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피하지만, 일단 해봅니다
 
지은이 : 나카가와 료(역:김나정)
출판사 : 갈매나무
출판일 : 2022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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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피하지만, 일단 해봅니다


    창피를 모를수록 진정한 나를 알 수 있다

    변화가 필요한 시대에서 살아남기

    ‘하루라도 빨리 성장해서 성과를 내야 해.’

    사회 초년생은 대부분 이런 생각을 하며 업무에 임할 것이다. 이 ‘성장’은 자신이 갖춘 업무 능력이나 기술과 더불어 자신이 걸어 나갈 길의 연장선 위에 있기 마련이다. 같은 조직, 같은 회사에 오랫동안 몸담는 일이 당연했던 사회에서는 이러한 하나의 성장축을 기준 삼아 평가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성장’ 이상으로 ‘변화’가 요구되는 시대가 오고 있다.


    우리는 ‘100세 시대’라고 불리는 세상에 살고 있다. 수명이 비약적으로 늘면서 필연적으로 노동 시간도 늘어났다. 일본은 2021년부터 단계적으로 정년을 만 70세까지 연장하기로 했다. 처음 사회생활을 하는 순간부터 70세까지 연장하기로 했다. 처음 사회생활을 하는 순간부터 70세 정년까지 계속해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20대에 배운 지식과 기술만으로 70세가 될 때까지 사회에서 필요한 인재로 남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일본의 노동 인구 절반가량이 인공지능과 로봇 기술로 대체될 수 있다고 한다. 앞으로 남은 긴 사회생활 동안 한 가지 영역에 한정된 지식과 기술만 추구한다면 결국 벽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요컨대 적극적으로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경험과 지식을 쌓아야만 하는 시대에 돌입한 것이다. 이런 시대에서 우리는 ‘몇 살이 되어도 창피함을 무릅쓸 용기’를 키워야 한다.


    경험이 많은 사람일수록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이 꺼려질 수 있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새로운 일에 도전할 구실이 생겼다고도 볼 수 있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고집하지 말고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만 할 수 있다면 모든 일이 기회로 바뀔 것이다.


    “한 가지 영역도 아직 완벽하지 않은데 다른 영역에 손을 대면 양쪽 다 애매해질 뿐이야”라고 말하는 사람도 적잖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 분야에 강점을 지닌 제너럴리스트는 ‘조합의 스페셜리스트’이기도 하다. 조합할 수 있는 영역이 많아질수록 특별함이 커져 그 사람의 시장 가치 또한 올라간다. 이러한 영역 간의 조합이야말로 비연속적이고 개별적인 축에서 일어나는 ‘변화’다.


    나는 입사 8년 차에 겨우 카피라이터가 되어 신입 카피라이터와 함께 연수를 받은 후 현장에 투입되었다. 연수에서는 내 광고 문구보다 신입 사원의 문구가 더 칭찬을 받았다. 동기 카피라이터들은 나보다 훨씬 전부터 활약해 이미 8년이라는 경력이 있었다. 게다가 더 위선에는 이 분야에서 몇십 년이나 일해온 대선배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과 같은 무대에서 싸운다 한들 승산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가장 처음 부임했던 프로모션국에서 배운 광고 설계 및 실행 능력과 그다음에 부임한 영업국에서 배운 팀 통솔력, 그리고 개인적으로 공부해온 광고 문구 작성과 영상기획 능력을 조합해 능력을 발휘하기로 했다


    한 가지 영역만을 봤을 때는 승산이 없어 보이더라도, 여러 영역을 조합하면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된다. 여러 영역의 지식과 경험을 섞으면 내 강점이 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은 순간이었다.


    인간은 완벽을 원할수록 더 불완전해진다

    창피함이라는 감정은 누구나 피하고 싶은 감정이다. 창피함을 느끼는 순간에는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얼굴이 새빨개지며,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픈 생각이 든다. 심지어 당신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창피함을 피하려고 할수록 우리는 창피함을 더 느끼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창피함이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나’와 ‘지금의 나’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눈앞에 닥친 일을 실패 없이 ‘완벽’하게 해내려고 할수록 현실의 내가 ‘불완전’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이 불완전함을 받아들이지 못해 부정적인 감정이 커지면 더욱 창피해져서 결국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된다.


    창피함이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나’와 ‘지금의 나’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심리적 좌절’이다. 재미있는 기획을 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싶지만, 실제로는 그럴듯한 기획이 전혀 생각나지 않을 때, 이 차이에서 생기는 심리적 좌절감이 회의에서 발언할 용기를 빼앗아 가버린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주변에서 나를 무시하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도 커진다. 그러고는 참여한 회의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회의실을 빠져나가게 되는 것이다.


    만약 이때 창피함을 무릅쓸 용기가 있었다면, 대단한 기획이 아니었을지라도 당신의 발언을 계기로 누군가 묘안을 냈을지도 모른다. 창피함을 피하기 위해 당신은 숨어 있을지도 모를 가능성을 버리고 만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높은 기대치는 변화하고자 하는 욕망이기도 하다. 하지만 기대치가 높을수록 지금의 나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커지고, 이상적인 내가 현재의 나를 부정하게 된다. 그 결과, 창피하다는 감정이 더욱 커져 행동에 제약이 생기는 것이다.


    존경받고 싶다는 마음보다 중요한 것

    우리가 창피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의식적으로 ‘존경받고 싶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행동을 제약하고 용기를 빼앗아 간다.


    머리가 좋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세미나에서 ‘적절한 질문’을 생각하다 결국 질문하지 못하고 끝나버린다거나, 일을 잘한다는 평가를 받고 싶어서 완벽함을 추구하다가 마감을 놓쳐 혼나는 경우 등이 있다.


    기껏 참가한 세미나에서 질문도 못한 채 의문을 품고 돌아가는 것은 참으로 아까운 일이다. 마감을 놓친 경우도 상사와 미리 상의했더라면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머리로는 알면서도 하지 못했다는 데에 창피함을 느끼고 만다. 이렇듯 존경받고 싶다는 마음이 우리의 행동을 막아선다.


    그래서 내가 추천하는 방법은 ‘존경받는 사람’이 아닌 ‘응원받는 사람’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존경받으려고 하면 할수록 이상적인 내가 기준점이 되어 나도 모르게 나의 부족한 부분에 눈이 가고 만다. 그리고 그 이면에 숨은 창피함이 발목을 잡는 것이다.


    반면 응원받는 사람은 무엇이든 내보일 수 있다. 그저 내 모습 그대로 세미나를 들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질문을 솔직하게 물어보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이전의 나처럼 질문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된다. 마감을 놓쳤던 일도 본격적으로 일에 착수하기 전에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간단히 메모해놓고, 사전에 상사와 논의하면 더 여유 있게 일을 끝낼 수 있다.


    콤플렉스는 가리기 때문에 콤플렉스가 되는 것이다. 반대로 콤플렉스를 내보이면 그것은 매력 포인트가 된다. 이러한 열등감이 그 사람의 성격과 가치관을 형성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도 콤플렉스였다. 광고 대행사에서 창의적인 일을 하고 싶었던 내가 겪은 8년이라는 고뇌의 시간이 결과적으로는 나의 오리지널리티가 되어 이 책을 기획하는 바탕이 되어준 것이다.


    콤플렉스는 나쁜 것이 아니다.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자신의 콤플렉스를 찾아보자. 그곳에 당신의 개성이 숨어 있을 것이다.



    창피를 피할수록 오히려 기회가 사라지는 이유

    거대한 바위처럼 보여도 딛고 나면 돌부리일 뿐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누군가가 자신의 진가를 알아줄 것이라는 생각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기다리기만 해서는 ‘누군가’도 ‘언젠가’도 오지 않는다.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부조리한 사회에서 당신보다 먼저 창피함을 무릅쓰고 행동하는 사람이 기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다.


    한편으로 창피함을 무릅쓰기 힘든 시대가 된 것도 사실이다. SNS에서 타인의 평가가 수치화되고, 전 세계 사람들의 성공이 가시화되면서 자신의 평범한 일상을 비교하며 우월감과 열등감을 느끼기가 쉬워졌다. 게다가 잘 보이기 위해서 나를 과장하거나 허상을 만들기도 한다. SNS에는 지금 그런 환상같은 ‘나’가 넘쳐나고 있다. 유명인의 실언이나 실패는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고, 사회 전체가 필요 이상으로 이들을 질책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언동 또한 제한하게 된다. 창피를 무릎쓰는 일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하지만, 창피함이 앞길을 가로막은 거대한 바위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당신이 지금까지 한 적 없는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있다는 증거다. 첫걸음을 내딛기 두려운 것은 그것이 ‘하면 된다는 가능성’을 버리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한번 손을 대는 순간부터 ‘내가 진심으로 하면 될 텐데’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실패했을 때, 그 결과를 직시해야만 한다. 하지만 첫걸음을 디디면 ‘왜 그렇게 고민했었지?’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첫발을 내딛는 용기로 당신은 ‘해본 적 없는 사람’에서 ‘해본 적 있는 사람’이 된다.


    지금까지 거대한 바위라고 느꼈던 창피함이라는 심리적 장벽은 사실 살짝 발을 걸려 넘어질 뻔한 돌부리에 지나지 않는다. 처음 걷는 자갈길이라면 작은 돌부리에도 걸려 넘어지기 쉽다. 초행길에서는 방향이 맞아도 무언가 불안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다음에 같은 길을 걷는다면 어려움 없이 걸을 수 있다.


    시점이 바뀌면 창피함이라는 기준도 바뀐다. 어린 시절을 이집트에서 보낸 나는 내가 주변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이 창피했다. 학교에 주먹밥을 가져가자 아이들이 웃었고, 그다음 날부터는 샌드위치를 싸달라고 어머니께 부탁했었다. 25년 후 나는 해외의 구글에서 단기로 일할 기회가 생겼다. 언어도 문화도 비즈니스 방식도 다른 곳에서 일하면서 느낀 것은 주변인과 다르다는 사실은 창피한 게 아니라 또 다른 가치가 된다는 점이었다. 다른 경험과 언어, 문화를 가진 것만으로도 타인에게 신선한 시점을 제공할 수 있다. 내 창피함의 원인이었던 ‘다름’은 벽이나 돌부리가 아닌 무기였다.


    이 골치 아픈 창피함이란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 우리는 다양한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우리 앞에 어떤 창피함이 기다리고 있을지 미리 알게 된다면 거대한 바위처럼 보였던 것도 돌부리로 보일 것이다. 처음부터 돌부리라고 생각한다면 처음 가는 길이라도 곧장 걸어갈 수 있다.



    창피함에 맞서기 위한 나만의 관점 키우기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를 신경 쓰는 외적 창피함

    외적 창피함은 타인에게 ‘이렇게 보이고 싶다’는 이상에서 벗어났을 때 느끼는 창피함이다. ‘창피’라는 감정을 떠올렸을 때 생각나는 장면들은 대개 이 외적 창피함으로 분류된다.


    예를 들어, 출발하려는 지하철에 겨우 몸을 욱여넣어 탄 뒤 괜히 멋쩍어져서 다른 칸으로 이동할 때, 송년회로 노래방을 갔을 때 분위기에 맞지 않는 선곡을 할까 봐 애꿎은 리모컨만 바라볼 때, 레스토랑에서 주문한 메뉴와 다른 음식이 나와도 깐깐한 손님으로 보일까 봐 아무 말 없이 먹을 때 등이 이에 해당한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외적 창피함을 느끼기 쉬운 시대에 살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전 세계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되면서 우리는 매시간 매초 외적 창피함과 싸운다. 이렇게까지 개인이 타인의 주목을 받고, 비교당하는 시대가 있었는가.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순간부터 SNS에서는 실시간으로 ‘좋아요’와 댓글이 달린다. 몰라도 될 타인의 시선조차 가시화되고 있다. SNS로 매일 접하는 타인의 용모, 타인의 삶에 대한 부러움은 부메랑처럼 돌아와 나와 타인을 비교하게 한다.


    외적 창피함은 사회 규율을 형성하는 데 일조한다. 조용한 곳에서 큰 소리로 떠들거나 공공장소를 전속력으로 달리는 사람이 없는 것도 주변의 눈을 의식하는 외적 창피함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창피함이 우리 생활을 쾌적하게 만들어주는 측면도 분명 있다.


    외적 창피함은 주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경우도 적잖다. 부모가 아이에게 “창피하니까 하지 마”라며 주의를 주는 순간이나 선배가 후배에게 “젊을 때는 창피함을 맛보는 게 좋다”고 조언하는 일, 비즈니스 서적 등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모르면 창피당한다’라는 불안감을 조성하는 말들. 이것들 모두 일방적으로 창피함을 강요하는 행위다. 이렇게 창피함을 강요당한 사람은 그전까지 창피하다고 느끼지 않았던 일들을 곱씹어보게 된다.


    외적 창피함, 내적 창피함 중 어느 쪽을 더 느끼기 쉬운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외적 창피함을 느끼기 쉬운 타입은 타인의 눈을 신경 쓴 나머지, 무언가를 시작하는 첫걸음을 내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주변의 반응을 상상하면서 행동하기 전부터 고민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은 타인의 감정을 우선할 줄 아는 다정한 성격이라고 볼 수도 있다. 타인과의 접점이 많고, ‘다른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비치는지’를 항상 의식하는 사람으로, 영업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특히 많다.


    내가 어떤 종류의 창피함을 느끼기 쉬운 타입인지를 이해하고 앞으로 나타날 창피함의 정체를 미리 안다면 용기를 내서 이를 극복할 수 있다. ‘행동한 뒤에 올 안 좋은 상황’과 ‘행동한 뒤에 얻을 이점’을 양쪽 저울에 올려놓고, 한쪽에 용기를 더해주기만 하면 된다. 지금까지 놓쳐왔던 기회들이 작은 용기를 계기로 어느 순간 우리 눈앞에 나타날지도 모른다.



    창피한 마음을 이기면, 그것이 바로 성공의 신호

    창피함을 넘어서는 열정과 만나는 법

    창피함이라는 감정을 극복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근본적인 방법은 ‘창피를 무릅쓰는 체질’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창피함’에 맞서서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일과 만나야 한다.


    첫발을 내딛기가 어렵거나 새롭게 시작한 일을 지속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모두 당신의 열정과 창피함을 저울에 달았을 때, 열정이 창피함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당신의 열정이 부족하다”고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다. 열정이 창피함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은 당신이 눈앞에 있는 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일이라면 몸이 저절로 움직인다. 첫발을 내딛는 것도 지속하는 것도 괴롭지 않다. 당신이 창피함을 넘어서서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 일을 찾았을 때, 창피함에 대한 면역력은 비약적으로 상승할 것이다.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온갖 수를 쓰게 된다. 스스로 놀랄 만큼 대담한 행동도 할 수 있다.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을 발견한다면 기획서를 작성해 상사와 직접 담판을 지으면 된다. 정말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SNS로 메시지를 보내면 된다. 보통 이렇게 ‘대담한 행동’을 막아서는 것은 틀림없이 창피함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일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 누구도 부탁하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하게 되는 일’을 찾아서 해보자. 그곳에 당신이 깨닫지 못했던 열정과 좋아하는 일이 숨어 있다.


    처음에는 뭐든지 괜찮다. 대단한 일이 아니어도 좋다. 지금은 한 개인의 ‘취향’이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시대다. 과자를 좋아한다면 과자들을 비교해 트위터에 소개해보자. 옷을 좋아한다면 자기만의 청소 비법을 블로그에 적어보자.


    좋아해서 시작한 행동은 첫걸음에 대한 부담감도, 지속에 대한 부담감도 적다. ‘나도 모르게 하게 되는 일’을 찾는 것은 스스로도 몰랐던 나의 재능과 만나게 되는 엄청난 기회다. 또, 이렇게 좋아하는 감정에서 시작한 행동은 때에 따라 창피함을 무시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 좋아한다면 시작하고, 지속할 수 있다. 반대로, 좋아하지 않는 일은 시작도 지속도 어렵다. 무엇보다 즐긴다는 것 자체가 가장 큰 재능이라고 할 수 있다. 흥미가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당신의 창피함을 넘어설 수 있는 열정을 찾아보자.


    선택의 나침반이 되어주는 창피함의 힘

    창피함은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도 아니다. 창피함이라는 감정의 긍정적인 면을 이해하면 우리는 창피함이 주는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우리는 대체로 ‘할지 안 할지’의 양자택일을 통해 창피함과 직면한다. 오랜만에 길에서 만난 지인에게 ‘말을 걸지 말지’, 내가 노력해 준비한 프로젝트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릴지 말지’, 내 지식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도록 ‘SNS에 올릴지 말지.’ 이와 같은 적극적 선택(내가 상처받지 않는 형상 유지 행동)의 양자택일이 우리 삶 속에 넘쳐난다.


    창피함에 대한 두려움이 있으면 외적 창피함을 수반하는 적극적 선택을 본능적으로 피하게 된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적극적 행동에는 외적 창피함이 표식처럼 붙어 있다. 즉, 행동할 때는 외적 창피함을 느끼는 선택지를 고르는 편이 올바른 선택이다.


    행동하지 않는 소극적 선택을 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새로운 가능성은 반드시 창피함을 수반하는 적극적 행동에 숨어 있다.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는 창피함을 표식 삼아 ‘고민될 때는 창피할 것 같은 쪽을 고르자’라고 정해놓으면 적극적 행동을 택할 수 있다. 이것은 반사적으로 창피함을 회피해 소극적 선택을 하는 나 자신을 향한 경계 행동이기도 하다.


    창피함은 이제껏 보지 못했던 풍경이 펼쳐진 곳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러니 창피함을 표식으로 삼자. 창피함은 기회를 찾기 위한 신호다. 또한 창피함에 대한 면역은 빨리 키울수록 좋다. 면역을 빨리 키워놓으면 여러 가능성에 도전할 수 있다.


    창피함은 빨리 투자할수록 수익도 높다. 지금의 내가 미래의 나를 대신에 창피함을 미리 투자해놓으면 미래의 나는 지금보다 적극적 선택을 고르기 쉬운 체질이 되어 있을 것이다. 창피함에 대한 소득은 지금 당장 체감하기 어렵지만, 미래의 나에게는 분명 큰 자산이 된다.


    창피함은 결코 젊은 세대만 겪는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창피함에 더 겁을 먹는다. 창피함을 두려워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창피함을 느끼는 것은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있다는 증거다. 성장보다 변화가 요구되는 시대에 필요한 것은 창피를 무릎쓸 용기다. 고민될 때는 눈 딱 감고 창피한 편을 고르자. 그것이 곧 당신의 미래를 개척하는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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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