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 않기 위해 쓴다
 
지은이 : 바버라 에런라이크(역:김희정)
출판사 : 부키
출판일 : 2021년 06월




  •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철저히 ‘체험형 글쓰기’를 표방하는 저널리스트로, 3년간 워킹푸어로 일한 경험을 담은 《노동의 배신》을 2001년 출간하면서 세계적인 밀리언셀러 작가로 발돋움했다. 이 책은 35년간 바버라 에런라이크가 《가디언》 《타임》 《뉴욕타임스》 《허핑턴포스트》 《네이션》 등 유수의 언론 매체에 기고했던 칼럼 모음집이자, 그의 말에 따르면 ‘도덕적 분노에 불을 지폈던 글’을 묶은 것이다. 


    지지 않기 위해 쓴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변태적인 가학피학성 공공 정책

    사담 후세인에 필적할 정도로 미국을 위협하고 있는 내적 요인은 복지 제도일지도 모른다. 이미 저명한 권위자들은 복지가 빌 클린턴이 진짜 남자인지를 확인해 줄 중요한 시험대라고 선언했다. 그는 정부 돈으로 먹고살겠다는 저 방탕하고 게으른 자들에게 보수적인 정책들이 요구하는 것처럼 철퇴를 내릴 정도로 강인할까? 아니면 사람들이 줄줄이 굶어 죽을까 봐 벌벌 떠는 도나 섈레일라(Donna Shalala, 클린턴 행정부에서 8년간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한 인물-옮긴이) 같은 사람들에게 무릎을 꿇을 것인가? 모든 사람의 관심이 거기 쏠려 있었지만 사실 양쪽 진영 모두를 만족시킬 만한 저비용의 기발한 해결책이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 듯하다. 복지 수당을 받는 사람들에게 그 쥐꼬리만 한 돈을 계속 받아 가도록 허락하고, 그 대신 주기적으로 공개 매질을 받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자에서부터 신보수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원칙이다(복지 비용은 연방 예산의 1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수십 개 대학과 연구소에서 학자인 체하는 남성들은 15세의 소녀가 임신을 핑계 삼아 임대료를 내지 않고 생애 최초의 원룸을 얻으려 하는 것을 두고 입에 거품을 물고 뒤로 넘어간다. 복지 혜택을 최장 2년으로 제한하겠다는 클린턴의 공약이 널리 환영받은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클린턴은 그 2년 동안 직업 훈련과 보육을 제공하지만, 그 후에는 쓰레기를 뒤져 음식을 찾아 먹든 말든 모르는 척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복지 혜택과 매질을 결합한 프로그램은 모든 면에서 월등하다. 첫째, 직업 교육과 강제 현장 실습을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해도 이 프로그램보다 더 효과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복지 수급자들은 수십 년간 수십 가지의 근로 복지 제도(실업자에게 일정한 노동을 하게 하고 복지 혜택을 주는 제도-옮긴이)와 근로 동기 부여 프로그램에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참여해 왔다. 입사 면접 시 어떤 옷을 입어야 하고, 구인 광고에서 자신에게 맞는 일자리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문서 작성과 간단한 회계 업무는 어떻게 보는 것인지 등도 배웠다. 하지만 그 효과는 가장 열렬한 복지 제도 지지자들마저 미미하다고 인정할 정도로 약소하다. 수입도 눈곱만큼밖에 늘지 않았기에 결국 다시 복지 혜택을 받아야 하는 처지로 돌아가곤 한다. 이는 복지 수급자들이 구제 불능의 게으름뱅이여서가 아니다. 빈곤선 아래의 급여를 받으면서 1년 내내 풀타임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이미 노동 인력의 18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노동 시장에서, 최저 임금을 지급하는 일자리가 특히 아이를 돌봐야 하는 여성에게 돌아갈 확률은 매우 적기 때문이다.


    둘째, 복지 혜택과 매질을 결합한 프로그램은 지금까지 시행된 어떤 근로 복지 제도보다 훨씬 저렴하다. 복지 수급자 전체를 노동 시장에 진입하도록 준비시키는 데 드는 비용이 적게 잡아도 1년에 500억 달러라는 추산이 나와 있다. 현재 복지에 들어가는 돈의 대략 2배 정도 액수인 이 돈의 절반가량은 보육에 사용될 것이다. 그러니 복지 수급자들을 훈련시키고 집 밖으로 내몰아서 무슨 낙을 볼 수 있다는 말인가? 복지 수급 대상자에 해당하는 1000만 명에 달하는 어린이들, 현재 집에서 엄마들이 돌보는 이 어린이들을 보육 시설로 보내 다른 가난한 여성들의 돌봄을 받는 사이 아이들의 엄마는 데이터 입력이나 햄버거 패티를 뒤집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결국 얻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취학 전 아동들을 이리저리 이동시키는 결과뿐이다.

    그러나 복지 혜택과 매질을 결합한 프로그램의 진짜 장점은 이 접근법이 빈털터리가 된 채 사회 가장자리로 밀려난 사람들을 향한 징벌적 분노의 분출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최하층민’이라고 애매하게 규정된 이 계층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설파한 예수의 산상수훈이 기이하게 뒤집힌 나머지 다른 어느 사회 계층보다 더 큰 분노를 사고 있다. 빈곤층을 벌줄 필요가 있다는 정서는 이미 현재의 복지 체계에 내장되어 있어서, 수급자들은 이 정부 부처에서 저 정부 부처로 계속 찾아다니며 (아이들을 데리고 다녀야 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재정 상태와 잠자리 문제, 집안일 처리 습관 등 매우 사적이고 은밀한 부분까지 까발림을 당하곤 한다. 이런 행정적 괴롭힘은 견딜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러 생활 보장 대상자 신분을 포기하는 빈곤층 여성들이 많다. 그러니 매질로 피를 볼 수 있으면 얼마나 더 생생한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 상상해 보라!


    대격차 사회: 사장들 vs. 노예들

    CEO들과 노예들. 그들은 양극화된 미국 계층 사회의 극단에 존재한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직종에서 평행적 분열(parallel splitting)이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일인자로 인정받는 수준의 대학교수들은 수십만 달러의 연봉을 받고, 거기에 더해 컨설팅 수임료나 특허 수익, 바이오테크 기업에서 받는 자문료 등을 챙기는 경우가 많다. 교수직의 다른 극단에는 한 학기에 5000달러도 안 되는 보수를 받으면서 보험 등의 혜택도 없고 종신 교수직을 받을 가능성도 없이 격무에 시달리는 강사들이 있다. 몇 년 전에 맨해튼에 있는 노숙인 쉼터에서 기거하면서 대학 강의를 다니던 강사 이야기가 화제가 된 적도 있다. 웨이트리스, 청소부 일을 하면서 강의를 하는 강사는 수없이 많다.


    미국 사회의 극심한 양극화 현상이 점점 더 심화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다 보면 ‘암흑 에너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빅뱅의 에너지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은하계들 사이의 거리를 벌리고 있는 그 신비로운 힘 말이다. 우주의 모든 물체는 다른 물체를 밀어내는 힘을 가진 게 아닐까. CEO가 CFO(재무 최고 책임자), COO(운영 최고 책임자) 등을 멸시하고 멀리하는 것처럼 말이다. “저 녀석들이 너무 가까워졌잖아. 내 보수를 더 많이, 많이, 많이 올려야 해!”


    모든 게 불법 이민자들의 탓이라면

    이제 우리 미국인들은 중남미계 불법 이민자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직업군의 생활이 어떤지를 엿볼 기회를 얻었다. 건설업, 이사업, 조경업 등에서 일하는 일용직 근로자들의 생활 말이다. 미국의 주요 대학 세 곳이 합동으로 진행한 2006년 연구에서 미국에서 일하는 일용직 근로자의 4분의 3이 불법 이민자들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들의 생활이 비참하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은 일이다. 중위 소득의 불법 이민자도 한 달 소득이 700달러에 불과하고, 대부분 건강보험은 꿈도 꾸지 못하는 데다, 절반이 한 번 이상 고용주들에게 보수를 떼였다고 응답했다.


    위에서 언급한 연구 결과 중 정말 놀라운 사실은 설문에 응답한 일용직 근로자의 49퍼센트가 그들을 고용한 주체에 대해 자영업자도 소기업도 아니었으며, 대기업은 더욱더 아니었다고 답한 부분이다. 고용주의 49퍼센트는 미국의 일반 가정이었다. 루 돕스의 프로그램에 베이 뷰캐넌(Bay Buchanan, 보수 논객이자 정치인 팻 뷰캐넌의 누이)이 출연해서 불법 이민자들을 고용하는 ‘대기업’들을 맹렬히 비난한 적이 있다. 그러나 알고 보니 현실에서는 바로 그의 이웃이 불법 이민자를 고용해 페인트칠을 하고 잔디를 깎고 있었다.


    이제 가난한 것도 범죄입니다

    노숙인과 빈곤에 관한 법률 센터(National Law Center on Homelessness and Poverty)에서 새로 발표한 보고서에서는 경기 부진으로 빈곤층이 늘어가는 상황인데도 논리나 공감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동원되지 않은 채 가난을 범죄화하는 움직임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보고서에 따르면 2006년 이후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가난함을 드러내는 행위를 처벌하는 법령의 수가 꾸준히 증가해 왔고, 무단 횡단, 쓰레기 무단 투기 행위, 뚜껑을 연 채로 알코올을 들고 다니는 것 등 ‘피해자가 없거나 사회적 피해가 크지 않은’ 위반 행위에 대한 범칙금 부과와 체포 건수도 함께 증가했다.


    빈곤층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공공 서비스 예산은 줄이고 법 집행을 강화하는 것이 패턴으로 고착된 듯하다. 학교와 대중교통 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무단결석을 불법으로 만든다. 공공 임대 주택을 없앤 다음 노숙을 불법화한다. 구직 기회가 거의 없는 상황인데 길거리에서 물건 파는 사람들을 단속한다. 빈곤층, 특히 소수 인종 빈곤층은 우리에 갇힌 채 무작위로 가해지는 전기 충격을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는 쥐와 비슷한 경험을 한다.


    복지 정책의 공공연한 비밀에 대하여

    임시 지원 프로그램이 지원자들의 접근을 최대한 막도록 고안돼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리고 그 전략은 눈부신 성공을 거뒀다. 이는 정부 보조가 게으름, 방만, 중독 등으로 얼룩지고 병든 ‘빈곤의 문화’를 장려하기 때문에 유일한 해결책은 복지 혜택을 가능한 한 빨리 중단해야 한다는 원리에 근거한 방침이다. 복지를 ‘개혁’한 직후 약 150만 명이 복지 수당 수급자 명단에서 사라졌다. 많은 경우, 가령 담당자와의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은 것 등을 비롯한 실수에 대한 ‘제재’ 때문이었다. 변덕스럽고 가혹한 행정 절차에 관한 이야기가 널리 돌았다. 그 후 2001년 불황이 닥쳤을 때도 복지 수당 수급자 수는 크게 증가하지 않았고, 이번 경기 침체에도 최근까지 그 추세는 계속됐다. 조지타운대학교 로스쿨의 복지 전문가 마크 그린버그(Mark Greenberg)의 말에 따르면 임시 지원 프로그램은 늘어 가는 수요에 대해 “놀라울 정도의 무반응”을 보이고 있다.



    몸과 마음을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

    건강과 도덕성에 대한 흥미로운 진실

    도덕성과 건강을 혼동하는 태도는 내가 다니는 피트니스 센터에서도 예외 없이 팽배해 있다. 피트니스 센터에서 현재 내건 표어는 ‘건강은 나와의 약속!’이다. 우리가 맺는 인간관계에서는 이제 거의 찾아보기 힘든 가열한 도덕성이 함축된 그 ‘약속’이라는 단어가 바로 여기에서 등장한다. 탈의실에서는 마치 기적적인 갱생의 효과를 발휘하는 교도소의 수감자들이 나누는 대화처럼 끝없는 반성과 새로이 다지는 결의만이 오간다. “아침에 도넛을 먹지 말았어야 했어요” “2주일이나 안 왔으니 오늘 그 대가를 치르게 되겠지.” 얼마나 치열하고 단단한지에 따라 서열이 매겨진다. 물렁거리고, 느리고, 쉽게 지치는 사람은 한 치의 동정도 받지 못하고 차갑게 무시당한다.


    그렇다면 우리로 하여금 마치 뭔가 순수하고 숭고한 것을 성취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달리기를 하게 만들고, 무거운 웨이트 기구를 들게 하고, 용을 쓰게 하고, 자신의 신진대사를 모니터링하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사회학자 로버트 크로퍼드(Robert Crawford)는 미국에 ‘건강 제일주의’가 팽배하게 된 시기가 중산층 사이에서 불안감이 퍼진 것과 때를 같이한다고 주장한다. 20세기 초, 경제가 혼란에 빠지고 노동 투쟁이 극심해지면서 화이트칼라 미국인 사이에 최초로 1980년대 스타일의 건강 열풍이 시작됐다. 하이킹을 하고, 자전거를 타고, 웨이트 기구를 들면서 전반적으로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말한 ‘분투하는 삶’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정수된 물을 마시고, 도정이 되지 않은 곡류를 섭취하기 위해 법석을 떨었다(에너지원으로 단것을 선호하는 경향은 여전했지만). 도를 넘긴 일부 사람은 ‘전기 벨트’, 진동 의자, 고환 받침이 있는 옷, ‘물 요법’, 오래 씹기, 관장 자주 하기 등의 방법까지 동원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계속 ‘올바른 삶’과 ‘신성한 건강의 법칙’을 되뇌며 도덕성을 내세웠다.


    제대로 따져 보면 환자의 생활 습관이나 도덕성의 결여를 탓할 수 없는 병이 엄청나게 많다. 예를 들어 암으로 인한 사망 중에서 1년에 2만 5000건은 기업식 영농법에서 아낌없이 사용하는 제초제가 근본 원인이다. 매년 1만 명의 미국인이 산업 재해로 목숨을 잃는다. 그에 더해 2만 명이 일터에서 석면, 유해 용해제, 방사능 등의 발암 물질 노출 때문에 사망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모두 예방 가능하지만 미도정 귀리나 관절에 무리를 주지 않는 에어로빅으로 예방할 수 없는 죽음들이다. 환경으로 인한, 혹은 직업으로 인한 질병은 시민이 지금보다 훨씬 엄격한 사회적, 정치적 규제를 요구해서 법제화하고 법을 시행해야 예방이 가능하다.


    심지어 건강하지 못한 생활 습관도 개인적 원인뿐 아니라 ‘환경적’ 원인 때문일 수 있다. 식습관과 흡연 습관을 예로 들어 보자. 섬유소를 열심히 챙겨 먹는 중산층은 담배를 피우고 푸드 스탬프로 감자칩과 탄산음료를 사 먹는 게토 주민을 깔보기는 쉽다. 그러나 저소득 지역에서는 편의점과 패스트푸드점이 거의 유일한 식품 판매 창구인 경우가 많고, 옥외 광고판과 텔레비전 광고가 그들이 접하는 가장 중요한 영양 관련 ‘정보’ 제공자다. 동기 부여의 문제도 있다. 자기 앞에 펼쳐진 삶이 길고 희망적이라면 담배를 끊고 단것을 덜 먹겠다는 결심을 할 만도 하다. 그러나 앞으로 대면할 삶이 그다지 길지 않고 그다지 달콤하지 않다고 판단된다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통계적으로 볼 때 섬유소를 많이 먹고 조깅을 하는 사람들은 화이트칼라 중상류층에 많다. 블루칼라와 핑크칼라(사무실과 식당 등에서 주로 여성들이 종사하는 저임금 직종-옮긴이) 직종 종사자들은 에비앙보다는 버드와이저를, 데친 연어보다는 미트로프를 선호한다. 그리고 그중 많은 수가 여전히 흡연자다. 전문직 및 관리직 종사자들 사이의 흡연자 비율이 35퍼센트인데 반해 블루칼라, 핑크칼라 직종 종사자 중 51퍼센트가 담배를 피운다. 이런 사실은 사회적 우려를 촉발해야 마땅하다. 간부들뿐 아니라 조립 라인 노동자들에게도 맞는 심혈관 강화 피트니스 프로그램을 특별히 고안해야 하지 않을까? 트럭 기사들과 타이피스트들에게 피트니스 센터 할인권을 발급하는 것은 어떨까? 극빈층에게 영양제를 공급하는 것도 좋겠다. 그러나 건강 제일주의는 그런 조치를 취하는 대신 오래 지속된 편견만 강화하는 것에 그치고 만다. 건강한 생활 습관이 뛰어난 도덕성의 표현이라면, 노동자 계층은 촌스럽고, 예의가 없다는 등 지금까지 우리가 믿도록 만들어져 온 모든 편견이 맞을 뿐 아니라 도덕성까지 결여돼 있다는 뜻이 된다.



    여성들이 계속 써야 하는 이유

    ‘여성’ 기업가들을 위한 성공 전략

    여성 기업인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가장 뻔한 반페미니즘적인 답, 즉 생물학적으로 여성은 성공적인 기업 경영에 맞지 않는다는 답은 갤리스의 연구가 의미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자녀를 둔 여성은 기동성이 높은 독신 여성에 비해 결코 야심이 적지 않았다(조사가 진행된 1982년 당시 남편 혹은 자녀를 둔 여성은 소수에 지나지 않긴 했다). 그러나 가장 뻔한 페미니즘적인 답, 즉 여성이 성차별로 인해 좌절하거나 설 자리를 잃는다는 답은 『우리 같은 여자들』에 의해 다시 한 번 확실하게 증명된다. 75년간 하버드 MBA를 졸업한 여성 중 많은 수가 남성 동료들에게 무시와 모욕을 당한 경험이 있었고, 승진 기회를 남성 동료들에게 빼앗겼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아무리 강한 결의에 찬 페미니스트일지라도 허버트 J. 프로이덴버거 박사(Dr. Herbert J. Freudenberger)와 게일 노스(Gail North)가 그들의 저서 『여성의 번아웃(Women's Burnout)』에서 거론한 ‘기업인으로서의 번아웃’을 경험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반페미니스트,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갤리스와 그가 인터뷰한 여성들과 같은) 포스트페미니스트들에게 성차별은 훨씬 더 큰 상처를 남겼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런 차별은 보이지도 않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어쩌다 무작위로 벌어지는 ‘차별’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그런 현상에 대해서 어떤 조치를 취한다는 꿈조차 꿀 수 없는 것이다.


    갤리스는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어떤 형태의 차별보다 근절하기가 훨씬 더 어려울 가능성이 있는 문제다. 호르몬 혹은 역사적인 원인으로 여성들이 갖게 된 인성과 기업의 비인격적인 관료 문화가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추측이다. 동창 중 가장 성공했고, 동료 인간들과 완전히 다른, 괴물 같은 수전은 그 규칙을 증명해 주는 예외적인 사례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꼭대기까지 오르는 데 성공한 남성들은 완전히 지루하고 남성으로서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갤리스는 어쩌면 그들이 인간적 유대를 얄팍하게 유지하면서 온 정신을 최종 결산 결과에 집중해야 하는 기업 문화에 이상적으로 맞아떨어지는 생물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충고들을 쏟아 내는 책들에 따르면 우리가 이제까지 알고 있던 것과는 달리 기업 문화가 베버가 그리는 엄격하고 비인격적인 성격만을 가진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여성 기업인들에게 ‘어떻게 하면 더 남성처럼 행동할 수 있는지’를 가르치는 부류를 대표하는 책 『더 라이트 무브스』에서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친구라는 생각을 버려라”라고 조언한다. 관료주의적 인성을 가지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딱 맞는 좋은 충고다. 그러나 동시에 동료들이 자신을 ‘냉담하고 오만하다’고 생각할 위험을 피하기 위해 ‘우정의 환상’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기업 문화에 맞는 ‘인위적으로 따뜻하지만, 진심을 담은 친절은 베풀지 않는’ 유의 성격을 갖기 위해 가식적으로 꾸며야 한다는 뜻이다.


    여성 기업인들이 문제를 겪는 것에는 더 깊고 실존적인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을 위한 자기 계발서를 훑다 보면 이토록 애면글면하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의아해하지 않을 수가 없다. 4만 달러 내지 5만 달러 연봉에 스톡옵션과 내부 수입 할당을 받는 정도로 만족하면 안 될까? 여성 기업인들을 위한, 그리고 그들에 관한 문헌들에서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개인적인 출세 말고는 이런 ‘게임’을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거의 거론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버드대학교 졸업생들이 됐건 자기 계발서에 익명으로 인용된 여성들이 됐건 자신을 넘어선 초월적인 책임감, 가령 하다못해 더 나은 장치를 만들어 내겠다는 목표 같은 것을 언급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탈산업화 시대의 미국 기업에서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없다면 뭔가 더 숭고한 조직적인 목표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ㅇㅇ 기업을 서구 최대 기업으로 키우고 싶다는 유의 목표 말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기업인의 삶에서 추구하는 거대하고 원대한 비전은커녕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자본주의의 도덕적 목적성에 대한 의식조차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신 성공한 여성 기업인들은 “지금 내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을까? 이렇게 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와 같은 질문만 하거나 “뭔가가 빠진 느낌이에요” 하고 우울함을 털어놓는 것에 그친다.



    중산층 몰락 사회의 탄생

    미들 클래스 드림의 종언

    계층은 그 자체가 매우 혼란스러운 개념이다. 특히 직업군이나 군에 따라 각각 다른 이해관계를 가졌다는 암시만으로도 ‘계급 투쟁’을 선동한다고 비난받는 미국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계층이라는 것이 모종의 ‘계급 의식’ 혹은 담합이나 일치된 행동이 따르는 개념이라면 ‘중산층’은 일종의 디폴트 계층이다. 부유층과 빈곤층을 제외하면 남게 되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은 계층 말이다.


    그러나 중간 소득 계층에서 벌어져 온 일들에 관해 더욱 생산적일 수 있는 또 다른 해석이 있다. 1977년, 우리는 ‘전문직-경영인 계층(Professional-Managerial Class)’ 줄여서 PMC를 따로 분류하자고 제안했다. 그들은 노동자 계층과도 다르고 소기업을 소유한 ‘구’ 중산층과도 구분되며, 물론 부유한 자본가들도 아니기 때문이다.


    전문직-경영인 계층 PMC의 기원

    부상하는 PMC와 전통적인 노동자 계층 사이의 관계는 처음부터 갈등의 골이 깊었다. 다른 전문직 종사자들도 비슷하지만, 특히 관리자들과 기술자들은 직업상 노동자 계층의 삶을 관리하고, 통제하고, 제어하는 일을 한다. 그들은 분업을 주관하고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생활을 분초 단위로 제어하는 기계를 고안하고, 상품에 대한 욕구와 의견을 조작하며, 그 자녀들의 사회화에 영향을 주고, 심지어 그들과 그들의 신체 사이의 관계까지 간섭을 한다.


    동시에 사회의 ‘합리성을 추구’하는 PMC의 역할 때문에 그들은 자본가 계층과 직접적으로 충돌한다. PMC는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기업주에게 고용된 직원이자 하급자다. 그러나 생산 과정에서 진정으로 ‘합리적’인 것이 단기적인 이윤을 내는 최선의 방법이 아닐 때가 많기 때문에 PMC는 자본가와 기업들로부터 자율권과 자유를 원하는 경우가 많다.


    20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PMC가 종사하는 직종이 급증했다. 공교육이 강화되고 현대적인 대학 교육이 도입되었으며 지방 정부의 규모와 역할이 커졌다. 동시에 자선 단체들이 생겨나고 신문 판매 부수가 치솟았으며 전통적인 방식의 여가 활동 대신 대중 음악과 엔터테인먼트 산업, 스포츠 산업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다. 그리고 이 모든 발전은 저널리스트, 사회 복지사, 교수, 의사, 법조인 그리고 ‘예술인(화가, 작가 등을 포함)’ 등 고등 교육을 받은 전문가들을 위한 일자리의 증가로 이어졌다.


    자본가들의 반격

    1970년대부터 자본가 계층은 자신들의 입지를 단호하게 재확립했다. 그 후 벌어진 자본가들의 반격은 물리적으로, 이념적으로 너무도 철저했고 최근의 좌파 이론가들은 그 움직임에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 즉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을 붙였다.


    새로운 경영 전략은 노동 비용을 철저히 줄여서 이윤을 올리는 데 집중됐다. 이 목표를 달성하는 가장 직접적인 전략은 노동력이 싼 해외로 제조업을 이전하는 일이었다. 미국 내에 거주하면서 일자리를 잃지 않은 고용인들은 이전 어느 때보다 더 많은 면에서 엄격한 규율 적용과 제어를 받게 되었다. 일터에서 행해지는 감독이 더 강화됐고, 태만한 사람들을 걸러 내기 위한 약물 테스트가 실시됐으며, 노조 결성을 방지하기 위해 점점 더 전문적인 기술이 동원됐다. 복지 국가의 축소 또한 징계를 강화하는 효과를 발휘해서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어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점점 잃어 갔다.

    이러한 반노동 조치의 대부분이 직간접적으로 PMC의 여러 요소에 영향을 끼쳤다. 정부 지출 삭감은 사회 복지사, 교사, 그리고 ‘돌봄 산업’ 종사자들의 일자리 전망을 어둡게 했고, 미국 내 산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 계층이 대량 축소됨으로써 중간 관리자들에 대한 수요 또한 줄어들어 인원 감축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점점 잦아졌다. 그러나 자유업 종사자들에 대해서는 특별한 종류의 반감이 존재했다. 이 감정은 보수주의자들이 ‘최하층’이라고 묘사한 대상에 대해 신자유주의자들이 품은 반감에 거의 필적할 만큼 강한 것이었다. ‘좌파에 대한 재원 말리기 전략’을 통해 이 진보 엘리트들 혹은 좌파 성향의 비영리 조직들을 말살시키는 것이 신자유주의자들의 주된 프로젝트 중 하나가 되었다.


    그 후, 그러니까 지난 12~13년 사이 PMC는 1980년대에 산업 노동자 계층이 겪었던 운명을 경험해야 했다. 값싼 해외 노동력이 이들을 대체하기 시작한 것이다. 2000년대에 접어들자 기업들은 새로 개발된 고속 전송 기술들을 도입해 전문직 업무까지 아웃소싱하기 시작했고, 이 추세는 많은 PMC 종사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계층 의식은 어디로 갔나

    탄생한 지 100여 년이 지났지만 PMC는 그들만의 계층을 만들어 내는 데 실패했다. 그들 중 좀 더 잘사는 부류인 기술을 갖춘 전문가들은 동료들을 버리고 보수가 더 좋은 직종을 찾아 자본에 봉사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고, 과학자들은 연구를 그만두고 월스트리트로 향하고 있다. 물리학자가 금융계의 투자 분석가 혹은 부자들을 위한 ‘맞춤 투자 서비스’를 시작하면 하루아침에 수입이 2배가 된다. PMC 중 가장 운이 없는 부류인 저널리스트나 사회학, 문학 박사들은 소매업 종사자로 전락했다. 그 중간에 속하는 의료인, 법조인, 교수 등은 대기업에 의해 자신의 삶이 점점 더 포위되고 심하게 조정되는 경험을 하고 있다. 중간층은 버티지 못했다. ‘중산층’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나서 시민의 덕목과 헌신적인 직업의식을 가진 계층이라 자부하던 PMC는 그렇게 무너져 버렸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PMC가 품었던 꿈, 즉 이성이 지배하고 공공 윤리가 투철한 전문가들이 이끄는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꿈이 이제 완전히 신뢰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전 세계적으로 이 목표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는 듯 보였던 나라들은 엄청난 군사력을 갖춘 독재 국가가 됐거나, 좀 더 최근 들어서는 전체주의적 자본 국가로 변신하고 있다. 미국 내 신자유주의자들은 중국과 소비에트 연방의 사회주의가 터무니없이 실패한 것을 선전 도구로 사용해서 가장 기본적인 공공 분야를 공격하고, 거의 모든 것을 민영화하기 위한 핵심 논리로 삼고 있다.


    그러나 PMC 스스로도 ‘공동의 대의를 옹호하는 자’라는 평판을 잃는 데 한몫했다. 빛나는 의학 연구 성과와 첨단 헬스 케어 산업이 존재하지만, 그 바로 옆에 극심한 빈곤과 짧은 평균 수명이 특징인 도시 빈민가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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