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바꾸기로 했다
 
지은이 : 우즈훙
출판사 : 리드리드출판
출판일 : 2022년 10월




  • 내면의 공포와 두려움을 인정해야 진정한 자유가 찾아옵니다. 모든 사람이 가진 각각의 심리적 고통에는 모두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직면하고, 고통의 의미를 인식하며, 문제의 근원을 찾아내는 과정을 통해 성장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나는 나를 바꾸기로 했다


    꿈(DREAM)

    창조할 것이냐, 파괴할 것이냐

    제자리를 맴돌며 안절부절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선뜻 나서지 못하고 주저하는 데에는 까닭이 있다. 자신의 창조물이 산산조각이 날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자신의 창조물은 곧 삶이고, 파괴는 곧 죽임이다. 창조와 파괴의 욕구는 인간의 근본이다. 파괴는 곧 죽임이다. 창조와 파괴의 욕구는 인간의 근본이다. 육체적 생명 출생과 사망으로 ‘삶과 죽음의 본능’이라 부른다. 생사의 범주는 무한대로 확장할 수 있다. ‘소망, 욕망, 정서, 감정, 생각’ 등 우리가 느끼는 모든 정서에 삶과 죽음이 존재한다고 보면 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창조를 통해 쾌감을 느낀다. 하지만 파괴의 쾌감도 있다. 창조력이 잘 형성되지 못한 사람은 파괴 욕구를 추구한다. 파괴의 힘은 대부분 주변이나 사회 등 낯선 외부 세계에서 나타나지만 가장 강력한 힘은 자기 마음에 뿌리내리고 있는 ‘파괴 욕구’에서 출발한다. 대단히 크게 비뚤어지고 어긋난 자기애가 발현되며 엄청난 파괴력이 나타난다.


    지나치게 자기애가 넘치는 사람은 자기 욕구가 실현되는 것만 보고 싶어 한다. 그 욕구에 자기 생명을 걸었다는 뜻이다. 수고하고 애썼지만 나쁜 결과가 도출되면 자기 파괴의 욕구가 강하게 작용한다. 자신이 통제하지 못할 만큼 강력한 힘이다.


    불의의 사고나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리는 원인도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일에서 높은 성과를 내고 인정받았다. 그는 기쁨을 만끽하면서 은연중에 두려움에 휩싸인다. 이 좋은 일들이 물거품이 될지 모른다는 걱정이 시작된 것이다. 이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기에 그는 누군가 자신을 시기하고 질투한다고 의심한다. 기쁨보다 더 큰 불행이 덮쳐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상상까지 불러온다.


    그로 인해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모두가 축하하는 상황에서도 불안해진다. 나중에는 자신이 이 상황을 즐기지 못하는 것에 스스로 분노한다. 이는 어떤 외적 에너지가 그를 망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내적 파괴 욕구가 강한 힘을 발휘한 것이다.


    안타깝지만 실현할 가치가 없는 욕구나, 실현하기 어렵고 실현 불가능한 욕구는 소멸시켜보는 연습을 해보자. 주도적으로 희망과 가능성이 없는 소망을 죽이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자신을 위한 선택이다.


    한 마을에 착한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술에 취한 그는 건물에서 뛰어내리라는 메시지를 들었다. 누군가 잡아끄는 것 같은 느낌도 받았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을 통제했지만, 동시에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너무 짜릿할 것 같았다. 그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짚으며 올라가던 도중 불현 듯 ‘아니오!’라는 단어가 번개처럼 뇌리를 강타했다. 이제껏 다른 사람의 말에 순응하고 고분고분 살았을 뿐 ‘아니오!’를 외쳐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부의 권리 또한 자신에게 있으며 그것이 자기만의 힘과 에너지가 된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는 서둘러 계단을 내려왔다.


    창조 욕구와 파괴 욕구는 합리적으로 발산해야 한다. 창조 욕구가 낮은 사람은 반드시 파괴 욕구가 높다. 그로 인해 사람은 착한데 뭔가를 해내지는 못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기회가 생기면 무시무시한 파괴 욕구를 드러낼 것이다. 그들에게는 파괴 욕구를 표현할 교묘한 방법이 있다. 예를 들면 창조자에 대한 비판과 무분별한 건의 등이다.


    주위가 조용해지면 만물이 만들어내는 노랫소리를 들어보자. 만물의 노래 속 리듬과 운율은 아름다움으로 심금을 울린다. 자연은 생과 사를 순리로 받아들이고 주어진 것에 만족한다. 연속되는 하모니는 삶이고, 끊어지는 것은 죽음이며, 고음은 삶이고 저음은 죽음을 의미한다. 만약 ‘생’과 ‘사’ 중 한쪽 면만 있다면 리듬이나 운율도 없을 것이다. 두 가지 면을 가져야 비로소 생사의 힘이 아름답게 교차된다.


    지구 역사와 함께 만물의 노래, 우주의 노래는 줄곧 연주되었다. 변화하고 변동에 맞춰 리듬과 박자를 조율하며 인간의 삶을 이끌었다. 이제 당신도 생사의 노래를 자기 의지로 연주하기를 바란다. 당신의 기대보다 훨씬 훌륭한 작품이 될 것이다.


    자신의 경계를 넓혀라

    경계의 문제를 달걀 껍데기로 비유해보자. 달걀 껍데기는 총 두 겹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딱딱한 겉껍데기이고 다른 하나는 부드러운 막이다. 예를 들어 일반 가정에는 명확한 경계가 있다. 아버지는 딱딱한 껍데기처럼 든든한 보호자 역할을 하고, 어머니는 부드러운 막처럼 돌보는 역할을 한다. 한 사람이 동시에 두 가지 역할을 하기란 매우 어렵다. 만약 어머니가 가정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면 어머니의 부드러운 면이 많이 사라질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부드럽게 가정을 돌보는 역할을 한다면 강한 면보다 부드러운 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개인과 사회 구성원에게 가장 바람직한 ‘경계’는 사회가 큰 용기(容器)로서 믿을 만한 보호막이 되어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개개인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여 자기 책임을 완수하는 데 집중할 수 있다. 만약 사회가 그렇지 못하다면 개인이 많은 힘을 들여 보호막을 구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돌봄의 기능을 잃고 혼란에 빠질 수 있다.


    개인 대 개인에서 경계와 이익은 사회적 관계의 기본적 수칙이다. 서로의 경계를 인정하고 존중할 때 좋은 사회가 된다. 여러 명분을 근거로 함부로 개인의 이익을 착취해서는 안 된다. 이런 전제하에서 더불어 사는 사회가 구현되고 아름다운 현상들이 창조될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경계 의식은 자신을 가두는 틀이 된다. 공간이 확보되지 않으면 몸을 웅크리는 것처럼 생각의 틀이 협소하면 머릿속 생각도 움츠러든다. 이때 상상의 세계조차 열리지 못한다면 살아 있으되 죽은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보이지 않는 계급으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경계’는 높은 계급의 사람을 편안하게 해준다. 자기보다 낮은 계급의 경계에 침입했을 때 이익을 얻을 뿐만 아니라 상대를 위한다는 명복을 갖추고 도덕적 우위를 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권위를 내세워 합리화하고 통제를 정당화하려 든다. 그로 인해 낮은 계급은 속수무책으로 사고를 착취당하고 만다. 그러므로 자기 사고의 경계를 넓혀 나가지 못한다면 정신적 식민지 상태에 빠져 주도권을 잃어버릴 수 있다. 주체적 관점마저 상실하는 것이다.


    경계와 독립은 상대와 맞물려 있는 경우가 많아 매우 복잡하다. 다른 사람의 공간에 침입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공간을 강력하게 지켜내야 한다. 경계를 지켜낸 사람은 그 안에서 자유롭고 강해질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자신이 초대하지 않았는데 누군가 자기 영역 안으로 들어오면 이는 침입니다. 허락하지 않았는데 내 생각을 부정하면 공격이다. 이에 대응하고 대적하며 싸워나가며 자기 경계를 지킨다.


    이렇듯 직접적이고 명료한 경계 의식을 가지면 수많은 일이 매우 간단해진다. 그러나 경계가 매우 좁다면 판단과 결정도 소극적이고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로 인해 몸과 마음에 각종 문제가 생기고 주변과 마찰을 부르는 것이다.


    영역 인식이 확실하면 상대와의 관계에서 규칙이 생겨난다. 규칙은 합의로 정해야 하는데, 합의되지 않으면 자신의 권리를 인정받기 어렵다. 신이나 법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듯 합의로 나의 영역은 내가 주관하고, 상대의 영역은 상대가 주관하며 교집합 영역에서는 서로가 동의한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관계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은 자기보호 차원이다. 자신을 낮추지 않고 강함을 내세우면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침입과 착취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안다.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능력을 실제 능력 아래로 떨어뜨리면서 이를 핑계 삼는다. 책임을 회피하는 게 아니라 차라리 능력이 없다고 보이는 편을 택하는 것이다. 분쟁이나 분란을 피해 애써 모른 척할 때도 있고 묵인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생긴다.


    그런데 오직 갓난아기만이 한계가 없는 세상을 산다. 엄마가 조건 없이 완전하게 모든 일의 원인과 결과를 책임지기 때문이다. 아기는 모든 일을 벌일 뿐이다. 하지만 성인은 다르다. 자신의 말과 행동, 사고를 전적으로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어디 그뿐인가. 자신의 공간이 침입당하지 않도록 지킬 강한 힘도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감정을 다스리고 사랑하는 법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경계와 이익은 사회생활의 기본적 수칙이다. 서로의 경계를 인정하고 존중할 때 좋은 사회가 된다. 여러 명분을 근거로 함부로 개인의 이익을 착취해서는 안 된다. 이런 전제하에 더불어 사는 사회가 구현되고 아름다운 현상들이 창조될 수 있다.


    상상을 현실로 완성해 갈 때 만족이 따른다

    우리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 현실적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일을 상상으로 이루고자 한다. 그러기에 상상은 무한대로 확장해나갈 수 있다. 현실에서 벗어나 위안과 희망을 주기도 한다. 때로는 상상에서 에너지를 얻기도 하는데, 이때 상상의 힘은 창조력으로 전환되어 현실로 발현된다. 상상력이 발휘하는 효과에 따라 삶의 모습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허망한 꿈은 삶의 동력이 되지 못한다. 상상에 그칠 뿐 더 나아가지 못하고 허무함만 안길 수 있다. 그런데도 상상 속 모습을 현실의 나에게 강요한다면 편집적 폭력이 될 수 있다.


    사람은 유아기 시절부터 실망이나 절망 상태에서 ‘상상’으로 위로한다는 연구가 있다. 고통의 순간을 이겨낼 수단으로 상상이라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성장 단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상상은 위안이나 힘이 되어 준다. 우리도 상상하며 대리 만족하지 않는가. 그런데 현실에서 벗어난 상상은 불필요한 새장과 같다. 그안에 안주하려는 경향까지 보인다. 현실에 근거한 상상만이 삶의 가능성을 연다.


    자신의 비전과 일맥상통하는 상상이라면 상상만으로 끝내지 말자. 현실에서 완성해야 한다. 차일피일 미루거나 언젠가 하겠다고 제쳐두어서도 안 된다. 상상이 물 흐르듯 흘러 멀리 가버리고 만다. 인류 역사상 상상에서 착안된 위대한 성과를 되짚어보자. 그 변화의 중심에 당신이 설 수 있다. 상상은 시간적·공간적 거리가 현실에서 동떨어진 것 같지만 자신을 진정으로 만족시킬 중요한 단서인 경우가 많다.



    성장(DEVELOPMENT)

    응답을 주고받는 관계에서 자신을 발견하자

    좋은 부모와 가정은 ‘응답’하는 그릇과 같다. 욕구, 사랑, 증오 등과 같은 아이의 활력은 모두 이 용기 안에서 자유롭게 흐르고 응답을 받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의 자아는 내면화되며 보호막을 형성한다. 보호막은 응답의 질에 따라 그 탄력이 결정된다. 따라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는 성인이 된 후 자아가 온전히 형성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자아가 파괴되고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져 감정이 마비된다. 이런 사람은 수렁에 빠져 발버둥치는 것처럼 인간관계에서 엄청난 노력과 수고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자아가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이들은 자기 존재의 가치를 부인하게 된다. 스스로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므로 세상에서 숨으려고만 한다. 그 결과 상대에 대한 존중과 이해가 동반되지 못해 인간관계도 단절될 수 있다. 우리는 누군가 자신을 알아봐 주고 인정해줄 때 자신 또한 자신의 몸과 마음이 보인다. 그러므로 자신의 만족스러운 부분을 세상에 조금씩 드러내 다른 이들의 관심을 유도해 보자. 사랑받은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도 서서히 주위의 사랑과 관심이 스미면 자아 형성이 이루어질 수 있다.


    관계 맺음은 서로의 거울이다. 먼저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자신을 보게 되면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느낀다. 몸과 마음이 파괴된 내담자에게 상담사가 따뜻한 그릇이 되어 공감해준다면 내담자는 상처를 극복해간다. 스스로 거울을 내면화해 자신과 다른 사람을 관찰하게 되는 것이다. 상대를 통해 자신을 더 잘 알게 된다. 연애 실패 후 자아가 파괴된 이는 자신이 토막 나는 꿈을 꾸기도 한다. 이는 현재 자신의 몸과 감정이 파괴되어 불안한 상태라는 의미다.


    자아가 파괴된 이는 자아가 해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하느라 다른 사람과 충돌이 생겼을 때 자기 반성할 여유가 없다. 상대방을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적대감에 지나치게 민감하고 자신과 다른 의견은 무조건 공격으로 간주한다.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강하게 반격하며 고집을 내세우는 것이다. 그 결과 그는 고립될 수밖에 없다.


    자아가 파괴된 사람은 자아가 안정된 사람을 찾아야 한다. 반대로 자아가 안정된 사람은 자아가 파괴된 사람의 공격을 통해 굳어버린 자신의 자아를 부수고 재설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자아를 통제선 안에 가두지 마라

    ‘통제감’은 자아가 뻗어갈 공간을 결정한다. 지나치게 집에만 박혀 사는 사람들은 그 공간에서만 자신의 통제가 발휘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큰 공간에 놓이게 되면 자기통제력을 잃어버린다. 우리 주위에 지나치게 집돌(순)이인 사람이 있다면 그가 왜 밖으로 나오지 않는지, 왜 인간관계를 맺으려고 하지 않는지, 왜 늘 같은 음식만 먹는지 등 새로운 시도를 즐기지 않는다면 이 부류에 해당한다. 그들을 만약 더 큰 세계로 끌어낸다면 새로 접하는 모든 일에서 자기 통제감을 잃고 헤맨다. 그들은 자신이 와해되고 있다고 느껴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또한 그들은 자신이 가본 적이 없는 곳에 가게 되면 미리 세심한 계획을 세우고, 발생 가능한 모든 상황과 대책을 최대한 고려해 통제감을 형성하려 한다. 하지만 한 번 통제감을 상실하면 그들은 외부 세계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적대감으로 받아들이고 외부로 통하는 문을 닫는다. 적대감은 곧 어둠이고, 통제력 상실은 어둠에 함몰되는 것이다.


    자신이 맞설 수 없는 외부 환경이 두렵다면 상상 속에서 통제감을 넓혀보자. 자신에게 찾아오는 가상의 적대감과 맞서 싸워보면 된다. 상상이므로 자기 통제감을 상실할 염려가 없다. 마음껏 대적하고 자신감을 얻자. 그렇게 되면 현실에서도 한 걸음씩 자기 통제 범위를 넓혀갈 수 있다.


    모든 문제는 존재 영역에서 출제된다

    우리는 현실에서 직면한 문제가 늘 순조롭게 해결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미 부정적인 감정이 ‘좋고 나쁨’, ‘옳고 그름’, ‘높고 낮음’의 평가를 내렸다면 문제 상황을 바로 직시할 수 없다. 이런 문제는 깊이 파고들수록 무엇이 문제인지 미궁에 빠진다. 감정이 판단력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결할 방안을 찾지 못하면 문제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당신이 이제껏 극복하지 못하고 평생 싸워 온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완전히 방임할 공간을 마련해보자. 습관처럼 일을 미룬다면 일정한 시간(예를 들면 일주일)을 두고 철저하게 일을 미뤄보자.


    이때 어떤 일을 하도록 자신을 압박해서는 절대 안 된다. ‘온전한’ 미룸을 경험하며 마음에 깃드는 ‘위안’과 ‘불안’을 동시에 경험해야 한다. 물론 내면의 대립적 목소리가 동시에 부딪혀 힘을 겨루고 갈등하면 괴롭다. 그래도 양쪽의 목소리를 순수하게 받아들이며 자신이 진짜 원하는 방향을 찾아야 한다. 인격적 갈등에는 모두 깊은 뜻이 있다.


    감정을 이해하고 자유로워지자

    진짜 자아를 원한다면 자기감정을 존중하자. 마음과 감정이 삶을 이끌도록 해야 한다. 자아가 파괴되었거나 아직 형성되지 않은 사람은 자기감정을 존중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며 황량함과 어둠을 연상한다. 이를 채우고 보완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우리는 건강한 자아가 형성되지 않으면 외부에서 자신을 구할 도구를 찾는다. 예를 들어 부부싸움을 할 때 배우자의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부분을 언급하는 경우다. 상대 부모의 단점이나 치부, 약점을 이야기하는 것은 신의 규율을 어기는 것과 같다. 우리는 가족과 자신의 자아를 일정 부분 동일시한다. 따라서 배우자가 자기 부모를 공격하면 자신의 자아가 공격당했다고 분노한다. 이에 부정당한 자아를 회복하기 위해 최대한 강력하게 방어하는 것이다.


    내면이 연약한 사람일수록 외부 세계에 자신을 의탁하는 경향이 있다. 어릴 때의 부모는 외부 세계의 절대자였다. 성장 과정에서 부모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하면 성인이 된 후에도 그들은 그 안에 머물고 싶어 한다. 부모가 드리운 그늘에 있어야 안정이 되는 것이다. 부모를 옹호하거나 상대의 부모를 공격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의 출발이다. 약한 자기 내면을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외부 자아를 지키려는 것이다.


    이제는 외부 세계나 다른 사람의 감정에 치우치지 말자. 자기 감정을 존중하라. 감정은 마음에서 나온다. 자기감정을 따르면 오히려 자유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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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