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국가들
 
지은이 : 조슈아 키팅(역:오수원)
출판사 : 예문아카이브
출판일 : 2019년 07월




  • 이 책은 지구상에서 국가라고 불리는 나라들의 지정학적 배치가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 상태에 이르게 됐는지, 무슨 까닭으로 변화 없이 유지돼왔는지, 그 흐름 속에서 왜 일부 국가와 민족은 터전을 잡지 못하고 떠도는지, 이 같은 상황이 앞으로의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탐색한다. 저널리스트이자 국제 외교·정책 분석 전문가인 저자가 두 발로 직접 찾아다니며 취재한 결과를 르포르타주(reportage) 형식으로 펼쳐내고 있다. 


    보이지 않는 국가들


    국가 체제가 지배하는 세계

    민족주의라는 유령

    전쟁 그리고 거의 사반세기 동안의 경기 침체로 인한 방치 탓에 압하지야의 수도 수후미는 낡아서 거의 너덜너덜해졌다. 그래도 이 도시의 매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소련 통치 이전에 지어진 리차 호텔 근처의 해안지구 산책로는 매우 아름답다. 전쟁 당시 공습의 피해를 입은 건물들과 텅 빈 건물들이 도처에 넘쳐나긴 하지만, 차르가 통치하던 러시아 제정 시대와 소련이 통시하던 공산주의 시대 내내 압하지야가 해변 휴양지로 번영을 구가했으리라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마치 뉴저지에 있는 저지쇼어가 몇 달간의 엄청난 공습에 시달린 다음 20년 동안 방치됐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아직 그곳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제1차 대전 후에도 압하지야에서는 간헐적으로 폭력 사태가 벌어졌다. 압하지야의 지배층은 공산주의 시절 내내 독립을 추진했다. 당시 압하지야 지역은 조지아 소비에트 공화국 내에서 특별하면서도 다소 불분명한 행정상의 지위를 갖고 있었다. 압하지야는 민족 갈등이 벌어질 만한 곳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압하지야와 조지아 사이의 갈등이 높아진 것은 냉전이 종식돼가던 시기, 그렇지 않아도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는데 냉전 종식으로 발언권이 높아진 조지아 정부가 독립을 요구하면서부터였다. 소련에서 이미 주변주 취급을 받았던 압하지야 지도자들은 독립을 쟁취한 조지아 통치 아래에서 훨씬 더 가혹한 처우를 받게 될까 봐 두려워했다.


    압하지야와 조지아 중 정확히 어느 쪽이 전쟁을 시작했는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많지만, 1993년 말까지 압하지야의 민병대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조지아군을 인구리 강 반대편으로 몰아냈고, 그 이후 이 지역은 항구적인 분쟁 지역으로 남아 있다.


    압하지야인들 그리고 체첸과 오세티야인들이 배운 바대로 소련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국가들이 모스크바의 멍에를 벗어던질 때 국제사회가 제공한 지원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니우스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민족과 종족 집단의 주권을 지원하는 일은 끝없는 분리주의와의 분쟁을 불러 일으켰다. 국제사회는 이미 소련 사회주의 공화국에 속했던 15개국의 독립을 승인했고, 분열을 허락한 범위는 딱 거기까지였다. 그 당시 서 있던 자리가 독립군 국경 저편이었다면, 안됐지만 어쩔 수 없었다. 블라디미르 푸틴이 2014년 크림반도합병을 정당화하는 연설에서 말한 그대로였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잠들었던 나라와 다른 나라에서 깨어났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소련공화국 국민이 과거에 존재했던 공화국의 소수민족이 된 것입니다.”


    역사가 찰스 킹은 다음과 같이 썼다. “소련 해체 이후 캅카스 지방의 질서는 개별 민족들이 독립 쟁취를 위해 투쟁한 당연한 결과물이 아니라, 어떤 분리주의자들은 너그러이 봐주는 반면, 어떤 분리주의자들은 봐주지 않는 국제사회의 역량을 반영하고 있었다.”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조지아와 같은 일부 국가들은 국제적 승인과 다자간 기구들의 회원국 자격을 받음으로써 합법화됐던 반면, 승인받지 못한 국가들은 승인받은 국가들 못지않게 국가로서 충분히 기능하고 있는데도 분리주의자들의 일시적 변덕을 합리화하려는 미친 시도를 벌이는 집단으로 매도당했다. 요컨대 일부 국가들은 국제사회에서 평등한 대접을 받고 다른 국가들은 그렇지 못했다.


    압하지야에서 전쟁이 벌어졌음을 가장 섬뜩하게 일깨워주는 상징물은 수후미 외곽 지역, 특히 국경 지대에 녹슨 채 우두커니 줄지어 서 있는 공산주의 시대의 아파트 건물일 것이다. 한때 조지아 주민이 가장 많이 살던 곳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지역은 이상할 정도로 인구 밀도가 낮게 느껴진다. 당연한 일이다. 압하지야인들은 자기네 영토 내에서도 소수민이었다. 1898년 당시 압하지야에 거주하고 있던 주민 중 압하지야인들은 18퍼센트에 불과했다. 수백 년 동안의 차르 체제가 압하지야인들을 추방하고 소비에트 사회주의 정책이 조지아인들을 압하지야로 이주하도록 독려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다. 국제인권감시단의 추정에 따르면 전쟁 기간 동안 약 20만 명의 조지아인들이 압하지야에서 달아났다. 압하지야 지역의 인종청소가 성공적으로 완수된 셈이다.


    압하지야의 텅 빈 건물들은 정체 상황의 불편한 진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 지역의 안정 상태는 사실상 100년 동안이나 지속된 대량학살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진실 말이다. 


    19세기 후반, 발칸반도에서는 민족주의가 발흥했고, 오스만제국은 몰락했으며, 그리스와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를 비롯한 국가들이 건국됐고, 이슬람 및 다른 소수민족이 대규모로 축출됐다. 이 지역을 휩쓴 새로운 민족주의는 평화의 시기 동안 통과된 인종차별법의 결과이기도 했다.


    유럽의 거대한 다민족 제국이 오랜 기간 동안 차츰 몰락하고 민족주의가 부상해 활개를 치는 과정은 1930년대에 기괴할 만큼 절정으로 치달았고, 그 사이 인종청소는 더욱 가속화됐다. 그렇지만 윌슨이 파리 강화회의에서 천명한 ‘민족자결’ 열네 개 조항이 100년 동안 지속된 유럽의 인종청소에 일조했는지의 여부는 아직도 확실한 대답이 없는 질문이다. “우리 민족은 국가를 세울 자격이 있다”라는 논리에서 “우리 국가는 우리 민족만을 위한 것이다”라는 논리까지 가는 데 엄청난 이데올로기적 도약을 할 필요는 없다. 민족이라면 누구나 국가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 반드시 인종청소를 조건으로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실제로 인종청소라는 결과를 낳았다.


    유사한 과정이 지난 10년 동안 이라크에서도 벌어졌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던 무렵 바그다드 지역에는 이슬람교 수니파와 시아파 주민들이 여기저기 섞여 살고 있었다. 2006년 이라크 내의 알카에다가 시아파의 성지인 사마라의 알아스카리 사원을 폭파하면서 시작된 종파 전쟁으로 바그다드는 수니파와 시아파 지역으로 급속히 분열됐다. 많은 분석가들은 이런 분할 과정이 교전 약화의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싸우던 집단이 분리된 것이다. 알카에다의 후계자인 IS의 부상으로 분할 과정은 전국적으로 가속화되고 분할 지역도 더욱 넓어졌다. 이라크를 상이한 민족 집단으로 분할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하는 외부 관측통들의 말은 100년 전 파리에 있던 윌슨처럼 인종청소라는 의도적인 조치의 결과를 지지하는 셈이다.


    어떤 의미로 보면 세계지도는 윌슨의 민족자결 비전을 닮아가고 있다. 모든 민족에게는 국가가 있어야 하며, 국가에게는 한 민족만 존재해야 한다는 비전. 민족자결이 실현되는 데 필요했던 것은 100년에 걸친 인종 학살, 전면전, 그리고 숨 막히는 전체주의였다. 캅카스에서 중동과 동남아시아까지 그 과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수백년 동안 진행된 민족국가 성립 이후 우리는 영토 국가를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정치 단위로 보는 데 심하게 길들여져 다른 모델은 상상하기 어렵게 돼버렸다. 하지만 다른 모델은 분명히 존재한다. 어디서 찾아야 할지 알고 있다면 말이다.



    보이지 않는 국가

    구글 어스를 띄우고 클릭만 하면 보르네오 섬 열대우림부터 리우데자네이루의 빈민가에 이르기까지 지구상 거의 모든 지점의 위성 이미지를 볼 수 있는 21세기에서 망망대해라는 말은 그 옛날의 망망대해와 같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소말릴란드가 지난 26년 동안 처해 있던 기이한 상황, 낮도 밤도 아닌 황혼을 닮은 기이한 지정학적 조건은 오늘날 망망대해 한가운데 떨어져 있다는 것이 물리적 거리나 여행의 어려움이 아니라(소말릴란드에 갈 때 나는 지구상에서 가장 분주한 국제공항인 두바이에서 누구나 타는 민간 항공기를 이용했다), 우리의 인식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소말릴란드는 어딘가에 있는 곳인 동시에 아무데도 없는 곳이기도 하다. 그 주된 이유는 세계의 다른 대부분의 지역이 이곳을 모르거나 이곳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소말릴란드가 이름 그대로 실재하는 소말리 땅(Somaliland)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곳은 국가가 드러낼 수 있는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다. 공항에서는 소말릴란드 국기가 나부끼며 소말릴란드 제복을 입은 세관 직원이 워싱턴에 있는 소말릴란드 영사관에서 발급한 소말릴란드 비자를 검사한다. 이곳을 방문하는 동안 나는 소말릴란드 번호판이 달린 택시를 이용하면서 소말릴란드 화폐인 실링으로 택시 요금을 냈고, 택시는 나를 소말릴란드 정부의 각료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줬다. 그러나 미국 국무부, UN, 아프리카연합(African Union)과 다른 모든 지구상의 정부들이 봤을 때 나는 소말릴란드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내가 소말리아에 있다고 인식한다. 폭력으로 물든 무정부 상태와 국가 파산의 상징인 소말리아 말이다.


    소말릴란드는 인정받지 못하는 국가들 중에서도 독특한 사례로 꼽힌다. 분명히 완전한 독립을 이뤘는데도 정치적으로 완전히 고립돼 있다는 점 때문이다. 독립 이전의 남수단(South Sudan)과 달리 소말릴란드의 국가 지위에 대한 요구는 식민지 국경을 재설정하는 것이 아닌 식민지 시대의 국경을 복원하려는 시도에 기반을 두고 있다.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압하지야와 달리 소말릴란드는 강대국의 지원이 없다. 중국이라는 대국에 종속된 대만과 달리 소말릴란드는 더 부유하고 더 강력한 나라가 아니라, 반대로 오히려 더 가난하고 약한 나라에 족쇄가 채워져 있다. 또한 팔레스타인과 달리 소말리아의 독립 운동은 전 세계 활동가들에게 별로 인기 있는 명분이 아니다. 물론 소말릴란드가 소말리아 외에 적과 대치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외교관들이 어느 정도 인정하는 바 이들은 소말릴란드의 역사에 대체로 동정적이며 이 나라가 최근에 이룬 성과에도 감탄하고 있다.


    그렇다면 소말릴란드의 주요 걸림돌은 세계의 적대감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소말릴란드가 현재 처해 있는 곤경은 “새로운 국가를 세웠는데 아무도 모를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한다.


    언론인 그레이엄 우드는 소말릴란드와 압하지야 같은 곳을 ‘중간지대(limbo world)’라고 불렀다. “실제 국가처럼 행동함으로써 실제 국가가 되기를 희망하는 정치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실제’ 국가를 ‘자칭’ 국가와 구별해주는 것은 다른 나라들의 ‘인정’ 뿐이다. 실제 국가의 여부를 결정하는 국제관계의 최종적인 법률 권위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이 문제에 대한 의견 차이 또한 많다. 소말릴란드와 비슷한 위상을 지닌 나라들과 스웨덴 같은 국가를 구별해주는 요소는 스웨덴이 동료 국가들(다른 국가들)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인정은 법적 행위가 아니라 ‘정치적’ 행위다.


    현재 전 세계 나라들 중 25개국은 이스라엘을 공식적인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은 유럽 및 북아메리카의 많은 국가들에게는 독립국가로 인정받지 못하지만 그 밖의 135개국으로부터는 인정을 받고 있다. 러시아 그리고 러시아의 이데올로기적 동맹국들은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라는 조지아 탈퇴 지역은 국가로 인정하면서 코소보의 독립은 인정하지 않는다. 나우루, 바누아투, 그리고 투발루는 인정 논쟁에 대해 실용적 입장을 취해왔다. 이들은 압하지야와 대만처럼 논란이 분분한 국가들의 인정 문제를 러시아와 중국과의 우호적 관계와 연관 지어 교환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를 인정하는 문제는 외교관계를 맺는 일과 다르다. 미국은 북한의 김정은 정권을 불법이라 보고 외교관계를 맺지 않지만 북한이 국가라는 것, 김정은이 그 국가의 통치자라는 사실까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1945년 UN 설립 이후 UN 가입 자격은 국가가 지닌 적법성의 황금률이 됐다. UN에 가입하려면 총회 3분의 2의 승인이 필요하다. 더욱 중요한 요건은 안전보장이사회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이 입장을 바꾸지 않으면 정회원 자격을 얻으려는 팔레스타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코소보도 마찬가지다. 러시아가 거부권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3년 이후 매년 정회원 자격 신청을 해온 대만의 경우는 중국의 거부권 행사로 희망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듯이 국가의 지위는 법적 개념이지만 이를 얻는 일은 전적으로 정치적 과정이다. 어디가 국가이고 어디가 국가가 아닌지를 구분하는 보편적인 법칙을 확정하려는 시도는 무엇이건 간에 끝내 결실을 맺지 못할 것이다.


    국가로 행세하는 나라

    소말릴란드는 압하지야에 비해 가기가 훨씬 쉽다. 두바이를 거쳐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하르게이사까지 정기적으로 운행하는 여객기에 타면 된다. 미국인들은 워싱턴에 있는 소말릴란드의 비공식 영사관에서 비자를 바로 얻을 수 있다.


    하르게이사의 에갈 국제공항이 가까워질 때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소말릴란드는 마치 살 수 없는 곳이 아닌데도 아무도 살지 않는 곳처럼 보인다. 건조한 덤불지대와 들쭉날쭉한 솟아 있는 산들이 수도 주변에 길게 펼쳐져 있는 이곳은 인간이 정착하기에 최적의 장소 같지는 않다.


    하르게이사는 얼핏 보면 캘리포니아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 언덕이 많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콘크리트 집과 여기저기 패인 도로들이 삐죽삐죽 뻗어 나가 있다. 도시 전체는 사막의 얇은 먼지 막으로 둘러싸인 듯 탁하고 건조하다. 우기가 돼서 격렬한 폭우가 쏟아지면 포장이 되지 않은 대부분의 길은 젖어서 질척거린다.


    소말릴란드의 호텔을 온라인으로 예약하려다 보면 다음과 같은 문구를 보게 된다. “미국 국무부는 미국 시민에게 가급적 소말리아 여행을 가지 말라 경고하고 있습니다. 알샤바브라는 알카에다 연관 테러조직의 위협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곳에 오게 된 다음에는 이런 경고가 쓸데없었다는 사실을 금세 깨닫게 된다. 하르게이사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안전한 대도시 중 한 곳이라서 오염과 교통을 빼놓고는 별 걱정 없이 돌아다닐 수 있다. 물론 수도 밖을 여행하는 외국 여행객은 무장 경호원을 고용해야 한다.


    1960년 소말릴란드 보호령은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했으며, 미국을 포함한 세계 35개국으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았다. 7월 1일, 소말리아가 이탈리아에서 독립했고 두 나라는 통일했다. 그런데 소말릴란드는 그 이후 이 결정을 내내 후회하게 된다. 두 영토의 정치 체제를 조화롭게 통일하는 문제를 두고 곧바로 문제가 불거졌기 때문이다. 독립한 지 겨우 1년 만에 북부 유권자들은 새 헌법을 거부했다. 두 지역의 통일은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설상가상으로 1969년에는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시아드 바레(소말리아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1969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차지했으며, 사회주의혁명당을 조직해 1당 독재 체제를 유지하다가 반군에 의해 수도를 빼앗겼다-옮긴이)를 권좌에 올려놓았다.


    소말릴란드 사회 내의 긴장은 바레의 통치가 오래 지속되면서 더욱 악화됐다. 사태가 비극으로 치달은 것은 바레가 오가덴 지역의 소말리 분리주의자들을 대표해 에티오피아 공격을 시작했을 때였다. 과거 바레의 과학적 사회주의를 지지했던 소련은 에티오피아인들을 지지하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했고 소말리 사람들은 궤멸했다. 이 분쟁과 최악의 가뭄이 겹쳐 수십만 명의 오가덴 난민들이 이들을 받아들일 준비도 돼 있지 않은 소말리아로 밀려들었고, 1980년에는 소말리아 국민 4분의 1이 난민으로 전락하기에 이르렀다. 바레와 그의 냉혹한 군사정권에 대한 지지도 시들어가기 시작했다.


    갈등은 1980년대 후반 소말리민족운동과 중앙정부 사이의 전면적 내전에서 절정에 다다랐다. 이 시기 동안 수천 명이 살해됐고 수백만 명이 고향을 떠났다. 10년 전 수천 명이 에티오피아에서 소말리아로 밀려들어왔던 것처럼 이제는 반대 방향으로 난민 행렬이 이어졌다. 소말리아인들은 전 세계로 흩어졌다.


    1991년 5월 소말리민족운동은 남부와의 인연을 끊고 독립할 것이며, 이제부터 소말릴란드공화국이 될 것을 선포했다. 그러나 국제 사회는 심드렁했다. 북부의 느리고 꾸준한 국가 형성 과정은 남부를 휩싼 혼돈에만 온통 관심을 기울인 국제사회의 언론으로 인해 눈에 띄지 않았다.


    소말릴란드는 1960년 소말리아와의 국경을 스스로 없앴지만 소말릴란드인들은 그 결정을 돌이킬 수 없다고는 여기지 않는다. 탈식민지 통합의 약속을 저버리는 국가는 소말릴란드가 처음이 아니다. 세네갈 영토 내의 좁은 땅이었던 세네갈과 감비아가 세네감비아 연방으로 통일한 시기는 1982년에서 1989년까지였다. 이집트와 시리아도 1958년부터 1961년 시리아가 분리 독립할 때까지 잠시 동안 통일아랍공화국으로 통일한 적이 있다. “이런 나라들이 결혼(통일)의 효력을 유지할 수 없어서 헤어지는데, 왜 소말릴란드만 사랑도 없는 결혼에 매여 있어야 한단 말인가?” 하는 것이 소말릴란드인들의 불만이다.


    소말릴란드 외무부 장관 사이어는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는 소말릴란드가 에리트레아, 남수단, 동티모르처럼 전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는 다른 국가보다 오히려 더 국가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봐요.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은 대부분의 신생국가보다 소말릴란드가 더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말입니다.”


    소말릴란드는 자신들이 소말리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남부의 소말리아 사람들과 동일한 나라의 일원이 돼야 한다는 생각만큼은 수긍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르게이사에서 이런 주장들은 반박하기 힘들 만큼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이곳을 나가면 이들의 주장은 특별한 설득력이 없을 공산이 크다. 소말릴란드가 마주하고 있는 실망스러운 현실은 세계지도가 국제법이나 심지어 관습보다도 경로의존성(과거에 이뤄진 선택이 관성 때문에 쉽게 변화되지 않는 현상-옮긴이)에 의해 현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가들은 현 상태를 바꾸지 않으려는 관성에 빠져 있고, 국민들은 현 상태를 바꾸는 것이 몹시 어렵고 위험을 초래하리라는, 어느 정도는 정당한 우려를 품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독립을 향한 꿈

    여기도 저기도 아닌

    이라크령 쿠르디스탄, 즉 이라크의 쿠르드 자치구는 양자역학에 나오는 양자 같은 성질의 국가다. 입자인 동시에 파동으로 존재하는 양자물리학의 물질처럼, 이곳은 어떤 각도와 틀을 통해 보느냐에 따라 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곳은 이라크라 불리는,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민족국가 지역이다. 물론 이라크령 쿠르디스탄과 이라크라는 국가와의 관계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렇지만 어떤 의미에서 이라크령 쿠르디스탄은 국가 자격을 얻기 위해 치러야 하는 시험대를 의기양양하게 모두 통과한 독립국이다. 이곳은 미국의 워싱턴 및 외국의 다른 수도에서는 수많은 UN 회원국들보다 오히려 더 고차원적이고 폭넓게 외교적 지위를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이곳은 남부 쿠르디스탄 문화 공동체의 일부이기도 하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가 존재한다면 바로 쿠르디스탄이 그런 집단에 속할 것이다. 물론 이곳의 문화적 결속 수준은 그다지 높지 않다. 터키의 쿠르드족은 문화 및 정치적 권리를 얻고자 지난 수십 년 동안 무력 투쟁과 평화 투쟁을 비롯해 다각도로 투쟁을 벌여왔지만, 이라크령 쿠르디스탄은 놀랍게도 터키의 수도 앙카라의 동맹이 됐고, 이라크 바그다드의 개입 없이 자국의 석유를 터키까지 연결한 송유관을 통해 판매한다는 합의에 이르렀다. 물론 물의를 일으킬 만한 합의였다. 이 문제는 ‘시리아계 쿠르드 민주연합당’이 등장하면서 훨씬 더 복잡다단한 양상을 띠게 됐다. 시리아계 쿠르드 민주연합당과 이라크령 쿠르디스탄 사이의 관계는 잘해 봐야 아주 허약하고, 때로는 노골적일 정도로 험악하다.


    그뿐만 아니라 이라크령 쿠르디스탄은 내부적으로도 정치 지역이 두 곳으로 나눠져 있다. 이 지역은 각각 쿠르디스탄의 오랜 족벌 정당들 중 한 곳과 연합한 정당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이라크령 쿠르디스탄은 수도인 아르빌을 포함해 쿠르드 민주당이 지배하고 있다. 최근까지 쿠르드 민주당은 마수드 바르자니 대통령이 이끌었다. 동부 쿠르디스탄(이란령 쿠르디스탄)은 이 지역 제2의 대도시이자 수도인 술라이마니야를 포함해 ‘쿠르드 애국동맹’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이런 상황을 잠깐 들여다보면 쿠르드족이 마치 단일한 민족인 것처럼 ‘쿠르드 무장화’를 역설하는 미국 정치가들의 주장에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쿠르드족이 단일한 정치체라고 말하는 것은 아랍인들이 단일한 정치체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다. 쿠르드족을 대변하는 이들은 때로는 중첩되고 때로는 갈등하며 경쟁하는 정당, 집단, 정부, 민병대의 혼합물이다.


    쿠바드 탈라바니가 내게 한 말이다. “쿠르드 민주당의 검문소를 거치면 그 다음은 쿠르드 애국동맹의 검문소가 나옵니다. 우리가 아직 국가라는 통일된 조직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매일매일 뼈아프게 인식하는 거죠. 이런 분열은 좋은 출발점이 아닙니다. ‘아, 이런 일들은 사실에 맞춰 처리하면 되는 거지’ 하는 식으로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탈라바니는 쿠르드족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이렇게 덧붙였다. “쿠르드족이 통일을 이뤘던 것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통합됐을 때뿐입니다. 우리는 단 한 번도 우리들만의 순수한 의지로 통일을 한 적이 없어요. 우리가 갈라질 때마다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준 것은 더 큰 세력과 대의명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세력과 명분이 없을 때 우리는 통일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세상이 우리의 분열을 획책하지 않아도 우리가 알아서 분열하는 셈입니다.”


    IS가 위협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의문시된 것은 100년을 이어져온 지리상의 정체 상태뿐만이 아니었다. 쿠르드족의 분열 상황 또한 도전을 받은 셈이었다. IS가 분열된 쿠르드족에게 통합의 명분을 제공했던 것이다.


    IS가 저지른 최악의 잔학 행위는, 주로 이라크 북부에 살고 있는 쿠르드족과 기독교도 그리고 야지디교를 믿는 야지디족을 대상으로 한 것들이다. 수천 명의 야지디족을 살육하고 자세히 문서화된 성뇨예 시스템을 만든 이들의 행위는 집단학살로 규정됐다. 2014년 8월 미국이 결국 이라크 내 IS를 공습하도록 만든 최종 도화선은, 이들이 쿠르드족의 땅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야지디족의 학살이 임박하면서였다. 2014년에 벌어진 미군의 공습은 미국과 이라크 및 시리아와 쿠르드군을 포함한 군사 작전의 시작이었고, 결국 2017년 10월 IS가 점령했던 영토의 실질적인 수도였던 시리아의 라카를 비롯한 대부분의 IS 영토를 수복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IS는 사담 후세인의 실각 이후 쿠르드족의 안전에 가장 큰 위협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위협은 또 기회이기도 했다. 쿠르드족의 이라크에 점차 뿌리내리고 있던 친서방적 자유 시장 민주주의가 IS의 원시적이고 종말론적 비전과 딴판이라고 해도, 쿠르드족과 IS는 수십 년 동안 중동에서 유지돼왔던 지도상의 정체를 전복시키고 싶은 욕망만큼은 공유하고 있다.


    IS가 출현해 이라크의 수니파 지역을 승승장구하며 활보하고 있다는 사실은 수십 년 동안 이라크령 쿠르디스탄의 지도자들이 주장해왔던 바를 입증했다. 이들의 주장이란 중앙에서 통제하는 다민족 이라크는 이제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있는 정치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이라크 군부의 몰락과 페시메르가의 비교 우위 덕에 쿠르드족은 그동안 이들이 갈망해왔던 영토상의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원했던 키르쿠크가 특히 그랬다.


    “대중의 생각을 바꿔서 그들 사이에 독립에 대한 염원을 다시 불러일으킨 것은 IS와의 전쟁이 아닙니다. 바그다드가 쿠르드 지역을 다루던 방식, 그리고 이들이 실상은 쿠르드 지역으로 권한을 위임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점이야말로 쿠르드족의 독립 열망을 부활시킨 요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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