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은 당신을 배신하지 않는다
 
지은이 : 조윤제
출판사 : 21세기북스
출판일 : 2021년 06월




  • 무엇이든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그 안에서 끊임없이 비교하고 경쟁한다. 속도와 경쟁으로 점철된 시대,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만들고 나의 주관과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공부해야 할까. 베스트셀러 『다산의 마지막 습관』으로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공부를 도왔던 저자가 이 책에서 동서양 고전에 담긴 불변의 진리와 인생에 관한 예리한 통찰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고전은 당신을 배신하지 않는다


    어제의 삶에서 찾은 인생의 태도 세 가지

    버려라 _ 급변하는 내일에 도태되지 않기 위하여

    공자가 말한 삶을 바꾸는 가장 확실한 방법

    우리가 보기에 강은 그대로 있지만, 그 강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따라서 조금 전에 우리가 발을 담갔던 그 강물은 이미 흘러갔고, 지금 발을 담그고 있는 강물이 아니다. 이 비유는 겉으로 보기에는 변화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자연의 이치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변화하는 세상을 살고 있고, 그것을 느끼든 느끼지 않든, 스스로 변화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 역시 변화하며 살고 있다. 우리가 스스로 변화해나간다면 변화를 우리가 주도하는 것이고, 만약 스스로 변화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변화에 휩쓸려갈 수밖에 없다. 결국, 내가 전혀 의도치 않은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어차피 변화할 수밖에 없다면 스스로 변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스스로 변화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공부다. 진정한 공부란 나 자신이 변화하여 생각이 바뀌고 삶이 바뀌는 것이다. 공부를 통해 그동안 모르고 있던 새로운 지식이 내 머릿속에 들어가면 내 생각이 바뀐다. 내 생각이 바뀌면 세상을 보는 사고방식이 바뀌고, 행동이 바뀐다. 내 삶의 의미와 가치관이 변화하고, 그에 따라 내 삶도 바뀐다. 공자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던 말이 이것을 뜻한다. 내가 마치 죽었다가 깨어날 정도로 바뀌는 것이 진정한 공부다. 『변신』의 작가 카프카는 유일하게 진실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했던 절친한 친구 오스카 폴락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를 깨물고 찌르는 책들을 읽어야 할 거야. 만일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질로 두개골을 깨우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는단 말인가? 자네가 쓰는 식으로, 책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라고? 맙소사, 만약 책이라고는 전혀 없다면 그 또한 우리는 정히 행복할 게야. 그렇지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고통을 주는 재앙 같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 같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멀리 숲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들이지.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변화를 위한 또 한 가지는 단 한 번의 이벤트가 아니라 날마다 변화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고대 중국 은나라의 명군주 탕왕이 자신의 세숫대야에 새겨 두고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했다는 고사 “진실로 새롭게, 날마다 새롭게, 또 새롭게”처럼 변화란 날마다 쌓아나가야 하며 꾸준히 계속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성공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완전하게 변화해야 한다. 조금 모양을 바꾸고 방식을 바꾸는 것으로는 진정한 변화를 만들 수 없다. ‘환골탈태’해야 한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의 문장을 본떠서 완전히 새로운 문장을 만든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하지만 요즘은 낡은 제도나 관습을 바꾸고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으로 많이 쓰인다. 우리 개인도 역시 변화를 할 때 이러한 환골탈태의 정신으로 완벽하게 다시 태어날 수 있어야 한다.


    우물 안 개구리가 가지고 있는 세 가지 한계

    ‘우물 안 개구리’는 결코 세상의 거대함을 꿈꾸지 못한다. 한 번도 우물 바깥을 보지 못했고, 넓은 세상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지 동그란 동전 크기로 보이는 하늘이 그에게는 우물 밖 세상의 전부다. 마찬가지로 그 어떤 동물도 자신이 알고 있는 본능적인 지식 이상의 능력을 발휘할 수는 없다. 자연의 법칙을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물 안 개구리는 그곳에 만족하며 안주하기 마련이고, 여름만 사는 곤충은 아무리 애를 써도 물이 얼음이 되는 겨울까지 살 수는 없다. 이처럼 그 어떤 동물도 자신이 알고 있는 본능적인 지식 이상의 능력을 발휘할 수는 없다. 이러한 한계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활동하는 공간, 주어진 시 간, 그리고 알고 있는 지식의 한계다.


    공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길은 어디에 머무를지를 아는 것이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대학자 다산 정약용은 일찍이 환경의 중요성을 통찰했다. 아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비록 자신은 귀양을 오고 가문은 폐족이 되었지만, 아들들에게는 서울을 떠나지 말라고 당부했다. 오늘날과 같이 좋은 학군을 찾거나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비록 어려운 처지지만 미래의 희망과 이상을 지키려면 반드시 보고 듣는 것이 있는 서울에 머물러야 한다는 절절한 가르침이다.


    시간의 한계는 사람 역시 자연과 다를 바 없다. 누구나 주어진 수명 이상 살 수 없고, 하루는 누구에게나 24시간이다. 아무리 유능해도, 권력이 있어도, 부유해도, 가지는 것은 오직 24시간이다. 이를 두고 보면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것이 시간이다.


    하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차이가 생긴다. 시간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은 자신의 소중한 삶을 위해 시간을 아끼며 자신의 꿈을 이루어간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을 생각 없이 흘려보낸다면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시간을 대하는 태도는 자신의 삶을 대하는 태도와 같은 것이다. 전국시대의 영웅 제갈량은 아들 첨에게 반드시 시간을 아껴야 한다고 가르치며 시간에 대한 통찰을 전해준다.


    지식의 한계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오직 지식의 습득만을 목적으로 삼는 공부다. 머릿속에 담는 지식만을 위한 공부는 온전히 나의 것으로 삼지 못하고 당연히 실천할 수도 없다. 간혹 잘못된 지식이나 오류가 있어도 걸러내지 못하므로 공부로 인해 오히려 해를 입을 수도 있다.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이런 한계를 갖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하지만 동물들과는 달리 사람은 이러한 모든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더 나은 미래,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과감한 도전을 통해 주어진 환경의 한계를 벗어날 수도 있다. 위기의 순간이 닥쳤을 때, 절대 포기하지 않는 의지와 상황을 읽는 통찰력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도 있다. 지식과 경륜을 갈고 닦아 남들이 가지 못했던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도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삶의 의미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다. 삶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알고, 나의 존재 의미를 분명히 하는 정체성의 확립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 삶을 사는가? 그 삶을 통해 무엇을 남길 수 있는가? 크고 대단한 꿈만이 위대한 것이 아니다. 작은 우물 안이라는 환경을 과감히 뛰어넘어 세상으로 나가고자 하는 의지가 바로 그 시작이다. 그리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해 한 걸음 내디디면 삶의 위대한 도전은 시작된다.


    흔들려라 _ 마음은 원래 말을 듣지 않는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어른의 조건

    맹자는 ‘부끄러움의 철학자’라고 불려도 좋을 만큼 부끄러움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맹자가 말했던 것은 부끄러움 그 자체라기보다는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그만큼 사람에게 중요하다는 것인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인 ‘수오지심’으로부터 맹자가 가장 중요시했던 ‘의’가 발현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맹자는 목숨보다 더 의를 소중히 여겼다. 『맹자』고자 상에서 그는 “물고기도 내가 먹고 싶고, 곰 발바닥 요리도 욕심이 나지만 이 둘을 모두 가질 수 없다면 당연히 물고기는 포기하고 곰 발바닥 요리를 택할 것이다. 삶도 내가 바라는 것이고 의도 내가 역시 바라는 것인데, 이 둘을 함께 취할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를 택한다”라는 유명한 문장을 남기기도 했다.


    맹자는 이러한 주장들을 통해 부끄러움이란 사람을 바르게 살도록 이끄는 중요한 감정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설사 나쁜 일을 했을지라도 그 일을 부끄러워할 수 있다면 자신을 바로잡고 잘못을 고칠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동양의 철학자들은 모두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공자는 “잘못이 있어도 고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잘못이다”라고 했고, 심지어 자신의 근심거리 네 가지를 말하면서 ‘잘못을 고치지 못하는 것’을 그 중의 하나로 꼽기도 했다. 유교의 시조이자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대철학자의 고백으로는 너무 사소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여기서 새겨야 할 지점이 있다. 스스로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단지 열심히 노력할 뿐이라는 진정한 성찰의 자세는 그 누구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바른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동양의 사고관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끄러움에 대해 대단히 엄격하다. 그는 아직 경험이 적고 경륜이 무르익지 않은 젊은이들은 부끄러운 일을 저지를 수 있지만, 나이 든 사람은 그 어떤 부끄러운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훌륭한 사람은 아예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부끄러움이란 자신이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는 자각에서 비롯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생각조차 해서는 안 된다고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 설사 잘못된 일을 하고 부끄러워한다고 해서 스스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서양의 엄격함보다는 동양의 관대함이 좀 더 편히 받아들일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역시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이미 공자나 맹자와 같은 성인들도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았는가. 단지 우리는 언제든지 부끄러운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부끄러움은 한자로 ‘치’라고 하는데, 풀이해보면 ‘귀 이’와 ‘마음 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귀로 자기의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는 뜻이다. 은밀히 있는 자기 마음의 소리를 들어보면 자신이 부끄러운 일을 했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고치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진정한 용기란 부끄러운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자존심, 자만심, 자기연민, 자기합리화, 나를 꾸미고 싶은 모든 허식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는 것이다.


    스스로 나는 부족하다는 인식, 그것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자세. 이러한 겸손과 솔직함을 바탕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일을 멈추지 않을 때 하루하루 나아지는 자신을 만들어갈 수 있다. 결국, 부끄러움이란 우리가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이다. 우리가 사람답게 살고 있다는 증거다. 그 시작은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이른 새벽 시간, 나만의 동굴에서 예전의 ‘나’를 만날 때, 새로운 ‘나’를 시작할 수 있다.


    솔직하게 바라보고, 겸손하게 인정하라

    ‘성찰’. 과거 뛰어난 선비들이 스스로 수양하고 정진하기 위해 취했던 기본적인 삶의 자세를 뜻하는 말이다. 국어사전에서는 “자신의 일을 반성하며 깊이 살핌”이라고 풀이하고, 한자 사전에서는 “허물이나 저지른 일들을 반성하며 살피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두 사전 모두 반성이라는 말과 살피는 것이라는 의미가 공통으로 들어가 있다.


    한자를 보면 ‘성’은 ‘적을 소’와 ‘눈 목’으로 구성된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살핀다’는 의미다. 사람들이 집중해서 무언가를 볼 때 나오는 모습이다. ‘찰’은 집의 머리를 뜻하는 ‘갓머리’와 ‘제사 제’로 구성된다. 제사를 지내는 장소와 자세는 가장 경건하고 정성스러워야 하는 만큼 역시 조심스럽게 잘 살펴서 행해야 한다. 결국, 성찰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솔직함과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할 수 있는 겸손함과 자신의 잘못을 즉각 고칠 수 있는 실천 정신을 기본으로 한다. 이러한 자세가 바탕이 될 때 진정한 성찰이 될 수 있고, 자신의 삶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어갈 수 있다.


    서양철학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소크라테스는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삶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성찰에 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던 성찰은 “나 자신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단지 아는 것은 내가 모른다는 사실이다”라는 ‘무지의 지’를 핵심으로 한다. 이처럼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것은 바로 진리를 찾는 첫걸음이 된다. 그 바탕이 되는 것이 생각이다. 그리고 그 수단은 질문과 대화다. 생각을 통해 세상의 진리를 알고, 질문을 통해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무지를 깨닫고, 진리를 찾는 여정을 시작했던 것이다.


    동양철학은 성찰의 의미를 자기수양에 두었다. 먼저 나 자신을 바르게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서삼경 중의 하나인 『대학』의 핵심적인 구절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다. 먼저 자신과 집안을 바르게 수양한 다음에 나라를 다스려야 종국에는 천하가 평안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잘 아는 내용인데, 『대학』에는 수신의 전 단계로 네 가지가 나온다. 바로 ‘격물치지성의정심’다. 세상의 이치를 궁구하여 지식을 충실하게 하고, 그다음 반드시 올바른 뜻을 세우고 바른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할 때 개인의 수양이 완전해질 수 있고, 세상을 향해 나아갈 자격이 생긴다. 이런 과정을 충실히 하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할 것이 바로 성찰의 자세이다.


    내면의 충실함을 갖추고, 진실하게 자신을 드러내어 남을 배려하는 모습은 자기수양과 공부로 얻을 수 있다. 그 시작은 날마다, 순간마다 진실한 자신의 모습을 냉철하게 볼 수 있는 신독의 자세를 갖는 것이다.



    내일의 삶을 채워줄 네 가지 공부

    나를 완성하는 공부 _ 온전한 ‘나’의 삶을 살기 위하여

    습관이 오래되면 천성이 된다

    에우에노스는 기원전 5세기의 수사학자이자 소피스트인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말을 인용하면서 습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다. 습관은 본성과도 같지만 그래도 본성보다는 바꾸기 쉽다는 것이다. 이어서 결론처럼 말했던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잘 말해준다.


    “친구여, 내 이르노니, 오랜 기간 수련하다 보면 그것이 결국 사람의 본성이 된다네.”


    아마 이 말이 아리스토텔레스가 하고 싶었던 말일 것이다. 결국, 습관이란 의식적인 노력으로 마치 본성처럼 몸에 익힐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덕적 미덕을 설명하면서도 습관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도덕적 미덕이란 지혜, 직관, 분별력 등을 뜻하는 지적 미덕과 함께 아리스토텔레스가 추구했던 미덕의 하나이다. 관대함, 명예로움, 진실함 등 사람의 도덕성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들은 사람에게 본성적으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습관화하면 마치 본성처럼 체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아주 어릴 때부터 어떤 습관을 들이느냐에 따라 사소한 차이가 아니라 큰 차이가, 아니 모든 차이가 생겨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공부에도 습관은 중요하다. 지혜를 가장 사랑했던 철학자들은 마치 공부가 자신의 삶인 것처럼 즐겁게 공부를 했다. 그리고 그 공부를 통해 인생의 행복도 찾았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 그런 경지에 이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 해답은 동양의 고전에서 찾을 수 있다. 『중용』에서는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를 잘 말해준다. 어리석은 사람도 현명해지고, 연약한 사람도 굳세어질 수 있고, 어떤 고난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해주는 공부는 바로 이렇게 해야 한다.


    “배우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배울진대 능통하지 못함을 그냥 두지 말며, 묻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물을진대 알지 못함을 그대로 두지 말며, 생각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생각할진대 얻지 못함을 그대로 두지 말며, 분별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분별할진대 명백하지 못함을 그대로 두지 말며, 행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행할진대 독실하지 못함을 그대로 두지 마라. 남들이 한 번에 능하거든 나는 백 번을 하고 남이 열 번에 능하거든 나는 천 번을 해야 한다.”


    배움에 대한 열망을 말해주는 것이지만, 이 구절에 습관의 비밀이 있다. 단숨에 깨닫는 것도 좋지만, 타고난 천성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면 반복을 통한 습관화로 얼마든지 경지에 이를 수 있다. 남들보다 힘들고 조금 더 노력해야 할지 몰라도 그 가치는 변함이 없다. 아니, 타고난 천성을 지닌 이보다 더 의미 있고 소중할 것이다. 타고난 천성이란 목적지에 조금 더 일찍, 쉽게 도달하는 방법일 뿐이다. 자칫 방심하면 샛길로 빠질 수 있다. 쉽게 이룬 것이니 그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교만해질 수도 있고, 삶에서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을 놓칠 수도 있다. 꾸준히 노력하고 힘써 행하는 좋은 습관이 배움의 진전, 인생의 성공을 좌우한다.


    순자가 말하는 진정한 배움의 의미

    공자가 학문 그 자체의 즐거움 외에 배움의 목적으로 두었던 것은 두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는 스스로를 수양하고 실력을 배양하여, 나라와 천하를 평안하게 하려는 뜻이 있었다. 배움을 통해 사랑으로 다스려지는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함이었다. 그래서 공자는 현실정치에도 많은 관심을 두었는데, 권력자로서 풍요로운 삶을 누리려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감화시켜 이끄는 ‘덕의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자신은 물론 모든 위정자들이 올바른 배움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의 생각을 한마디로 집약해 보여주는 것이 ‘고지학자위기 금지학자위인’라는 성어로 “옛날 학자는 자신을 위해 공부했고, 요즘 학자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공부를 한다”는 뜻이다.


    공자가 가졌던 또 다른 공부의 목적은 가르침이다. 공자는 배움을 순수한 자기만족에 두지는 않았다. 배움을 통해 스스로를 성장시키고 학문의 발전을 이루었다면 당연히 그 배움은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한다. 배움이 흐르고 흘러야 점차 더 좋은 세상을 이룰 수 있다는 진정한 통찰이다. ‘배워서 남 주나’가 아닌, ‘배워서 남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진정한 배움의 목적을 공자는 절실하게 실감하고 있었다.


    또한 학문을 통해 스스로도 성장해나갈 수 있어야 한다. 즉, 배움에 대한 겸손이 뒷받침되어야 가르치는 일이 즐거움이 될 수 있다. 내가 평생을 두고 이룩한 학문이 세상에 퍼져 나가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심지어 대를 이어서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이처럼 동양의 철학자들은 설사 그 철학의 대강은 다를지라도 배움에 대한 생각은 일치했다. 배움이란 나의 성장을 위한 것이지만 그에 그쳐서는 안 되며 가르침으로 이어져 내려가야 한다. 하지만 단순히 배운 것만 전달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생각과 연구를 거쳐 더 새롭고 창의적인 것을 만들어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배우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배움의 단계에서부터 배움에 대한 열망, 배운 것을 표현할 수 있는 표현력, 그리고 하나를 미루어 새로운 것을 아는 창의력과 상상력을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 공자가 “한 모퉁이를 들어 보였을 때 나머지 세 모퉁이를 알지 못하면 반복해서 가르쳐주지 않는다”라 고 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바로 이런 사람이 배움의 결과를 얻을 수 있고, 후에 가르침의 자리에 섰을 때 창의적인 가르침을 줄 수 있다.


    삶과 사람에 대한 공부 _ 본질을 깨달아 핵심을 통찰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인간의 본성

    아리스토텔레스는 ‘앎’을 단순히 지식을 아는 것이나 지적 호기심이 아니라 사물과 세상의 근원에 대한 인과관계를 아는 것에 가장 중점을 두었다. 그래서 그는 개별적인 것에 대한 앎인 ‘경험’보다 보편적인 것에 대한 앎인 ‘기술’이 더 차원이 높다고 여겼고, 특별한 목적을 위한 기술보다 이론적인 학문이 더 지혜롭다고 여겼다. 바로 원리와 원인을 찾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물을 인식하고 느끼는 것을 좋아하고, 세상과 사물의 근원을 파악하려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현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지식을 얻고자 하는 욕구가 우리에게 내재된 본능이라는 사실을 느끼고 있다. 다른 동물들이 가진 생존을 위한 본능이 아니라 창의적이고 발전적인 관점에서의 본능이다. 인류만이 가지고 있는 지적 활동에 대한 본능이 인류의 발전을 이끌었다는 데 이론을 가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무언가를 알고자 하는 호기심이 창의적인 사람의 것만이 아닌 우리 모두에게 보편적인 욕구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이러한 앎에 대한 열망을 잊게 되었다. 특별히 다른 무언가를 탓하고 비난하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학교 교육이라는 시스템 때문이라는 데 이론을 가질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시험에서의 좋은 성적과 상급 학교의 진학이라는 현실적 한계 때문에 개인의 창의성을 발휘할 수도, 자신의 적성에 맞는 배움을 얻을 수도, 배움의 즐거움을 누릴 수도 없는 것이다.


    지식은 좋은 직업을 얻기 위한 도구나 성공을 위한 도약대로 인식되어왔다. 물론 이러한 지식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지식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사는 것도 역시 중요하다. 실제로 지식은 우리를 잘살게 하는 충분한 힘이 있다. 하지만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더 좋은 삶을 사는 데는 부족하다.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갖지 못했을 때는 채워지지 않는 욕심 때문에 힘들고, 가졌을 때는 그것을 잃을까 두렵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가질수록, 더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불행한 사람을 많이 본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마음이 빈 허망함이 가장 큰 이유다. 욕심으로 지금껏 달려왔기에 그 어떤 자리에 있어도, 아무리 많은 것을 채워도 만족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이들은 행복할 수 없다.


    이들에게는 행복을 위한 진정한 배움의 길, 순수한 관조적 활동으로서의 배움이 필요하다. 바로 삶의 행복을 채워주는 배움, 어떤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닌 그 자체로 즐거움을 주는 배움이 필요한 것이다. 다양한 취미활동, 풍부한 경험 쌓기, 진실한 교제, 사람에 대한 학문인 인문학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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