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의 심리학
 
지은이 : 바버라 블래츨리 (지은이), 권춘오 (옮긴이)
출판사 : 안타레스
출판일 : 2023년 08월




  • 운과 기회를 학습하는 뇌! 왜 똑같은 우연을 누구는 기회로 만들고 누구는 흘려보낼까요? 딴짓하는 머릿속 주의력 회로를 깨워 ‘뇌’의 ‘기회 감지기’를 어떻게 정상 작동시킬 수 있는지 설명드립니다.


    기회의 심리학


    운이란 무엇인가

    무작위 패턴

    여러 다른 과학자들도 무작위성과 인간의 독특한 관계를 인식하고 이를 설명하는 갖가지 용어를 창안해냈다. 통계학자 예지 네이만(Jerzy Neyman)과 이건 피어슨(Egon Pearson)은 통계적 의사결정을 연구하면서 인간이 저지르는 두 가지 의사결정 오류를 설명했다. 하나는 거짓을 참으로 판단하는 ‘거짓 긍정(위양성, false positive)’인 ‘제1종 오류(Type I error)’로, 무작위성에 패턴이 있다고 여기는 것처럼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에서 의미나 중요성을 찾을 때 나타난다. 참을 거짓으로 판단하는 ‘거짓 부정(위음성, false negative)’인 ‘제2종 오류(Type II error)’는 실제로 유의미한 현상이나 사건에 아무 의미나 중요성이 없다고 여길 때 발생한다.


    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은 자신이 ‘동시성(同時性, synchronicity)’이라고 이름 붙인 현상, 즉 실제 인과관계나 연결고리가 없는 우연의 일치에서 어떤 관계를 경험하게 되는 인간 무의식에 관해 자주 언급했다. 융에 따르면 어떤 사건들은 원인과 결과로 연결돼 있고, 어떤 사건들은 인과 없이 의미로만 연결돼 있다. 그는 우리의 삶이 그저 무작위적인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고 믿었다. 개인의 삶뿐 아니라 역사를 통틀어 모든 인간의 삶에 근본적인 패턴이 있다고 여겼다. 그는 이 패턴을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이라고 불렀다. 그는 우리가 함께 일어나는 두 사건에서 의미를 보면 그 모든 것을 연결하는 근본적 패턴을 보는 셈이라고 말했다.


    조현병(정신분열증)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독일 신경학자이자 정신과 의사 클라우스 콘라드(Klaus Conrad)는 “서로 연관이 없는 현상이나 사건에서 의미나 패턴을 인식하려는 경향”을 일컬어 ‘아포페니아(appophenia)’라고 명명했다. 최근에는 심리학자이자 저널리스트 마이클 셔머(Micheal Shermer)가 “무의미한 잡음에서 유의미한 패턴을 찾으려는” 인간의 경향을 설명하고자 ‘패턴성(patternicity)’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여러분이 여름날 하늘의 구름 속에서 사람 얼굴을 봤거나 페퍼로니 피자에서 성모 마리아를 본 적이 있다면 ‘파레이돌리아(pareidolia)를 경험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파레이돌리아도 무작위 배열에서 패턴을 찾아 의미를 부여하려는 심리 현상을 말한다. 사람에게 사람 얼굴보다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신경과학자들은 왜 우리 인간에게 파레이돌리아 같은 특정 패턴을 보려는 경향이 있는지 설명하기 위해 실험을 진행했다. 스위스의 한 연구팀이 피실험자들에게 실제 사람 얼굴 사진과 벽에 있는 전기 콘센트를 가까이에서 찍은 사진과 같은 ‘얼굴 같은’ 이미지를 보여준 뒤 그들의 뇌 활동을 기록했다. 그 결과 진짜 사람 얼굴 사진과 얼굴 같은 이미지 모두 ‘방추형 얼굴 영역(Fusiform Face Area, FAA)’ 신경 세포가 반응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관자놀이 바로 아래에 있는 뇌 피질 측두엽 일부인 ‘방추형 얼굴 영역’은 주로 얼굴에 대한 시각 정보를 담당하는 뇌 영역이다. 이 부위 세포 반응은 피실험자들이 ‘얼굴 같은’ 이미지를 보는 순간 거의 동시에 150밀리초(millisecond)만에 일어났다. 이에 연구팀은 그 시각 정보가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얼굴’로 분류된다고 결론지었다. 이로 볼 때 우리는 주변 세계에서 특정한 패턴을 보도록 프로그래밍된 것 같다. ‘아포페니아’, ‘패턴성’, ‘파레이돌리아’ 이 모든 용어는 무작위성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잡음에 불과한 것들에서 의미를 찾는 인간 고유의 근본적 성향을 가리키고 있다.


    그렇다면 한 ‘종(, species)’으로서 인간 성향이 무작위성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할 때 ‘운’은 대체 무엇일까? 마이클 셔머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아는 듯 보인다. 그는 ‘패턴성’에 이어 우리가 인간이기에 가진 또 다른 성향, 즉 “보이지 않는 어떤 행위자의 의도에 따라 세상이 통제된다고 믿는 경향”을 설명하면서 ‘행위자성(行爲者性, agenticity)’라는 용어를 제시했다. 먼 과거에 우리가 무작위 사건과 마주했을 때, 달리 말해 그냥 일어난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운’이라고 부르는 것을 발명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변덕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행위자’의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이다. 이후 인류 역사에서 ‘운’은 ‘우연’이나 ‘기회’라는 개념과 뒤섞이며 이어져 내려왔다.


    독일계 미국 철학자 니콜라스 레셔(Nicholas Rescher)는 운은 인간의 지위를 정의할 정도로 인간 삶에서 본질적이고 중요한 요소라고 썼다. 실제로 우리는 운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우리는 세상이 근본적으로 불공평하며,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쨌든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사실을 이해할 만큼 이성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좋은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 수도 있고, 나쁜 사람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운의 탄생

    행위자 감지기

    일반적으로 우리 인류는 운을 필멸자인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취급했다. 어떤 사건의 원인을 찾지 못하거나 찾았더라도 설명할 수 없을 때 인류는 그 통제권을 영원불멸의 신에게 돌렸다. 원인에 쉽게 접근해 이해할 수 있다면 초자연적인 것에서 인과관계를 찾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신에게 의지하려는 경향은 우리가 무언가를 설명할 수 없을 때 발현된다.


    인지심리학자 저스틴 배럿(Justin Barrett)은 인간이 생각하는 방식, 특히 종교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연구했다. 그는 인간이 세상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생각하도록 도와주는 여러 정신적 도구를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 뇌의 안면 감지기와 패턴 탐지기가 세상을 바라본다. 인간 뇌 세포는 얼굴과 패턴이 마주칠 때 미친 듯이 발화해 잠재적으로 중요한 무언가가 밖에 있음을 뇌의 나머지 영역에 경고한다. 인간은 저스틴 배럿이 ‘행위자 감지기(agency detector)’라고 부른 정신적 도구도 갖췄다. 우리가 세상에서 목표 지향적 패턴, 즉 목적이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패턴을 마주하면 우리 뇌는 그 패턴의 ‘행위자’를 찾기 시작한다. 저스틴 배럿에 따르면 ‘행위자’는 우리 주변 세계 무언가에 단순히 ‘응답’하는 존재가 아닌 ‘행동’을 시작하는 존재다. 다시 말해 ‘행위자’는 사건이나 현상을 발생시킨다. 인간 뇌는 발생하는 모든 일의 배후에 있는 행위자를 볼 수 있도록 과민한 ‘행위자 감지기’로 진화했다. 우리에게 이런 경향이 생기게 된 까닭을 저스틴 배럿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만약 당신이 어떤 존재가 행위자라는 데 모든 것을 걸었는데 실제로는 행위자가 아니라면, 당신은 잃을 게 별로 없다. 그러나 행위자가 아니라고 확신했는데 실제로는 행위자라면, 당신은 점심밥이 될 수 있다.”


    예컨대 밀림을 탐험하다가 사자 발자국일 수 있는 움푹 들어간 땅을 보게 된 경우, 사자가 근처에 있다 여기고 조심하는 편이 생존 확률을 높인다는 것이다. 이 과민한 행위자 감지기가 세상 모든 패턴을 의미있다 해석하고, 경이롭거나 끔찍한 사건 배후에 무작위성이 아닌 행위자가 있다고 믿게 된다면 우리는 종교를 얻게 된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인간이 행위자로서 작동하지 못하거나 어떤 사건 및 현상에서 그 원인이 되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할 때, 우리는 신 또는 여신이라고 불리는 초월적 행위자를 찾기 시작한다.


    행운, 종교, 초자연적인 것을 향한 믿음 사이에는 오래되고 긴밀한 관계가 있다. 한 문화를 기준으로 묶일 수 있는 민족 집단에 직접 참여해 그들이 경험하는 일상의 의미를 해석하는 민족지학자들은 우리가 신과 소통할 때 병을 극복하거나,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적을 무찌르는 등 구체적인 도움을 요청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전능하신 신과 함께 바람만 쐬는 게 아니라 그에게 간청한다. 우리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의 결과를 보여달라고 말이다.


    정말 중요한 일이 생길 때 우리는 자신을 대신해 신이 개입해주기를 소망한다. 이런 의미에서 신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무언가를 통제할 수 있기에 신이다. 이런 이유가 전부는 아니더라도 인류 문화 대부분은 행운이 필요하거나 불운을 피해야 할 때 인간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대상인 신이나 여신을 설정하고 발전시켰다. 그리고 도움을 구하는 과정은 기도나 제사처럼 의식화됐으며, 마법의 주문이나 우상, 부적과 같은 상징을 낳았다.



    운과 미신

    행운의 부적

    저주는 불운과 관련이 있지만, 저주를 풀거나 막는 방법도 있다. 운의 힘을 끌어당기는 가장 흔한 방법은 ‘부적(符籍, charm)’을 소지하는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행운의 부적, 행운의 옷, 행운의 액세서리 등을 갖고 있다. 행운을 부르고 불운을 멀리하기 위해서다. 나도 고백하기 부끄러우나 ‘행운의 신발’ 한 켤레를 갖고 있다. 물론 사람들이 이런 ‘부적’의 힘을 정말로 믿어서, 우주의 무작위 사건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고 이성적으로 확신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마음이 안정되고 기분이 좋아진다는 사실을 감정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나도 무언가 약간의 행운을 바랄 때 내 ‘행운의 신발’을 신는다.


    영국 심리학자 리처드 와이즈먼(Richard Wiseman)은 운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운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을 15년 넘게 연구해왔다. 2003년 그가 진행한 설문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77%가 운을 믿었고, 행운을 부르거나 불운을 피하고자 미신적 행동을 했다. 심지어 과학에 관한 배경 지식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의 25%도 자신들이 다소 미신적이라고 인정했다. 불운을 막는 방법으로 ‘나무 만지기’(74%), ‘검지와 중지를 꼬아 십자가 모양 만들기’(65%), ‘부적 지니고 다니기’(28%)를 믿었고, ‘사다리’(50%), ‘깨진 거울’(39%), ‘숫자13’(26%)순으로 불길하다고 여겼다.


    프로와 아마추어를 막론하고 운동선수 대부분이 저마다 행운의 부적 하나쯤은 몸에 지닌 채 코트, 필드, 그린에 선다. ‘행운의 의식’을 행하는 선수들도 있다. 특히 프로 스포츠 선수들은 성과, 경력, 부상, 인기 등 갖가지 스트레스 요소에 직면해 있다. 그 때문에 운동선수는 경기를 잘하기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려는 동기가 강하다. 그게 아무리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어도 말이다.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오른 삼루수의 전설 웨이드 보그스(Wade Boggs)는 경기력을 향상하고자 자신만의 ‘행운의 의식’을 빠짐없이 수행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났고 연습도 의식처럼 했다. 경기에 출전하기 전날에는 무조건 닭고기를 먹었고, 히브리어를 하지 못하는데도 타석에 들어서면 늘 바닥에 ‘살아있음’을 뜻하는 ‘카이’를 그렸다. 그러면 배트를 휘두를 만반의 준비가 되는 것이었다.


    여러분에게도 매일 ‘루틴(routine)’처럼 행하는 행운의 의식이 있을지 모르겠다. 많은 이들이 그 효과에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생활 일부를 의식화하는 듯 보인다. 오랫동안 심리학자들은 우리가 왜 그런 특이한 행동을 하는지, 무엇이 그 행동을 멈추지 못하게 하는지 연구했다. 행동주의 심리학자 버러스 프레더릭 스키너(Burrhus Frederic Skinner)는 미신적 행동을 학습과 강화의 결과라고 여겼다. 거의 모든 것이 강화 인자가 될 수 있다. 배고플 때는 음식을 먹고, 목마를 때는 물을 마시며, 신발이 발을 너무 꽉 조이면 벗는다. 강화는 우리가 어떤 반응을 한 뒤에 일어난다. 신발을 벗으면 편안해지고 쿠키를 먹고 나면 덜 배고프다고 느낀다. 그러면 그 행동 동기가 강화된다. 스키너에 따르면 반응을 반복할 가능성을 높이는 강화는 ‘긍정적 강화(positive reinforcement)’이고 반복하지 않을 가능성을 높이는 강화는 ‘처벌(punishment)’이다.


    스키너는 그 유명한 ‘스키너 상자(Skinner box)’를 이용해 특정 자극에 적절히 반응하면 먹이를 얻는 등 동물들이 ‘긍정적 강화’행동을 하도록 학습시켰다. 예를 들어 불이 켜진 작은 버튼을 부리로 쪼면 먹이가 나오는 상자에서 비둘기들은 매우 빨리 버튼 쪼는 법을 배웠다. 몸을 빙글빙글 돌리거나 머리를 흔들면 먹이가 나오는 상자에서도 빠르게 학습했다. 어느 날 스키너는 자극 없이 먹이만 나오면 비둘기들이 어떻게 할지 궁금해졌다. 다른 장치를 빼고 무작위로 먹이만 나오게 한 상자에서도 비둘기들은 각기 학습한 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어떤 비둘기는 먹이가 나오기 전 부리로 상자 벽을 쪼았고, 어떤 비둘기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빙글빙글 돌았다. 또 어떤 비둘기는 진자처럼 머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비둘기들은 마치 그런 반응을 해야 먹이를 먹을 수 있는 듯 행동했다. 자신의 행동과 먹이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는 거처럼 말이다. 스키너는 우리의 미신적 행동, 즉 행운의 부적을 몸에 지니거나, 행운의 음식을 먹거나, 행운의 신발을 신는 것도 학습에 따른 강화 행동이라고 결론지었다.



    어떻게 기회를 잡는가

    직감은 틀리지 않는다

    ‘본능적인 직감’인 ‘직관(直觀, intuition)’은 우리 뇌에 범람하는 감각의 지속적인 흐름에서 패턴을 인식하는 능력이다. 누구나 직관력을 갖고 있다. 우리는 이성보다 직관을 이용해 결정하는 때가 훨씬 많다. 독일 신경과학자 키르스튼 폴츠(Kirsten Volz)와 D. 이브 폰 크라몬(D. Yves Von Cramon)은 우리가 두 가지 방식으로 결정을 내린다고 설명했다. 하나는 ‘이성’이다. 어떤 결정을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며, 그러려면 우리 기억 속 지식과 협의가 필요하다. 이런 결정은 의도를 갖고 수행해야 하는 매우 골치 아픈 작업이고 상대적으로 시간도 오래 걸린다. 다른 하나는 ‘직관’이다. 직관적인 결정은 빠르고 의도적인 주의를 요구하지 않지만 이성적인 결정만큼이나 유용하다. 부인할 수 없이 직관은 우리가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하는 중요한 방법이다. 살면서 우리가 어떻게 왜 아는지 모르는데도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경험을 하고 있다. 두 사람은 직관을 이렇게 묘사했다.


    인간은 의식적인 주의 없이도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련의 감각 패턴을 지속해서 인식함으로써 직관을 형성한다. 그 결과 인지한 일관성에 따라 생각과 행동이 편향되는데, 이 직관은 이전 경험의 전체 흐름을 반영하는 정신적 표상에 의존한다.


    직관을 좀 더 쉽게 표현하면 의미 있는 무언가를 모호하고 흐릿하게, 그러나 재빠르게 느끼는 것이다. 운이 좋은 사람들은 운이 나쁜 사람들보다 이런 흐릿한 느낌에 더 주의를 기울인다. 자신들의 직관에 따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거나 서둘러 벗어난다.


    직관을 신경생물학적으로 연구한 어떤 실험에서 연구팀은 실험 참가자들에게 일관적이거나 비일관적인 시각 자극을 제시한 뒤 최대한 빨리 응답하도록 요청했다. 실험 참가자들은 일관적인 이미지에는 신속히 응답했고 비일관적인 이미지에는 다소 늦게 반응했다. 실제로 우리가 일관적인 자극을 빠르게 인식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미 머릿속에 패턴으로 각인된 직관이 순식간에 이미지를 인지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결정하기 때문이다. 일관성에 대한 느낌은 우리의 감각 체계 전체에서 찾을 수 있다. 일테면 키르스튼 폴츠 연구팀은 청각 자극을 활용한 다른 실험에서 피험자들에게 어떤 소리인지 설명하지 않고 “교회 종소리, 하수구로 물 지나가는 소리, 식사용 날붙이가 딸가닥하는 소리 등”을 제시한 뒤 일관성을 느끼면 재빨리 응답하도록 요청했는데, 중간 중간 잡음이나 거꾸로 재생한 소리처럼 아무런 맥락없는 ‘비일관적인’ 소리도 끼워 넣었다. 이 실험에서는 MRI를 이용해 실험 참가자들의 뇌 활동을 지도화했다.


    실험 참가자들은 소리가 규칙적이고 왜곡 없이 재생될 때 빠르고 정확하게 응답했다. 청각 자극으로 활성화한 뇌 영역 또한 시각 자극에서 나타난 영역과 유사하게 반응했다. 달리 말해 청각 정보를 처리하는 측두엽 부위도 시각 정보를 처리하는 후두엽 부위처럼 활성화했다. 그런데 다소 특이하게도 ‘안와 전전두 피질’ 영역이 먼저 반응했다. 키르스튼 폴츠 연구팀은 감정 조정과 억제를 담당하는 안와 전전두 피질도 대부분 감각 정보에 반응해 “신속한 감지기 및 예측기” 역할을 한다고 새롭게 결론지었다. 안와 전전두 피질이 그동안 사물 인식에 관여한다고 알려진 뇌 영역보다 ‘빠르게’ 활성화한다는 것은 이곳이 해당 감각 정보가 ‘진짜’인지 판단하기 위해 가장 ‘핵심’이 되는 정보를 먼저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한편 스페인 신경과학자 호아킨 푸스테르(Joaquin Fuster)는 사물의 정체를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과정에 안와 전전두 피질이 관여한다고 표현했다. 요컨대 우리 오랜 친구 전두엽의 이 영역은 감각 체계로부터 받은 정보를 가장 먼저 검토해 그것이 진짜인지 그리고 무엇인지 판단하는 중요한 부위다. “직감을 따르라”는 오래된 격언을 읽을 때면 언제나 ‘안와 전전두 피질’을 떠올려야 할 것 같다.


    호아킨 푸스테르에 따르면 안와 전전두 피질은 우리가 빨리 되풀이해서 내리는 몇 가지 다른 결정과도 관련이 있다. 예를 들면 다른 대상과 비교해 상대적 가치를 판단하고, 우리 행동의 결과를 추적하고, 상황을 지배한 규칙을 기억하고, 더는 유효하지 않은 규칙에서 새롭고 더 나은 규칙으로 전환하고, 나아가 우리의 감각 체계에서 생성한 정보에 대한 기억을 만들어내는 것까지 수행한다. 이와 같은 모든 작업을 통틀어 앞서 언급한 ‘실행 기능’이라고 부른다. 우리 주변 세계와의 일상적 상호 작용을 안내하거나 지시하고, 목표 달성을 할 수 있도록 우리 행동을 융통성 있게 조정하는 모든 결정이 ‘실행 기능’ 범주에 속한다.


    전두엽의 전전두 피질, 특히 안와 전전두 피질에 영구적 손상을 입은 사람은 ‘실행 장애 증후군(dysexecutive syndrome)’이라는 실행 기능 장애를 겪게 된다. 적게는 한두 가지에서 많게는 수십 가지에 이른다. 호아킨 푸스테르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주의력, 작업 기억력, 계획력, 통제력, 억제력 등에 문제가 발생하며, 이 가운데 몇 가지 문제라도 의사결정 및 조직화 행동을 무력화한다. 실행 장애 증후군 환자는 물리적 활동은 물론 심리적 활동 전반에 걸쳐 제약을 받기에 삶이 고통스럽다.


    실행 장애 증후군 환자는 크고 작은 목표 달성을 위한 결정을 내리는 데 엄청난 어려움을 겪을뿐더러 목표 달성과 무관한 일들도 무시하지 못한다. 아주 단순한 목표도 설정할 수 없다. 어떤 물건을 집을 때도 목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거기에 있으니까 집는다. 무엇이든지 눈에 보이면 만지고 집어야 한다는 강박감을 느끼는 듯하다. 가능성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실행 장애 증후군 환자는 아무 물건이나 만지작거리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갈 길을 잃는다. 주변 사람들이 무엇을 하든 상관없이 무조건 따라 하고 싶다는 충동도 억누르지 못한다.


    주변 사물이 무엇인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신속히 판단하는 능력을 상실하면 간단한 목표 달성도 힘들어진다. 실행 장애 증후군 환자는 주의를 집중할 수 없고 중요하지 않는 것들을 걸러낼 수 없어서 결과적으로 잘못된 결정을 내린다. 반면 전두엽이 멀쩡한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떨까? 우리의 중추 신경계가 제공하는 모든 능력에는 다양한 힘이 있다. 각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그 능력을 얼마나 잘 사용하는지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이와 관련해 또 다른 연구팀은 남들보다 운 좋은 사람들은 목표 달성을 위한 최선의 방식으로 실행 기능을 사용한다고 주장했다.



    행운의 값비싼 미소

    운과 두려움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것

    제목이 무색하게도 나는 이 책에서 ‘기회’라는 용어보다 ‘운’이라는 용어를 훨씬 많이 썼다. 그렇지만 ‘운’은 사실상 ‘기회’와 같은 말이다. 여기에서 ‘기회’란 ‘우연한 기회’다. ‘무작위성’이 낳은 ‘기회’다. 무작위성은 매일 매 순간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무작위성은 알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기 때문에 어찌 보면 무섭다.


    다른 동물도 그렇지만 인간은 이해하지 못하는 대상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불안 장애를 주로 연구하는 캐나다 임상심리학자 니콜라스 칼튼(Nicolas Carleton)은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이야말로 다른 모든 두려움의 밑바탕을 이루는 근본적인 두려움이라고 말한다. 그는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과 다음에 일어날 일을 이해하기 위한 정보가 없을 때 생기는 두려움”이라고 정의한다. 이 두려움은 사건을 이해할 “중요하고 핵심적인 정보가 충분치 않을 때 촉발”한다. 그래서 우리 뇌는 이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우리가 모르는 세상에 호기심을 갖고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도록 이끈다.


    우리가 모르는 것에 호기심을 갖게 되면 심리적 이점이 따라온다. 연구자들은 호기심이 충족될 때 불확실성이 줄어들고 보상과 강화에 반응하는 뇌 회로가 활성화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미지의 것, 이해하지 못하는 것, 우리를 두렵게 하는 대상에 이름을 붙이는 것도 인간인 우리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름을 지어주면 불확실성이 크게 줄어든다. 무언가 잘 아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지의 대상에 이름을 지으면 우리 뇌의 감정 반응 회로인 측두엽 안쪽의 ‘변연계’를 길들여서 두려움에 특화한 ‘편도체’활동이 억제된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우리 인간은 초자연적 존재를 설정해 무작위성을 관리하는 역할을 부여했고, 우주의 기운을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끌고자 정교한 의식과 주술적 상징을 고안했다. 이 역시 우리 뇌가 한 일이었다. 뇌는 이토록 감당하기 어려운 과제를 수행해왔다. 어떻게든 무작위성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해서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결정하려고 힘써왔다. 우리는 우리가 지닌 모든 인지능력을 총동원해 무슨 일이 일어났고, 왜 일어났으며,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반복해서 학습함으로써 무작위성에 패턴이 있다고 여기는데 이르렀다. 그리하여 세상과 삶의 무작위성에 대응해 우리가 내린 결정 및 그에 따른 실행 또는 억제는 이제 ‘운’, ‘운명’, ‘기회’라는 이름으로 통용됐다.


    여러분 인생에서 우연과 마주했던 모든 시간을 떠올려보자. 그 기회가 여러분을 그냥 지나쳤든 무릎 위에 떨어졌든 간에 나는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저마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 우리가 한 일이 ‘올바른’ 것인지는 그 일을 한 뒤에야 알 수 있다. 무작위성을 다룰 때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최선의’ 방법은 없다. 우연과 마주해 그 우연을 대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이면서 각자 다른 인간이다. 우리는 서로 사는 환경이 다르고 개인의 경험을 공유하지 않으므로 기대하는 것과 추구하는 것, 두려워하는 것과 피하고 싶은 것들이 저마다 다르다. 그렇지만 뇌의 메커니즘은 우리 모두 같다. 무작위적이고 일관성 없는 세상에서 패턴과 규칙을 찾도록 설계된 뇌는 여러분이나 나나 똑같다.


    물론 우리가 세상을 바라볼 때 진정한 본질을 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보고 싶은 것, 기대하는 것, 때로는 보기 두려운 것을 본다. 누구나 그렇다.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가 패턴을 찾고 우리 삶을 이루는 우연한 사건에서 그 패턴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하다.


    의학에서 말하는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와 같다 ‘placebo’는 ‘마음에 흡족하게 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자동사 '플라케오'에서 파생한 용어다. 나을 수 있다고 믿고 작은 ‘알약’을 먹었는데 진짜 나았다면, 그 약이 ‘가짜’라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병을 이길 수 있다는 강한 의지와 믿음이 환자의 면역 체계를 강화해 치료에 도움을 준 것이다. 과학이며, 이 또한 우리 뇌의 능력이다. 내가 ‘행운의 신발’을 신을 때 좋은 일이 생긴다는 믿음으로 그 신발을 신고 하루를 보냈더니 정말로 좋은 일이 생긴다면, 미신이니 비합리적이니 하는 논리가 중요할까? 과학도 미신처럼 보일 때가 있다. 내가 “빛을 믿는 사람은 마음이 빛으로 가득 차고, 두려움을 믿는 사람은 두려움으로 가득 찬다”고 말하면 과학자답지 않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의 생각은 그 자체로 에너지이므로 ‘끌어당김의 힘’, 즉 ‘유인력(誘引力, attraction)’을 가졌다.


    행운을 믿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추가적 힘을 얻기 위해 행운을 기대하면 실제로 도움이 된다. 운이 좋다고 믿으면 통제 가능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은 자신감으로 바뀌어 여러분을 더 나은 성과, 더 많은 성공, 더 유익한 결과로 이끈다. 더욱이 그 ‘좋은 경험’은 다음번 곤란한 상황에 직면할 때 낙담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타개해나갈 수 있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성공만큼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없다”는 말이 있다. 한 번 성공한 사람은 두 번 세 번 계속 성공할 수 있다. ‘행운의 부적’을 몸에 지니고 ‘좋은 경험’을 했다면 얼마든지 또 그렇게 해도 된다. 다시 말하지만 좋은 일이 생긴다는 데 미신이니 비합리적이니 하는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과학이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이 책에서 계속 확인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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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