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산
 
지은이 : 데이비드 브룩스(역:이경식)
출판사 : 부키
출판일 : 2020년 09월




  •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는 고통의 시기를 겪으며 인생의 태도를 다시 정립한다고 말한다. 삶의 고통을 딛고 다시 시작하는 법을 익히려면 개인과 사회 차원에서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제 우리가 개인의 행복, 독립성, 자율성이라는 허울 좋은 가치를 넘어 도덕적 기쁨, 상호 의존성, 관계성을 회복할 때라고 주장한다. 지난 60년간 앞의 가치들을 지나치게 강조해 온 결과, 공동체는 해체되고 개인들 사이의 결속은 끊어지며 외로움은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좋은 인생을 살아가려면 훨씬 더 큰 차원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문화적 패러다임의 무게 중심이 개인주의라는 첫 번째 산에서 관계주의라는 두 번째 산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산


    두 개의 산

    인생은 단지 경험의 연속이 아니다

    아무 데로도 가지 못하는 헤엄치기

    학생일 때는 인생이 어떤 역에서 다음 역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있다. 언제나 다음에 제출해야 할 숙제가 있고, 다음에 치를 시험이 있고, 또 다음에 내야 할 입학 원서가 있다. 이런 것들로 인해 당신의 일정과 에너지는 체계적인 계획에 따라 세워지고 사용된다. 친구들과 나누는 사회적인 삶은 그 나름의 울퉁불퉁한 드라마가 있긴 하지만, 적어도 식당이나 기숙사 방에서, 당신 바로 앞에서 펼쳐진다.


    그러다가 당신은 이 가장 구조화되어 있고 또 가장 많이 감독받는 학생 시기에서 갑자기 인류 역사상 가장 덜 구조화된 시기인 청년기로 던져진다. 어제만 하더라도 부모님, 선생님, 코치, 상담사들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성취,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성적을 얻도록 온갖 도움을 주며 응원했다. 그런데 대학교를 졸업한 오늘, 갑자기 그 모든 게 딱 중단된다. 세상은 당신의 이름을 알지 못하고 당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신경도 쓰지 않는다. 취업 면접장에서 책상 건너편에 앉아 있는 면접관은 ‘너 같은 사람은 100만 명이나 있지만 내가 필요한 사람은 딱 한 사람이다’라는 눈으로 바라본다.


    심미적인 삶

    어떤 사람들은 대학을 졸업할 때 대담한 모험가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결혼과 실질적인 일자리는 서른다섯 살이 되는 해 어느 날에 우편물처럼 날아들 것이고, 그사이에 이들은 다양한 경험을 하고자 한다.


    스물세 살에 몽골에서 영어를 가르치거나 콜로라도강에서 래프팅 강사 일을 하는 사람들이 그런 부류이다. 이 대담한 과정은 실질적인 이점이 있긴 하다. 졸업 후 들어갈 첫 번째 직장은 아마 끔찍할 것이다. 그러므로 임팩트 투자자인 블레어 밀러(Blair Miller)가 조언하듯이, 당신은 이 시기를 자신의 위험 지평을 넓히는 데 사용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임팩트 투자(impact investing)는 재무상 수익을 창출하는 동시에 사회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성과도 달성하는 투자를 말한다-옮긴이).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완전히 미친 어떤 짓을 한다면 이 사람은 그 일을 경험한 뒤로는 웬만한 미친 짓은 거뜬하게 다룰 수 있을 것이며, 나머지 수십 년 동안의 인생에 접근하는 방식이나 태도가 한결 더 대담할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사람은 임상심리학자 맥 제이(Meg Jay)가 “정체성 자산(identity capital)”이라고 부른 어떤 자산을 축적할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로 30년 동안 그는 면접장이나 디너파티 자리에서 몽골에서 영어를 가르쳤던 경험을 얘기하고 싶어 안달할 것이다. 그 경험이 자기를 남들과 달라 보이게 할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말이다.


    이것은 이십 대를 시작하는 탁월한 한 가지 방법이다. 그런데 그 길을 따라 몇 년을 걸어가다 보면 이런 유형의 인생에 뒤따르는 문제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특히 그때까지도 어느 하나에 정착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더 그렇다. 만일 모든 것에 “예”라고 대답하면서 여러 해를 보낸다면, 결국 당신은 키르케고르가 심미적 라이프 스타일이라고 탄식했던 것에 이르고 말 것이다. 심미적인 삶을 이어가는 사람은 마치 하나의 예술 작품을 대하듯이 심미적인 기준을 가지고서 자기 인생을 판단하며 살아간다.

    - 이 인생은 흥미로운가 아니면 따분한가? 아름다운가 아니면 추한가? 즐거운가 아니면 고통스러운가?


    이런 삶을 뒷받침하는 이론은, 사람은 최대한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일련의 연속적인 모험으로만 살아간다면, 스쳐 지나가는 감정들과 쉽게 바뀌는 열정이라는 불확정성 속에서 정처 없이 배회하는 꼴이 되고 만다. 이럴 경우 이 사람의 인생은 어떤 성취를 쌓아 가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일시적인 순간들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가 가진 힘을 무작위로 온 사방에다 흩뿌리며 낭비하는 셈이다. 그러면서 소중한 무언가를 놓쳐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끊임없이 휩싸인다. 이 사람의 가능성은 끝이 없을지 몰라도, 의사 결정 풍경은 구제 불능일 정도로 밋밋하다.


    자유는 헛소리다

    여러 해 동안 온갖 선택권들을 추구하고 나면, 이제 이 사람은 인생의 의미를 구하는 실마리를 잃어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 질문에 초점을 맞추는 일조차 하지 못한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David Foster Wallace)의 장편소설 『무한한 재미(Infinite Jest)』는 이런 산만한 마음 상태를 묘사한다. 이 소설은 “치명적으로 재미있어서” 모든 사람을 무아지경의 좀비로 만들어 버리는 어떤 영화를 소재로 삼아 인생의 커다란 질문들이 오락으로 대체된 상황을 다룬다. 이 소설은, 온갖 문장들이 서로 뒤엉키고 온갖 생각들이 이리저리 마구 튀어나오는, 극도로 산만한 마음 그 자체를 형상화한다. 이런 세상에서 모든 사람은 부지런히 오락을 즐기지만 응당 있어야 할 발전(진보)은 찾아볼 수 없다.


    이 모든 것과 싸우는 방법은 일종의 철의 의지력을 동원해 자기의 개인적 주의력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윌리스는 생각했다. 그는 캐니언대학교에서 했던 유명한 졸업식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무슨 생각을 어떻게 할지 통제하는 훈련법을 배운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주의를 기울일 대상을 선택하고 또 경험에서 의미를 어떻게 조직할지 선택하는 일에서 충분한 의식과 자각을 갖춘다는 뜻입니다. 성인이 되어서 이런 종류의 선택 훈련을 할 수 없다면, 여러분은 엉뚱한 것들에 완전히 휩쓸려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윌리스의 처방은 비현실적이다. 너무나 산만한 상태라서 실제 몰입으로 이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자기 주의력에 집중할 수 있겠는가. 이런 상태에서는 마음이 붕 떠 있으며 외부의 온갖 자극에 놀아난다. 자신은 충분히 용감하거나 유능해서 자기 내면의 가장 깊은 곳과 중요한 부분을 꿰뚫어 볼 수 있다고 잘난 체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마라. 이리저리 휘둘리는 한 가지 이유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자유는 위대하다. 그러나 궁극의 목적으로 설정된 개인적·사회적·정서적 자유는 완전히 헛소리다. 이것은 아무런 방향성도 없고 확고한 토대도 없으며 그저 무작위의 어수선한 인생으로 이어질 뿐이다. 마르크스의 표현대로 하자면, 모든 단단한 것이 녹아서 허공으로 흩어지고 만다. 자유는 그 속에서 인생을 보내고 싶은 바다가 아닌 것으로 판명 난다. 자유는 바다가 아니라 당신이 건너고 싶어 하는 강이다. 당신은 이 강 건너편에 뿌리를 내리고 무언가에 온전히 몰입하고 헌신하고 싶어 한다.


    자기 인생에 귀 기울인다는 것

    모세의 길

    고통의 시기에 대한 통상적인 반응은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이다. 그 상황에서 나타나는 증상들을 치료한다든가 술을 마신다든가 슬픈 음악을 듣는다든가 하는 시도 말이다.


    고통의 순간에 놓여 있을 때 해야 할 올바른 일은 고통 속에 똑바로 서는 것이다. 기다려라. 고통이 자기에게 가르치는 내용을 똑똑히 바라보라. 그리고 그 고통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제대로 처리되기만 하면 축소가 아니라 확장으로 인도해 줄 어떤 과제임을 깨달아라.


    계곡은 우리가 낡은 자기를 버리고 새로운 자기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지름길은 없다. 아주 오래전부터 시인들이 묘사해 왔던 동일하고 영원한 세 단계 과정, 고통에서 지혜로 그리고 다시 봉사로 이어지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낡은 자기를 죽이고, 텅 빔 속에서 깨끗이 씻고, 새로움 속에서 부활하는 것이다. 계곡의 고뇌로부터 사막의 정화를 거쳐 산봉우리의 통찰에 이르는 것이다.


    자기 인생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가장 혼란스러운 순간에 가장 똑똑한 선택은 수백만 명이 역사 속에서 했던 일을 실천하는 것이다. 다시 추스르고 일어나 홀로 광야 속으로 들어가라.


    광야에서는 인생에서 산만한 것들이 모두 제거된다. 이때의 인생은 조용하다. 이곳에서는 규율과 단순성과 치열한 주의 집중이 요구된다. 광야에서의 고독은, 개인의 인격 속에 복잡하게 녹아들어 있고 사람을 즐겁게 해 주는 모든 습관을 필요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벨든 레인은 『성인들을 배낭에 넣고서』에서 이렇게 묻는다.


    “만일 ‘재능 있는 어떤 아이’가 자기 가치를 증명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 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자기에게 박수를 쳐 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비록 적대적이지는 않다 하더라도 냉담하기만 한 침묵의 무관심과 마주할 때, 과연 그 아이는 무엇을 할까? 그 아이의 세상은 산산조각이 난다.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갈망으로 가득 찬 아이의 영혼은 광야의 사막에서 굶주린다. 광야는 그 강박적인 성취자를 작고 매우 평범한 어떤 존재로 쪼그라뜨린다. 오로지 이럴 때만 비로소 그 아이는 사랑받을 수 있다.”


    광야에서의 고독은 시간과 관련된 경험을 바꾸어 놓는다. 평범한 인생은 평범한 시간 속에서, 즉 출퇴근을 하고 설거지를 하는 시간 감각 속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광야는 그리스 사람들이 “카이로스 시간(kairos time)”(카이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기회의 신’으로 제우스의 아들이다-옮긴이)이라고 부르는 것의 속도로 살아가는데, 이 시간은 더 느릴 수 있지만 언제나 더 풍성하다. 동기화 시간(synchronous time)은 연속적이지만, 카이로스 시간은 질적인 것이다. 시의적절할 수도 있고, 아직 성숙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풍성할 수도 있고 성길 수도 있으며, 고무된 것일 수도 있고 밋밋한 것일 수도 있는, 요컨대 혼잡한 시간일 수도 있고 텅 빈 순간일 수도 있다. 누구나 광야에 나가서 여러 주 동안 있다 보면 저절로 카이로스 시간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광야에서 자기 자신과 소통하는 영혼 역시 마치 붉은 삼나무가 성장하는 것처럼 느리고 고요하지만 두텁고 강력한 시간인 카이로스 시간에 맞춰진다.


    더 깊은 자기를 만나는 시간

    광야에 있으면 자기 자신의 더 나은 버전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벨든 레인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큰맘 먹고 광야에 나섰을 때 나는 혼자 있는 것을 내가 얼마나 즐기는지 몰랐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나와 동행하는 그 사람은 자기의 성취에 대해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는다. 그는 반짝거리는 개성을 다른 사람들에게 흩뿌리려고 애를 쓴다. 캘리포니아의 벨마운틴 정상에 있는 떡갈나무 그늘 아래에서 이런저런 글들을 일지에 휘갈겨 쓸 때 나는 종달새처럼 행복하다. 나는 광야에 혼자 있을 때의 나인 바로 그 사람이 되고 싶다.”


    이것은 중요한 어떤 계시의 시작점이다. 자연을 사랑하는 작가 애니 딜러드는 『돌에게 말하는 법 가르치기(Teaching a Stone to Talk)』에서 이렇게 썼다.


    “심리학자들이 우리에게 경고하는 폭력과 테러는 깊은 곳에 잠겨 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이 괴물들을 더 깊은 곳으로 몰아넣는다면, 만일 당신이 이 세상의 가장자리 끝에서 이 괴물들과 함께 떨어진다면, 우리의 과학이 포착하거나 이름 지을 수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나머지 다른 것들을 표면으로 붕붕 뜨게 만들며, 선함에 선용할 힘을 주고 악함에 악용할 힘을 주는, 대양 또는 매트릭스 또는 에테르, 통합된 어떤 장이다. 그것은 바로 서로를 보살피는 복잡하고 설명할 수 없는 우리의 어떤 마음이다.”


    이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내용이다. 어쩌면 이 책 내용 전체를 이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대부분 자기 인생의 표면에 딱딱한 껍질을 만든다. 이 껍질은 두려움과 불안정함을 숨기고 남에게 인정받고 성공을 거두기 위한 것이다. 당신이 자기 자신의 핵심으로 다가간다고 치자. 이때 당신은 전혀 다르며 훨씬 더 원초적인 어떤 경지를 발견할 것이고, 그 안에서 다른 사람을 보살피고 다른 사람과 연결되고자 하는 깊은 열망을 발견할 것이다. 자기 자신의 이 깊은 핵심을 ‘플레로마(pleroma, 충만)’라고 부를 수 있다. 바로 여기에 당신의 심장과 영혼이 깃들어 있다.



    직업에 대하여

    소명으로서 직업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소명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소명으로서 직업 찾기와 관련해서 모든 사람이 아는 사실은, 이것이 커리어 찾기와는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이 커리어라는 관점으로 접근할 때는 전두엽이 매우 많은 부분에서 관여한다. 이 사람은 자기가 가진 여러 재능을 하나하나 조사해서 파악한다.


    - 나는 무엇을 잘할까? 어떤 재능이 시장에서 비싸게 먹힐까?


    그런 다음 좋은 교육을 받는 것으로 자기 역량에 투자를 한다. 그리고 전문적인 기량을 닦는다. 그런 다음에 어떤 기회가 있는지 일자리 시장을 둘러보다. 그러고는 자기가 투자한 시간과 노력에 대해 최대의 보상을 제공하는 유인을 따른다. 그리고 성공이라는 정상을 항해 올라가는 올바른 경로를 전략적으로 찾고 또 그 경로를 따른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는 존경, 자부심, 경제적 안정이라는 성공의 여러 보상들을 거둔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소명으로서 직업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할 때는 의식의 자아 차원에서 살지 않는다. 돈을 많이 받는다거나 생활이 편해진다는 이유로 어떤 일을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관점으로 접근할 때 사람은 자기 기질의 본성에 사로잡힌다. 어떤 행위나 어떤 부당함이 이 사람이 가진 본성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며 능동적인 반응을 요구한다. 카를 융은 직업을 “어떤 사람이 함께 있던 무리에서 그리고 이미 잘 알려져 있던 경로에서 스스로 벗어나게 해서 해방되도록 운명 짓는 어떤 비이성적인 요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직업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자기 내면에 있는 사람이 부르는 목소리를 듣는다. ‘소명을 받는다’는 말이다”라고 했다.


    워즈워스의 방랑 시기

    소명으로서 직업에는 수습 기간이, 비용이 편익을 초과하는 시기가 있기 마련이다. 누구든 이 기간을 거쳐야만 또 다른 차원의 강렬함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런 순간들에서 커리어 관점에 휘둘리면 더는 그 직업을 가질 수 없다. 쏟아붓는 것에 비해 얻는 것이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것을 자기 직업으로 발견한 사람은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선택을 한다는 것은 자기의 본성을 거스르는 짓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람은 이해타산이 맞지 않는 그 일을 밀고 나간다.


    이런 맥락에서 스탠퍼드대학교 교수들인 앤 콜비와 윌리엄 데이먼은 다음과 같이 썼다.


    “어떤 쟁점이 자기 정체성과 덜 부합할 때, 예를 들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을 내가 더 많이 해야 하는 게 맞지만 나로서는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어’라거나 ‘도무지 시간을 낼 수 없어’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쟁점이 자기 정체성의 핵심 문제일 때는 그 문제에 등을 보이며 돌아서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 된다.”



    심장을 깨우고 영혼을 자극하는 일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선택을 할 때

    모든 결정에는 미래에 대한 상당한 불확실성이 내포되어 있다. 전환적 선택이 특히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여러 변화들이 실질적으로 효력을 발휘한 뒤 새롭게 전환된 자아가 과연 어떤 모습일지 또는 무엇을 원할지 지금으로서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에게 달콤한 것이 새롭게 바뀐 당신에게는 구역질이 날 수 있다. 새로운 종류의 비참함이나 기쁨은 지금까지 당신이 경험한 적 없는 것들인데, 이런 것들이 미래의 당신 존재의 핵심일 수 있다. 현재의 자기 자아를 아는 것도 힘들기 짝이 없는데, 미래의 바뀐 자아가 어떤 모습일지 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 문제는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는데, 변화된 자기가 가지게 될 욕구에 대한 데이터가 현재로서는 전무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헌신 공포증(commitment phobia)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중대한 선택 때문에 시달리다가 몽유병 증세까지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역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중대한 선택보다 사소한 선택에 더 많이 주의를 기울이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은 인생의 역설이다. 자동차를 사기 전에 사람들은 해당 모델의 소비자 평점을 모두 확인하고 중고차로 되팔 때의 가격을 살피는 등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직업을 선택할 때는 신중한 의사 결정 과정을 거치기보다는 그저 시류나 주변 상황에 휩쓸려서 한다. 또 어쩌다 보니 함께 살게 된 사람과 결혼을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중대한 선택들은 사실상 선택이 아니다. 그것들은 유사(流沙)이다. 사람들은 어쩌다 보니 자기가 서 있게 된 바로 그 자리에서 그저 유사에 휩쓸려 버리고 만다.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도 이 점을 인정했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결정을 내렸지만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그 결정과 관련된 동기들을 명확하게 의식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사실이 너무나 놀랍다.”


    이 방법에는 어떤 지혜가 담겨 있다. 생각을 많이 할 시간 여유가 없을 때 더 나은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해 주는 상황들이 있다. 그러나 이 방법에는 ‘충분할 정도로’ 많은 지혜는 없다. 그렇다면 당신은 순간적인 어떤 느낌, 그저 어떤 직관에 당신의 인생을 걸겠는가?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이유는 이렇다.


    첫째, 직관이라는 것은 불안정하다. 느낌은 대개 유동적이며 시시때때로 변한다. 어떤 사람이 한 직장에 취업하려고 한다고 치자. 이 사람은 그 회사에 취업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 속에서, 투자금을 모으고 관리하는 그 일을 자기가 즐기면서 할 수 있다는 온갖 이유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런데 결국 그 직장에 취업하지 못했을 때 이 사람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며 일종의 안도감을 느낀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던 거지? 나는 중년 남성이고, 아무리 봐도 나의 정체성을 판단할 단서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게 분명한데 말이야.


    둘째, 직관은 자주 엉뚱한 길로 유도해 길을 잃게 만든다. 카너먼과 트버스키를 비롯한 많은 행동경제학자들은 사람의 직관이 그 사람을 배신할 수 있는 온갖 방식들을 연구하고 이를 책으로 써 왔다. 예를 들면 손실 회피 편향(이익보다 손실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심리 현상-옮긴이), 점화 효과(시간적으로 먼저 제시된 자극이 나중에 제시된 자극의 처리에 부정적 또는 긍정적 영향을 주는 심리 현상-옮긴이), 후광 효과(인물이나 사물 같은 대상의 두드러진 어떤 특성이 그 대상을 평가할 때 다른 특성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심리 현상-옮긴이), 낙관주의 편향(자기가 실패할 가능성을 낮게 평가하는 심리 현상-옮긴이) 등이다. 여섯 달 동안 이러저러한 사람이야말로 자기 인생의 유일한 연인이라고 생각했다가 그 뒤 40년 동안 그 사람이야말로 자기 인생의 절대적인 재앙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도 여럿 있다. 조지 엘리엇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남자와 여자는 자기가 느끼는 징후, 즉 모호하고 불안정한 어떤 동경을 때로는 천재성이라고, 때로는 신앙이라고, 더 흔하게는 강렬한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서글픈 실수를 저지른다.”


    마지막으로, 직관은 오로지 특정한 유형의 의사 결정들에서만 신뢰할 수 있다. 직관이란 패턴 인식을 근사하게 표현한 말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경험이 축적되어 있어서 정신이 다양한 패턴들을 모두 속속들이 검토할 수 있는 영역에서만 신뢰할 수 있다. 그러나 전환적 선택은 전혀 알지 못하는 영역으로 훌쩍 뛰어든다는 것이다. 그 영역과 관련된 패턴은 전혀 학습되어 있지 않다. 이때는 직관이 올바른 정답을 제시할 수 없다. 그저 무작위의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당신 내면의 악마와 만나라

    합리적인 과정은 결코 실패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인생의 어떤 중대한 헌신과 관련된 문제를 결정할 때는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첫 번째 문제는 이 장 서두에서 설명했던 것이다. 당신의 바뀐 자아가 원하는 것에 대한 데이터를 당신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며, 이것은 가지려 해도 가질 수가 없다. 그러니 증거에 근거해 객관적인 점수를 내서 최종 선택지를 결정할 수 없다. 두 번째 문제는 어떤 중대한 문제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당신은 궁극적인 도덕적 목적과 자기 인생의 의미에 대한 어떤 결정을 내린다는 사실이다.


    만일 당신이 무슨 직업을 택하면 좋을지 알아보려고 커리어 관리 분야의 전문가들을 찾아가서 도움말을 구한다고 치자. 이때 많은 전문가는 “내가 가진 재능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당신의 직업 탐색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에 둘 것이다. 커리어 조언의 세계에서 가장 중시하는 한 가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가 지닌 힘을 파악하도록 돕고 그 힘을 활용하는 방법을 찾도록 돕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전제되어 있는 암묵적인 기준은 커리어 진로를 선택할 때는 해당 분야에 대한 관심보다 재능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미술에 관심은 많지만 재능이 없다면, 당신은 결국 자기가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어떤 회사에 소속되어서 따분한 디자인 작업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직업과 관련한 선택을 할 때 “나에게는 어떤 재능이 있을까?” 하고 물어보라는 것이 이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커리어처럼 무미건조한 무언가를 찾는 데 기꺼이 만족한다면 이 질문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만일 자기에게 맞는 직업을 알아내고자 한다면 올바른 질문은 “나에게는 어떤 재능이 있을까?”가 아니다. 이때는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한다.


    - 내가 하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받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계속 더 잘하고 싶어 할 만큼 사랑하는 활동은 무엇일까? 내 존재의 근원에서 나를 사로잡을 정도로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직업을 선택할 때 흥미나 관심보다는 재능이 우선이라는 말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흥미는 재능을 키워 주며 또 대부분의 경우 재능보다 더 중요하다. 직업 탐구에서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결정적인 부분은 자신의 심장과 영혼, 즉 장기적인 동기 부여이다. 지식은 널려 있지만 동기 부여는 희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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