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기원
 
지은이 : 서은국
출판사 : 21세기북스
출판일 : 2021년 06월




  • 납득하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우리 뇌는 심리적 고통과 신체적 고통을 똑같이 받아들인다. 몸과 마음의 고통은 인간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생존, 그리고 번식. 모든 생명체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다. 인간 역시 이 명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단지 생존하기 위해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다. 이별의 고통을 알지만 다시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아픔을 감수하고서라도 얻고 싶은 무언가를 위해 인생은 계속된다. 꿈을 위해, 사랑을 위해, 결국 행복을 위해 우리는 살아간다. 행복은 모든 사람이 바라는 삶의 최종 목표다.



    행복의 기원


    행복은 생각인가

    삶은 갈등의 연속이다. 이 갈등은 인간의 양면적 모습 사이의 끝없는 줄다리기다. 무의식적이고 동물적인 우리의 ‘본능’이 의식적이고 합리적이고자 하는 문명인의 ‘이성’과 하루에도 몇 번씩, 평생 동안 충돌한다.


    인간의 진짜 모습은 무엇일까? 철학자들이 수천 년간 펼친 이 논쟁에 끼어들고 싶지는 않다. 양면적 모습을 언급하는 이유는 심리학이라는 학문, 특히 지금까지의 행복 연구는 인간의 ‘의식’ 수준에서 진행되는 상당히 합리적인 모습에만 너무 몰두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런 관점으로 그려진 행복의 청사진에는 정작 결정적인 것들이 빠져 있다. 행복은 본질적으로 감정의 경험인데, 마치 머리에서 만들어내는 일종의 생각 혹은 가치라는 착각이 들게 한다.


    불행한 사람은 긍정의 가치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행복은 본질적으로 ‘생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생각을 고치라고 조언하고 있다. 이런 식의 행복 지침서를 읽고 행복해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왜 생각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행복해지기 어려운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지만 이렇다. 행복은 사람 안에서 만들어지는 복잡한 경험이고, 생각은 그의 특성 중 아주 작은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뜻대로 쉽게 바뀌지도 않지만, 변한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전체의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용돈을 받고 즐거워할 때 느끼는 행복 역시 돈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돈이라는 자극이 뇌의 특정 부위들을 흥분시켜 ‘좋다’는 일시적 경험을 합성해내는 것이다. 어쨌든 행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경험이 왜, 언제 뇌에서 발생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 뇌의 주인에 대한 깊은 이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의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 분명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특성이다. 숙고할 수 있기에 어제의 경험을 통해 뭔가를 배우고, 내일을 준비하고, 이런 책도 사서 읽어본다. 그러나 무엇을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이 어떤 생명체의 생존에 꼭 필요한 것일까?


    우리보다 지구에 훨씬 오래 전부터 살아온 악어. TV에서 보면 녀석들은 진흙을 뒤집어쓰고 있을 뿐, 도무지 고차원적인 생각을 하는 표정이 아니다. 인간사회 못지않은 복잡한 위계 구조를 유지하며, 심지어 곰팡이 종자까지 운영하는 놀라운 개미들. 그 녀석들도 생각이란 건 하지 않는다. 즉, 의식적인 생각은 생명 유지의 필요조건이 아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호흡, 소화, 혈액순환.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거의 모든 생리적 기능들은 자동으로 이루어진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심장이 몇 번 뛰었는지, 호흡을 몇 차례 했는지 우리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 심장은 뛰었고 숨을 쉬었다. 우리의 생명을 꾸려나가는 수많은 기능은 자동으로, 잘 짜인 프로그램처럼 우리 의식 밖에서 돌아가고 있다.


    요약하자면 의식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생존에 절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일상의 경험들을 하기 위한 필요조건도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이 ‘생각하는 모습’을 인간의 대표적 특성으로 꼽는다. 가장 큰 이유는, 사람은 자신의 경험 중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부분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보이는’ 부분이 실제보다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는 오해를 하면 인간은 그저 ‘생각하는 단백질 덩어리’로 착각하며 살게 된다. 그래서 행복이라는 분제도 생각이라는 아주 좁은 테두리 안에서 논하게 되고, 결국 행복의 본질을 간파하지 못하게 된다.


    이성의 역할을 중시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동물적 본능을 통제하고 다스리기 때문이다. 중요한 기능이다. 이 능력 덕분에 먹고 싶어도 참고, 자고 싶어도 새벽까지 공부하고, 지금이 아닌 먼 훗날을 위해 산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통제된 행위가 본능적 욕구보다 무조건 좋고 바람직한 것인가? 어떤 잣대를 가지고 판단하느냐의 문제다.


    가치가 아닌 생존에 기여하는 정도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생존에 위협을 느끼면 인간은 더 동물스러워진다. 항상 식량난에 시달렸던 인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영양을 몸에 비축하도록 설계됐다. 특히 지방이나 당분이 있는 음식으로, 그래서 다이어트를 결심하는 이들에게 초콜릿과 지방은 무서운 유혹이다. 이 오랜 습성 때문에 현대인은 성인병과 비만에 시달리지만, 그 버릇 덕분에 지금까지 생존해오고 있다.


    행복에 대한 책에서 왜 이성이나 본능 같은 주제를 굳이 다루느냐고? 행복을 소리라고 한다면, 이 소리를 만드는 악기는 인간의 뇌다. 이 악기가 언제, 왜, 무슨 목적으로 소리를 만들어내는지를 알아야 행복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있다. 그래서 우선 이 악기의 주인, 즉 인간에 대한 심층적 파악이 필요하다. 생각은 그의 모습 중 아주 작은 일부다.



    다윈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행복

    인간의 관점에서는 우주의 모든 것이 이유와 목적이 있어 보인다. 강물은 바다를 향해 가고, 봄비는 꽃을 피우기 위해 내리는 것 같다. 이처럼 세상만사를 어떤 원인이나 목적, 계획과 결부시켜 생각하는 관점을 철학에서는 ‘목적론’이라고 한다. 자연의 그 어떤 것도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분명한 이유와 목적을 품고 있다는 생각. 이 목적론적 사고의 원조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생관 또한 다분히 목적론적이다. 그에게 삶은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추구하며 그것을 향해 나가는 과정이다. 이때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궁극적인 목표를 행복이라고 보았다. 아침 식사는 출근하기 위해, 출근은 돈을 벌기 위해, 돈은 결국 행복해지기 위한 것이다. 인간 행위의 종착지는 결국 행복이라는 것이다.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본적인 사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세상은 그 누군가의 계획과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인간은 더 똑똑해지기 위해 살아온 것도 아니다. 물리적 법칙과 화학 반응들에 의해 발생한 것이 우주고, 생명이고, 인간이다. 그 과정에는 어떤 목적도 이유도 없다.


    인간이 우조의 특별한 존재라는 오만에 지동설이 한 방을 날렸다면, 여기에 KO 펀치를 날린 것이 다윈의 진화론이다. 인간이 우주뿐 아니라 지구에서조차 그다지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일깨워준 것이다. 자연의 법칙을 따라 존재하게 된 하나의 생명체. 인간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다윈의 진화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은 질적인 차이가 있다. 진화론은 다윈이라는 한 천재의 개인적 의견이나 견해가 아니다. 사실이다. 지질학, 동물학, 고고학, 화석학, 생물학, 유전학, 인류학, 심리학…. 학문을 초월해 현재까지 동원된 모든 과학적 방법들이 지속적으로 검증하고 있는 사실이다.


    다윈 대 아리스토텔레스. 중요한 대립이자 갈림길이다. 행복을 어디에 대입시켜 논하느냐에 따라 판이하게 다른 결론이 나온다.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로 대변되는 철학에 바탕을 둔 전통적인 관점이고, 또 하나는 새롭게 개통된 진화론이라는 코스다.


    진화론 코스에서 보게 되는 행복은 그동안 우리에게 익숙했던 모습과 다르다. 생존, 욕정, 번식과 같은 본능들과 뒤범벅된 매우 원초적인 모습니다. 행복이 실체에 더 가깝지만, 여전히 학계에서는 외면 받고 있는 얼굴이다.


    스탠포드 대학에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갓 마친 제프리 밀러라는 젊은 친구가 2000년에 내놓은 『메이팅 마인드』라는 책. 세퍼드라는 대가 밑에서 공간사고를 전공했던 이 친구는 학위 후 훨씬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인간의 마음은 정말 ‘무엇을 하기 위해’ 설계되었을까?


    그 책의 요지는 이렇다. 창의성이나 도덕성 같은 마음의 산물들은 동물 중 인간만이 가진 특성이며, 또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인간은 동물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밀러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 또한 진화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긴 ‘도구’일 뿐이다. 피카소는 캔버스에, 바흐는 악보에 생을 바쳤지만, 이런 행위는 동물이 생존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악보와 사자가 추위를 막아주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창의적인 노력에 담긴 본질적 의미나 목적은 무엇일까?


    본인조차도 의식하지 못하지만, 상당 부분은 짝짓기를 위함이다. 이것이 밀러를 비롯한 최근 진화심리학자들이 내놓은 파격적인 대답이며, 현재 많은 학자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견해다. 유전자를 남기기 위함이다.


    재미있는 남자. 전 세계 여자들이 꼽는 남자의 매력 포인트 중 하나가 위트다. 그러나 유머러스한 남편이 생존에 무슨 직접적인 도움이 되겠는가? 정신없이 웃느라 굶주린 사자가 나타나도 모를 텐데. 위트 자체가 생존 필수품은 아니다. 그러나 위트는 그 사람이 가진 마음의 ‘수준’을 나타낸다. 위트는 창의성의 표현이며, 높은 창의성을 가진 사람은 멋진 꼬리를 소유한 ‘인간 공작새’가 되는 셈이다.


    드디어 결정적인 질문을 던질 때가 왔다. 행복감 또한 마음의 산물이다. 창의력과 마찬가지로 행복도 생존을 위한 중요한 쓰임새가 있는 것은 아닐까? 행복은 삶의 최종 목적이라는 것이 철학자들의 의견이었지만, 사실은 행복 또한 생존에 필요한 도구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결국은 사람이다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강렬한 고통과 기쁨은 모두 사람에게서 비롯된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이별, 짝사랑…. 인간을 시름시름 앓게 하는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하지만 인간이 느끼는 가장 강력한 기쁨 또한 사람을 통해 온다. 사랑이 싹틀 때, 오랜 이별 뒤의 만남, 칭찬과 인정…. 그래서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인간이 치르는 가장 성대한 의식들은 사람과의 만남(결혼, 탄생) 혹은 이별(장례)을 위함인 것이다.


    왜 이토록 인간은 서로를 필요로 할까? 바로 생존. 세상에 포식자들이 있는 한, 모든 동물의 생존 확률은 다른 개체와 함께 있을 때 높아진다. 시카고 대학의 카시오포 교수팀의 오랜 연구에 의하면 현대인의 가장 총체적인 사망 요인은 사고나 암이 아니라 외로움이다.


    짝짓기라는 궁극적인 생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타인이 필요하다. 포유류는 자기 혼자 유전자를 남길 수 없다. 아무리 사냥을 잘해도 짝짓기 상대가 없는 동물은 지구에서 사라졌다. 현대 생활은 맹수나 배고픔의 위협으로부터는 비교적 자유롭지만, 여전히 짝짓기는 절대적인 생존 과제로 남아 있다.


    약 5만 년 전 호모사피에스 중 아주 작은 무리가 아프리카를 나와 세상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중앙아시아를 거쳐 일부는 유럽 쪽으로, 일부는 시베리아나 호주 쪽으로. 고고학자들은 아프리카를 나온 이 초기 집단의 크기는 불과 150명 정도였을 것이라 추정한다. 이 작은 무리가 무섭게 번성해 불과 몇 만 년 만에 남극에서 북극까지 지구 구석구석을 정복하며 살고 있다. 몇 만 년의 시간은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찰나에 불과하다. 이 짧은 시간에 인간이 지구를 정복하게 된 비결은 무엇일까?


    극도의 사회성. 하버드 대학의 에드워드 윌슨 교수가 최근 저서에서 내린 결론이다. 지구에서 최고의 생존 성공담을 가진 동물은 개미와 인간이다. 두 생명체의 공통된 특성은 유별날 정도로 사회적이라는 것이다. 한 개체로서는 그다지 탁월한 능력이 없지만, 서로 돕고 나누고 이용하는 복잡한 사회적 능력 덕분에 두 종은 지구에서 유례가 없는 성공신화를 썼다. 그래서 윌슨은 인간의 지구 정복을 ‘사회적 정복’이라고 표현했다.


    행복을 생각하기에 앞서, 행복을 찾는 인간은 누구인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말자. 인간은 동물이다. 행복에 대해 고민도 해보는 똘똘한 면은 있으나, 살아가는 궁극적인 이유는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두 가지다. 생존과 짝짓기. 인간은 좀 더 세련되고 복잡하게, 때로는 대의명분을 만들어 자신도 모르게 그 목표들을 이룰 뿐이다.


    지난 30년간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행복에 대해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중 가장 중요하고도 확고한 결론은 무엇일까? 긴 시간 행복을 연구한 사람으로서 고민을 해보았다. 내 생각에는 두 가지다.


    첫째, 행복은 객관적인 삶의 조건들에 이해 크게 좌우되지 않는다. 둘째, 행복의 개인차를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것은 그가 물려받은 유전적 특성,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외향성이라는 성격 특질이다.


    두 결론은 수백 편의 논문을 통해 검증된 사실이다. 확고한 결론이지만,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설명은 아직도 학계에 부족하다. 나는 이 적막감을 조금 채우고자 이 책을 쓰게 되었다.


    우선 새로운 안경을 쓰고 행복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익숙한 철학의 안경을 벗고, 진화론적인 렌즈로 행복(쾌감)의 본질을 좀 더 깊게 들여다보게 되었다. 나의 짧은 결론은, 행복은 사회적 동물에게 필요했던 생존 장치라는 것이다.



    행복은 아이스크림이다

    행복을 좇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질문이 하나 있다. 내 인생에 무엇이 있어야 행복할까? 저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대부분 돈, 명예, 건강 등 몇 개의 범주 안에 답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창고에 이 행복곡물들을 많이 채우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산다. 주식에 비유한다면 돈과 같은 삶의 조건들이 가장 확실한 행복이윤을 가져다주는 종목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많은 것을 거기에 투자한다. 사실일까? 결국 행복은 무엇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일까? 행복에 대해 가장 흔히 하는 이 생각은 동시에 가장 틀린 생각이기도 하다.


    인생의 여러 조건들, 이를테면 돈, 건강, 종교, 학력, 지능, 성별, 나이 등을 다 고려해도 행복의 개인차 중 약 10~15% 정도밖에 예측하지 못한다. 몇 해 전 한국심리학회에서 체계적으로 조사한 한국인의 행복에 대한 결론도 이와 비슷하다.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이 차이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의 10%와 관련된 이 조건들을 얻기 위해 인생 90%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돈을 벌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면 국가의 행복과 경제 수준은 서로 손을 놓아버린다. 국가 간 행복수치와 GDP는 분명히 관련이 있지만, 이것은 기본적인 의식주조차 해결 못하는 극빈의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자료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최빈국들을 제외하면 얘기는 아주 달라진다.


    부유해질수록 돈으로 행복을 사는 것은 점점 어려워진다.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같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행복수치는 특히 높다. 흔히 그들의 높은 소득과 사회복지 시스템에서 오는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오해다. 일본이 핀란드보다 국민소득은 높지만 행복수치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낮다.


    돈과 행복에 대한 가장 유명한 연구는 미국 일리노이 주에서 지금의 화폐 가치로 약 100억 원의 상금을 받았던 복권당첨자들에 대한 연구다. 복권 당첨 1년 뒤, 21명의 당첨자들과 주변 이웃의 행복감을 비교했더니 놀랍게도 별 차이가 없었다. 왜 그럴까?


    우선 감정이라는 것은 어떤 자극에도 지속적인 반응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권 당첨, 새 집, 안정환 골. 짜릿하지만 그 어떤 대단한 일도 지속적인 즐거움을 주지는 못한다. 인간은 새로운 것에 놀랍도록 빨리 적응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좌절과 시련을 겪고도 다시 일어서지만, 기쁨도 시간에 의해 퇴색된다. 이런 빠른 적응 과정 때문에 비교적 최근의 일들만이 현재의 행복에 영향을 준다.


    감정의 또 다른 특성은 상대적이라는 점이다. 극단적인 경험을 한 번 겪으면, 감정이 반응하는 기준선이 변해 그 후 어지간한 일에는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권 당첨 같은 일확천금의 경험은 장기적인 행복의 관점에서 보면 저주가 될 수도 있다. 실제로 복권 연구에서 보면, 복권에 당첨된 자들의 행복더듬이는 둔해진다. 복권 당첨 후 그들은 TV 시청, 쇼핑, 친구들과의 식사 같은 일상의 작은 즐거움에서 이전 같은 기쁨을 더 이상 느끼지 못했다. 큰 자극의 후유증이다.


    그래서 성공하면 당연히 행복해지리라는 기대를 하지만, 실상 큰 행복에 변화가 없다는 사실은 살면서 깨닫게 된다. 그제야 당황한다. 축하 잔치의 짧은 여흥만을 생각했지, 잔치 뒤의 긴 시간에 대해서는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생은 유한하다. 제한된 시간과 에너지를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가 결국 인생사다. 사람들은 상당 부분을 부와 성공 같은 삶의 좋은 조건들을 갖추기 위해 쓴다. 이런 것을 소유해야 행복이 가능하리란 강한 믿음 때문에.


    하지만 여기서 기대만큼의 행복 결실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수십 년 연구의 결론이고, 이 현상을 일으키는 주범으로 ‘적응’이라는 녀석이 자목되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질문이 여전히 남아 있다. 적응이라는 범인은 잡았는데, 그의 정확한 범행 동기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우리가 느끼는 기쁨과 즐거움은 왜 그토록 빨리 소멸될까? 꿈꾸던 대학에 입학해도, 소울메이트라고 확신했던 그와 결혼을 해도, 왜 처음의 흥분과 떨림은 지속되지 못할까? 적응이라는 현상에 대한 기록은 많지만, 이에 대한 속 시원한 설명은 아직도 부족하다.


    적응이란 간단히 말하면, 어떤 일을 통해 느끼는 즐거움이 시간이 갈수록 줄어드는 현상이다. 행복이라는 좁은 관점에서 보면 야속한 일이다. 수년 동안 몸과 약간의 영혼까지 팔아서 얻은 승진이 주는 즐거움과 불과 며칠이다. 그래서 ‘쾌락의 쳇바퀴’ 라는 표현이 오래 전부터 학계에서 쓰여왔다.


    쾌락은 생존을 위해 설계된 경험이고, 그것이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본래 값으로 되돌아가는 초기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이 적응이라는 현상이 일어나는 생물학적 이유다. 그리고 수십 년의 연구에서 좋은 조건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장기적으로 훨씬 행복하다는 증거를 찾지 못한 원인이기도 하다. 아무리 대단한 조건을 갖게 되어도, 여기에 딸려 왔던 행복감은 생존을 위해 곧 초기화돼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복은 ‘한 방’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쾌락은 곧 소멸되기 때문에, 한 번의 커다란 기쁨보다 작은 기쁨을 여러 번 느끼는 것이 절대적이다. 유학 시절, 지도 교수가 쓴 논문을 읽은 적이 있다. 제목은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나는 이것이 행복의 가장 중요한 진리를 담은 문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큰 기쁨이 아니라 여러 번의 기쁨이 중요하다. 객관적인 삶의 조건들은 성취하는 순간 기쁨이 있어도, 그 후 소소한 즐거움을 지속적으로 얻을 수 없다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다.


    결국 행복은 아이스크림과 비슷하다는 과학적 결론이 나온다. 아이스크림은 입을 잠시 즐겁게 하지만 반드시 녹는다. 내 손 안의 아이스크림만큼은 녹지 않을 것이라는 환상, 행복해지기 위해 인생의 거창한 것들을 좇는 이유다. 하지만 행복 공화국에는 냉장고라는 것이 없다. 남은 옵션은 하나다. 모든 것은 녹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자주 여러 번 아이스크림을 맛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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