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의 방
 
지은이 : 리옌첸(역:정세경)
출판사 : 현대지성
출판일 : 2021년 06월




  • 한 인간으로 존중받으며 살다가 존엄하게 죽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과거뿐 아니라 지금도 열악한 노동 환경, 정보 격차, 성 불평등 같은 문제로 소외되는 사람들이 있다. 저자는 내 몸과 내 삶의 주체성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이런 현실을 알리고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자 다양한 채널을 통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또한 헛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없도록 고군분투한다. 불공정한 대우나 핍박을 받았던 사람의 유골을 마주할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사람들과 의견을 나눈다. 이것이 저자가 고인을 애도하는 방식이며 뼈와 죽음을 통해 삶을 바라보는 태도다.



    뼈의 방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다

    이름을 되찾아야 하는 이유

    이름을 찾아주는 일

    법의인류학자의 임무는 뼈를 분석하여 유골의 정확한 신원을 확인하는 것이다. 법의인류학자는 사람들이 흔히 아는 법의학자와 다르다. 법의학자가 주로 시체에서 사망원인을 찾는다면 법의인류학자는 뼈에서 사망의 종류와 사망 원인을 관찰해낸다. 법의학자들은 연조직이 남아 있는 시체를 다루기 때문에 부패 단계에 들어서거나 백골화된 시체를 접할 일이 거의 없다. 그에 비해 법의인류학자들은 이미 부패가 진행된 시체를 다룬다. 심지어는 미라화된 시체를 접하기도 한다.


    법의인류학자는 유골을 건네받은 뒤 ‘Big 4’라고 부르는 정보인 ‘성별, 나이, 혈통, 키’를 찾아낸다. 여기에 생전의 흔적인 외상, 만성 질병, 활동 흔적을 조사해 보태면 유골의 주인에 관한 기록 파일을 만들 수 있다. 이런 기록이 있으면 가족을 찾을 가능성도 커진다. 그래서 법의인류학자를 일컬어 ‘이전-이후(before-after)’전문가라고도 한다. ‘이전’이란 죽은 사람이 살아생전에 한 일, 겪은 일이 뼈에 미친 영향을 뜻하며 ‘이후’는 죽은 뒤 뼈에서 볼 수 있는 무언가를 말한다. 법의인류학자는 이 외에 인골을 찾아 수색하고 수습하는 일, 신원 식별에 도움이 될 만한 특징과 단서를 분석하는 일에도 능숙하다.


    법의인류학자는 골학(骨學) 교육에 집중하여 인류학을 바탕으로 눈앞의 상황에 대한 전면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하도록 훈련받는다. 법의인류학의 사고방식과 연구 방법은 인류학에서 가져온 것이 많다. 앞서 말했듯이 법의인류학자는 다양한 종족의 생활 방식과 음식, 환경을 모두 연구하기 때문에 법의학자들의 ‘비장의 카드’로 여겨지기도 한다. 해부하고도 사망 원인을 밝히지 못하는 경우 법의인류학자가 작은 단서라도 찾아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 때문에 업무가 비슷하면서도 다른 법의학자와 법의인류학자는 밀접한 협력 관계를 맺으며 서로를 존중한다. 실제로 내가 아는 법의인류학자들은 다양한 시체해부를 관찰한 경험이 있으며, 시체 보관소에서 일해본 사람도 있다. 법의인류학자들은 법의학자들의 작업 방법과 순서, 단계를 숙지하고 있다.


    법의인류학자와 법의학자, 법치의학자는 모두 법정에서 전문가 증인이 될 수 있다. 법의인류학자들은 법의학의 다른 분야 전문가들과 달리 전쟁 범죄와 대량 사망 사고의 조사 업무에도 참여한다. 법의인류학은 인도주의 색채가 매우 강하고, 그렇기에 제한적으로 활용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에 주목한다. 살아 있는 사람이든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든 무고한 사람이든 전쟁 범죄자든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든 상관없다. 우리는 그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존엄한 대우를 받았느냐에 주목한다.


    진상이 밝혀진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름 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는 일은 계속되어야 한다. 뼈에 남겨진 흔적을 토대로 우리는 망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법의인류학자의 본분은 말할 수 없는 망자를 대신해 그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뼈 대신 말하는 사람

    발굴의 3대 원칙

    고고학의 이미지는 영화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땅에서 오래된 유물을 발굴해내는 장면을 떠올리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시대에 약간 뒤떨어진 이야기다. 고고학은 오히려 법의학과 비슷한 면이 많다.


    고고학과 법의학은 모두 사건 발생 순서를 밝히고 발생 요인을 찾아내는 일을 한다. 두 학문에서 도출해낸 결과는 다를 수 있지만 증거를 찾아 사건의 논거로 삼으려는 목표는 같다. 고고학은 물적 증거를 연구해 패턴과 연관 관계를 확정 짓는 과학으로, 상황의 배후 사건을 알아내는 학문이다. 하지만 감식과나 법의학 조사 요원이 숨겨진 묘지 혹은 무연고자들이 묻힌 공동묘지를 찾는 일은 거의 없다.


    물론, 고고학과 법의학은 엄연히 다른 학문이다. 가장 큰 차이는 고고학이 오래된 물건과 상황을 연구하는 데 반해 법의학은 비교적 최근의 것들을 다룬다는 점이다. 하지만 두 학문이 마주하는 상황은 모두 일회적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현장을 발견한 순간부터 작업이 진행될 때마다 현장은 변화하고 오염되며 증거를 잃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고고학의 몇몇 중요한 원칙들은 법의학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1. 누중의 법칙(Superposition)

    범죄 현장에서는 유기물이든 무기물이든 모든 것을 정해진 순서에 따라 놓아야 한다. 법의고고학의 시각에서 보면, 발굴 과정에서 가장 먼저 발견되는 것이 가장 최근에 놓인 것이며 반대로 깊은 곳에 있을수록 오래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2. 공반 관계(Association)

    같은 지점에서 발견되거나 특징이 있는 물건과 함께 발견되는 물건은 관계가 있게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법의고고학에서는 같은 무덤(예를 들어 집단 무덤 같은) 안의 모든 유골은 서로 관련이 있으며 하나의 사건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3. 반복(Recurrence)

    중복해서 나타나는 일은 우연이 아니다. 무덤에서 찾아내는 물건이나 자주 사용하는 기계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동양인의 장례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동양인들이 무덤 앞에 국화를 놓는 것을 보면 그 행위가 우연이 아니며 국화에 상징적인 의미가 있으리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가지 원칙은 법의고고학 및 고고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맥락’으로 확장된다. 맥락은 하나의 물건 혹은 몇 개의 물건이 같은 체계나 공간에 들어온 후 자연환경과 상호 작용하여 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말한다. 예외는 없다. 이를 조사하고 연구하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처리 방법을 계획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맥락을 알아야 증거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뼈에서 찾은 다잉 메시지

    이런 이야기는 고인의 신원을 찾기 위한 조사에 물꼬를 터주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법의인류학자의 마지막 목표 가운데 하나는 죽은 자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죽은 사람이 누구든 누구에게 죽임을 당했든, 심지어 배후에 군대나 정부가 있든지 간에 상관없이 말이다. 억압받고 착취당한 사람들, 살해된 사람들, 학대를 당하고 연고자도 없이 아무 데나 묻힌 사람들, 집단 무덤에 묻힌 사람들을 위해 더욱 그래야만 한다. 물건 취급을 받았던 그들은 어떤 존중도 받지 못했고 인간으로서 존엄도 지킬 수 없었다. 법의인류학자는 단순히 범인을 찾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억압을 당한 채 무덤에 묻혀야 했던 ‘증인’을 통해 사건의 진상을 밝혀야 한다.


    법의인류학자의 작업에 깊은 의미가 있다고 하지만, 인도주의에 어긋나는 행위를 다루고 조사하는 일은 큰 도전이다. 재난을 겪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인도적인 조사 작업은 유족들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다. 생환자의 기록을 다루는 것 역시 법의인류학자가 해야 할 핵심 업무다. 법의인류학자가 상처 입은 가족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보듬지 못하면 사회의 정서적 회복이 더뎌지기도 한다. 모순된 말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시체의 신원을 찾고 나면 유족들은 평온을 되찾는다. 오랫동안 행방을 몰라 시달렸던 두려움에서 해방되기 때문이다. 고인의 죽음이 불행했던 역사적 사건 때문이었음을 확인한 후에야 자책을 멈출 수 있게 된다. 이를 기점으로 유족들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


    가해자는 죽음과 살해 방법을 숨기는 것만으로 피해자의 목소리를 막았다고 믿겠지만, 피해자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억울함을 호소한다. 뼈의 이야기를 해독해 사건의 진상을 쫓기 위해서는 때때로 시간과 공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법의학은 꾸준히 발전하고 있는 과학 감정 기술을 통해 뼈의 특성과 뼈에 난 상처를 연구하고 있다. 여기에 고고학의 체계적인 분석과 발굴이 더해지면 깊은 곳에 묻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물론 그런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유족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런 불행한 사건들에서 알 수 있듯, 법의인류학자는 모든 작업을 투명하게 진행하여 유족에게 고인의 마지막 순간을 명확히 알려주어야 한다. 그래서 유족이 이전과 같을 수 없는 인생을 마주할 준비를 하도록 도와야 한다. 오랫동안 이 일을 하면서 깨달은 점이 하나 있다. 법의학으로 살인범을 잡는 것보다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과거는 죽은 자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밝히는 것이며 미래는 다시 힘을 낼 수 있도록 기운을 북돋는 것을 뜻한다. 역사적 배경, 정치, 종교는 달라도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죽음은 한결같은 답을 준다. 바로 뼈 너머의 인간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죽음이 남긴 메시지

    뼈에 대한 예의

    주인 없는 시체의 권리

    죽은 사람의 신체를 매매하거나 연구 용도로 쓰는 것은 그리 새로운 일이 아니다. 지난 4백여 년 동안 과학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시체 활용 방식도 이전과 달라졌다. 16세기만 해도 의학은 인체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데 쓰일 뿐이었다. 르네상스 시기의 해부학자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는 학생들이 개를 해부해 인체의 구조를 배우는 현실에 매우 큰 불만을 느꼈다. 훗날 그는 동물과 인체는 구조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실제 인체로 해부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무덤에서 범죄를 저지른 자의 시체를 훔쳐 교재로 쓰는 악습도 생겨났다.


    영국에서 1832년에 ‘해부학법’이 시행되기 전에는 사형을 당한 사람의 시체만 해부 용도로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체의 공급량은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고 악덕 장사꾼들은 암시장에서 훔친 시체를 팔기 시작했다. 시체 도둑들은 막 땅에 묻힌 ‘신선한’ 시체를 노려 훔쳤고 이렇게 훔친 시체는 의과대학 후문에서 거래되었다. 시체 도둑들을 ‘부활시키는 사람’이라고 일컫기도 했다.


    우리에게는 유골 매매가 생소할 수 있다. 하지만 수백 달러만 주면 사람 뼈 표본을 손쉽게 살 수 있는 나라도 있다. 이런 표본은 대부분 매매가 허가되지 않은 유골이다. 인도에서는 종교적·사회적인 이유로 시체를 갠지스강 같은 곳에 흘려보내 그대로 부패하도록 놔두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가족들이 시체를 물에 흘려보냈다고 해서 그것이 다른 용도로 아무렇게나 쓰여도 된다는 뜻일까? 과학 지식을 얻는 것이 정말 죽은 사람을 존중하고 그의 존엄을 지켜주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할까? 현재 법률은 매매한 인체 유해와 장기를 이식 용도로 쓰는 것만 금지할 뿐 판매 자체가 불법이라고 명시하지는 않는다.


    모든 뼈는 존중받아 마땅하다

    시체나 인체 표본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대중에게 해부학 지식을 알려주는 전시회가 종종 열린다, ‘인체의 신비전(BODIES: The Exhibition)’은 이런 전시회의 시조 격이다. 주최 측은 전시된 시체가 모두 유럽과 미국에서 자발적으로 기증된 것이라 강조했다. 하지만 이를 증명하기 위한 서류는 공개되지 않았다. 이 전시회의 주최자인 독일 의사 군터 폰 하겐스(Gunther von Hagens)박사는 “저는 그 어떤 정치범이나 정신질환자, 혹은 무연고자의 시체도 전시회를 위한 인체 표본 제작에 쓴 적이 없습니다!”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하지만 중국의 한 의과대학에서 그에게 무연고자의 시신을 제공했으며, 그가 자신이 발명한 합성수지화 기술로 인체 표본을 만든 뒤 현지 대학에 시신을 되팔았다는 증거가 나왔다.


    다른 나라에 있는 유해를 본래 땅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최근 몇 년 사이 인류학계에서도 중요한 화두였다. 미국의 원주민들은 그들도 과학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다만, 동의도 받지 않은 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조상들의 시체를 훔쳐 자신들의 문화를 멸시하는 행태에 불만을 품은 것이었다. 세계 각지에는 여러 원주민 문화의 전시품과 유골이 소장되어 있다. 하지만 원주민의 문화는 그 자체로 존중받지 못하고 억압받았으며 비인도적인 것으로 치부되곤 했다. 침략자들은 새로운 땅에 도달했을 때 눈앞의 새로운 발견을 전부 ‘원시’의 증거로 여기며 원주민들을 ‘고대의 인류’라 칭하기도 했다.


    뼈는 다양한 문화의 종족들에게 느끼고 행동하며 기억을 불러일으키도록 만드는 중요한 상징물이다. 뼈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나름의 영향력을 행사한다. 개인의 유골도 마찬가지다. 뼈는 매우 독특한 매개체로써 한 사람의 일생을 확장한다. 뼈는 늘 우리에게 삶을 생각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종교와 철학에서도 뼈를 통해 죽음 뒤에 무엇이 있을지를 생각해왔다.


    나는 시체를 전시하거나 교육 용도로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교육을 위한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 뼈들이 허가를 받았는지 전시 경로는 적법한지 등의 문제는 반드시 확인되어야 한다. 개인의 욕심을 채우려는 이윤 창출의 시장 논리로 유골에 접근하여 그들이 사람으로서 존중받지 못한 것은 아닌지도 질문해봐야 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대원칙은 유골도 한때 누군가의 가족이었으며 무엇보다 ‘사람’ 이었다는 사실이다. 뼈는 살아 있는 사람처럼 존엄하게 대우받아 마땅하다.


    과학의 이름으로 강요당한 침묵

    해골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

    사람의 유골을 신중하게 다루어야 하는 만큼 유골의 반환 계획도 조심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유골은 일반적인 박물관 전시품과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 원주민들도 여러 해 투쟁한 끝에 1990년이 되어서야 미국 정부로부터 선조들의 유골과 장례용품, 관련 유물 등을 원주민 자치구로 옮겨 올 수 있다는 허가를 받았다. 다른 나라에 전시된 문물을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주는 일은 미국과 원주민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에도 사람의 유골을 사고파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유골 관리에 신중하지 못한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어느 시대의 산물이든 어디에서 왔든 유골은 항상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그 유골은 언젠가 살아 있었던 사람이니 말이다.


    죽음 앞에서 마주한 윤리적 문제들

    죽음은 단순히 육신의 작동이 멈추는 일이 아니다. 죽음에 대해 고려해야 할 요소들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일본의 유명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소설 『인어가 잠든 집』(재인 역간)에서 죽음의 다층적인 의미를 다루었다. 등장인물인 엄마 가오루코는 딸 미즈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냥 보기에 뇌사 진단을 받은 미즈호의 모습은 자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가오루코는 죽음의 정의가 야박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소설에서는 일본에서 뇌사를 판단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과학과 법률에서는 죽음을 다르게 정의한다. 죽음에 대한 철학적 정의는 논증이 훨씬 복잡하다. 오랜 역사를 거치며 죽음에 대한 정의는 끊임없이 새롭게 숙고되고 있는 걸까? 과연 이스탄불 선언 이후로 전 세계의 장기 기증은 온전히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을까? 장시 암시장 거래는 줄어들었을까? 타인으로부터 뇌사 판정을 받고 싶어 하지 않는 가족에게 눈앞에 누워 있는 딸은 산 사람일까 시체일까? 소설 속의 엄마가 딸이 여전히 살아 있다고 고집하는 것은 잘못일까? 엄마의 행동에 대해 이렇다 할 평가를 내리지 않는 아빠에게는 책임이 없을까? 미즈호와 함께 수영장에 갔던 외할머니와 이모가 간호를 돕는 것이 죄책감 때문이라면 가오루코가 이들의 행동을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속죄일까? 앞에서는 돕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불만을 품은 가족들이 줄곧 사건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있기로 선택한 것은 책임감 없는 행동이 아닐까?


    『인어가 잠든 집』은 일련의 윤리 문제, 특히 의료 윤리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며 우리가 고민해볼 만한 다른 문제들도 함께 언급한다.


    가족 간의 정이나 감정과 관련된 일을 맞닥뜨리는 경우에는 이성과 감정의 고된 힘겨루기가 펼쳐지게 마련이다. 그럴 때 옳고 그름의 문제는 온전히 개인의 선택이 되고 만다. 행복은 여러 정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독히 고집하던 일을 문득 툭 내려놓기도 하는 것이다. 죽음은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내려놓는 것만이 유일한 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종착점에 닿을 때까지 걷고 또 걸어갈 뿐이다.


    유골을 전시하거나 연구하는 것으로 역사가 바뀔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이것이 무례하다고 느껴질 수 있다. 과학 발전에 기여한다는 이유로 사람에 대한 존중과 그 너머의 윤리를 포기해야 할까? 유골이나 인체 표본 전시는 사람들이 인체 구조의 오묘함을 배울 좋은 기회다. 전시회들은 하나같이 언론 매체나 문헌, 각종 조명에 소리 효과까지 동원해서 관람자들을 과거 그 시절로 돌아가게 만들려고 애쓴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전시회 관람 과정이 죽은 이와 함께하는 시간이라는 사실이다. 자신의 몸을 기꺼이 내어준 그들에게 귀 기울이고 그들의 경험과 이야기를 배우는 시간이어야 한다. 브라이언 패튼이 자신의 시 <이렇게 많은 서로 다른 긴 시간(So Many Different Lenghts of Time)>에서 말했듯이 우리의 마음속에는 영원히 누군가가 함께 살며 세상에 존재한다.


    메멘토 모리, 우리는 결국 뼈가 된다

    죽음 앞의 평등

    인체 해부학의 실증적 연구는 15세기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인체 소묘를 그리면서 시작되었다. 작가 스콧 카니(Scott Carney)의 『레드 마켓, 인체를 팝니다』라는 책에 나오는 자료에 따르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포함한 인골 표본이 처음 등장한 것은 1543년이다. 하지만 사람의 몸에 실제로 칼을 대 해부를 배우기 시작한 지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최근 고고학자 제나 디트마(Jenna Dittmar)와 피어스 미첼(Piers Mitchell)이 사후 의료 행위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며 병원 무덤에서 나온 유골들을 분석했다. 이를 통해 미국과 영국의 유골들에서 2, 3회씩 해부한 흔적을 발견했다. 그들은 이 유골들을 통해 옛날 사람들이 남녀의 시체를 어떻게 다르게 대했는지 차이점을 알아보려 했다. 남성의 유골뿐만 아니라 여성의 유골에서도 해부의 흔적과 빈도수가 비슷하다는 점을 확인했다. 그들은 총 99구의 유골을 연구했는데 그중 남성의 유골이 74구, 여성의 유골이 25구였다. 이 유골들은 모두 19세기 후반 로열 런던 병원과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온 것이었다.


    연구 팀은 유골에서 모든 흔적을 찾아내 기록하고 역사에 기록된 해부 과정 및 묘사와 비교하여 해부의 전말을 밝혀냈다. 그중에서도 흥미로운 사실은 두개골을 자를 때 쓴 톱의 날을 분석한 결과, 각도는 조금씩 달랐지만 왼쪽에서부터 잘랐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유골의 얼굴과 눈 부위도 모두 해부되었던 흔적을 찾았다. 99구의 유골 중에 3구의 머리는 경추에서부터 톱질을 하여 몸과 분리된 흔적이 있었다.


    이외에도 연구에서는 절단된 신체 부위에서 잘린 흔적을 여러 개 발견했다. 이는 당시 해부에 필요한 시체가 부족하여 관행으로 이루어졌던 ‘시신 나눔’ 때문으로 추정되었다. 여성의 시체도 예외는 아니었다. 연구 팀은 이 같은 사실을 통해 남성이든 여성이든 죽고 난 뒤에는 똑같이 대해졌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부족한 시신을 나누어 학습했기 때문에 당시에 해부를 책임진 사람은 죽은 이의 시체에서 ‘성별’이라는 속박을 걷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면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한 법이다.


    역사와 문화의 중요한 증거, 뼈

    생전 활동과 일했던 흔적을 추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뼈의 구성, 인성 등이 여러 요소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남녀의 유골에는 차이가 있다. 인간의 생활 방식은 사냥과 채집 사회에서 농업 사회로 전환되었지만, 뼈 전체를 놓고 보면 사실 큰 차이가 없다. 다만 먼 옛날(중유럽에서 발견된 기원전 5200년~기원후100년)의 사람 목뼈는 비교적 굵고 굽어 있다. 자주 달리다 보니 근육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까지 진화를 거치며 사람의 목뼈는 곧아지고 가늘어졌다. 대체로 비교적 정적인 경작을 하며 운동량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차이는 남성의 몸에서 많이 나타날 뿐, 여성의 목뼈에는 큰 차이가 없다.


    뼈는 지난 수백 년, 심지어 수천 년 동안 진화해왔다. 이는 통계학의 숫자로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휴대용 엑스레이기 같은 과학 기술과 도구를 활용하여 고고학자나 관련 전문가들이 뼈의 단서와 특징을 해독할 수 있다. 사람이 죽은 지 수백 년이 넘었다 해도 뼈가 놓여 있던 환경에 따라 보존 상태가 달라지며, 양호한 경우에는 뼈의 특징을 분석하여 신원도 식별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뼈가 지난날 겪어온 모든 일을 우리가 명확히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뼈는 우리에게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으며, 전 세대에 걸친 사람과 뼈의 관계를 들려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과 뼈의 관계는 반드시 다양한 각도의 문화, 역사를 통해 전체적으로 조망해야 한다. 인류는 뼈를 이용해 악기, 보석, 소장품, 종교적 증거품을 만드는 등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부여했다. 뼈는 단순히 과학 연구 혹은 생물학의 일부에 그치지 않는다. 뼈는 문화와 역사, 사회의 한 부분이다.


    누가 어떤 각도로 관찰하느냐에 따라 뼈에서 분석해낼 수 있는 이야기는 달라진다. 학자들은 뼈를 통해 옛사람들의 경험이 후대 사람들에게 미친 중대한 역사적 사건을 읽어낼 수 있다. 하지만 뼈가 우리 몸 안에 숨겨져 있듯 문화에서 뼈가 차지하는 자리 역시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뼈를 직접 언급할 일이 많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뼈는 조용히 우리의 일상을 모두 기록하고 있다.


    평행우주를 잇는 다리

    뼈는 수백만 년 변화의 역사 속에서 우리의 몸을 지탱해왔다. 우리는 뼈 덕분에 활동할 수 있다. 개개인의 특성에 따라 뼈도 저마다의 독특성과 다양성을 지니게 되었다. 특성에 따라 뼈도 저마다의 독특성과 다양성을 지니게 되었다. 다시 말해 뼈는 우리의 생활 방식과 습관을 줄곧 기록해 온 것이다. 어찌 보면 사람들의 몸에는 자신만의 전기(傳記)가 한 권씩 있는 셈이다.


    뼈는 우리 몸의 마지막 퍼즐 한 조각으로 우리의 인생을 일깨우며 삶의 마지막 순간을 알려준다. 두개골의 문화적 의미는 뼈가 우리에게 알려준 인생의 의미를 좀 더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뼈와 마주할 때 우리는 한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뼈에 담긴 문화와 역사, 생명을 통해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려 한다. 뼈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외면하고 싶은 자신의 모습을 볼 수도 있다. 혹은 세상에 동화되고 세속화되어 몸에 부여된 가치를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뼈를 통해 자신을 마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해부학은 단순히 인체 구조만을 배우는 학문이 아니다. 삶과 죽음, 인간의 본질, 이타주의, 존중과 존엄 등 철학적 문제들을 다룬다. 그런 의미에서 해부학은 수행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해부학을 배우는 과정은 지극히 개인적일 수밖에 없다. 해부학에서 인생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은 그 마음을 후대에 전해줄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인체 구조의 오묘함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돌아볼 수 있도록 말이다.


    세상에 살아 있는 사람은 제아무리 많은 죽음과 마주한다 해도 죽은 이들과 교집합을 만들 수 없다. 하지만 해부학에 발을 담그고 그 아름다움을 이해하면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평행우주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다. 이 다리를 건너본 사람은 해부학이 준 특별한 경험을 잊을 수 없다. 첫걸음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해부학의 모든 것이 몸 안의 신경 하나하나를 깨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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