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함께 걸어 다니는 어원 사전
 
지은이 : 마크 포사이스
출판사 : 윌북
출판일 : 2023년 07월




  • 의미심장한 문장 하나로 시작해 문학부터 철학, 과학까지 두루 섭렵하며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재밌는 어원 이야기! 112가지 영어 단어마다 인간이 쌓아온 흔적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쏠쏠합니다!


    그림과 함께 걸어 다니는 어원 사전


    수지맞은 도박업자

    지금 보고 계신 것이 바로 book(책)입니다. 영어에는 book이 들어간 희한한 표현이 참 많습니다. cook the books라고 하면 책을 구워 익힌다는 것인데 뜻은 ‘장부를 조작하다’가 됩니다. bring someone to book이라고 하면 누군가를 책 앞으로 끌고 온다는 것이니 ‘문책하다’가 되고, throw the book at someone은 누군가의 면상에 책을 던지는 것이니 ‘엄벌을 내리다’가 됩니다. take a leaf out of someone’s book은 문자 그대로 따지면 남의 책에서 한 장을 뜯어간다는 것이지만 뜻은 ‘남을 본뜨다’입니다.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뜻밖의 횡재’를 뜻하는 a turn-up for the books라는 표현은 아무리 뜯어봐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럴 만하지요. 그 표현은 사실 책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거든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a turn-up for the bookmakers가 되어야 합니다.


    《유토피아(Utopia)》를 쓴 토머스 모어는 1533년에 “책 만드는 사람들(bookmakers)은 이제 차고 넘친다”라고 했습니다. 그 발언을 남기고 두어 해가 지나 참수형을 당했으니 출판업계 입장에서는 다행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칠면조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들여놓은 탐험가들의 눈에 띈 새가 있었으니, 바로 목련 숲속에서 까르르륵 하고 우는 칠면조들이었습니다. 칠면조는 아메리카 대륙의 토착 동물이거든요. 아즈텍족들도 가축으로 키워 잡아먹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새의 이름이 어째서 소아시아에 있는 나라 이름과 똑같은 turkey가 되었을까요?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설명은 가능합니다.


    동물 이름이 엉터리로 지어지는 일은 다반사입니다. 예를 들어 기니피그(guinea pig)는 이름과 달리 돼지도 아니고, 아프리카의 기니(Guinea)에서 유래하지도 않았습니다. 원래 남아메리카의 가이아나(Guyana)라는 나라에서 유래했는데, 발음을 좀 잘못하다 보니 원산지가 그만 대서양 건너편 나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피그’가 된 이유는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투구 쓴 기니 새’라는 뜻의 helmeted guinea fowl(뿔닭)도 똑같습니다. 이 새는 원래 마다가스카르 토착종이었고, 역시 기니가 원산지는 아닙니다. 특징이라면 대단히 못생겼는데, 대가리에 큰 혹 비슷한 게 달려 있습니다. 투구를 썼다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지요. 의외로 맛은 좋습니다.


    이 뿔닭을 마다가스카르에서 유럽으로 들여왔는데, 그 일을 주로 한 사람들이 터키 상인들이었기에 새 이름이 자연스럽게 turkey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크리스마스에 먹는 칠면조는 그 새가 아닙니다. 뿔닭은 학명이 Numidia meleagris로 닭목 뿔닭과에 속하고, 칠면조는 학명이 Meleagris gallopavo로 닭목 꿩과에 속합니다. 물론 칠면조도 뿔닭처럼 맛은 좋지요.


    목련 숲에서 뛰노는 칠면조를 발견해 유럽으로 들여온 사람들은 중남미를 침략했던 스페인 정복자들이었습니다. 칠면조는 스페인에서 인기를 끌었고 뒤이어 북아프리카에서도 사랑을 받았습니다. 뿔닭과는 엄연히 다른 종이지만 생김새는 사실 뿔닭과 굉장히 비슷합니다.


    사람들은 아리송했습니다. 칠면조는 뿔닭과 암만 봐도 비슷한데다가 맛도 비슷했고, 어디 바다를 건너온 먹거리라는 것도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같은 건가 보다 하고 아메리카에서 수입된 새도 turkey라고 불렀습니다. 애초에 터키산이라고 착각했던 새와 같은 새라고 이중으로 착각한 것이지요.


    물론 터키에서는 그런 착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동네에서 난 새가 아니라는 것쯤은 당연히 알았지요. 터키에서는 그 새가 인도산이라고 착각하여 hindi라고 불렀습니다. 프랑스에서도 똑같이 착각해 지금까지도 칠면조를 dindon이라고 부릅니다. 그 어원은 d’Inde, 즉 ‘인도에서 온’입니다. 이래저래 혼란스러운 새입니다만, 어쨌든 맛 하나는 좋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어찌나 맛이 끝내줬는지, 칠면조가 영국에 처음 들어온 게 1520~1530년대였는데 1570년대에 이미 크리스마스 표준 메뉴로 정착했습니다. 그런데 talk turkey라는 표현으로 가면 또 아리송해집니다. 그게 어째서 ‘진지하게 까놓고 말하다’라는 뜻이 된 걸까요? 그 표현은 오래된 농담에서 기원했다고 합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재미는 별로 없습니다.


    칠면조와 대머리수리가 등장하는 이야기인데요, 대머리수리 고기는 먹으려면 먹을 수야 있겠지만 식당에서 파는 걸 본 적이 없으니 맛이 어지간히 없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래서 생겨난 이야기입니다.


    옛날에 백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이 같이 사냥을 나갔습니다. 둘이서 칠면조 한 마리와 대머리수리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백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대머리수리 가지면 내가 칠면조 가질게. 아니면 내가 칠면조 가질 테니 네가 대머리수리를 갖든지(You take the buzzard and I’ll take the turkey, or, if you prefer, I can take the turkey and you can take the buzzard).”


    그러자 아메리카 원주민이 이랬다고 합니다.


    “You don’t talk turkey at all(너 나한테 칠면조 얘기는 안 하니?).”


    이 농담은 19세기 미국에서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의회에서도 누가 인용했다고 합니다. 다만 웃은 사람이 있었는지는 기록된 바 없어 알 수 없습니다.


    유기농, 범죄조직, 오르간

    organ(오르간)으로 키운 식품이 organic food(유기농 식품)입니다. organist(오르간 연주자)가 저지른 범죄가 organised crime(조직범죄)이고요. 어원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옛날 고대 그리스어에 organon이란 단어가 있었습니다. ‘가지고 뭔가를 할 수 있는 것(something you work with)’이란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도구, 기구’를 뜻하기도 하고, ‘악기’를 뜻하기도 하고, 몸의 ‘기관’을 뜻하기도 했습니다. 일단은 ‘악기’라는 의미에 집중해볼까요.


    원래 organ은 종류와 관계없이 그냥 악기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9세기에 모든 교회에 pipe organ을 놓는 게 유행이었을 때도 organ의 뜻은 그냥 악기였습니다.


    그러다가 pipe organ을 간단히 organ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다른 악기는 organ이 아니게 되었습니다(유일한 예외는 mouth organ, 즉 하모니카). organ이라고 하면 지금처럼 교회나 성당에서 볼 수 있는 파이프 오르간만을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17세기 영국 시인 존 드라이든이 “그 어떤 인간의 목소리가 신성한 오르간의 찬송에 비할 수 있겠는가?(What human voice can reach the sacred organ’s praise?)”라고 읊었을 때의 organ도 바로 그 뜻입니다.


    그럼 다시 그리스어 어원으로 돌아가 봅시다. organ은 여전히 ‘뭔가를 하기 위한 도구’란 뜻이 있었고, 그래서 ‘신체 기관’을 뜻하기도 했으니까요. 이런 옛날 농담도 있지요. “바흐가 아이를 스무 명이나 낳은 이유는? 오르간에 스톱이 없었으니까(Why did Bach have twenty children? Because he had no stops on his organ).” 오르간에는 ‘스톱’이라고 하는, 파이프로 들어가는 바람의 입구를 여닫는 장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연장을 쉴 새 없이 놀렸다’는 뜻도 되지요.


    그런 organ이 모여서 하나의 organism유기체이 됩니다. organism이 만들어내는 것은 organic(유기적인)한 것이지요. 20세기에 들어 화학비료를 밭에 뿌려대면서 그런 것을 쓰지 않는다는 뜻으로 organic farming(유기 농법)이나 organic food(유기농 식품) 같은 말이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몸은 그 짜임새가 정교하고 치밀합니다. 모든 organ이 저마다 어떤 기능을 합니다. 가령 손으로는 잔을 들고, 입으로는 마시고, 배는 마신 것을 채우고, 간은 독소를 처리하는 식이지요. 심장, 머리, 폐, 간, 신장 등이 모두 맡은 일을 해주는 덕분에 우리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모아서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는 것은 몸의 organ들과 같은 구실을 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럴 때 사람들을 organise(조직하다) 한다고 합니다. 그 결과가 organisation(조직)이고요. 이렇게 의미가 옮겨간 것은 16세기, 국가를 하나의 몸과 같은 것으로 보아 이른바 body politic(정치체)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유행하면서였습니다.


    하지만 organised crime(조직범죄)이란 표현은 1929년에야 등장합니다. 마피아 두목 알 카포네가 시카고에서 한창 위세를 떨칠 때지요. 마피아 같은 조직 폭력단을 가리켜 ‘폭도, 군중’을 뜻하는 mob이라고 흔히 부르는데, mob은 라틴어 mobile vulgus, 즉 ‘변덕스러운 평민’을 줄여서 만든 말입니다.


    중국

    서양 사람들은 중국어 발음을 엄청나게 어려워합니다. 마찬가지로 중국 사람들은 서양 언어 발음을 어려워합니다. 19세기에 영국 상인들이 중국에 와서 아편을 팔려고 할 때 중국인들은 business라는 말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 pidgin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영어와 다른 언어가 섞여서 만들어진 이상한 언어를 pidgin English피진 영어라고 합니다.


    영어권 사람들도 중국어 발음에 워낙 자신이 없다 보니 중국어 단어를 수입할 때는 프랑스어처럼 그대로 가져오지 않고 그냥 뜻을 옮겨서 가져와버립니다. 하지만 중국어 단어가 그대로 영어로 들어온 일도 없진 않습니다. 주로 맛있는 음식이 그랬는데요. 대개는 그렇게 된 게 다행입니다. 물론 kumquat(금귤)의 뜻이 ‘golden orange’라는 걸 영어권 사람들이 알면 더 잘 팔릴지도 모르고, dim sum(딤섬, 點心, 보통 만두 등 가벼운 음식을 찜통에 쪄 먹는 것을 가리키지만 원래는 ‘마음에 점을 찍는다’라는 뜻으로 아침과 저녁 사이 간단하게 요기하는 음식을 뜻하며, 한국어의 ‘점심’도 같은 어원입니다)의 뜻이 ‘touch the heart’라는 걸 알면 더 감동하면서 먹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fish brine(생선 액젓)’보다는 아무래도 발음을 따와서 ketchup(케첩)이라고 한 게 백배 낫지요. ‘odds and ends(잡탕)’보다는 chop suey(찹 수이)가 뭔가 훨씬 있어 보입니다. 또 tofu(두부)가 ‘rotten beans(썩힌 콩)’를 뜻한다는 걸 알면 아무도 안 먹을지도 모릅니다.


    이렇듯 중국어는 서양 사람들의 귀에 희한하게 들리지만, 그렇게 천양지차로 다른 언어 사이에 연결되는 접점이 있습니다. 언어 간에 역사적으로 친족 관계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언어를 만드는 방식에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소리를 흉내 내어 단어를 만든다거나 하는 것입니다. 영어에서 고양이 우는 소리를 meow(‘미아우’)라고 하지요. 중국어에서 고양이는 miau(貓, 고양이 묘)입니다.


    더 신기한 것도 있습니다. 중국어로 pay(지불하다)는 pei(賠, 물어줄 배)입니다.


    미개한 외국인들

    지금은 네덜란드 사람 하면 착하고 정감 있는 느낌이지만, 옛날엔 안 그랬습니다. 네덜란드는 영국에서 북해 건너 코앞에 있는, 막강한 해군력을 자랑하는 무역 강국이었습니다. 그러니 두 나라는 당연히 앙숙이었지요. 싸우기도 많이 싸웠고, 안 싸울 때도 영국인들은 욕을 열심히 개발해 네덜란드를 교묘하게 깠습니다.


    네덜란드식 용기(Dutch courage)는 ‘술김에 부리는 용기’입니다. 네덜란드식 잔치(Dutch feast)는 ‘주인이 손님보다 먼저 취하는 잔치’지요. 네덜란드식 위안(Dutch comfort)은 ‘그만하기 다행이다’라는 부질없는 위안입니다. 네덜란드 아내(Dutch wife)는 ‘긴 베개’ 또는 ‘죽부인’이고요. 그 밖에도 네덜란드식 셈법(Dutch reckoning)은 ‘바가지 청구서’, 네덜란드 과부(Dutch widow)는 ‘매춘부’, 네덜란드 삼촌(Dutch uncle)은 ‘엄한 잔소리꾼’입니다. ‘네덜란드식으로 하자(go Dutch)’는 쩨쩨하게 ‘밥값을 각자 내자’는 말입니다. 이 정도면 속이 좀 시원했으려나요.


    1934년 마침내 이 말들이 다 네덜란드 정부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네덜란드 정부는 영어를 바꾸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대신 모든 영어권 국가의 자국 대사관에 자국을 말할 때 ‘The Netherlands’라는 이름만 쓰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네덜란드 사람들도 아마 영국에 대해 비슷한 말들을 만들어 쓰고 있겠지만, 아무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네덜란드어는 우리에게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double Dutch)’이니까요. 어쨌거나 영국 사람들은 다른 이웃 나라에 대해 고약한 표현을 생각해내느라 바빠서 그런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Welsh rarebit(웰시 래빗)이라는 음식이 있지요. 녹인 치즈를 얹은 토스트입니다. 그게 원래는 Welsh rabbit, 그러니까 ‘웨일스 토끼’였습니다. 웨일스 사람은 맛있는 토끼고기를 준다고 하고는 내놓는 게 고작 치즈 얹은 토스트라는 데서 나온 말입니다.


    같은 원리로, Welsh carpet(웨일스 카펫)은 벽돌 바닥에 무늬를 칠한 가짜 카펫을 뜻했고, Welsh diamond(웨일스 다이아몬드)는 수정, Welsh comb(웨일스 빗)은 손가락을 뜻했습니다.


    이 정도면 웨일스인에게도 충분히 욕을 먹였다 싶었던 잉글랜드인은 아일랜드인을 다음 타깃으로 정했습니다. 아일랜드인은 남은 찌꺼기 음식을 모아서 Irish stew(아이리시 스튜)나 끓여 먹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일랜드인은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아예 Irish(말도 안 되는)라는 형용사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영국의 숙적은 프랑스였습니다. 영국인이 보기에 프랑스인은 사기꾼이면서 호색한이었습니다. 그래서 French letter는 ‘콘돔’이 되었고, French leave는 ‘허락 없이 자리를 뜨는 것, 즉 무단결근’이 되었습니다.


    해고 머신 터미네이터

    terminate가 ‘끝내다’란 뜻이 된 것은 라틴어로 terminus가 ‘끝, 한계’를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서 bus terminal(버스 터미널), terms and conditions(계약 조건), fixed-term contract(기간제 계약) 같은 온갖 용어들이 나왔습니다. 심지어 ‘용어’도 term이라고 하지요. 용어란 ‘한정된’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용 계약을 ‘종료한다’고 할 때도 terminate를 쓰게 되었습니다. 고용 계약을 종료하는 방법은 법적으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terminate without prejudice(잠정 종료)하는 것입니다. prejudice는 법률 용어로 권리나 이익 따위에 대한 ‘침해’나 ‘배제’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말은 ‘재고용될 권리를 배제하지 않고 종료’한다는 뜻이 됩니다. 즉, 나중에 상황이 바뀌면 다시 고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다른 하나는 terminate with prejudice(영구 종료)하는 것입니다. ‘재고용될 권리를 배제하고 종료’한다는 뜻이지요. ‘널 다시는 고용하지 않겠다’라고 못 박으면서 해고하는 것이니, 이건 피고용자가 뭔가 대단히 나쁜 짓을 해서 고용자의 신뢰를 저버린 경우입니다.


    CIA미국 중앙정보국에 고용된 요원은 조직의 신뢰를 깨고 적에게 비밀을 누설할 경우 여지없이 고용이 종료됩니다. 물론 잠정 종료가 아니라 영구 종료(termination with prejudice)입니다. 아니 CIA라면 더 나아가 다시는 어디에도 고용되지 못하게 해줄 수도 있습니다. 어려울 것 없이 뒤에서 몰래 다가가 머리에 총알구멍을 내주면 됩니다. 이 방법을 가리켜 CIA 내부에서는 우스개로 termination with extreme prejudice, 즉 ‘극단적 영구 종료’라고 불렀습니다. 다시는 세상에서 볼 일이 없게 만드는 것이지요.


    물론 CIA는 워낙 비밀스러운 기관이니 그 말을 언제부터 썼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일반 대중이 알게 된 것도 순전히 ‘그린베레’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미 육군 특전단의 실수 때문이었지요.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9년, 타이 칵 쭈옌이라는 베트남 사람이 그린베레의 요원 또는 첩자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아니면 CIA 요원이었을 수도, 양측 모두에 고용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베트콩에도 협력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린베레는 좀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CIA에 가서 이 작자를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겠냐고 조언을 구했습니다. CIA는 이미 지난 일이니 잊어버리고 그 사람도 사정이 있었을 테니 너그럽게 이해해주자고 했습니다. 여하튼 CIA 측 주장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반면 그린베레의 주장에 따르면 CIA가 쭈옌을(혹은 쭈옌과의 고용 계약을) ‘terminate with extreme prejudice’하라고 했다는 겁니다.


    누구 말이 맞는지는 몰라도 결과적으로 타이 칵 쭈옌은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살인 혐의로 그린베레 요원 8명이 구속되었고, 시끌벅적한 소동과 군사재판이 이어지는 가운데 CIA의 ‘고용 계약’ 관련 우스개가 만천하에 공개되고 맙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때까지 계약서 문구와 버스 터미널에나 얌전히 숨어 있던 terminate라는 단어가 일약 영화판의 스타로 떠오릅니다. 첫 영화는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1979)이었습니다. 주인공이 베트남 정글에 숨어 있는 커츠 대령을 찾아내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는 장면에서 ‘terminate with extreme prejudice’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terminate라는 단어는 이내 대중의 뇌리에 ‘죽이다’의 우악스럽고 공포스럽고 터프한 동의어로 각인됩니다. 곧이어 1984년, 제임스 캐머런 감독은 우악스럽고 공포스럽고 터프한 살인 로봇에 ‘The Terminator(터미네이터)’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왕비와 첨단기술

    군힐다는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 덴마크의 왕비였습니다. 중세 암흑시대 왕비들이 다 그렇지만, 국왕 스벤 1세의 부인이었다는 사실 말고는 알려진 게 거의 없습니다. 그녀의 아들은 후에 크누트 대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아버지가 덴마크 국왕 하랄 1세(935~986)였습니다.


    하랄 1세는 이가 파란색이었다고 합니다. 아니 어쩌면 검은색이었는지도 모릅니다. ‘blau’라는 단어의 의미가 변천을 겪었으므로 정확히 무슨 색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그리고 덴마크와 노르웨이에 난립하던 세력들을 단일 국가로 통일한 왕이기도 했습니다.


    1996년에 짐 카다크라는 엔지니어가 어떤 기술을 개발했는데 무선기기와 컴퓨터 간에 정보를 주고받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고된 개발 작업을 마친 후 쉬면서 프란스 군나르 벵트손의 역사 소설 《전함 바이킹(The Longships)》를 읽었습니다. 바이킹들이 모험을 벌이고 약탈과 강간을 일삼는 이야기였는데, 배경이 ‘푸른 이빨 하랄’ 즉 Harald Bluetooth가 통치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짐 카다크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왕과 자기가 하는 일이 별 다를 바 없었습니다. 무선기기와 컴퓨터를 서로 통하게 한다는 것은 기술 분야에 난립하는 세력들을 통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프로젝트에 재미 삼아 Bluetooth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누구도 Bluetooth를 그 기술의 실제 상표명으로 삼을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파란색 이빨’이란 그다지 느낌이 좋지 않았기에, 카다크가 다니던 회사의 마케팅팀에서는 더 나은 이름을 궁리했습니다. 결국 생각해낸 이름이 무난하면서 밋밋한 Pan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술을 공개하기 직전, 다른 회사에서 이미 Pan이라는 상표명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습니다. 시간이 촉박한 상황에서 회사는 하는 수 없이 카다크가 붙였던 별명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 기술은 오늘날 Bluetooth(블루투스)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무서운 돈

    돈은 괴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적어도 어원적으로는 그렇습니다. 둘 다 라틴어 ‘monere(‘모네레’)’에서 유래했거든요. 둘의 연관성은 비록 우연에서 비롯되었지만, 그래도 의미심장합니다.


    monere는 라틴어로 ‘경고하다’를 뜻했지요. 지금도 premonition은 ‘사전 경고’, 더 나아가 ‘불길한 예감’을 뜻합니다. 고대 사람들은 무시무시한 짐승들이 곧 재앙의 전조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황제가 서거하거나 전쟁에서 크게 지거나 하는 일이 있기 직전에는 켄타우로스니 그리핀이니 스핑크스니 하는 동물들이 어디에선가 갑자기 나타나 눈앞에 돌아다닌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한 몸에 두 동물이 합쳐진 괴상한 생명체를 가리켜 ‘경고’를 뜻하는 monstrum이라 불렀고, 이것이 오늘날 monster괴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경고해줄 무언가가 필요한데 켄타우로스가 없다면 거위도 쓸 만합니다. 오늘날에도 거위를 경비용으로 키울 정도로, 거위는 침입자를 발견하면 맹렬히 소리를 질러댈 뿐 아니라 성질도 꽤 사납습니다. 잘못해서 거위 성질을 건드렸다 하면 한바탕 크게 싸울 각오를 해야 하지요. 로마인들은 카피톨리누스 언덕에서 거위를 경비용으로 키웠습니다. 그러다가 기원전 390년 갈리아인이 로마에 쳐들어왔을 때 거위 덕을 톡톡히 보았다고 합니다. 탄복한 로마인들은 감사의 마음으로 신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배은망덕하게 신전을 거위들에게 바칠 생각은 하지 않고 경고의 여신 유노(Juno)에게 바쳤습니다. 유노의 별칭은 유노 모네타(Juno Moneta)였습니다.


    유노 모네타 신전 바로 옆에는 로마의 화폐 주조소가 있었습니다. 아니면 신전의 일부 공간에서 화폐가 주조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 건 아무도 모르고, 문헌에도 상당히 모호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로마의 화폐 주조소가 신전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모네타(Moneta)였는데, 오늘날 영어에서도 모음은 다 바뀌었지만 여전히 ‘조폐국’을 mint라고 합니다.


    로마의 모네타(Moneta)에서 찍어낸 것은 역시 모네타(moneta)였습니다. 문자 그대로는 ‘경고’의 뜻이었지요. 그 단어는 프랑스에 건너가 t가 탈락되었고, 영어에 건너올 때는 이미 money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어에서 ‘돈과 관련된’을 뜻하는 형용사 monetary의 형태에는 여전히 그 모네타 신전과 사나운 거위의 흔적이 선명히 남아 있습니다.


    돈이 괴물이 된 것은 사실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비롯된 우연에 불과합니다. 어쩌면 돈이란 그리 나쁜 게 아니고, 걱정은 기우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너무 무서워하지 마세요. 편한 마음으로 ‘죽음의 서약(death-pledge)’에 사인하면 됩니다. 아차, 말이 잘못 나왔네요. ‘모기지(mortgage)’를 말한 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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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