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원칙
 
지은이 : 박영규
출판사 : 미래의창
출판일 : 2021년 05월




  • 정치학자이자 인문학자인 저자는 누구보다도 ‘(리더로서) 전인적 존재에 가까운’ 세종에게 길을 묻고 싶다고 한다.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은 무엇보다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한글 창제야 인류사적 업적이니 말할 것도 없고 눈부시게 발전시킨 과학기술, 4군6진 개척으로 상징되는 영토 확장, 민생 안정을 위한 조세 개혁, 음악의 정비 등 이루 다 헤아릴 수조차 없다. 저자는 이런 업적들을 넘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세종의 유산에 주목했다. 바로 세종의 원칙이다.


    세종의 원칙


    공부의 원칙

    근본부터 충실하게 다지다

    세종은 사고의 넓이와 깊이를 더하는 데 가장 중요한 학문을 철학과 역사로 여겼다. 조선에서 철학이라면 경학 곧 성리학이었다. 세종은 유교의 기본이자 핵심 교재인 4서(논어, 맹자, 중용, 대학)와 5경(시경, 서경, 역경, 춘추, 예기)에 달통했다. 당대의 석학으로 이름 높은 변계량, 이내와 같은 대학자들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세종의 학문은 높은 경지에 올랐다. 특히 주역에 해박한 것은 천문과 지리에도 전문가의 조예를 더하게 했다.


    일찍이 성리학의 대가가 되었지만 세종은 오히려 성리학 공부에만 치우치는 당대 선비들의 학문 풍토에 불만을 제기했다. 구체적인 현실과 동떨어진 공부는 관념에 치우쳐서 공허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성리학과 함께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종 23년(1441) 6월 28일, 임금은 정인지를 불러 일렀다.


    “무릇 정치를 하려면 반드시 전대 치란의 자취를 보아야 하고, 그 자취를 보려면 오직 사적을 상고해야 한다”


    임금이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경연 교재로 삼으려 하자 조신들은 권수가 너무 많다며 반대했다. 그러자 절충안으로 『자치통감강목』을 교재로 삼았다. 294권으로 된 『자치통감』을 59권으로 압축한 요약본이다. 공부를 하면서 미진함을 느낀 임금은 집현전 학사들에게 명해 『자치통감』에 주석을 단 『통감훈의』를 편찬하도록 했다. 임금은 이 통감 주석서의 모든 구절을 몸소 손볼 정도로 역사의 무게를 중하게 여겼다.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군주가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 네 가지를 강조했다. 첫째는 아랫사람들이 기꺼이 따르게 하는 힘을 갖출 것, 둘째는 정확하게 일을 맡기고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할 것, 셋째는 인재에게 일을 맡겼으면 간섭하지 말 것, 넷째는 군주의 권위를 내려놓고 한없이 겸손할 것. 세종은 『자치통감』 『통감강목』 등의 역사서를 수십 번 반복해서 읽으면서 군주로서의 리더십과 용인술 그리고 원칙과 자세를 배웠다.


    구체적으로 질문해서 대안을 끌어내다

    좋은 질문을 하려면 문제에 대한 전문지식과 논리적 사고력, 통찰력을 갖춰야 한다. 이런 조건들을 갖추지 못하면 질문은 겉돌아 핵심을 찌르지 못하거나 방향을 잃기 십상이다.


    세종은 좋은 질문자였다. 그는 폭넓은 독서를 통해 전문지식과 논리적 사고력, 사안의 핵심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지녔다.


    세종 22년(1440), 제주도 안무사 최해산이 임금에게 다급한 장계를 올렸다. 안무사(按撫使)란 지방에 변란이 발생했을 때 왕명을 받아 백성들을 위무하는 일을 맡은 관리를 말한다. 안무사는 장계로 용이 나타난 일을 고한 것이다.


    “정의현에서 다섯 마리의 용이 한꺼번에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의 용이 도로 수풀 사이에 떨어져 오랫동안 빙빙 돌다가 뒤에 승천했습니다.”


    장계를 받은 임금은 깜짝 놀랐다. 상상의 동물인 용이, 그것도 다섯 마리나 승천했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다. 임금은 안무사에게 더 자세히 보고하라며, 이렇게 물었다.


    “용의 크고 작음과 모양과 빛깔과 다섯 마리 용의 형체를 분명히 살펴보았는가? 그 용의 전체 모양을 보았는가? 머리나 꼬리 혹은 허리와 같은 신체의 일부만 보았는가? 용이 승천할 때에 구름의 기운이나 천둥 번개가 있었는가? 용이 처음에 뛰쳐나온 곳이 물속인가, 수풀 사이인가, 들판인가? 하늘로 올라간 곳이 사람 사는 인가에서 얼마나 떨어졌는가? 구경하던 사람이 있던 곳과는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용 한 마리가 빙빙 돈 것이 오래 되었는가, 잠깐이었는가? 용이 이처럼 하늘로 올라간 적이 그 전후에 또 있었는가? 용이 승천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은 누구누구인가? 그들이 목격한 구체적인 장소와 시간은 어떻게 되는가? 과인의 이 모든 질문에 대해 구체적으로 보고서를 작성해 아뢰도록 하라.” _『세종실록』1440. 1. 30


    임금의 질문은 현미경처럼 구체적이고 구조화되어 있다. 이런 질문은 맥락에 맞는 답변을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안무사는 임금이 주문한 육하원칙에 맞게 사실관계를 조사하여 다시 장계를 올렸다.


    솔선수범하는 리더십을 보이다

    세종 조에는 지식경영이 꽃을 활짝 피웠다. 성종, 정조와 더불어 대표적인 호학군주였던 세종은 학문을 널리 진흥시켜 이를 국정 운영의 토대로 삼았다.


    지식경영이 성공한 배경에는 세종 특유의 리더십이 있다. 그의 리더십은 두 가지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세종은 솔선수범하는 리더였다. 세종은 조신들에게 책을 열심히 읽으라고 시키기 전에 자신이 먼저 책을 가까이했다. 잠저 시절부터 책을 읽느라 밤을 샐 만큼 독서광이던 그는 즉위 이후에도 변함없이 책을 끼고 살았다.


    세종은 경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아주 특별한 사정이 아니면 경연에 빠지는 법이 없었다. 경연은 임금과 조신들이 미리 책을 읽고 와서 그 내용을 자유롭게 토론하는 자리로, 해당 주제와 연관된 국정이 논의되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룹 스터디나 학술 세미나 같은 것인데, 책 내용을 토론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국정 현안이 언급될 수밖에 없게 되어 경연은 중요한 국정 토론 마당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임금들은 그런 경연을 부담스러워했지만 호학군주인 세종은 오히려 앞서서 경연을 즐겼다.


    둘째, 지식경영의 기반이 되는 제도와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구축했으며, 이를 통해 인재를 적극 발굴했다. 세종은 독서를 통해 폭넓은 지식체계를 쌓은 후 이를 국정 전반에 활용했다. 자신뿐만 아니라 국가를 이끌어가는 모든 신하들이 여기에 동참해야 지식경영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중앙정부에서 국정을 처리하는 젊은 관료들을 국가의 핵심 역량으로 키우는 일을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로 여겼다.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먼저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했다. 집현전은 중국 당나라에서 유래된 학문연구기관으로, 고려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름만 남은 유명무실한 기구였다. 임금은 즉위년에 좌의정 박은의 건의를 받아들여 집현전을 상설기관으로 재정비했다.


    임금은 더 나아가 집현전 소속의 신진 학사들을 경연 검토관으로 참여시켜 집현전에 힘을 실었다. 임금은 이렇게 젊고 유능한 학사들을 상시로 직접 대면하는 기회를 만들어 국가의 새로운 동량을 키우는 한편으로 자연스럽게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 집현전 학사들은 임금과 매일 얼굴을 맞대고 학문과 정책을 토론해야 했으므로 한시도 공부를 게을리 할 수 없었다. 세종은 내관들을 시켜 집현전 학사들이 공부에 불편함이 없도록 지성으로 보살피게 했다. 아침과 저녁 식사를 빈객(임금의 손님) 수준으로 대접하게 할 정도로 극진한 예우를 아끼지 않았다.


    세종은 여기에 더해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를 도입하여 지식경영의 내실을 다지는 계기로 삼았다. 사가독서제의 취지는 오늘날 대학 교수의 안식년제와 비슷하지만 그 운용은 파격적인 면이 있었다. 세종 2년(1420), 집현전의 뛰어난 학사를 선발하여 유급휴가를 주고 연구에 전념하도록 한 것이 시작이다. 처음에는 자택에서 독서하도록 했지만 1442년부터는 산중의 진관사에서 독서하도록 해서 상사독서(上寺讀書)라고 불렀다.


    세조 때 집현전과 함께 폐지된 것을 성종이 예문관을 설립하면서 부활시켰다. 성종은 독서당을 설치하고 규칙을 만들어 계절마다 읽은 책의 목록을 보고하고, 월별주별로 제술시험을 보아 불합격하면 퇴출시켰다. 인조 이후에는 겨우 명맥만 유지하다가 정조 때 규장각을 설립하면서 폐지되었다.



    소통의 원칙

    먼저 조신들의 의견부터 구하다

    세종은 말하기 전에 먼저 듣고 또 들었다. 사실 남의 말을 먼저 듣는 데는 대단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인내심이 아니라면 그는 정말 타고난 전략가다. 1418년 8월 12일, 즉위식 다음날 조신들에게 내린 세종의 취임 일성은 먼저 듣겠다는 말이었다.


    귀가 있으면 누구나 듣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듣는 경향이 있다. 입으로는 “그래 듣고 있으니 말하라”고 그러지만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으니 그만하라’며 장벽을 치는 것이 보통이다. 사람 사이의 소통이 어려운 것은 그 때문이다. 물리적 감각기관인 귀가 있어도 마음을 열지 않으면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세종은 달랐다. 마음을 열고 조신들의 말을 들었다. 조신들을 능가할 만큼 식견이 풍부했지만 세종은 자신이 가진 지식을 모두 내려놓고 조신들의 말부터 들었다.


    소수의견도 존중하여 “그대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권력자의 입장에서 보면 소수의견은 골치 아프다거나 시간낭비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소수의견을 막아버리면 아첨하고 아부하는 말만 넘쳐나게 되고 다수의 의견을 건강하게 만드는 견제장치가 사라져버린다. 그때부터는 다수의견이 옳은 것이 아니라 부패하게 된다. 또 무엇보다 소수의견이 옳을 때도 있다. 설령 소수의견이 옳지 않더라도 다수의견을 보완하고 견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소수의견이 사라진 사회는 위험하다.


    그 시대에 이미 그런 점을 잘 알고 있던 세종은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데도 불구하고 경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그런 점은 생각해볼 만하다, 내가 부족했다며 늘 허조의 말에 성심껏 귀를 기울였다.


    자기 잘못을 바로 시정하여 “그대의 말이 옳다”

    세종은 자신의 말이 곧 법인 절대군주였지만 임금의 권위를 앞세워 신하들의 말을 무시하거나 흘려듣지 않았다. 쓴소리라도 마음을 열고 들었으며, 소수의견에도 귀를 기울였다. 더 중요한 것은 단순히 경청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견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즉시 인정했다는 사실이다.


    최초의 전국여론조사, 백성의 소리를 직접 듣다

    조세제도 개혁 과정에서 보여준 경청의 리더십은 소통의 달인 세종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결정판이었다.


    아무튼 기득권을 쥔 자들이 중간에서 농간을 부릴 수 없게 된 개정안에 신하들의 의견이 찬반으로 팽팽하게 갈리자 임금은 특단의 대책을 내놓는다. 중앙과 지방 정부의 전현직 관리들, 그리고 마을을 대표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전수조사하기로 결정한다. 민생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사안인 만큼 백성의 소리를 직접 들을 필요가 있었다. 사상 최초로 전국여론조사를 실시하도록 한 것이다.


    세종의 결정에 따라 담당 부처인 호조에서는 대대적인 여론조사를 실시한다. 그 대상이 무려 17만여 명에 이르는 유례없는 규모였다. 전화도 없고 교통수단도 발달하지 못한 당시에 17만여 명을 대면 조사한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전현직 관리들과 백성들을 직접 만나서 실명을 기재하고 반대하거나 찬성하는 이유까지 적는 방식이어서 방대한 인력이 필요한 대역사였다. 하지만 세종의 관리들은 불과 몇 달 만에 그 일을 해냈다.


    반대파는 권위가 아니라 논리로 설득하다

    세종이 아무리 신하들의 말을 잘 듣는 임금이라지만 사사건건 지나치게 물고 늘어지는 허조가 지긋지긋할 만도 했다. 그런데도 허조의 말에 끝까지 귀를 기울였다. 어떤 사안이든 소수의견은 결정과 시행 과정에서 만의 하나 있을지도 모를 문제점을 일깨워주는 호루라기 같은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요소가 있다.


    반대하는 신하를 임금으로서의 권위가 아니라 논리로 설득해서 찬성으로 돌아서게 한 세종의 설득 리더십과 소수의 의견에도 끝까지 귀를 기울이는 경청 리더십이 만들어낸 파저강 토벌 계획은 결국 대성공으로 끝났다.



    인재 등용의 원칙

    의심나면 맡기지 않되 맡겼으면 의심하지 않다

    “리더가 무위해야 일을 맡은 사람이 책임감을 가진다(無爲也則 任事者黃矣)”


    『장자』에 나오는 구절이다. 장자의 말 그대로 임금 세종은 자신이 발탁한 인재들에게 무한 신뢰로 권한을 위임했다. 그래서 세종의 신하들은 하나같이 나랏일을 자신의 일로 여겨 최선을 다했다.


    세종은 신하와 치열한 토론을 통해 국정의 큰 가닥만 잡고 세부 실무는 신하에게 전임했다. “그대가 알아서 전장하라.” 국정 총괄은 황희에게, 국방은 김종서에게, 과학은 장영실에게, 음악은 박연에게 전적으로 일임하는 식이다.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작은 허물이 있어도 원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 탓하지 않았으며, 특히 밤낮으로 오랑캐를 대적해야 하는 국방 분야에서는 위임과 면책의 범위를 대폭 확대시켰다. 황희는 아흔을 바라보도록 국정에 헌신했고, 김종서는 예순이 넘도록 변방을 꿋꿋이 지켰다.


    출신 성분에 구애됨 없이 중용하다

    세종은 인재를 발탁하는 기준부터가 남달랐다. 출신 성분보다는 철저하게 능력 위주로 인재를 발탁했다. 인사에서의 이런 원칙도 지식경영을 성공시킨 요인 중 하나였다.


    세종은 장영실이 비록 노비 출신이지만 솜씨가 워낙 뛰어나 국가의 과학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특히 장영실이 발명한 자격루가 중국의 물시계보다 더 정밀하다고 칭찬하면서 그 공로를 높이 사서 장영실에게 호군의 벼슬을 내린다고 말했다. 눈여겨볼 대목은 세종이 장영실의 관직 제수를 결정하면서 영의정 황희와 좌의정 맹사성 등과 의논했는데 황희와 맹사성도 장영실의 출신 성분을 이유로 반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황희도 서얼 출신이라 출신 배경에 대한 편견이 없었으며, 맹사성은 양반 출신이었지만 사고가 유연해 여느 신하들과 달랐다. 황희와 맹사성 두 사람이 세종 치세에서 중용된 것은 인재관이 임금의 코드와 잘 맞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도덕적 허물보다는 능력을 더 크게 사다

    예나 지금이나 공직자에게는 엄격한 윤리 기준이 적용된다. 국민의 본보기가 되어야 할 공직자가 도덕적 흠결 때문에 세간의 지탄을 받게 되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강희맹이 책문의 답안에서 언급했듯이 단점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다 보면 능력을 충분하게 발휘하지 못한다는 딜레마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서 도덕적 허물보다는 능력을 더 크게 보는 거시적 시각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세종 치세에도 공직자에게 어느 정도 수위의 도덕적 잣대를 적용해야 할지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


    세종도 이 문제를 놓고 다각도로 고민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사소한 도덕적 허물보다는 능력을 더 크게 봐야 한다는 쪽이었다. 물론 일률적으로 그런 기준이 적용되지는 않았지만 국가의 핵심 인재 가운데 그런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임금은 능력에 방점을 찍고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문무를 겸비한 신하를 우대하다

    김종서는 6진을 개척했다. 그는 오랜 세월 변방 사령관으로 복무하면서 건국 초기 조선의 국방을 튼튼하게 만든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래서 흔히 무장으로 알고 있지만 문관 출신이다. 아버지가 무인이라 용맹한 기질을 타고나긴 했지만 문과 급제로 벼슬에 들었다.


    세종은 신하들의 가족까지도 세심하게 보살피는 배려의 리더십으로 신하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냈다. 임금이 자신의 노모와 아내까지 각별히 챙긴다는 사실을 알게 된 김종서는 변방 오지에서 12년간 머물면서 청사에 빛나는 혁혁한 공을 세운다. 김종서의 헌신이 없었다면 조선의 북방 경계는 한참 아래로 내려와 있었을 것이다. 세종 시대에는 임금의 탁월한 리더십 덕분에 나라를 빛낸 영웅들이 하늘의 무수한 별처럼 빛났다.


    과학과 예술 분야의 전문가를 중용하다

    세종은 실용적인 사상가이자 실천가였다. 백성의 삶을 실질적으로 향상시키고자 과학기술의 발전에 필요한 인재들을 대거 중용했다. 세종 시대를 빛낸 천재 과학자는 장영실 말고도 많지만 특히 정초와 이순지가 특출했다.


    한편, 세종은 예술 부문의 전문가들도 우대했다. 아악과 향악의 정비를 맡아 빛나는 공을 세운 박연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세종은 임금이 되지 않았으면 조선의 위대한 예술가가 되었을 터였다. 그 정도로 예술 특히 음악 분야에 조예가 깊었다. 박연이 만든 편경의 소리를 듣고 반음 높게 만들어진 곳을 정확하게 짚어낼 만큼 절대 음감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그런 재능을 지녔음에도 음악의 정비는 박연에게 전적으로 위임하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박연을 부른 자리에서 임금은 “음악의 일은 그대가 전장하라”며 업무상 재량권을 폭넓게 부여했다.



    국가 경영의 원칙

    오로지 백성을 위해 실용을 앞세우다

    국가 경영자로서 세종의 제1원칙은 실용이었다. 유교 이념을 국시로 하는 명분의 나라 조선에서 누구보다 그 명분을 수호해야 할 임금이 왜 실용을 앞세웠을까?


    세종에게는 임금으로서 섬겨야 할 하늘이 중국의 천자도 아니요, 유교 질서도 아니요, 바로 백성이었기 때문이다. 백성을 살리려면 실용이 답이었으므로, 민생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명분에 구애받지 않고 적극 추진했다.


    세종의 이러한 원칙은 정치, 경제, 외교, 국방 등 국정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적용되었다. 한글을 창제한 가장 큰 이유도 백성을 위한 쓸모 때문이었다. 직업 삼아 익혀야 할 정도로 어려운 문자인 한자를 읽지 못해 소송에서 억울한 피해를 당하고 있던 백성들을 구제하려는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한글을 창제했다.


    사대를 하는 대신 철저하게 실리를 취하다

    외교에서도 나라를 이롭게 하는 것이 세종의 가장 큰 원칙이었다. 그래서 철저하게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외교정책을 폈다. 시대 상황이나 정치 역학으로 볼 때 조선은 어차피 명나라에 사대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더구나 조선의 사대부들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당연히 지켜야 할 도리로 여겼다. 심지어는 조선 임금의 신하이기에 앞서 명나라 황제의 신하임을 자처하는 자들도 적잖았다. 세종은 이런 현실을 인정하되 오히려 역이용하여 철저하게 실리를 추구했다.


    재난에 대비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다

    세종 8년(1426) 2월, 한양 도성에는 큰 화재가 발생했다. 임금은 강원도 횡성에서 강무(사냥을 겸한 군사훈련) 중이었고 도성에는 왕비와 일부 대신들만 남아 있었다. 한성부 남쪽에서 시작된 불은 순 식간에 한양 도성 전체로 번졌고, 정부 기관과 백성들의 민가가 불에 탔다.


    소식을 접한 임금은 즉시 환궁하여 복구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가장 먼저 취한 조치는 이재민 구호조치였다. 화재를 입은 집을 조사시켜 식구 수대로 적절한 구호물품을 내리고 복구에 필요한 목재를 지원하도록 했다. 그리고 화상 환자는 속히 의원 치료를 받도록 하고, 사망자 가족에게는 장사에 필요한 물품을 지원하도록 했다.


    중요한 사실은 임금의 대책이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화재를 계기로 도성과 궁궐의 화재 예방 매뉴얼을 만들도록 했고, 화재 발생 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도로를 넓히고 소방 방재 시스템을 갖추도록 했다. 한양의 행랑에 방화벽을 쌓고 일정한 간격으로 우물을 파도록 했고, 종묘와 궁궐, 종루에 불을 끄는 기계를 설치하도록 했다. 특히 궁궐은 화재가 나면 무방비 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는 구조여서 이에 대한 구체적인 조치를 지시했다.


    신중하게 결정하되 원칙은 끝까지 지키다

    공법은 미리 정해놓은 일정한 세율에 따라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제도로, 관리들의 횡포를 줄여 조세의 공정을 꾀하고 국가의 세수를 늘리는 장점이 있었다. 공법 도입 과정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태도로 신중하고 또 신중했다는 점이다.


    세종은 새로운 제도의 도입에 따른 부작용을 면밀하게 검토했으며, 그런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전국 백성을 상대로 여론조사까지 실시했다. 공법 도입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의 하나로 조세 개혁을 과거시험의 책문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젊은 선비들의 머리에서 나오는 참신한 아이디어를 발굴하기 위한 조치다.


    세종은 17만여 명의 백성을 상대로 대규모 여론조사를 실시하여 공법 도입에 따른 찬반 의견을 구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세종 18년(1436) 상정소(詳定所)를 설치하여 세목과 세율을 정하도록 했다. 상정소는 새로운 법전법규를 제정하거나 정책제도를 마련하기 위해 설치하는 임시기구다. 오늘날의 ‘태스크포스 팀’이라고 보면 된다.


    임금이 과거시험의 책문으로 제시한 이후 무려 9년 만에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기 위한 공식기구가 설치된 것이다. 공법을 도입하기로 결정이 났지만 도입에 따른 부정적 측면을 우려하는 신하들의 목소리도 이어졌다. 하지만 원칙을 정한 후에는 공법 도입 자체를 유보하자는 주장은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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