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이 관우에게 말하다 2
 
지은이 : 천위안(역:유연지)
출판사 : 리드리드출판
출판일 : 2023년 07월




  • 심리학을 통해 역사 속 인물과 사건을 분석하는 ‘심리설사’ 분야의 창시자 천위안이 충의의 표상 ‘관우’를 통해 현대 생활에서 응용해야 할 신용에 관한 심리 전략을 이야기합니다!



    심리학이 관우에게 말하다 2


    관우, 형남을 정벌하다

    경험은 축적되는 재산이다

    유비군을 완전히 박살 낸 조조는 형양의 9군까지 점령한 뒤, 그 여세를 몰아 남쪽의 오나라까지 집어삼켜 천하 통일을 이루려는 야심에 불타고 있었다. 재위한 지 얼마 안 된 오나라의 손권은 전쟁경험이 전무한 탓에 이 사태를 어찌하면 좋을지 몰랐다. 조정의 문무대신들은 화친파와 교전파로 엇갈려 논쟁이 끊이질 않았고, 손권은 아무 의견도 내놓지 못했다.


    제갈량은 이 기회를 틈타 오나라로 건너가 뛰어난 화술로 손권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손권에게 유비와 손을 잡고 조조에게 맞설 것을 제안했다. 또한 주유를 도와 조조에게 맞설 계책을 내놓았다.


    제갈량의 뛰어난 지략은 주유의 질투심을 유발했다. 질투란 타인의 타고난 조건 또는 후천적인 성과를 자신과 비교한 뒤 생기는 일종의 모순된 심리다. 그렇다면 질투는 대체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질투의 진원지는 바로 ‘자기위주편향’이다. ‘자기위주편향’의 대표적인 현상은 바로 ‘모든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평균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집단의 각도에서 봤을 때 이야기이다. 만약 그 대상이 어떤 특정 개인일 경우 ‘모든 사람’은 곧 ‘자신’을 뜻하게 된다.


    개인 간에도 우열의 차이가 존재한다. 기량을 확실하게 발휘하는 개인의 경우, ‘자신의 능력이 평균 이상’이란 생각이 점점 ‘자신이 이 세상에서 최고’라는 생각으로 바뀌게 된다. 이런 달콤한 상상 속에 빠져 있을 때 기분도 역시 최고가 된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상황이 급변하여 다른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거나 더 이상 자신이 이 세상 최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된다. 그 충격은 우리 내면의 모순된 심리를 만들어낸다. 가장 먼저 나타나는 반응은 불신 즉 ‘현실부정’이다. 사람들은 현실부정을 통해 내면의 모순된 심리를 완화하려 한다. 하지만 ‘현실부정’의 효력은 매우 일시적이다. 다른 우수한 누군가가 계속해서 좋은 결과물을 도출할 경우 ‘어쩔 수 없이 현실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는 과정은 매우 큰 고통을 수반한다. 이때 만약 모순된 심리가 해소되지 않으면 심리의 균형이 깨지게 되고, 그 결과 ‘기본적 귀인오류’가 나타나게 된다.


    다른 사람의 우월한 모습은 선천적으로 타고났거나 운이 좋아서 등 인위적인 힘의 개입이 불가능한 외부요인에 의한 것으로 생각한다. 반면에 자신의 성공은 오직 본인의 노력과 의지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라 생각함으로써 마음의 안정감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되지 않을 경우 심리 메커니즘에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그중 하나가 상대방을 신격화하는 현상이다. 이 경우 상대방을 ‘인간’이라는 범주에서 아예 제외시켜 자신과 구분을 짓는다. 인간의 능력이 어떻게 신의 능력에 비할 수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며 상대방이 자신보다 우월하다는 현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또 다른 하나는 바로 질투다. 질투는 온갖 수단으로 상대방의 우월성을 폄하하고 부정함으로써 심리적 안정감을 찾으려는 현상이다. 심지어 질투가 극에 이를 경우 상대방의 물리적 존재 자체를 없애는 방법으로 만족감을 얻기도 한다. 이 경우 상대를 ‘살아 있는 사람’에서 배제함으로써 자신과 구분을 짓는다. 죽은 사람과 살아있는 사람을 비교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존경과 질투는 한 나무에서 자라난 다른 두 가지와 같다. 천재적인 지략을 가진 제갈량을 두고 노숙은 존경심을 가졌지만 주유는 질투심을 드러냈다. 존경은 개인 간의 능력 차이가 엄청나게 클 때 생기지만 질투는 그 차이가 크지 않을 때 생긴다.


    심리학으로 들여다보기

    질투가 생기지 않게 애쓰는 것보다 질투를 현명하게 다스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시기와 질투는 부정적인 감정이지만 자신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무조건 선을 앞세워 이를 다스리기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지혜가 필요하다.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타인을 평가하는 기준점이다

    유비는 끝까지 제갈량의 주장을 반대하며 위연의 참수를 막아냄으로써 자신의 영웅적 기질을 보여주었다. 제갈량은 이 일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유비가 있는 이상 모든 일의 최종 결정권자는 자신이 아니라 바로 유비라는 사실이었다. 지난번에는 이유가 너무 명백해서 관우를 죽이지 못했다면, 이번에는 이유가 불충분하여 위연을 죽이지 못했다. 이는 결국 목숨을 살리고 죽이는 권한은 유비에게 있음을 의미했다.


    어찌 되었든 위연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제갈량이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아무 근거 없이 내뱉은 ‘모반의 관상’이란 말은 굉장히 직접적이고 강렬하면서 부정적 심리 암시인 ‘자성적 예언’이 되었다.


    ‘자성적 예언’은 로버트 머턴이 제시한 이론이다. 최초 상황에 대한 잘못된 정의는 새로운 행위를 야기시키는데, 그 새로운 행위로 인해 최초의 잘못된 관념이 진짜로 인식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성적 예언은 잘못된 관념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정확성이 증명된 잘못된 관념이다.


    유비 진영에서 제갈량의 위신은 어느 정도일까? 대다수 사람은 그의 말에 의심의 여지를 갖지 않았다. 그가 이전에 동풍을 핑계로 칠성대에 올랐을 때, 흰 도포를 입고 칼춤을 추는 모습을 통해 자신을 신격화시킨 바 있다. 그래서 제갈량의 한마디로 대다수 사람의 머릿속에는 ‘위연이 모반의 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분명히 배반을 저지를 것’이란 강한 첫인상 즉 초두효과가 생겼다. 그날 이후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와 같은 인상을 위연에게 투영시켰다.


    이런 투영 작용은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어떤 이가 도끼 한 자루를 잃어버렸는데, 그는 옆집 소년이 그 도끼를 훔쳐 갔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그는 옆집 소년의 모든 행동과 말을 주시하게 되었다. 그의 눈에는 옆집 소년의 걸음걸이, 얼굴색, 표정, 말투 등 모두가 하나같이 도끼를 훔쳐 간 범인의 모습으로 보였다. 얼마 후 그는 잃어버린 도끼를 찾았다. 알고 보니 며칠 전 그가 산에서 장작을 팬 뒤 산골에 두고 온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는 도끼를 찾은 뒤 옆집 소년과 마주치게 되었고, 다시 한번 그 소년을 유심히 관찰했다. 하지만 다시 봤을 땐 그 소년의 걸음걸이, 얼굴색, 표정, 말투 모두 도끼를 훔쳐 간 범인의 모습처럼 보이지 않았다.

    위연에게도 이런 암시는 직접적으로 그의 내면에 영향을 주었다. 이후 위연은 밤잠을 자다가도 머리를 만지며 정말 자신이 모반의 상을 가지고 있을까, 또 자신이 정말 배반을 하게 될까 끊임없이 의심했다. 그리고 수십 년이 흐르는 동안 이런 암시는 점점 그의 마음속에 고정적인 생각으로 굳어져 버렸다.


    제갈량이 죽은 뒤 위연은 그의 암시대로 정말 배신을 했다. 하지만 이는 위연의 잘못이 아니다. 위연의 배신 만큼은 제갈량이 책임져야 할 업보다. 위연은 제갈량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괴테의 명언이 있다.


    “사람들이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라. 그리고 그들이 이미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 된 것처럼 대하라.”


    제갈량은 왜 위연을 죽여야 한다고 했을까? 그게 직권남용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많은 사람은 제갈량이 위연의 용모와 성격이 관우와 많이 닮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름 타당한 논리이긴 하나 그 전제는 두 사람이 닮아서가 아니다. 사실 제갈량은 전혀 위연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제갈량이 위연에게 말한 ‘불충불의’라는 말만 봐도 그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제갈량은 항상 관우의 기를 꺾어 자신에게 승복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좀처럼 뜻대로 되지 않자 관우를 자극하여 장사로 보내게 되었다. 그는 관우가 위험에 처할 것을 미리 알고 유비에게 지원군을 보내도록 설득한 뒤,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관우에게 망신을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운이 아주 좋았던 관우는 위연이 자발적으로 성을 바치는 덕에 힘들이지 않고 공을 세우게 되었다. 제갈량은 그런 관우의 공적에 흠집을 내기 위해 위연을 희생양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위연의 행위를 ‘불충불의’한 행동으로 포장해야만, 관우의 공적을 ‘불충불의’로 얻은 초라한 승리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관우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념이 ‘충의’이기 때문에, ‘불충불의’라는 말만큼 그의 콧대를 제대로 꺾을 수 있는 무기도 없었다.


    하지만 제갈량은 자신이 예상했던 결과물을 얻지 못했다. 자리에서 물러난 관우와 위연의 마음속엔 제갈량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버렸다. 제갈량이 원하는 결과는 결코 이런 것이 아니었다. 제아무리 천문 지리에 능통한 제갈량도 사람 심리를 꿰뚫는 능력만큼은 완벽하지 못했던 것 같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제갈량은 관우처럼 스스로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계속해서 격장법을 써봤자 별다른 효과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역효과만 일으킨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으로는 방법을 바꿔보기로 했지만 그러기엔 이미 관우가 제갈량에 대해 갖고 있던 응어리의 골이 너무 깊어진 터라, 관우가 생각을 바꾸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돼 버렸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제갈량과 관우 모두 유비의 가장 최측근으로서 유비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고 굵직굵직한 공적들을 많이 쌓아왔다. 하지만 성격 충돌과 원만한 관계 정립의 실패는 둘 사이에 뿌리 깊은 앙금만 남겼다. 이는 결과적으로 두 사람에게도 유비에게도, 나아가 유비가 이끄는 조직에도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관우, 형주의 주인이 되다

    변화가 때론 어리석은 선택이다

    관우는 사자를 통해 유비가 서천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사자가 말했다.


    “주공께서 특별히 장군을 탕구장군 수정후로 봉하셨습니다. 또한 별도로 금과 은 등을 하사하셨습니다.”


    관우가 물었다.


    “다른 장군들은 어떻게 되었소?”

    “제갈 군사께서는 군사장군, 장비 장군께서는 정원장군 신정후, 조운 장군께선 진운장군, 마초 장군은 평서장군 도정후에 봉해지셨습니다. 또한, 제갈 군사와 법정, 장비 장군, 조운 장군께서 장군과 동등한 재물을 하사받으셨습니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계시지만 주공께서는 한순간도 장군을 잊지 않고 계십니다. 장군께서 받으신 하사품은 단연 최고의 상입니다.”


    사자는 있는 그대로의 말을 전했지만, 그 말을 듣고 난 뒤 관우는 순간적으로 낯빛이 어두워지며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는 사자에게 예를 다해 대접한 뒤 서천으로 돌려보냈다. 관우에게 또 어떤 심리적 변화가 생긴 것일까?


    중국인들의 마음속엔 늘 ‘가난함보다 불평등을 더 걱정’하는 심리가 존재해 왔다. 자신이 받은 포상의 절대적인 가치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바로 상대적 가치다. 장비와 조운이 하사받은 것에 대해서는 관우 또한 아무 이견이 없었다. 그럼 제갈량일까? 아무리 관우가 마음속으로 제갈량을 인정하진 않아도 이번에 그가 공을 세운 것만큼은 명확한 사실이었다. 방통이 성공하지 못한 서천 정벌을 제갈량이 해냈으니, 설령 이견이 있다 해도 합당한 이유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 합류한 마초가 자신과 같은 급인 정후에 봉해지고, 법정이 자신과 동등한 하사품을 받은 것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관우의 이런 감정을 심리학에서는 ‘상대적 박탈감’이라고 부른다. 보편적으로 자신과 타인을 비교했을 때 느끼는 좌절감이 더욱 크다. 예를 들어 경찰의 월급 수준이 올라가면 당연히 그들의 사기는 올라가겠지만 소방관의 사기는 떨어진다. 마르크스는 이에 대해 아주 유명한 말을 남겼다.


    “집은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다. 만약 주변의 집들이 똑같이 작다면 그것은 거주에 대한 모든 사회적 수요를 충족시킨다. 하지만 만약 작은 집 옆에 궁전이 지어진다면 그 작은 집은 한순간에 오두막으로 전락하고 만다(마르크스의 이웃효과).”


    관우는 제갈량이 유비의 진영에 합류한 뒤 자신의 위치와 역할이 위태로워져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했다. 그런데 이제는 마초와 법정까지 자신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 꼴을 보니 자존심 강한 관우로선 기가 막힌 것이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누군가 자신의 자존감과 우월감에 흠집을 낼 경우 주로 상대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심지어 어떤 경우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전장에서 수비나 방어로는 공적을 쌓기 힘들다. 방어에 성공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방어에 실패하면 그것은 곧 죄가 된다. 관우는 전장에 참여하는 것이 공을 세우기 더 쉽기 때문에 자신의 공적과 하사품 그리고 명성이 다른 이보다 뒤처진 것이라 생각했다.


    관우는 유비가 형제의 정을 생각하여 자신에게 일등상을 하사했다는 그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반나절 간의 고민 끝에 결국 관평을 불러 말했다.


    “성도에 가서 백부님께 감사 인사를 전하고 오너라. 그리도 한 가지 더 아뢸 것이 있다. 듣자하니 마초라는 자가 아주 용맹하다던데 내가 서천으로 가 그자와 한 번 무예로 승부를 겨루고 싶다고 아뢰거라.”


    법정은 문관이기 때문에 관우는 자신의 화풀이 상대로 마초를 선택한 것이다.


    제갈량은 관우가 충동적으로 어리석은 선택을 할까 봐 걱정됐다. 어쨌든 관우는 자신이 선택한 사람이 아닌가?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이 정확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본전 포기도 마다치 않는다. 심지어 자신이 고수해온 입장마저도 바꾼다. 제갈량은 관우의 마음을 달래는 것 외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다. 제갈량이 유비에게 말했다.


    “주공께선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서신을 써 보내면 관장군도 마음을 돌리고 형주 수비에 전념할 것입니다.”


    관우의 급한 성미가 우려된 유비는 제갈량에게 당장 서신을 쓰게 했다. 그리고 관평에게 그날로 곧장 서신을 가지고 형주로 돌아가도록 명령했다. 관평에게 보고를 받은 관우는 급히 되물었다.


    “내가 마초와 대결을 하겠다고 했던 일은 어떻게 되었느냐? 백부님께 말씀드렸느냐?”

    “군사께서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관우는 제갈량의 서신을 읽은 뒤 성이 떠나갈 정도로 큰소리로 웃었다. 막힌 속이 뻥 뚫렸는지 관우는 관평에게 급히 문무백관을 소집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제갈량의 서신을 공개했다. 제갈량의 서신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장군께서 맹기와 실력을 겨뤄보고 싶어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맹기의 용맹함이 대단하긴 하나 그래 봐야 서한의 경포나 팽월 정도 수준에 불과합니다. 또한, 익덕과 어깨를 견줄 만한 실력이긴 하나 미염공을 상대하기엔 아직 한참 부족한 자입니다. 지금 공께서 신경 쓰실 일은 형주 수비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만약 서천에 온 사이 형주를 빼앗기기라도 하면 그보다 큰 죄는 없을 것입니다. 부디 현명하게 판단해 주시길 바랍니다.”


    제갈량은 또 한 번의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 사람들은 한 번 잘못을 저지르고 나면 더 많은 잘못으로 처음 그 잘못을 덮으려 한다. 제갈량은 관우에게 형주 수비를 맡기는 것이 자신의 전략과 완전히 상반되는 결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선택했다. 이것이 바로 제갈량의 첫 번째 실수다. 그리고 그 잘못을 정당화하기 위해 제갈량은 기존의 ‘상대를 과소평가하여 자극’하는 방법에서 ‘적당히 달래는 방법’으로 전략을 바꿨다. 분명 제갈량으로선 쉽지 않은 결정이었겠지만 이로 인해 내면에 갈등과 모순도 생겼다. 하지만 그 결정이 ‘모두를 위한 최선’이라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기에 평정심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제갈량의 이런 전략변경은 관우의 오만함을 더욱 부추겼다. 이것이 제갈량의 잘못된 선택이 불러온 최악의 결과였다. 제갈량은 서신을 통해 마초를 경포와 팽월 부류로 구분 지었을 뿐 아니라, 그의 실력을 장비와 비등한 수준 정도로 말했다. 용맹하고 싸움에는 능하나 그 이상 그 이하는 없다는 식으로 설명한 것이다. 반면에 관우는 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부류로 표현했다. 두 부류 사이에 존재하는 명확한 경계선은 이들의 실력 자체가 관우와 겨룰 만한 수준이 아님을 뜻했으니 대결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데 관우가 재차 대결을 청한다면 이는 스스로 자신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행동이 되는 꼴이었다.


    여기서 제갈량이 선택한 설득방법은 설득의 주변경로다. 또한, 이어지는 다음 말에서는 설득의 중심경로를 택했다. 제갈량은 우선 형주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하는 등 이치를 설명하고, 그다음 관우의 역할의 중요성을 언급해 ‘도의’로써 그를 설득했다. 제갈량의 이런 상반된 태도 변화는 관우에게 승리감, 만족감, 자부심을 안겨주었다.


    무엇이든 무조건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제갈량은 서신의 뒷 구절만 남기고 앞 구절은 쓰지 말았어야 했다. 즉 설득의 주변경로가 아닌 중심경로만으로 그를 설득했어야 했다. 일반적으로 설득의 주변경로는 중심경로로는 설득이 불가능할 때 선택하는 것이다. 제갈량은 얼마든지 중심경로로 관우를 설득할 수 있었다. ‘대의’라는 명분으로 그 책임을 따졌어야 했다.


    심리학으로 들여다보기

    사람들은 늘 극과 극의 선택을 한다. 그것이 가장 어리석은 변화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이다. 극단적 관점으로 문제에 접근한다면 선택의 폭이 좁아진다. 그만큼 가능성의 영역도 줄어들어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넓고 다양한 단계의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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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