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병
 
지은이 : 나가이 요스케(역:박재현)
출판사 : 마인드빌딩
출판일 : 2022년 03월




  • 공감은 연대, 단합, 단일 등의 단어를 어우르는 만큼 힘이 센 관념입니다. 그러나 이 힘 센 공감이 과연 모두에게 공평할까요? 누군가는 희박한 공감에 목말라하지는 않을까요? 공감이라는 현미경으로 인간의 심리, 욕망, 그리고 세계를 들여다봅니다.


    공감병


    추루한 무일푼의 남성은 왜 공감을 얻지 못할까

    지금은 모바일 쇼핑이 대세

    다음의 두 사람 중 당신은 어느 쪽에 공감하는가?


    1. 길바닥에 힘없이 앉아 있는 남루한 차림의 60대 남성. 오래 굶주린 탓에 지금 당장이라도 죽을 것만 같다.


    2. 내전으로 가족을 잃은 10세 여아. 누더기 차림에 오랫동안 먹지 못해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다.


    선택하기 전에 잠깐 1의 남성에 대한 정보를 덧붙여보겠다.


    이 남성은 도박으로 모든 재산을 날렸다. 무일푼에 먹을 음식도 바닥난 상태라 무기력하게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음식을 먹지 못한 탓에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그는, 당신과는 정반대의 이념을 가진 커뮤니티 소속이다.


    자, 당신의 공감에 어떤 변화의 바람이 일었을까?


    이 세상에서는 일반적으로 2의 여자아이가 훨씬 더 많은 공감을 얻는다. 또한 1의 남성에게 앞서 말한 바와 같은 배경 정보가 보태질수록 그에 대한 공감은 확연히 줄어든다. 60세 남성도 10세 여아도 똑같은 인간으로서 같은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지만 무슨 까닭에서인지 이런 차이가 발생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 공감할까?

    현실 세계에서 2의 여자아이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다.


    실제로 나는 이제껏 소말리아나 예멘 같은 분쟁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얻은 공감의 농담에 의하여 개인의 인생이 180도 바뀌는 모습을 수없이 봐왔다.


    소말리아에서 투항병의 갱생을 돕는 활동을 했을 때, 갓 스물을 넘긴 호쾌한 청년과 만난 적이 있다. 왜소한 몸집의 그는 고향 마을의 친구들이 전부 테러 조직에 강제적으로 가입하면서 자신도 어쩔 수 없이 들어가게 되었다는 사연을 갖고 있었다.


    갱생시설의 작은 운동장에서 장난기 가득한 눈을 빛내며 얼굴 가득 웃음을 띤 채 열심히 축구를 하던 그의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는 자신을 받아준 커뮤니티 대표와도 금방 친해졌고, 그의 고단했던 과거도 제법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 좋은 모습으로 사회에 복귀할 수 있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갱생시설에서 자립한 아바스라는 서른 살의 청년은 매우 성실했지만 붙임성이 없고 과묵했다. 게다가 테러 조직에 가입한 이유가 ‘돈이 없는 백수라서’였다.


    나의 팀은 아바스를 사회에 복귀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그를 받아줄 커뮤니티를 찾는 건 쉽지 않았고 간신히 찾은 커뮤니티에서도 그는 그다지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그의 태도는 ‘돈 때문에 과격한 테러 조직에 가담했으니 언제든 돈이 떨어지면 다시 돌아갈 것’이라거나 ‘제법 나이도 있는데 성격도 별로 좋지 않다’는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결국 그는 정착하려던 마을을 떠나 다른 마을로 가야 했고, 현재 그곳에서도 여러 문제에 부딪히며 끊임없이 살아가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는 자신과 공통항을 갖고 있거나 비슷한 경험을 한 대상, 혹은 자신보다 약해 보이는 대상에 좀 더 쉽게 공감하는 경향이 있다. 나아가 자신이 공감하는 만큼 그 대상에게 정당성이 있다고 판단하기도 한다.


    공감의 초점이 맞춰지는 포인트는 무엇보다 대상자가 놓인 상황(앞의 문제에서는 당장이라도 굶주림으로 죽을 것 같은 절박한 상황)이 중요해 보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공감하는 사람의 감정적 반응은 그런 본질 외의 것(대상자의 속성이나 배경 같은)에 큰 영향을 받는다.


    혼자 힘으로 인생을 헤쳐나갈 수 없는 어린 난민 아이가 분쟁지역에서 고통받고 있다면 어떻게든 아이를 돕고 싶다는 감정이 공감을 강화시킨다.


    또한 보여지는 모습도 공감을 불러오는 매우 큰 포인트이다. 예컨대 2의 여자아이가 더 가련해 보이거나 지켜주고 싶을 만큼 연약한 모습을 하고 있다면 공감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한편 길가에 힘없이 주저앉아 있는 남루한 차림의 60세 남성이라면 부랑자나 노숙자로 인식되어 대개의 사람은 그와의 공통항을 발견하기 어렵다.


    하물며 돈이 없는 이유가 도박으로 모든 재산을 날렸기 때문이라는 배경 정보를 듣는다면 오히려 ‘자업자득 아닌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아가 자신과 반대 진영에 소속된 사람이라면 ‘꼴 좋다’며 고소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눈곱만큼의 공감도 싹트지 않는 게 당연하다. 감정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이성적으로(인지적으로) 생각해 봐도 ‘내가 공감할 만큼의 정당성이 없다’는 냉담한 결론이 기다릴 뿐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벌써 60년이나 살았는데 아무렴 어때.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은 어린아이가 더 중요하지’, ‘특별히 가여울 것도 없어. 이런 사람은 얼마든 있으니까’라는 생각에 그치기도 한다.


    하지만 추루한 노인이든 어린아이든 인간으로서 겪는 굶주림이라는 고통은 다를 바 없다. 개인이 갖춘 정보 처리 능력은 매우 미비하고 매번 똑같이 처리하기 힘들다. 그래서 애당초 모든 인류에 동등하게 공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결국 개개인이 가진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에 사로잡힐 때 공감은 특정인에만 해당되는 지향성을 갖게 된다.



    공감 중독이 불러오는 악순환

    자신의 인생이 자신의 것이 아닌 사람들

    우리 주변에는 ‘아무도 내게 공감해주지 않는다’며 분노에 치를 떨며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 있다.


    지나친 과장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공감에 지나치게 의존한 탓에 자신의 인생을 망쳐 치료가 필요할 만큼 심각한 상태에 놓이는 게 세계적인 현상이다.


    ‘자기 승인 욕구의 과도한 비대화’라고도 할 수 있다. 타자의 공감을 얻고 인정받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다. 따라서 불특정 다수의 공감을 얻고 인정받기 위해 SNS에 거짓말을 하고 허세를 부린다.


    자신의 신체를 SNS에 공개했다가 두 번 다시 평범한 일상생활로 돌아오지 못하고 파탄을 맞은 일부 여성의 사례도 드물지 않다.


    특히 일본의 젊은이 대다수는 무신론자라서 그런지 자기 존재나 의미를 종교 등 외장형 가치관에서 찾지 않는다. 철저히 자신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위험하다.


    나는 업무상 경건한 종교인(이슬람교 신자나 기독교 신자)과 자주 만나는데 그들의 근거 없는 자기 긍정감에 때때로 감명까지 받는다.


    그들은 ‘신이 나를 만드셨고, 나를 이끌어주신다’며 자기 존재에 대해 그다지 생각하지 않는다(내 소감은 그렇다).


    한편 이렇다 할 배경 없이 과도하게 연결된 지금, 타자와 자신을 비교하며 자신감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다.


    자신감을 가지든 그렇지 않든 나는 나일 수밖에 없지만, 궁극적으로 자신의 존재가 흔들리고 ‘나는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럴 때 어떤 식으로든 타인의 공감을 얻으면(의도적으로 유도했을 가능성도 있다), 공감은 독약처럼 작용하여 의존성이 높은 마약으로 변해간다.


    사이비 종교나 수상쩍은 모임 혹은 온라인 살롱이 다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슬금슬금 빠져들 가능성도 있다. 그 결과, 자신의 인생이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대학 시절, 나와 함께 NPO 활동을 했던 어느 후배는 학력 콤플렉스를 비롯한 많은 열등감으로 고민하느라 자신의 가치를 발휘하지 못했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췄는데 알고 보니 겉으로는 멋들어져 보이는 어느 다단계 사업 모임에 가입해 있었다.


    내게도 돈벌이가 될 만한 솔깃한 얘기를 들려주러 와서는 “이곳저곳 헤맸는데 마침내 내가 있을 곳을 찾았다”고 말해 인상 깊었다.


    모임 안에서 따스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모임의 울타리 밖에 대해서는 노골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울타리 밖에 있는 외부인의 고통에는 샤덴프로이데를 느끼고 그들의 행복에는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이것이 격차나 차별, 대립이나 분단을 불러오기도 한다.


    즉, 연결되어 있기에 도리어 동강이 나는 것이다. 세계화가 진행된 이 거대한 사회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안락한 공간을 선택한 결과로 서로 연결되기도 하지만 분단이나 대립 또한 커진다.


    과잉 동조에 뒤따르는 위험성

    지나치게 공감하면 공격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과도한 공감에 의한 폭주란, 피해자의 보복 감정에 너무 이입한 나머지 그들의 슬픔이나 분노를 제멋대로 대변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피해자와 전혀 관계없는 제3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것은 분쟁지역은 물론 그곳과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아이와 함께 걷던 어머니가 운전자의 전방주시 소홀로 교통사고를 당해 중증 장애가 남았다고 생각해보자. 그들이 느끼는 슬픔과 분노는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에 대한 배려가 충분하지 않다면 왠지 가해자의 권리가 더 잘 지켜지는 것처럼 보인다. 오래전부터 피해자에게는 보상받을 길 없는 고통과 떨쳐낼 수 없는 아픔이 강하게 남는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런 가운데 선량한 시민들이 SNS를 비롯한 인터넷상에서 자발적으로 피해자의 아픔과 슬픔에 깊이 공감하며 반응한다. ‘우리의 사법제도는 썩을 대로 썩었다. 이래서는 보상받지 못하는 피해자가 너무 가엽다.


    내게도 딸이 있는데 만일 내 딸을 죽였다면 죽음으로 복수할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가해자는 사회적으로 말살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가해자의 이름, SNS, 경력, 가족, 사진 등을 검색해 세상에 그대로 공개하여 사회적으로 매장한다.


    이때 생긴 연대로 인해 인터넷상의 익명 게시판에서 서로 분담하여 정보를 캐내기도 한다.


    피해자를 대신한다는 대의명분을 앞세워 당당히 몽둥이를 치켜든다. 피해 감정과 보복 감정에 강하게 공감한 결과, 폭력적이고 과격한 자위단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런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트위터에서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용어도 화제가 됐다. 누군가 어떤 잘못을 저지르면 대중 앞으로 끄집어내 실컷 두들겨패는 것이다.


    정치 영역에서라면 때로는 이 방법이 문제 해결을 위한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눈에는 잔인한 폭력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약자를 괴롭혀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정작 불특정다수가 힘을 합쳐 누군가를 공격하는 양상은 그저 오싹할 따름으로 결코 사회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 없다.


    또 ‘피해자가 먼저다’, ‘피해자가 중요하다’는 말도 이곳저곳에서 볼 수 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


    분명 당사자인 피해자의 의견이 중요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분쟁 해결과 평화 구축을 위해 일하고 있는 나는 그 중요성을 무겁게 의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한다. 당사자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다툼이라도 당사자 혼자서는 도저히 해결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친구나 선생님, 때로는 동네 사람들 이 나름의 역할을 맡아 해결에 나서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당사자의 목소리에 동조하는 건 간단하다. 그러나 그만큼 문제를 한층 심화시키거나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기도 한다. 때때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사자 외에 제3자가 필요하다.


    비판보다 위선이 좋을 때도 있다

    SNS를 통해 선동하고 선동당하는 세상에 진절머리가 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더는 SNS 같은 건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연대’나 ‘원팀(One Team)’처럼 단결을 호소하는 구호에 신물 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맹위를 떨치는 와중에도 ‘연대’나 ‘결속’이라는 키워드를 내세워 도쿄 올림픽·패럴림픽의 개최를 흔들림 없이 추진하는 모습을 보고 내심 혐오감을 느꼈던 사람도 많다.


    나 역시 달콤한 말들을 주장하면서 내집단에 없는 타자에게는 공격적이고 폐쇄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들을 보며 안타까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런 태도를 자각하지 못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곳저곳에서 타자의 공감을 얻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역력하기에 공감의 꺼림칙한 성질이나 공감의 결과로 돌아오는 반동에 피로감을 느끼는 것이다.


    트라우마나 슬픈 사건, 사고에 과도하게 공감할 때 발생하는 ‘공감 피로’나 ‘공감 탈진’도 최근 문제로 언급되고 있다. 과거보다 쏟아지는 정보의 양도 많아졌고 공감이 반응하는 대상과 접할 기회도 단연코 많아졌다.


    최근 감동 포르노라는 말이 화제가 되었다. 감동이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귀여운 사람을 기용하는 것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감동 포르노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저널리스트 겸 코미디언 스텔라 영이 만든 말이다.


    자신의 장애에 대한 사회적 시선의 문제를 깨달은 그녀가 “저는 여러분이 감동하는 대상이 아닙니다”라고 말한 테드강연은 한국을 비롯해 세계 전역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종일 배려에 대해 말하는 프로그램이 방영되지만, 오히려 위선과 해악의 말도 증가한 것 같다. 이런 현상은 공감을 부추기려는 노림수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는 경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비판은 때론 지극히 평범한 선의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평범한 선의에 대해 ‘사람을 돕고 싶다고? 그거 자기중심이고 위선이야’, ‘NPO 법인은 감성팔이를 하는 곳’이라는 식의 비난은 사회를 더 좋게 만드는 건전한 공감(이성적이고 인지적인 공감)도 현실 도피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과거 일본의 정치학자인 마루야마 마사오가 ‘위선의 권함’에서 우려했던 바대로 사회적으로 선한 모든 것에 무턱대고 비판을 쏟아내면 선과 악, 정의로운 것과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감각이 마비되고 만다.


    중요한 것은 문제의식을 이해하고 그 문제에 대해 어떻게 행동하느냐일 것이다. 결국 땅(문제)에 발을 딛고 서 있는 것이 중요하다.


    또 ‘행동하지 않는 선보다 행동하는 위선이 낫다’는 말처럼 사회적 선이 무릇 행동에 근거한다면 그 행동의 결과는 분명 클 것이다.


    어디까지나 감동 포르노에 찬반양론이 있다는 것이지 결코 선이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다. 결국 무슨 일이든 균형이 중요하다. 지금 세상에 더욱 포괄적인 시각을 가지는 것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바이다.



    과도한 동질성에서 피어나는 어긋난 공감

    ‘이해 불가’를 전제로 앞으로 나아가기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일본은 여전히 인종 다양성이 그리 높지 않다. 그럼에도 때때로 여러 불만이나 불안이 표출된다.


    문화나 언어에서 오는 차이도 있겠지만 재일외국인에 의한 범죄 등의 뉴스로 인해 부정적인 감정이 생기기도 한다.


    “당신이 있을 곳은 분명 있어요(그러나 내 주변에는 없어요)”라거나 “백인은 그나마 낫죠. 중국이나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은 안 됩니다”라는 마음이 드물지 않게 드러난다.


    냉정히 생각해 자신에게 기분 좋은 타자나 이문화는 괜찮지만 그렇지 않은 타자와의 공생이 죄다 행복하고 반짝이는 나날인 것은 아니다.


    생각하건대, 현실적인 실태를 뛰어넘어 ‘이미 그런 시대이니 다양성을 받아들이자’고 말하기보다 오히려 ‘우리는 다양성을 포용하기는 어렵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활 소음의 크기, 조망권에 대한 의식, 종교관, 습관, 사고방식 등등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나와 다르기 때문에 분명 어려운 부분도 있다.


    ‘이러다 우리의 고유문화가 무너지는 게 아닐까’ 하고 경계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이 착각이라도 ‘우리의 좋은 모습을 지키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의 생각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일본의 경우 향후 50년, 100년을 생각했을 때 난민이나 이주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파탄에 이를지도 모른다.


    생산성 향상을 가져오는 것이 다양성의 추구이고,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다양성을 꾀해야 하므로 이런 점을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다양성을 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존중하면서도 대립을 막기 위한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원래 다양성이란 자신에게 껄끄러운 사람의 존재까지도 인정하는 것이다.


    일본인끼리든 외국인에 대해서든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많다. 이런 현실을 똑바로 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이해할 수 있다고 믿기에 오히려 대립하고 분단하는 이 시점에서 내가 제안하고자 하는 것은 일단 우리는 ‘타자라는 존재를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전제로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어떻게 하면 타자와 원활히 공존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땅에 두 발을 굳건히 딛고서 괜한 문제의 발생 없이 서로의 생각을 대화로 나눌 수 있다.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생각하고 대화한다. 대화를 나눠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다시 대화한다.


    느닷없이 대립점에 마주하는 게 아니다. 특히나 심각한 주제에 대해서는 그런 부분부터 움직이는 게 의외로 문제가 잘 풀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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