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폐의 세계사
 
지은이 : 셰저칭(역:김경숙)
출판사 : 마음서재
출판일 : 2019년 02월




  • 대만의 유명한 대중 인문학자이자 미학자인 저자는 이 책에서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각국의 지폐를 통해 그 나라의 역사와 정치, 문화를 흥미롭게 풀어낸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지만 지폐 디자인에는 한 나라의 흥망성쇠와 비전, 이상이 오롯이 담겨 있어 해당 국가를 이해하는 데 더없이 좋은 자료가 된다. 


    지폐의 세계사


    색채로 표현한 인간성의 존엄 | 스페인

    대다수 사람들에게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라는 이름은 아마 낯설 것이다. 분명 고야는 대중들이 쉽게 좋아할 만한 예술가는 아니다. 스페인 북부의 몰락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대담하고 열정적인 필치로 18세기 이베리아 반도의 풍요로운 분위기를 그려냈다.


    결혼 후 고야는 처갓집 덕을 보고 있었는데, 서른 살 즈음 추천을 받아 마드리드의 왕립 태피스트리 공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의 주된 일은 ‘Cartoons라고 불리는 밑그림을 그리고 제작하는 것이었다.


    고야가 밑그림을 완성하면 그것은 직공들에게 넘겨졌다. 그러면 직공들은 모직물에 밑그림을 정확하게 복제했다. 대다수의 태피스트리는 귀족과 서민의 일상생활을 풍부한 색채와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로 묘사한 것이었다. 1775년부터 1791년까지 고야는 스페인 황실을 위해 각지의 별궁에 적어도 63편의 밑그림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18세기 스페인의 풍속과 민심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예술 작품이 되고 있다.


    초기의 고야는 당시의 예술사조였던 로코코 양식의 섬세하고 나태한 아름다움에 미련을 두고 있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아름다움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흙먼지로 변할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로부터 몇 년 후,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귀족적인 로코코 양식은 새로운 시대의 경멸과 비판, 유린을 당하게 되었다. 고야는 고상하고 풍요로운 묘사에 전념하면서도 인물의 눈빛을 통해 아쉬움과 연민을 영원히 남기려 했다. 마치 이어지는 순간에 그림 속 인물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또 다른 두 편의 작품 <술 마시는 사내>(1777)와 <도자기 파는 여인들>(1779) 또한 고야가 왕립 태피스트리 공장에서 일하던 시기에 창작한 것이다. <술 마시는 사내>에서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술을 퍼마시는 남자와 <도자기 파는 여인들>에서 건초더미에 앉아 물건을 파는 부녀자들은 모두 평범한 서민들이었고 고야는 그들에게 관심과 동정을 투영했다.


    그들은 나라가 홀대하는 변두리 계층이기에 연약하고 보잘 것 없었지만, 고야는 그들의 세속적인 모습을 미화하거나 포장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주려 했다. 서민의 일거수일투족은 고상하기는 커녕 거칠었지만(그림 속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술을 마시거나 당근을 씹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림 곳곳에서 원초적이고 왕성한 생명력이 넘쳐흘렀다.


    이와는 달리, 마치 초현실적 장막에 둘러싸인 듯한 <술 마시는 사내>의 귀족 남자 세 명과 <도자기 파는 여인들>의 마차를 탄 귀부인은 상류사회의 음침함과 현실에 대한 무지 및 부조화를 드러낸다.


    나는 줄곧 고야의 풍속적인 작품을 좋아했다. 냉정하면서도 열정적인 필치, 신비로운 색채에 대한 추구는 인간의 존엄성이 충만한 예술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계급의 격차를 조화롭게 녹여낸 고야의 예술적 스타일은 오랫동안 스페인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일까. 스페인의 지폐 발행 역사를 살펴보면 고야는 주제 인물로 가장 많이 등장한 사람 중 하나다. 그만큼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이자 시대를 가장 잘 이해하고 표현한 예술인이었다. 부르봉 왕조 시대부터 20세기 초 제2공화국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프랑코 장군의 독재 시대에 발행된 지폐에서도 고야의 자취를 발견할 수 있다.



    초원 제국의 눈부신 상상력 | 몽골

    몽골제국 시대의 통치 영역은 오늘날 그 어떤 나라보다도 넓다. 동쪽으로는 임진강변의 고려 개경에서부터 서쪽으로는 드네프르(Dnieper)강가의 키예프 대공국까지, 남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의 바그다드에서부터 북쪽으로는 시베리아 벌판에 이르는 영역이었다. 문치무공(文治武功)이 왕성했던 13세기에는 세계 대륙의 5분의 1을 차지하고 전 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호령했다. 이 시기에 카라코룸(Karakorum)은 몽골제국의 수도이자 세계의 수도였다.


    카라코룸의 웅장함은 오늘날 무너진 담만 남아 있기 때문에 후대 사람들은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몽고 비사》, 《원사(元史)》, 《신원사(新元史)》에 기록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다지 풍부하게 묘사되어 있지는 않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당시 서양에서 카라코룸을 방문했던 사절단과 전도사들이 그들의 풍부하고 다채로운 문자로 거대한 사막에 위치한 고도의 화려한 모습을 묘사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뤼브뤼키의 동유기》에 가장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후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제국의 수도는 사방이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성벽의 돌출된 부분에는 채색한 그림과 비단이 장식되어 있으며, 칸 궁전의 황금 기와는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비범한 광채를 내뿜는다. 다른 피부색, 다른 언어, 심지어 서로 적대하는 종교도 이곳에서는 모두 조화롭게 지낸다.”


    그러나 뤼브뤼키가 몽골제국에 대해 남긴 기록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단연코 칸 궁정 안에 위치한 실버트리(Silver Tree)였다.


    “가죽 부대에 젖이나 술을 담아서 궁에 들어가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었다. 그래서 칸은 프랑스 파리에서 온 기욤이라는 건축가에게 궁전 입구에 거대한 실버트리를 만들게 했다. 실버트리의 줄기, 잎사귀와 과실은 은과 보석으로 만들어졌다. 실버트리 주위에는 말 젖을 내뿜는 은사자 네 마리가 있고, 줄기에는 네 개의 관이 나무 꼭대기까지 뻗어있는데, 관 끝에는 도금한 뱀 네 마리가 꼬리로 나무줄기를 둘둘 감고 있다. 뱀의 입에서는 각각 포도주, 미주(米酒), 마유주, 벌꿀주가 뿜어져 나왔다.”


    후대 사람들은 뤼브뤼키의 기록을 바탕으로 거대한 사막 초원에 존재했던 기이한 광경을 다양한 도안으로 재현했다. 특히 1993년 이후 발행된 투그릭(Tögrög) 지폐는 대몽골제국의 화려한 과거를 하나하나 재현하고 있다.


    500투그릭 및 1,000투그릭에는 《몽고비사》에도 기록된 적 있는 호화로운 장면이 담겨 있다. 서른 마리가 넘는 소가 화려하고 묵직한 황금 수레를 끌고 있는데, 이는 오고타이가 사용했던 이동 궁전이다. 훗날 귀위크와 쿠빌라이가 각각 칸 지위를 쟁탈하기 위한 전쟁을 벌인 후 황금 수레는 문헌에서 사라졌다.


    5,000투그릭 및 10,000투그릭 지폐 뒷면에는 칸의 궁전 앞에 설치된 실버트리가 그려져 있다. 지극히 사치스러운 실버트리는 호쾌하고 손님을 대접하기 좋아하는 유목 민족의 특색을 보여준다. 물론 우리는 이를 실제로 볼 수 없다. 지폐의 도안으로 사용된 실버트리는 18세기에 네덜란드인이 뤼브뤼키의 기록을 바탕으로 묘사한 것이다. 상상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그림은 동양의 화려함과 서양의 아이디어가 결합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치명적 매력을 지닌 적막의 섬 | 페로제도

    나는 안개가 자욱한 어느 날 오후 페로제도에 도착했다. 배는 스트뢰뫼(Streymoy)에 위치한 페로제도의 수도 토르샤븐(Tórshavn)에 정박했다. 배를 오르고 내리느라 15분쯤 시끌벅적하더니 이어서 진공 상태 같은 정적이 찾아왔다. 추위를 피해 차라도 한잔하고 싶을 정도로 바다에서는 매서운 바람이 불어왔다. 길거리에서 가옥에 이르기까지 토르샤븐항의 모든 것은 강렬한 적막감을 느끼게 했다. 나는 단번에 페로제도의 고집과 고독을 사랑하게 되었다.


    비록 궁벽한 곳에 위치하고 인구가 희박하기는 해도 페로제도 사람들은 유럽 대륙을 한 수 아래로 보는 예술가 집단이었다. 이들은 광활하고 쓸쓸한 페로제도와 20세기에 깊은 영향을 끼친 예술사조를 긴밀하게 결합시켰다. 뭉크의 <절규>와 같은 표현주의(Expressionism), 미국에서도 매우 환영받는 미니멀리즘(Minimalism), 그리고 일상생활의 물건을 사용해 주제로 삼는 설치미술(Installation Art)과 개념미술(Conceptual Art)은 페로 예술가들이 특별히 사랑하는 표현 방식이다.


    나는 페로제도의 예술가 중에서도 현지의 풍경을 그리는 데 뛰어났던 하이네센(Zacharias Heinesen)을 제일 좋아한다. 하이네센의 풍경화에는 강렬한 생동감과 몽롱한 아름다움이 넘친다. 또한 서양 회화의 제약을 대담하게 돌파해 시원하고 자유로운 필치로 페로제도의 빛과 어두움, 안개 낀 풍경을 깊이 있게 묘사했다. 하이네센의 작품에는 유화의 농후함과 수채화의 낭만이 동시에 존재한다.


    2002년 페로제도의 화폐 페로크로나는 북유럽 전통의 복잡한 무늬를 배제하고, 페로제도의 안개 낀 분위기를 잘 드러낸 하이네센의 작품을 채택했다. 동양적인 발묵 기법이 자아내는 극적인 긴장감은 지폐라는 작은 캔버스에 북대서양 열도의 광활하고 적막한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50페로크로나의 뒷면은 페로제도 남쪽에 위치한 수에우로위(Suðuroy)섬의 숨바(Sumba) 지역을 묘사한 것으로, 육지와 바다가 교차하며 드러나는 험준한 느낌을 잘 살렸다.


    100페로크로나에는 안개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보르도이(Bordoy)섬의 클락스비크(Klaksvik) 광경이 실려 있다.


    200페로크로나에는 보가르 섬 부근의 틴호몰이 묘사되어 있다. 성 브렌던은 당시 안개가 가득 낀 바다에서 틴호몰의 더할 나위 없이 높은 그림자를 보고 그것을 거인이라 생각해 질겁하기도 했다.


    500페로크로나는 흐반나순(Hvannasund) 항구가 배경이다. 윤기 있고 우아한 검은색 잉크로 촌락의 모습을 무릉도원의 목가적인 분위기로 그려냈다.


    액면가가 가장 높은 1,000페로크로나에는 산도이(Sandoy)섬의 평화로운 풍경이 담겨 있다.


    하이네센은 지폐라는 한정된 공간에 인물을 배제하고 망망대해와 하늘, 육지만을 그렸다. 우리는 종교에 상관없이 깊고 고요한 자연에 들어가면 어느 순간 내면에 잠자고 있던 순수한 영혼을 일깨운다. 그리고 ‘영원’에 대해 무한한 존경과 흠모를 품는다.


    나는 천 년 전의 성 브렌던 또한 대해를 표류하면서 분명 자연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깊이 깨달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폐가 한낱 종잇조각으로 변할 때 | 독일

    “달걀 하나를 살 돈으로 몇 년 전에는 승용차를 살 수 있었다. 훗날 가격은 더 비상식적으로 상승했다. 듣자 하니 독일에서는 달걀 하나의 가격이 40억 마르크까지 치솟았다. 이는 과거 베를린의 모든 부동산 가격을 합한 액수와 거의 같다.”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1881-1942)는 『어제의 세계』라는 자서전에서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과 오스트리아 양국의 고달픈 생활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특히 고정임금을 받는 계층의 피해가 심각했고, 지갑 속에 든 지폐는 하루아침에 벽지만도 못한 종잇조각으로 변해버렸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통화팽창지수에 따른 임금 조정 방식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야 비로소 발명된 것이다.


    악성 통화 팽창은 1923년에서 1924년 사이에 절정을 이루었다. 1919년 1마르크였던 물건을 1923년에는 7,260억 마르크를 지불해야 비로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또한 1922년 발행된 지폐의 최고 액면가는 5만 마르크였으나 1923년 초에는 100조 마르크에 달했다. 당시 800억 마르크는 1달러와 상등했다. 그나마 연말이 되자 420억 마르크를 1달러와 교환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1913년부터 1918년까지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던 시기에 독일의 통화발행량은 8.5배 증가했다. 당시 독일 마르크는 미국 달러에 비해 50퍼센트 정도 가치가 떨어질 뿐이었다. 그러나 1921년부터 독일 중앙은행은 마치 불붙은 화산처럼 통화를 방출하기 시작했다. 1921년 통화발행량은 1918년에 비해 다섯 배 증가했고, 1922년에는 1921년에 비해 열 배나 증가했다. 1923년에는 1922년보다 무려 7,235만 배 증가했다. 1923년 8월부터 물가는 천문학적으로 치솟았고, 토스트 한 조각 혹은 우표 한 장의 가격이 1,000억 마르크에 달했다. 독일 노동자들은 임금을 매일 두 번에 나누어 수령하고 이를 반드시 50분 안에 다 써버려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 쓸모없는 폐지로 변했기 때문이다.


    악성 통화 팽창이 이렇듯 심각한 타격과 고통을 야기하자 독일의 각 지역에서는 자발적으로 상의를 거쳐 현지에서만 유통되는 금융 태환권을 발행하게 되었다. 이를 ‘긴급 통화(Notgeld)’라고 하는데 지역마다 재질, 구도, 액면가가 각각 달랐다. 정부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붕괴된 상황에서 긴급 통화는 유일하게 믿을 만한 것이었다.


    다양한 액면가, 저속한 색채와 난잡한 스타일에 인쇄 상태마저 불량한 긴급 통화를 살펴보면 당시의 생활이 얼마나 곤궁했는지 알 수 있다. 긴급 통화 중에는 지역의 해학적인 문구나 우스갯소리를 담은 것도 있었는데, 이는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국민들의 고충을 잠시나마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속세의 흥망성쇠를 모두 지켜본 앙코르의 미소 | 캄보디아

    나는 기둥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에 의지해 앙코르와트 사원의 긴 복도를 걸었다. 그곳에서 본 부조를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벽에는 위엄 있는 천신 비슈누와 흉포한 악마 아수라가 불로불사의 감로수를 쟁탈하기 위해 각자의 군대를 거느리고 유해(乳海)를 휘저었다는 신화가 정교하고 세밀하게 새겨져 있었으며, 대담하고 전위적인 구도로 표현되어 있었다. 마치 신화시대에 벌어진 이계(異界)의 전쟁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진 것 같았다.


    그러나 진정으로 내 마음속에 깊이 각인된 것은 길고 긴 세월 동안 여행자들에게 ‘앙코르의 미소’라 불리는 유적이었다. 미소의 주인공은 자야바르만7세(1125-1218)로, 크메르 제국의 가장 명성 높은 통치자였다. 그는 다란인드라바르만2세의 장자였지만 왕자의 난에서 동생 야소바르만2세에게 패배했다. 그러나 무능했던 새로운 왕은 나랏일에 무지했고, 대규모의 민란과 쿠데타가 연이어 발생했다. 결국 야소바르만2세는 집권 6년 만에 권세를 잡은 신하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1777년 참파국(현재의 베트남)의 군왕 자야 인드라바르만4세는 난을 틈타 크메르 제국을 침략해 당시 국왕이었던 트리부바나디티야바르만을 죽이고 수도와 왕궁을 약탈했다. 이때 이미 50세가 넘었던 자야바르만7세는 사람을 모아 참파국 군대에 대항했다. 4년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전쟁 끝에 자야바르만7세는 참파국 군대를 국경 밖으로 몰아냈고, 이때부터 왕좌에 올라 이후 30여 년간 지속된 문치무공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캄보디아는 1887년부터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시대(1887-1954)에 발행된 피아스터(Piastre) 지폐는 ‘앙코르의 미소’를 새로운 주제로 삼았다. 1954년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난 뒤에는 화폐 단위를 리엘(Riel)로 변경했다. 그러나 새로운 정부도 여전히 ‘앙코르의 미소’를 지폐의 도안으로 애용했다.


    1973년 발행된 1,000리엘은 조금 다르다. 지폐의 뒷면은 여전히 ‘앙코르의 미소’가 주제지만, 이는 모두에게 익숙한 바이욘이 아닌, 타솜(Ta Som)이라 불리는 다란인드라바르만2세의 묘다. 프랑스의 탐험가 앙리 무오(Henri Mouhot)가 앙코르 유적지에 들어갔을 때도 수많은 두상이 이처럼 넝쿨에 뒤엉킨 상태였을 가능성이 높다.


    1,000리엘이 과거 지폐와 크게 다른 점은 앞면의 도안이다. 앞면에는 또 다른 미소가 등장한다. 바로 희망이 가득하고 낙관적인 기개가 돋보이는 여학생의 미소다. 여학생은 자신감과 긍지가 충만한 얼굴로 침착하면서도 긍정적인 광채를 발하고 있다. 캄보디아 국민들은 빛나는 미래가 머지않았음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20세기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고 잔인무도한 시기가 곧 도래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70년 3월 18일 친미(親美) 성향의 론 놀(Lon Nol) 장군은 쿠데타를 일으켜 캄보디아 군주제를 폐지시켰다. 친공(親共) 정책을 펴던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는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캄보디아 공산당(크메르 루즈)은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하는’ 전략을 실행해 나가며 점차 세력을 확장했고, 1975년 4월 마침내 수도 프놈펜을 장악했다. 악성 통화 팽창과 내전을 앞에 두고 론 놀은 결국 무능한 공화국 정부의 포기를 선언하고 황급히 도망쳤다. 그리하여 크메르 루주가 캄보디아를 인수해 관할하게 되었고 3년 8개월에 이르는 근대 역사상 가장 냉혈하고 잔혹한 극좌 통치가 시작되었다.


    크메르 루주는 과거 발행된 화폐의 실효를 선포했다. 정교하게 인쇄된 지폐를 한 광주리씩 도시의 광장에 모아놓고 불태워버렸고, 국민들은 하루아침에 중산층에서 빈민으로 전락했다. 이어진 계급투쟁과 종족 숙청이라는 전대미문의 참상은 점차 캄보디아를 돌이킬 수 없는 지옥의 심연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캄보디아 국민들은 순진하고 선량한 미소를 잃었다. 론 놀 집권 이전의 캄보디아는 동남아에서 발전 잠재력이 가장 큰 나라로 인정받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직전까지 경제력을 지니고 있었던 캄보디아와 베트남 화교들은 크메르 루주 통치 기간에 자본을 대량으로 철수했다. 그 결과 캄보디아 대신 싱가포르가 번영하게 되었다.



    부조리와 허무가 어우러진 태양의 도시 | 알제리

    알제리 수도 알제의 오후는 매우 한산하다. 뽐내듯 작렬하는 햇빛, 그 속에는 반 고흐의 프로방스 같은 색조가 담겨 있다. 그러나 밝은 파란색과 대비되는 빛바랜 흰색에는 카뮈가 묘사한 ‘무력한 도시’라는 문학적 이미지가 융화되어 있다.


    알제리는 모로코, 튀니지와 함께 지중해 남부에 위치한 아랍 국가지만 문화적 성격에는 큰 차이가 있다. 색채가 선명한 모로코, 꾸밈없이 소박한 튀니지와 달리 알제리의 수도 알제는 곳곳에 쇠락과 실패의 풍경이 그대로 드러난다. 마치 카뮈가 이곳을 떠난 다음부터 도시가 추억과 슬픔에 잠겨 있는 듯하다. 물론 이는 여행자의 쓸데없는 걱정과 감상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실제로 알제의 길거리에서는 무료하게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청년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이곳의 생활은 상당히 한정돼 있고, 폐쇄적이고 질식할 것 같은 정치적 분위기와 근엄하고 보수적인 종교 법률은 청년들의 자유분방함을 제한한다. 도시 곳곳에서 그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아무 목적 없이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닌다.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있지만, 미소 뒤에는 숨길 수 없는 막연함이 드러난다.


    알제리는 1830년부터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1962년 식민 통치에서 벗어난 후 알제리 중앙은행이 처음 발행한 화폐 알제리디나르는 예술적인 면에서 여전히 프랑스의 색채를 농후하게 띠고 있다. 피사로 스타일의 광택과 들라크루아 스타일의 화려한 색채가 바로 그러하다.


    100알제리디나르의 주제는 수도 알제다. 앞면은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고 번화한 알제의 항구로, 단조로운 색조를 통해 노스탤지어의 동경을 드러낸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림 중앙의 화물선과 증기선을 좋아한다. 작은 배의 연통에서 뿜어져 나오는 증기는 낭만적인 분위기를 어렴풋이 자아낸다.


    지폐의 뒷면은 독립기념비(Sanctuary of Martyr) 부근에서 알제 시가지를 조감한 풍경이다. 지중해의 눈부신 흰색, 아랍 특유의 수줍은 흰색, 세월이 느껴지는 흰색, 카와쿠보 레이 스타일의 무언의 흰색 등 다양한 종류의 흰색이 바로 도시의 주제라 할 수 있다.



    격변하는 시대에 생각한 사랑의 이원론 | 이탈리아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칼비노는 몽골 황제 쿠빌라이 칸과 베네치아 청년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 사이에 발생한 적 없는 허구의 대화를 소개한다. 문학가들은 마르코 폴로의 허구적인 이야기를 아랑곳하지 않고, 역사학자들은 마르코 폴로가 동양에서 보고 들은 것이 진짜인지, 심지어 그의 존재 여부조차 심각하게 의심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탈리아 사람들은 마르코 폴로의 업적을 인정한다. 1982년 6월 1일 발행된 1,000리라는 비잔틴, 이슬람, 고딕 스타일의 건축물인 ‘베네치아 총독궁’을 배경으로 로마의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Galleria Doria Pamphilj)이 소장한 마르코 폴로의 초상화를 주제로 삼았다. 심플한 지폐 도안에는 전 세계인들에게 익숙한 베네치아의 이미지가 담겨 있다. 망망대해와 사막을 표류했던 여행자 마르코 폴로는 훗날 지폐의 주인공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지폐의 주인공이 된 사실을 의외로 생각할 사람이 또 있다. 마르코 폴로와 마찬가지로 베네치아 출신인 르네상스 회화의 대가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90-1576)다. 1975년 발행된 20,000리라 지폐에는 티치아노와 그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지폐의 주제 선택만으로도 상당히 깊은 의미를 지녔다.

    현재 보르게세 미술관(Galleria Borghese)이 소장한 <천상과 세속의 사랑>(1515)은 티치아노가 서거하고 100여 년 후 후대 사람들이 제목을 붙인 것이다. 화가는 르네상스 시대의 기이한 책 『폴리필로의 꿈(Hypnerotomachia Poliphili)』에서 창작 영감을 받았다. 마치 애정 소설처럼 보이는 이 책은 내용이 매우 난해해 이해하기 힘들고, 비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한 문체로 가장 지루한 주제를 논한다. 신성하고 경건한 종교적 사랑과 감각기관의 향락을 위한 세속적인 탐닉, 과연 둘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티치아노는 『폴리필로의 꿈』을 읽은 후 종교적 사랑과 세속적 사랑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 양자 간에는 도덕적 대비가 명확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천상과 세속의 사랑>을 감상하며 작품 속의 누가 세속 혹은 신성을 대표하는지 분분한 의견을 펼친다. 분명 티치아노는 이처럼 정신적 소모가 심한 추상적 문제를 그림을 감상하는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티치아노가 생각한 ‘사랑의 이원론’이 합리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동양으로 향하는 새로운 항해를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동쪽에서 투르크인이 궐기하자 베네치아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기 싫어하고 창조력이 뛰어났던 베네치아 사람들은 세계의 변화를 이해하고 재빨리 나라의 스타일과 포지션을 바꿨다. 즉 베네치아공화국은 해상국가에서 문화대국으로 신속하게 전향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종합 예술적 엔터테인먼트 노선을 걷는 지중해의 라스베이거스가 된 것이다.


    거의 히스테릭에 가까운 신속한 전향 때문에 술, 섹스, 도박 등 감각 기관에 최대의 향락을 가져다주는 행위와 부패하고 음탕한 생활이 즉시 베네치아의 크고 작은 골목을 점령하게 되었다. ‘해상의 예루살렘’이라는 자부심이 있던 베네치아는 모든 악의 근원인 ‘소돔’ 같은 곳으로 타락했다. 베네치아의 변화를 보면서 티치아노는 <천상과 세속의 사랑>을 그렸고, 이를 통해 도덕적 이상과 세속적 욕망 사이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천상과 세속의 사랑>이 던지는 메시지는 비단 베네치아인의 고민만이 아니라 현대 문명의 숙제이기도 하다. 이상과 현실, 보수와 개방, 천상과 인간세계……. 이원적으로 대립하는 모든 개념이 융화되고 균형을 이룰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어쩌면 리라 지폐 속의 티치아노는 서정적인 필치를 통해 ‘군자는 혼자 있을 때도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삼간다.’는 명확한 도리를 일깨우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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