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의 운명
저   자 : 문재인
출판사 : 가교
출판일 : 2011년 06월

도서정보

■책 소개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에 대한 문재인의 증언록

 

이 책은 노 대통령이 생전에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고 표현할 만큼 신뢰했던 평생의 동지, 문재인의 시각에서 본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에 대한 증언이다. 두 사람의 ‘운명’ 같은 30년 동행을 통해서 본 자신의 삶의 발자취에 대한 기록과 함께,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 비사 가운데 처음 공개되는 내용이 다수 포함돼 있다.

 

문 이사장은 책의 서문에서 책을 펴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책을 쓰기로 생각을 한 것은, 한 가지 이유에서다. 또 한 정권이 끝나간다. 국민들은 희망을 갈구하고 있다. 더 이상 절망의 시기가 반복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이명박 대통령과 이명박 정부가 역사에 반면교사(反面敎師)라면,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역사에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될 수 있도록 다양한 증언을 남기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노무현 대통령과 한 시대를 같이 살았던 사람들,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함께 했던 사람들 모두가 지고 있는 첫 번째 책무는 자기가 보고 겪었고 일했던 내용을 증언하는 것이다. 다음 시대에 교훈이 되고 참고가 될 내용을 역사 앞에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이제 누군가는 노무현 대통령을 극복해야 한다. 이제 누군가는 참여정부를 넘어서야 한다. 성공은 성공대로, 좌절은 좌절대로 뛰어넘어야 한다. 그런 바람으로 펜을 들었다.”

 

책은 모두 4부로 구성되었으며, 문 이사장이 처음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 함께 노동ㆍ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시기는 물론 서거 이후 지금까지의 30여년 세월 동안의 인연과 그 이면의 이야기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 저자 문재인
1952년 경남 거제에서 출생. 1971년 부산 경남고등학교 졸업, 1980년 경희대학교 법대 졸업. 1980년 제22회 사법고시 합격. 1982년 노무현 변호사와 합동법률사무소를 시작.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과, 민주사회를 위한 부산-경남 변호사모임 대표, 천주교 인권위원회 인권위원과 부산NCC 인권위원, 부산 YMCA 이사, (사)노동자를 위한 연대 대표. 19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 1987년 부산 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 1995년 법무법인 부산 설립, 2002년 노무현 대통령후보 부산 선거대책본부장, 2003년, 2005년 청와대 민정수석, 2004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2007년 청와대 비서실장, 2007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 추진위원회 위원장, 2009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의위원회 운영위원장. <노무현재단> 이사장

 

■ 차례
강물이 되어 다시 만나기를

 

제 1부 만남
1. 그 날 아침
2. 첫 만남
3. 동업자
4. 선배처럼 친구처럼
5. 인권변호사의 길로
6. 동지
7. 열정과 원칙
8. 87년 6월, 항쟁을 하다
9. 노동자 대투쟁과 노 변호사의 구속
10. 노 변호사를 국회로 보내다
11. 혼자 남다
12. 동의대 사건과 용산참사
13. 조작간첩 사건
14. 지역주의와의 싸움
15. 2002년의 감격

 

제 2부 인생 
1. 아버지와 어머니
2. 가난
3. 문제아
4. 대학, 그리고 저항
5. 구속, 그리고 어머니
6. 아내와의 만남
7. 구치소 수감생활
8. 강제징집
9. 공수부대
10. 고시공부
11. 다시 구속되다
12. 유치장에서 맞은 사시합격
13. 변호사의 길로

 

제 3부 동행
1. 청와대로 동행
2. 참여정부 조각(組閣) 뒷얘기
3. 서울 생활, 청와대 생활
4. 대북송금 특검
5. 검찰 개혁
6. 국정원 개혁
7. 권력기관의 개혁
8. 사회적 갈등관리
9. 노동사건
10. 미국을 대하는 자세
11. 고통스러운 결정, 파병
12. 아픔
13. 대통령, 재신임을 묻다
14. 자유인
15. 히말라야
16. 카트만두에서 접한 탄핵
17. 탄핵대리인
18. 시민사회수석
19. 대연정, 대통령의 고뇌
20. 수사지휘권 발동
21. 사법개혁의 계기
23. 공수처와 국가보안법
24. 사임
25. 마지막 비서실장
26. 한미 FTA
27. 남북 정상회담
28. 노란 선을 넘어서
29. 정치라는 것
30. 미국 쇠고기 수입문제
31. 그해 겨울
32. 퇴임
33. 청와대 떠나는 날
34. 시골생활
35. 농군 노무현
36. 정치보복의 먹구름
37. 비극의 시작
38. 치욕의 날

 

제 4부 운명
1. 상주 문재인
2. 그를 떠나보내며
3. 눈물의 바다
4. 작은 비석, 큰마음
5. 국민의 마음을 새긴 추모박석
6. 그가 떠난 자리
7. 다시 변호사로 돌아오다
8. 길을 돌아보다
9. 운명이다

도서요약

문재인의 운명


강물이 되어 다시 만나기를

어떤 이들에게 '그를 떠나보낸 날'은 여전히 충격과 비통함이며, 어떤 이들에게 '노무현'은 아직도 서러움이며 아픔이다. 어떤 이들에게 '그와 함께 했던 시절'은 그리움이고 추억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 있다. 이제 우리는 살아남은 자들의 책무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그가 남긴 숙제를 고민해야 한다. 노무현 시대를 넘어선 다음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언제까지나 과거에 머무를 순 없다. 충격, 비통, 분노, 서러움, 연민, 추억 같은 감정을 가슴 한 구석에 소중히 묻어두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냉정하게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그를 '시대의 짐'으로부터 놓아주는 방법이다. 그가 졌던 짐을 우리가 기꺼이 떠안는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다. 노 대통령과 나는 작은 지천에서 만나, 험하고 먼 물길을 흘러왔다. 여울목도 많았다. 그러나 늘 함께 했다. 이제 육신은 이별했다. 그러나 앞으로도 나와 그는, 정신과 가치로 한 물줄기에서 만나 함께 흘러갈 것이다. 바다로 갈수록 물과 물은 만나는 법이다. 혹은 물과 물이 만나 바다를 이루는 법이다. 어느 것이든 좋다.



만남

1982년 8월, 사법연수원을 수료하면서 판사를 지망했다. 연수원 성적이 차석이어서, 수료식에서 법무부장관상을 받았다. 사법고시 합격자 수가 많지 않던 때여서, 연수원을 마치면 희망자 전원이 판사나 검사로 임용됐다. 그런데 막판에 나는 판사 임용이 안 된다고 했다. 유신 반대 시위로 구속된 전력 때문이었다. '왜 데모를 했나, 그게 언제였나?' 나 혼자만 치른 30분 정도의 면접. 그게 다였다.


할 수 없이 뒤늦게 변호사 개업으로 방향을 바꿔야 했다. 〈김&장〉을 비롯해 괜찮은 로펌 여기저기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조건도 좋았다. 그러나 내가 생각했던 변호사의 상(像)과 너무 달랐다. 꼭 인권변호사는 아니더라도 서민들이 겪는 사건 속에서 억울한 사람을 돕고 보람을 찾는 그런 모습이 내가 그렸던 법률가 상이었다. 그래서 그냥 보통 변호사의 길을 가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만난 게 노무현 변호사였다. 그런데 그 과정과 인연이 묘했다. 원래 그와 일하기로 했던 사법고시 동시 박정규가 검사로 임용되면서, 대신 나를 소개한 것이다. 한번 만나보라고 해 노 변호사를 찾아갔다.


나는 그 때까지 노 변호사를 전혀 몰랐다. 수수하다 못해 허름한 건물에서 처음 만난 그와의 만남이 내 평생의 운명으로 이어질 줄은 상상도 못했다. 처음 만남은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느낌이 달랐다. 그때엔 다들 변호사라 해도 대부분 권위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목엔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노 변호사는 풍기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아주 소탈했고 솔직했고 친근했다. 그런 면에서 동질감 같은 게 느껴졌다. 그날 바로 같이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그와의 운명적 만남이 평생으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노 변호사는 나를 편하게 대해줬다. 그리고 처음부터 나를 많이 존중해줬다. 내게 늘 높임말을 썼다. 노 변호사가 나를 대해주신 태도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노 변호사와 함께 일을 시작하기 전, 그는 이미 두 건의 시국사건을 맡아 '그 바닥'에 반 정도 발을 내디딘 상태였다. 이른바 '부림사건'과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이었다. 노 변호사는 사건을 맡게 되자 가장 열심히 했고, 변론을 주도했다. 피고인들이 당한 고문과 장기간의 불법구금을 생생하게 폭로한 것도 노 변호사였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반론에 임했다. 나는 처음부터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으려고 작정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를 찾아오는 사건을 피하지 않았고, 그들의 말에 공감하면서 열심히 변론했다. 차츰 우리는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울산, 창원, 거제 등을 망라하는 지역의 노동인권사건을 총괄하는 센터처럼 돼버렸다.



노 변호사를 국회로 보내다

88년 4월, 제13대 총선에서 노 변호사는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해 초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에게서 영입제안이 있었다. 대선에서 패배한 '양김'이 재야인사를 이루면서 다투어 영입하던 때였다. 나는 그 선거에서 사용한 노 변호사의 선거포스터를 지금도 기억한다. 달동네 판자촌을 배경으로 수수한 모습에 그러나 강한 눈빛으로 서있는 흑백톤의 사진이었다. 선거 구호는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이었다. 그때 썼던 '사람 사는 세상'을 그 후 줄곧, 심지어 대통령 재직 중에도, 그리고 퇴임 후에도 사인글로 썼다.


노 변호사는 당선되자마자 국회 청문회 스타가 돼 우리를 뿌듯하게 했다. 그러나 영광도 컸지만, 좌절과 고통도 많았다. 나는 그의 좌절과 고통을 볼 때마다 그의 정치 입문을 찬성했던 것을 후회했다. 그도 힘들 때는 '당신들이 정치로 내보냈으니 책임지라'고 농담처럼 말하곤 했다. 정치를 그만 둘 기회가 한 번 있긴 했다. 종로를 버리고 부산 강서에서 출마해 낙선했을 때였다. 그때 그는 내게, 이번에 낙선하면 정치를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낙선하자 오히려 원칙의 정치인, 바보 노무현으로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는 이변이 일어났다. 그 힘으로 재기했고, 끝내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비운의 일을 겪고 나니, 역시 처음부터 정치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말렸어야 했다는 회한이 남는다.



2002년의 감격

2002년 대선에서 운명의 날은, 대선 전날이었다. 그런 선거가 또 있을까. 선거 전날 밤, 정몽준씨가 전격 후보단일화 약속을 파기하고 지지를 철회했다. 전국이 요동쳤다. 선거는 이제 망친 것처럼 참담한 분위기였다. 서울의 주변 핵심 인사들이 모두 노 후보에게 정몽준씨를 직접 찾아가라고 종용했던 모양이다. 잘 안됐던지, 나에게 전화가 왔다. 내가 (노 후보를) 설득을 좀 하라는 것이다. 어쨌든 가시게 됐다. 문전박대를 당했다. 씁쓸하게 돌아오는 모습이 오히려 지지자들을 분노하게 했다.


이튿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하나 밖에 없었다. 투표참여를 독려해 투표율을 높이는 것이다. 부산은 전날 밤 선대본부 전화팀을 해산시킨 상태였다. 급히 다시 불러 모아 아는 지인들에게 투표참여를 호소했다. 우리만 그런 줄 알았더니 많은 국민들이 같은 일을 했던 모양이다. 국민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오후 6시 선대본부 사무실 TV앞에 모두 앉았다. 최종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예상대로였다. 우리의 승리였다. 모두 끌어안고 환호했다. 누구는 울먹이며 승리를 자축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내 생애 가장 기쁜 날 중 하나였다. 당선이 결정되자 거리엔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노 변호사와 함께 최루탄을 맞으며 누빈 거리였다. 그 거리에 기쁨이 가득했다. 영원히 계속 되었으면 싶은 순간이었다. 앞으로 겪게 될 고통이나 고난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카트만두에서 접한 탄핵과 탄핵 대리인

청와대에서 나온 후 일체 소식을 끊고 지내다 카트만두에서 시장과 인근 사원을 구경 다니며 쉬던 중, 우연히 탄핵 소식을 접했다. 호텔에서 영자지 기사를 찬찬히 읽어보니 국회에서 야당이 노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발의했다는 뜻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깜짝 놀랐다. 한나라당은 대통령 취임 후 한 달이 채 안 됐을 때부터 탄핵을 말했다. 내가 그만두기 얼마 전에도 민주당 조순형 대표가 탄핵을 말한 적이 있었다. 늘 반복되는 정치공세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 상황에서 그냥 여행을 계속하기는 어려웠다. 일단 돌아가서 상황을 본 다음, 다시 여행을 하기로 했다. 귀국한지 얼마 안 돼, 대통령 기자회견이 있었다. 기사를 보니 탄핵 반대여론이 압도적이었고, 대통령의 사과를 전제로 한 탄핵안 철회 해법이 주장되기도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강경하고 원칙적인 입장을 밝혀 오히려 야당이 전의를 가다듬도록 만들었다.


결국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의결됐다. 대통령은 내게 탄핵대리인단 구성을 비롯해 법적 대응 전반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대리인들은 중립적이면서 명망과 실력을 두루 갖춘 분들을 모시기로 했다. 어떤 분들이 좋을지 여러 사람과 상의한 후, 한 분 한 분 찾아가 부탁을 드렸다. 모두 흔쾌히 동의해줬다. 나는 대리인단 간사로서 실무적 역할과 함께 홍보를 맡았다. 여론전도 중요했다. 나는 한편으로 헌법학자들을 비롯한 법학자들과 법률가들의 탄핵반대 의견을 이끌어 내는 노력도 했다. 자발적으로 뜻을 모아 다수의 연명으로 또는 학회 이름으로 탄핵반대 성명을 내준 분들도 많았다. 5월 14일, 드디어 헌재결정이 내려졌다. 기각이었다. 함께 고생한 대리인들과 감격의 포옹을 하며 기쁨을 나눴다.



남북 정상회담

비서실장을 하는 동안 가장 큰 일은 2007년 10월의 남북정상회담이었다. 참여정부의 남북정상회담 기본 원칙은 국정원, 통일부 등 대북 관련 공식기구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과거처럼 물밑에서 비선을 내세워 추진하지 않는다는 방침이 확고했다. 또한 성과가 담보되지 않는, 만남 자체를 성과를 삼는 회담은 하지 않는다는 방침도 확고했다. 그래서 6자회담을 통해 북핵문제가 타결된 연후에만 남북정상회담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6자회담 타결 전에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해서 혼선을 빚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정상회담이 열리기까지 많은 과정이 있었다. 2005년 6월 6/15공동선언 5주년을 맞아 대통령은 정동영 통일부장관을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평양에 보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게 했다. 이때 정 특사는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6자회담을 조기에 재개하고, 그 성과를 이어받아 남북정상회담도 열고 싶다는 대통령 의중을 전달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좋은 시기가 되면 날을 잡자고 했다.


2006년 6월 초, 우리 주도의 구상으로 미국이 북한 계좌를 동결한 BDA 문제가 풀리면서 김만복 국정원장이 남북장관급 회담차 내려온 북측 수석대표를 통해 '남북정상회담 논의를 위해 대통령 특사를 보낼 의향이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7월 말 북한을 다녀온 김 원장이 정상회담 추진에 합의를 하고 왔다. 다음부터는 급물살을 탔다. 실무접촉도 진행됐다. 정상회담 일정이 도출됐다. 8월 28일이었다. 대단히 촉박한 일정이었다.


회담준비가 한창일 때 북한에서 수재가 났다. 북측에서 회담연기를 제안했다. 아쉬움이 있었지만 준비는 훨씬 충실하게 할 수 있었다. 중간에 북한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회담 준비사항 협의차 서울에 내려왔다. 그런데 우리가 제기했던 주요 의제에 대해 갖고 온 내용이 거의 없었다. 노 대통령은 노골적으로 실망을 표시했다. 나중에 다행히 북측이 이를 많이 수용해서 회담의 일찬 성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청와대 떠나는 날

2월 24일 밤, 대통령이 차관급 이상을 모두 청와대로 초대해 마지막 식사대접을 했다. 만찬이 끝나고 비서실장 공관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이삿짐을 싣고 먼저 양산으로 떠났다. 지난 세월 생각과 앞으로 살아갈 걱정에 혼자서 보내는 참여정부 마지막 날 밤이 서글펐다.


2008년 2월 25일, 대통령을 모시고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열리는 차기 대통령 취임식에 가야 했다. 차기 대통령에게는 취임식이지만 물러나는 대통령에게는 이임식도 없는 쓸쓸한 퇴장의 자리다. 에콰도르 대통령 취임축하 특사로 갔을 때, 퇴임 대통령 이임식이 취임식 전날에 있었다. 취임축하 사절들도 대부분 참석했다. 퇴임 대통령이 자기 치적을 열거하는 연설을 너무 오래해 지루했다. 그래도 이임식을 별도로 하는 것이 참 좋아보였다. 그에 비하면 우리의 퇴임 문화는 너무 척박하다.


대통령 취임 행사가 끝나고 서울역으로 이동했다. 대통령과 우리는 KTX로 내려가게 돼 있었다. 서울역엔 많은 사람들이 환송을 위해 모여 있었다. 수많은 인파 가운데 하염없이 울면서 대통령을 떠나보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중국 동포들이었다. 2003년이던가, 자신들의 힘들고 어려운 처지를 호소하여 단식농성 하고 있을 때, 법무부 등 여러 곳의 여러 반대를 무릅쓰고 대통령이 찾아가 격려해 준 일이 있었다. 그 일이 고마워서 서울역까지 환송 나온 것이다.


대통령은 환송 나온 사람들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기차에 올랐다. 봉하마을까지 함께 내려갈 많은 인사들이 동승했다. 대통령은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말렸는데, 전 현직이나 청와대 직원들이 많이들 함께 탔다. 봉하마을엔 이미 엄청난 인파가 운집해 있었다. 환영인사에서 대통령은 인사 말 끝에 크게 외쳤다. "야~~ 기분 좋다!" 나도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야, 나도 해방이다!'



정치보복의 먹구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서울은 물론 전국에서 촛불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노 대통령은 대단히 신중하고 절제된 모습을 보여줬다. 참여정부에 책임을 전가하는 이명박 정부와 당국자들 발언이 연이어 터져 나와 속으로는 마음이 상했을 텐데도, 현직 대통령을 존중하고 배려했다. 그러나 대통령도 우리도 촛불시위의 후속 대응이 정치보복이고, 보복의 칼끝이 우리에게 향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정치보복의 시작은 참여정부 사람들에 대한 치졸한 뒷조사였다. 주변 인물들을 대놓고 잡아들이며 약점을 캐고 있다는 얘기도 속속 들려왔다. 대통령도 당신을 모셨던 사람들이 겪는 고초를 모두 듣고 있었다. 칼끝은 슬슬 대통령에게 겨눠지기 시작했다. 먼저 대통령 기록물을 두고 망신주기가 시작됐다. 역사상 가장 많은 기록물을 남기고 이관한 대통령을 '기록물을 빼돌린 파렴치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코미디가 벌어졌다. 과거에는 퇴임 직전, 기록물을 폐기해 버리거나 전직 대통령이 집으로 가져가 버렸다. 관련법을 만든 건 바로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더구나 복제본은 노 대통령이 가지고 있었고, 그 속의 문서가 밖으로 유출된 것도 아니었다. 노 대통령 자신도 열어보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설령 법 위반일 수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얼굴 붉히면서 덤벼들 일이 아니었다.


기록물 사건이 마무리되니까 이번엔 쌀 직불금 문제를 갖고 망신을 줬다. 마치 참여정부에서 잘못한 것을 자신들이 설거지하는 것처럼 몰아갔다. 그 무렵이 돼서야 '아, 이명박 정부가 정치적 대립국면을 형성하고 있구나'라는 느낌을 갖게 됐다. 이전 정부 탓으로 떠넘기는 정치적 차원을 넘어, 상당한 악의를 갖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비극의 시작

대통령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기업이 표적이 되기 시작했다. 그 시기 대통령은 좀 이상했다. 당시 대통령도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모르다가, 우리가 사실관계 파악을 위해 권 여사님에게 묻고 권 여사님이 점차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와 같이 사실관계를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 평소 같으면 굉장히 야단을 치고 화를 내실만도 한데, 단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게 이상하게 보였다.


검찰과 언론이 한 통속이 돼 벌이는 여론재판과 마녀사냥은 견디기 힘든 수준이었다. 대통령을 아예 파렴치범으로 몰아갔다. 검찰에서는 홍만표 수사기획관이 아침저녁으로 공식 브리핑을 했다. 중수부장 이하 검사들도 언론에 수사상황을 모두 흘렸다. 심지어 검찰관계자라는 이름의 속칭 '빨대'가 이야기를 더 풍부하게 만들었다. 뇌물로 받은 1억 원짜리 시계를 논두렁에 갖다 버렸다는 '논두렁 시계' 소설이 단적인 예이다. 사법처리가 여의치 않으니 언론을 통한 망신주기 압박으로 굴복을 받아내려는 것 같았다. 언론은 기꺼이 그 공범이 됐다. 당시 대통령은 워낙 억울한 부분이 많아, 법률적 대응 외에 정치적 대응을 할까도 고민했었다.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정치적 저의에 대해선 짚고 넘어가면서 정면으로 대응하는 방식을 검토했다. 대통령과 우리는 그때 엄청나게 인내하면서 대응했다. 그 일을 겪고 보니 적절한 대응이었는지 후회가 많이 남는다. 물론 그랬으면 대통령이 더 후련해하고 더 힘을 내게 됐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당신의 마음이 그런 줄 알았으면 우리라도 몸부림을 쳐봤어야 했는데'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대통령은 어쩌다 그런 곤경에 처하게 됐을까. 그는 가난했다. 가난이 그를 공부에 매달리게 했고, 가난이 그를 인권변호사의 길로 이끌었다. 그가 가난하지 않았다면, 자신처럼 힘들었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을지 모른다.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돕겠다고 소박하게 시작한 일이 인권변호사였고, 민주화운동이었고, 정치는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대통령까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자신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처음에 변호사 하면서 가난에서 겨우 벗어났지만, 다른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을 돕는 삶으로 빠져들면서 자신은 도로 가난해졌다. 봉하마을은 외진 곳이어서 땅값이 엄청 싼데도 사저 건축비용이 없어 은행 대출을 받았다.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돈도 빌리게 됐다. 노 대통령 서거 후 상속신고를 하면서 보니 부채가 재산보다 4억 원 가량 더 많았다.



상주 문재인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 서거 소식은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다. 사람들은 믿기지 않는지, 나에게 묻고 또 물었다. 대통령의 비보를 접하고 한편으론 견딜 수 없는 자책이 밀려왔다. 나중에야 들었다. 서거 직전 마지막 주말을 혼자 지내셨다. 전날, 사저 안에 비서관들이 있는 공간으로 직접 담배를 가지러 잠시 들르셨다. 마치 마지막 작별이라도 하듯 그들을 한동안 물끄러미 보시곤 아무 말씀도 없이 나가셨다. 그리고 23일 새벽 집을 나서, 그 먼 길을 떠나셨다. 언제부터였을까. 홈페이지에 "여러분은 나를 버리셔야 합니다"라는 글을 올리셨는데도 나는 대통령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했다.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아내가 울면서 준 검은 양복과 검은 색 넥타이를 챙겨 병원으로 왔다. 이제 그를 장사 지내는 상주가 되었다. 봉하엔 이미 비보를 접한 시민들이 엄청나게 모여 있었다. 함께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길고 긴 5월 23일 하루가 넘어갔다. 내 생애 가장 긴 하루였다. 그날만큼 내가 마지막 비서실장을 했던 게 후회된 적이 없다. 시신확인에서부터 운명, 서거 발표, 그를 보내기 위한 회의주재까지, 나 혼자 있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했다.



그가 떠난 자리

이제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의 정신과 가치를 이야기한다. 고맙기는 하다. 하지만 아무리 대통령 서거에 대해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해도, 그분이 살아계신 것만 할까. 가끔 꿈에서 그 분을 만난다. 한 번은 박석 등 묘역 조성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놓고 걱정이 많을 때였다. 꿈속에서, 묘역 조성에 이용되는 자재 창고가 있었다. 대통령이 나와 함께 창고에 가서 준비된 상황을 보고는 굉장히 좋아했다. 비록 꿈이지만 '우리가 하려는 방식에 대해 대통령도 나쁘게 생각하지 않으시는구나'라고 혼자 아전인수로 해석했다. 그래서 좀 안심이 됐다.


술을 한 잔 마시면 가끔씩 옛날을 추억한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 인생에서 노무현은 무엇인가. 잘 모르겠다. 하여튼 그는 내 삶을 굉장히 많이 규정했다.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의 삶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운명이다. 그런데 그것이 꼭 좋았냐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너무 많아서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와의 만남부터 오랜 동행, 그리고 이별은 내가 계획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피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가 남긴 숙제가 있다면 그 시대적 소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물며 나는 더욱 그렇다.



운명이다

노무현의 정신과 가치는 그가 정치인생 내내 사용했던 '사람 사는 세상'이란 말속에 다 담겨 있다. 굴곡이 많고 평탄치 않은 삶이었다. 돌아보면 신의 섭리 혹은 운명 같은 것이 나를 지금의 자리로 이끌어 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한가운데에 노무현 변호사와의 만남이 있었다. 그는 나보다 더 어렵게 자랐고 대학도 갈 수 없었다. 어려운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나보다 훨씬 뜨거웠고, 돕는 것도 훨씬 치열했다. 그를 만나지 않았으면 적당히 안락하게, 그리고 적당히 도우면서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치열함이 나를 늘 각성시켰다.


그의 서거조차 그러했다. 나를 다시 그의 길로 끌어냈다. 대통령은 유서에서 '운명이다'라고 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나야말로 운명이다.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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