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왜 사느냐 묻는다면
 
지은이 : 미나미 지키사이(역:백운숙)
출판사 : 서사원
출판일 : 2023년 06월




  • 정말로 훌륭한 건 원하는 바를 이루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꿈이 산산조각 나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굳건히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만 버티면 내일은 괜찮다고 믿는 이들에게 지혜로운 노승이 무심하고 담대한 생의 기술을 전합니다.


    그럼에도 왜 사느냐 묻는다면


    우연히 태어난 ‘나’라는 존재에 의미를 찾지 말자

    내가 가장 소중하다는 착각

    마음속 고민을 털어놓기 위해 절을 찾은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꽤 많은 사람이 같은 착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라는 굳건한 존재가 있고, 그런 ‘나’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생각. 나의 삶은 무엇보다 소중하니까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다. 내 마음 같지 않은 하루하루와 인간관계에 발을 동동 구르고,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런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나는 틀림없이 여기에 있는데, 뭐가 착각이라는 거지?”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대체 무엇을 소중히 하란 거지?”


    이렇게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그런데 ‘나’란 어떤 존재인지 생각해본 적 있는가? ‘몸’이 나일까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 우리 몸을 이루는 수많은 세포는 3개월이 지나면 모두 새로운 세포로 교체된다. 새로운 세포로 바뀐 몸은 남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마음’이 나일까? 이 말에도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 없다. 어제의 마음과 오늘의 마음이 같다고 어떻게 확신하는가. 답하기 쉽지 않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은 존재라는 근거는 두가지다. 바로 ‘나의 기억’과 ‘다른 이의 인정’이다.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떴는데 지금껏 쌓아온 모든 기억이 홀연히 사라졌다고 상상해보자. 잠들기 전까지의 ‘나’는 더는 세상에 없다. 또, 어느 날 문득 주변 사람들이 나를 A라는 다른 인물로 대한다면 어떨까? A로 살아가거나, 평정심을 잃고 괴로워하거나, 어쩌면 스스로 세상을 등지게 될지도 모른다.


    거친 비유를 들었지만 ‘나’라는 존재는 그만큼 흔들리기 쉽다. 나는 ‘나’라는 기억의 집합체이면서 다른 이가 ‘나’임을 인정해줄 때에야 비로소 세상에 존재한다.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내가 ‘나’라는 근거는 사라지고 ‘나’는 속절없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평소 ‘나’라고 일컬어지는 건 그저 ‘기억’과 ‘타인과의 관계’로 쌓아 올린 허상에 불과하다. 언제든 흔들릴 수 있는 토대 위에 있는 불안정한 ‘나’를 가장 소중히 여겨도 괜찮은 걸까. “그렇지만 저는 누가 봐도 저인데요”하고 말하는 이에게 당신이 누구인지 되물으면 이름과 성별, 나이, 성격, 직업, 가족, 주소를 술술 읊는다. 하지만 이런 건 어디까지나 지금의 ‘나’를 이루는 속성일 뿐이다. 이런 속성을 모두 걷어내면 무엇이 남을까?


    생각해보면 사람이라는 존재는 태어날 때부터 남이 지어준 옷을 걸치고 있는 셈이다. 언제 어디에서 태어날지, 성별도 외모도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다. 이름도 부모가 붙여주지 않던가. 나에게 이름을 지어준 부모조차 어쩌다 보니 부모라는 존재가 되었을 따름이다. 이 세상에 스스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없다.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태어났다면 태어나는 시간과 장소, 부모를 원하는 대로 골라서 자기가 바라는 모습이 되었을 거다. 그러나 지금의 자신이 바랐던 모습이라고, 완벽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기는 할까. 우리는 이 세상에 뜻하지 않게 태어나 타인의 의해 ‘남들과는 다른 나’로 규정되어 살아간다. 그런 ‘나’로 살아가자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아야 할 것만 같다. 처음부터 내가 아닌 남이 골라준 옷을 입고 있으니 잘 어울린다든가 보기 좋다든가 하는 칭찬을 들어야만 마음이 놓이고 옷 입을 맛이 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존재인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세상이 빚어낸 ‘나’를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삶의 괴로움 앞에서 애써 저항하기보다는 괴로움을 기꺼이 수용하며 그저 흘러가도록 놓아두기, 내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려는 건 이런 삶의 지혜다.


    모든 고민은 관계에서 온다

    절을 찾아와 하소연하는 분들은 크게 두 유형이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상황에 괴로워하는 이들, 그리고 지금 있는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어 하는 이들이다. 그런데 두 유형에 공통점이 있으니, 입 밖으로 먼저 나오는 말이 남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우리 애가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데 어쩌면 좋을까요?”

    “직장 상사 비위 맞추기가 너무 힘들어요.”

    “어머니와 함께 사는데, 자꾸만 싸워서 더는 같이 못 살겠어요.”

    “남은 정도 없어서 이혼하고 싶은데 남편이 펄펄 뛰네요.”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은 자기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제아무리 심각하다 해도 대부분은 자신을 둘러싼 인간관계에 관한 고민이다. 부모 또는 자식, 배우자, 직장 동료와 사이가 어떻고 어떤 문제가 생겨 얼마나 괴로운지 같은 것들 말이다.


    생전 처음 보는 스님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려 굳이 먼 걸음을 하는 분들도 계시니, 마음고생이 오죽했으면 이곳에 이르렀겠나 생각하며 사연에 귀를 기울인다. 다만 앞에 앉은 분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는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다. 그보다는 괴로운 감정 이면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의 사이를 유심히 살핀다. 누구와 어떤 관계이며 어느 지점에서 삐거덕거리는지. 사연의 등장인물들을 들여다보면 비로소 문제의 본질이 보인다. 왜 하필 지금 그러한 감정이 바깥으로 드러났는지도 알 수 있다.


    한번은 마흔 넘은 미혼 남성이 나를 찾아왔다. 어머니와 함께 사는데, 걸핏하면 어머니가 생활에 사사건건 참견을 한다는 거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잔소리를 늘어놓아 같이 살기 힘들 지경인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번듯한 직장에 다니며 경제적 여력이 충분한 남성이었다. 어머니와 거리를 두면 갈등이 자연히 해소될 거라는 점은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나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조언을 해드렸다.


    “정 마음이 힘들면 일단 떨어져서 지내보는 게 어떨까요? 지금 사는 집에서 나와 혼자 살 집을 마련하는 겁니다.” 그러자 남성은 놀란 토끼 눈을 하고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엄마는 제가 사는 집에 자꾸 찾아올 텐데요!”


    엄마가 찾아오면 일단 맞이하고, 얼마간 시간을 함께 보낸 뒤 돌려보내면 그만이다. 하룻밤 자고 가는 게 아니라면야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은 확보할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남성은 “그래도……”라고 말끝을 흐리면서 영 시원스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괴로워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엄마와 떨어져 살고 싶지는 않은 것이리라.


    지금 이 남성은 엄마를 귀찮게 여기고 있다. 하지만 엄마가 식사는 물론 집안일을 챙겨주니 잔소리만 어느 정도 참으면 편한 생활을 할 수 있다. 몸 편한 생활과 엄마의 잔소리 없는 생활 중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문제의 본질은 이렇게 단순하다.


    물론 본인은 자신이 손쓸 수 없는 문제라는 생각에 너무나 괴롭다. 어쩌면 일이나 대인관계로 인해 울적한 마음의 화살이 때마침 어머니에게 향했을 수도 있다. 특히 사람 사이의 문제를 들여다볼 때는 괴롭고 밉고 싫은 ‘감정’과 ‘지금 일어난 일’을 따로 떼어 생각해야 한다. 감정과 상황이 별개임을 알아야 문제를 풀어갈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이가 감정과 상황을 혼동하고, 끊임없이 같은 문제를 되풀이한다. 관계를 올바르게 보지 않고 혼자 끙끙댄다고 해서 문제가 풀릴 리 없는데도 말이다.


    이렇게 되묻는 이도 있다. “지금 당장 힘든데 어떻게 감정과 상황을 따로 생각할 수 있나요?” 그러나 지금 상황과 바라는 상황이 다르다면 먼저 문제를 바르게 보아야 한다. 그러자면 감정과 상황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차분하게 되짚어보라. 가령 상사가 싫어서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면 상사와 성격이 안 맞는지 업무 스타일이 다른지 먼저 살피자. 성격이 맞지 않는 상사와는 업무 외의 접촉을 되도록 줄이고, 평소 상사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면 상황이 한결 나아질 것이다. 상사와 업무 스타일이 다른 거라면 상사를 업무에 필요한 조건으로 여기면서 일에 집중하면 된다. 상사에게 기꺼이 공을 돌리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하면 일이 더 잘 풀릴지도 모른다.


    다만 상사가 권력을 이용해 괴롭히는 상황이면 이야기가 다르다. 혼자서는 당해낼 도리가 없다. 그러나 좋고 싫음에 그치는 단계라면 아직 손쓸 방법이 있다. ‘포기하다’라는 말을 일본어로 쓸 때는 한자 ‘체()’를 쓰는데. ‘체’에는 ‘깨닫다’라는 뜻도 있다. ‘체’는 주로 ‘단념’을 표현할 때 쓰지만, 여기에는 ‘잘 살피다’ ‘분명하게 보다’라는 부처의 지혜도 담겨 있다.


    문제를 바르게 보려면 괴롭고 힘든 감정은 잠시 뒤로 미뤄두고 상황을 잘 살펴야 한다. 그리고 문제는 나 혼자 아닌 다른 이와의 사이에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살면서 마주하는 거의 모든 문제는 나와 남 사이에 있다. ‘나의 문제’는 말하자면 타인과 함께 짠 옷감과도 같다.


    세상에 나 혼자면 괴로울 일도 없지 않겠나. 그렇지만 타인이 있기에 내가 있다. 남과 나 사이에 이야기가 생기고, 그리하여 우리는 희로애락을 느낀다. 때로는 그 감정을 놓지 못해 하염없이 곱씹기도 한다. 그런데 나와 남 사이에서 생겨난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나의 기억이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내가 만든 이야기를 곱씹으며 괴로워하기보다 관계를 새로 짜야 한다.


    그러려면 관계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누가 이득을 보는지 살펴서 관계의 균형을 새로 맞춰야 한다. 때로는 한발 물러서는 것도 균형을 맞추는 방법이다. 다만 무작정 크게 양보하면 도리어 균형이 무너져 역효과가 날 수 있다. 새로운 사람을 관계에 들이는 것도 방법이다. 물론 미리 충분히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야 한다. 이런 노력이 불러오는 변화를 활용해 문제를 풀어나가면 된다. 먼저 눈앞의 문제를 올바르게 들여다보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다.


    지금 그곳에서 꽃피우지 않아도

    심긴 곳에서 꽃피우라는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운이 좋아 바라던 곳에 심겼다면 몰라도 다른 이가 멋대로 심어놓은 곳에서 그저 꽃피우라니, 말이 되는가. 내가 심긴 곳은 ‘우연히 놓인 자리’일 뿐이다. 우연히 뿌리내린 곳을 무조건 받아들이고 꽃까지 피우라는 건 너무나 가혹한 말이다. 제아무리 불합리하고 힘겨운 상황이라도 순순히 받아들이고 견디며 꿈을 위해 노력하라니, 공평과도 거리가 멀다. 그렇게 치면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전 미국 땅의 흑인들은 우연히 놓인 곳에서 그렇게 피어나야 맞았다는 말인가.


    비슷한 제목이 붙은 책이 많은 사랑을 받은 것도 이해는 된다.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그곳에서 꽃피우세요”하고 누군가 말해주면 마음을 추스르는 데에 힘이 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모든 것을 특정한 조건에서 이루어진 임시 상태로 본다. 사람 사이의 관계도, 일도, 가정도, 늘 특정 조건에서만 성립하는 모호한 것이다. 지금 내가 어느 곳에 놓여 있든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불교의 눈으로 보자면 일시적이다.


    직장 동료나 상사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으면 당사자에게는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회사를 나오면 사이가 좋지 못했던 이와의 관계는 끊어진다.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해도 전학을 가거나 졸업을 하면 나를 못살게 군 아이와의 인연이 끊어지기 마련이다. 물론 가족도 마찬가지다. 함께 있으니 가족인데, 이혼하거나 태어나자마자 부모 자식이 서로 떨어지면 생판 남이나 마찬가지다.


    스스로 선택한 곳인데도 생각과 달리 괴로울 때가 종종 있다. 그렇다면 다른 곳을 찾으면 될 일이고, 조금만 더 머무르자고 마음먹어도 된다. 지금 자리에 계속 머무를지는 스스로 정하면 된다. 정말로 괴로운 건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다.


    어디에도 몸 붙일 곳이 없다고 한탄하는 분들이 있다. 그런데 몸 붙일 곳이 없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모든 곳은 잠시 머무는 곳이며 일시적이니 말이다. 어느 곳도 어떤 관계도 절대적이지 않다. 평생을 마음 놓고 지낼 수 있는 곳은 세상에 없다. 몸과 마음을 내려둘 자리가 필요하다면 새로운 곳을 찾거나 지금 있는 곳이 조금이라도 마음 편한 곳이 되도록 고민하는 수밖에 없다.


    지금 있는 곳에서 꽃피우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은 ‘지금 있는 곳’과 ‘나 자신’이 절대적이라는 착각에서 비롯한다. 남들의 생각을 무작정 받아들여서 그저 지금 있는 곳에서 꽃피우기 위해 노력하라는 건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말이 되지 않는다.


    지금 자리에서 꽃피우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방법을 달리하면 드물게 꽃이 피기도 한다. 이 정도의 마음가짐으로 지금 있는 곳에 머무르면 충분하다.


    세상의 정보는 대부분 없어도 그만

    나 자신을 들여다보려면 ‘교양’이 필요하다. 이렇게 말하면 “책 읽으며 공부하는 게 좋을까요?”라고 묻기도 하는데, 그런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교양은 흔히 말하는 정보나 지식과는 다르다. 학교를 어디까지 나왔고 책을 얼마나 읽었는지 교양과 별 상관이 없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것이 바로 교양이다.


    왜 교양이 있어야 하는가. 어떤 문제를 생각할 때 밑바탕이 되는 가치관을 갖기 위해서다. 나에게 세상은 어떤 곳인가? 나와 세상은 어떤 관계인가? 가치관이 서야만 세상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 그러자면 나에게 필요한 정보를 찾아서 교양을 길러야 한다. 이때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있다. ‘정보’‘지식’ ‘지혜’ ‘교양’이 모두 다르다는 점이다.


    짧게 정리하면 이렇다. 먼저, 세상에 있는 ‘정보’의 99퍼센트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나에게 필요한 정보는 단 1퍼센트에 불과하다. 가려낸 1퍼센트의 정보가 ‘지식’이 된다. 지식을 고민에 직접 활용하면 ‘지혜’가 된다. 그러니 지혜가 있다는 건 스스로 가려낸 지식을 삶에 어떻게 녹여내면 좋을지 안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혜가 생기면 교양이 쌓이고, 교양이 쌓이면 가치관이 길러지는 거구나!’ 하고 섣불리 생각하면 안 된다. 가치관이 없으면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나에게 꼭 필요한 1퍼센트의 정보를 가려낼 수 없다. 말하자면 ‘정보→교양→가치관’은 하나의 순환 고리인 셈이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 먼저 눈앞의 문제를 외면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부딪치고 고민해야 한다. 자신의 문제를 올바로 바라보고, 상황을 헤쳐나가고 싶다고 진심으로 생각할 때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 그러자면 제대로 부딪치고 몰두해야 한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간절히 바랄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에게 꼭 필요한 정보를 가려낸다. 물론 그런다고 상황이 바로 바뀌지는 않는다. 정보를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까,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면 좋을까, 이리저리 고민하다 보면 ‘정보’가 ‘가치관’으로 바뀌는 선순환이 시작된다.


    조금 느릴 수도 있다. 문제를 잘못 짚으면 정보에서 가치관으로 이어지는 순환이 잠시 멈칫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순환은 느릴지언정 꾸준히 이어질 것이다. 그러다 보면 가치관은 자라나기 마련이다.



    때로는 꿈과 희망도 짐이 된다

    사람에게는 좌절이 필요하다

    사람에게는 좌절이 필요하다. 좌절감을 맛보면 무엇이 나에게 이익인지 저울질하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다.


    ‘욕심을 채우고 싶다.’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다.’

    ‘기왕이면 나에게 득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우리는 평소에 이익을 얻으려는 마음으로 움직인다. ‘이렇게 하면 잘될지도 몰라’ ‘이게 나에게는 더 좋겠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번 실패를 맛보면 이리저리 따져보던 마음이 싹 가신다. 생각대로 되지 않거나 꿈이 산산이 조각나면, 이익을 따져가며 행동하기보다는 나에게 정말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된다.


    나에게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 깨달으면, 노력이 좋은 결실로 이어질지 알 수 없더라도 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이런 이에게는 잠재력이 있다. 그러니 꿈이 손에 잡히지 않아도 낙심할 것 없다.


    꿈와 희망이 오히려 인생의 걸림돌이 될 때도 있다. 꿈이든 희망이든 어찌 보면 마약이나 다름없다. 이루어질 리 없는 꿈을 하염없이 붙들고 있는 건 ‘꿈’이라는 환상이 걷혔을 때의 현실이 두렵기 때문이다.


    꿈과 희망을 꼭 붙들고 있기가 힘겹지는 않은가? 계속 힘겹게 붙들고 있을 텐가, 아니면 놓아버리고 편해질 텐가. 꿈이라는 말 뒤에 가려진 속마음을 한 번쯤은 유심히 살펴야 한다.



    감정에 휘둘려도 괜찮다

    화는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는다

    누군가가 나에게 화를 낸다면 그저 이 사람이 원하는 게 뭘까를 생각하자. 상사가 “그래서 결론이 뭔데!” 하고 부하직원에게 큰소리를 냈다고 치자. 보고에 핵심이 없다고 지적했을 뿐이니 다음부터는 두괄식으로 보고하면 된다. 성미급한 상사가 얼마나 예민하게 굴든 지적받은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이 사람은 화를 내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는구나’ 하고 불필요한 분노는 흘려버리면 된다.


    화가 나는 건 내가 옳다는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옳은 것’은 모호한지라 늘 변하기 마련이다. 이 사실을 알면 잠시 욱할지언정 분노에 휩싸일 일은 없다. 내가 늘 옳다는 믿음은 불교와는 거리가 먼 마음이다. 불교에서 분노를 경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괴로움을 낳고 깨달음을 방해하는 세가지 번뇌인 ‘삼독(三毒, 탐貪‧진瞋‧치痴 즉, 탐욕‧분노‧어리석음)’ 중 하나로 분노를 꼽을 정도다. ‘내가 또 화를 냈구나’하고 깨달았다면 내 생각이 정말 옳은지 짚어보아야 한다.


    세상 모든 것은 일정한 조건에서만 성립한다. 분노로 번뇌하고 싶지 않다면 이 생각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한다. 덧붙이자면, 화를 빨리 가라앉히려면 화가 나는 사람에게서 물리적으로 멀어져야 한다. 이왕이면 일어서거나 의자에 앉기보다는 바닥에 몸을 붙이고 앉으면 효과가 좋다.


    질투는 착각이 낳은 감정

    우리는 화 못지않게 질투라는 감정에도 괴로워한다. 동경하고 부러워하는 마음은 ‘와, 멋있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될 수 있을까?’ 하는 감탄에서 그친다. 그런데 질투심은 내가 가져야 마땅한 것을 남이 부당하게 취했다고 착각할 때 생긴다. 원래는 내가 저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나 대신 남이 차지했다고 생각하니 마음에 파도가 친다.


    질투의 밑바탕에는 소유욕이 있다. 본디 내 것인데 부당하게 빼앗겼다는 생각 말이다. 이를테면 평범한 직장인은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와 소프트뱅크의 회장 손정의에게 질투심을 느끼지 않는다. 아무리 야구를 좋아해도 세계적인 야구 선수를 질투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처럼 평범한 이들은 애초에 그들과는 발 딛고 선 곳이 다르니 우러러볼 수는 있어도 질투하지는 않는다.


    연인이 나에게 쏟아야 할 애정을 엉뚱한 데에 쏟는다는 생각이 들 때, 내가 차지해야 할 지위를 경쟁자가 먼저 차지했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질투한다. 경쟁에서 뒤처지더라도 상대가 나의 진정한 경쟁 상대라 여기면 존경심이 앞서지, 질투하지는 않는다. 더욱 정진해야겠다고 스스로를 가다듬을 뿐이다.


    질투는 여러 감정 중에서도 좋을 것 하나 없는 감정이다. 우러르고 부러워하는 마음은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켜서 생산적인 행동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질투심에 사로잡히면 내 것을 부당하게 빼앗겼다는 생각에 갇혀 빙글빙글 돌 뿐이다. 어찌 보면 증오심보다도 결이 나쁘다. 증오심은 몸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어 때로는 좋은 결과를 불러오기도 하지만 질투는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 뿐이다. 질투심을 이기지 못해 하는 행동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 하기는 힘들다.


    질투심 뒤에는 비뚤어진 소유욕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나를 돌아보지 않고서는 질투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질투가 난다면 정말로 부당한 상황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자.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 실력대로 상황이 흘러간 경우가 대부분이다.


    ‘저 자리에는 내가 있어야 하는데.’


    내 생각은 이렇지만 인사 담당자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


    ‘저 사람은 나를 좋아할 수밖에 없어.’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정작 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더 마음이 갈 수도 있다. 당장은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차분히 돌아보면 그렇지도 않다. 내가 세상을 잘못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질투심을 내려놓으려면 내 생각이 착각일 수도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제야 질투는 불필요한 감정이 된다. 질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결이다.



    죽음을 향해 매일을 산다는 것

    나에 대한 집착 내려두기

    언젠가 나이 지긋한 스님이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큰 병으로 병실에 누워 있는데 문득 ‘여기에서 이렇게 죽는 건가’ 하는 생각과 함께 깊은 공허함이 밀려와 당장이라도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는 거다. 지금껏 사람들에게 했던 설교는 다 무엇이었나 싶었다고 회상하는 모습을 보며 참으로 정직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공허함을 느낀 스님은 문득 마음이 동해 오랜만에 좌선을 했다고 한다. 선승에게 좌선이 수행의 기본이라는 점은 두말하면 잔소리. 그러나 수술을 마치고 건강을 회복 중이던 스님은 좌선을 할 만한 몸 상태가 아니었다. 건강을 어느 정도 되찾고 나서야 이제는 괜찮겠다 싶어 좌선을 한 것이다. 좌선을 했더니 지금껏 마음을 뒤덮었던 공허함이 눈 녹듯 사라졌다.


    스님은 감회에 젖어 말했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치다. 좌선을 하면 생각이 멈추고 마음을 돌아보게 된다. 그러니 죽음이 공허하다는 허탈감도 자연히 사라진다. 역시 좌선은 죽음 앞에서도 쓸 만하구나.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새삼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이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는 건 주어가 ‘나’일 때뿐이다. ‘내가 죽는구나!’이렇게 실감할 때 우리는 비로소 죽음에 대한 공포와 맞닥뜨린다. 이때 살펴야 할 것은 ‘죽음’이 아니다. 아무리 고민해도 죽음의 실체를 알 수는 없다. 유심히 보아야 할 것은 바로 ‘나’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뛰어넘으려 하지 말고, 두려움에 떠는 나 자신을 지운다. 죽음이 두렵다면 ‘죽음’이 아닌 ‘죽음을 두려워하는 나’를 서서히 지워야 한다. 이게 바로 불교의 발상이다.


    스님에게는 좌선이라는 방법이 있지만 평범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나’를 지우기가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스님이 아니어도 좌선은 할 수 있다. 다만 처음에는 전문적인 지도가 필요하고 수련을 쌓아야 한다. 하지만 좌선을 하지 않아도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자면 죽음을 넘어서려 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


    죽음을 받아들이려면 자신을 활짝 열어두어야 한다. 나 자신을 활짝 연다는 건 무엇인가? 자신을 애지중지하는 걸 그만두는 거다. 이익을 좇아 행동하지 말고, 내가 아닌 남을 위해 움직이자. 사람은 환갑을 넘으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나이 60을 넘기면 자식은 어엿한 어른이 되어 제 몫을 한다. 더는 부모의 손이 필요치 않다. 나이가 꽉 차서 일을 그만두면 업무적으로 기대받을 일도 없다. 이렇게 마음을 다잡으면 ‘나’와 ‘나의 인생’에 매달릴 필요가 더욱이 없다. 이 한 몸 없어도 곤란해할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나를 고집하지 말고 남을 먼저 생각하면 된다.


    아직 앞날이 창창한 이들은 와닿지 않겠지만, 나이를 먹는다는 건 있으나 없으나 별 상관없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아이도 다 크고 일에서도 손을 떼고 나면 가까이해도 득 볼 것 없는 나를 과연 누가 필요로 할까? 배우자의 속마음은 차치하고서 말이다. 하고 싶은 일이 많더라도 나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어떤 가치가 있을지 살피지 않으면 누군가가 피해를 볼 수도 있다. 내가 하려는 일이 남들에게 환영받을 만한지 돌아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자선사업이나 자원봉사를 하라는 게 아니다. 결과적으로 그리될 수도 있겠지만 할 수 있는 일을 능력껏 하면 된다. 이를테면 땅에 떨어진 쓰레기를 주워보자. 또는 난처한 상황에 처한 이에게 도움을 베풀자. 바람직한 일 중에서도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을 해보는 거다. ‘조금은 도움이 되겠지’하는 생각이면 충분하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나는 오소레 잔산과 후쿠이현에 있는 절의 주지를 맡고 있는데, 후쿠이현 레이센사에 보시하는 A씨의 이야기다. 속세를 떠나 한적한 생활을 하는 그는 손재주가 대단하다. 염주 만드는 솜씨와 화도 솜씨는 말할 것도 없고, 꽃꽂이 솜씨는 남을 가르칠 정도여서 사람들의 부탁을 받아 주민회관에서 무료로 화도 교실도 운영하고 있다. 어느 날 화도를 가르치며 수강료를 받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좋아서 하는 일이니 돈 같은 건 필요 없어요.”


    그는 목공예도 잘해서 절에서 쓸 의자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절에 사람들이 모일 때 쓸 의자가 필요할 것 같아서 만들었다는 거다. 알 만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A씨 의자’라고 부르며 애지중지한다.


    물론 사람들이 고마워하면 그도 뿌듯하겠지만 칭찬받고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으로 하는 일이 아니었다. 화도를 가르치고 의자를 만드는 일이 그에게는 삶의 보람을 느낄 만큼 거창한 일도 아니어서,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하는 듯했다. 하지만 매일매일의 활력소는 되었으리라. ‘나도 아직 쓸데가 있네’ 하는 정도면 충분하다.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싶은 일을 담담히 해나가자. 그러면 이해득실에 얽매이지 않는 부드럽고 따스한 관계가 피어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이를 먹고 기력을 다하면 ‘슬슬 내 인생도 문을 닫아야겠군’ 하고 뒤로 물러서자. ‘그래도 열심히 잘 살았네’ ‘괜찮은 인생이었어’ 하고 돌아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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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