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知)의 실패: 과학 기술의 발전은 왜 재앙을 막지 못하는가
저   자 : 마쓰모토 미와오(역:김경원)
출판사 : 이상북스
출판일 : 2018년 04월

도서정보

■ 책 소개

 

지구 환경 파괴, 유전자 변형 작물, 원자력 사고 등 과학, 기술, 사회의 경게 면에서 발생하는  이른바 ‘구조적 재앙’을 과학 사회학 관점에서 파악한 선구적 역작!

 

이 책의 초판 출간 후 발생한 일본 사회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한국 사회의 세월호 사건 등을 떠올리면 차마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심경을 금할 수 없다. 이 책은 그러한 사건이나 사고에 깊이 관여하는 사회 전체의 문제, 즉 사회의 어느 부분을 보더라도 비슷한 구조가 얼굴을 내밀고 있는 문제를 지적한다. STS(Sciencem Technology & Society/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는 하나의 학문 분야라기보다는 1980년대부터 서구에서 과학 기술의 사회 연구자와 과학 기술의 사회 문제에 관한 운동가 및 실무자 등을 중심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말이다. 사회 쪽에 발을 디딤으로써 이해할 수 있는 과학 기술의 명암 양면을 다분야 횡단적, 문제 지향적으로 제시하거나 통제하려는 시도의 총칭이다.

 

■ 저자 마쓰모토 미와오
저자 마쓰모토 미와오(松本三和夫)는 1953년에 태어나 도쿄 대학 대학원 사회학 연구과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 대학 조교수, 옥스퍼드 대학 세인트안토니즈 칼리지 상석객원 연구원, 에든버러 대학 게놈 정책 연구소 초빙 연구원 등을 거쳐 현재 도쿄 대학 대학원 인문 사회계 연구과 교수이며, 전공은 과학 사회학, 이론 사회학, 재해 사회학, 기술 사회사다. 저서로는 『The Sociology of Structural Disaster: Beyond Fukushima』 『Technology Gatekeepers for War and Peace』 『과학 사회학의 이론』 『구조재』 『테크노사이언스 리스크와 사회학: 과학 사회학의 새로운 전개』 등이 있다.

 

■ 역자 김경원
역자 김경원은 서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본 홋카이도 대학 객원 연구원, 인하대 한국학 연구소와 한양대 비교 역사 연구소 전임 연구원을 역임했다. 현재 이화여대 통역 번역 대학원에서 강의하며, 저서로는 『국어 실력이 밥 먹여 준다』, 역서로는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확률의 경제학』 『일본 변경론』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고용 신분 사회』 등 다수가 있다.

 

■ 차례
저자 서문 / 한국어판 저자 서문

 

제1장 사고는 왜 없어지지 않을까
0 들어가는 말
1 과학 기술은 선일까? 악일까?
2 ‘지(知)의 실패’란 무엇인가
3 ‘지(知)의 실패’를 계속 산출하는 시스템
4 리스크론 비판
5 맺음말

 

제2장 과학 기술 정책의 딜레마
0 들어가는 말
1 지(知)의 빈틈을 어떻게 볼까?
2 과학 기술 정책을 만드는 담론
3 과학 기술 결정론과 사회 결정론의 순환
4 과학 기술 복합체와 문제의 전체상
5 맺음말

 

제3장 과학 기술 복합체에 대한 기대와 성과의 사회적 의미
0 들어가는 말
1 신에너지 기술의 등장
2 일본의 OTEC 개발 과정
3 불확실성과 의사 결정
4 나아가야 할까, 멈춰야 할까
5 맺음말

 

제4장 ‘지(知)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
0 들어가는 말
1 학제 간 연구의 통념에 들러붙는 환상
2 닫힌 엘리트 노선
3 닫힌 대중 노선
4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합작 조건
5 맺음말

 

제5장 자기 언급ㆍ자기 조직형 제언
0 들어가는 말
1 기술 관료 주의와 거리를 둔다
2 기술 다중 민주주의와 거리를 둔다
3 밑바탕부터 제도를 재설계하자
4 원자력과 GMO 문제에 대한 제언
5 맺음말

 

저자 후기 / 주 / 찾아보기 

 

도서요약
지(知)의 실패: 과학 기술의 발전은 왜 재앙을 막지 못하는가


사고는 왜 없어지지 않을까

‘지(知)의 실패’란 무엇인가

사회에는 신구 기술의 과도기에 등장한 기술이 존재한다. 그런데 과도기의 기술을 낳은 사회 안에는 과도기의 기술이 초래한 사고를 수습해 낼 구조가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 책에서는 천재와 인재의 사이에서 사고를 심각한 사회 문제로 증폭시키는 이 상태를 가리켜 구조재(構造災)가 발생했다고 표현하려 한다.


구조재의 두드러진 특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눈앞에서 발생한 사고의 책임을 도대체 어디에 물어야 좋을지 아무도 짐작하지 못한다. 구조재는 천재도 아니고 금방 식별할 수 있는 인재도 아니다. 어디에서도 구조재를 감당할 곳을 찾을 수 없다. 법 제도, 전문가, 관료 기구, 의회, 민간 사회 같은 여러 관계 주체의 틈으로 사고의 책임 문제가 끼어 들어온다는 불명료성이 존재한다. 동시에 책임의 소재를 확정하는 데 80년이나 걸릴 만큼 방대한 시간을 다 써 버려야 한다. 구조재의 또 다른 특징은 귀책의 소재를 확정하기 위해 방대한 시간이 경과하는 사이에 불이익을 당하는 당사자는 귀책의 소재 확정에 관여하는 주체가 아니라 그 기술을 도입한 생산 공정에서 일하는 일반 노동자들이라는 점이다. 문제를 규정하는 자와 불이익의 당사자가 명확하게 분리된 상황, 다시 말해 현장의 실태를 경시하기 쉬운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구조재의 이 두 가지 특징은 서로 어울려 잘못된 선례를 답습하거나 적재적소의 처치를 자주 빗겨 나감으로써 좋든 싫든 기존의 정형적인 틀(예를 들어 ‘사고사’)로 문제를 덮어 버리게 되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구조재는 문제의 해결은커녕 시야에서 문제의 소재를 가려 버린다. 또한 당사자에게는 계속해서 불이익을 안겨 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유야 어떻든 구조재가 하나의 계기가 되어 과학/기술/사회 계에서 이와 같은 가능성을 실현시킨 상태야말로 이 책이 주장하는 ‘지(知)의 실패’일 것이다. 즉, ‘지(知)의 실패’란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재에 의해 계속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이 생겨나고, 아울러 눈에 보이지 않는 임계점에 이르러 스스로 붕괴할 가능성을 끊임없이 품고 있으며, 과학/기술/사회의 복잡한 상호 자용이 섞여 있는 과학/기술/사회의 상태를 가리킨다.


4 리스크론 비판

앞에서 규정한 ‘지(知)의 실패’를 일으킨 상황에서 사안의 와중에 몸을 둔 당사자(예를 들어 과학자, 기술자, 생산 공정의 노동자 등)가 보기에는 일(예를 들어 사고)이 터지고 나서야 뒷전에서 수군대며 마음대로 말할 수 있다고 느낄지 모른다. 그렇게 느끼는 종류의 비판은 어디에나 적지 않다. 그런 당사자의 느낌이 어떤 임계량을 넘었을 때, 당자가가 과학자이든 기술자이든 생산 공정의 노동자이든 의례적 관심과 무관심, 머릿수 맞추기 등 구조재의 특성을 바꾸는 일 없이 대책이라는 이름으로 일련의 체면 유지책이 나올 수 있다. 그 후 이익을 위한 비당사자의 비판과 당사자의 체면 유지책을 재생산하기 위해 시간과 자원을 한없이 낭비할 수 있다는 것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 상태가 실현되었을 때 당사자와 비당사자가 함께 속한 과학/기술/사회 계는 과거의 사건을 통해 학습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같은 형태의 ‘지(知)의 실패’를 계속 양산하리라는 점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리스크(과학/기술/사회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미래적이고 집합적인 불이익)가 강한 불확실성을 동반할 경우, 리스크에 대처하는 의사 결정의 장면에서는 개방형 지침을 채용할 가능성이 높다. 개방형 지침이란 전문가에 의해 최대한 불확실성을 줄이고, 그럼에도 불확실성이 남는 리스크에 대해서는 전문가를 뛰어넘는 광범위한 비전문가의 참여에 의해 사전에 의사 결정을 한다는 지침을 가리킨다. 개방형 지침은 전문가를 넘어서는 광범위한 사람들이 다양화하고 익명화하는 경향을 띤다. 이 지침에 의한 의사 결정에서 ‘지(知)의 실패’에 관련된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전문가이든 다양화되고 익명화된 비전문가이즌, 불확실한 리스크에 대한 여러 주체의 집합적 의사 결정이 결과적으로 무한 책임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 기술 정책의 딜레마

과학 기술 정책을 만드는 담론

과학/기술/사회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에 대한 공통 이해가 성립하는 과정을 생각하면, 각 부문의 이해 방식에 차이가 존재한다는 전제가 성립한다. 그런데 STS 매트릭스 방법(과학/기술/사회의 경계 상태를 행렬 형식에 따라 기술하는 방법)을 사용해 현실에서는 어떤 차이가 존재하는지 살펴보면, 흥미롭게도 과학 기술 결정론과 사회 결정론이 차지하는 비율이 모든 부분에서 거의 균등하고, 부문 간 차이는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모든 부분에 과학 기술 결정론에 속하는 판단 구조와 사회 결정론에 속하는 판단 구조가 거의 같은 비율로 공존함을 의미한다. 결국 문제의 종류와 측면, 입장과 쟁점이 어떻든 과학/기술/사회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이해하는 단일한 형이 부문에 관계없이 거의 전역을 뒤덮는 상태가 나타난다.


이렇게 과학/기술/사회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예측 불허의 사건을 아주 단일한 판단 구조로 이해하는 상태를 지(知)의 경계 문제라고 부르고자 한다. 과학/기술/사회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다양하고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을 이해하려는 행위는 지(知)의 틈새에 직면하고, 사건에 대한 이해를 돕는 지(知)의 틀의 부재 상태는 계속된다. 그런 상태에서는 될수록 여러 상이한 이해 방식을 조합해 사건의 전체상을 탐색하고, 사건의 다양성과 불확실성에 대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만약 처음부터 단일한 이해 방식에 의해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한다면, 현실에서 발생하는 사건의 다양성과 예측 불가능성에 의해 배신당할 가능성이 높다.


과학 기술 복합체와 문제의 전체상

과학/기술/사회 계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복수의 입장에 따른 상이한 기술을 종합해 문제의 전체상에 접근하는 방법을 취하지 않으면, 부담과 이익, 불이익의 분배를 동시에 다루는 논의는 경계 문제의 범주 안에 매몰되어 실질적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즉 사회의 각 부분이 지닌 고유의 입장을 철두철미 고수하고, 각 부분에 고유한 입장에서 상세한 문제를 기술하는 것이 경계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불가피하다. 동일 쟁점을 둘러싼 다양하고 상세한 문제를 기술해 당사자와 관찰자에게 동시에 공유하지 않으면, 전형적인 이분법적 고정관념의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기 쉽다.


따라서 STS 상호 작용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자 한다. STS 상호 작용이란 과학/기술/사회가 자원을 주고받으며 서로 존속/변화/쇠퇴하는 양상을 가리킨다. 이에 의한 사고방식은 복수의 상이한 입장을 기술해 종합할 때 공통의 지평을 마련하는 논의의 토대가 된다. 즉, STS 상호 작용이 여는 새로운 지평은 가장 뚜렷한 자신의 입장을 명시해 문제를 기술함으로써 경계 문제를 회피하고, STS 상호 작용이라는 공통의 자리에서 상이한 여러 입장의 기술을 종합해 문제의 전체상을 얻음으로써 불확실성을 될수록 축소해, 가능하면 문제의 전체상에 따른 의사 결정의 선택지를 제시한다는 특징이 있다.



과학 기술 복합체에 대한 기대와 성과의 사회적 의미

신에너지 기술의 등장

신에너지 기술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것들의 공통점은 화석 연료, 특히 석유 원료의 에너지 생산 기술을 보완하거나 대체하는 것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둔 기술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신에너지 기술 개발의 주력인 재생 가능한 에너지 이용 기술로 석유를 대체할 필요성은 1970년대 초부터 지구적 차원에서 주장되어 왔으나, 오늘날 세계의 1차 에너지 공급 중 재생 가능 에너지 비율은 여전히 10퍼센트 이하다. 이렇듯 재생 가능 에너지에 대한 꿈과 그것의 기술 개발이 낳은 현실의 성과 사이에는 현저한 간격이 존재한다. 이 간격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사회의 경계 면에서 발생하는 꿈과 현실의 간격이 무엇을 말해 주는지 STS 상호 작용을 통해 구체적으로 짚어 내는 작업이 중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바다로 둘러싸인 일본의 해양에너지 이용 기술은 지리 조건을 활용한 재생 가능 에너지 이용 기술의 전형일 뿐 아니라 그 기술 개발의 꿈과 현실의 간격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는 사례일 것이다. 특히 해양 온도차 발전, OTEC의 개발은 전략적으로 주목할 만하다.


일본에서 OTEC의 연구와 개발은 1970년대 중반부터 프랑스, 미국, 일본 세 나라가 선도적인 역할을 맡았고,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현실적 기대가 높아졌다. 1990년대에는 세계적 규모로 연구와 개발이 본격화되어 여러 팀이 다투어 참여했으나, 21세기에 이른 오늘날 OTEC의 상용 플랜트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일본의 OTEC 개발 과정

OTEC 개발 경로는 두 가지 점에서 고전적 선례를 바탕으로 정식화한 STS 상호 작용과 다르다. 첫째, 우선 사회로부터 요청을 받아 연구하고 개발했다. 둘째, 그러나 경제성 전망이 어두워 결국 사회적 요청에 부응하지 못한 채 STS 상호 작용은 도중에 사라진다. 사회의 요청을 받아 착수한 연구와 개발에는 강력한 사회적 기대가 따라붙지만, 그 결과에 경제성이 없으면 요청에 부응하지 못하고 STS 상호 작용이 도중에 중단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 부딪치면 사회의 강력한 기대를 받고 지출한 선행 투자를 회수할 수 없게 하는 거대한 간격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불확실성과 의사 결정

OTEC은 재래의 발전 플랜트보다 열 차이가 아주 적은 해양의 온도차를 이용하기 때문에 발전계의 효율에 대한 요구가 훨씬 엄격하고, 따라서 제약이 큰 조건에서 일정한 효율을 실현해야 발전계 자체가 성립한다. 따라서 어떻게 효율, 특히 열 사이클 효율을 높이느냐가 초기 기술 개발이 직면한 결정적 문제였다. 폐쇄 사이클의 OTEC 개발을 추진한 일본의 경우, 이 문제는 무엇을 작옹 유체로 선택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후보로 선택한 것이 프론이었다. 그런데 프론은 꽤 상이한 사회적 문맥에서도 큰 관심을 모았다. 프론에 의한 성층권 오존층 파괴가 그것이다.


이렇듯 OTEC의 개발 과정에는 과학/기술/사회의 경계에서 빛이었던 것(OTEC의 유력한 작동 유체 호보인 프론)이 그림자(광역적 해양 환경이나 성층권 오전층 파괴 물질 후보인 프론)로 바뀌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빛에서 그림자로 바뀌는 과정은 불확실성 아래에서 의사 결정 방식 문제로 귀착한다.


나아가야 할까, 멈춰야 할까

거꾸로 과학/기술/사회의 경계에서 그림자였던 것이 빛으로 바뀔 징조도 OTEC 개발 이후의 결과를 통해 나타난다. OTEC가 경제성을 달성하려는 시도의 실패를 통해 태어난 파생 기술의 전용이 그 예이다. 이 과정도 불확실성 아래에서의 의사 결정 방식 문제로 귀착한다.


다만 불확실성이 끼어들 때 눈에 띄는 차이가 있다. 빛이 그림자로 바뀌는 과정에서는 단일한 목적에 공헌하는 복수의 수단을 선택할 때 불확실성이 끼어든다. 이에 반해 그림자가 빛으로 바뀌는 과정에서는 단일한 수단이 공헌하는 복수의 목적을 선택할 때 불확실성이 끼어든다.



‘지(知)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

학제 간 연구의 통념에 들러붙는 환상

학제 간 연구에서 이질적인 지(知)의 경계를 넘을 뿐인 교섭이라면 상호 풍부화와 상호 불모화를 똑같이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만약 결과적으로 상호 불모화가 일어난 경우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 지(知)가 따로 존재하는 경우보다 훨씬 증폭된, 그리고 당사자 외에는 쉽게 보이지 않는 복합적 손상을지(知) 전체에 가져다준다. 그러나 학제 간 연구의 통념은 이 점을 등한시하고 있다.


교섭의 시도가 상호 풍부화에 이르는 이종 교배를 초래하는 조건은 적어도 각각의 지(知)의 품질에 대해 복수의 이질적인 지(知)의 담당자들이 자기 언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섭에 앞서 또는 교섭과 병행해 지(知)의 각 영역이 구조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점 또는 지향하는 지(知)와 현실의 교섭 사이의 거리에 대한 자기 언급을 부정적 자기 언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부정적 자기 언급은 학제 간 연구의 시도에 상호 불모화의 가능성을 부단히 검출하고, 상호 풍부화의 이상에 비추어 상호 불모화에 이르는 길을 피하기 위한 불가결한 조건이다.


하지만 당사자가 부정적 자기 언급을 실행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상호 풍부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상호 불모화를 회피하기 위해 부정적 자기 언급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 일반적으로 확정 상태를 결정하는 조건을 찾아내기보다는 실현 가능 상태를 결정하는 조건을 찾아내는 편이 수월할 뿐 아니라 하나의 대답을 고집할 필요도 없다. 여러 사례를 참고해 복수의 답안 후보를 음미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종 교배에서 부정적 자기 언급의 활용을 찾아낸다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닫힌 엘리트 노선

STS의 윤곽을 좀 더 확실하게 해 두자. 여기에서 말하는 STS란 1980년대부터 주로 서구에서 과학 기술의 사회 연구자, 과학 기술의 사회 문제에 관한 활동가 등을 중심으로 사용된 말이다. 이것은 사회 편에서 이해할 수 있는 과학 기술의 명담을 분야 횡단적/문제 지향적으로 제시하거나 다양한 해널을 통해 통제하고자 하는 시도의 총칭이다.


지적 생산재로서 STS란 신쿤파 이래의 과학 기술 사회학에서 출발해 과학 지식 사회학, 기술의 이종 시스템 해석 등을 거쳐 현재에 이라는 과학 기술의 사회 연구 이론을 중심으로 한 담론을 가리킨다. 특정 과학자 집단과 기술 집단 내부의 구조를 미세하게 기술하고 분석하는 데 적합한 개념 장치로 검출할 수 있는 사회의 요소를 임시방편으로 논의하는 경향이 있으며, 좋든 싫든 학제로서 자기 완결성이 높은 엘리트 노선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지적 소비재로서 STS란 자각적이든 아니든 다양한 지역의 다양한 운동과 발맞추어 전개해 온 대중 노선의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다소 기존의 학제가 붕괴하는 경향을 띤다.


지적 생산재로서 STS의 핵심을 내재적으로 검토해 보면 STS는 부정적 자기 언급을 결여하고 있고 폐쇄적인 학제 간 연구의 경향을 띤다. 학제 간 연구에 의한 정치적 성과로 인해 원래 STS가 외치던 취지, 즉 과학과 기술에 얽혀 있는 다종다양한 사회적 측면을 해명하는 중요성과 일반인들이 원하는 과학 기술의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성을 간단히 지나쳐 버리는 상호 물모화의 경향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닫힌 대중 노선

여기에서 말하는 지적 소비재로서 STS는 다양한 지역의 다양한 운동과 함께 전개되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지적 생산재로서 STS와는 다를 뿐 아니라 담론군의 이론적 기초를 이루는 핵심 부분을 특정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각각의 논자가 각각의 상황에 대응해 각각 안고 있는 로컬한 주제에 대해 나름의 방식으로 담론을 내놓는 흐름이 지배적이다. 예를 들면 인종, 소수 민족, 성, 연령, 특정 종교, 특정 지역 등 주제는 실로 다채롭다. 이렇게 폭이 넓은 지적 소비재로서 STS의 대중 노선 가운데 전문가와 비전문가 사이의 이종 교배를 지향하는 담론을 바탕으로 오늘날 이종 교배의 대중 노선이 직면한 문제 상황을 살펴보면 이렇다.


지금까지 지속되어 온 전문가와 비전문가 사이의 이종 교재에 대한 대조적인 시도는 어느 것이든 악순환의 덮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을 찾아내기는커녕 지향하는 지(知)의 모습과 현실적인 교섭 사이의 거리에 대해 부정적 자기 언급을 하지 않는다. 참으로 각각의 입장에서 ‘지적 빈곤의 덫’을 깨닫고 있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만약 깨닫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면, STS의 대중 노선은 엘리트 노선과 다른 의미에서 부정적 자기 언급을 결여한 폐쇄적인 이종 교배가 될 수 있다. 즉 전문가의 지식 생산과 시민 참여의 융햡이라는 가면을 쓰고 ‘지적 빈곤의 덫’을 한없이 반복하는 상호 불모화로 빠져든다.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합작 조건

상호 불모화의 가능성을 회피하는 수단은 두 가지이다.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관계를 대국적이고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 그리고 부정적 자기 언급, 특히 지향하는 지(知)의 모습과 현실적인 교섭 사이의 거리에 대한 자기 언급이다.


전문가와 비전문가는 속인적(屬人的) 실체가 아니다. 그들은 전문 지식의 종류가 다르면 서로 바뀔 수 있는 관계적인 개념이다. 비전문가의 이의 제기와 아울러 전문 지식에 대한 전문가의 부정적 자기 언급을 통해 과학/기술/사회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해명과 해결을 지향하는 행위는 과연 전문가의 행위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는 대답은 과학/기술/사회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현상의 해명과 문제 해결을 그때마가 임기응변에 맡기는 것은 하늘에 운을 맡기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아무리 강한 불확실성을 동반한다고 해도 주어진 상황에 충실하게 논증과 실증을 통해 주도면밀하게 현상을 해명하고 신중하게 문제 해결의 방책을 궁리하며 자각적으로 의사를 결정하는 것, 이것이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최대 특성이다. 비록 상황이 현상 해명과 문제 해결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끝가지 포기하지 않고 인간다운 특성을 유지하는 것이 전문가의 행위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는 대답은 그렇다는 대답의 이유와 반대다. 전문가가 주어진 상황에서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해도 강한 불확실성에 의해 전문자의 행위가 별 효과를 내지 못하는 사태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때는 최선의 전문 지식을 통원해 현상을 해명한 결과 전문자는 문제 해결의 방책을 비전문가에게 제시하고, 비전문가는 전문가에게 그 시점에서 느끼는 불이익을 전달한다. 그래서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합의 아래 납득할 수 있는 의사 결정을 하고 응분의 책임을 지고 행동과 결과를 선택하는 길이 존재한다.


이런 일은 전문가만의 행위는 아니다.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합작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애초 모든 사안에 대한 전문가는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예측 불가능한 현상을 해명하고 문제 해결에 관여하는 사람은 전문가인 동시에 비전문가일 수밖에 없다. 결국 상호 풍부화를 가능하게 하는 이종 교배에 기여하는 전문자의 파트너, 그것이 좋은 비전문가일 것이다. 이것이 ‘지(知)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한 원칙으로서 이종 교배의 이념이 이야기하는 바다.



자기 언급/자기 조직형 제언

기술 관료주의와 거리를 둔다

‘지(知)의 실패’의 회피와 극복은 구조 변혁의 의지를 기술 관료주의와 공유한다. 그러나 유토피아로 흘러가기 쉬운 변혁의 장대한 청사진을 제시하는 일은 절제한다. 그리고 보통 사람의 상상력에 호소해 가능한 변혁의 전략과 논리를 제시한다. 나아가 기존의 구조를 전제로 한 지위 향항 운동이 아니라 눈앞의 상태를 직시하며 비판자의 지위를 확립하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기술 관료주의와는 명료하게 선을 긋는 지점이다.


기줄 다중 민주주의와 거리를 둔다

과학 기술을 둘러싼 의사 결정 과정에서 참여형의 합의 형성 방법을 고안해 도입한 시점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방법이 1980년대 서구에서 등장해 서서히 도입되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아무리 옹호하는 말을 늘어놓아도, 누가 누구를 전문가로 인정하고 누가 누구를 비전문가로 인정하는가라는 주최자의 생각에 거의 전면적으로 의존한다는 기본 특성은 변하지 않는다. 이 기본 특성에서 유래하는 합의 회의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민주주의의 빛과 그림자가 표리일체 관계로 공존할 수 있다는 관점이 거의 누락되어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외부 적대 세력에 관한 저항의 관점이 포장을 바꾸어 합의 회의를 둘러싼 상황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외부의 적이란 정체적 전체주의가 아니다. 외부의적은 오히려 몇 명의 전문가에 의한 의사 결정 방식이다.

참여형의 합의 형성 방법이라는 형식이 미묘한 사안에 관한 과학 기술의 민주주의를 담보하지는 않는다. 미묘한 사안에 관한 참여형의 합의 형성 방법이라는 형태는 기술 민주주의(민의를 반영하기 위해 민주적으로 의사 결정을 하는 상태)와 기술 다중 민주주의(민의 반영이라는 이름을 빌려 이익을 유도하는 상태)라는, 비슷하지만 다른 두 가지 상태로 나아갈 수 있다.


합의 회의가 상징하는 참여형의 합의 형성 방법 담론은 기술 다중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이제까지 완전히 등한시했다. ‘지(知)의 실패’를 회피하고 극복하는 행위는 그 가능성을 뚜렷이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참여형의 합의 형성만 기대하는 시도와 선을 긋는다.


밑바탕부터 제도를 재설계하자

한쪽으로는 기술 관료주의, 다른 한쪽으로는 기술 다중 민주주의와 거리를 두며 일본 사회가 어느 한쪽으로 나아가는 회로를 차단할 방책을 어떻게 구체화할까?


이 의문의 답은 바로 부정적 자기 언급이다. 이 원칙은 유토피아로 흘러갈지 모르는 변혁의 장대한 청사진 제시를 좀 절제하고, 보통 사람의 상상력에 호소해 가능한 변혁의 전략과 논리를 제시하기 위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부정적 자기 언급을 미리 고정시켜 제도를 재설계해야 한다. 이를 테면 과학/기술/사회 사이의 구조를 정하는 데 큰 영향력을 지닌 돈의 흐름, 특히 사회가 과학 기술에 투입하는 흐름에 개입하는 것이다. 과학 기술의 사회적 통제 수간으로서 경쟁적 자금의 비중이 증대하는 경향이 존재한다면, 경쟁적 자금의 배분 방식 안에 자기 언급을 미리 고정시켜 제도를 재설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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