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인의 월든
 
지은이 : 박혜윤 (지은이)
출판사 : 다산초당(다산북스)
출판일 : 2022년 09월




  • 마틴 루서 킹이 사랑했고, 법정 스님이 마지막까지 곁에 두었던 전 세계적 고전 『월든』! 소로가 남긴 약 180년의 텍스트를 기반으로, 발전과 성장에 대한 강박으로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모순적이고 부족한 그대로 변명하지 않고 나대로 살아나가는 삶의 태도를 새롭게 이야기합니다.


    도시인의 월든


    내 삶의 저자가 되는 법

    문명에 반항하는 확실한 방법

    우리 가족이 사는 곳은 바다와 무척 가깝다. 차로 30분 정도만 가면 닿고, 한 시간쯤 가면 어지러운 선을 그리는 아름다운 해안이 펼쳐진다. 바닷가에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좋을 것 같지만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상당히 힘든 일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요즘처럼 정신 없는 세상에 매일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월든』에서 소로는 머리를 쓰는 일, 농사처럼 손을 쓰는 일보다 더 좋은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 주장은 어떻게 보면 싱거운 이야기 같기도 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상당한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소중한 인생은 게으르게 낭비한다고 볼 수도 있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무언가를 했다. 반감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게 목적은 아니었겠지만, 행하는 것이든 혹은 행해야 하는데 하지 않는 것이든, 사회적으로 합의된 어떤 것에 의문을 제기한 것은 분명하다. 그는 바쁘게 무언가를 하고, 발전을 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일을 멈춤으로써 이 모든 일들의 전제에 놓인 우리 사회와 문화의 시간관념을 거부했다.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나의 하루하루는 일주일의 요일에 따르지도 않았고, 매 시간으로 쪼개지지도 않았고, 시계의 똑딱 소리에 쫓겨 분주해지지도 않았다. 나는 푸리 인디언처럼 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을 모두 같은 한 단어로 표현했다. 그들은 어제는 뒤를, 내일은 앞을, 당일은 머리 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표현했다,”


    시간관념은 우리가 속한 자본주의 문화의 핵심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와 다른 시간관념을 가진 다른 부족을 살펴봐야 한다. 소로가 말한 푸리 인디언과 비슷한 민족이 피다한족이다. 피다한어에는 과거나 미래를 표현하는 방법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들은 현재에 집중해 자신의 직업 경험만을 표현한다. 이러한 언어 습관은 삶의 방식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피다한족은 도구도, 예술작품도 만들지 않고, 음식을 보존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필요한 도구는 즉석에서 만들어 쓰고 그만이다. 보존한 음식이 없으니 한참을 굶기도 한다. 신화나 구전 이야기도 없고, 장례식이나 결혼식 같은 의례도 없다.


    사실, 이들이 삶을 어떤 방식으로 느끼는지는 아무리 상상을 해봐도 알 수 없다. 미래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잠재우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애당초 없다니. 피다한족은 우리 기준으로 봤을 때 지독하게 원시적인 생활을 한다. 그런데 그들의 심리상태에 이입하도록 노력해 보면 묘하게 부러운 마음이 드는 것도 같다. 내일 먹을 식량을 생각하지 않고, 신의 분노와 벌은 안중에도 없으니 그들은 늘 웃으면서 산다고 한다.


    문명은 삶을 하나의 ‘제도’로 만들었다. 문명 전체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개인 모두가 하나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제도의 일관성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시간관념이다. 모두가 함께 지키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간이다. 이 시간을 같은 속도와 정확성으로 따라가면서 우리는 더 많이, 더 효율적으로 생산해야 한다. 그렇기에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햇살이나 쳐다보고 있는 것은 문명에 대한 중대한 반항이 된다.


    하지만 소로의 이야기 중에 가장 아프게 느껴지는 문장은, 예전에는 정직하게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나 자신을 위한 일을 하는 자유를 잃지 않을 방법을 열정적으로 궁리했지만 이제는 무뎌졌다는 부분이다. 미개인들의 물질적 부족함은 사실 문명으로 인해 빈곤을 알아버린 우리들 눈으로 왜곡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해서 우리가 미개인을 따를 수는 없다. 소로도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외부에 우리를 조정하는 문명이라는 존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우리 각자는 문명의 시간관념을 내면에 가지고 있다. 내일 먹을 것을 걱정하기도 하고 때로는 내일 먹을 것에 대해 기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니 문명을 비판하는 것으로 끝을 낼 수는 없다.


    첫 번째로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독특한 개인으로서 나 자신과 함께 있는 일이다. 하루, 이틀 그렇게 시간을 잊는다고 해서 문명이 무너지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고 나면 우리는 더 좋은 물건, 더 높은 생산성에 대한 숭배를 조금 내려놓을 수도 있다.


    그다음 소로가 한 일은 바로 집안일이었다. 그는 집안일이 즐거운 일이라고 했다. 바닥이 더러우면 일찍 일어나 가구들을 집 밖에 내어놓고, 물을 뿌리고 모래로 문질러 깨끗하게 청소를 한다. 그러고는 풀밭에 있는 가구들을 찬찬히 감상한다. 주변의 나무며 어우러진 가구들을 보면서 그는 충만한 일체감을 느낀다. 그는 이런 집안일을 명상이라고 불렀다. 사소하고 귀찮은 집안일을 즐거움이자 나만의 명상으로 여기는 소로의 모습에 나는 감동한다.


    우리가 정규직이 없어도 문명인다운 노동의 가치를 정규적으로 느낄 수 있는 수단이 바로 매일의 집안일이다. 남편이 회사를 그만둔 다음 새로운 직장을 구하는 것이 계획대로 되지 않았을 때, 불안을 달래준 것은 매일의 설거지와 청소였다. 사춘기에 접어드는 딸의 정체성 탐구에 기둥이 되어준 것도 집안일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매일 내 방식대로 대강 밥을 차리며 나만의 일을 하는 동시에 문명에 동참하는 만족감을 느낀다.



    감히 쓸모없어질 용기

    용기 아닌 용기, 복종 아닌 복종

    몇 년 전 앞마당에 라벤더를 심었다. 심고 나서 2~3년 동안은 꽃도 피지 않아서 죽었나 보다 했는데, 어느 순간 쑥쑥 자라 때가 되면 보랏빛의 자그마한 꽃을 피운다. 라벤더 내음을 들이마시다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얻게된 수많은 것들과 또 잃은 것들이 떠오른다. 이런 때면 되새기는 오래된 질문이 하나 있다.


    어떻게 세상을 사랑하면서도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람들과 어울리고 사랑하면서도 인간들이 만들어낸 불합리와 잔인함에 절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여자는 대학 도서관에도 함부로 출입할 수 없을 정도로 성차별이 심했던 20세기 초, 영국에서 살았던 천재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는 에세이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의 현실을 그린다. 하지만 이 책은 여성의 현실을 고발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는다. 현대 교육을 받은 오늘날의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지 않아도 여성의 일상에 아직도 만연한 불공평함에 대해서 세련된 논리로 개탄하고 개선방향까지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논리를 벗어난 결론으로 간다.


    『자기만의 방』을 읽은 후 이 세상이나 나 자신의 불합리한 모습을 비판하고 싶을 때, 멈칫하게 됐다. 나는 울프에게서 그 순간에 먼저 무엇을 생각해 봐야 하는지 배웠다. 외부의 어떤 대상을 비난하기 전에 먼저 내 안에 있는 날것의 부정적 감정을 보는 것이다. (원문에서는 주로 ‘쓰다’라는 의미로 번역되는 bitterness라고 했다. 나는 이것을 ‘정제되지 않은 부정적 감정’으로 이해했다.) 울프는 아무리 억울하고 화가 나도, 불합리를 당하는 여성의 이장만이 아니라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인간의 보편성을 표현하려면 자기 안에 있는 ‘비터니스(bitterness)’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썼다.


    소로는 숲에 들어가서 집을 짓고 자연을 벗 삼아 홀로 살겠다고 해놓고는 겨우 2년 조금 넘은 뒤 미련도 없이 걸어나왔다. 소로는 그에 대해 실패라고 평가하지도 않고 어떤 변명도 하지 않는다. 숲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나오는 것에도 좋은 이유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길을 만드는 것만큼이나 거기서 벗어나는 것도 어렵다는 것도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당연히 세상 사람들로부터도 비웃음당할 것이다. “겨우 2년? 실패했군.” 이렇게 말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살아야 할 삶은 숲에서의 생활 하나만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이 자신이 만든 길이라고 해도 말이다. 사회에서 가장 신성한 법칙보다 더 높은 ‘나 자신의 존재의 법칙’이란 바로 이렇게 매 순간 새로운 길에 나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비난과 비웃음 앞에서도 자신만이 살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지, 그런 평가들 앞에서 항변하고 반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소로는 말한다. 미라보의 노상강도질처럼 말이다. 노상강도질을 하려면 실제로 군인이 되어 목숨을 걸고 전쟁에 나가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소로는 그런 용기가 어리석다고 말한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가 아니라 복종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 단락에서 내게 알맞은 위로를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가족의 실험을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평가하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나는 너무 창피해서 쥐구멍을 찾고 싶어진다.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기도 어렵다. 얼만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딘가 이상하게 사는 게 사실이니까. 혹은 왜 그렇게 사냐고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 부부나 애들이나 세상에 반항하기 위해 무언가를 했던 기억은 없다. 규칙이란 규칙은 다 지키지 않으면 겁이 나서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는 게 집안 내력이라 최선을 다해서 사회가 정상이라 여기는 것들에 맞추려고 했다. 그런데 소로에 따르면 이런 복종의 태도로 나만의 무엇을 찾아가다 보니 이렇게 된 모양이다. ‘나만의 존재 법칙’에 복종하기 위해 이 길, 저 길을 밟아본 결과다. 잘 모르니까 정답을 바라지 않고, 마음의 길을 조심조심 밟아온 것이다.


    소로는 사회에 불만을 표시하고 반항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으면 자신의 길에서 벗어나게 될 거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동시에 자신이 만든 길에서도 자유롭게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고도 말한다. 그런 삶은 자기 존재의 더 높은 법칙에 복종함으로써 가능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회사에 다녀도, 백수로 살아도, 도시에 살아도 시골에 살아도 어려움은 있다. 천국에 가도 문제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때, 그문제 자체에 반대하기보다는 바로 그곳에서 나만의 길을 만들어내는 것, 바로 그것이 울프가 말한 ‘비터니스’를 버리는 게 아닐까.



    부족한 그대로 살아가는 상상력

    최고가 아니어도 되는 즐거움

    남편과 비슷한 시기에 수영장에서 수상안전요원으로 일하기 시작한 또래 여성이 있다. 이분은 일을 참 잘했고 승진을 해서 이제는 남편의 상사가 됐다. 수상안전요원에 머물렀을 때는 일이 끝나면 수영도 하고 참 즐겁게 살았는데, 승진한 후로는 너무 바빠서 일에 치여 사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가끔 하던 농담 따먹기를 할 시간도 없었다. 반면 남편은 승진할 생각은 전혀 없이 일주일에 딱 15시간만 일하면서 일을 즐기고 있다. 소로가 말한 그대로다. “노동하는 인간은 매일 진정한 본모습을 찾을 여유가 없다.” 죽어라 일만 하는 게 결코 좋은 게 아니라는 걸 우리는 상당히 희한한 방식으로 깨달았다.


    일을 열심히 하는 게 결코 나쁜 게 아니다. 지금도 나는 언제라도 기회를 만들어 일을 하려고 호시탐탐 궁리한다. 하지만 가끔은 찬란한 여름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갖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남편이 대책 없이 회사를 그만두고 어떻게 먹고살지 고민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남편에게 대책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대책이 두 가지나 있었다. ‘어디든 취직이 되겠지, 혹은 박혜윤이 일을 하겠지.’ 그러나 두 가지 대책 다 망하고 나서, 생계 걱정을 하던 시절이었다. 우리 적성에 맞는 돈벌이가 뭐가 있을까 이야기하다 내가 “당신은 상상력이 없으니까…”라고 말을 시작해서 이런저런 직업을 얘기했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이 버럭 화를 냈다.


    “너무한 거 아니야? 어떻게 나한테 상상력이 없다고 그렇게 대놓고 말할 수 있어?”

    “응. 대놓고 말하지, 그러면 어떻게 말해야 돼? 뭐가 너무한데?”

    “그렇게 비난하는 거.”

    “당신은 상상력이 대단한데 내가 잘못 판단했다는 거야? 그렇다면 사과할게. 당신 상상력이 뛰어나?”


    남편은 잠자코 날 노려봤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내가 ‘당신은 상상력이 없어서 문제야.’라고 하는 게 아니라 상상력이 어떤 식으로 없는지, 그래서 다른 특성으로 어떻게 보충해서 일을 완수하는지, 당신의 고유성이 무엇인지 시시콜콜하게 관찰하고 있잖아. 그런 나의 관찰이 싫다면 앞으로 안할게. 그리고 사과할게. 당신이 정해. 상상력이 많아? 내가 틀린 거야?”


    한참 시간을 끌더니 남편은 들릴락 말락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상상력 없어.”


    생계를 위한 돈을 벌고, 사회적 소속감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 외에도 일이 주는 강력한 즐거움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다. 인정 욕구와 비슷하지만 완전히 똑같은 것은 아니다. 이건 일을 잘하는 자신에 대한 만족감이다. 일중독에 빠지는 주요 원인 중 하나 아닐까. 일중독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갖고 있는 최고의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전제를 갖고 살아간다. 일의 이러한 특성이 반드시 좋기만 한 것일까?


    『월든』의 한 구절을 살펴보자.


    노동하는 인간은 매일 진정한 본모습을 찾을 여유가 없다. 다른 사람들과 가장 인간다운 관계를 유지할 여력이 없다. 시장에서 그의 가치가 떨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기계가 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시간이 없다. 자신의 지식을 끊임없이 써먹어야 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무지를 기억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성장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바로 무지를 아는 것인데 말이다.


    그렇다. 우리가 어떤 직업을 가지든, 일을 할 때 배우는 과정이라는 변명이나 실수는 기본적으로 용납되지 않는다. 우리는 일이 요구하는 지식과 능력을 최대한 함양하고 발휘해서 ‘잘’ 해야 한다.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에게 당연하게 요구되는 자세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정해진 기능에 따라 일을 완수하는 기계처럼 완벽할 수 없다. 장점도 단점도 있는 것은 물론, 그런 장단점이 고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환경이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유일무이한 사람이 된다. 그 과정이 성장이다. 성장이 단지 능력을 키워서 남들보다 뛰어난 경쟁력을 갖추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인간이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건 자신의 무지를 기억하는 거라는 소로의 말을 좋아한다.


    우리는 일의 장점을 잘 알고 있다. 경제적 안정은 물론, 개인의 성장에도 사회적 발전에도 일이 필수적이라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다. 자본주의의 소신이든 아니든, 우리 모두에게 일을 하고 싶은 강렬한 욕구도 있다. 따라서 소로의 주장을 일을 때려치우자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다만 누구나 인생의 어느 시기에서건 백수가 되는 것을 피할 순 없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그런 일은 더욱 잦아질 것이다. 이 기간은 짧은 수도 있고, 평생 지속될 것처럼 길 수도 있다. 피할 수 없다면 직업 밖의 나는 누구인지, 그 열린 시간의 의미는 무엇이고 어떻게 보낼 것인지 적극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단지 다음 직업을 찾기 위해 애를 쓰고 불안해하며 보내기에는 아까운 시간이다.


    남편도 일에 지쳐 자발적으로 회사를 그만뒀지만, 비자발적으로 다음 일자리를 찾는 것이 어려워졌다. 남편은 이 기간 동안 자신의 부족함을 알아갔다. 일할 때는 능력 있는 직장인으로 살기 위해서 절대로 인정할 수도, 인정할 필요도 없는 자신 안의 어떤 부분들이었다. 소로의 말처럼 일을 하는 동안에는 자신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기만 하지, 자신의 부족한 점을 돌아볼 필요는 없으니까.


    우리는 남편의 상상력 부족을 고쳐야 할 결점이 아니라, 다른 장점과 어떻게 어우러지는지 어떤 종류의 상상력인지를 세밀하고 섬세하게 알아가는 시간들을 보냈다. 남편은 지리적 상상력은 뛰어나지만 체계를 머릿속에 그려내는 능력은 부족했다. 대신 지금 주어진 일을 꼼꼼하게 챙길 수 있었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의 장점뿐 아니라 단점까지도 투명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소로가 말한 “가장 인간적인 관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우리는 나 자신의 능력뿐만 아니라, 단점도 세밀하게 깨우치며 할 수 있는 일들을 천천히 찾아가고 있다.


    지금은 적성에 맞는 일,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에 그렇게 집착하지 않는다. 일이 힘든 건 적성에 맞지 않아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남의 일을 방해하지 않는 정도에서 일차적으로 만족하고, 그 후에는, 최선이나 최고보다는 내 단점도 함께 수용하면서 적당히 일을 하려고 한다. 어쩐지 이제는 무슨 일도 즐겁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똑부러지게 일 잘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지만 않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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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