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미술은 진짜 모르겠더라
 
지은이 : 정서연
출판사 : 21세기북스
출판일 : 2023년 04월




  • 미술 전문 미디어 ‘와이아트’ 정서연 대표가 ‘요즘 미술’에 가장 잘 어울리는 키워드 12개를 엄선해 현대미술 감상에 필요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제공합니다.


    요즘 미술은 진짜 모르겠더라


    미니멀리즘 - 사물을 배열했을 뿐인데 왜 예술이지?

    현대미술의 분기점, 미니멀리즘

    ‘요즘 미술’을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키워드는 ‘미니멀리즘’입니다. 그 이유는 미니멀리즘이 현대미술 중에서도 모더니즘과 포스터모더니즘의 경계에 걸쳐 있어서 ‘요즘 미술’을 파악하는 분기점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미니멀리즘은 인테리어와 디자인, 패션 분야에서 주로 ‘심플하다’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미니멀 라이프’에서처럼 불필요한 물건을 줄이고 간결한 생활방식을 유지한다는 의미도 있죠. 이러한 의미처럼 미술에서의 미니멀리즘도 겉보기엔 ‘심플한’ 작품들로 보입니다. 대개가 전시 공간 안에 사물들을 차례대로 놓아두거나, 벽에 공업용 모듈을 기계적으로 배치하는 식이니까요.


    하지만 예술로서의 미니멀리즘은 ‘평면성’을 강조하는 ‘모더니즘’의 원리를 극단적으로 추구해 ‘사물’을 전시장 안으로 가져오는 식의 작업을 의미합니다.


    모더니즘 정신의 계승

    모더니즘의 원리는 한마디로 ‘장르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회화는 회화다워야 하고, 문학은 문학다워야 하며, 연극은 연극다워야 한다는 것이 모더니즘의 기본 전제입니다. 그럼 회화가 문학이나 연극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간단해요. 바로 ‘캔버스’와 ‘물감’을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캔버스와 물감을 사용함으로써 나타낼 수 있는 특징에 집중하는 것이 바로 장르의 순수성을 지키는 길입니다. 2차원이라는 회화의 고유한 형식을 최대한 살리자는 것이죠. 그러니까 캔버스라는 ‘평면’을 어떻게 물감으로 뒤덮는지가 중요합니다.


    고전주의 회화에서 캔버스는 평평하지만 시각적으로는 어떤 ‘공간’이 보입니다. 모더니즘에서는 이러한 공간은 ‘환영’이라고 보고, 환영을 제거해 ‘평면성’을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해야 장르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미술비평가인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평면성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작품으로 잭슨 폴록의 회화를 꼽았습니다. 잭슨 폴록의 회화를 보면 선과 면의 구별도 없고, 화면 안과 밖의 경계도 불문명하죠. 요소들이 화면 전체에 균등하게 배분되어 있는 ‘전면회화’의 특징을 보입니다. 반면 회화는 화면에 어떤 중심적인 구도를 설정하지 않고 전체를 균질하게 표현하는 경향의 회화를 말하며, 말 그대로 평면성이 도드라집니다.


    그림 밖으로 나와 ‘사물’이 된 미술

    미니멀리즘 작가들은 평면성이라는 모더니즘의 원리가 사각형의 캔버스 틀 안에서는 끝내 해결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최소한의 환영마저도 없애려고 했던 시도가 바로 미니멀리즘입니다. 환영을 없애기 위한 이러한 시도는 결국 예술을 ‘사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미니멀리즘의 대표적인 작가로 꼽히는 도널드 저드가 보기에 환영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작품이 아예 실제 공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도널드 저드는 통째로 된 하나의 유일한 사물을 전시함으로써 요소들 사이의 관계를 해체하고 환영을 제거합니다. 그는 작품 <무제>에서 상자 모양의 단위체들을 층층이 쌓아 올렸는데, 사이의 움푹 빈 공간은 아무 것도 감출 수 없다는 그의 신념을 반영합니다.


    관람자의 지각과 체험이 중요해진 이유

    미니멀리즘은 ‘관람객의 체험’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미니멀리즘에서 작품의 의미는 작품과 관람자가 맺는 공간에서의 상호작용에 달려 있어요. 여러분도 미술관에 방문했을 때 느끼곤 했을 텐데요, 관람객의 지각과 체험을 중시하는 경향은 요즘 미술에서 자주 나타납니다.


    미니멀리즘 작가들 중에서도 지각의 차원을 강조한 로버트 모리스는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고 아무것도 암시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전시장에 다면체를 놓아두었습니다. 그가 전시장에 설치한 다면체는 세 개 모두 같은 ‘L’자 형태인데 놓인 위치와 빛의 방향에 따라 모양이 다르게 보입니다. 관람자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몸을 여러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고, 매 순간 오브제를 다르게 감각하죠. 머리로는 같은 모양인 걸 알지만 지각적으로는 다르게 느껴지는 거예요. 이러한 미니멀리즘 작품들은 우리에게 신체의 참여를 요구합니다.


    그런데 모더니즘 비평가인 마이클 프리드는 로버트 모리스의 작품이 무대 위의 배우 같다는 점에서 ‘연극성’을 지닌다고 비판했습니다. 실제로 로버트 모리스의 조각은 마치 연극 공연을 관람하듯 시간 속에서의 경험을 요구하는데요, 프리드는 미술이 연극과 같은 시간예술이 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죠. 모더니즘 미술은 장르의 순수성을 지켜야 하는데, 시각예술이 시간예술처럼 되어버리면 곤란하니까요.


    하지만 현재 시점에서 마이클 프리드의 분석은 비판이라기보다는 미니멀리즘의 특성을 잘 설명한 글로 읽힙니다. 미니멀리즘은 작가의 개입을 배제하고, 공장에서 제작된 기성 재료를 사용하며, 작품이 반복적으로 배치되는 모습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관람자의 체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작품과 관람자 사이의 상호작용에 관심을 두고 있죠. 모더니즘 미술이 매체의 특징을 존중하면서 장르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했다면, 미니멀 아트 또한 환영을 제거하기 위한 목표에 집중하면서 평면성과 사물성을 극단으로 강조한 경향이 있습니다. 미니멀 아트는 모더니즘 미술의 정점인 동시에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이행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니멀리즘은 모더니즘의 평면성에서 우리를 해방시킴과 동시에 미술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전통적인 미학을 부정하고 시각예술의 확장을 가져온 미니멀리즘은 복합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현대의 미술을 이해하는 바탕이 됩니다.



    퍼포먼스 - 몸으로 직접 경험하는 충격의 예술

    자신의 몸을 캔버스로 삼은 예술

    퍼포먼스라고 불리는 미술가의 신체적 표현은 20세기 초에 등장해 1960년대부터 활발해졌는데요, 특히 1960년대 신체미술은 ‘행위미술’과 거의 동의어로 쓰였어요. 특별한 재료 없이 신체적인 교감과 감각을 통해 관람자에게 접근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몸을 매체로 활용한 1960년대와 달리, 1970년대 퍼포먼스 예술가들은 신체를 통해 인간의 극한 상황을 표출함으로써 자신의 경험을 드러냈습니다. 오노 요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같은 페미니스트 미술가들이 두각을 나타냈고, 비토 아콘치, 브루스 나우만, 크리스 버든 등의 미술가들은 공포와 죽음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 가학적이고 극단적인 형태의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예술가는 왜 자신의 몸을 칼로 찔렀을까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활동 기간 내내 주로 퍼포먼스를 선보인 만큼 미술사적으로 의미 있는 작품들이 많습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처음으로 선보인 퍼포먼스 작품으로는 <리듬 10>(1973)이 있습니다. 작가는 퍼포먼스를 위해 크기가 다른 열두 자루의 칼과 녹음기 두 대, 그리고 마이크를 준비했어요. 그러고는 공연장 바닥에 커다란 흰 종이를 깐 뒤 무릎을 꿇고 앉았죠. 이내 리듬에 맞춰 손가락 사이의 틈을 칼로 찌르기 시작합니다. 칼이 손가락을 찌를 때마다 다른 칼로 바꾸는데요, 칼을 교체할 때마다 바닥의 흰 종이가 손가락에서 흐르는 피로 붉게 물들었어요.


    이러한 퍼포먼스의 과정은 첫 번째 녹음기에 녹음되고, 열두 자루의 칼이 모두 사용되면 두 번째 퍼포먼스가 시작됩니다. 두 번째 퍼포먼스는 첫 번째 퍼포먼스의 녹음을 재생하면서 진행되며, 이 과정은 두 번째 녹음기에 녹음됩니다. 모든 퍼포먼스가 끝나면 두 녹음기의 테이프를 동시에 재생하고 작가는 무대를 떠납니다.


    퍼포먼스 아트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상식적 가치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특징을 지닙니다. 특히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같은 페미니스트 예술가들은 관조적이고 미적인 가치로 표현되던 여성의 신체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죠. 그는 자신의 몸을 재료로 삼아 기존의 가치에 균열을 내면서 성, 젠더, 인종, 계급 같은 정체성을 충격적인 방식으로 드러냅니다.



    팝 아트 - 기계로 찍어내도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도대체 앤디 워홀은 왜 비싼

    ‘팝 아트’라는 용어는 1954년 영국의 비평가인 로렌스 알로웨이가 대중문화를 반영하는 예술형식을 총칭하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이후 대중문화에 등장하는 이미지를 순수미술의 문맥 안에서 사용하는 미술가들의 활동을 가리키는 말로 정착하게 되었죠.


    당시 여러 팝 아티스트들이 활동했지만 앤디 워홀이 팝 아트를 대표하는 작가로 평가받게 된 주요 원인은 ‘실크스크린’이라는 제작 방식에 있습니다.


    내 작품세계에서 손으로 그리는 것은 너무 오래 걸리며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것은 아니다. 기계적인 수단이 오늘날의 것이다. 실크스크린은 손으로 그리는 것만큼이나 정직한 방법이다.

    -앤디 워홀


    실크스크린은 판화의 일종으로, 기본적으로 동일한 이미지를 손쉽게 반복할 수 있게 해줍니다. 원판과 동일한 이미지를 수백 개씩 만들어낼 수도 있고, 이미지의 자리를 바꾸거나 겹쳐 찍는 방식으로 변형을 가해 구사하는 것도 가능하죠. 전통적인 회화가 유일무이한 방식으로 제작되었다면 실크스크린은 기계화와 산업화를 가능케 합니다. 앤디 워홀의 작품이 높은 가치를 부여받은 이유는 산업사회에 걸맞는 산업예술을 제작하기 위해 예술적 생산방식을 산업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텅 빈 얼굴로 드러난 소비사회의 초상

    앤디 워홀은 마치 상품처럼 우리의 욕망이 된 ‘유명인’의 이미지를 복제한 제품도 다수 남겼습니다. 그는 마릴린 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 재클린 케테디 오나시스, 마오쩌둥과 같은 유명 인사의 초상을 반복적으로 표현했는데요, 우리는 실제 인물보다 앤디 워홀의 그림에서 그 사람을 훨씬 빠르게 인식합니다. 해당 인물이 ‘이미지’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워홀이 남긴 초상화들은 정신세계를 지닌 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한 겹 표피만 남은 텅 빈 얼굴들을 하고 있어요.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의 표면을 본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가 만든 초상화들도 내면이 제거된 표면에 불과합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거의 대부분 상대방의 겉모습을 보고 일차적인 판단을 하게 됩니다. 바쁜 현대인들은 사람의 내면을 파악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외형이라는 표면에 집중합니다. 외모지상주의도 같은 맥락이죠. 앤디 워홀이 인물의 표면에 집중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소비사회의 도래에 따른 인간의 변화를 냉철하게 읽어냅니다.


    앤디 워홀에 대한 높은 평가는 소비사회에 대한 자신의 통찰을 작품으로 구현해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소비사회를 이해할 수 있죠. 그가 표현한 상품들은 우리의 욕망 그 자체이며, 소비사회와 자본주의의 궁극적 가치인 ‘부’를 표상합니다. 하나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복제하는 형식은 산업사회의 대량생산 시스템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대 물질문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소비사회와 비인간화, 그리고 그에 따른 현상들을 표현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가치를 다시 인식하게 만듭니다.



    관계미술 - 미술관에서 식사를 대접한 예술가

    모여서 먹기만 해도 미술이 될 수 있을까

    대표적인 관계미술 작가로 꼽히는 리크리트 티라바니자는 1990년 뉴욕의 한 갤러리에서 열린 첫 개인전 《무제(팟타이)》에서 태국 요리를 만들어 관람객들에게 대접했습니다.


    화이트 큐브의 갤러리는 신성한 공간처럼 여겨지는 특수한 장소입니다. 하지만 그는 음식 접대라는 행위를 통해 미술과 일상의 경계를 허물고 관람객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만들었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무제(무료)》 전시를 이어갔습니다.


    리크리트 티라바니자가 직접 요리한 태국 음식을 ‘무료’로 제공하자 많은 관람객이 몰렸는데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와서 동료 예술가들이 요리를 거들기도 했습니다.


    음식을 매개로 소통의 장을 제공하는 리크리트 티라바니자의 작업은 우리가 예술 작품을 그저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작가는 관객 개개인이 공감할 수 있도록 유도된 ‘공유의 장’을 제공함으로써 관객에게 참여의 기회를 부여합니다. 식사라는 것은 전 세계 어디에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일상적인 행위잖아요. 그는 미술을 특정한 계층의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장벽을 낮춤으로써 예기치 못한 예술과의 만남을 경험하게 만듭니다.


    전시장 바닥에 사탕을 쌓아놓은 이유

    관계미술을 펼친 현대미술 작가들 중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작품이 관계의 미학을 잘 구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자신의 ‘사탕 연작’ 중 하나인 <무제(LA의 로스 초상화)>에서 자신의 동성 연인이었던 로스 레이콕의 몸무게인 175파운드를 사탕더미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관람자들이 사탕을 가져가거나 먹을 수 있게 함으로써 연인의 투병 과정과 죽음을 은유했는데요, 관람자가 사탕을 가져가면 다시 채워 넣도록 했습니다. 사탕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줄어들지만 동시에 끝없이 다시 채워집니다. 곤잘레스 토레스는 죽음을 현재형으로 만듦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추모의 마음을 계속 이어가게 합니다. 이 작품이 관계미학으로 해석되는 이유는 관람객과 작품의 상호작용이 전시의 구조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관람객이 많은 사탕을 가져간다면’ 혹은 ‘가져가지 않는다면’이라는 변수가 작품의 중심이 되는 것이죠.


    누군가에게는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작업이 제도비판 미술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빌보드’ 시리즈로 분류되는 <무제>는 커다란 옥외 광고판에 하얀 침대와 두 개의 베개를 찍은 사진을 전시한 작품입니다. 당시 뉴욕현대미술관을 비롯해 뉴욕 시대 24곳에서 동시에 전시되었는데요, 이 침대는 그와 죽은 연인 로스가 함께 쓰던 것입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연인이 죽은 후 침대가 고통의 장소가 되어버려 멀리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를 지닌 사적 침실을 공적인 영역에 전시함으로써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효과를 낸 것입니다.


    이 작품은 겉으로는 연인의 죽음이라는 내밀한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는 당시의 동성애자들을 향한 차별과 혐오에 맞서기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1986년 미국 대법원은 동성애자들의 행동을 처벌하기 위해 무단으로 그들의 침실에 들어갈 권리가 있다는 판결을 내렸는데요,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동성애자들의 사적 영역을 침범하는 정부를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낸 것이죠. 직접적으로 구호를 내세움으로써 강렬한 인상을 주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개념적인 성격을 강조해 개인의 열린 해석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나는 관람자가 필요하다. 내 작업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대중이 필요하다. 관람자 없이, 대중 없이 이 작업은 의미를 갖지 못한다.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는 다수의 대중과 소통하는 기회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자신의 창작 과정에 관람객을 적극적으로 참여시킴으로써 작품에 다양한 의미와 해석을 부여하는 것이죠. 시각적으로 새로운 감각을 주면서도 기존 체제를 비판하고,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면서 관계를 구축합니다. 그의 작품은 완결되지 않은 형태로 제시되어 사람들의 참여에 의해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양상을 띱니다. 사회비판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이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아 해석의 여지를 남겨둡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작품의 형태가 변화하고 소멸해가지만 그의 작품은 계속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냅니다.



    공공미술 - 일상의 공간을 모두를 위한 예술로 만들다

    미술은 어떻게 머물고 싶은 공간을 만들까

    ‘공공장소 속의 미술’은 공원이나 광장 같은 공용 공간에 작품을 설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미술관이나 갤러리 안에서 볼 수 있는 작가의 작품을 공공장소에 세우는 방식이죠. 아무래도 가장 많이 본 공공미술 작품 유형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러한 유형의 공공미술이 많은 이유는 건축물을 지을 때 건축비의 일정 비율을 미술품 설치에 사용해야 한다는 법 조항 때문일 거예요. 1951년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건축비의 1퍼센트를 미술품 주문에 사용해야 한다는 법을 제정했고, 이후 미국 연방정부에서도 건축비의 0.5퍼센트를 공공미술에 할당하도록 하는 제도를 마련했습니다. 한국의 <문화예술진흥법> 또한 일정 규모 이상의 건축물에는 건축비용의 100분의 1이하 범위에서 미술작품을 설치하도록 명시하고 있어요. 이러한 법 조항은 일상에서도 예술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측면에서 정당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면 미적인 가치를 우선시해 작품을 설치하기보다 법 조항에서 제시하는 퍼센트만 의식한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좋은 공공미술 작품과 어우러진 멋진 공간이 잘 떠오르지 않거든요. 청계천 광장에 설치된 클래스 올덴버그의 다슬기 모양 조형물인 <봄>만 해도 그렇습니다. 클래스 올덴버그는 대형 조형물을 통해 많은 소통을 이끌어낸 작가인데요, 유독 이곳에 설치된 작품은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청계천이라는 장소성과 환경이라는 의제에 어울리지 않고, 공간적인 분위기에도 스며들지 못한 듯합니다.


    물론 이 범주에 속하는 작품들이 모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머물로 싶은 마음이 생기는 공간이 많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장소에 한번도 방문하지 않은 채 작품을 설치한 예술가들이 많은 것이 또 하나의 이유이고요. 공공장소 속의 미술은 단순히 공간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미적 만족감을 주면서 새로운 공간으로 확장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인공지능 - 인공지능이 사람보다 그림을 잘 그린다며?

    렘브란트가 그리지 않은 렘브란트 그림

    ‘인공지능 예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프로그램으로는 구글의 ‘딥드림’이 있습니다. 딥드림은 ‘딥러닝’ 기술을 시각 이미지에 적용한 것으로, 결과물이 마치 꿈을 꾸는 듯한 추상적인 이미지를 닮았다고 해서 딥드림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어요. 2015년부터 연구된 딥드림은 이미지에 나타나는 패턴 차이를 학습한 뒤 자신이 알고 있는 패턴을 기반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방식입니다.


    딥드림은 ‘인셉셔니즘’이라는 기술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인셉셔니즘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인셉션>에서 따온 명칭으로, 기존에 입력된 이미지에서 변수를 찾아내 새로운 이미지를 합성하는 방식입니다.


    한편 마이크로소프트와 네덜란드 공과대학교, 렘브란트미술관에서 2014년부터 공동으로 진행해온 ‘넥스트 렘브란트’라는 프로젝트로 주목할 만합니다. ‘넥스트 렘브란트’는 립러닝 알고리즘이 2년에 걸쳐 346점의 렘브란트 그림을 분석하고 그 특징을 파악해 렘브란트풍의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프로젝트입니다.


    이 프로젝트의 흥미로운 부분은 인공지능이 단순히 렘브란트의 스타일을 따라한 것이 아닌, 그림의 주제를 스스로 선택해 완전히 새로운 그림을 창조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어두운 색상의 옷을 입고 모자를 쓴 수염이 난 30~40대의 백인 남성의 초상화’라는 주제는 프로그래머가 입력한 값이 아니었어요. 그림 속 남성이 얼굴을 오른쪽으로 살짝 돌리고 있는 것도요. 모두 인공지능이 스스로 결정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 결정한 뒤에는 그동안 학습한 렘브란트 스타일로 눈, 코, 입, 귀 등을 표현했고, 다음으로는 3D 프린팅 기술과 UV 잉크 등을 활용해 렘브란트가 사용했던 붓 터치를 재현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2019년 10월 크리스티 경매에서 약 5억 원에 낙찰된 <에드뭉드 벨라미> 초상화도 인공지능 예술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파리의 예술 단체 오비어스가 개발한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그린 그림인데요, 이 AI는 14세기에서 20세기에 그려진 1만 5000여 장의 초상화를 학습해 실존하지 않는 인물인 벨라미의 초상을 그려냈습니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협력이 바꿀 미술의 미래

    요즘 인공지능 예술을 둘러싼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데요, 인공지능 예술에 대해서는 ‘사진’이 처음 등장했을 때와 비교해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진이 발명되었을 당시 사람들은 이제 예술이 종말을 맞을 거라고 예상했죠. 인간의 손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사진보다 똑같이 그려낼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사진이 등장하고 난 뒤 예술가는 손으로 일일이 그려내던 노동에서 벗어나 보다 넓은 의미에서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연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하기도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가시화하기도 했으니까요. 이러한 변화가 ‘현대미술’의 탄생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인공지능 예술도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인공지능은 예술가의 창작을 돕는 하나의 기술적 도구로서 시각예술을 확장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인공지능의 창의력은 인간의 창의력을 복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프로그래머들이 알고리즘을 만들고, 예술가는 만들어진 인공지능을 도구로 사용하니까요.


    인공지능은 급속도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만큼 머지않아 우리의 삶뿐만 아니라 예술계에도 어떤 형태로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있는데, 이제는 가장 인간적인 활동이라고 여겨온 예술마저 위협받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간은 예술에 있어서 ‘주체’라는 입장을 무의식적으로 고수해왔던 것 같습니다. 인간과 기술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기술은 인간의 명령에 따르는 부수적인 존재로 파악했던 것이죠. 이러한 전제는 인간이 만든 기술을 ‘객체’로 보는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사례들은 모두 인간과 인공지능이 연합해 작품을 만드는 과정이었습니다. 인간이 알고리즘을 만들어 인공지능을 학습시키고, 인공지능은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에 대한 창조성 평가는 다시 인간의 몫이죠. 인공지능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넘어 이제 인간과 인공지능이 서로 소통하면서 서로가 새로운 역할을 수행하는 상황이 만들어진 듯합니다.


    이미 시작된 인공지능 시대에서는 ‘인간 vs 인공지능’의 대결 구도를 버리는 것이 관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간과 기술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각각을 행위자로 인정하자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수많은 존재들과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고, 인간 외적인 존재들도 인간처럼 행위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과 비인간을 동등하게 다뤄야 한다는 것이죠. 인간도 장단점이 있고, 인공지능도 장단점이 있는 만큼 ‘인공지능과 협력하는 인간’이야말로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세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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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