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결정짓는 내 안의 감정 패턴
 
지은이 : 황시투안 (지은이), 정은지 (옮긴이)
출판사 : 미디어숲
출판일 : 2023년 07월




  • 삶에 끊임없이 반복되는 그 사람의 고유한 행동이나 생각, 정서적 반응... 거기에는 감정 패턴, 사고 패턴, 관계 패턴 등이 있습니다. 문제에 반복적으로 반응하는 자신의 패턴을 들여다보고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인생을 결정짓는 내 안의 감정 패턴


    내 안의 감정 패턴 인식하기: 왜 나는 늘 짜증나는 일만 생길까?

    더 나은 삶을 위한 ‘LOVER’ 원칙

    ‘내려놓은’에 대한 오해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한다. 몇 년 전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뽑는데, 배움에 대한 열정이 무척 높은 사람이 지원을 했다. 책을 두루 읽어 심리학부터 불경까지 모르는 것이 없었다. 처음에 우리는 모두 그를 매우 좋게 봤으나 1년이 지나도록 그는 여전히 아무런 실적이 없었다. 결국 그의 직속 상사가 해고를 고려하게 되었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그 신입사원을 찾아가 얘기를 나눠보았다. 그런데 그의 말을 듣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대표님이나 저나 모두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실적에 집착할 이유는 하나도 없지요. 얼마나 버느냐에 대해서는 일찌감치 마음을 내려놨습니다.” 나는 젊은 그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발언은 그야말로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일종의 모독이었다.


    공부하는 걸 좋아하는 나는 교육계에서 20년간 몸담으며 세계 각지를 돌아다녔다. 세계 곳곳을 다니다 보면 경험하며 체득할 것들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도에는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내가 아는 여러 친구가 인도에서 돌아오면 사업을 접고, 젊은 나이에 ‘세속’을 떠나 이전에 벌어 놓은 돈만 까먹으며 생활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사지 멀쩡한데도 가족에게 의존하며 마치 어딘가 병든 사람처럼 살면서 이를 ‘내려놓음’이라고 명명한다. 나는 아무래도 인도에는 ‘속세 음식과의 단절’을 가르치는 과정이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러던 내가 쉰 살이 되던 해 용기를 내 인도를 방문할 일이 생겼다. 그곳을 다녀와 느낀 것은 몇몇 사람들은 수행을 빌미 삼아 도피할 명분으로 인도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과거와 현재의 자신을 기쁘게 받아들여라

    주위를 돌아보면 현실에 안주하며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거의 모든 힘을 쏟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게 된다. 물론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과 만족하며 기뻐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이 두 가지 모두 수행자가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태도이다. 그저 몇몇 사람들이 이를 현실에 안주하는 이유로 핑계를 대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진정으로 ‘자신을 받아들이고 만족하며 기뻐할 수’ 있을까?


    우선 ‘받아들임’은 ‘수용’하는 것과 다르고, ‘만족’은 현실에 ‘안주’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시간 프레임이 있는 것으로, 과거와 현재의 자신을 관용하고 기쁘게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미래에 대해 개방적인 자세를 갖고, 앞으로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고 노력하는 것이다. 받아들이는 대상은 사람이며, 과거의 내가 어떻든 상관없이 아무것도 되지 않더라도 나를 받아들이며 좋아하고, 스스로 더 나아지기 위해 쏟은 노력을 높게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대상이 ‘일’이라면 결과가 좋지 못했던 행동에 대해서 끊임없이 수정하고 개선하며 발전시킨다.


    또한 만족할 줄 아는 것은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에 감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자원을 누리고, 그 가치를 드러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만족할 줄 아는 것은 현실에 안주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과거에 스스로를 가두고 그 자리에 멈추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말한다. 반면 현실에 안주하는 태도는 현재의 것에만 만족하고 진취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며 지금 있는 곳에 멈춰서는 수동적인 삶의 자세이다.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나의 기초이고, 내 삶의 터전이기 때문에 그것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감사해야 한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금 주어진 모든 것을 소중히 여겨야 비로소 자신의 영역을 넓히고 인생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


    작은 공격에도 휘청이는 가짜 자신감

    자신만만해 보이던 사람이 작은 공격에도 휘청이는 이유

    자신감이란, 특정한 상황에 성공적으로 대처하는 능력을 말한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기 긍정과 믿음이며, 자신의 역량에 대한 확신이고, 반드시 뭔가를 성취하고 추구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자신감은 보통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능력과 관련이 있다. 가령 내가 연설에 재능이 있으면 연설엔 자신이 있고, 노래에 소질이 없으면 그것에는 자신이 없게 된다. 그러나 노래를 잘 못 부른다고 해서 나 자신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어떤 면에서는 약점이 있고 부족한 점이 있어도 나 자신을 의심하지 않고 여전히 ‘나’라는 인간에 대한 자신감을 느끼는 것, 이런 믿음을 ‘자존감’이라고 부른다.


    자존감은 한 개인이 스스로를 평가할 때 형성되는 자기 효능감, 자기애, 그리고 자아 존중감을 말한다. 자존감은 일종의 자기 가치감이고, 자신에 대한 종합적 가치에 대한 주관적인 판단이다. 만약 어떤 구체적인 일을 특별히 가리키지 않는다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자신감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자기 가치감, 혹은 ‘자존심’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자존심은 타인이 나를 존중하고 받들기를 바라는 감정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잘난 체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이 잘난 줄 안다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늘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어떨 땐 좀 으스대거나 다른 사람들을 시큰둥하게 대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의 말을 언뜻 들으면 되게 멋있어 보이고 능수능란하다. 게다가 모르는 것도 없고, 무엇이든 성공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한계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알고 지내다 보면 그는 이상과는 거리가 멀고, 말도 지나쳐 믿을 수가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그의 삶이 자기를 과시하는 것임을 알게 되고, 그에 대한 신뢰도도 크게 떨어지게 된다.


    잘난 체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와 부가 집단 내에서 하는 역할이나 활용 가능 가치 등을 지나치게 중요하게 여기고, 집단에서 자신의 가치를 과장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와 비슷한 상태로 자부심과 자만이 있는데 ‘자부심’은 자기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자만’은 자신이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뽐내는 태도를 가리킨다.


    위의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한 사람이 자존감을 느끼는 것은 일이나 능력과 무관하다. 그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스스로를 믿는 신뢰와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능력이다. 그러나 과시, 자부심, 자만은 모두 하는 일이나 능력과 관계가 있으므로 능력이나 하는 일에 근거하여 자신을 판단한다. 의지해 오던 능력이나 일이 사라져 버리면 한 사람의 가치관이 전부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자존감은 외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실패나 좌절을 겪어도 일시적이라 생각하고 뛰어넘을 능력이 있다. 실패와 좌절은 결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신에 대한 믿음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내 안의 사고 패턴 전환하기: 왜 내게는 행복한 일상이 없는 걸까?

    인생을 망치는 습관적인 패턴

    문제에 대응하는 습관적인 패턴

    다른 사람의 생각과 자기 생각이 다를 때 어떤 사람은 포기하거나 도망가고, 어떤 사람은 상대방을 경멸하기 위해 이른바 ‘악플’을 단다. 심리학에는 ‘투쟁 - 도피 반응’이란 것이 있다. 이는 우리가 배치되는 의견을 만났을 때 흔히 보이는 두 가지 대응 패턴으로 싸우거나 혹은 회피하는 반응이다. 이외에도 어떤 사람들은 어려움을 외면하고 존재 자체를 무시하거나 합리화하기도 한다. 공격하고 도망치거나 무시하는 것은 사람들이 문제를 대하는 습관적인 대응 패턴이다.


    공격형 vs 도피형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공격과 도피 그리고 무시는 인간의 생존 본능이다.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면 때리고, 이길 수 없으면 도망치고, 이길 수도 도망칠 수도 없으면 아예 그 존재를 무시해버린다. 사실 이 세 가지 본능은 모두 최선의 접근이 아니라 동물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 본능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 인류는 지혜로운 존재다. 우리가 이런 원시적 대응 본능에 머물러 있다면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려움 혹은 위기 앞에서 어떻게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지 자신에게 먼저 물어보자. 도망치거나 수수방관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길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이 되어보자. 스스로 길을 만드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과 관계없이 책임을 지는 사람을 뜻한다. 난처한 상황을 겪었을 때 책임을 지려는 자세를 갖춘 사람은 머지않아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패턴이든 일단 한 번 자리를 잡으면 그 사람은 어디서나 같은 패턴으로 문제 상황에 대응한다.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문제 있는 가정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은 서로를 공격하다 이혼하고 도망치거나, 문제를 등한시하며 냉랭하게 살아갈 것이다. 반대로 행복한 가정은 어떤 문제든 먼저 책임을 지려 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길을 만드는 사람’이 반드시 있다. 물론 가족 모두가 길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 일심동체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가정은 두말할 것 없이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다.


    에덴의 동산에도 우리의 적은 있다

    나의 에덴동산은 어디인가?

    혹시 여러분은 현재의 가정, 회사, 국가 심지어 속세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고 있진 않은가? 막상 그렇게 실행할 용기도 없으면서 말이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처한 환경을 탓하며 자신만의 에덴동산이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꿈을 꾼다. 하지만 랴오천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이런 생각이 터무니없는 것이었다고 느낄 것이다.


    그녀는 내 수업을 들은 첫 번째 비구니였다. 단아하고 수려한 외모에 승려 옷을 차려입은 모습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출가한 사람이 왜 심리학 강의를 들을까, 나도 호기심이 일었다. 나는 부처의 가르침이 넓고 심오하기에 출가한 사람들은 일찍이 속세를 간파하고 집착을 버렸으리라 생각해 왔다. 그래서 그녀가 왜 심리상담을 받으려고 하는지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녀에게 먼저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친구가 별로 없으며 절에 있는 몇몇 스님과는 어울리기 힘들어 어떻게 지내야 할지 막막하다고 했다. 그녀는 여러 군데 절을 옮겨 다녀봤지만, 상황은 모두 똑같았고 마음이 무척 괴롭다고 했다. 우연한 기회에 그녀는 내 책을 읽게 되었고 많은 깨달음을 얻어서 나에게 상담을 받기로 했다는 것이다.


    나는 출가한 사람이 이런 고민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어떻게 도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일단 그녀를 출가한 사람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호기심을 품은 채 진행해 나갔다.


    나는 이어서 그녀에게 현재의 상황과 비슷한 경험을 이전에도 겪은 적이 있는지 물어봤다. 그녀는 한참 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어릴 적 부모에게 잦은 학대를 당했다. 작은 잘못에도 매를 맞았던 그녀는 하루빨리 집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여덟 살이 되던 해에 외갓집에 보내져 외할머니 가족과 함께 살게 되면서 두려워하던 집을 떠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하지만 그 즐거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부모가 외숙모에게 생활비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외숙모는 늘 그녀에게 욕을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의지할 곳 없이 떠돌아다니는 부평초처럼 느껴졌다.


    모든 행동의 이면에는 긍정적인 동기가 있다

    여기까지 듣고 난 뒤 난 ‘도피’가 그녀 인생의 패턴이 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녀가 이 점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심리 역할극을 실행했다. 나는 그녀 역할을 맡은 학생을 붙잡고 부모 집에서 외갓집으로, 다시 외갓집에서 절로, 이 절에서 또 다른 절로 도망 다니게 했다. 어디를 가든 누군가는 꼭 손가락질하며 그녀를 나무랐다. 이 막간의 인생 재연을 보면서 그녀는 흐느껴 울며 이렇게 토로했다.


    “세상에서 제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누군가에게 길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알려주지 않으면 상대방이 저를 무시하거나 미워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금방 마음이 무너졌어요.” 그 순간 나는 강의실 공기 전체에 그녀의 억울함과 무력함이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들어 나의 눈을 보게 한 뒤에 한마디 한마디 힘을 주어 그녀에게 말했다. “남들이 당신을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제가 묻고 싶은 건 이겁니다. 당신은 자기 자신을 좋아하나요?” 그녀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눈물을 마구 쏟으며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당신마저 자신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이 당신을 좋아하길 기대할 수 있을까요? 자신마저 자기를 무시한다면 누가 당신을 무시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라고 반문했다.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자는 자신뿐이다

    랴오천의 이야기를 보면 그녀는 어린 시절 부모가 때려서 외가로 도망갔고, 외할머니 집에서 외숙모가 욕을 하면 다시 도망가고 싶어 했다. 성인이 된 뒤에 더 이상 집에 있을 수 없어 출가를 택했지만, 절 안에서도 스님이 그녀를 나무라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느껴지면, 이 절에서 또 다른 절로 도망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점점 ‘도피’라는 행위는 그녀가 외부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하나의 고정된 패턴으로 자리 잡았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문제가 생기거나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를 때면 그녀의 잠재의식은 즉시 도망치게 만들었다. 자신을 피해자로 보고 누군가의 구원의 손길을 바랐던 게 그녀가 도피한 이유였다.


    그러나 그녀 말고 누가 그녀를 구할 수 있을까. 구원자는 단 하나, 자기 자신밖에 없다. 나는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당신은 이제 ‘도피’가 자신의 패턴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리고 이 패턴 때문에 당신은 너무 고생했어요. 제 생각엔 동료 중에도 당신처럼 도피하고자 출가한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 같아요. 그들도 당신처럼 고생하며 하루하루 힘겹게 버티고 있을 텐데 그들을 도와주고 싶지 않나요? 그리고 당신을 비판했던 스님들도 오랜 시간 마음고생을 하다가 비판했을지도 몰라요. 부처의 가르침은 중생을 제도하라는 것인데, 당신은 왜 불법을 열심히 배워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울 생각은 하지 않나요?”


    그녀는 갑자기 기운을 차렸다. “선생님의 심리 치료와 공부가 저 같은 사람에게 많은 도움이 된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런데 제가 아직 능력이 부족하니 저에게 몇 가지 다른 수업도 좀 더 보내 주실 수 있을까요? 저도 다 배우고 나면 선생님처럼 다른 사람을 도와줘야겠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순간 그녀의 에너지를 느꼈다. 그리고 그녀가 이미 ‘피해자’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더 할 말이 있을까? 이제는 실제 행동으로 그녀의 성장을 응원할 일만 남았다.


    종종 우리도 랴오천처럼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직장, 감정, 가족, 심지어 이 나라에서 도피하고 싶을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가 어디로 도망가든 반드시 누군가는 우리를 싫어하고, 누군가와 의견이 엇갈리고, 누군가의 비판이나 비난을 듣게 된다. 환경은 항상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 앞에서 우리는 당연히 도피를 선택하게 된다.


    랴오천은 속세를 떠나 절로 도망쳤지만, 거기서도 또 다른 절로 도망가길 원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로 도망가야 우리가 생각하는 에덴동산에 도착할 수 있을까? 정말 어디에나 내 마음대로 되는 에덴동산이 있기는 한 걸까? 내 생각엔 스스로를 ‘피해자’로 본다면 어디로 도망가든지 결과는 똑같다. 모든 곳은 지옥과 같을 것이다.


    피해자를 자처해 도피하지 말고 길을 개척하는 자가 되어보면 어떨까? 오직 자신만이 스스로를 구할 수 있다! 자신의 길을 만드는 자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누구나 성장해서 에너지를 쌓으면 스스로의 노력으로 인생 곳곳에 에덴동산을 조성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굳게 믿는다.



    내 안의 관계 패턴 관찰하기: 왜 나는 인복이 없는 걸까?

    ‘난 안 돼’라는 제한적 신념을 깨트리다

    규칙을 지키며 사는 것이 가장 좋은 삶인가?

    부모는 자신의 아이가 말을 잘 듣기를 바란다. 다만 아이들이 부모 말을 잘 듣게 될 때 진귀한 것들이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점을 간과했을 뿐이다. 이런 일들이 가정교육에서 일어나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프다. 만일 모든 아이가 규칙을 지키며 행동하고 말을 잘 듣고, 기존의 전통과 이념에 따라 세상을 살아간다면, 세상은 어떻게 변하고 또 발전할 수 있겠는가?


    아인슈타인은 ‘개인의 독창성이 없는 사회는 발전이 없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개인에게 독창성이 있는지 없는지는 사회의 미래나 발전과 관련이 있다. 우리 인류 사회는 창의적 사고를 실천하고 발휘한 역사로 이루어졌다. 혁신이 없으면 사회는 정체되고, 역사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개인 또한 독창적이고 독립적인 사고가 없으면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자멸하고 만다. 남이 가는 길을 따라가고 남이 하는 말을 따라 하고 남이 생각하는 문제를 생각한다면, 독립된 개체로서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겠는가? 자신의 생각, 아이디어, 길도 없이 우리는 결국 사람들 속에 파묻힐 수밖에 없다.


    입시 교육이 주도하는 요즘 대다수 학부모와 교육자들은 지식을 주입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아이들이 출발선에서 뒤처지지 않도록 온갖 극성을 부리고 각종 규칙을 설정하며 어릴 적부터 아이들을 협소한 범위 안에서 규정한다. 그리고 그 영역에서 필사적으로 성장하도록 재촉한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농가에서 부추를 재배하는 것과 같다. 더 많은 부추를 얻기 위해서 그들은 부추에 빛을 차단하고 완전히 어둡게 한다. 하지만 이러면 부추는 병이 들 수밖에 없다. 광합성 작용을 하지 못해 엽록소를 합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부모도 자녀가 아프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말을 듣지 않는’ 아이로 키울 용기

    건강한 아이는 생기가 넘친다. 생기 넘치는 아이가 되는 중요한 요소는 끊임없이 시도하고 끊임없이 혁신하는 것이다. ‘혁신’이란 기존의 생각에 구속받지 않고 문제에 관한 새롭고 독특한 해답과 방법을 추구하는 사고방식이다. 쉽게 말하면 남이 하지 않은 말을 하고 남이 하지 않은 일을 하며 남이 생각하지 않은 것을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사람은 창조적인 사고를 하지만 개발되는 정도가 달라서 일부 사람들의 창조적인 생각은 사라지기도 하고, 누군가는 잘 개발되기도 한다. 샤오미의 창업자인 레이쥔雷軍은 인터뷰에서 “어릴 때 라디오・TV를 분해하는 걸 좋아했는데 아버지가 격려하고 지원해주셨습니다. 이런 취미는 부모님의 지원 없이는 할 수 없었는데 그 시절엔 특히 그것들이 비쌌기 때문이죠. 하지만 아버지는 그 물건들을 사주는 데 돈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어릴 적부터 몸에 밴 무선 가전제품에 대한 흥미로 인해 40대에 재창업할 때 스마트폰 분야를 선택했습니다. 어렸을 때 싹튼 취미를 중년이 돼서야 실천할 기회가 생긴 것도 인생의 즐거움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레이쥔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부모의 격려와 지원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만한 행운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다.


    스스로에게 한계를 짓는 신념(‘난 못해’, ‘어차피 해 봤자 안 될 거야’ 등)을 심리학에서는 ‘제한적 신념’이라고 부른다. 이런 제한적 신념은 보통 가정교육이나 학교 교육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이는 아이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서 혹은 부모나 교육자 자신이 인지하는 한계로 인해, 또는 아이가 어떤 영역에 집중하기를 부모가 원하기 때문에 형성된다. 아이가 알 수 없는 것들을 향한 궁금증으로 탐색하려 할 때 부모는 항상 ‘안 된다, 불가능하다’며 제한한다. 부모를 향한 타고난 사랑과 충성심 때문에 이런 제한은 어느새 아이의 뇌 속에 일종의 구속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런 구속은 바이러스적 신념이 되고, 이를 심리학에서는 ‘무기력’이라고 한다.


    말을 잘 듣는 아이는 사실은 수많은 가능성을 박탈당한 아이다. 부모가 원하는 대로만 할 뿐 부모가 허락하지 않는, 혹은 부모가 가진 인지의 한계로 인해 어떤 영역의 경우는 어느새 닫혀 버렸을 수 있다. 그런 아이들이 크면 프랭클린이 꿈을 잃은 사람들을 향해 한 말처럼 ‘스물다섯 살 때 죽었으나 75세에 장례식을 한’ 꼴이 된다. 죽은 것은 그들의 육체가 아니라 마음의 희망, 그리고 인생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우리는 서서히 미워하는 상대를 닮아간다

    응어리진 마음을 내려놓아야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

    서양 의학은 질병에 대항하는 방법을 써서 질병을 치료한다. 예를 들어 감기에 걸렸을 때 항생제를 투여해 세균을 죽인다. 하지만 박테리아는 내성이 생겨 점점 더 강해진다. 따라서 항생제도 점점 독한 것을 쓸 수밖에 없고 세균과 약물이 함께 업그레이드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우리의 생각도 이와 같다. 누군가가 미울 때 본능적으로 맞서려고 한다. 그 사람이 한 것처럼 그 사람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와 같은 사람이 된다. 배우자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 그를 미워하고 그에게 대항하기 위해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되고,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미워했던 그런 사람이 되어 버린다.


    인생에서 가장 슬픈 일은 바로 한 사람을 미워하다가 결국에는 자신이 미워했던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한 사람을 미워하는 데 신경을 쓸 바에는 중의학의 가르침처럼 근본을 튼튼히 하여 자신을 더욱 건강하고 강력하게 변화시켜 보자. 그러면 일찍이 자신을 해친 적이 있는 세균들이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억울한 일을 당하면 복수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는 결코 복수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증오하는 마음으로 복수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면 한도 풀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이는 좋은 복수가 아니다. 나는 단지 더 나은 방식을 선택하길 바랄 뿐이다.


    인생은 누구도 아닌 자신의 것이다. 원한을 내려놓아야 자신을 구할 수 있다. 원한을 내려놓아야 우리의 인생이 하늘처럼 넓어지고 매일 즐겁게 살 수 있다. 이보다 더 좋은 방식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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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