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친절한 세계사
 
지은이 : 미야자키 마사카츠(역:김진연)
출판사 : 미래의창
출판일 : 2021년 03월




  •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이 대하드라마의 관전 포인트는 역사의 ‘맥’을 잘 짚는 것이다. 저자는 35개의 ‘키포인트’를 제시함으로써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던 사건이나 현상을 요소 요소에 배치했다. 또한 세계사의 큰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지도들을 전면에 배치하고 책의 설명을 뒷받침하는 지도들이 중간에 삽입되어 있어 이해를 돕고 있다. 세계사가 너무 방대해서 공부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거나, 빠른 시간에 세계사의 주요 포인트를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권한다.


    세상 친절한 세계사


    세계사의 기원

    ‘대지구대’에서 시작된 여행

    인류의 고향은 어디인가?

    단번에 감이 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지구상에 널리 분포된 인류의 기원은 ‘대지구대’라 불리는, 동아프리카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거대한 대지의 틈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곳에서 실로 인류의 99% 이상이 살았고, 아주 최근에서야(최근이라 해도 약 3만 년 전이지만) 인류가 지구 각지로 이동했으리라 추측된다.


    대지구대 중에서 가장 낮은 토지가 북동부에 위치한 해발 마이너스 153미터의 아파르 분지인데, 약 450만 년 전 그 땅에 직립두발보행 인류의 최초 조상인 라미두스 원인이 출현했다. 이후 약 260만 년 전부터 한랭한 기후로 인해 빙하가 발달하고, 해수면이 내려가는 빙하기와 온난한 간빙기가 반복되는 격심한 자연변화 속에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원시인, 구인 등이 출현했고, 약 20만 년 전에는 우리의 직접적인 조상인 호모사피엔스가 출현했다.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인류는 수렵 및 채집활동을 하면서 계속 이동했다. 이들이 일생 동안 10킬로미터 이동했다고 하면 대지구대에서 중국까지는 2만 년 하고도 수천 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이처럼 인류는 머리가 아득해질 정도의 긴 시간에 걸쳐 천천히 영역을 넓혀나갔다.


    참고로 빙하기에는 해수면이 지금보다 대략 130미터나 낮았기 때문에 시베리아와 알래스카가 넓은 면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동해도 거대한 호수였다. 인류의 조상은 이런 상황 속에서 아프리카, 유라시아에서 남북 아메리카, 호주로까지 퍼져 나갔다.


    세계사의 다음 무대는 ‘대건조지대’로

    ‘건조한 기후’가 세계사의 토대를 만들었다?

    약 1만 년 전에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자 북위 30도를 사이에 둔 북위 40도에서 20도까지의 유라시아 남부에서 극심한 건조기후가 진행되었다.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의 광대한 지역이 사막과 초원으로 변해 사람들은 극심한 건조기후와 싸워야만 했다. 일본열도처럼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에서는 평화로운 수렵 및 채집활동이 이어졌지만, 같은 시기 서아시아에서는 대지구대의 북쪽 출구에 해당하는 요르단 계곡에서 발견된 건조기후에 강한 밀씨가 동쪽의 메소포타미아, 서쪽의 이집트에 전해지면서 밀을 식량으로 하는 특수한 농업사회가 발달했다. 건조한 기후와 식량 부족이 새로운 생활 스타일의 어머니가 된 것이다. 건조기후에 강한 밀류의 종자(곡물)를 식량으로 삼게 된 일류는 ‘밭’을 일구고 곡물을 수확하기까지의 일정기간 동안 토지에 머무르게 되었다(정착). 이것이 바로 약 9,000년 전에 일어난 ‘농업혁명’이다.


    목축사회는 이렇게 출현했다

    약 9,000년 전 ‘비옥한 초승달 지대’(팔레스타인에서 이라크에 이르는 지역)에서 밀 재배가 시작되었다. 강수량이 꽤 높은 중국 내륙지역에서는 작은 조와 수수에 의지하는 농업사회가 발달했다. 서방에서 중국으로 밀이 전해진 것은 한나라 시대 이후다. 습윤한 양자 강 유역에서는 오래전부터 쌀이 재배되었지만, 쌀이 중국의 주식이 된 것은 당나라 때 일이다.


    한편 야생동물에게 밭은 최고의 먹이였다. 인류는 먹이를 찾아 밭으로 몰려드는 염소, 양 등 동물의 특징을 파악하여 마침내 그것을 귀중한 단백질원으로 관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목축이다. ‘목축’의 중심지는 오랜 세월에 걸쳐 점차 ‘밭’에서 벗어나 풀을 풍부하게 얻을 수 있는 복쪽 초원지대로 이동했다. 그리고 수컷 주위에 암컷에 무리 지어 생활하는 습성을 지닌 양, 염소, 소, 말, 낙타 등의 우제류 동물을 ‘무리’로 사육하는 ‘목축’도 보급되었다. 참고로 건조한 기후와 햇볕에 취약해 사막이나 초원에서 사육할 수 없는 돼지는 유목사회보다 농경사회에서 주로 사육되었다.



    4대 하천 문명의 출현

    월등히 부유한 나일 강 유역(이집트)

    ‘규칙적인 홍수’가 만들어낸 이상적인 곡창지대

    먼저 가장 오래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이집트에서는 에티오피아 고원의 정기적인 강우로 인해 나일 강이 장기간 범람하여 심하지 않을 정도의 홍수가 발생했다. 이를 통해 매해 비옥한 흙이 공급되었고, 그 결과 고대에서 가장 축복받은 농경지대가 만들어졌다. 이집트가 유적, 유물의 보고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교외 도시 기자에 3대 피라미드를 보유한 카이로의 연간 강수량은 약 25~26밀리미터로, 그야말로 사막 그 자체였다. “이집트는 나일 강의 선물”이라는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말을 통해 이집트 문명에서 나일 강이 얼마나 큰 위치를 차지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나일 강은 6월부터 물이 불어나기 시작해서 10월이면 수위가 감수기 때보다 11미터에서 12미터나 높아졌다. 강에서 수 킬로미터 앞까지 넘쳐흐른 ‘물’이 밭의 염분을 씻어내고, 부엽토를 퇴적시켜 매년 농지를 비옥하게 되살렸다. 이렇듯 나일 강은 타고난 관개시스템의 힘을 발휘하여 150만 명에서 200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일 강이 범람하기 시작하는 시기에, 일출 무렵 샛별 시리우스가 태양과 같은 위치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게 된 이집트인들은 그날을 1월 1일로 하여 1년 365일의 태양력을 만들어냈다. 현재 전 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달력의 기원이다.


    부족의 대립이 격렬했던 메소포타미아

    눈 녹은 물에 의지하는 문명

    메소포타미아는 그리스어 ‘mesa’(정중앙)와 ‘potamos’(강)의 합성어로,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라는 두 ‘강 사이의 토지’ 라는 뜻이다. 페르시아 만 안쪽에 위치함 메소포타미아 남부(수메르 지방)가 문명의 중심이었는데, 그곳은 비를 내리게 하는 몬순의 경로에서 벗어나 있다. 예컨대, 해당지역에 있는 바그다드의 연간강수량은 불과 120밀리미터에 불과했다.


    따라서 두 강의 하류 수메르 지방의 농업은 터키 동부 고산지대의 불안정한 눈 녹은 물에 의존해야 했다. 이에 문명의 담당자 수메르인은 수로, 저수지 등을 만들어 건조한 기후에 대비했고, 우르, 우루크 등의 동시국가는 물 전쟁을 반복했다. 주변지역에 자리 잡은 목축민의 침입도 끊이지 않아 성벽으로 둘러싼 견고한 도시군을 형성했다.


    부족의 대립과 공존이 낳은 ‘법률’

    메소포타미아에서는 3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산재해 있던 도시들 간에 ‘물이 있는 곳’을 둘러싼 전쟁이 일상적으로 반복되었다. 게다가 주변의 사막, 초원, 황무지에 있는 목축민들의 침입도 빈번했다. 목축민들은 오아시스에서의 교역으로 곡물을 손에 넣었을 뿐 아니라, 때로는 도시를 습격하기도 했다. 지리적으로 폐쇄되어 있었던 이집트와 달리 메소포타미아는 농경부족과 목축부족 간의 전쟁을 반복해서 겪었다. 따라서 법률을 만들어 부족간의 대립을 완화할 필요가 있었다.


    수메르인과 북부에서 진출한 아카드인의 공방이 장기간 이어졌고, 기원전 19세기에 새롭게 진출한 아모리인은 유프라테스 강 중류지역에 위치한 바빌론을 수도로 하여 바빌론 제1왕조(기원전 1894년경~기원전 1595년경)를 건국했다. 바빌론 제1왕조의 6대 왕 함무라비는 메소포타미아를 통일한 후,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동해보복의 원칙과 귀족, 평민, 노예의 신분차이를 바탕으로, 전문 282조로 구성된 ‘함무라비 법전’을 제정했다. 이는 사회의 규칙과 형벌의 대상을 명확히 하고, 국가가 부족을 대신하여 형벌을 내림으로써 사회질서를 유지하려는 확고한 태도를 담고 있다.


    인도반도와 동아시아 문명

    메소포타미아와 뿌리가 같은 인더스 문명

    인더스 문명은 현재의 파키스탄 지역에서 전개되었다. 히말라야 산맥과 힌두쿠시 산맥의 눈 녹은 물과 몬순을 수원으로 삼은 인더스 문명은 자연관개에 의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집트 문명과 비슷하다.


    반면, 유적에서 출토되는 활석제 인장에 조각된 인더스 문자가 아직도 해독되지 않아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로 면직물이 많이 생산된 인더스 문명에서는 문서의 재료로 면직물이 사용되었는데, 그 면직물이 다 썩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인더스 문명은 ①상류지대의 지진으로 흐름이 막혀 있던 인더스 강의 물길이 바뀌고, ②기후변동으로 몬순의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되는 등의 원인으로 기원전 1800년경에 급격하게 쇠퇴했다. 서아시아에서 함무라비 법전이 제정되었을 무렵이다. 그러한 때에 아프가니스탄에서 말과 전차를 이용해 진출한 아리아인에 의해 기원전 1500년경 인더스 문명은 멸망하고 말았다.


    황하의 조 문명과 양자 강의 쌀 문명

    황하는 중류지역에서 크게 활모양으로 굽어지며 황토고원을 지나기 때문에 많은 양의 황토가 물에 녹아 있어 물보다 진흙이 훨씬 많은 특수한 큰 강이었다. 이른 봄 고비사막에서 날아오는 ‘황사’는 한국과 일본에서도 유명한데, 이것이 오랜 세월에 걸쳐 퇴적되어 황토고원이 탄생한 것이다.


    황하 중류지역에서는 황토지대의 지하수를 이용하여 홍수의 피해를 비교적 적게 받는 지류의 구릉지대에서 조가 재배되었다. 조는 3개월에서 5개월 사이에 수확할 수 있는데, 씨앗이 매우 작아 죽으로 먹었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와 달리 대규모 관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황하 문명의 특색이다.



    유라시아의 일체화로 일어난 문명의 대교류

    세계사를 리드한 이슬람의 대정복 운동

    이슬람교는 이렇게 탄생했다

    ‘유목민 폭발 시대’는 7세기 ‘혹서’와 ‘가뭄’이 지배하던 불모의 땅, 아라비아 반도에서 시작되었다. 지정학적으로 봤을 때 페르시아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의 남쪽에 위치한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러한 움직임이 나타난 것은 전혀 이상할 이유가 없다. 시대를 전환시킨 핵심인물은 아라비아 반도의 중심도시 메카에서 태어난 사막의 상인, 무함마드(570년~632년)였다. 태어나기 반년 전에 아버지가 교역지에서 병사하고, 6살 때 어머니마저 사망하여 고아가 된 인물이 만년에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선진적인 시리아 지역으로 장사를 하러 갔다가 유대교 등의 일신교를 접한 무함마드는 자연스럽게 새로운 세계관과 인생관을 가지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번성했지만 빈부격차가 심화되는 메카에 실망한 무함마드는 마흔 살 이후, 교외의 히라 산 동굴에서 명상을 하며 지냈는데, 이때 대천사 가브리엘(아랍어로는 지브릴)로부터 자신이 신 알라의 예언자(카리스마)라는 계시를 받았다. 무함마드는 자신을 아랍어로 신의 의지를 전하는, ‘최후의 심판’ 직전에 부름을 받은 ‘최후의 예언자’로 칭했다.


    그러나 메카는 아랍유목민의 다신교 신앙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10년간의 포교활동에도 불구하고 신자는 100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 사이 무함마드와 이슬람 신도에 대한 박해의 움직임이 강해져, 무함마드는 이를 피하기 위해 야스리브(후에 메디나. ‘예언자의 도시’ 라는 뜻)로 이주(헤지라 622년)했다. 헤지라가 이루어진 622년이 이슬람력의 기원 원년이 되었다.


    630년, 메디나에서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여 1만 명의 유목 부족군을 조직한 무함마드는 메카를 무혈점령하여 카바 신전에 모셔져 있던 약 360개에 달하는 부족신 우상을 파괴하고, 아라비아 반도의 유목민을 유일신 알라 아래로 결집시켰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2년 후인 632년, 무함마드는 급사하여 메디나에 매장되었다.


    세계사를 변화시킨 이슬람의 ‘대정복 운동’

    무함마드가 급사하자 교단 간부는 교단의 혼란과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간부 중에서 ‘칼리프’(신의 사도, 무함마드의 후계자)를 선출하여 교단의 지도를 맡겼다. 또한, 무함마드가 이야기한 신의 말들을 모아 114장으로 구성된 ‘신의 말씀’ 집 <코란>을 편찬하여 신도들의 생활지침으로 삼았다.


    이슬람 교단 수뇌부의 논의를 통해 칼리프를 선출한 제4대 칼리프까지의 시대를 ‘정통 칼리프 시대’라 한다. 정통 칼리프 시대에는 무함마드의 죽음으로 유목민이 이탈하는 것을 막고, 외부 이교도와의 전쟁에서 얻은 이권을 제공하여 이슬람 교단으로 끌어들일 목적으로, 낙타와 말을 이용해 약해진 비잔티움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려는 ‘대정복 운동’이 조직되었다.



    재편되는 유라시아

    사상 최대의 중화 제국, 청의 탄생

    중화질서를 부활시켜 세계사에서 후퇴한 ‘명(明)’

    중화세계는 명이 전통적인 지배체제를 회복시키고, 다음 왕조인 청이 청해, 티베트, 내몽골, 동투르키스탄(서역)을 정복하여 사상 최대의 중화 제국이 되었다. 몽골인 지배타도와 사회개혁을 추구한 홍 건군(‘붉은색’은 한인의 상징 색)의 빈농 출신 주원장(태조 홍무제 재위 1368년~1398년)은 난징을 거점으로 ‘명’을 건국하여, ‘호풍’(유목민풍 이문화)을 배제한다는 슬로건 아래 전통적인 농경 제국을 부활시켰다.


    명은 보수적인 중화사상에 의거하여 각지 수장의 사절단이 명 황실의 덕을 우러르며 비위를 맞추고자 방문하면 황제가 충분한 하사를 하는 감합무역, 즉, 정치지배를 우선시하는 조공무역으로 동아시아 세계를 재편하고자 했다. 이로 인해 몽골 제국 시대에 유라시아의 해양 상업에서 일익을 담당했던 중국 상인은 세계사 무대에서 후퇴하고 말았다. 제3대 영락제(재위 1402년~1424년)는 몽골민족과의 전투를 중시하여 몽골 고원의 입구,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기고 베이징과 난징을 주축으로 중화제국을 재건했다.


    사상 최대의 중화 제국 ‘청(淸)’의 탄생

    명이 1644년 ‘이자성(1606년~1645년)의 난’이라는 대농민 반란으로 멸망하자, 둥베이 지방을 통일하여 조선과 내몽골을 복속시킨 여진족이 중국에 침입하여 ‘청’(1644년~1912년)을 세웠다. 청은 창건자 누르하치(재위 1616년~1626년)가 창설한 ‘팔기’(여덟 개로 나뉜 군사 및 행정을 일체화시킨 조직)로 중국을 군사정복하고 변발(앞머리 일부분만 남기고 다 민 후 그 머리를 길러 세 가닥으로 꼰 여진인의 머리형)을 강요하여 ‘중국의 여진화’를 꾀했다.


    이러한 청의 중국 지배는 강희제(재위 1661년~1722년), 옹정제(재위 1722년~1735년), 건륭제(재위 1735년~1795년) 등 3대가 통치한 130년 동안 정착되어 갔다. 이 시기에 청은 과거 중화 제국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았던 오늘날 대만, 티베트, 내몽골, 청혜, 동투르키스탄(과거의 서역, 신장)이 위치한 지역을 정복하여 중앙아시아 동반부를 지배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서반부를 지배하는 러시아 제국과 중앙아시아를 양분하게 되었다. 이렇게 사상 최대의 ‘중화 제국’이 된 청의 대규모 영역은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대서양이 키운 자본주의와 국민국가

    산업혁명과 산업도시가 세계사를 주도하다

    ‘산업혁명’으로 도시가 역사를 주도하는 시대로

    18세기 후반에 시작된 ‘산업혁명’은 사회를 단기간에 변화시키지 않았다. 긴 세월에 걸쳐 바람직한 세계의 모습을 그 근본부터 전환시킨 산업혁명은 서서히 이루어진 사회변혁이었다.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보면, 화석연료인 석탄을 연소시키는 증기기관이 만들어낸 인공적인 에너지와 기계들을 연결시키는 공장이, 봉건적 지배의 거점이었던 도시를 거대한 생산의 장으로 바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각지에 산업도시가 탄생하여 농지를 훨씬 능가하는 생산력으로 세계사를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었다. 바로 산업도시가 주도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1760년대에 들어서자 설탕 증산으로 무역균형이 무너져 아열대 및 열대 지역을 대상으로 한 유럽의 새로운 전략상품이 요구되었다. 당시 영국 수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모직물이 수출 대상 지역의 기후와 맞지 않아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새로운 전략상품으로 인도산 면직물이 대서양 시장으로 반입되었다.


    ‘수출의 꽃’이 된 면직물

    산업도시는 전근대의 도시와 비교해 보면 그 기능이 크게 다르다. 산업도시는 공장, 창고, 역, 부두, 노동자 센터 등의 다양한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여 도시를 철저하게 재편성했다. 요컨대, ‘도시의 시대’는 산업도시의 출현에서 시작된 셈이다.


    산업혁명이 1760년대 이후 영국에서 일어난 면공업 방적부문에서의 기계 도입, 증기기관의 이용, 이에 따른 경제 및 사회의 대변동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알 것이다. 산업혁명은 인류 역사상 하나의 커다란 신기원이다. 이는 자본주의 경제의 확립, 도시화의 진전, 교역의 광역화 등을 통해 전통적 사회시스템을 크게 변화시켰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네덜란드나 프랑스와의 경쟁에서 이긴 영국이 대서양에서 경제패권을 확립하여 광대한 ‘해외시장’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17세기 말에는 대서양 무역의 주력상품이 전통적인 모직물에서 영국 동인도 회사에 의해 인도로부터 수입된 면직물(캘리코)로 바뀌었다. 하지만 인도의 무굴 제국에서 캘리코를 사려면 많은 은이 필요했다. 의회 또한 영국의 모직물산업을 압박하는 인도 면직물의 수입을 금지하는 ‘캘리코 사용금지법(1720~1774년)’을 제정하여 모직물 업체를 옹호했다.


    이에 영국 상인은 카리브 해역에서 목화를 재배한 후, 영국 본국에서 전략상품인 면직물을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인도산 면직물 수임금지가 영국 국내의 수출용 면직물 공장을 키웠다. 서인도 제도에서 재배된 목화를 원료로 하는 면직물 생산이 노예무역항 리버풀의 배후지역에 위치한 랭커셔 지방에서 급성장했다. ‘산업혁명’의 시작이다.



    세계 규모의 시대로

    글로벌화와 불투명한 지구 신시대

    세계적으로 중요해지는 태평양

    태평양은 그 크기가 너무 광대해서 세계사 속에서 확고한 위치를 확립할 수 없었다. ‘물의 사막’이었던 셈이다. 이는 대서양이 자본주의 경제와 국민국가 체제에 의해 근대세계의 틀을 마련한 것과는 크게 다르다.


    20세기 말에 세계 규모의 ‘전자공간’이 형성되어 경제의 글로벌화가 진행되었다. 또한, 아시아 여러 나라가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룩하자 마침내 세계사는 태평양 세계에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미국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에 걸쳐 태평양의 군사패권은 확립했지만, 경제권 성장까지는 이루지 못했다. 그 결과 태평양은 미소 냉전의 최전선이 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서는 미국의 군사적 우위가 흔들려 태평양 세계는 미국과 중국의 대립의 장이 되고 있다.


    2006년에 동남아시아의 싱가포르, 브루나이, 뉴질랜드, 남미 칠레가 공동시장의 형성과 무제한 관세철폐를 목표로 하는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를 만들었다.


    2010년에는 미국이 이에 참가하겠다고 표명했고, 뒤이어 호주, 베트남, 말레이시아, 콜롬비아, 멕시코, 캐나다, 일본도 참가했다. 한 번 규제를 완화하면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역전방지조항(Ratchet 조항), 손해를 입은 외국자본이 손해배상을 요구할 수 있는 ISD 조항 등이 포함되어 있어 각국의 태도결정과 이해조정에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전혀 다른 태평양 주변지역과 나라들이 만든 공동조직은 태평양 지역의 안전보장과 경제성장에 유용하다. 시스템이 만들어지지 않는 한 태평양은 안전보장 면에서도 언제나 불안정한 상태다.


    태평양 세계에 안정된 경제 질서가 형성되면 미국의 태평양 제국 재편과 중국의 태평양 진출에의 야망을 억제할 수 있지 않을까? TPP는 태평양을 ‘큰 세계’로 편입시키기 위한 실험적인 시도라 할 수 있다.


    21세기 이후 지속 가능한 세계에 대한 모색

    20세기에는 비행기망, 철도망, 항로망, 고속도로망, 인터넷 등이 다중적으로 지구 위를 뒤덮어 세계 규모의 거대한 물류, 정보 및 문화의 상호교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다른 한편으로는 각 지역 및 국가 간의 경제격차를 확대해 세계 규모의 부의 편재와 굶주림의 확대라는 심각한 문제를 낳았다.


    1972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산성비에 대한 위기감을 바탕으로 ‘제1차 UN 인간환경회의’가 개최되었다. 또 같은 해 25개국, 70명으로 구성된 스위스의 법인 로마 클럽이 《성장의 한계》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세계인구, 공업화, 오염, 식량생산, 자원 사용 등의 현재 성장률이 변함없이 계속된다면 100년 이내에 지구상의 성장은 한계점에 달해 인구와 공업력이 어느 순간 갑자기 제어불능 상태에 직면할 것이라 경고했다.


    UN 인간환경회의의 뒤를 이어 1987년에 UN에 제출된 브룬트란트 보고서도 ‘지속가능한 개발’을 제안했다.


    문명이 형성되고 5,0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세계는 대전환기에 직면했고 새로운 방향성을 찾기 힘든 상황에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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