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 두기
저   자 : 임춘성
출판사 : 쌤앤파커스
출판일 : 2017년 02월

도서정보

■ 책 소개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휘둘리지 않고, 헤매지 않고, 혼자 속 끓이지 않고
스스로 중심잡고 우아하게 사는 법

 

너무 가까이 다가갔더니 ‘앗, 뜨거워!’ 상처만 받았고, 너무 멀리서 맴돌았더니 내 곁을 허망하게 떠나버린 기회들, 사람들, 목표들…. 다가가야 할까, 도망쳐야 할까?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벌어지지? 왜 나만 이렇게 힘들까?” 싶을 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 혼자 상처받고, 속 끓이고, 실망했다면, ‘거리 두기’를 잘하고 있는지 따져볼 일이다.

 

생각해보면 인생의 거의 모든 문제는 ‘거리 조절’에 실패했을 때 벌어진다.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스스로 중심 잡고 우아하게 살 수는 없을까? 20여 년간 대학생, 대학원생들의 선생으로 살아온 한 공학자가 알려주는 시스템적 세상살이, 나와 너,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고민들을 직설적으로 풀어본다.

 

■ 저자 임춘성
연세대학교 정보산업공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에서 산업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뉴저지 럿거스대학교 교수를 거쳐 지금은 연세대학교 정보산업공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여 년간 대학생, 대학원생들의 선생으로 살아온 공학자다. 세상이 어렵고 관계가 서툰 학생들과 젊은이들을 보며, ‘그때는 나도 그랬지….’ 싶었고, ‘그때 누가 나에게 이런 얘기를 좀 해주었더라면 덜 상처받고 덜 헷갈리고 덜 헤맸을 걸….’ 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

 

세상을 시스템으로 보는 공학자의 안목으로, 급변하고 다변하는 세상에 대응하는 개인의 전략을 다루는, 연세대학교 공과대학의 유명 강좌인 ‘테크노 리더십’을 다년간 강의하고 있다. 그의 전작 《매개하라》는 인문과 사회, 경영과 기술을 아우르는 독특한 책으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바 있다. 이외 다수의 전문서, 논문 그리고 주요 신문사의 칼럼을 집필했다.

 

■ 그림 니나킴
그린이 니나킴은 담백한 한 컷으로 독자들의 마음에 훅 들어오는 일러스트레이터. 지은 책으로는 《사라지고 싶은 날》이 있다.

 

인스타그램 @ninakim89

 

■ 차례
안녕하세요 _ 나와 세상, 그 사이를 보다
나 _ 나는 나에게 어떤 나인가요?
세상 _ 속 모를 사람들이 모인 거대한 의문부호
그 사이 _ 반응을 선택할 힘과 자유가 있는 곳
보다 _ 부디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1. 휘둘리지 않으려면
고맙지만 위험한 존재
누가 나를 휘두르는가?
휘둘리지 않으려면 알아야 할 사이존재
현실적인 너무나 현실적인 처방

 

2. 버림받지 않으려면
버릴 것인가, 버림받을 것인가
존재보다는 관계
버림받지 않으려면 되어야 할 사이존재
효용 아니면 중독

 

3. 치우치지 않으려면
반드시 넘어야 할 선
당신의 균형감각
치우치지 않으려면 지녀야 할 사이존재
훌륭한 인생을 위한 괜찮은 방법

 

4. 손해 보지 않으려면
언제 만족하세요?
모든 것은 기대치의 문제
손해 보지 않으려면 정해야 할 사이존재
명심하세요, 눈높이 관리

 

5. 상처받지 않으려면
정복되지 않는 그대
피뜩피뜩 가볍게 올렸다 내렸다
상처받지 않으려면 변해야 할 사이존재
상처받지 않고, 상처주지 않고 살 수 있을까?

 

6. 책임지지 않으려면
무조건 하고 볼 일이다?
‘선택’의 다른 말은 ‘책임’
책임지지 않으려면 내세워야 할 사이존재
책임을 책임져야 한다는 말

 

7. 홀로되지 않으려면
혼자 있을 때가 필요하다지만
같은 것을 다르게 보기
홀로되지 않으려면 써먹어야 할 사이존재
분석의 위대한 힘

 

8. 꼴통 되지 않으려면
청춘에서 꼴통으로
다른 것을 같게 보기
꼴통 되지 않으려면 해보아야 할 사이존재
통찰력이 탐나세요?

 

감사합니다 _ 우아하게 세상을 살고 싶은 우아한 당신에게
IQ, EQ보다 중요한 MQ

 

참고문헌
저자소개

도서요약

거리 두기


버림받지 않으려면

효용 아니면 중독

세상은 곧 인간입니다. 만물의 영장으로 득세하고 있는 인간들이 세상의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많은 것들이 있지만, 우리 인간에게 대부분의 자극과 영향을 주는 것도 인간입니다. 그래서 나를 둘러싼 인간이라는 환경이 바로 세상 그 자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 삶은 다름 아닌 인간관계라 규정할 수도 있겠네요. 사회생활도 결국은 인간관계죠.


그물망 같은 인간관계에서,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인간세상에서, 갑자기 톱니가 빠집니다. 그물망이 벌어져서 뭔가가 빠져나옵니다. 내밀리고 내쳐지면 버림받은 것입니다.


버림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단순합니다. 상대가 나를 버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버리지 못할까요? 이것 역시 간단합니다. 둘 중에 하나겠죠. 무언가 좋은 게 있다면 버리지 않을 것이고, 버리면 뭔가가 안 좋아져도 버리지 않겠죠. 전자를 '계명구도(鷄鳴狗盜)' 후자를 '순망치한(脣亡齒寒)' 방책이라 일컫겠습니다.


'계명구도'는 누구나 쓸모는 있으니 가능하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중국 제나라의 맹상군이 닭과 개를 흉내 내는 사람들과도 어울리다 보니 그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던 일화입니다. 쓸모가 있으면 버려지지 않는 법입니다.


누구나 나름의 존재가치가 있습니다만, 특히 소중하고 중요한 관계에 있어서는 그 빛을 발하게 해야 합니다. 직장생활에서 '나니까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관계에서 '나 아니면 안되는 상황'을 설정해야 하는 것이죠.


'쓸모'라는 표현을 사람에게 붙이기는 다소 경박한 것 같습니다. 큰 차이는 없어 보이지만 차라리 '효용'이라고 하겠습니다. 버림받지 않으려면, 갑과 을 사이에 눌러앉아 있으려면, 지속적인 효용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사이에 있으려 하니 효용이 있어야 하고, 효용이 있으니 버림받지 않습니다.


효용이 떨어지면 '계륵(鷄肋)'이 됩니다. 먹자니 먹을 것이 없고 버리자니 아깝다는 계륵 말입니다. 그러다가 효용이 아예 없어지면 토사구팽(兎死狗烹)이 되겠죠. 토끼를 잡을 때 요긴하게 써 먹다가 쓸모가 없어진 개는 잡아먹는다잖아요.


지속적으로 효용을 보여주어야 버림받지 않습니다. 만일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보여줄 만큼의 큼직한 효용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본인의 효용을 보여주는 정도를 처음부터 조절해야 합니다.


인간관계에서는 자신의 존재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존재 그 자체로 의미를 인정해줄 사람은 가족, 그중에서도 부모님밖에는 없을 것 같군요. 상대에게 자신의 존재의미는 결국 존재의 가치, 즉 효용입니다. 효용을 꾸준히 지탱하고, 필요할 때 강화해야 버림받지 않습니다. 앞날을 생각하지 않고 초장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은 현명하지 못합니다.


기업에서도 자사의 제품과 서비스를 고객이 버리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추가적인 효용을 계속 보여줍니다. 점진적으로 성능을 향상시키는 버전업이나, 고객이 필요로 하는 또 다른 효용을 끼워 넣는 번들링 전략이 그런 것입니다.


현명한 직원은 회사에 꼭 필요한 인재가 되기 위해 학습과 자기계발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소중한 인연의 상대가 싫증을 느끼지 않도록 새로운 모습, 새로운 환경, 새로운 관심사, 새로운 소통거리를 개발하고 노력합니다.


비행기를 타고,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 하다못해 동네 조그마한 커피점에서 커피를 마셔도 마일리지를 줍니다. 스탬프가 차곡차곡 쌓이는 맛에 또 그 커피점에 갑니다. 만일 스탬프가 빽빽히 찍혔다면 더욱더 못 떠납니다. 스탬프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쌓여 있다면, 이제 순망치한 방책을 생각해볼 때가 된 것입니다.


'순망치한'은 알다시피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입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아쉬워집니다. 이는 입술을 버리면 낭패이니 못 버립니다. 이번에는 쓸모 있게 하기보다는, 없으면 힘들게 하는 방책입니다. 커피점 회원카드에 스탬프가 쌓이면 버리기 아깝습니다. 그간에 쌓인 스탬프는 더 이상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 효용이 아니라, 당연히 받아야 할 그간의 노력의 대가로 둔갑합니다. 이제는 생기면 이익이 아니라, 안 쓰면 손실로 여겨집니다.


이를 '전환비용'이라 부릅니다. 지금 것을 버리고 다른 것으로 전환할 때 발생하는 비용입니다. 기업도 사람도 버림받지 않으려면 전환비용을 심어놓아야 합니다. 버리면 비용이 발생하고, 속상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죠.


순망치한 방책은 버리면 불편하게 만드는 작전입니다. 잠깐의 불편함이 아닌 상당 기간의 불편함으로 자리매김하면 더 효과적이겠죠. 상당 기간의 불편함, 이에 걸맞는 단어는 중독입니다.


중독은 없으면, 하지 않으면 몹시 불편해지는 형편입니다. 일상에서 습관이 되어 특정 사고와 행위에 편향된 증세입니다. 일반적으로 중독은 습관보다 감정적인 의존 성향이 강합니다. 우리네 삶과 일상의 감정에는 소소하고 사소한 중독이 적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인간관계에서도 중독은 흔한 현상입니다. 중독된 사람은 중독된 것을 버리기 어렵습니다. 곱씹어 보아야 합니다. 순망치한, 전환비용, 습관, 그리고 중독. 버림받고 비참해지기 싫다면 말입니다.



손해 보지 않으려면

손해 보지 않으려면 정해야 할 사이존재

부러움과 질투의 차이를 아세요? 질투에는 내가 질투하는 상대와 동등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상대가 가진 것, 상대가 받는 대우를 나도 동등하게 가져야, 받아야 한다는 의식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으니 불편합니다. 질투가 납니다. 그러나 부러움은 다릅니다. 마음 한 구석에 한 수를 접어준 상대에게 느끼는 감정입니다. 맞장 뜨는 사이라기보다는 한 수 위의 상대이니 열등감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부러우면 지는 거야'라고 하잖아요.


묘한 차이는 연민과 동정에도 나타납니다. 유사한 입장과 비슷한 신분의 상대에게 느끼는 것이 '동정'입니다. 동정은 감정이입으로 증폭됩니다. 감정이 이입되려면 입장과 신분이 얼추 같아야 하는 것이죠. 이에 비해 연민의 감상은 상대에 대한 우월감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감정이입은커녕 '나는 저렇지 않아'라는 속 편한 마음이 숨겨져 있습니다.


부러움과 질투, 연민과 동정 같은 사사로운 감정도 상대에 따라 구분됩니다.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수준이 있고, 자기만의 눈높이가 있습니다. 각자의 수준과 눈높이는 다 다릅니다. 다 다른 수준과 눈높이로 사람을 대하고 세상에 응합니다. 그리곤 사람과 세상에 대하여 스스로 각자의 기대치를 갖습니다. 기대치가 충족되면 기쁘고, 충족되지 않으면 화납니다. 다 다른 사람들이 각자 자기만의 수준, 눈높이, 기대치를 갖고 서로 뒤엉키니 인생이 복잡한 것입니다.


어찌하면 좋을까요. 만족하며 살고 싶습니다. 종종 주변 사람들도 만족시키며 살고 싶습니다. 나도 만족하고 남도 만족시키며 살고 싶은데, 서로 쳐다보는 수준이 다르고 기대하는 것, 기대하는 정도가 다 다릅니다. 어떻게 현명하게 풀어갈까요.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기대치가 다른 나와 당신을 직접 맞닥뜨리게 하여 서로 생채기를 내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와 당신 사이에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무언가를 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나의 수준, 나의 눈높이, 당신의 수준, 당신의 눈높이가 맞아 떨어지지가 않습니다.


손해 보고 싶지 않을 때 활용할 수 있는 사이존재가 있습니다. 나와 당신 사이에 자리 잡고 서로의 기대치를 조정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일종의 조정자입니다. 조정자는 양쪽 기대치의 편차를 줄여주어서 손해 보지 않게 해줍니다. 물론 내가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이득을 보거나 착취하려는 마음이 아니라면, 상대방도 불필요한 손해를 피해갈 수 있습니다.


서로의 상이한 생각과 기대치를 조정해주는 가장 흔한 것은 바로 '상식'입니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인식과 지식이 바로 그것이죠. 상식이 있는 사람, 상식이 통하는 사람과는 상식으로서 대화하고 상식을 준거삼아 의견의 차이를 좁힐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상식이라고 믿는 것이 과연 상식인가를 한 번쯤은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다수가 일정 시점에 가진 생각이 상식입니다. 그러나 급변하는 세상입니다. 특정 사안에 대해서 다수에게 유리한 주장이 꼭 올바른 것은 아닙니다. 가치관의 혼돈을 예의주시하고, '다수의 생각이니 무조건 상식이다'라고 외치는 발상을 경계해야 합니다.


상식과 유사한 맥락이지만 조금 더 구체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 '표준'입니다. 표준은 사람과 사물에 관하여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정도입니다. 약간의 수치적인 개념이 있어 구체적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상대에 대한 기대치가 표준을 넘으면 많은 것이고, 표준에 모자라면 적은 것이죠. 표준은 평균적이니 대다수의 속성입니다. 표준으로 기대치를 삼으면 어마하게 이득 보거나 또는 엄청나게 손해 보는 일은 아마 없을 겁니다.


이 연봉에 이만큼의 재산을 가졌다면 이 정도의 세금을 내야 하고, 아무리 바쁜 가장이라도 요새 학부모라면 자녀에게 그 정도의 시간은 내어야 합니다. 평균적이고 평범하니 표준입니다. 애인이라면 맛집, 영화관도 같이 다니고 때가 되면 선물도 사주어야 합니다. 남들도 다 하는 표준이니 나도 군말 없이 해야 하는 것이죠.


손해와 이득의 논리로 점철된 비즈니스 세계에서 표준은 더욱 막강합니다. 서로의 입장과 기대치를 조율하기 위해 정부와 국제기구에서 표준을 설정하고, 시장에서 자연스레 표준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표준을 논할 때 한 가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표준에는 평균적인 평범 외에 또 다른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범'의 의미인데, 평범과는 꽤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표준 체형, 표준 키 하면 평범이지만, 글로벌 표준, 표준 강령 등으로 쓸 때는 모범의 뜻입니다. 표준을 언급하며 기대치와 이해관계를 조정할 때는 평범과 모범을 잘 구별하여 사용해야 하겠지요.


표준의 영어표현은 스탠더드, 참 멋진 단어입니다. 옥스퍼드 사전을 찾아보면 그 뜻이 '질적 수준'이랍니다. 그 자체로 '눈높이'를 지칭하네요. 상대의 눈높이에 맞출 줄 알고, 자신의 눈높이를 올릴 줄 아는 사람은 멋진 사람입니다. 스탠더드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스탠더드가 있는 사람이니까요.



책임지지 않으려면

'선택'의 다른 말은 '책임'

모건 스콧 펙은 정신과 의사입니다. 그 역시 많은 사람들, 정확히는 환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많은 통찰을 얻습니다. 그의 잔잔한 외침 중에 특히 마음 깊이 다가온 것이 있습니다. 스콧 펙이 가라고 하는 길의 한가운데에서 '책임'이라는 무거운 단어를 만납니다.


사람들은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입니다. 책임을 짐으로써 수반되는 일들은 대부분 부담스럽고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가급적 피하고 싶습니다. 스콧 펙은 우리가 책임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다해야 하는 이유를 크게 2가지로 나누어 차분히 설명합니다.


먼저 일상에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랍니다. "그것은 내 문제가 아니야"라고 말하며 문제를 다른 사람이나 여타 상황으로 떠넘깁니다. 다이어트에 실패한 것은 세상에 맛있는 음식이 너무 많고, 그 맛있는 음식을 같이 먹자는 친구가 너무 많고, 그 친구와 만나야 하는 이유가 또 너무 많습니다.


셰익스피어도 "마치 자기 자신은 그래야만 했기에 악당이 되었고, 하늘이 그렇게 정했기에 멍청이가 되었으며, 또한 세상이 그렇게 만들었기에 도둑이 되며, 뭔가 모르는 영향력에 어쩔 수 없이 복종하여 술주정뱅이, 거짓말쟁이가 되었다는 듯이 행동한다"고 《리어왕》을 통해 냉소합니다. 책임을 전가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지켜보는 이들을 종종 슬프게 하기도 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 문제가 어떻게 발생되었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엉뚱한 곳으로 책임을 전가하면 그 문제는 해결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내 문제를 해결해주기 전까지는요.


우리가 책임을 받아들여야 하는 좀 더 근원적인 이유는 두 번째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의 결과를 책임지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그 일이 발생하게끔 한 선택을 했기 때문입니다. 선택을 했으니 결과가 있습니다. 선택할 자유가 있으니 그 자유를 누린 자에게 결과에 대한 책임도 있습니다. 즉 자유가 책임을 불러온 것입니다.


만일 주어진 책임을 회피한다면 주어진 자유 역시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내 책임을 남에게, 조직에게, 사회에게 떠넘긴다면 내 자유 역시 남, 조직, 사회에 양도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유는 얻되 책임은 지지 않고, 권리는 갖되 의무는 다하지 않는 묘책이 있지 않다면 말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지나치게 많이 책임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회심리학에서는 이들을 '내재론자'라 부릅니다. 내재론자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본인의 행동결과로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책임소재를 자기 안에서 찾는 것이죠. 반면 '외재론자'는 외부의 영향에 의한 결과라고 판단합니다. "다 내 탓이오."와 "다 세상 탓이오"의 차이입니다. 의학에서도 심장혈관 계통 질병 위험요인의 하나로 타입 A 유형의 사람을 지목하는데, 이들이 내재론자에 해당한다고 보면 됩니다. 아무튼 너무 많이 책임지려 들면 심장혈관에도 안 좋다고 하는군요.


책임을 안 지려고 뺀질거리는 것도 문제이지만, 세상의 온갖 문제를 다 어깨에 들쳐메고 책임지려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적당한 수준의 내재론자나 타입 A는 혁신을 이끌거나 탁월한 업무성과를 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과하면 흔히 노이로제라 부르는 '신경증'이 됩니다. 반면 남에게, 사회에 탓을 돌려 책임을 회피하는 '성격장애'도 있습니다. 신경증 환자들은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고, 성격장애자들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든다고 하네요. 웃어넘기기에는 씁쓸합니다.


성격장애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매일매일 책임지지 않는 사람들을 지켜봅니다. 그런데 더 화나는 것은 책임지지 않아도 될 일까지 책임지는 나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책임질 일인지, 무엇이 책임지지 말아야 할 일인지, 어떤 것을 해야 하고 어떤 것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분간하기가 어렵습니다.


책임지지 않는 뻔뻔한 사람도 되기 싫지만, 아무도 진심으로 인정, 칭찬, 위로해주지 않는 불필요한 책임까지 떠맡기는 더더욱 싫습니다. 정말 억울하기는 싫습니다. 억울함을 극구 피하려는 소심함을 떠나서도 '쓸데없이 책임지지 말아야 할 이유'는 충분히 있습니다.


첫째, 세상은 책임질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 일들은 너무 많기도 하지만 너무 사소하기도 합니다. 둘쨰, 쓸데없이 책임질 일들이 많아지면 진짜로 책임져야 할 일을 제대로 책임지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이유는 더욱 세속적입니다. 세상은 사람이고, 책임지기 싫어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입니다. 누구나 책임에 수반되는 고통은 피하고 싶으니까요. 그러니 얽히고 설킨 인간관계에서 가만히 있으면 나 혼자 책임을 옴팡 뒤집어쓰게 됩니다. 어차피 책임은 나 아니면 그가 져야 하고, 책임의 소재는 나 아니면 세상에 있으니까요.



꼴통 되지 않으려면

청춘에서 꼴통으로

수필 좋아하나요? 수필은 일상의 느낌이나 체험을 자유롭게 쓴 산문이라 다가가기가 쉬운 장르입니다. 우리가 수필을 사랑하는 이유는 소소한 공감이 작가의 개성이나 인간성과 더불어 무겁지 않게 마음에 스며들기 때문이겠죠. 영어 표현인 에세이의 어감도 딱 그렇습니다. '수필' 하면 개인적으로 유독 연관되어 떠오르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찬'입니다.


아마도 풋풋한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던 시절, 단박에 들어와서 흔들었던 2가지의 '예찬'이 지금도 꿈틀거려서인가 봅니다. 짧은 수필들인데, 그중 하나는 민태원의 《청춘예찬》입니다. 들어보았으리라 생각됩니다. 특히 유명한 문구는 '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 청춘의 끓는 피가 아니라면 인간이 얼마나 쓸쓸하랴?'입니다.


특별히 청춘을 드높게 예찬하는 이유는 청춘이 이상을 추구해서랍니다. 이성과 이상은 대조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나름의 법칙을 터득하게 되는 이성은 지식과 경험의 축적물이죠. 사실 시간과 비례합니다. 그러나 특별한 시기에 끓는 피로 추구하는 이상은 청춘만의 특권이라 강조합니다. 순진하니 감동하기 쉽고, 물들지 않았으니 용기가 있다 부르짖습니다.


그래서 그립습니다. 며칠 밤을 꼴딱 새도, 오만 가지 술을 다 먹어도 거뜬했던 시절이 그립기는 합니다. 피부가 화사하고, 얼굴에 주름 하나 잡티 하나 없던 때가 그리운 것도 맞습니다. 그렇지만 진정 그리운 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뜨거운 피, 꿈과 이상, 나라 걱정하느라 밤새 충혈된 눈으로 열변을 퍼붓고, 님 위한 사랑으로 밤새 떨리는 마음으로 잠 못 이룹니다. 열린 만큼 상처받지만 감동하며, 아프지만 다시 용기를 냅니다. 그것이, 그런 마음이, 그러한 시절이 그리운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해볼까 합니다. 저는 직업이라고는 평생 대학교수밖에 해본 게 없습니다. 나름 잘 살아왔습니다. 이런 얘기도 있네요. "검사는 친가가 좋고, 의사는 처가가 좋고, 교수는 자기가 좋다." 요사이는 임용만큼이나 승진도 쉽지 않고, 기대만큼이나 급여도 녹록하지 않습니다만, 근본적으로 좋은 직업입니다. 그래도 어디 가서 대학교수라고 하면 무시하는 사람은 없고, 종종 스승이라 존경해주는 제자들이 있습니다. 대기업처럼 출퇴근이 빡빡하지 않으며 방학도, 연구년도 있습니다. 충실해야 할 교육, 연구, 교내행정, 대외활동이 일반인의 생각을 훨씬 상회하지만, 그만하면 괜찮은 직업입니다.


대학이라는 지성, 캠퍼스의 낭만, 청춘과 함께하는 감성이 어우러진 직업으로, 교수에 대한 로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존경받는 교육인, 총명한 연구자, 양심적인 지식인의 모습을 지닌 대학교수는 일부였습니다. 오히려 좁은 방 한 칸에 틀어박혀 자신만의 논리로 철옹성을 쌓고, 자신만의 전문성으로 현실과 담을 쌓아놓는 모습이 쉽게 발견되었습니다. 남자로서 아빠로서, "딸이 있다면 절대 교수에게는 시집보내지 말아야지."하며 제 얼굴에 침을 뱉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꼰대가 되고 꼴통이 되어갔습니다.


'꼴통'은 골통, 즉 딱딱한 골의 통이니, 원래 머리가 나쁜 사람을 지칭합니다. 그렇지만 머리 나쁘지 않은 꼴통이 더 많아 보입니다. 대학 교수도 머리가 나쁜 사람은 하기 힘든 직업입니다. 속이 좁고 자기중심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을 일컫는 표현이겠죠. '보수꼴통' 하면 보수적인 색채가 진한 사람들을 비하하는 말입니다. 보수 계층이 자신이 가진 것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변화에 타협하지 않는 성향이 있어, 꼴통으로 불리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죠.


대학교수가 꼴통이 되기 쉬운 이유는 공자가 설명해줍니다. 《논어》의 〈위정〉편에서 '학이불사즉망'이라 합니다. '학(學)만 하고 사(思)하지 않으면 어둡다'인데 이를 대학교수의 업을 연상하며 해석하면 학(學)은 이론적 사고를, 사(思)는 경험적 사색을 의미한다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대다수의 교수들은 경험적 사색을 중시합니다. 그러나 대학이라는 포근한 울타리가 전체적인 균형 측면에서 이론적 사고에 치우치게 하는 모양새는 어쩔 수 없습니다.


이왕 《논어》〈위정〉을 써먹은 김에 한 가지 더. '군자불기(君子不器)'라 하죠. 군자는 특별한 용도에만 쓰이는 그릇이 아니라 말하고 있습니다. 대학교수의 상징과도 같은 특성은 전문성입니다. 무언가 전문적이라는 것은, 그 깊이가 깊을수록 그 폭은 좁게 되는 성향을 지닙니다. 전문적인 사람은 구조적으로 군자가 되기가 쉽지 않은 법입니다. 그러니 따져보면 대학교수를 너무 비판해서도 안 됩니다. 단순히 대학교수를 오래 하다 보면 꼴통이 될 소지가 있다 정도로만 이해해주기를 바랍니다.


나이든 사람만 꼴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이가 어려도 생각이 꽉 막힌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래서 나이 어린 이가 닫혀 있으면 안타깝고, 나이 든 이가 열려 있으면 아름답습니다. 미국의 시인 사무엘 울만도 '청춘은 인생의 어느 기간이 아니라 그러한 마음가짐을 말한다'라 했습니다.


남에게 가슴자락을 열어 내보였으니 상처받기도 합니다. 남에게 마음을 열고 세상에게 눈을 열었으니, 남이 보이고 남을 받아들입니다. 세상이 느껴지고 세상을 받아들입니다. 아직 자기만의 생각, 원칙, 룰, 편견, 고집이 다 들어차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봄바람이고 푸른 봄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모습이 우리가 선망하고 예찬하는 청춘과 신록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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