용돈은 알바가 주기로 되어 있었다. 그들은 나보고 중앙역에서 11시 45분 기차를 타라고 했다.


지금 나는 노르셰핑 인근에 사는 할머니 집에 가려는 중이었다. 할머니가 엘사 고모에게 전화해 나를 보내라고 했다. 그리고 알바에게 기차표를 사주라고 말했다. 부모라면 최소한 그 정도는 해주겠지! 나는 새 학기가 시작될 때까지 로버트 삼촌, 그레타 숙모와 함께 지내기로 했다. 로버트는 군나르의 남동생으로 노르셰핑 외곽에 위치한 마리에보리 시민학교의 교장이었다. 그곳의 기숙사는 원래 방이 많았지만, 지금은 학기 시작 전이라 빈방이 더더욱 많았다. 할머니도 여름 동안 그곳에서 지낸다고 하셨다. 그리고 친가 쪽 사촌들도 모두 그곳에 가 있었다. 엘사 고모 역시 방학이 시작되면 바로 내려올 예정이었다. 고모는 내가 다음 학기부터 스웨덴 학교에 적응할 수 있도록 개인 교습을 해주기로 했다.


칼슬로 역에 제대로 내리려면 그 역에서 내리겠다고 차장에게 미리 말해 두어야 했다. 타거나 내리는 승객이 없으면 기차는 칼슬로 역에서 멈추지 않고 그냥 지나가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나를 그곳으로 보낼 준비를 해줄 때까지 나는 무작정 기다렸다. 알바가 문을 열고 내게 기차표와 용돈이 든 봉투를 주면, 바로 옷 가방을 들고 떠날 참이었다.



4장 할머니 집으로 가는 길, 기차는 멈추고

지금 시각은 1940년 6월 3일 월요일 오후 2시 30분. 스톡홀름 중앙역을 출발한 지 두 시간 반도 넘은 시각이었다. 이제 막 남 쇠데르텔리에 역을 지난 기차는 또다시 선로 위에 멈춰 섰다. 엔진도 멈추지 않은 채 이렇게 측선에 멈춰선 게 벌써 두 번째였다.


많은 사람들로 인해 공기는 탁했다. 얘기하는 사람, 투덜거리는 사람, 코를 훌쩍이는 사람, 기침하는 사람, 뭔가 씹고 있는 사람, 그리고 우는 어린아이에 아기 오줌 냄새, 사람 냄새, 담배 냄새에 먼지가 뒤섞여 공기는 후덥지근하고 눅눅했다. 그리고 가끔씩 내 옆에 누군가가 조용히 방귀를 뀌어 숨쉬기가 곤란할 지경이 되었다. 네덜란드 진인지 시큼한 맥주인지 모를 냄새가 한 번씩 훅훅 풍기는데도 스웨덴 사람들은 창문을 잘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어떤 할아버지나 아줌마가 바람이 너무 세다, 류머티즘이 있다, 감기 걸릴 것 같다 등등의 이유를 대며 창문 닫으라고 소리를 지를 게 뻔했다.


나는 엘로이즈를 머릿속으로 끄집어내려고 노력했지만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고 그녀를 붙잡으려는 순간, 내 손에서 미끄러지듯이 사라져 버렸다. 다른 잡생각들이 자꾸만 그녀를 밀어냈다. 한 시간 동안 화물 열차가 세 대째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열차는 아직도 측선에 멈춰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존은 엘로이즈의 동생이었기 때문에 존과 잘 지내고 싶었고, 엘로이즈 역시 저녁마다 다른 자매들과 기도를 했기 때문에 나 역시 그렇게 했다. 엘로이즈 가족들은 모두 독실한 신자였기에 나는 매주 일요일 그들과 함께 교회에 나갔다. 찬송가를 부르는 엘로이즈를 바라보면서, 그녀가 진심으로 신을 믿는지 어떤지는 몰라도 그냥 계속 이렇게 함께 교회에 나가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존은 다른 면에서도 쓸모가 있었다. 혼자서는 역사적 사건을 연출하는 놀이를 제대로 할 수 없었지만 존과 함께라면 가능했다. 크리스마스가 끝나고 존의 집에서 지낼 때, 우리는 존의 장난감 병사들을 가지고 남북전쟁의 발단이 되었다고 알려진 하퍼스 페리 습격을 연출했다. 존 브라운 역할을 맡은 나에게 남부군 총사령관, 로버트 E. 리의 역할을 맡은 존이 연방정부의 무기고와 병기창을 점거하려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고, 나는 방 한가운데 서서 오른손을 쭉 뻗어 집게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우렁찬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전능하신 하느님의 권한으로 노예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다!” 이 말을 하면서 나는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존 브라운 역할 놀이를 하면서 나는 온몸에 짜릿한 전율을 느꼈지만, 존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속에서 느껴지는 게 없는지 그저 배고프다는 소리만 했다. 평소대로라면 나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 그 장면들을 머릿속으로 되새겨 보았을 테지만, 그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존과 노는 이유는 어쨌든 엘로이즈 때문이었으니까.


엘로이즈가 문 앞으로 다가오면 내 얼굴은 빨개졌고 마음속으로는 엘로이즈를 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으나, 차마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숲과 갈대가 무성한 만의 풍경을 바라보는 지금도 오로지 엘로이즈에 대한 기억만 강렬하게 남아 있을 뿐 존 생각은 전혀 나지 않았다. 엘로이즈를 떠올리기만 하면 한 대 맞은 듯 가슴이 아프고 눈이 따끔거렸다.


나는 창밖을 응시하면서 늙은 아저씨, 아줌마, 아이들, 먹고 떠들며 말싸움하고 오줌 냄새나는 그 인간들과 나 사이에 벽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이미 사라진 엘로이즈의 모습은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창밖의 헛간은 부서진 채 그대로 서 있었고, 내 코에는 석탄 그을음이 묻어났으며, 그 늙은 아저씨들이 떠드는 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그때 갑자기 기차가 덜컹거렸다. 연결 사슬이 덜컹거리고, 열차의 범퍼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연기 내뿜는 소리, 쾅쾅 뭔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흔들리고 밀리면서 열차는 천천히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얼룩진 유리창밖 풍경도 바뀌기 시작했다. 이제 헛간과 호수는 보이지 않았고, 소나무 숲이 계속 이어졌다. 기차의 속력이 빨라지자 오래된 열차 칸의 찌걱거리는 소리와 덜커덩거리는 소리, 철로에서 들리는 쿵쿵거리는 소리로 뒤에 앉은 남자들의 대화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창밖으로는 스웨덴의 풍경이 끊임없이 스쳐 지나갔다.



5장 할머니 집으로 가는 길, 기차는 다시 출발하고

갑자기 눈앞에 엘로이즈가 나타났다. 우리는 파티에 함께 있었고, 내 배 속은 이미 상태가 심각했다. 나는 엘로이즈를 따라 파티에 갔다가 그녀의 친구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카펫과 값비싼 책상 위, 그리고 온 사방에 먹은 것을 토해 냈다. 모두가 역겹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엘로이즈는 이렇게 외쳤다. “그 소파 새로 산 건데!”


그 날은 엘로이즈와 가장 친한 친구의 생일로, 그녀는 생일파티에 반 친구들을 초대했고, 엘로이즈의 친척인 나도 함께 와도 좋다고 허락했다. 하지만 존은 함께 갈 수 없었다. 존은 너무 어려서 안 된다고, 엘로이즈가 점심을 먹으며 말했다.


그날 오후, 존은 나를 자극했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나는 잉크와 비누를 먹을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존은 주머니에서 녹색 비누 하나를 꺼냈다. “못 먹을걸!” 존이 말했다. “당연히 먹을 수 있어.” 내가 말했다. 비누는 정말 끈적끈적하고 맛이 없어 보였다. 존은 점심을 먹은 직후부터 비누를 주머니에 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못 먹을걸!” “아니, 먹을 수 있어. 근데 그 비누 좀 더러워 보인다.” “씻어오면 되지.” 존은 화장실로 가서 비누를 잘 씻은 다음 내 앞에 다시 내밀었다.


그래서 나는 비누를 먹었다. 존이 나를 자극했기 때문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비누는 끈적거렸고 역겨웠으며, 맛도 끔찍했다. 나는 연신 트림을 하면서도 그 역겨운 비누를 천천히 씹었다. 그리고 입안에 가득 찬 물컹거리는 덩어리들을 꿀꺽 삼켜 버렸다.


결국 나는 엘로이즈와 그녀의 친구들이 모두 예쁘게 옷을 차려입고 놀고 있는 방 한가운데에 서서 토하고 말았다. 나는 존이 내게 복수한 거라고 생각했다. 나 때문에 엘로이즈도 그 집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다음 날, 나는 세인트폴의 앨버트 할아버지 댁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할 때 엘로이즈는 나를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음 역은 칼슬로입니다.” 차장은 문가에 서서 외쳤다. 그리고 내 옆으로 와 말했다. “이번 역에서 내려야지.”


자리에서 일어나 승강구로 가면서 나는 이제 다시 엘로이즈를 떠올릴 수 없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비누를 먹고 토하던 순간의 느낌이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끔찍한 수치심이 되어 밀려왔다.



6장 나 홀로 스웨덴에서

내가 열세 살이 되기 3주 전, 그들은 미국으로 돌아갔다. 나를 히틀러 세상이 되어버린 스웨덴에 남겨놓은 채 자기들끼리만 뉴욕으로 돌아갔다.


히틀러가 마음만 먹으면 곧바로 점령할 수 있는 이곳 스웨덴의 일요일 아침이었다. 스웨덴 사람들은 덴마크인들처럼 절대 스스로 나라를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미국에는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보다 훨씬 괜찮은 성직자들이 많았고, 그들이야말로 진정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고귀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미국에만 있었고, 그런 미국 사람들만이 히틀러의 목을 비틀어 죽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가족들이 모두 동의한 가운데 1940년 여름을 노르셰핑 외곽에 위치한 마리에보리에서 로버트 삼촌, 그레타 숙모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로버트 삼촌이 다소 어수룩한 편이라면, 코끝이 뾰족한 그레타 숙모는 성격이 진짜 사나웠다. 할머니도 여름 동안은 이곳에 와서 손자들을 돌보았다. 할머니는 내가 예전에 기억했던 모습보다 훨씬 늙어 있었다. 또 이곳 마리에보리에 사촌들이 모두 와 있었는데, 다들 나보다 나이가 한참 어렸다.


아침에는 늘 오트밀로 만든 죽이 나왔다. 사촌들과 나는 커다란 학생식당에 앉아 아침을 먹었다. 학생식당 유리문 밖은 정원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전날, 그날에 그랬듯이 그리고 지난주, 그 지난주에 그랬듯이, 스웨덴 브로비켄의 풍경은 계속 똑같은 잿빛을 띤 초록색 천지였다. 열기로 인해 공기는 숨이 막힐 듯했고, 지평선 쪽에서는 천둥이 치고 있었다. 파리들은 윙윙거렸고, 안개는 점점 짙어졌다. 하지만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이런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눈에 힘을 주고 사물을 뚫어져라 쳐다보면 그 뒤의 진짜 세계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게 이런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이 알게 해서 좋을 게 없었다.


주위의 어린 사촌들은 아침을 먹으면서 쩝쩝 소리를 냈다. 나는 죽 한 그릇을 앞에 놓고 앉아 시력을 다시 돌려주셔서 감사하다고 신에게 감사 기도를 드렸다. 어제는 빵에 바를 버터도 치즈도 보이지 않았는데, 오늘은 우유 사이로 버터 그릇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말을 했다가 그레타 숙모가 듣기라도 한다면, 그녀는 ‘거만한 상류계급이다’, ‘지금 전쟁 중인 거 모르느냐?’, ‘독일 군대가 점령한 프랑스에서 어린애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생각 안 해 봤느냐?’며 온갖 잔소리를 늘어놓았을 것이다. 나는 문가에 서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숙모를 쳐다보았다. 나는 상대방이 뭐라고 말할지 이미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대화할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차라리 하품이나 하면서 입 다무는 게 속 편했다.


일요일 아침이라 수업이 없었기 때문에 학교는 거의 텅 비어 있었다. 감사 인사를 하자마자 나는 자리를 벗어났다. 나는 계단을 천천히 걸어올라 다락에 있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곳은 매우 조용했다. 이제야 완전한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그레타 숙모는 예리한 사람이어서 어디에 가면 나를 찾을 수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도서관에서 나를 찾아내 오후에 여자들이 몇 명 올 예정이니 진입로를 청소하라고 말했다. 학생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으니 아마도 주부 모임이나 여성 단체 모임이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점심을 먹고 있을 때 여자들이 가든파티를 하러 왔다. 여자들이 정원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나는 할머니와 테라스에 앉아 산딸기 주스를 마시며 그들을 보았다.


닭장 같다! 여자들은 풀밭 위를 이리저리 걸어 다니며 닭들처럼 꼬꼬하고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갑자기 이 모든 소리와 동작이 멈췄다. 내가 그렇게 정지 화면으로 만들었다. 돌아가다 멈춘 영화 필름처럼 화면이 정지했다.


나는 잔디밭 위에 서 있는 그들 모두의 시간을 그대로 멈추게 만들었다. 검은 머리 여자에게 다가가 손을 뻗어 만지려고 할 때, 시간이 심하게 떨리면서 원래대로 돌아가려 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나는 그 속에 있다가 사람들 눈에 띄는 일이 없도록 재빨리 테라스로 돌아갔다.


그때 할머니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얀, 꿈꾸는 듯한 표정이구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말했다. 나는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카르나를 떠올려 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갑자기 내 머리카락을 만지는 그녀의 손의 감촉이 느껴졌지만, 바로 다음 순간 손은 사라지고, 나도 모르게 펄쩍 뛰면서 숨이 멎을 뻔했다. 그리고 이제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그녀 역시 색깔은 사라지고 형태도 흐릿해진 말의 그림자가 되었다.


그렇다. 비록 카르나는 작년까지 실제로 존재했고 지금도 스웨덴 어딘가에 있을 테지만, 이제는 영영 사라졌다. 이렇게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 나는 그녀의 영상을 눈앞에 불러내려고 애쓰지 말았어야 했다. 더 이상 그래서는 안 됐는데, 그건 내 실수였다. 그녀를 다시 불러내는 순간 카르나는 텅 비어 버렸고 빈 말뿐인 존재가 되어 버렸다.


나는 멀리서 우르릉거리는 천둥소리를 들었다. 브로비켄 아래부터 회색빛 옅은 안개가 깔리기 시작하더니 테라스 주변에도 온통 회색빛 열기로 가득 찼다. 여자들은 여전히 꼬꼬하고 울었다. 여자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그들의 얼굴도 다르게 보였다. 나는 다시 한 번 내 앞의 그림을 바꿔 보려고 노력했지만, 돌아가다 걸린 필름처럼 뻣뻣해져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는 아무리 눈에 힘을 줘도 아무것도 바꿀 수가 없었고, 꼬꼬하고 우는 여자들은 종종걸음을 치며 계속 돌아다녔다. 마리에보리 전체가 회색 베일이 되어 나를 숨 막히게 했다. 시간은 닫혀 버렸다. 그리고 나는 결코 여기서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나는 스웨덴에 갇혔다.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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