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리 걷어차기
저   자 : 장하준(역:김희정)
출판사 : 부키
출판일 : 2020년 08월

도서정보

■ 책 소개


역사적 사실로 짚어 보는 ‘선진국은 어떻게 선진국이 되었는가?’ 
경제학의 이면에 감춰진 세계 경제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는 책 

장하준 교수의 케임브리지대 경제학부 교수 생활 30년을 계기로 전면 개정판으로 나온 이 책은, 장하준 교수 스스로도 경제학자로서의 인생에 한 획을 그은 책으로 꼽는다. 처음부터 다시 번역하는 과정에서 다소 불분명했던 부분들을 모두 바로잡고, 혼란스럽던 일부 용어를 정리ㆍ통일했으며, 미주를 각주로 옮겨 본문에 대해 보다 풍성한 이해가 가능하도록 했다. 

저자의 당초 집필 의도는 선진국들의 성장 신화 속에 숨겨진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선진국들이 현재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들에게 강요하는 정책과 제도가 과거 자신들이 경제 발전 과정에서 채택했던 정책이나 제도와는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지를 일깨워 주고, 동시에 선진국들에게는 위선적인 ‘설교’ 대신 진정 도움이 되는 방법을,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들에게는 현실적으로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안을 고민해 보기를 촉구하는 데에 있었다. 

하지만 선진국들이 선진국 위치에 오르기까지 어떤 일을 어떻게 해 왔는지, 각종 정치적ㆍ사회적 제도는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과정에서 이 책은, 산업 정책 같은 정부의 경제 개입이 과연 경제 발전에 해로운지, 사유 재산 보호가 경제 발전에 정말 도움이 되는지, 민주주의의 성숙이 최종적으로 경제 발전의 원인인지 결과인지 등을 짚어 보고, 역사적 사실은 도외시한 채 도덕성 기준에서 판단하는 것이 현실의 문제를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을 지적함으로써 우리가 경제와 사회를 바라보는 방식을 되돌아보게 한다. 
 
■ 저자 장하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0년 이후 케임브리지 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3년 신고전파 경제학에 대안을 제시한 경제학자에게 주는 뮈르달 상을, 2005년 경제학의 지평을 넓힌 경제학자에게 주는 레온티예프 상을 최연소로 수상함으로써 세계적인 경제학자로 명성을 얻었다. 2014년에는 영국의 정치 평론지 《프로스펙트PROSPECT》가 매년 선정하는 ‘올해의 사상가 50인’ 중 9위에 오르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는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Economics The User’s Guide》,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23 Things They Dont Tell You About Capitalism》, 《나쁜 사마리아인들Bad Samaritans》 《쾌도난마 한국경제》 《국가의 역할Globalization, Economic Development and the Role of the State》 등이 있다. 

■ 역자 김희정
서울대 영문학과와 한국외국어대 동시통역대학원을 졸업했다. 가족과 함께 영국에 살면서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돈의 정석》 《진화의 배신》 《랩 걸》 《인간의 품격》 《어떻게 죽을 것인가》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등이 있다.

■ 차례
서론 부자 나라들은 실제로 어떻게 부자가 되었을까? 29 
1 역사에서 배우다: 몇 가지 방법론적 문제 32 
2 이 책의 구성과 내용에 관해 44 
3 이 책의 독자들에게 47 

1부 경제 개발 정책 역사적 관점에서 본 산업 무역 기술 정책 
1장 개발도상국 시절 현 선진국들의 따라잡기 전략 61 
1 영국의 따라잡기 전략 61 | 2 미국의 따라잡기 전략 73 | 3 독일의 따라잡기 전략 91 | 4 프랑스의 따라잡기 전략 97 | 5 스웨덴의 따라잡기 전략 103 | 6 소규모 유럽 국가들의 따라잡기 전략 109 | 7 일본과 동아시아 신흥공업국들의 따라잡기 전략 117 

2장 선진국의 앞서가기 전략과 따라잡기 국가들의 대응 127 
1 식민지 국가들에 대한 앞서가기 전략 127 | 2 반독립 국가들에 대한 앞서가기 전략 131 | 3 경쟁국들에 대한 앞서가기 전략 133 

3장 산업 개발 정책에 관한 몇 가지 신화와 교훈 141 
1 초기 경제 정책의 역사에 대한 신화와 사실 142 | 2 관세만이 능사는 아니다: 유치산업 보호의 다양한 모델 150 | 3 현재의 개발도상국들은 지나친 보호 정책을 사용하는가 152 

2부 제도와 경제 발전 역사적 관점에서 본 ‘바람직한 통치 체제’ 
1장 선진국의 제도 발전 역사 166 
1 민주주의 발전의 역사 166 | 2 관료 제도와 사법 제도의 역사 176 | 3 재산권 제도의 역사 184 | 4 기업 지배 제도의 역사 191 | 5 금융 제도의 역사 204 | 6 사회 복지와 노동 제도의 역사 220 

2장 과거와 현재 개발도상국의 제도 발전 역사 236 
1 선진국의 제도 발전 역사 조감도 237 | 2 제도 발전을 향한 멀고도 험한 여정 244 | 3 과거와 현재의 개발도상국들을 비교해 보자 249 

3부 현대를 사는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 
1장 경제 개발 정책을 다시 생각하다 258  
2장 제도 발전을 다시 생각하다 266  
3장 있을 수 있는 반론에 대해 276 
4장 경제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282 

 

도서요약
사다리 걷어차기


경제 개발 정책 역사적 관점에서 본 산업 무역 기술 정책

개발도상국 시절 현 선진국들의 따라잡기 전략

영국의 따라잡기 전략

현대 자유방임주의 사상의 원천이자 역사상 완전한 자유 무역을 실행해 본 경력이 있는 유일한 나라인 영국은 정부 개입이 거의 없이 경제 발전을 한 예로 널리 알려져 있다. 봉건 제도가 무너질 무렵(13~14세기) 영국은 상대적으로 경제가 뒤쳐져 있었고, 1600년 전까지도 유럽 대륙에서 기술을 수입하는 처지였다.


영국은 당시 더 발전된 저지대 국가(Low countries)지역, 특히 지금의 벨기에에 위치한 브뤼지, 겐트, 플랑드르의 이프레 등지에 주로 가공하지 않은 양모와 그보다는 적은 양이지만 저부가가치의 모직물(당시 숏클로스 short cloth 라고 알려진 옷감)을 수출했다. 당시 영국 군주들이 이 제품에 세금을 부과한 것은 주로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지만, 원자재보다 가공된 직물에 대한 세금이 더 낮아서 미약하나마 모직 옷감의 수입 대체 효과가 생겼고 수출 촉진에도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


튜더 왕조는 의도적인 유치산업 보호 정책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조처들을 취해 모직 제조업 발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18세기 상인이자 정치인, 소설가로 이름을 날린 대니얼 디포(Dania Defoe)는 지금은 거의 잊힌 저서 <영국 통상 계획 A Plan of English Commerce>(1728년) 에서 이 정책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튜더 왕조의 왕들, 특히 헨리 7세(1485~1509)와 엘리자베스 1세(1553~1603)가 저지대 국가들에게 양 원모 수출에 크게 의존하던 영국을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모직 제조업 국가로 탈바꿈시켰는지를 상당히 세밀하게 묘사한다.


디포는 헨리 7세가 저지대 국가들과 영국의 기술 격차를 감안할 때 영국이 상황을 변화시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 판단하고 점진적 접근 방식을 썼다고 강조한다. 헨리 7세는 모직 산업이 확고히 자리 잡은 후에야 양 원모에 관한 수출 관세를 인상했다. 그러나 영국의 기술력으로 가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양 원모가 생산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바로 양털에 부과했던 수출 관세를 폐지했다.


디포에 따르면 영국이 가공하지 않은 양모의 수출을 전면적으로 금지할 정도로 자국의 모직 제조 산업에 대해 확신하게 된 것은 헨리 7세가 수입 대체 정책(1489년)을 쓴 지 거의 100년이 지난 후인 엘리자베스 1세(1587년) 때였고, 영국의 이러한 조치는 저지대 국가의 모직 산업 붕괴로 이어졌다.


모직 산업 무문에서 영국이 거둔 성공을 설명할 때 위에 언급한 요소들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16세기식 유치산업 보호 전략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조처들은 헨리 7세가 시작하고 그의 후계자들이 이를 계속 추진하지 않았으면, 영국이 산업화 초기에 이런 성공을 거두는 것은 불가능하다고까지 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분명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18세기 영국 수출 소득의 절반 이상을 벌어들이는 기간산업 역할을 한 모직업이 없었다면 산업 혁명은 매우 어려웠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세기 후반에 산업 혁명을 거친 영국은 다른 나라와 기술 격차를 크게 벌리면서 앞서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앞서가는 동안에도 다른 나라가 영국의 앞선 기술을 넘볼 수조차 없게 된 19세기 중반까지는 산업 장려 정책이 지속되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게 사용된 도구는 보호 관세였다.


영국은 식민지의 상품이 우월해서 자국의 산업을 위협할 소지가 있으면 그 제품의 수입을 금했다. 예를 들어 1699년 제정된 양모법(Wool Act)에 따라 영국의 식민지들은 모직 제품을 수출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이로 인해 당시 영국보다 앞서 있던 아일랜드의 모직 산업이 붕괴되는 결과를 낳았다. 1700년에는 우월한 품질의 인도산 면제품(옥양목)의 수입을 금지하는 조처가 취해져서 당시 면 산업으로는 세계 최고의 효율을 자랑하던 인도의 면 제조업에 큰 타격을 가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1815년에 접어들 무렵 영국에서는 자신감이 생긴 제조업자로부터 자유 무역을 요구하는 소리가 거세지고 있었다. 1815년에 새로 통과한 곡물법에 따라(영국은 1463년 이래 수많은 곡물법을 제정했다) 농업 보호는 더 강화되었지만 자유 무역을 촉구하는 압력은 점점 높아졌다. 1833년 일련의 관세 삭감 조치가 있었지만 큰 변화가 생긴 것은 곡물법이 무효화되고 다수의 공산품에 대한 관세가 폐지된 1846년이었다.


곡물법 폐지가 상징적 의미를 지니기는 하지만 자유 무역에 진정한 변화가 온 것은 1850년대였다. 1850년대의 글래드스톤(William Gladstone) 정권의 예산안, 특히 1860년 예산안이 채택되고 그와 함께 영불 자유 무역 협정(이른바 코브던 슈발리에 협정)이 체결되면서 같은 해에 대부분의 관세가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자유 무역 체제는 오래 가지 않았다. 1880년대에는 이미 어려움에 처한 일부 영국 제조업자들이 보호 정책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미국과 독일의 공산품과의 경쟁에서 급속히 밀리기 시작한 20세기 초에 접어들면서 보호주의를 다시 도입하는 문제는 영국 정치권에서 가장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마침내 영국이 제조업 최강국이 아님을 인정하고, 1932년 대규모로 관세를 재도입하면서 자유 무역 시대는 막을 내렸다.


독일의 따라잡기 전략

1834년 독일 관세 동맹이 체결되기 전 프로이센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관세와 그 후 독일 산업계가 입은 관세 혜택은 전반적으로 낮은 편이었다. 1844년에 철강, 1846년에 면실에 대한 관세 인상이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이었다.


상대적으로 보호 관세가 낮았다고 해서 독일 정부가 경제 개발에 대해 자유방임주의적 접근을 한 것은 아니었다. 후에 독일을 통일한 프레이센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171~1740)와 프리드리히 대왕(1740~1786) 때 새 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한 정책들을 시행했다. 보호 관세, 독점 허용, 왕립 공장에서 싼 값에 원료를 제공하는 등의 일반적인 방법도 물론 사용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주요 산업 분야에 정부가 직접 관여했다는 사실이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즉위했을 당시 프로이센은 실질적으로 원자재 수출국이었고, 모직과 마 의류만이 유일한 공산품 수출 품목이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선왕의 중상주의 정책을 이어받아 다양한 산업, 특히 섬유(주로 마직류), 금속, 무기, 도자류, 실크, 설탕 정체 산업의 육성에 나서서 독점권 부여, 보호 무역, 수출 보조금, 자본 투자, 해외 숙련공 영입 등의 정책을 추진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또 다수의 기업에게 의뢰해 오늘날 ‘경영 자문’이라고 부르는 기능을 수행하도록 해서 새 산업, 특히 금속 식기류, 제당, 금속 및 군수품 산업 부문을 개척하도록 했다. 이런 ‘시범 공장(model factories)’들은 여러 면에서 온실 식물과 비슷해서 가혹한 시장 경쟁에 노출되면 살아남지 못할 확률이 컸지만 새 기술을 소개하고 ‘전시 효과(demonstration effect)’를 내는 중요한 기능을 했다.


프로이센은 군사 강대국으로 변신시키고자 하는 야망을 품었던 프리드리히 대왕은 산업 지역인 실레지아를 합병하고, 그 지역을 개발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특히 철강과 마섬유 산업에 집중해서 독일 최초의 용광로를 이 지역에 설치하고, 베틀을 1인당 한 대씩 무상 제공하는 조건으로 외국의 직조공들을 영입했다. 실레지아를 ‘독일의 무기고’로 개발하는 계획은 프리드리히가 사망한 후에도 역동적인 기업가적 관료들이 물려받아 계속 추진했다.


1842년 무렵에 실레지아는 기술 면에서는 영국과 거의 동등한 수준이고, 유럽에서는 명실상부 가장 개발된 지역이었다. 실레지아에서 거둔 성공은 원래 의도했던 대로 아주 좁은 범위의 방위 관련 산업 분야에 국한되었고 다른 지역으로 쉽게 파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따라잡기 단계의 경제에서 부족한 기업가적 정신과 능력을 정부가 어떻게 보완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 중요한 예가 되었다.


19세기 초 이후 프로이센 정부는 실레지아에서 사용했던 방법보다 덜 직접적이고 더 정교한 개입 정책들을 고안해 냈다. 그 중 중요한 사례는 루브 지방의 도로 건설에 필요한 재원을 정부가 댄 일이다. 또 교육 개혁을 통해 새 학교와 대학을 짓는 것뿐 아니라 교육의 방향을 신학에서 과학과 기술로 변화시킨 것도 주목할 만한 사례이다.


1840년대 이후 민간 부문이 성장하면서 산업 발전에 독일 정부가 가시적으로 개입하는 일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정부가 완전히 종적을 감추었다기보다는 지시를 내리는 역할에서 안내를 하는 역할로 변신했을 뿐이다.


제 2제국(1870~1914) 기간 동안 민간 부문이 더욱 발전했고, 더 강해진 융커들이 산업 발전이나 관료제의 강화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부의 자율성과 역량이 손상되기 시작했다. 정부의 역량과 산업 발전 과정에서 정부 개입이 상대적으로 줄었다고 할지라고 당시의 관세 정책과 카르텔 정책이 중공업의 발달에 끼친 역할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틸리(Tilly)는 관세 덕분에 카르텔들이 중공업 부문에서 활동하기가 더 편해졌고, 그에 따라 기업들은 투자와 혁신을 더 공격적으로 할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 거기에 더해 이 기간은 독일이 정치적, 종교적, 지리적으로 매우 다양하고 분열된 상태를 극복하고 통일을 한 직후라 사회의 평화를 유지하고, 그에 따라 투자를 증진할 수 있는 현대적 사회 정책을 개척해 나가던 시기이기도 했다.


선진국의 앞서가기 전략과 따라잡기 국가들의 대응

식민지 국가들에 대한 앞서가기 전략

영국은 식민지들, 특히 미국에서 제조업이 발달하는 것을 막으려고 일련의 강력한 정책을 추진했다. 첫째, 식민지 국가들에서 1차 제품의 생산을 권장하는 정책이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1720년대에 월폴은 미국 식민지에서 생산되는 대마, 목재, 가공처리 된 목재 등의 원자재에 대해 수출 보조금(장려금)을 지급하고 영국 수입업자들이 내는 관세는 폐지했다. 원자재 생산을 장려하면 영국과 경쟁할 가능서이 있는 제조업에 눈 돌리는 것을 저지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에서 나온 정책이었다.


둘째, 일부 제조업의 활동을 불법화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압연공장과 절단제강 공장을 운영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해서, 고부가가치 철강 제품이 아니라 저부가가치인 선철과 철봉 등을 만들 수밖에 없도록 했다.


셋째, 영국 상품과 경쟁이 될 만한 제품을 식민지가 수출하는 것을 금지했다. 우리는 이미 18세기 영국이 어떻게 인도의 면방직 산업에 타격을 주었는지를 살펴본 바 있다. 당시 영국은 인도 제품의 품질이 더 우수한데도 불구하고 인도로부터의 면직물(옥양목) 수입을 금지했다.


넷째, 식민지 당국이 관세를 부과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재정적인 이유로 불가피하게 관세가 필요한 경우에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 관세의 효과를 무마하는 조처를 취했다. 1859년 인도의 영국 식민지 당국은 순수히 재정적인 이유로 직물 제품에 대해 소량의 수입 관세(3퍼센트에서 10퍼센트)를 부과했지만, ‘공평한 경쟁의 장’을 보장한다는 명분 아래 인도의 생산업자들에게도 같은 비율의 세금을 내도록 했다. 이런 ‘보상’ 조처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영국의 면직 제조업자들은 정부게 이 관세를 폐지하라는 압력을 계속해서 가해 결국 1882년 관세 폐지에 성공했다.



제도와 경제 발전 역사적 관점에서 본 ‘바람직한 통치 체제’

선진국의 제도 발전 역사

재산권 제도의 역사

‘바람직한 통치 제도’에 관한 담론에서 재산권 보호의 ‘질’은 핵심적 요소 중의 하나로 등장한다. 재산권 보호가 투자 동기를 부여하는 데 중요하고 따라서 부의 창출에 결정적 요인이라는 논리에서이다. 그러나 재산권의 ‘질’을 측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계약법, 회사법, 파산법, 상속법, 세법, 토지 사용에 관한 각종 법 등 수많은 요소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분석 방법을 쉽게 적용할 수 있는 측면이 재산권 부문에도 있기는 하다. 그것은 바로 뚜렷하게 식별이 가능한 몇몇 법률들, 예를 들어 특허법과 그보다는 중요하지 않지만 저작권법과 상표법으로 규정된 지적 재산권이다.


* 지적 재산권 제도의 역사

최초로 특허권 보호 제도가 탄생한 것은 1474년 베니스에서였다. 새로운 기술과 기계를 발명한 사람에게 10년간 특허권을 인정한 것이다. 16세기에 일부 독일의 주, 특히 작센에서는 완전히 체계적이지는 않았지만 모종의 특허법이 시행되었다. 영국에서는 1623년에 독점 조례의 제정으로 최초의 특허법이 도입되었지만 많은 학자들이 1852년 개정이 되기 전까지는 ‘특허법’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프랑스는 1791년, 미국은 1793년, 오스트리아는 1794년에 특허법이 도입되었다.


이 시점에서 초기이 모든 지적 재산권 보호 제도는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결함(deficient)’이 매우 많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특허법에 공시 의무 규정이 명시되어 있지 않았고, 특허 출원 시 신청과 처리 과정에 드는 비용이 높은 데 반해 특허권자에 대한 보호는 충분치 못한 나라가 많았다. 또 대부분의 특허법은 발명품의 독창성을 확인하는 부분이 매우 느슨했다. 법률이 제정되었다고 하지만 특허권자에 대한 보호, 특히 외국인의 지적 재산권에 대한 보호는 매우 미흡했다. WTO의 무역에 관한 지적 재산권 협약이 나온 후 논쟁의 중심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지적 재산권 관련 법을 제정하는 나라의 수가 늘면서 국제적인 지적 재산권 체제를 설립하자는 압력이 19세기 말부터 점점 세지기 시작했고, 이 주제에 관해 일련의 회의가 열렸다. 1873년에 비엔나 회의가 열렸고, 1883년에 마침내 국제 산업 재산권 보호 협회 파리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에 서명을 한 11개국은 벨기에, 포르투갈, 프랑스, 과테말라, 이탈리아, 네덜란드, 산살바도르, 세르비아, 스페인, 스위스 등이다.


이 협정에는 특허뿐 아니라 상표법도 포함되어 있어서 특허법을 제정하지 않은 스위스와 네덜란드도 참여할 수 있었다. 1886년 저작권에 관한 베른 협정이 체결되었고, 파리 협정도 여러 차례(1911년, 1925년, 1934년, 1958년, 1967년) 개정을 거치면서 특허권자의 권리를 강화하는 쪽으로 변화해 갔다. 베른 협정과 함께 파리협정은 무역에 관한 지적 재산권 협약 TRIPS이 나올 때까지 국제 지적 재산권 체제의 근간을 이루었다.


과거와 현재 개발도상국의 제도 발전 역사

선진국의 제도 발전 역사 조감도

1820년 당시 선진국 중 어느 나라도 남성 보통 선거제를 시행하고 있지 않았다. 설령 투표권이 확대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상당한 재산을 보유한 남성, 그것도 30세 이상의 남성만 포함되었다. 모든 선진국에서 관직 임명은 연고주의, 엽관제, 이름만 있고 업무는 없는 관직, 관직 매매 등으로 얼룩져 있었다.


근대적 기업의 발달에 핵심 조건으로 꼽히는 유한 책임 제도는 어느 나라에서도 일반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권리라기보다는 특권으로 인식되었다. 기업 재무 면에서 가장 선진적인 제도를 갖춘 나라에서도 외부 감사나 정보완전 공시가 의무화되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선진국 중 어느 나라도 사회 복지 제도나 노동 시간, 아동 노동, 근무 환경의 안전 및 위생 등에 관한 노동 관련 법규를 갖추고 있기 않았다.


* 1875년, 본격적인 산업화 진행

1875년에 접어들 무렵 현 선진국들은 산업화의 진행과 함께 상당한 제도 발전을 이루어냈다. 어느 나라도 보통 선거권을 갖춘 곳은 없었다. 고작해야 프랑스, 덴마크, 미국 등 소수 국가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남성 보통 선거권은 갖추고 있었지만 그나마 미국은 그 후 선거권 범위를 더 제한하는 후퇴를 겪었다. 더욱이 이 나라들에서조차 비밀 투표와 같은 민주주의의 기초적 제도도 존재하지 않았고, 선거 부정이 만연했다.


이 시기에는 현 선진국들 대부분이 특허법을 제도화한 후였지만(스위스와 네덜란드는 제외), 법의 질적 수준이 무척 낮았다. 상당수의 나라(스웨덴, 영국, 포르투갈, 프랑스, 벨기에)에서 유한 책임제가 법제화되었지만 이 나라들도 유한 책임 회사의 회계 감사와 정보 공시에 관한 규정을 마련하지 않은 상태였다.


많은 선진국에서 은행은 여전히 생소한 제도였고 이탈리아, 스위스, 미국 등 몇몇 나라에는 중앙은행마저 존재하지 않았다. 은행에 대한 규제는 여전히 아주 드문 일이었고, ‘인맥’에 의존한 대부와 은행의 파산이 빈번했다.


* 1913년, 산업화의 성숙 초기

현대의 개발도상국들 중 부유한 편에 속하는 브라질, 타이, 터키, 멕시코, 콜럼비아 등은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는 제도를 갖추어야 한다는 요구를 받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선진국 중 가장 부유한 나라들이 이 나라들의 수준에 도달했을 당시 시행하고 있던 제도에 현재의 기준을 적용하면 질적으로 매우 낮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프랑스는 1913년에야 비밀 투표제를 도입했고 독일은 여전히 시행하지 않고 있었다. 관료 체제의 현대화는 특히 독일 같은 나라에서 상당한 진척을 보였다. 그러나 많은 나라 특히 미국과 스페인 같은 나라에서는 여전히 엽관제가 널리 퍼져 있었다.


기업 지배 제도는 영국과 미국에서도 현대적 기준을 적용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미흡했다. 영국은 약 10여 년 전(1900년)에 유한 책임 회사에 대한 의무 회계 감사 제도를 도입했지만, 법의 허점으로 말미암아 제출하는 대차대조표가 최신 것일 필요가 없었다. 경쟁법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여서 미국에서는 1890년에 셔먼 법이 도입되었지만 1914년 클레이턴 법이 제정되기 전까지는 이렇다 할 독과점 금지법이 시행되지 않고 있었다.


은행의 발전은 여전히 지지부진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아직 지점 설립이 허용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은행업 관련 규제는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중앙은행이 보편화되었지만 그 수준은 요즘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뒤떨어져 있었다.


현재의 개발도상국들과 비교해서 선진국들이 그와 유사한 개발 단계에서 더 잘한 일이 있다면 사회 복지 제도일 것이다. 사회 복지 제도는 1880년대 이후 인상적인 발전을 거듭해서 1913년 무렵에는 캐나다, 미국, 포르투갈을 제외한 대부분의 선진국이 비록 매우 불완전한 형태로나마 어느 정도 수준의 복지 제도를 갖추었다.


노동 시간, 일터의 안전성, 여성 노동 및 아동 노동에 대한 법률의 대부분이 이즈음에는 도입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기준이 상당히 낮았고, 적용 범위 또한 제한적이었을 뿐더러 시행도 미흡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하루 노동 시간을 10시간으로 제한하는 조치가 고용주와 보수적인 판사들의 극렬한 저항에 부딪혔고, 연방 수준에서 아동 노동이 금지(1938년)되기까지는 약 25년이 더 흘러야만 했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

경제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국제 개발 정책의 주도 세력과 그들을 조종하는 선진국은 왜 경제 개발에 가장 성공한 나라들이 지난 수 세기에 걸쳐 사용한 정책을 권장하지 않는 것일까? 왜 현재의 개발도상국에게는 자신들이 그들과 유사한 개발 수준에 있을 때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던 ‘가장 바람직한’ 정책과 제도를 강요하려 하는 것일까?


선진국은 왜 자신들의 개발 역사에 그토록 무지한 것일까? 이것은 현재의 지적 정치적 아젠다의 시각으로 과거를 해석하려 해서 역사적 관점을 흐려 놓곤 하는 사람의 본능적 성향 때문일까? 아니면 늘 반복되는 것처럼 정작 자신들이 개발을 할 때는 사용하지 않은 정책과 제도이지만 일단 기술적 선두 자리를 점한 지금에 와서는 그것을 개발도상국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이익이 된다는 계산 때문일까?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먼저 선진국들의 개발 역사에 대한 정확한 사실과 정보가 더 널리 알려져야만 한다. 이것은 ‘역사를 바로잡는’ 문제일 뿐 아니라 개발도상국들이 제대로 된 정보에 입각해서 자국에 맞는 정책과 제도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경제 개발에서 정책과 제도가 하는 역할, 특히 제도의 역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학계의 노력이 필요하다.


정책 면에서 더 자세히 말하자면 선진국과 그들이 조종하는 국제 개발 정책 주도 세력은 대부분의 현 선진국들이 경제 개발을 할 때 그토록 효과적으로 사용했던 ‘바람직하지 못한’ 정책을 개발도상국들이 사용하는 것을 장려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금지하지는 말아야 한다. 비행기 사고가 날 확률이 있다고 해서 비행기 운행을 전면 금지한다거나, 알레르기 반응으로 사망하는 아이들이 소수 있다고 해서 모든 예방 주사 프로그램을 폐지하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현재 선진국과 국제 개발 정책 주도 세력이 추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국제 개발 정책을 입안할 필요가 있다. 제도의 개선은 늘 권장되어야 한다. 특히 (실제로) 바람직한 정책과 바람직한 제도가 겸비되었을 때 생길 수 있는 엄청난 성장 잠재력을 고려하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특정한 현대 영미식 제도를 모든 나라에 강요하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이다. 이와 더불어 개발 단계와 특정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심지어 문화적 조건을 고려해서 각 나라에 어떤 형태의 제도가 필요하고 이로운지를 정확히 판별할 수 있는 더 많은 시도가 학문적, 실증적으로 진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제 현 개발도상국들이 더 빨리 경제 개발을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책과 제도에 대해 다시 생각할 때가 되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선진국들에게도 더 큰 혜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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