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가 바꾼 세상
 
지은이 : 후루타치 코스케(역:마미영)
출판사 : 에이지21
출판일 : 2022년 08월




  • 석유, 천연가스를 둘러싼 에너지 전쟁, 곡물 파동에 의한 식량 위기, 갈수록 더해가는 이상 기후 현상 등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들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초대한 이 문제들을 ‘에너지’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향후 인류가 나아갈 길을 조명합니다.


    에너지가 바꾼 세상


    양의 역사를 찾아 떠나는 여행

    불 에너지

    여러분은 불이라는 존재를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가? 물체에 열을 가하면 불이 붙는다. 이를 자연의 섭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이는 정확하다고 할 수 없다. 지구의 오랜 역사 속에서 일상적으로 불이 존재하는 환경은 비교적 최근에야 가능해진 일이다. 불을 붙이려면 조건이 있다. 연료, 산소, 열이다. 보통 연소의 3요소라고 불리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46억 년 전에 탄생한 지구에 처음부터 풍부하게 존재했던 것은 의아하지만 열뿐이었다. 땅에는 연료가 될 만한 재료가 거의 없었고 하늘에도 대기에 산소가 존재하지 않았다. 원시 지구를 뒤덮은 대기는 지구 내부의 가스 성분이 화산 등을 통해 분출된 것이어서 이산화탄소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즉 지구상에 불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존재할 수 없었다.


    지구상에 불이 탄생한 사건과 관련이 있는 최초의 변화는 아직도 그 과정이 학문적으로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40억 년 전 심해 밑바닥에 있는 열수분출공 부근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정된다. 바로 우리의 조상, 생명의 탄생이다. 생물은 탄소를 주된 요소로 하는 유기화합물로 잘 타는 성질이 있다. 건조해서 수분이 빠지면 식물이건 동물이건 하나같이 잘 타는 이유는 정확히 말해서 우리는 모두 탄소로 이루어진 유기화합물이기 때문이다.


    남은 한 가지 요소인 산소 역시 생물에 의해 공급되었다. 생명의 요람인 바닷속에서 진화를 위해 광합성을 하는 박테리아가 탄생한 것이다. 36억 년 전으로 추정된다. 박테리아는 광합성을 통해 이산화탄소를 체내에 흡수해 탄소를 고정하는 한편 불필요한 산소를 배출했다. 결과적으로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량이 서서히 줄어들고 산소량이 늘어났다.


    이렇게 지구 탄생으로부터 10억 년이 흘러 드디어 연소의 3요소가 얼추 갖춰졌다. 하지만 지구에서 일상적으로 불을 볼 수 있게 되기까지는 더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끝없이 연소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양의 산소와 잘 타는 연료의 확보, 다시 말해 바닷속에 사는 유기화합물인 생물을 좀 더 건조한 육지로 유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실현하는 데는 대기 중 산소 공급량의 비약적인 증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윽고 육지에 진출한 식물이 지표면을 뒤덮으면서 연료, 산소, 열이라는 제대로 된 연소의 3연소가 갖춰졌고 지구 곳곳에 불이 생겨났다. 지구 탄생으로부터 42억 년 후 지금으로부터 불과 4억 년 전의 일이다.


    이렇게 지구에 불이 탄생하기까지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탄소로 이루어진 일종의 생물인 우리 인류와 생물의 연소로 발생하는 불 사이에는 깊은 관계가 있음을 깨닫는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보게 되는 불은 대부분이 생물의 서글픈 마지막 모습이다. 어쩌면 생명이자 생명의 화신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종교나 주술을 통한 영적 의식에서 불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인류가 오랜 옛날부터 불의 본질을 잘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뇌의 본성: 끊임없이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현대 사회의 인류는 화석 연료 등을 통해 대량의 에너지를 만들어 스스로가 이룩한 문명사회를 지탱하고 있다. 이런 에너지 대량 소비 사회를 만든 주체는 다름 아닌 고도로 발달한 인간의 두뇌다. 전체 체중의 2.5%에 불과한 우리의 뇌는 체내에서 소비하는 기초 대사량의 20%를 사용한다. 한편 평균적인 영장류는 기초 대사량의 13%를 사용하는 데 그친다. 인류의 두뇌가 얼마나 대량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는가를 알 수 있다.


    인류의 두뇌는 요리를 통해 고도로 발달해왔다. 건강을 위해 생식을 권하는 사람도 드물게 있다고는 하나 체중이 많이 빠져서 오래 유지했다는 사례는 보고된 바 없다. 가열이라는 외부 에너지의 추가 공급이 없으면 우리는 몸을 보전하는 일조차 어려워진다. 인류가 자랑하는 우수한 두뇌는 가열이라는 형태로 불이 가진 에너지를 간접적으로 취함으로써 자연의 생식이 허용하는 뇌 크기를 훨씬 뛰어넘는 크기까지 비대해졌다. 다시 말해 우리의 뇌는 본질적으로 더 똑똑해지고 싶어 하고 그러기 위해서 더 많은 에너지를 바라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인류가 만들어낸 문명사회를 살펴보자. 뇌의 본질이 보이지 않는가. 바로 에너지 소비량을 늘여서 발전해 가는 사회 말이다. 특히 산업혁명 이후 우리 사회는 화석 연료 등의 에너지를 우리의 몸이 아닌 기계에 ‘먹여서’ 증기기관이나 자동차를 움직이고 전기를 만들어 전자 기기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최신 대형 발전소, 즉 거대한 인공 위장이 공급하는 대량의 에너지는 정보 처리 기계, 쉽게 말해 인공두뇌의 기술 혁신에도 적극적으로 사용되어 마침내 인간의 두뇌를 뛰어넘는 인공지능의 탄생을 눈앞에 두기에 이르렀다.


    끝없이 에너지를 취하려는 욕구는 우리의 뇌가 가진 본성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룩한 눈부신 문명사회는 소화 가능한 음식을 화석 연료와 우라늄 광물에까지 확대함으로써 소화기관이 흡수 가능한 에너지 용량을 비약적으로 늘려 뇌를 한층 거대하게 만든 괴물로 여겨진다. 이 괴물은 분명 뇌에 집중적으로 투자해온 인류 진화 역사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렇듯 투입된 외부 에너지에 의존하는 ‘뇌화(腦化)’가 점점 더 심해지는 사회에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우리 앞에 놓인 질문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인류와 불의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드러나는 에너지 문제의 근본적인 물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에너지로 뒤덮인 인류

    19세기까지 인류는 태양 에너지와 자연의 질소 고정 능력의 범위 안에서 생산된 식량을 소비하며 삶을 영위해왔다. 그 속에는 자연이 정한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하버-보슈법이라는 기술이 탄생하면서 인류는 자연의 한계를 너무나 쉽게 뛰어넘었고, 유한한 화석연료를 간접적으로 섭취해 살아가는 형태로 이렇게까지 인구를 늘려 왔다.


    캐나다 매니토바 대학교의 바츨라프 스밀 명예교수에 따르면 하버-보슈법이 발명되지 않았다면 현재 이 세상에 사는 인구의 5명 중 2명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달리 말하면 현재 살아 있는 모든 인류의 몸의 40%를 하버-보슈법으로 고정된 질소 원자에 의존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요컨대 현재를 사는 우리는 누구나 하버-보슈법의 혜택을 받고 있다.


    인류는 지금까지 다섯 차례에 걸친 에너지 혁명의 역사를 만들어 왔다. 제1차 에너지 혁명에서 불을 사용하는 법을 익히며 시작된 에너지 획득의 역사는 불 조리를 통해 뇌가 비대해지면서 속도가 빨라졌다. 이어서 농경 생활을 하게 되는 제2차 에너지 혁명이 일어났고, 대지로 쏟아진 태양에너지를 독점해 잉여 식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했으며 도시를 만들고 문명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증기기관이라는 에너지 변환 기계의 발명으로 제3차 에너지 혁명이 일어나 육체가 가진 한계를 극복했다. 화석 연료를 태워 대량의 에너지를 흡수함으로써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거나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전기의 체계를 찾아내 사용법을 익히면서 제4차 에너지 혁명에 접어들었고, 에너지 변환의 자유와 더불어 에너지를 사용하는 장소의 제약까지 극복했다. 또 발전소와 송배전망의 정비로 에너지 접근성이 좋아졌으며, 일상적인 에너지 변환 기계로 다양한 전자제품을 흔히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하버-보슈법이 발명되면서 인공 비료가 탄생하는 제5차 에너지 혁명이 일어났고, 인공적인 에너지로 농작물을 기르는 농업의 공업화를 추진해 압도적인 양의 에너지를 공급함으로써 식량 생산이 가진 자연의 한계를 뛰어넘기에 이르렀다.


    인류는 5번의 에너지 혁명을 통해 놀라운 규모의 에너지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존재가 되었다. 인간의 완력이나 각력을 대신하는 동력은 현격한 차이의 힘을 장기간 안정적으로 뽑아내는 기계가 대신했다. 내로라할 두뇌마저도 전기를 이용한 정보 처리 기술의 힘으로 처리 능력이나 기억력이 대폭 보강되었다. 이렇듯 외부 육체와 외부 두뇌의 도움을 받고 사는 우리는 이제 인간을 초월한 존재, 즉 초인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뇌는 성장 과정부터가 에너지를 얻는 데 무척이나 탐욕스러웠다. 탐욕은 종 보존에 필요한 식량을 훨씬 웃도는 에너지를 얻은 오늘날에도 전혀 쇠퇴하지 않았다. 더 똑똑해지기 위해서 끊임없이 에너지를 요구하고 있다. 이는 모든 생물 중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우리의 뇌가 가진 욕구는 동력 기계나 정보 기술과 같은 외부 육체, 외부 두뇌를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자연이 정한 질소 고정량의 한계를 벗어나 대사 활동을 유지하는 식량까지도 에너지로 뒤덮어 버렸다.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는 이제 자신의 존재까지도 에너지의 대량 소비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기후 변화나 원자력 발전과 같은 에너지 문제를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를 반성하고 존재 의의를 고찰하는 일이기도 하다. 어째 됐건 하버-보슈법이 없었다면 나나 여러분이라는 실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에너지 문제는 깊이 파헤치고 들어가면 이렇게나 철학적이다.



    지식을 찾아 떠나는 여행

    에너지 흐름이 만들어내는 것

    에너지 문제를 철학적으로 바라보다

    각각의 에너지 절약 기술이 사회 전체의 에너지 소비량을 늘리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면 지식의 축적이 바탕이 된 현대 문명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에너지 소비량을 계속해서 늘려 나가야 한다. 하지만 유용한 에너지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이런 사회는 여러 고대 문명이 그랬듯 언젠가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지속 가능한 사회를 실현하려면 에너지 문제를 어떤 자세로 바라봐야 할까.


    첫 번째는 기술 혁신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순진한 기대를 갖지 않는 것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정보통신 기술의 일취월장을 눈으로 직접 보고 있는 탓에 어떤 문제든 마지막에는 기술 혁신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리라 착각한다. 에너지를 창조하는 기술 내지는 에너지의 질적 저하를 역전시키는 기술은 전부 실현 불가능하다. 게다가 에너지 절약 기술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일한 기술 혁신 신앙을 버리고 에너지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이것이 에너지 문제를 생각하는 첫걸음이다.


    에너지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이는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왜 인류가 에너지 소비량을 증가시켜 왔는가를 생각해 보자는 뜻이다. 늘린 이유를 안다면 줄이는 방법의 힌트도 얻을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아는 일, 즉 철학적인 태도로 바라본다는 뜻이다. 인류는 왜 에너지 소비량을 늘렸을까. 앞에서 살펴보았듯 불의 사용으로 시작된 다섯 차례의 에너지 혁명을 통해 인류는 에너지 소비량을 놀라울 만큼 증가시켰다. 나는 각각의 과정에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키워드는 ‘시간의 단축’이다.


    제1차 에너지 혁명이 된 불의 사용은 ‘요리’라는 형태로 음식의 저작시간을 현저히 줄였다. 식사 시간을 극적으로 줄이는 데 성공한 인류는 과거 식사에 할애한 시간을 옷을 짜거나 도구를 만들면서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제2차 에너지 혁명인 농경 생활로의 이행은 잉여 식량의 창출로 식량 생산에 종사하지 않는 사회 지배층이나 야금 등 특수 기능을 가진 장인층을 낳았다. 혹독한 농사일을 일부 인력에 집중시키고 나머지 사람이 얻은 자유 시간이 문명 발전의 동력이 되었다.


    제3차 에너지 혁명인 실용적인 증기기관의 발명은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되었고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는 에너지 대량 소비 사회의 문을 열었다. 광산이나 공장에 설치된 증기기관은 똑같은 시간에 사람이나 소 말의 몇 십 배나 되는 일을 해내는 데다가 지쳤다고 쉬는 법도 없었다. 개량으로 크기가 작아진 증기기관을 교통기관에도 탑재할 수 있게 되면서 증기선, 증기기관차가 등장했고 사람들이 더욱더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동력을 가진 교통기관의 등장과 보급으로 사람들의 이동 시간이 크게 줄어들고 이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제4차 에너지 혁명인 전기 이용은 거리라는 한계를 없앴다. 모스 부호로 유명한 전기통신 기술은 19세기 중반에 고속 정보 전달 수단으로 한 세기를 풍미했고 각 지역의 철도 노선에는 경쟁하듯 전신선이 깔렸다. 전기통신 기술은 이후에도 진화를 거듭하며 컴퓨터와 같은 정보 처리 기술의 발전과 하나가 되어 현재까지도 정보통신 네트워크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다. 이렇게 인류는 거리의 장벽을 없애고, 직접 가보지 않고도 세계 각지의 정보를 얻고 의사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복잡한 대량 정보까지도 컴퓨터를 이용해 매우 짧은 시간에 처리할 수 있다. 이러한 움직임 역시 시간 단축과 관련이 있다.


    제5차 에너지 혁명인 인공 비료의 발명은 자연이 정한 질소 공급의 한계를 산산이 깨트렸다. 하버-보슈법의 발명으로 토양의 비옥도를 단시간에 높이는 식량 대량 생산 수단을 손에 넣은 인류는 트랙터와 같은 경작 기계의 도입, 컨트리 엘리베이터라고 불리는 대규모 곡식 저장 시설의 가동 등 차근차근 농업의 공업화를 추진해 생산 효율을 높여나갔다. 이와 더불어 영양가가 높은 옥수수가 싼값에 대량 생산되면서 소고기 등 식육 생산에 드는 시간도 현저히 줄었다. 그 결과 인류가 식량 생산에 소비하는 총 시간이 훨씬 짧아졌고, 창출된 잉여 시간은 정보통신 산업 등 새로운 산업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이렇게 인류 활동의 발자취를 정리해 보면 인류의 역사는 ‘시간을 단축하는 일’, 바꿔 말해 ‘시간의 빨리 감기’에 가치를 둔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이는 인류의 가치 판단 기준이 얼마나 두뇌에 편중되어 있는가를 보여준다. 우리는 늘 육체적 부담을 최소화하며 최대의 성과를 얻고자 한다. 에너지를 얻으려는 뇌의 끝없는 욕구가 시간을 앞당기는 결과를 낳았다.


    시간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

    하나의 생물이라고 했을 때 인간의 시간은 이미 완전히 어긋나 있다. 지금보다도 훨씬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살도록 만들어진 몸과 그것과는 무관하게 그저 시간 단축에만 혈안이 된 극단적으로 비대해진 뇌 사이에서 말이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하면 뇌 주도의 사고법에서 벗어나 조금이라도 몸을 생각하는 사고법을 실현할 수 있을지를 분명히 의식해야 한다. 자신의 몸이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인간의 심층 심리를 파악할 수만 있다면 시간 단축을 지향하는 생활 습관도 개선될 여지가 있다.


    전 세계적으로 좌선이나 요가, 달리기의 오랜 인기는 우리가 몸의 시간으로 되돌아가려는 잠재적 욕구를 가졌음을 보여주는 증거일 것이다. 사회의 시간을 조정하는 일이 쉽지는 않겠으나 그렇다고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에너지 문제처럼 사회의 바람직한 모습이 요구되는 복잡한 문제는 흑백 논리식의 질문을 세상에 던져보았자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뇌가 주도하는 시간 인식 문제를 중심에 두고 몸이 내는 소리 없는 비명에 귀를 기울여 개인과 사회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을 조금이라도 바꿔 나갈 수 있도록 모두가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한다. 시간 단축에 큰 가치를 부여하는 사회에서 에너지 소비를 억제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천천히 걷는 일에 더 큰 가치를 발견할 줄 아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여행의 목적지

    나아가야 할 미래

    지금까지의 번영을 가능케 한 사고방식과 결별하고 자기 의지로 새로운 미래를 구축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꿈꾸는 미래의 모습을 다시 새롭게 상상해야 한다. 지금은 지향하는 새로운 여행의 목적지를 명확히 한 다음 목적지에 다다르는 길을 모색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새로운 목적지의 설정은 현재 당연시되는 사고를 의심하는 데서 출발한다.


    당연한 생각을 의심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지만 2020년에 이를 쉽게 만든 큰 사건이 전 세계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바로 폭발적인 감염을 일으킨 코로나 바이러스다. 이로 인해 사람들의 이동이 엄격히 제한되었고 직장에서는 재택근무가 강하게 권고되었으며, 학교는 오랜 시간 휴교에 돌입했다. 레스토랑이나 헬스장 등의 상업시설은 휴업하거나 시간을 단축해 운영되었고 전 세계 도시란 도시에서 사람들의 왕래가 끊어졌다. 그렇게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여겼던 일상이 갑자기 바뀌어 버렸다. 이렇듯 장기에 걸쳐 일상이 바뀌면 코로나 이후의 세계가 그 이전과 완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온다고 상상하긴 어렵다. 그렇다면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지금까지의 일상을 적극적으로 바꿀 기회의 싹이 움트고 있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코로나 팬데믹은 인류에게 여러 가지 깨달음을 주었다. 여기서는 그중에서도 인류가 나아가야 할 에너지의 미래를 그리는 데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두 가지 깨달음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 번째 깨달음은 이번 감염 사태로 전 세계가 경제적으로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위기에 취약한 운명 공동체인가가 명백해졌다는 점이다. 경제적 합리성을 추구해 탄생한 세계적인 생산과 소비 네트워크는 감염에 너무나도 무력했고 코로나 바이러스는 순식간에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갔다. 그렇게 세계는 대혼란에 빠졌다. 감염 확대를 방지하기 위해 각국은 국경을 봉쇄하고 외출 금지령을 발효하는 등 시민의 눈을 아랑곳 않고 사람의 이동을 전에 없는 수준으로 제한하기에 이르렀다.


    두 번째 깨달음은 이번 사태로 고사하지 않을까 우려될 만큼 전 세계적으로 동시에 경제 활동이 마비되었음에도 감소한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파리 협정의 목표 수준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2020년 4월과 5월의 급격한 경제 활동의 억제는 지속 불가능하다는 점도 밝혀졌다. 이 시기에 전 세계에서 행해진 반강제적인 매장 폐쇄, 각종 이벤트 중지는 매장 운영자나 이벤트 주최자에게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주었을 뿐 아니라 식사나 쇼핑, 이벤트를 자유로이 즐길 수 없게 된 일반 소비자에게도 정신적으로 큰 억압이 되었다. 이와 같은 극단적인 쇼크 요법으로는 꾸준한 이산화탄소 배출 억제 활동이 요구되는 기후 변화 문제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점이 시사되었다. 이는 경제와 환경을 이율배반적인 것으로 보고 어느 한쪽만 과도하게 우선해서는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번 코로나 팬데믹에는 배울 점이 많다. 특히 앞서 말한 과도한 집중화의 재검토, 경제 활동과 환경 보호의 균형 확보가 앞으로의 미래를 점치는 데 중요한 관점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경제와 환경의 위치를 바꾸는 사고방식이야말로 코로나 이전의 당연함에서 탈피해 지속 가능한 사회로 이행할 수 있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누구든 실천할 수 있는 효과가 확실한 방법

    뇌를 매개하지 않고도 자연스레 몸이 움직이는 구체적이면서도 간단히 실천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는 절약이다. 사실 절약만큼 누구나 실천하기 쉽고 에너지 소비량의 억제 효과가 큰 방법은 없다. 최근 들어 경제 활동의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낭비를 허용하는 풍조가 있다. 그것은 자본의 신의 폭주를 용인하는 경제 성장 지상주의이므로 환경 보호와 경제 성장의 균형을 현저히 깨트리는 요인이다. 게다가 기존의 자본주의 정신에도 위배된다. 원래 자본주의 정신이란 막스 베버가 밝힌 것처럼 금욕적인 프로테스탄티즘에서 비롯된 근면과 절약의 미덕이 바탕인 부의 창조다. 애초에 절약은 근면과 함께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실제로 절약은 매우 효과가 좋다. 절약을 에너지원의 하나로 보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물건을 오래 아껴 쓰고, 사용하지 않는 방의 불이나 에어컨을 끄고, 음식물 쓰레기를 줄인다. 이러한 낭비만 없애도 에너지 소비량 감축에 충분히 공헌하는 일이다. 에너지가 많이 드는 소고기를 먹다 남기는 일 따위는 벌이 내리는 일이니 절대 금지다.


    물론 절약한다고 해서 일이 다 잘되는 것도 아니고 과도한 절약이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래도 절약이 앞으로의 시대를 사는 하나의 키워드라는 점은 명백하다. 또 오해하지 않게 덧붙이자면 여기서 말하는 절약이란 10원이라도 싼 것을 골라 사는 일에 집착하라는 말이 아니다. 자본을 집약하고 대량 생산된 제품일수록 싸게 시장에 공급되므로 금전적인 절약에만 초점을 맞추면 자본의 신이 원하는 바대로 되고 만다. 절약 정신은 어디까지나 낭비를 멈추고 ‘아깝다’라고 생각하는 마음에 중점을 둬야 한다.


    에너지의 대량 소비로 유지되는 현대 사회의 모습을 바꾸기 위해서는 철학적인 논의를 통해 뇌의 성찰을 유도하는 식의 굵직한 대안뿐 아니라,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여서 누구나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소소한 대안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무엇이든 돈으로 환산하려는 태도나 아무렇게나 낭비하는 행동이 환경을 해친다고 입 아프게 말할 필요도 없이 그저 멋이 없는 일이 되면 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인류가 공업 제품을 만들기 위해 낮은 엔트로피 자원을 계속 소비하는 한 완전한 의미의 지속 가능한 사회는 도래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속 가능한 사회와 최대한 가까운 모습을 구현하기 위해 거듭 노력하고, 메울 수 없는 틈이 있다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거나 자연의 도움을 받아 고치며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인간의 활동에 끝이란 없다. 부단한 개선이 있을 뿐이다. 이야말로 인류의 조상이 불을 얻은 이래 우리 인류를 공전의 번영으로 이끈 길이자 앞으로도 계속 걸어가야 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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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