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지수 낮춰드립니다
 
지은이 : 조관일
출판사 : 21세기북스
출판일 : 2023년 06월




  • ‘꼰대’, ‘빤대’, ‘낀대’? 빤대는 이유 없는 반항, 삐딱한 관점, 무조건 반대하며 자기 몫도 못하면서 빤질대는 젊은이, 낀대란 꼰대와 빤대 사이 어정쩡한 중간 세대. 기성세대와 MZ세대가 함께 어우러지는 회복과 상생의 세대 갈등 회복 스킬을 소개합니다!


    꼰대지수 낮춰드립니다


    세대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 역발상 세대론

    회사 내의 세대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지금 우리 사회의 노인 혐오적 분위기가 기성세대에 대한 혐오로 변질되고 회사로 스며들어 확대되면서 요즘 직장의 분위기가 좋지 않다. 신세대는 직장 내의 기성세대를 까닭 없이 비하한다. 겉으로는 호의적이며 충성하는 것 같아도 말이다.


    상사가 업무와 관련해 조금만 말을 길게 하거나 따끔하게 지적하면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아도 속으로는 ‘꼰대!’라고 비아냥거린다. 당연한 지시도 괜한 참견이나 쓸데없는 잔소리로 받아들인다. 그러니 상사와의 관계가 원만할 수 없다. 젊은 사원의 생각은 알게 모르게 언행으로 나타나고 말투와 표정으로도 상사나 선배에게 전달되니까.


    생각해보라. 사회와 달리 회사의 세대 차이란 별 게 아니다. 사회에서는 10대부터 90대까지 세대가 넓게 분포되지만 회사는 그렇지 않다. 고작 20대부터 50대 정도다. 가장 나이가 어린 신입사원과 가장 나이가 많은 경영층의 간격이 불과 30년 내외다. 과장이나 팀장과의 나이 차이는 10년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거기에는 노인충, 틀딱충, 연금충도 없으며 할매미도 없다. 상사이자 선배가 기성세대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이뿐만 아니라 세대와 세대 사이가 무 자르듯 구분이 명확한 것이 아니다. 예컨대 10년 또는 20년 간격으로 정확하게 신세대가 기성세대로 변하고, 다시 신세대가 나타나는 게 아니다. 기성세대와 신세대가 외딴섬에 따로 떨어져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대한민국에 나타난 것도 아니다. 같은 세상에서 동시대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다. 같은 나라, 같은 사회에서 같은 뉴스를 보며 같은 생활방식으로 어울려 웃고 떠들며 살아온 사람들이다. 기성세대는 계속 옛날에 머물고 신세대만 새로운 시대를 사는 게 아니다.


    더구나 지금은 온 세상이 동시 생활권이요, 동시 소통되는 시대다. 문명국이라면 전 세계의 모든 세대가 같은 경험을 한다. 즉, 기성세대도 신세대와 사회‧문화적 경험을 공유한다. 그런데 태어난 시기와 자라난 환경이 다르고 교육받은 내용이 다르다고 마치 금성에서 온 세대와 화성에서 온 세대가 직장에서 만난 것처럼 착각한다.


    실상이 이러함에도 신세대가 40~50대의 기성세대를 향해 눈을 흘기는 것은 합리적인 판단 없이 정치‧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리고 세대 차이를 주장하는 이들의 부추김에 영향받은 탓이 크다. 물론 상사나 선배 중에 정말로 멋대가리 없는 행태, 꼰대질과 갑질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훨씬 더 많은 기성세대는 신세대와 오십보백보다.


    ‘세대 갈등’이 아니라 ‘입장 갈등’

    이런 주장에 대해 젊은 사원들이 항변할 것 같다. 3년 차이만 돼도 세대 차이가 난다는 요즘에 10년이나 30년이 얼마나 큰 차이인지 아냐고. 실제로 직장 생활을 해보면 젊은 꼰대도 적지 않다고.


    그러나 혼동하지 마시라. 헷갈리지 마시라. 직장 내의 세대 갈등은 세대 간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보다는 입장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 더 크다. 세대 갈등이라기보다 입장 갈등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각자의 입장이 상사와 부하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갈등이다.


    ‘입장’은 그 의미가 비교적 넓다. 영어로 아이덴티피케이션(identification)이라고 하는데 ‘신원’의 의미를 갖는 말이다. 또는 포지션이라고도 하는데 이때는 ‘처지’라는 의미다. 한마디로 입장의 차이란 역할의 차이다. 조직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 지위, 신분 등이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차이다. 이 역할의 차이는 인식의 차이를 발생시킨다. 즉, 같은 상황에서 다른 생각이 나타난다. 그럼으로써 갈등을 초래한다.


    나이에 따른 세대 구분과 관계없이, 심지어 같은 세대라 하더라도 입장이 다르면 관점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며 논리가 달라진다. 자연히 소통에 장애를 일으키고 ‘불통’의 문제를 야기해 갈등이 생긴다. 소통의 장애로 갈등이 생겼을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이 있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봐.”


    무의식적으로 이런 말을 내뱉는 이유는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면 문제가 풀린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만난 30대 초반의 벤처기업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요즘 신입사원을 보면 답답합니다.”


    나는 웃었다. 나이로 따지면 그는 분명히 신세대인데 그의 눈에는 거의 동년배인 신입사원의 행태가 못마땅한 것이다. 왜 그런가. 바로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선배나 상사를 비난하는 신세대 사원도 당장 지위가 달라지면 그 사장과 똑같은 논리로 바뀔 것이다. “요즘 신입사원들 왜 그래?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라며 후배의 근무 태도를 답답해하고 나무랄 것이다.


    결론적으로 직장의 세대 차이, 세대 갈등이란 일반적인 세대론과 다르다. 세대 차이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보다는 입장 차이, 입장 갈등이 세대 문제보다 앞선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직장에서의 세대 문제는 세대 갈등으로 접근하기보다 ‘입장 갈등’으로 중심을 옮기는 게 옳다. 지위와 처지가 다름으로써 발생하는 갈등이 무엇인지를 헤아리고 서로 이해해야 한다.


    물론 입장 외에도 상사나 선배의 인간적인 결함, 즉 꼰대짓과 갑질로부터 비롯된 갈등도 해결하면서 말이다.



    꼰대의 일격 : 회사는 유치원이 아니다

    회사는 유치원이 아니다

    철없는 젊은 날은 죽어야 한다

    군대는 말할 것도 없고 회사 역시 유치원이 아니다. 회사의 간부는 유치원 교사가 아니다. 밖을 향해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 회사의 생존이 가능한 상황에 내부 구성원들에게 일일이 신경 쓴다면 어떻게 되는가. 에너지를 낭비하는 게 될뿐더러 그럴 여력도 없는 게 기업들의 어려운 여건이다.


    고객을 만족시키기 전에 내부 고객, 즉 내부 구성원부터 만족시켜야 한다는 이론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만족시킬 걸 만족시켜야지, 유치원생처럼 어르고 달래며 회사를 끌고 갈 수는 없다. 그렇게 어르고 달래봤자 결국 헛수고다. 그런 사람은 어차피 경쟁력이 없는 사람이요, 주면 줄수록 앙앙 거린다.


    회사로서는 계속해서 새로운 세대가 진입할 터인데 언제까지 신세대의 눈치를 보며 경영할 것인가. 새로운 세대를 이해하고 그들이 신바람 나게 활약할 수 있는 풍토를 만드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적극 권장한다. 그러나 경영환경과 조직의 생리를 도외시하고 신세대의 입맛을 맞추는 데 에너지를 쏟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잊지 마라. 회사는 유치원이 아니다. 멘털이 강한 훌륭한 젊은이도 많은데 나약한 대상, 이유 없는 반항에 물든 사람, 즉 빤대까지 보살피며 비위를 맞출 수는 없다. 젊은 세대에게는 이런 주장이 매우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회사의 입장에서 사원을 보자. 당신은 그렇지 않겠지만 주위에 유치원생 같은 동료가 없지 않음을 알 것이다. 젊은 신세대의 눈으로 봐도 빤대가 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간부라면 그런 사람까지 달래가며 리더로 일할 것인가? 당신이 회사를 끌어가는 경영자라면 어떻게 사람을 경영할 것인지 냉정히 돌아보자. 거꾸로 신세대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답이 나온다. 그렇다면 회사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젊은 구성원 역시 바뀌어야 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아프리카의 지성이라 불린 아마두 함파테 바는 “노인 한 사람이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 없어지는 것과 같다”라는 유명한 말로 노인의 가치를 높이 샀고 자전적 성장소설 《들판의 아이》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때 나는 일곱 살이었다. 어느 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아버지가 나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오늘 밤으로 마냥 철없던 꼬마였던 너는 죽었다. 지금까지 너는 어렸기 때문에 뭐든 네 멋대로 할 수 있었지. 하지만 오늘 밤부터는 너도 어엿한 어린이가 돼야 한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철없는 꼬마였던 너는 죽었다”라고 하던 아버지의 말씀이 계속 머릿속에 뱅뱅 맴돌았기 때문이다.


    맞다. 이제 철없는 젊은 날은 죽어야 한다. 신세대를 부추기는 주장에 부화뇌동해 마치 기성세대는 쓸모없고 생각도 없는 존재로 깔보는 자세를 바꿔야 한다. 명과 암을 잘 가리며 기성세대의 가치를 인정하고 경험을 제대로 배우는 ‘어엿한’ 어른이 돼야 한다. 유치원생처럼 나약하게 보호받으려는 생각은 떨쳐버리고 멘털을 강하게 키워야 한다.


    철없는 젊은 날을 어떻게 죽일 것인지 오늘 밤은 잠 못 이루며 고민해보자.



    꼰대 바로 알기 :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가?

    빤대 되지 않기 빤대 탈출 5계명

    여러 요령과 방법이 있겠지만 많다고 좋은 것도 아니기에 핵심적인 덕목 5가지만 언급한다. 이름하여 5계명이라 해두자. 그것도 기억하기 쉽게 ‘이.미.자.이.사’의 다섯 글자를 첫 글자로 해 계명을 만들었다.


    ① 이유 없이 삐딱하지 않기

    청소년을 상징하는 말에 사춘기가 있다. 소년 소녀가 성장하면서 여러 호르몬 중 성호르몬이 두드러지게 분비되고 다양한 변화를 겪게 되는 시기다. 사춘기라면 오버랩되는 단어 중에 짜증, 반항, 다툼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아무래도 이유 없는 반항이다. 괜히 짜증이 나고 까닭 없이 부모에게 반항하는 것으로 사춘기가 시작된다.


    그것은 일종의 성장통이다. 그것을 통해 성년으로 발달한다. 그런데 성년이 되고 직장인이 되고서도 사춘기 증후군이 남아 있다면 이거 문제다. 삐딱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보며, 이유 없이 반항하게 된다면 아직 성장을 덜한 것이다.


    주위 사람중에 삐딱한 인물을 떠올려보라. 늘 반항적이고 사사건건 트집 잡기를 좋아하는 사람, 그가 어떻던가?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던가? 문제의식이 있고 개혁적이고 창의적이던가?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며 무조건 거부하는 사람이 틀림없을 것이다. 자기 몫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 남의 일에 게거품을 뿜어내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결코 삐딱한 사람이 되지 마라. 삐딱한 것도 습관이요, 버릇이다. 때로는 기질이다. 사사건건 부정하고 저항하고 삐딱하다면 그 사람의 장래는 결코 밝지 않다. 직장 내에서 설 자리를 찾기 어렵다. 늘 아웃사이더로 있다가 퇴직할 확률이 매우 크다. 그리고 인생 자체가 삐딱하게 빗나갈 확률 또한 커진다.


    ② 미래에서 오늘을 보기

    지금 당신은 어떤가? 상사에게 호의적인가? 지금의 당신이 훗날 어떻게 보일지 상상해보자. 5년이나 10년 후만 상상해도 충분하다. 그때로 가서 오늘을 보라. 그때는 회사에서 어떤 위치에 있을 것 같은가. 그것을 상상하라.


    미래에서 오늘을 보면 함부로 말하지 못한다. 글 하나라도 함부로 쓸 수 없다. 사람과 세상을 향해 좀 더 겸허해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훗날 땅을 치며 후회하기 때문이다.


    ③ 자신이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알기

    젊은 날에는 자기가 세상의 기준이요, 심판관이라도 되는 듯 착각하기 쉽다. 이유 없는 반항, 괜한 삐딱함은 바로 그것에서 나온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건방지기 때문이요, 거꾸로 말하면 겸손함을 모르기 때문이다. 겸손하지 않다는 것은 세상이 무서운 줄 모른다는 의미도 된다. “하룻강아지 범 주서운 줄 모른다”는 말이 있다. 바로 지금의 당신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있는 게 아닐까.


    젊음은 혈기 왕성한 것이다. 아직 덜 성숙한 것이다. 그래서 무모할 수 있다. 그러기에 사람을 깔볼 수 있다. 그 위험성을 스스로 인식하고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 자신만만한 것만큼 겸손해야 한다.


    겸손하라. 겸손이란 자기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위대함’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아는 것이다. 겸손은 의도적으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위선이 될 수 있다. 위선은 또 하나의 교만이다. 그보다는 자신의 젊음, 지위나 학벌, 내세울 만한 지식이나 자랑거리, 심지어 위대함조차도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진심으로 아는 것, 그것이 겸손이다. 겸손하면 스스로 낮아질 것이요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그러면 세상이 바로 보이고 처신의 요령이 보인다.


    ④ 이상과 현실을 직시하기

    세상에는 별사람이 다 있다. 좋은 사람들이 모인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그런 회사는 없다. 상사가 위대한 현인이거나 영웅이기를 기대하지 말라. 당신과 같은 수준의 사람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당신과 마찬가지, 거의 비슷한 능력으로 회사에 들어왔고 세월이 지나면서 승진했을 뿐이다. 꼭 탁월해야 승진하는 것도 아니며 뛰어난 사람이 경영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사내 정치에 뛰어난 사람, 반항하지 않고 순응한 사람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측근에게 영웅은 없다”는 말이 있다. 바로 옆에서 그 사람을 상대해본 사람에게는 그가 결코 영웅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냥 보통 사람이 어쩌다 그 역할을 잘한 경우가 많다. 그러니 이상과 현실을 헷갈리지 마라.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결국 당신이 하기 나름이다. 당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좋은 상사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해답은 당신에게 있다. 그것을 인정해야 문제해결의 길이 보인다.


    ⑤ 사람의 소중함을 알기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인연인 줄 모르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 줄 알고도 그것을 살리지 못하며, 현명한 사람은 소매 끝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는 말이 있다. 필연이든 우연이든 직장에서 만난 상사와 선배와의 인연을 잘 살려내고 관리하라. 그들이야말로 당신의 인생을 좌우할 결정적인 사람들이다. 그 인연을 무시하면서 페이스북 등 SNS에서 친구를 만들기 위해 애쓴다면 이건 웃기는 거다.


    인연의 소중함을 안다면 괜히 삐딱하지도 까탈스럽지도 않을 것이고 함부로 사람을 평가할 수도 없다. 당신의 소중한 인연은 바로 지금 당신 앞에, 당신과 함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꼰대지수 낮추기 : 함께 갑시다

    세대 차이를 이해할 수 있을까?

    수많은 세대론의 목적과 결론은 결국 세대 차이를 해소하고 세대 갈등과 혐오를 극복하자는 데 있다. 그래서 저마다의 해법을 내놓는다. 그중 가장 핵심적으로 제시되는 것이 상대방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심지어 “닥치고 이해!” “무조건 이해!”를 부르짖는 세대론자도 있다. 이해하면 간단히 해결되는데 그것이 안 되니까 속이 무척 타는가 보다. 그러나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이 이해되는가? 쉬운 듯 정말 어려운 일이다. 말로는 이해한다지만 내심 이렇게 외친다.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어.”


    상대방을 이해하려면 상대방의 입장이 돼 그 감정과 사고방식이 돼야 한다. 그런데 태어난 시대가 다르고 자라난 환경이 다른데 어떻게 그 감정과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가. 결국은 상상력을 최대한 동원해야 하는데 제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도 상대의 처지, 감정, 생각을 똑같이 이해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기에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의 관계를 ‘이해’를 통해 해결하려면 어려워진다. 그러면 방법이 없는가? 있다. 아주 간단하고 편리한 방법이다. 바로 ‘존중’이다.


    공존의 방식 – 존중이 답이다

    이해는 이상이지만 존중은 현실이다. 이해는 공감하는 것이지만 존중은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이해는 감정이고 느낌이지만 존중은 의지요, 결단이요, 선택이다.


    이해와 존중의 차이를 쉽게 알려면 아모스 알론조 스태그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미국 시카고의 전설적인 풋볼 코치였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우리 선수들은 모두 똑같이 사랑한다. 그러나 그들을 모두 똑같이 좋아하지는 못한다.”


    무슨 말인지 이해되는가? 이해되지 않으면 깊이 음미하면서 다시 한번 읽어보라.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를 참 잘 표현했다.


    노먼 맥클레인의 자전적 소설을 영화하한 <흐르는 강물처럼>에도 비슷한 ‘어록’이 등장한다. 미국 몬태나주의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플라이낚시를 좋아하는 것 외에는 성격이 전혀 다른 두 형제가 주인공이다.


    기존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꼰대 스타일의 형 노먼과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신세대 스타일의 동생 폴은 서로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때때로 격렬한 언쟁을 벌이며 갈등한다. 형제간에도 그러하니 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다. 맏아들 노먼과는 통하지만 막내인 폴과는 소통하기가 어렵다.


    그러던 어느 날 불의의 사고로 동생 폴이 목숨을 잃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폴을 그리워하는 아버지 맥클레인 목사는 은퇴를 앞둔 마지막 설교에서 이렇게 말한다.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온전히 사랑할 수는 있다.”


    아들 폴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온전히 사랑했다는 말이다. 이들 어록은 ‘이해와 존중’의 차이를 설명하는 데 딱 좋다. 더 나아가 이해할 수는 없어도 얼마든지 존중할 수 있음을 가르치는 데 제격이다. 그뿐만 아니라 세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서도 매우 소중하다. 이렇게 변형해 활용하면 될 것이다.


    “나는 그들(기성세대 또는 신세대)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들을 온전히 존중할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참 좋아한다. 친구든 후배든 누구든 간에 뭔가 마음이 통하지 않고 생각이 다름을 느낄 때마다 속으로 이 말을 중얼거리며 마음을 달래고 생각을 바꾼다.


    세대 차이와 세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자꾸 이해하려고 강조하지 마라. 골 아파진다. 그냥 존중하면 된다. 존중하면 상대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상대의 의사와 자유를 인정할 것이다. 존중하면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게 된다. 경청하고 수용할 것이다. 존중하면 배려하게 된다. 상대를 위하고 상대에게 도움이 되게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서로 이해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이제 아시겠는가? 세대 갈등은 이해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존중으로 해결해야 한다. 이해는 못 해도 존중은 할 수 있다. 사랑까지는 못 해도 존중은 가능하다. 존중이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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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