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엽기인물 세계사
 
지은이 : 호리에 히로키(역:서수지)
출판사 : 사람과나무사이
출판일 : 2021년 11월




  • 저자는 이 책 서문에서 “인간의 마음만큼 난해한 것도 없다. 심해처럼 바닥을 알 수 없고, 그래서 공포스럽다”라고 말한다. 영웅과 위인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른바 위대한 인물로 추앙받는 인물일수록 표리부동한 경우가 더 많을 뿐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어떤 무섭고 엽기적이고 위험한 모습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라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저자는 마치 앞면은 아름답고 화려한데 뒷면은 추하고 복잡한 양탄자처럼 이중성과 양면성을 가진 인간의 본성에 주목해 흥미진진하고 충격적이면서도 나름대로 통찰력을 느끼게 하는 역사적 인물들과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엽기인물 세계사


    우리가 미처 몰랐던 ‘두 얼굴의 위인’ 이야기

    나이팅게일은 과연 ‘백의의 천사’였을까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플로렌스’는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플로렌스는 이탈리아 도시 피렌체의 영어 이름이다. 나이팅게일의 부모는 이탈리아에서 3년간 신혼여행을 즐기던 중 피렌체에서 태어난 나이팅게일에게는 ‘플로렌스’, 그보다 1년 먼저 파르테노페(현재 나폴리)에서 태어난 딸에게는 ‘프랜시스 파세너피’라는, 태어난 도시명을 딴 이름을 지어주었다.


    나이팅게일 가문은 빈부 격차가 뚜렷하던 당시 영국에서 상당한 재력을 보유한 집안이었다. 부유한 집안의 귀한 딸 나이팅게일은 그야말로 금지옥엽으로 사랑받으며 자랐고, 결혼 적령기가 되면 아버지 못지않게 부유한 자산가와 결혼해 자유는 없지만 풍요롭고 안락한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나이팅게일의 간호사가 되겠다는 선언에 충격받고 기절한 어머니와 언니

    스물네 살 나이팅게일이 “간호사가 되겠어요.” “병원에서 일하고 싶어요.”라는 결심을 밝히자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던지 그의 어머니와 언니가 충격받고 기절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당시 병원은 그야말로 하층계급을 위한 시설이었다. 상류계급은 얼마든지 필요할 때 의사를 자기 집으로 불러 시종처럼 부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에서 간호사는 존경받기는커녕 누구나 기피하는 비천한 직업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나이팅게일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간호사가 되어 ‘크림반도의 천사’라는 아름다운 별명을 얻으며 전 세계인에게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크림전쟁의 천사 나이팅게일은 과연 ‘백의의 천사’였나?

    아름다운 외모와 가냘픈 몸매의 젊은 나이팅게일은 군인 사이에서 오늘날의 아이돌 스타 같은 빛나는 존재가 되었다. 전장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군인들의 그를 향한 지지는 절대적이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크림전쟁의 ‘천사’였다. 단, 어떤 의미에서는 ‘백의의 천사’보다 ‘죽음의 천사’에 가까웠지만! 실제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충격적이게도 그가 목숨을 구한 환자 수보다 사망한 환자 수가 훨씬 더 많았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당시 죽은 환자 중에는 제때 적절한 응급조치와 제대로 된 치료만 받았다면 충분히 생명을 구했을 사람도 적지 않았다. 알고 보면 크림전쟁에서 간호사로서 남긴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업무 실적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크림전쟁 중 가장 많은 사망자가 나온 곳이 바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간호 책임자로 일하던 병원이었다. 이와 관련해 그는 분노를 터뜨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군 수뇌부의 잘못이에요! 병사들이 우리 병원에 이송되었을 때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어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환자 중 한 사람이다”

    나이팅게일은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감염병학자이자 통계학자인 윌리엄 파에게 데이터 분석을 의뢰했다. 그런데 파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초보적 위생 관리에 소홀했기 때문에’ 동상과 영양실조 등 비교적 가벼운 질환으로 입원한 병사, 죽지 않고 제 발로 걸어서 병원 문을 나설 수 있던 병사들의 목숨까지 앗아갔다는 깜짝 놀랄 만한 결론을 내렸다.


    나이팅게일의 병원은 수용 가능한 인원수를 훨씬 웃도는 환자를 꾸역꾸역 받아들였다. 의사와 간호사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위생 상태도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환자들이 제대로 된 치료와 돌봄을 받지 못해 도리어 병이 심해지고 결국 목숨까지 빼앗긴 것이다.


    놀랍게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자신이 저지른 중대한 실수를 구체적으로 기록한 데이터를 주위의 만류와 반대를 뿌리치고 세상에 공개했다. 다음의 인용문은 이때 그가 남긴 말이다.


    아무리 규모가 작은 병원이라도 이렇듯 무서운 생명 경시 상황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병원 건물의 구조적 결함과 부실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다.


    그 후 그는 아흔 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런던에 간호사 양성소를 설립하고 간호 개선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또 그는 육군 위생 개혁, 인도의 공중위생보급 등에도 힘을 보탰다. 그럼에도 전기 작가 휴 스몰은 그를 다음과 같이 조금 야박하게 평가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환자 중 한 명이다.


    인간이란 원래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존재지만 그중에서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가장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존재가 아닐까.



    평범함 속에 감춰진 비범함으로 세계사를 뒤흔든 기묘한 인물 이야기

    인류가 낳은 가장 유명하고 논쟁적인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

    나치스 독일이 중요한 군사 작전을 계획하고 결정할 때 노스트라다무스의 시를 참고했다는데?

    인류가 낳은 가장 유명한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400년이 넘는 긴 시간이 지났으나 그의 인기는 여전히 사그라질 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자체를 마치 종교처럼 맹신하고 신봉하는 풍조마저 생겨났기 때문이다. 수많은 종교에 종말론이 있지만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특히 종말론적 요소가 두드러졌다.


    노스트라다무스가 남긴 유명한 예언 중 ‘세계의 멸망’에 관한 예언을 예로 들어보자. 프랑스 고어로 쓴 원고는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1999년 7월,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오리라. 앙골무아의 위대한 왕이 부활하리라. 화성을 전후로 성공적으로 지배하리라.(『예언집』 백시편 제10권 72번)


    원문에는 ‘7월’이 아닌 ‘7개월’이라고 나온다. 도저히 프랑스인이 프랑스어로 썼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엉성한 문장이다. 게다가 이 시에는 ‘인류 멸망’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공포의 대왕’이나 ‘앙골무아의 위대한 왕’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단어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해 이 시를 제멋대로 해석하게 만든다.


    그런데 20세기 중반을 지날 때까지만 해도 이 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다 전 세계적으로 기존 질서가 붕괴하기 시작하며 세기말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자 시에 감도는 기묘한 분위기와 세기말적 분위기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전 세계인들은 기이한 현실감을 느낀 게 아닌가 싶다.


    예언 시 한편으로 16세기 프랑스 초능력자 노스트라다무스는 죽은지 400년이 지난 뒤에도 유명세를 유지했다. 심지어 20세기 중반까지 나치스 독일이 중요한 군사 작전을 계획하고 결정할 때 그의 시를 참고했을 정도다(노스트라다무스가 유대계 프랑스인이라는 사실은 애써 무시한 모양이다). 1999년이 가까워지면서 노스트라다무스의 종말 예언으로 전 세계 곳곳에서 신흥종교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애매모호한 예언으로 전 세계인의 정신을 쥐락펴락한 노스트라다무스 자신이야말로 ‘공포의 대왕’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 어쨌든 생전에 그의 예언은 신통하게도 적중했다. 게다가 살아 있는 동안 상당히 정확하게 족집게처럼 예언하는 영험한 신통력으로 전 유럽 내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의 비참한 죽음과 발루아 왕조의 몰락을 정확히 예언한 노스트라다무스

    노스트라다무스는 제자들에게 “나에게는 신령이 내려주신 감이 있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곤 했다. 쉽게 말해 그는 신령한 눈으로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고 주장한 셈이다. 기록에 남은 예언 중 적중해서 유명해진 예는 그가 프랑스 국왕의 사고사를 예언한 것이다.


    1555년 5월 4일,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집』이 출간되었다. 그의 책은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가 궁정 귀족 사이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프랑스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프랑스에서 누구나 알 정도로 유명한 오컬트 마니아로 점성술과 각종 주술에 심취했다. 그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집』 백시편 제1권 35번 예언을 읽고 이상한 감각에 휩싸였다.


    젊은 사자가 늙은 사자를 넘어서리라. 싸움터에서 단 한 번의 싸움으로, 황금 갑옷 속의 두 눈을 찌르리라.


    노스트라다무스 특유의 수수께끼처럼 에둘러 말하는 시에서 ‘늙은 사자’는 자신의 남편 앙리 2세를 가리킨다고 왕비는 직감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그 예언이 앙리 2세를 향한 것임을 인정했다. 곧이어 노스트라다무스는 국왕을 알현했으나 왕은 예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예언은 적중했다. 1559년, 국왕 부부의 딸 엘리자베스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마상 창 시합이 열렸다. 당시 마흔 살의 앙리 2세는 한때 ‘기사왕’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자신의 실력이 녹슬지 않았음을 과시하고 싶었던지 몸소 시합에 나섰다. 그런데 국왕보다 일곱 살(열한 살이라는 주장도 있다) 어린 몽고메리 백작 가브리엘 1세가 힘 조절에 실패했는지 그의 창이 국왕의 오른쪽 눈을 찌르고 들어가 뇌를 관통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그 사고로 국왕은 위독해졌고 당시 의술로는 손 쓸 방도조차 없는 상태에 빠졌다.


    슬픔에 잠긴 왕비는 어떻게든 남편을 살리고 싶었다. 그러나 어설프게 치료하는 바람에 죽음의 시기를 늦춰놓기만 했고 국왕이 고통을 느끼는 시간만 길어졌다. 며칠 후 의사들의 필사적 치료도 소용없이 국왕은 세상을 떠났다.


    국왕의 죽음을 예언한 노스트라다무스는 어떻게 되었을까? 왕비에서 대비가 된 카트린은 그를 원망하기는커녕 열렬한 지지를 표명했다. 일반적으로 왕가에 불길한 예언을 하면 불경죄로 처벌을 받는데, 노스트라다무스는 예외였다. 카트린은 자식들의 미래를 예언해 달라고 부탁했고, 노스트라다무스는 1564년 ‘국왕 전속 의사’ 칭호를 얻었다.


    그 무렵 카트린의 아들 중 성인이 된 이가 셋이나 있었기에 그들 중 누군가가 국왕의 자리를 물려받으리라고 누구나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런데 노스트라다무스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아드님은 모두 왕이 되십니다.” 이 말은 무슨 의미였을까? 가까운 미래에 현 왕가의 지배가 끝나리라는 예언이었다. 이번에도 예언은 적중했다. 카트린의 아들들은 모두 국왕으로 즉위하지만 하나같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1564년, 카트린의 아들 샤를 9세를 알현하는 자리에 동행한 노스트라다무스는 수행원 속에 있던 열한 살 귀족 소년을 흘낏 보고 ‘뭔가’를 직감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소년이 잠에서 깨는 자리에 자신을 은밀히 들여보내 달라고 청했다. 아침에 시종들이 옷을 갈아입히려고 잠옷을 벗긴 소년의 몸을 유심히 관찰하던 노스트라다무스는 ‘장차 이 소년이 국왕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사마귀 모양과 위치를 보고 직감했다는데, 이 예언도 적중했다. 훗날 소년은 앙리 4세로 왕위에 올랐고, 프랑스 왕가는 부르봉 왕가로 교체되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의 정확도는 그가 살았던 시대에 한정되었을까? 현대인인 우리에게는 그의 예언이 빗나가는 게 더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에게 가장 잔혹했던 인간들 이야기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노동 가능 인구 2,000명 정도인 독일 소도시 하멜른에서 어느 날 갑자기 130명의 어린이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충격적 실화

    독일 그림 형제의 동화 등으로 유명한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는 실화일까 허구일까? 누구가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흥미롭게도 이는 13세기 말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다. 이는 하멜른 시 의사당에 새겨진 기록에서도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도 탄생 후 1284년 6월 26일 하멜른에서 아이들이 납치되어 사라졌다. 하멜른에서 태어난 아이 130명은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 코펜 언덕에서 사라져버렸다.


    이 사건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하멜른 마르크트 교회의 높이 6미터, 너비 3미터 스테인드글라스에 짧은 글귀로 새겨져 있다. 1300년 무렵의 일이다. 그런데 그 글은 세월이 지나며 차츰 마모되었고, 17세기에 이르러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상태로 훼손되어 기이한 내용만 살아남아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왔다.


    아이들이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 사라진 날은 세례 요한과 사도 바울의 축일인 6월 26일이었다. 그날 130명 아이들이 하멜른 시내에서 골고다 언덕 방향(동쪽)을 향해 인솔자를 따라 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코펜 언덕까지 따라간 다음 그곳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아베 긴야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발췌)


    당시 하멜른에서 사라진 아이들의 나이는 대략 몇 살쯤 되었을까? 『그림동화』 등에서는 ‘네 살 이상’으로 기록했으나 실제로는 그보다 좀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프랑스의 중세·근세 사회의 가족상에 관한 저서를 집필한 필리프 아리에스는 『아동의 탄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 시대의 가족은 아이를 많이 낳았고 아이들은 적어도 아주 어린 시기에는 돌봄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다. (중략) 자식의 수를 헤아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평균수명이 짧았던 것은 어려서 죽은 아이가 그만큼 많은 탓이다. 한 아이가 태어나 무사히 성인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도박에서 돈을 따는 일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고 행운이 따라주어야 가능했다. ‘130명 아이들’은 당시 성인 나이인 15세에 얼추 도달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즉 어느 정도 자라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아이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당시 하멜른은 소도시가 많은 독일에서도 상당히 한적한 고장이라 노동 가능 인구는 대략 2,000명 정도였다. 그중 무려 130명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렸으니 하멜른 시 주민에게 얼마나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얼마나 커다란 파급 효과를 가져왔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아이들 130명의 행방불명을 둘러싼 세 가지 가설 중 진실은?

    당시 아이들의 실종을 두고 유력한 세 가지 가설이 존재한다. 첫째, 아이들 130명이 페스트 등의 전염병으로 급사했다는 설. 둘째, 동유럽 계몽을 위해 동방 이민이 네덜란드와 독일 각지에서 추진되었는데, 당시 하멜른 청소년들도 모집되어 집단 이주했다는 설. 셋째, 신의 기적을 경험한 카리스마 넘치는 인솔자를 따라 아이들이 소년 십자군이 되어 성지 예루살렘을 향해 도보 행진에 나섰다는 설.


    이중 첫 번째 가설은 그럴 듯한 주장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치명적인 논리적인 오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왜 하필 아이들만, 그것도 130명이나 한꺼번에 사라졌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가설은 ‘새로운 나라 새로운 도시에 가서 성공하면 남들처럼 잘살 수 있다’라는 달콤한 말로 아이들은 꼬드긴다 해도 과연 130명을 한꺼번에 모집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는 점이 약점이다. 더구나 이주 후 그 누구도 하멜른으로 연락을 취해오지 않았다는 점도 신빙성을 떨어뜨린다.


    세 번째 ‘소년 십자군설’은 17세기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도 지지한 설이다. 라이프니츠는 하멜른 사건이 1284년이 아니라 1212년 무렵에 일어났다고 추정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소년 십자군으로 차출된 청소년은 대부분 사라센인(이슬람교도)에게 노예로 팔려가거나 바다에 던져지는 등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고 한다. 이후 운 좋게 살아남은 몇 명의 아이들만 고향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아이들에게 왜 덜컥 낯선 사람을 따라갔냐고 묻자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의 추리도 개연성은 높지만 결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추리에서는 시대를 자의적으로 조작한 부분을 해명할 길이 없다.


    충격적 4번째 가설, 과연 프리드리히 2세가 범인이었을까?

    위에 설명한 세 가지 가설 외에도 꽤 그럴 듯한 가설이 하나 더 있다. 이 가설에서는 아이들을 꾀는 사람, 즉 피리 부는 사나이를 왕이나 귀족 같은 고위층 인물이 모종의 은밀한 목적으로 고용했다는 설이다. 다시 말해 아이들이 대량으로 필요한 어떤 일이 있어서 이 일에 적합한 ‘바람잡이’를 고용해 아이들을 유인해 조달하는 데 이용했다는 추정이다. 예를 들어 독일 출신이며 이탈리아 생활에 비중을 두었던 프리드리히 2세라는 별난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있다.


    지적 호기심이 왕성하고 여러 언어에 능통했던 프리드리히 2세는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인권을 무시한 실험을 자행했다.


    만약 갓 태어난 아기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 말문이 트인 아기는 무슨 말을 할까?


    프리드리히 2세는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실제로 실험했으며 실험에 참여한 아기는 모조리 사망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기록은 프리드리히 2세에게 적대적이던 한 성직자가 남긴 것이므로 어느 정도 편견과 과장이 덧붙여졌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실제로 그런 실험이 이루어졌고 그 실험에서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고 해도 절대 권력을 가진 황제가 체포되어 죗값을 치를 일은 전혀 없었다. 왕이나 귀족처럼 신분이 높은 사람은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1300년 무렵부터 유럽에서 교황의 권위가 눈에 띄게 추락하기 시작했다. 하멜른에서 아이들이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은 그 직전 무렵이었다. 그때까지 종교적 금기로 여겨지던 인체 실험도 귀족의 성에서는 비밀스럽게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다. 가난하지만 앞날이 창창한 아이들 130명이 어느 괴짜 왕이나 귀족에게 끌려가 돌아오지 못했다는 가설이 가장 설득력 있게 여겨진다(그 누구도 돌아오지 못했기에 이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줄 사람도 없었고 아무 뒤탈도 없었던 게 아닐까).


    진상은 완전히 베일에 감춰져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았다.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진실은 오직 신만이 아는 찜찜하고도 무시무시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내면에 감춰진 ‘악마’의 본성이 깨어나다

    인류를 품종 개량한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히틀러의 ‘진짜 목적’은?

    히틀러와 나치스를 거세게 비판한 라우슈닝의 책 『히틀러와의 대화』에 적국 영국 정부가 출판 금지 처분을 내린 이유는?

    영국에서 출간된 책 한 종이 출판 금지 처분을 받았다. 1939년의 일이다. 이 책의 저자는 헤르만 라우슈닝이다. 그는 독일 지방 귀족 출신으로, 한때 히틀러가 주창하는 나치스 사상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투쟁에서 승리한 강자가 정의이고 약육강식에서 승리한 자만 살아남을 권리가 있다는 나치스의 주장은 단순명쾌해서 이해하기 쉬운 측면이 있다. 나치즘 신봉자들은 자신들이 ‘승자독식’ 세계에서 승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독일 이외 유럽 각 지역에서 꾸준히 ‘신도’가 증가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헤르만 라우슈닝이었다.


    히틀러는 라우슈닝을 나치스의 두뇌로 인정하고 단치히 시장과 나치스의 주요 요직을 맡기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었다. 다른 사람을 좀처럼 믿지 않았던 히틀러에게 특별한 총애를 받은 라우슈닝은 히틀러를 중심으로 뭉친 소수 정예 추종자 무리에 들어갈 권리를 획득했다.


    그런데 히틀러를 가까이에서 모시며 나치즘의 진짜 목적을 그의 입을 통해 직접 전해들은 라우슈닝은 공포에 사로잡혀 도망칠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절대 권력자 히틀러를 배신하고 다른 나라로 망명하면 자칫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의 목숨까지 위험해질 것이었지만 라우슈닝에게는 목숨을 걸고라도 꼭 발표하고 싶은 진실이 있었다. 그는 가족을 다른 나라로 도피시킨 후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에 권총을 든 채 모터보트를 타고 영국을 향해 배를 몰았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영국에 도착했다.


    영국에 도착한 라우슈닝은 나치 독일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책으로 정리했다. 그러나 그의 책 『히틀러와의 대화(미국 출간 제목은 『파괴의 목소리』, 영국 출간 제목은 『히틀러는 말한다. 아돌프 히틀러의 진정한 목적을 위한 일련의 정치적 대화』)』는 출간 직후 영국에서 출판 금지 처분을 받았다. 그 무렵 히틀러는 이미 독일 총통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또 당시까지만 해도 독일은 이웃 나라를 상대로 무리한 영토 분쟁을 벌이는 정도의 비교적 사소한(?) 문제 행동만 보였다.


    한 나라 통치자의 실명을 직접 거론하며 공격하는 책은 외교적으로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 영국 정부가 개입해 출간 금지 처분을 내린 것이었다. 게다가 책에는 기독교 사회에서 금기로 여기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라우슈닝의 창작이라고 보는 사람도 많았다. 


    청년들의 유전자를 ‘품종 개량’해 인류를 인공적으로 진화시킬 계획을 구상하고 실행에 옮긴 히틀러

    라우슈닝에 따르면 히틀러는 인류에게 신과 맞먹는 잠재력이 숨어 있다고 믿었단다. 실제로 히틀러는 “인류는 생성 도중인 신”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는 모든 인류가 신과 같은 존재가 아니며, 민족에 따라 우열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는 자신이 속한 아리안족은 가장 우월한 민족일 뿐 아니라 인류를 신의 경지로 이끌 능력을 가진 민족인 데 반해 유대인 등의 열등 민족은 세상을 멸망의 길로 이끌 위험한 민족이라고 굳게 믿었다.


    히틀러와 나치스의 최종 목적은 지상에서 그들이 규정한 ‘유해 민족’을 몰아내고 박멸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실제로 인류를 신과 맞먹는 존재로 격상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전 인류 중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여기는 아리안족을, 그중에서도 더욱 우수한 혈통을 지닌 청년들의 유전자를 ‘품종 개량’해 인류를 인공적으로 진화시킨다는 계획이었다.


    라우슈닝은 히틀러의 목적과 계획을 공개했다.


    고귀한 피(생물학적으로 우수하다는 의미)의 은혜를 누리는 상황을 만들어내면 (중략) 위대한 인종의 사나이가 나타난다.

    (나는 독일 민족으로 정치 운동을 시작했으나) 민족이라는 개념은 이제 무의미해졌다. (중략) 인류야말로 미래의 질서를 보여주는 개념이다.

    인류라는 개념으로 나치즘은 혁명의 바다를 건너 세계를 개조하리라.

    다양한 언어를 사용해도 지배자 인종에 속하는 사람 사이에는 상호 이해가 형성되리라.


    즉 히틀러가 라우슈닝에게 요구한 일이란 우수한 인간은 가축이나 작물처럼 교배하는, 이른바 ‘정원사’나 ‘가축 사육사’로서의 ‘육종’ 사업인 셈이었다. ‘인류를 인공적으로 진화시킨다’는 발상은 현실이 아닌 애니메니션이나 SF 영화에서나 나올 만한 아이디어다. 이 과대망상적 발상이 자신을 제2의 그리스도이자 구세주라고 믿어 의심치 않은 히틀러가 ‘신’의 대리인으로서 이루어야 할 최종 목표였다. 실제로 나치즘은 종교를 능가하는 위대한 사상이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던 히틀러. 그가 진심으로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라우슈닝은 목숨 걸고 독일을 탈출했다.


    라우슈닝이 망명하고 2년 후 나치스는 그야말로 SF 영화나 소설에나 등장할 만한 과격하고도 충격적인 발상을 현실 세계에서 구현하고자 했다. 이는 1941년 이후의 일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사건은 나치스가 점령한 각지의 유대인을 강제수용소에 가두고 대량 학살한 홀로코스트다.


    히틀러에게 누구 못지않게 총애받던 라우슈닝이 나치즘을 버린 것은 인간을 가축처럼 취급하는 히틀러와 나치스의 본질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누구보다 그 해악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