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논어를 만나 행복해졌다
 
지은이 : 판덩 (지은이), 이서연 (옮긴이)
출판사 : 미디어숲
출판일 : 2023년 01월




  • 수천 년 전의 책이 여전히 사랑을 받고 있다면? 그것은 책의 가치가 오늘날에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시대 불문의 고전, ‘논어’가 그 주인공입니다. 극도로 편하지만, 내면은 여전히 공허하고 허탈한 우리들! 옛 위인 지혜의 정수 ‘논어’를 한번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나는 논어를 만나 행복해졌다


    술이 편: 어짊으로 무장한 공자의 자태

    입신양명을 위한 네 가지 덕목: 지어도, 거어덕, 의어인, 유어예

    공자가 말하길 “도에 뜻을 두고, 덕에 근거하며, 어짊에 의지하고, 예에서 노닐어야 한다.”


    공자는 사람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하려면 “그 사람의 행동을 보고, 이유를 살피고, 편안함을 관찰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도에 뜻을 두고, 덕에 근거하고, 어짊에 의지하고, 예에서 노니는 것은 한 사람의 행동과 이유, 그리고 편안함을 결정하는 요소다.


    먼저 “도에 뜻을 둔다”라는 구절을 살펴보자. 만약 한 사람이 이루고 싶은 포부가 돈을 벌고 집을 사는 것이라면 그 사람의 인생은 너무나도 빈약한 삶이다. 평생 물질적인 것만 추구하는 것은 목표 실현 여부와 상관없이 인생을 고통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추구는 가장 쉽게 달성할 수 있지만 가장 만족하기는 어렵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인생의 표면을 떠다니며 이익과 명예를 두고 싸울 뿐 자아를 실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별다른 의미가 없다.


    도에 뜻을 두어야 한다는 공자의 말은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의 목표를 물질적인 속박에서 벗어나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는 데 두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뉴턴, 아인슈타인, 노자와 같은 사람이 바로 도에 뜻을 둔 인물이다. 이들은 우주의 이치와 인생의 의미를 알고자 했다. 사사로운 이익에서 벗어나 큰 포부를 가지면 인생이 무료하지 않고 추구해야 할 길이 끝이 없어 정신적으로 완벽한 만족 상태에 이를 수 있다.


    다음 구절인 “덕에 근거한다”라는 것은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첫 번째는 문장에 쓰인 ‘거’를 ‘의거하다’, ‘기반한다’라는 뜻으로 보고 어떤 일의 한계상황을 설명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덕은 어떤 행위의 기본 규칙과 경계선이다. 예를 들어서 길을 갈 때는 정해진 대로 오른쪽으로 걸어가야 모두가 원활하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만약 왼쪽으로 가는 사람이 있다면 서로 부딪치게 돼서 양쪽 모두 불편해진다. 정해진 규칙을 따르는 것은 서로를 존중하는 일이다. 이처럼 덕의 목적은 사회가 더욱 질서를 갖추고 효율적으로 되는 걸 말한다.


    두 번째는 ‘거’를 ‘충분히 알고 있다’라는 의미로 보고 도덕 체계를 아주 명확하게 이해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덕’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는 것보다 ‘덕’의 요구를 이해하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해석이 될 수 있다. 가령 우리는 ‘덕’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더라도 어른들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며 사람을 돕는 것을 좋아할 수 있다.


    “어짊에 의지하고”라는 구절은 어진 행동이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마지막 구절인 “예에서 노닐어야 한다”에서 쓰인 ‘유’는 광범위하게 섭렵한다는 뜻이고 ‘예’는 예절, 음악, 궁술, 승마, 글쓰기, 수학인 ‘육예’를 말한다. 따라서 ‘예에서 노닌다’는 것은 예법, 음악, 궁술, 승마, 독서, 수학 등 여러 지식을 익혀 자신을 꾸준히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뜻 이다. 풍성한 삶을 위해서는 어짊, 의로움, 도덕만 이야기해서는 안 되고, 육예를 모두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두루 실천하고 경험해야 비로소 자신의 어짊과 덕의 수련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성공하는 사람은 용기와 만용의 차이를 안다: 임사이구, 호모이성

    “써주면 행하는 것”과 “버려지면 숨는 것” 중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 어떤 관직을 맡아 달라는 제안이 오면 망설이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감이 없을 수도 있고, 일이 뜻하는 대로 되지 않아 되돌아올 나쁜 평판을 걱정하거나, 자기 이익을 헤아리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나랏일이 주어졌을 때 이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용기와 능력, 책임감이 필요하다. 영국 아편 상인들을 내쫓았던 청나라 정치가 임칙서는 “만일 국가에 이롭다면 목숨도 바칠 것이니 어찌 화복을 이유로 피하겠는가”라고 말했다.


    “버려지면 숨는 것”도 하기 힘든 일이다. 기대하던 관직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은 상처받고 나라를 원망할 뿐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모욕을 당했다는 생각에 집에 돌아와서도 쉽게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한다. “버려지면 숨는 것”은 집으로 돌아와 수련하고 배움에 정진한다는 뜻이다.


    공자는 안회와 자신은 이 두 가지 점을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제자인 안회 입장에서 공자의 말은 칭찬이었다. 옆에서 동료의 칭찬을 들었던 다른 제자 자로가 서운했던 모양이다. 일찍부터 공자를 따라다니며 공부했던 자로는 수제자로 인정받고 싶어 했다. 기분이 상한 자로가 공자에게 물었다.


    “스승님께서 전투를 이끌어야 한다면 어떤 제자를 데리고 가시겠습니까?”


    자로는 안회가 몸이 약하다는 사실을 알면서 이런 질문을 했고, 이를 알아챈 공자는 자로에게 매정하게 말했다.


    “맨손으로 범을 잡으려 하고, 맨몸으로 강을 건너려 하는 것은 무작정 용기만 믿고 경솔하게 행동하는 사람이다.”


    수호지에 등장하는 영웅호걸 무송도 호랑이를 막대기로 때려잡았다고 하니 맨손으로 호랑이와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가? 맨몸으로 강을 건너는 일도 마찬가지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죽어도 후회하지 않겠다며 만용을 부리는 사람을 공자는 경계했다.


    공자는 모든 생명은 소중하기에 자신의 목숨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그는 일을 할 때 두려워하고 계획하길 좋아하여 성공하는 사람과 함께 하겠다고 말한다. 두려워한다는 것은 용기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위험한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지혜롭게 대처하는 것이 진정으로 용기 있는 행동이다. 용기와 만용을 구분할 줄 아는 진지함이 필요하다.


    그 어떤 재물과도 바꿀 수 없는 감성의 가치: 락역재기중의

    공자가 말하길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신 뒤 팔을 굽혀 베니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다. 의롭지 않은 부와 귀한 것은 나에게는 뜬구름과 같다”


    공자가 행복에 관해 말하고 있다.


    “거친 밥을 먹고”는 초라한 음식을 말한다. 문장에 쓰인 ‘수’는 차가운 물이다. 뜨거운 물은 ‘탕’이라고 적는다. 변변치 않은 음식에 찬물을 마셨다는 것은 허기진 배를 값싼 음식으로 채웠다는 말이다. “팔을 굽혀 벤다”라는 구절은 팔베개한다는 뜻이다. 공자는 거친 음식과 냉수가 산해진미와 다를 게 없다는 듯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다”라고 말한다.


    ‘논어’에는 안회는 더러운 골목에 살면서 한 그릇의 밥과 표주박의 물로 하루를 지내도 즐거움이 변하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다. 공자는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신 뒤 팔베개하며 즐거워했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즐거운 일이다. 숨을 쉰다는 것은 신비롭다. 우리는 공기를 내뱉으면 자연스럽게 다시 공기를 들이마신다. 들숨과 날숨의 신비함과 즐거움을 깨닫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법희의 충만함'이다. 공자는 언제 어디서든지 물질에 구애받지 않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행복은 어떤 ‘상태’가 아니라 ‘능력’이다. 권력을 쥐는 것, 돈방석에 앉는 것. 호화로운 집에 서 사는 것 등 물질의 풍요로운 상태가 곧 행복을 의미할 수는 없다. 아무리 많은 재산이 있어도 마음이 어지럽다면 행복할 수 없다. 행복은 내면의 만족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행복을 느끼는 능력을 갖추었다면 거친 음식을 먹고 차가운 냉수를 마신 뒤 팔베개를 하는 것에서도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행복을 느끼는 능력이 없는 사람은 돈방석에 앉아 있어도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하다.



    태백 편 : 천하를 거느린 공자의 인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벗어나기: 석자오우상종사어사의

    증자가 말하길 “재능이 있으면서 재능이 없는 사람에게 묻고, 아는 게 많으면서 아는 게 적은 사람에게 물으며, 있으면서 없는 것처럼 하고, 가득 차 있으면서 텅 비어 있는 것처럼 하며 잘못을 해도 따지지 않았다. 옛날의 내 친구가 일찍이 이를 따랐다!”


    증자가 세상을 먼저 떠난 친구 안회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공자의 수제자였던 안회는 스승이나 친구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 인물이었다. 증자가 말하는 안회의 품성을 살펴보자.


    “재능이 있으면서 재능이 없는 사람에게 묻는다”라는 구절은 유능한 사람이 자신보다 못한 사람에게 묻는 상황을 말한다. “아랫사람에게 질문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는 옛말과 비슷한 의미다. 다음 구절인 “아는 게 많으면서 아는 게 적은 사람에게 묻는다”라는 의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어지는 안회의 성품을 살펴보자. “있으면서 없는 것처럼 하고 가득 차 있으면서 텅 비어 있는 것처럼”이라는 구절에서 ‘있음과 없음’과 ‘가득 차 있음과 텅 비어 있음’의 의미는 노자의 ‘도덕경’에서 말하는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어떤 것을 갖고 있으면서 갖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서 없는 것처럼” 하는 것이다. 지식이 풍부하다고 해도 자만하지 말고 겸손하게 행동해야 한다. 그래야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 이는 진실하면서 과감하게 자아를 인식하려는 태도이다.


    불교의 ‘금강경’에 등장하는 ‘불착상’은 아주 넓고 깊은 주제다. 불착상은 “아상도 없고 인상도 없고 증상도 없고 수자상도 없는 것”이다. 망상을 일으키고 미혹하게 하는, 들리고 보이는 모든 것을 말하는 ‘명상’에 빠지지 않는 것이 불착상이다. 쉽게 말해 사회적 신분이나 직함, 학위 등을 따지지 않는 자세를 말한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겉으로 나타나는 직함이 아니라 본질이다.


    안회는 공자가 가장 아낀 제자였다. 친구이자 같은 제자였던 자공과 증자도 안회를 존중했다. 하지만 안회는 그런 점을 의식하지 않고 항상 “있으면서 없는 것처럼 하고, 가득 차 있으면서 텅 비어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외부의 명성에 집착하지 않았고 부담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학식이 높으면서도 뽐내지 않았던 안회는 이러한 것들을 자기 내면의 일부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있으면서 없는 것처럼 하고 가득 차 있으면서 텅 비어 있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었다.


    마지막 구절인 “잘못을 해도 따지지 않았다”라는 것은 누군가 무례한 짓을 해도 따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의 저자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는 사람은 무거운 것은 물론이고 가벼운 것으로도 무너질 수 있다고 말한다.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에게 적은 월급, 주택 마련, 교육비 등은 삶의 무게를 짓누르는 요소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것들보다 가벼운 것들 때문에 더 쉽게 무너진다. 직함, 명성, 다른 사람들의 평가 등은 허구이지만 우리들의 내면을 쉽게 무너트릴 수 있는 요소들이다. 그래서 우리의 존재는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것이다. 헛된 명성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우리의 존재는 어쩌면 깃털보다 가벼울지도 모른다.


    자신감과 예리함의 또 다른 이름, 거만함과 인색함: 사교차린, 기여부족관야

    공자가 말하길 “주공과 같은 재주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도 거만하고 인색하다면 그 나머지는 볼 것도 없다.”


    공자의 우상인 주공은 강태공과 더불어 주나라를 창건한 공신이다. 주공은 주나라 왕실의 관직 제도와 전국시대 각국의 제도를 기록한 유교 경전 주례를 제정했다. 공자는 종종 사람을 칭찬할 때 그 당사자를 주공과 비교했다.


    문장을 살펴보자. 공자는 주공과 같은 재주와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거만하고 인색하다면 “볼 것도 없다”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거만하고 인색한 사람이라면 능력이 아무리 많아도 언급할 가치도 없다는 뜻이다. 공자가 ‘거만함’과 ‘인색함’에 이처럼 강력한 반감을 드러낸 이유는 무엇일까?


    거만함과 인색함은 기준이 모호해 쉽게 판단할 수 없다. 가령 자신감과 거만함은 종종 구별하기 힘들다. 자신감이 너무 지나치면 거만해지기 쉽지만, 한편으로는 당당한 면모로 보일 수도 있다. 인색함도 마찬가지다. 과도한 예리함이 인색하게 보일 수 있으나 정확한 것을 지키려는 성향이 그릇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거만함과 인색함은 자신이 그러한 성향을 갖고 있어도 스스로 그 사실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두 가지의 단점은 모호해서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모호해서 의식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더 큰 잘못을 저지르기도 쉬운 것이다.


    이 문장에서 공자는 우리에게 거만함과 인색함을 조심하려면 자신을 돌아보고 다른 사람에게 주의를 환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거만한 것은 명성을 좋아하는 것이고, 인색한 것은 물질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리고 명성과 물질을 좋아한다는 것은 탐욕스럽다는 의미다. 탐욕을 부리는 사람은 쉽게 불만을 품고 판단력을 잃게 되기 때문에 많은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명성과 물질을 좋아하는 것은 정신적인 부분에서나 물질적인 부분에서 자신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거만함은 정신적인 부분이고 인색함은 물질적인 부분이다.


    ‘거만함’과 ‘인색함’을 가진 사람은 내면의 즐거움이 부족하다. ‘다시 일어서는 용기(What Life Should Mean to You)’의 작가 아들러(Alfred Adler)는 열등감을 없애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개인의 가치와 전체 사회의 가치가 하나로 융합되려면 자기중심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아야 한다. 모든 일에서 개인의 명예와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면 곤경에 빠지기 쉽지만, 사회의 가치를 고려하면 어떤 성과든 이룰 수 있다.


    인생은 끝이 있지만 배움에는 끝이 없다: 학여불급, 유공실지

    공자가 말하길 “배움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으면서 잃을까 두렵다!”


    공자의 배움에 대한 열망이 너무 커 초조함마저 느껴지는 문장이다. 적당한 초조함과 긴장감은 삶의 활력소가 될 수 있다. 배우는 과정에서 조금도 초조해하지 않는다면 자기계발의 속도는 더딜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것은 건강을 해칠 정도가 아닌 적절한 수준의 긴장감을 말하는 것이다.


    심리학자 여키스(Yerkes)와 도슨(Dodson)의 이름을 딴 ‘여키스 도슨 법칙(Yerkes-Dodson Law)’은 초조함의 긍정적인 힘을 설명한다. 적절한 초조함은 더 많은 것을 배우려는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효율성을 높여준다. 하지만 과도한 초조함은 지나친 긴장감에 휩싸이게 만들어 효율성을 떨어뜨리게 한다.


    지식의 범위는 넓어질수록 접촉하는 영역도 그만큼 넓어진다. 따라서 배울수록 자신이 알지 못하는 범위를 더 넓게 의식하게 된다. 하지만 어느 한 분야만 파고든 사람이라면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도 결국 자신의 분야를 넘어서야 좀 더 완벽한 지식에 다가갈 수 있다. 이렇게 접촉하는 지식의 범위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모르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마지막 구절인 “잃을까 두렵다”라는 것은 지식을 잃게 될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많은 것을 배우지도 못하는데, 힘들게 배운 것마저도 잊어버린다고 초조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배움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상황을 피하기 어렵다. 공자도 “배운 것을 잃을까 두렵다”고 했으니 우리는 너무 초조해할 필요는 없다.


    배움에 대한 공자의 고백은 자신의 초조한 마음을 인정했다는 의미다. 자기 자신을 알면 우리는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배움에 대한 초조함을 받아들였다면 더욱 열심히 배우게 된다. 공자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이를 강조한다.


    “내가 종일 밥을 먹지 않고,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으며 생각했으나 유익한 점이 없었으니 배우는 것만 못하였다.”


    장자도 배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의 삶에는 끝이 있지만, 아는 것에는 끝이 없으니 끝이 있는 것으로 끝이 없는 걸 찾으면 위태로울 뿐이다.”


    인생은 끝이 있지만 지식은 끝이 없다. 유한한 생명으로 무한한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위태로운 이유는 배움은 다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공자와 장자의 배움에 대한 관점은 다소 차이가 있다. 공자는 자신이 “배움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으면서 잃을까 두려워”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여전히 노력해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배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모든 것을 다 배울 필요도 없다. 하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 계속해서 지식을 탐구하는 삶은 아름답지 않겠는가? 인생은 끝이 있지만 배움에는 끝이 없다.


    배움에 대한 초조함을 완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공자는 이미 방법을 말했다. 초조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초조함도 정상적인 상태로 볼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멀리해야 할 것은 초조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이다. 마음이 초조해질 때는 이렇게 생각해 보자.


    ‘내가 지금 초조해하는 것은 정상이야. 공자도 겪었던 일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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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