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풀니스
 
지은이 : 한스 로슬링 외(역:이창신)
출판사 : 김영사
출판일 : 2019년 03월




  • 전 세계적으로 확증편향이 기승을 부리는 탈진실(post-truth)의 시대에, 《팩트풀니스》는 막연한 두려움과 편견을 이기는 팩트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빈곤, 교육, 환경, 에너지, 인구 등 다양한 영역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세계와 실제 세계의 간극을 좁히고 선입견을 깨는 통찰을 제시한다. 우리의 편견과 달리 세상이 나날이 진보하고 있음을, 사실에 충실한 명확한 데이터와 통계로 이를 낱낱이 증명한다. 

    우물 안에 계속 갇혀 살기보다 올바르게 사는 데 관심이 있다면, 세계관을 흔쾌히 바꿀 마음이 있다면, 본능적 반응 대신 비판적



    팩트풀니스


    간극 본능

    ‘세상은 둘로 나뉜다’는 거대 오해

    우리에겐 모든 것을 서로 다른 두 집단, 나아가 상충하는 두 집단으로 나누고 둘 사이에 거대한 불평등의 틈을 상상하는 거부하기 힘든 본능이 있다. 이 간극 본능이 머릿속에서 어떻게 세상의 그림을 부자와 빈자라는 두 종류의 국가 또는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누는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첫 번째 거대 오해 추적기

    나는 강의를 시작하며, 아동 사망률은 우림 지역 부족사회에서 그리고 세계적으로 외딴 시골의 전통적 농촌에서 가장 높다고 설명했다. “텔레비전의 이국적 다큐에 나오는 지역, 그런 곳의 부모는 가족을 위해 누구보다도 안간힘을 다해 살아가지만 아이들을 절반 가까이 잃어요.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런 혹독한 조건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점점 줄고 있다는 겁니다.”


    그때 맨 앞줄에 앉은 어린 남학생이 손을 들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그 사람들은 절대 우리처럼 살 수 없어요.” 강의실에 있는 다른 학생들도 모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도 수없이 들은 ‘간극’ 발언이다.


    사람들 머릿속에 있는 그림은 무엇이 문제일까?

    강의 중에 학생들은 ‘그들’과 ‘우리’라고 했다. 평소 사람들은 ‘개발도상국’과 ‘선진국’이라고 한다. 독자도 아마 그런 명칭을 쓸 것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언론인, 정치인, 활동가, 교사, 연구원 모두 일상적으로 쓰는 말 아닌가.


    사람들은 ‘개발도상국’과 ‘선진국’이라고 말하면서, ‘못사는 나라’와 ‘잘사는 나라’를 떠올릴 것이다. 나는 ‘서양/그 외’, ‘북부/남부’, ‘저소득층/고소득층’ 같은 구분도 종종 듣는다. 사람들이 어떤 말로 세상을 묘사하든, 그것이 머릿속에 적절한 모습을 연상시키고 현실을 제대로 반영한다면 큰 문제는 아니다. 그렇다면 단순한 두 용어를 쓸 때 머릿속에서는 실제로 어떤 모습이 떠오를까? 그리고 그 모습은 현실을 얼마나 반영할까?


    짐승을 잡아라

    세상은 둘로 나뉜다는 오해와 맞서 싸운 지 20년이 되다 보니, 이제는 그런 시각을 마주쳐도 놀랍지 않다. 내가 만난 사람 절대다수가 그렇게 생각한다. 이제 세상을 둘로 나누는 오해의 덫을 놓아 그 증거를 제시해보겠다.


    * 사실 문제1 오늘날 세계 모든 저소득 국가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여성은 얼마나 될까?

    A: 20%

    B: 40%

    C: 60%


    응답자 중 평균 7%가 정답을 맞혔다. 정답은 C. 즉 저소득 국가에서도 여성의 60%가 초등학교를 나온다. 응답자 다수는 고작 20%로 ‘추측’했다. 초등학교를 나온 여성이 20%가 안 되는 나라는 아프가니스탄이나 남수단처럼 예외적인 몇몇 나라뿐이며, 기껏해야 전 세계 여성의 2%가 그런 나라에 산다.


    기대 수명, 영양부족, 수질, 예방접종률을 두고 비슷한 질문을 했을 때도, 특히 저소득 국가의 몇 퍼센트가 현대적 삶의 기초적 단계를 충족하고 사는지 물었을 때 역시 같은 결과가 나왔다. 저소득 국가의 기대 수명은 62세다. 그들 대부분이 먹을거리가 충분하고, 수질이 개선된 물을 이용하며, 다수의 아이가 예방접종을 받고, 다수의 여성이 초등학교를 나온다. 하지만 이번에도 침팬지의 정답률 33%보다 훨씬 낮은 극소수만 정답을 맞혔고, 대다수가 최악의 수치를 골랐다. 이는 오늘날 지구상에서 최악의 상황에 놓인 곳에 심각한 재앙이 발생했을 때만 나오는 수치다.


    이제 덫을 치우고, 오해를 들여다보자. 사람들은 저소득 국가의 삶을 실제보다 훨씬 안 좋게 생각한다는 게 분명해졌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런 심각한 삶을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상상할까? 우리는 스웨덴 사람과 미국 사람에게 물었다. “전 세계 인구 중 몇 퍼센트가 저소득 국가에 살까?” 그러자 다수가 50% 이상이라고 대답했고, 그 추정치 평균은 59%였다.


    정답은 9%다. 전 세계에서 겨우 9%가 저소득 국가에 산다. 그리고 그런 나라에서도 사람의 삶이 생각만큼 그렇게 비참하지 않다. 그곳의 삶은 여러 면에서 힘들지만, 지구상에서 삶의 질이 최악인 아프가니스탄이나 소말리아, 중앙아프리카공화국만큼 비참하지 않다.


    요약하면, 저소득 국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발전했다. 그리고 그런 나라에 사는 사람은 생각보다 훨씬 적다. 둘로 나뉜 세계에서 다수가 비참하고 결핍된 상태로 살아간다는 생각은 그야말로 착각이자, 전적으로 오해다. 한마디로 엉터리다.


    도와줘요! 다수가 사라졌어요

    다수가 저소득 국가에 살지 않는다면 어디에 사는 걸까? 다수가 고소득 국가에 살지 않는 건 확실할까?


    목욕물은 어느 정도가 좋은가? 얼음처럼 차갑게? 아니면 김이 나도록 뜨겁게? 물이 두 종류만 있는 건 결코 아니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 미지근한 물, 델 것같이 뜨거운 물, 그리고 그 사이에 해당하는 다양한 온도의 물이 있어 선택 대상은 많다.


    *사실 문제 2 세계 인구의 다수는 어디에 살까?

    A: 저소득 국가

    B: 중간 소득 국가

    C: 고소득 국가


    세계 인구 다수는 저소득 국가도, 고소득 국가도 아닌 중간 소득 국가에 산다. 중간 소득 국가는 세상을 둘로 나누는 사고방식에는 존재하지 않는 범주이지만, 현실에서는 엄연히 존재한다. 인류의 75%가 사는 곳이자, 사람들이 간극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곳이다.


    중간 소득 국가와 고소득 국가를 합치면 인류의 91%에 해당하는데, 이들 대부분이 세계시장에 편입되었으며 상당한 발전을 이뤄 그런대로 괜찮은 삶을 산다. 인도주의자에게는 기쁜 일이고, 세계적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중대한 일이다.


    중간층에 사는 50억 인구가 잠재적 소비자로서 삶의 질을 높이며, 샴푸, 오토바이, 생리대, 스마트폰 등을 소비한다. 그런 사람들을 그저 ‘가난한’ 사람으로 치부한다면 큰 시장을 쉽게 놓쳐버리는 꼴이다.



    크기 본능

    크기 본능

    사람들은 비율을 왜곡해 사실을 실제보다 부풀리는 경향이 있다. 비율을 왜곡하는 것은, 다시 말해 크기를 오판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향이다. 숫자 하나만 보고 그 중요성을 오판하는 성향도 본능이다. 이 두 성향이 크기 본능의 두 가지 핵심이다.


    언론은 이러한 본능의 친구다. 주어진 사건, 사실, 수치를 실제보다 더 중요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은 언론인의 직업적 의무에 가깝다.


    크기 본능의 두 가지 측면은 부정 본능과 더불어 세상의 발전을 체계적으로 과소평가하게 만든다. 세계 인구와 관련한 여러 비율 중에 기본 욕구를 충족하며 사는 사람의 비율을 물으면, 대부분 일관되게 약 20%의 답을 내놓는다. 하지만 정답은 80%, 나아가 90%에 가깝다. 예방접종을 받는 아이의 비율은 88%, 전기를 공급받는 비율은 85%다. 초등학교를 나온 여자아이의 비율은 90%다. 그러나 자선단체와 언론이 자극적으로 보이는 숫자를 고통받는 개인의 모습과 함께 끊임없이 보여주다 보니 사람들은 왜곡된 시각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다른 모든 비율과 발전을 체계적으로 과소평가한다. 그러면서 일부 비율은 체계적으로 과대평가하기도 한다. 스웨덴에 이주한 사람의 비율이며, 동성애에 반대하는 사람의 비율 등이 그렇다.

    크기 본능을 어떻게 억제할까?

    수를 비교하라

    중요성을 오판하지 않으려면 수를 하나만 갖고 따지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수가 하나라면 항상 적어도 하나는 더 요구해야 한다. 그 수와 비교할 다른 수가 필요하다. 큰 수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이상한 일이지만, 일정한 크기를 넘어선 수는 다른 수와 비교하지 않으면 항상 커 보인다.


    420만 명의 죽은 아기들

    2016년에 420만 명의 아기가 죽었다. 유니세프가 가장 최근에 발표한, 전 세계에서 1년도 살지 못한 채 죽은 아이들의 수다. 우리는 뉴스에서 또는 활동가 집단이나 기관이 내놓은 자료에서 이처럼 감정이 북받치는 수를 자주 본다. 이런 수치는 사람들의 반응을 유발한다.


    420만 명의 죽은 아기를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너무나 끔찍한 일이며, 대부분 쉽게 예방할 수 있는 질병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면 더 참혹하다. 그리고 과연 누가 420만 명이 거대한 수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누구도 그런 주장을 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내가 이 수를 언급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 수는 크지 ‘않다’. 이 정도면 놀랍도록 적은 수다.


    420만 명은 2016년의 수치다. 그 전해에는 440만 명이었고, 또 그 전해에는 450만 명이었으며, 1950년에는 1440만 명이었다. 오늘날에 비해 해마다 약 1000만 명이 더 죽었다. 이렇게 비교하면 그 끔찍한 수가 갑자기 적어 보인다. 사실 관련 데이터를 측정한 이래 가장 적은 수치다.


    물론 나는 이 수치가 더 떨어지길, 그리고 더 빨리 떨어지길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고, 자원 배분의 우선순위를 어떻게 정해야 할지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해 냉정하게 계산하고 효과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파악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분명한 사실은 예방할 수 있는 죽음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치를 비교하지 않고는 절대 그 사실을 알 수 없다.



    비난 본능

    비난 본능

    비난 본능은 왜 안 좋은 일이 일어났는지 명확하고 단순한 이유를 찾으려는 본능이다. 최근에 내가 이 본능을 느낀 것은 호텔에서 샤워를 할 때였다. 온수 수도꼭지를 끝까지 돌렸지만 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몇 초 지나 쩔쩔 끓는 물이 쏟아져 살을 데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배관공에게 화가 치밀었다. 이어서 호텔 지배인, 그리고 찬물을 쓰고 있을지 모를 옆방 투숙객에게 차례로 화가 났다. 하지만 누구도 비난할 수 없었다. 누구도 내게 고의로 해를 끼치거나 태만하지 않았으니까. 인내심을 가지고 수도꼭지를 천천히 돌리지 못한 내 잘못이었다.


    뭔가 잘못되면 나쁜 사람이 나쁜 의도로 그랬으려니 생각하는 건 무척 자연스러워 보인다.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누군가가 그걸 원해서 그리되었다고 믿고 싶고, 개인에게 그런 힘과 행위능력이 있다고 믿고 싶어진다. 그러지 않으면 세계는 예측 불가능하고, 혼란스럽고, 무서울 테니까.


    비난 본능은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중요성을 과장한다. 잘못한 쪽을 찾아내려는 이 본능은 진실을 찾아내는 능력, 사실에 근거해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을 방해한다. 비난 대상에 집착하느라 정말 주목해야 할 곳에 주목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면 문제를 해결하거나 재발을 방지하는 능력도 줄어든다. 누군가를 손가락질하는 지극한 단순한 해법에 갇히면 좀 더 복잡한 진실을 보려 하지 않고, 우리 힘을 적절한 곳에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항공기가 추락했을 때 잠깐 졸았던 기장만 탓하면 재발 방지에 도움이 안 된다. 기장이 왜 졸았는지, 앞으로 졸지 않으려면 어떤 규제가 필요한지 물어야 한다. 기장이 졸았는지 알아내느라 다른 생각을 못 하면 발전은 없다. 세계의 중요한 문제를 이해하려면 개인에게 죄를 추궁하느라 시스템에 주목해야 할 때가 많다.


    비난 본능은 일이 잘 풀릴 때도 발동되어 칭찬 역시 비난만큼이나 쉽게 나온다. 일이 잘 풀릴 때 우리는 아주 쉽게 그 공을 개인이나 단순한 원인으로 돌리는데, 이때도 대개는 문제가 훨씬 복잡하다. 세계를 정말로 바꾸고 싶다면, 세계를 이해해야지 비난 본능에 좌우돼서는 안 된다.



    다급함 본능

    다급함 본능

    드디어 마지막 본능까지 왔다. 이제 결정을 내릴 시간이다.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본능이 지금처럼 절실히 느껴지는 일은 다시없을 것이다. 오늘, 바로 지금이 이 책의 통찰력을 받아들여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꿀 절호의 기회다.


    지금 결정해야 하고, 지금 행동해야 한다. 생각하는 방식을 오늘부터 바꾸겠는가, 아니면 영원히 무지한 상태로 살겠는가? 그건 마음먹기 달렸다.


    그런데 이런 말투를 전에도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영업사원이나 활동가가 딱 이런 투로 이야기한다. “지금 하라.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다급함 본능을 자극한다. 이렇게 재촉하면 비판적 사고를 하기보다 빨리 결정하고 당장 행동하게 된다.


    하지만 침착하라. 그건 대개 사실이 아니다. 절대 그렇게 다급하지 않고, 절대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니다. 이 책을 덮고 다른 것을 해도 좋다. 일주일 뒤나 한 달 뒤, 아니면 1년 뒤에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요즘을 상기할 수도 있다. 그래도 늦지 않다. 사실은 한 번에 몰아서 하는 벼락치기보다 그게 더 좋은 학습법이다.


    다급함 본능은 위험이 임박했다고 느낄 때 즉각 행동하고 싶게 만든다. 아주 먼 과거에는 이 본능이 인간에게 이롭게 작용했을 것이다. 풀숲에 사자가 있을 거라 생각되면 지나치게 분석하는 건 옳지 않다. 하던 일을 멈추고 가능성을 주의 깊게 분석하는 사람은 우리 조상이 아니다. 우리는 불충분한 정보로 빠르게 결정하고 행동하는 사람의 후손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다급함 본능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어디선가 자동차가 느닷없이 나타나면 피해야 한다. 하지만 즉각적 위험은 거의 사라지고 좀 더 복잡하고 대개는 좀 더 추상적 문제를 마주하는 요즘, 다급함 본능은 주변 세계를 이해하는 데 오히려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이 본능은 스트레스를 주고, 다른 본능을 확대해 억제하기 힘들게 만들고, 분석적 사고를 가로막고, 너무 빨리 결심하도록 유혹하고, 충분한 고민을 거치지 않은 극적인 행동을 부추긴다.


    먼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위험을 마주할 때는 그런 본능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다. 미래의 위험이라면 오히려 상당히 나태해질 수 있다. 은퇴에 대비해 저축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주 적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미래의 위험에 대비하는 이런 태도는 장기적 사업을 하는 활동가에게는 큰 문제가 된다. 사람들을 어떻게 각성시킬까? 어떤 식으로 충격을 줘야 사람들이 활동에 나설까? 불확실한 미래의 위험을 확실하고 임박한 위험이라고, 중요한 문제를 풀 역사적 기회가 왔다고, 지금 해결하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하다고 설득해야 한다. 한마디로 다급함 본능을 부추겨야 한다.


    이 방법이 행동을 이끌어내는 확실한 길이지만, 그러다 보면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좋지 않은 결정을 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 그 명분의 신뢰성과 믿음이 떨어진다. 경고가 상시적이 되면 진짜 다급한 일에 무감각해지게 마련이다. 활동가가 행동을 이끌어내려고 문제를 실제보다 다급한 것처럼 말하면 양치기 소년이 되고 만다. 그 이야기의 결말은 다들 알지 않는가. 들판 여기저기 죽은 양들!



    사실충실성 실천하기

    사실충실성 실천하기

    날마다 일상에서 사실충실성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교육: 우리는 아이들에게 사실에 근거한 사고의 기본 틀을 가르치고, 사실과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하는 법을 훈련시켜야 한다. 그러면 주변 세계와 관련한 뉴스를 들어도 전후 맥락을 고려하고 언론, 활동가, 영업 사원이 과도하게 극적인 이야기로 극적 본능을 자극할 때도 그 사실을 눈치챌 수 있다. 이런 기술은 많은 학교에서 이미 가르치는 비판적 사고의 일부이며, 다음 세대를 여러 가지 무지에서 보호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아이들에게 겸손과 호기심을 가르쳐야 한다. 여기서 겸손이란 본능으로 사실을 올바르게 파악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것이고, 지식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다. 아울러 “모른다”고 말하는 걸 꺼리지 않는 것이자,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을 때 기존 의견을 기꺼이 바꾸는 것이다. 겸손하면 모든 것에 대해 내 견해가 있어야 한다는 압박감도 없고, 항상 내 견해를 옹호할 준비를 해야 할 필요도 없어 마음이 편하다.


    호기심이란 새로운 정보를 마다하지 않고 적극 받아들이는 자세를 말한다. 아울러 내 세계관에 맞지 않는 사실을 끌어안고 그것이 내포한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실수를 부끄러워하기보다 실수에서 호기심을 이끌어내자. ‘내가 그 사실을 어쩌면 이렇게 잘못 알 수 있을까? 그렇다면 여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사람들이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왜 그런 해결책을 썼을까? 호기심을 품으면 늘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어 꽤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세계는 계속 변할 것이고, 무지한 어른의 문제는 다음 세대를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 학교에서 배운 세계에 관한 지식은 졸업하고 10~20년이 지나면 낡은 지식이 된다. 그래서 어른의 지식도 계속 업데이트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자동차업계는 차에 결함이 생기면 리콜을 단행한다. 구매자는 제조업체에서 “귀하의 차량을 회수해 브레이크를 교체해드리려 합니다”라는 편지를 받는다. 학교에서 배운 세계에 관한 사실이 낡았을 때도 “죄송하지만 저희가 가르쳐드린 지식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닙니다. 귀하의 뇌를 보내주시면 무상으로 업그레이드해드리겠습니다.”라는 편지를 받아야 한다. 또는 고용주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세계경제포럼이나 그와 비슷한 회의에서 당황하지 않으려면 이 자료를 잘 읽고 이 문제를 풀어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당부

    그동안 무지와 싸우고 사실에 근거한 세계관을 널리 퍼뜨리면서 좌절할 때도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내 삶을 고무적이고 유쾌하게 소비했다는 생각이 든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배우는 것은 유용하고 의미 있는 일이었으며, 그 지식을 다른 사람에게 퍼뜨리는 것은 대단히 보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지식을 퍼뜨리고 사람들의 세계관을 바꾸는 것이 왜 그렇게 힘든지 마침내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는 무척 짜릿했다.


    누구나 하루아침에 사실에 근거해 세계를 바라볼 수 있을까? 큰 변화는 언제나 상상하기 힘들다. 하지만 분명히 가능하며, 나는 두 가지 단순한 이유에서 그러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정확한 GPS가 길 찾기에 더욱 유용하듯 사실에 근거한 세계관은 삶을 항해하는 데 더욱 유용하다. 그리고 어쩌면 더 중요한 둘째 이유는 사실에 근거해 세계를 바라볼 때 마음이 더 편안하다는 것이다. 대단히 부정적이고 사람을 겁주는 극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사실에 근거해 세계를 바라보면 스트레스와 절망감이 적다.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면 세계는 생각만큼 나쁘지 않다. 그리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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