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허리 가우디의 뼈
 
지은이 : 이지환
출판사 : 부키
출판일 : 2021년 09월




  • 문무를 가리지 않고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던 최고의 리더 세종은 왜 운동만 멀리했을까? 천상의 건축가 가우디는 왜 하필 해골 집을 짓는 데 집착했을까? 세계적인 대문호 도스토옙스키는 어쩌다 도박꾼이 되었을까? 인상파의 거장 모네의 말년 화풍은 왜 추상화처럼 변했을까? 그 해답은 이 천재들이 각기 앓았던 질병 속에 있다. 이들은 병약한 신체를 이겨 내고 탁월한 업적을 남겼지만, 생전에 적절한 진단이나 치료를 받지 못했다. 악질 범죄자처럼 이들을 괴롭혔던 질병의 정체는 무엇이며 이들의 삶과 업적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세종의 허리 가우디의 뼈


    세종의 허리: 조선 최고의 리더가 운동을 싫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세종에게 찾아온 낯선 통증

    세종(1397~1450)에게는 낯선 통증이 있다. 그의 허리는 유리잔처럼 깨어지기 쉽고 대나무처럼 뻣뻣했다. 눈도 아팠다. 종종 모래처럼 까끌거렸고, 때로는 사람 얼굴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악화됐다. 치료를 위해 용하다는 온천을 찾아 전국을 다녔지만 마음만 답답할 뿐 통증은 여전했다.


    통증이 꼭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통증은 엄격한 보호자다. 이런 방식의 경고는 유용하다. 덕분에 우리는 칼을 다룰 때마다 매번 조심하게 된다. 하지만 통증은 친절하지 못하다. 통증은 “당신의 맹장에 균이 가득 차 터지기 직전이니 빨리 해결하라고 불쾌한 자극을 주는 중입니다.”라고 설명해 주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배가 몹시 아프고 식욕이 떨어질 뿐이다.


    세종의 통증에 대한 몇몇 연구가 있다. 어떤 연구는 세종이 피부병이나 임질에 걸렸다고 주장한다. 다른 연구는 세종이 당뇨에 걸렸고 후추를 뿌린 듯 따끔거리는 눈 통증이 당뇨 합병증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세종의 병명은 무엇일까? 세종에게는 독특한 질병이 숨어 있었다. 그 질병은 오래된 벽지에 스며든 곰팡이처럼 몸 구석구석에 침투해 통증을 유발했다. 그리고 그의 삶도 바꿔 놓았다.


    유리로 만든 대나무처럼 뻣뻣한 허리

    세종은 20대에 무릎, 30대부터는 허리가 아팠다. 눈 증상은 40대부터 심해진다. 허리는 유리처럼 깨지기 쉽고 대나무처럼 뻣뻣했다. 눈 통증은 악화와 호전을 반복했다. 이 모든 증상을 발생시키는 단 하나의 질병이 있다. 강직성 척추염이다. 병명을 풀이하면 ‘척추에 염증이 생겨 허리뼈가 대나무처럼 뻣뻣이 굳는 병’이란 뜻이다.


    강직성 척추염은 결국 허리가 아픈 병이지만 다른 관절과 장기에도 영향을 준다. 증상의 시작은 23세 전후의 팔다리 통증인 경우가 많다. 세종도 22세에 무릎 통증이 생겼다. 그리고 무릎 통증은 강직성 척추염이 발생했다는 신호탄이었다.


    이후 세종의 허리는 굳어 간다. 세종은 ‘허리와 등이 굳고 꼿꼿하게 굽혔다 폈다 하기조차 어렵다’는 독특한 증상을 보였다. 이는 경직성 척추염 환자들이 호소하는 특징적인 징후다. 결정적인 추가 단서가 있다. 40대부터 심해진 눈 증상이다. 세종의 눈은 시리도록 아프고 까끌거리다가 돌연 씻은 듯 나았다. 뿌옇게 흐리기도 하고 붉게 충혈되기도 했다. 증상은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이는 급성 포도막염이다.


    강직성 척추염의 가장 흔한 합병증은 포도막염이다. 척추염 환자의 50퍼센트 이상이 포도막염을 앓는다. 포도막염은 통증을 유발한다. 어느 날은 눈 뜨기 힘들 만큼 아프다가 씻은 듯이 좋아지는 양상을 보인다. 이런 증상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가우디의 뼈: 천상의 건축가는 왜 하필 해골 집을 지었을까?

    뼈대와 건축은 닮은 점이 많다

    고풍스러운 그라시아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건물을 보며 혀를 찼다. 그라시아 거리는 서울 압구정동이나 미국 캘리포니아의 베버리힐스와 같다. 당시 스페인에서 가장 핫한 곳이었고 부자들이 모여 살았다. 그중에 직물 공장장 요셉 바트요도 있었다. 그는 건물이 ‘평범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발한 솜씨로 집을 튀게 만들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적당한 인물이 있다. 졸업하자마자 파리 세계 박람회에서 극찬을 받고, 1900년 바르셀로나 시의회에서 최고 건축상을 수상했으며, 기발한 공원을 만들어 주목받은 건축가, 바로 안토니 가우디(1852~1926)다.


    가우디는 1904년에 리모델링을 시작한다. 2년간의 공사가 끝나고 ‘바트요의 집’이라는 뜻의 카사 바트요가 완공됐다. 집은 기괴할 정도로 독특했다. 건물의 파사드(건물에서 출입구로 이용되는 정면 외벽 부분)부터 압권이다. 테라스는 해골을 박아 넣은 듯하고 기둥은 앙상한 무릎뼈 모양이다. 요셉 바트요는 리모델링한 건물이 제법 마음에 들었지만 다른 사람들 대부분은 아니었다. 평가는 박했다. 사람들은 카사 바트요를 ‘뼈의 집’이라고 조롱했다.


    카사 바트요뿐이 아니다. 뼈는 가우디의 작품 곳곳에 등장한다. 구엘 공원의 산책로는 해면골 모양이고 담장은 등뼈를 닮았다. 연립 주택인 카사 밀라의 천장은 고래의 갈빗대 같다. 여기서 의문이다. 가우디는 왜 이리 뼈에 집착했을까?


    뼈와 건축은 닮은 점이 많다. 뼈는 인간을 세우고 건축은 건물을 세운다. 가우디는 골격과 건물의 유사성에 매혹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가우디의 집착을 설명하기 부족하다. 가우디는 “인간의 뼈대와 나무의 기둥보다 훌륭한 구조물은 없다”고 말했고, 해부학을 공부하기 위해 의과 대학을 출입했다.


    그의 관절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시간은 가우디를 천재로 평가했다. 그가 탄생시킨 건물 7채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선정되었다. 매해 20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가우디의 유산을 감상하기 위해 바르셀로나를 찾는다.


    가우디는 20세기 가장 독창적인 건축가로 칭송받는다. 그의 독창성은 병약한 어린 시절에 뿌리를 둔다. 가우디는 관절염 때문에 친구를 사귀기 힘들었고 많은 시간을 홀로 보냈다. 덕분에 자신을 탐구하고 자연을 관찰할 수 있었다. 건축가가 된 후 어린 시절에 관찰했던 뼈와 자연을 독창적으로 해석해 작품에 재현시켰다.


    가우디의 관절염은 1858년, 그의 나이 6세 때에 발생한다. 관절염은 악질 조련사처럼 어린 시절부터 가우디를 길들였다. 가우디는 전기가 흐르는 철창에 갇힌 곰처럼 춤을 췄다. 찌릿한 고통을 주는 발을 보호하려고 푹신한 신발을 신었고, 고통에 갇혀 친구 사귀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관절염 때문에 사회성 결여는 그의 습관이 됐다. 가우디는 죽는 날까지 독신으로 살게 된다. 연락을 주고받을 친구도, 대화를 나눌 가족도 없었다. 결국 가우디를 괴롭힌 관절염을 유추할 기록이 몇 남지 않았다. 가우디에게 침입한 범죄자인 관절염은 영영 모습을 숨긴 채 미제 사건으로 남겨졌다.


    사후 예술가와 작품으로 대화하다

    가우디가 적절한 치료를 받았다면 어땠을까? 아픈 채 죽겠다며 고집을 부린 가우디가 밉다. 하지만 치료를 거부한 결정은 가우디 인생에 기록된 단 한 번의 저항 운동일지도 모른다. 가우디에게 개혁은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규칙적으로 기도를 드렸고 건물을 보수하며 나날을 보냈다. 그가 말년에 몰두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가우디의 철학이 특히 잘 나타나 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가우디 최고의 걸작으로 ‘빛의 성당’이라 불린다. 독실한 가우디는 지구의 자전과 공전은 신의 뜻이고, 빛은 신의 축복이라 믿었다. 이를 아름답게 드러내고자 시시각각 색이 변하도록 성당을 설계한다.


    이렇듯 신실한 가우디에게 1909년의 ‘스페인 비극 주간’은 잔인한 시련이었다. 그해 7월 25일, 스페인의 전쟁부 장관은 젊은이들을 징집한다. 북아프리카 광산의 노예를 감시할 예정이었다. 장관은 “징집이 싫다면 돈을 내라”고 했다. 부자들은 징집을 피할 수 있었고 돈이 없는 대부분은 끌려갔다. “가톨릭은 정부와 결탁했고, 신자들은 돈만 밝힌다.” 사건은 폭동으로 번졌다. 시민들은 80여 채가 넘는 교회 건물을 부수고 불태운다. 거리는 개혁을 외치는 인파로 가득했다.


    가우디는 괴로웠다. 그는 청렴하게 살았고 성당을 지으며 일생을 보냈다. 다른 이들은 자신을 좋게 평가해 주리라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군중의 눈에는 가우디도 불쾌한 부르주아 가톨릭 신자와 다를 바 없었다.


    비극 주간 이후 가우디에 대한 평가는 급속도로 나빠진다. 사망 10주년인 1936년, 가우디의 묘지는 과격주의자들에 의해 방화되고 경찰들에 의해 파헤쳐지기까지 했다. 1950년 즈음 살바도르 달리 등이 재평가하기 전까지 가우디는 20여 년간 혹평을 받는다.


    어떤 평론가는 작품을 알기 위해 작가를 탐구하는 일이 촌스럽다고 말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는 아는 일은 작품을 깊게 느끼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가우디가 그렇다. 가우디는 자신의 경험을 작품에 투사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건물 곳곳에 그의 삶과 생각이 스며 있다.



    니체의 두통: 실존 철학의 선구자는 어쩌다 정신 병원에 입원했을까?

    아폴론의 노래를 듣는 열두 살짜리 예수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1844~1900)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족들은 목사 영지에 정돈된 집을 짓고 식물을 캐며 소소하게 살았다. 니체는 아버지의 피아노로 연주되는 찬송가를 사랑했고 어머니가 들려주는 루터교 교리를 경청했다.


    5세가 되던 해 아버지는 심한 두통을 호소하더니 돌연 사망한다. 니체는 아버지와 영영 이별해야 한다는 생각에 많이 울었다. 6개월 뒤 막냇동생마저 잃는다. 가족들은 밀려나듯 목사 영지를 떠나야 했고 낯선 땅에서 아버지의 사망 보상금으로 살아가야 했다. 니체는 아버지의 목숨값으로 살아 낸 어린 시절을 ‘무덤 옆에 핀 식물’ 같았다고 회상한다.


    가족의 죽음 속에서 청렴한 교리 아래 키워진 니체는 신실하고 엄격했다. 학교 친구들은 그를 꼬마 목사라고 불렀다. 그가 성경 구절이나 찬송가 가사를 인용해 설교할 때면 친구들은 감동을 받아 울기까지 했다. “니체는 사원에 숨은 열두 살짜리 예수 같아.” 소년 니체는 모든 삶에 열정적으로 진지했고 성적은 항상 우수했다. 그는 즉흥 연주를 들려주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곡을 썼고 피아노를 쳤다. 그리고 음악은 훗날까지 그의 철학에 깊이 관여한다.


    신을 사랑하고 피아노를 즐기던 니체에게 갑자기 위험한 생각이 찾아온다. 아버지와 동생의 죽음, 나의 운명 모두가 신에 의해 조종된다면 인간은 그저 무대 위 꼭두각시처럼 조정되는 기계 장치인가? 이 화두는 두통처럼 그를 괴롭혔고 어머니의 뜻에 따라 진학한 신학 대학도 자퇴한다.


    정신 병원 입원과 기록되지 못한 연보

    1888년 폭발적인 집필을 마친 니체는 심각한 정신적 몰락을 겪으며 1889년 토리노 광장에서 말을 안고 쓰러졌다.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우던, 피아노 화음에 영혼이 맑아지던 소년은 더는 없었다. 니체는 넝마를 걸친 채 피아노로 엉망진창 소음을 연주해 댔다. 주저리 주저리 혼잣말을 하며 모르는 사람에게 욕설을 퍼붓는다.


    그즈음 니체의 친구들은 니체에게 편지 한 통을 받는다. 친구 오버베크는 니체에게 문제가 생겼음을 눈치챈다. 니체를 만난 오버베크는 그의 기괴한 행동에 경악했다. 1889년 오버베크는 즉시 니체를 바젤 정신 병원에 입원시킨다.


    니체는 정신 병원에서도 문제를 일으켰다. 평생을 괴롭혔던 불면증을 즐기기라도 하듯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고 고함을 지르며 소란을 피웠다. 니체는 환자들을 발로 차며 거침없이 욕설을 퍼부었고 자기 자신을 먹어 치운 그리스 신화의 에리시크톤처럼 집착적으로 음식을 탐했다. 자신의 장화에 소변을 봐서 마시고 온몸에 대변을 바른 채 왈츠를 추기도 한다.


    1890년 3월, 니체는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명목하에 동생 손에 이끌려 정신 병원을 나왔으니 결코 회복하지 못한다. 박제가 된 천재처럼, 니체는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낸다. 왼쪽 팔다리는 앙상하게 구부러졌고 침묵하는 구도자처럼 말수가 줄었다. 결국 1900년 폐렴으로 사망한다. 신의 죽음을 선언한 니체는 교회에서 기독교식 장례를 치르고 목사 아버지 옆에 나란히 묻힌다. 니체가 정신적으로 몰락한 1889년부터 1900년까지 11년 동안은 기록되지 못한 연보로 남았다.


    머릿속 종양 덩어리가 영혼을 파괴하다

    니체는 어릴 적부터 두통과 불면증에 시달렸다. 니체의 두통과 불면증은 나이를 먹으면서 심해졌다. 두통이 몹시 심한 날이면 니체는 먼지 쌓인 빨래처럼 무기력하게 소파에 앉아 통증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두통은 발작과 함께 오기도 했다. 1879년, 100번도 넘는 발작을 겪은 니체는 더 이상 건강을 방치할 수 없다고 느껴 교수직을 내려놓고 휴양을 떠났다.


    니체는 어릴 적부터 어지럼증을 호소했다. 증상은 심해져 30대에는 물체가 겹쳐 보여 글씨 쓰기가 힘들었다. 논문은 뇌종양이 눈을 움직이는 신경을 눌러서 겹쳐 보이는 증상(복시)과 어지럼증이 발생했다고 설명한다. 니체의 서로 다른 양측 동공 크기 또한 뇌신경 마비로 해석할 수 있다.


    신경외과 의사 크리스토퍼 오언은 니체의 뇌종양이 그의 전두엽이나 전측두엽을 누르며 서서히 자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두엽은 성격에 영향을 미친다. 전두엽이 손상된 환자는 유치한 행동과 이해할 수 없는 공격성을 보인다. 더불어 정신병으로 고통받은 말년의 성격 변화까지 뇌종양으로 설명할 수 있다.


    오명을 벗고 등불을 밝힌 니체 철학

    니체의 철학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기독교 신앙으로 시작해 예술을 신격화한 바그너의 사상을 거쳐 자신만의 인간적인 해답으로 완성됐다. 어쩌면 그의 철학 여정은 이성과 음악의 신인 아폴론을 닮은 갑갑한 셔츠에서부터 본성과 충동을 사랑한 신 디오니소스로 단추를 풀어 가며 변화해 온 과정일지 모른다.


    니체 철학은 오랫동안 히틀러의 인종 차별 전략에 도움을 줬다는 오명을 썼다. 니체 철학은 나치 철학이라는 과격한 말까지 있었다. 이는 분명한 오해다. 니체 철학이 인종 차별로 얼룩진 이유는 니체의 동생 잘못이 크다.


    니체의 하나 남은 동생은 1890년에 니체를 정신 병원에서 퇴원시키고 극진히 간호한다. 한편으로는 정신이 무너진 니체를 위해 메모와 편지와 글귀를 모아 책으로 출판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1893년에는 니체 기록 보관소를 설립했고 유명 인사들을 초청해 니체를 홍보한다.


    동생은 니체의 사상을 교묘히 편집한다. 한때 니체는 열렬한 독일 민족주의자로 살았다. 하지만 니체는 민족주의가 위험하다며 생각을 바꾼다. 반면 니체의 동생은 철저한 독일 우월주의자였다. 동생은 니체의 글을 악의적으로 편집해 반유대주의적 구절을 강조한 책을 낸다. 니체의 친구들은 그의 사상이 잘못 전달될까 봐 걱정되어 동생에게 ‘같이 니체의 글귀를 정리하자’고 제안했으나 철저히 무시당했다. 동생은 나치당 수장인 히틀러에게 매료되어 있었다. 히틀러 또한 왜곡된 니체의 사상에 감복해 자신의 저서 <나의 투쟁>에 적극 인용한다. 


    실존주의 철학의 거장 마르틴 하이데거 등의 노력으로 오명을 벗기 전까지 니체 철학은 언급조차 꺼려졌다. 이후 그의 사상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뤄졌고 지금은 세계적으로 사랑받은 사상가가 됐다.



    퀴리의 피: 노벨상 2회 수상 과학자가 정말 방사능의 위험을 몰랐을까?

    숨을 거둘 때까지 찾아 헤맨 신의 조각

    모든 물질은 원자다. 우리가 알아 왔던 사람과 증오할 사람, 사랑을 말한 혀와 폭군의 손가락, 흩어지는 파도와 서자의 눈물도 원자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원자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존재한다. 이렇게 명확한 사실이 밝혀지고 받아들여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180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원자의 존재를 의식하는 사람은 비난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신중한 태도는 학술적이며 본받아 마땅하다고 여겨졌다. 원자의 존재는 믿음의 문제가 아니다. 과학자들은 가시광선 세계에 갇혀 원자를 상상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빡빡한 실험을 준비해야 했다. 물에 녹은 소금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 맛을 잃지 않는 것처럼, 과학자들은 원자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측정할 수 있는 분명한 성질이 있으리라 믿고 이를 찾아 나섰다.


    1898년, 마리 퀴리(1867~1934)는 원자의 고유한 성질(정확히는 핵의 특성)인 방사능을 밝혀냈고 이 공로로 1903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는다. 덕분에 과학자들은 방사능이라는 새로운 도구로 원자라는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기 시작했다.


    마리 퀴리는 역시 방사능 연구를 계속했다. 최초의 진리에 도달한 대가는 컸다. 방사선은 마리 퀴리의 모든 흔적에 침입했다. 그녀의 실험복과 원고, 볼펜과 책장은 지금까지도 은은한 방사능을 띤다. 원자의 가장 깊은 곳에서 방출되는 방사선은 마리 퀴리의 몸 가장 깊은 곳까지 침투했고 결국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연구의 혜택은 다음 세대에게 주어졌다. 방사능은 양면성을 가진다. 부주의하게 다루면 세포를 망가뜨려 암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적절히 사용하면 암을 치료하는 기적의 광선이 되기도 한다. 세계적으로 매해 1800만 명 이상이 암 진단을 받고, 암 치료 환자들의 40퍼센트 이상이 방사선 치료를 받는다.


    마리 퀴리로부터 촉발된 방사선 연구가 없었다면, 혹은 누군가가 시작했겠지만 늦어졌더라면, 늦어진 시간만큼 치료를 받지 못해 죽어 갔을 환자는 무수히 많았을 것이다. 정작 마리 퀴리는 방사선으로 쇠약해지고 죽어갔다. 그녀는 방사선의 위험성을 알았을까? 알고도 끊임없이 실험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가?


    X선의 발견과 퀴리 부부

    마리 퀴리가 태어난 19세기, 과학은 한없이 깊게 들어가고 있었다. 최초의 근대 물리학자인 갈릴레오는 커다란 지구가 돌고 있다고 말했고, 뉴턴은 행성의 웅장한 움직임을 연구했다.


    1895년 독일의 물리학자 빌헬름 뢴트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무언가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진공관에 전류를 흘려 생성되는 음극선을 연구했다. 실험하던 뢴트겐은 기괴한 현상을 마주한다. 음극선에서 몇 걸음이나 뒤에 놓여 있던 인광 필름이 반짝반짝 빛났던 것이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뢴트겐은 딸깍딸깍 전류를 흘렸다 말았다 했다. 필름도 덩달아 깜빡깜빡 빛이 켜졌다 꺼졌다 했다.


    뢴트겐은 ‘내가 꿈을 꾸고 있는 줄 알았다’고 회상했다. 음극선 연구는 당시 많은 물리학자가 진행하고 있었지만 이런 괴이한 현상은 단연코 보고된 적이 없었다. 수학에서 알 수 없는 방정식의 해를 ‘X’라고 하듯, 뢴트겐은 이 미지의 광선에 ‘X선’이라 이름 붙이고 실험에 돌입한다.


    X선은 음극선과 다르게 두꺼운 종이도 쉽게 뚫고 어김없이 필름에 불을 밝혔다. 나무는 물론이고 물이 가득 담긴 비커도 간단히 통과했다. 놀란 뢴트겐은 납덩어리, 아연, 반지를 낀 부인의 손등을 차례로 X선에 비춰 보았고 X선이 쉽게 뚫을 수 있는 물질과 그렇지 못한 물질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X선의 발견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원자의 새로운 특성을 밝힌 것은 물론이고 의학에 곧바로 활용될 수도 있었다. 뢴트겐은 X선을 발견한 공로로 1901년 첫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가 된다. 그의 노벨상 수상 연설을 들은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쥘 앙리 푸앵카레는 “어쩌면 인광성을 가진 물체가 X선과 같은 성질을 갖지는 않을까” 하고 추측했다.


    푸앵카레의 말을 들은 앙리 베크렐은 곧바로 이 문제에 뛰어든다. 인광 물질 연구는 그의 아버지가 해 왔던 연구였다. 베크렐은 인광 물질인 우라늄 염에 햇볕을 쏘였다. 태양 에너지를 충분히 받은 우라늄 염은 인광을 띠기 시작했다. 베크렐은 제법 명쾌하게 실험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구리 십자가와 사진 건판을 우라늄 염과 함께 어두운 서랍 속에 며칠간 넣어두었다. 여기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긴다. 인광은 햇볕 같은 ‘외부 에너지’를 흡수해 방출하는 것이다.


    푸앵카레나 베크렐의 추측이 옳다면, 햇볕을 받지 못한 우라늄 염은 인광을 띠지 못하기 때문에 사진을 찍어 낼 수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서랍 속 우라늄 염은 여전히 알 수 없는 강한 에너지를 방출하며 함께 넣어 둔 사진 건판에 구리 십자가 문양을 찍어 냈다. 그것도 훨씬 선명하게 말이다. 1897년 베크렐은 이 알 수 없는 현상을 발표한다. “X선이 아닌 또 다른 방사 에너지가 있다. 이를 ‘베크렐선’이라고 하겠다.”


    방사능의 발견과 학계의 의심

    마리 퀴리는 곧바로 연구에 뛰어든다. 마리는 온갖 방법으로 우라늄을 괴롭힌다. 만약 우라늄의 형태가 변했을 때 방사능 세기도 바뀐다면, 방사능은 우라늄 원자의 성질이 아니라 분자의 성질일지 모른다. 마리는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전기 전도성을 측정했다. 결과는 놀랍고 명쾌했다. 우라늄은 형태와 온도가 어떻든 같은 수준의 방사선 에너지를 방출했다. 유레카! 방사능은 우라늄 ‘원자’의 성질임이 틀림없다!


    마리 퀴리는 훌륭한 과학자답게 한 번 더 의문을 가진다. 원자 스스로 방사선을 방출하는 현상이 오직 우라늄만의 특성이지는 않을까? 스스로 방사선을 뿜는 다른 원소는 없을까? 마리는 곧바로 다음 실험에 착수한다.


    마리 퀴리는 우라늄뿐 아니라 토륨 화합물에도 방사선을 띠는 원자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스스로 에너지를 방출하는 특성은 우라늄만의 특성이 아니기 때문에 새로운 이름이 필요했다. 마리 퀴리는 이 현상을 ‘방사능’이라고 칭했다. 퀴리 부부는 방사능을 발견한 공로로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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