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죽음과 자본주의의 미래
 
지은이 : 앵거스 디턴 외(역: 이진원)
출판사 : 한국경제신문
출판일 : 2021년 07월




  • 관심받지 못한 사람들의 죽음을 세상에 드러냈다는 점과 더불어 죽음의 원인을 정교하게 분석했다는 데 이 책의 미덕이 있다. 심층 원인에 대한 분석은 자본주의 시스템, 사회 구조에 대한 해부로 나아가는데, 경제학 연구방법론에 큰 영향을 끼친 저자 앵거스 디턴과 보건경제학 분야에서 다수의 상을 수상한 저자 앤 케이스는 소득 불평등, 경기 침체 등 경제적 요소에서 절망사의 원인을 찾는 손쉬운 결론과 거리를 둔다. 불평등 등 경제적 요소가 끼친 영향을 배제해서는 안 되지만, 그게 왜 전부가 아닌지 하나하나 논증해간다.


    절망의 죽음과 자본주의의 미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과 낮은 사람들의 생사

    켄터키는 주민들의 교육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주에 속한다. 45~54세 사이 백인 중 불과 4분의 1만이 학사학위를 갖고 있다. 하지만 4년제 대학 졸업장이 없는 사람들에게 점점 더 위험하게 변하고 있는 이런 패턴이 미국의 모든 주에서 재연되고 있다. 교육은 분명 누가 무슨 이유로 죽는지를 이해하는 열쇠다. 동맥과 폐에서부터 머리, 간, 혈관 이상은 주로 대학을 다니지 못한 사람들의 사인이다. 우리가 이런 고졸 이하 학력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추가적 위험을 이해하려면 사람들의 삶에서 교육이 하는 역할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생에서 교육의 의미

    대학을 나옴으로써 얻는 가장 확실할 이점은 소득이 늘어나고, 소득이 늘어나면 더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1970년대 후반 대졸 이상의 교육을 받은 노동자들의 소득은 고졸 노동자들의 소득보다 평균 40퍼센트가 높았다. 하지만 2000년이 되자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이러한 ‘소득 프리미엄(earnings premium)’은 무려 80퍼센트로 두 배가 늘어났다.


    반면 이 기간 대학을 중퇴한 미국 노동자들의 소득은 고졸 노동자들의 소득에 비해 15~20퍼센트 정도 높은 수준에 머물면서 소득 프리미엄엔 비교적 큰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1970년대 초반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진학을 포기한 사람들은 20세기 말에 그들이 얼마나 많은 소득을 포기해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과거와 달리 대학 학위를 요구하는 직업이 많이 늘어났기 때문에 대학을 다니지 못한 사람들에게 돌아갈 기회는 줄어들고 있다. 대졸자들에게 돌아가는 기회가 늘어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미국의 실업률이 역사적 저점인 3.6퍼센트에 머물렀던 2017년에도 고졸자 실업률은 대졸자 실업률에 비해서 근 두 배가 높았다.


    2017년 25~64세 사이 대졸 이상 학력자들의 취업률은 84퍼센트였던 반면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추가로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의 취업률은 68퍼센트에 그쳤다. 미국 노동자들의 소득은 통상 45~54세 사이에서 정점을 찍는다. 2017년 이 연령대에 속한 미국 고졸 이하 학력자들의 25퍼센트가 실업자였지만 대졸 이상의 학력자 중에는 실업자가 10퍼센트에 그쳤다는 점은 심히 우려스럽다.


    기업과 정부가 어느 때보다도 정교하고 복잡한 기술을 도입하고 있고 그들의 컴퓨터 사용이 크게 늘어나면서 고숙련, 고능력 노동자들에 대한 수요가 확대됐다. 이것이 교육 수준이 높고 낮은 사람들 사이의 소득과 고용 격차가 생기게 된 일부 원인일 수 있다.


    헤지펀드 트레이더나 실리콘밸리 기업가나 CEO나 일류 변호사나 의사 등 최상위 계층에 속하는 운이 좋으면서 능력 있는 소수는 사실상 무제한으로 소득을 올릴 수 있고, 그럴 가능성은 예전보다 훨씬 더 커졌다. 2018년 기준 미국 350대 기업 CEO의 평균 소득은 1,720만 달러로 노동자의 평균 소득보다 278배가 높았다. 1965년에는 이 차이가 20대 1에 불과했다.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최고 소득을 올린 사람들은 ‘자본’을 통해 얻었다. 즉 그들은 과거 시대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은 사람들이었다. 이자와 배당금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먹고살기 위해 일한다는 것은 ‘수치심의 증표’였다. 딸을 제조업자와 결혼시키는 것보다 더 큰 불명예는 없었다.


    오늘날 최고 소득은 재산을 물려받은 사람이 아니라 CEO처럼 고소득자나 컨설턴트, 의사, 변호사처럼 독자적으로 일하는 고숙련 사업주들이 올린다. 가족이나 출생이 아니라 교육이 그러한 직업을 갖는 데 반드시 필요한 관문이다.


    흑인과 백인의 죽음

    최소 2013년까지 지난 25년 동안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우리가 백인들 사이에서 기록해왔던 절망사의 무자비한 증가로 고통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20세기 초 흑인들은 흡연 형태의 강력한 코카인인 크랙 코카인과 HIV의 등장으로 촉발된 죽음의 위기에 직면했다.


    이런 위기는 비숙련 흑인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일자리를 잃던 시기가 지나자 일어났다. 도심에서 제조업과 운송업 분야의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사회의 대변동, 구직 포기, 가족과 사회생활의 붕괴가 야기됐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이 이야기는 지난 25년 동안 교육 수준이 낮은 백인들에게서 일어났던 일과 많은 면에서 유사하다.


    노동시장이 가장 숙련도가 낮은 노동자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흑인들이 가장 먼저 피해를 봤다. 그들의 숙련도가 낮았다는 점도 일부 이유였겠지만 오래된 차별화의 패턴도 역시 이유였다. 그로부터 수십 년 뒤에는 백인의 특권에 의해 보호받았던 덜 교육받은 백인들이 다음 차례였다. 기회의 부족과 미덕의 부족 중에서 무슨 이유 때문이냐를 둘러싼 논쟁들도 두 에피소드에서 놀랄 만큼 비슷하다. 즉 흑인과 백인 모두에게 일어난 일은 ‘내용’보다는 ‘시기’만 좀 더 달랐을지 모른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겪는 절망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 빈민가에 거주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제조업과 운송 등 구 경제 산업에 종사했다. 전후 외국과의 경쟁,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의 전환, 제조업 중심지로부터 관리와 정보 처리 중심지로 도시의 진화가 시작되면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가장 진보한 영역에서 상처를 입었다. 이것은 실업과 사회 해체에 관한 이야기다.


    윌슨에 따르면, 도시에 거주하던 흑인들은 “상품 생산에서 서비스 생산 산업으로의 전환, 저임금과 고임금 분야로 노동시장의 양극화 심화, 기술 혁신, 제조 산업의 도시 외곽으로의 이전 등 구조적 경제 변화에 취약한 곳에서” 주로 높은 취업률을 보였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1968년 부동산의 매매, 임대, 융자에 있어 인종, 종교, 국적, 성별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공평주거권리법(Fair Housing Act)이 통과되자 더 많은 교육을 받고 성공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빈민가에서 벗어났고, 남은 흑인들은 가족의 붕괴와 궁극적으로 범죄와 폭력을 포함한 광범위한 사회 병리들에 점점 더 자주 노출되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거주하는 빈민가는 1980년대에 크랙 코카인으로 위기를 맞았다. 이 코카인의 유행은 현재의 오피오이드 유행과 대조적인 면과 유사한 면을 모두 갖고 있다. 크랙은 값이 싸고 중독성이 강해 곧바로 황홀감을 느끼게 만들어줬다. 그러자 중독자들이 코카인 구입에 필요한 돈을 구하려 하면서 범죄율은 상승했다.


    크랙 거래상들이 길모퉁이에서 판매 장소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동안 젊은 흑인들의 자살률은 급등했다. 지금도 구할 수 있는 크랙 코카인이 여전히 골칫거리지만 1990년대 중반 이것의 유행이 크게 꺾인 것도 사실이다.


    그 이유에 대해선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지만 크랙 코카인에 의존했던 사람들이 나이를 먹었고, 그것이 가족과 친구들의 삶을 파괴하는 모습을 지켜본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그것에 대한 거부감이 커졌다는 점 모두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크랙 코카인 때문에 빈민가에서 구할 수 있는 총기 수가 영구히 늘어나는 등 그것이 계속해서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가 살펴봤듯 크랙 코카인 유행으로 인한 중독 여파로 펜타닐 사망률이 상승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겪은 불행의 원인은 주로 흑인 문화의 붕괴 때문이었다. 대니얼 패트릭 모이니(Daniel Patrick Moynihan)은 하버드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이자 1977~2001년 사이 뉴욕주 민주당 상원의원을 지냈고 존슨과 닉슨 정부의 자문관으로 활동했다.


    그는 1965년에 쓴 유명한 보고서 <흑인 가족(The Negro Family)>에서 아버지 없는 가족을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회의 핵심 문제로 간주하면서 이런 결손 가족이 생기게 된 원인을 노예제도에서 찾았다. 문제의 근본적 원인이 기회의 부족에 있지는 않다는 생각에는 정치과학자인 찰스 머리(Charles Murray)도 공감했다.


    그는 저서 ‘기반 상실(Losing Ground)’에서 빈곤 퇴치를 위해 기획된 복지 혜택이 근로 욕구를 해치고 기능장애적 행동을 유발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나중에 쓴 책 ‘양극화(Coming Apart)’에서는 교육 수준이 낮은 백인들이 현재 겪고 있는 많은 문제의 원인을 그들이 가진 미덕, 즉 부지런함의 결여에서 찾았다. 다시 말해 그들이 생계를 유지하거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하는 데 대한 관심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자살, 약물 그리고 술

    2017년 미국인 15만 8,000명이 자살, 약물 과다복용, 알코올성 간질환과 간경변 등 우리가 말하는 ‘절망사’로 사망했다. 이는 매일 만석으로 비행 중인 보잉(Boeing) 737 맥스 여객기 세 대가 추락해 승객 전원이 사망하는 것과 같다.


    세 종류의 절망사 모두 사람들의 ‘행동’과 관련된다. 무엇보다 자해로 인한 죽음인 자살이 그렇지만, 약물이나 술을 너무 많이 내지는 오랫동안 복용하거나 마셔도 죽는다. 오래전 에밀 뒤르켐은 다른 절 망사도 마찬가지지만 자살을 이해하려면 개인을 벗어나 사회, 특히 사회 구성원들에게 더 이상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주지 못하는 사회의 붕괴와 혼란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뒤르켐은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일수록 자살 확률이 높다고 믿었다. 그러나 현재 미국에서 일어나는 자살과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고통과 질병과 연결해 분석해보면 자살은 주로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 사이에서 증가했다. 역사적으로 특이한 일일 수도 있다. 역설적으로 보면 이것은 뒤르켐의 주장과도 일치하는데, 현재 혼란에 빠진 것은 교육 수준이 낮은 백인들이 사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가 예상했듯 인생을 휩쓸고 지나간 사회적, 경제적 격변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무엇이 자살을 유발하는가?

    다른 절망사들처럼 자살도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의 비히스패닉계 백인들 사이에서 증가하고 있다. 이것은 15~74세 사이의 모든 연령대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현상이며, 그 결과로 다른 부유한 나라들에 비해 자살률이 예사롭지 않게 낮았던 미국의 자살률은 현재 그들 중 가장 높은 편에 속하게 되었다.


    여성은 남성보다 자살할 확률이 훨씬 낮은데, 그들은 총기 대신 약물처럼 덜 효과적인 수단을 선택하거나 남성보다 사회적 고립에 덜 취약해서 그럴지 모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백인 여성의 자살률은 백인 남성의 자살률과 같이 상승하고 있다.


    적어도 믿을 만한 자료가 있는 다른 나라에서는 2000년 이후 자살률이 떨어지고 있다. 아시아, 특히 중국에서 더 많은 자율성을 갖고 더 도시화 된 지역에서 거주하는 젊은 여성들, 전 소련의 더 안정적인 삶을 사는 중년 남성들, 그리고 더 재력이 풍부한 노인들 사이에서 거의 보편적으로 자살률이 하락하면서 수백만 명이 목숨을 구했다. 계속해서 상승 추세를 나타내는 미국 백인들의 자살률은 세계적으로 예외적이다.


    단순한 자살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 누가 왜 자살할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방법도 없다. 개인의 경우 최고의 자살 예측 방법은 이전의 자살 시도 여부를 확인하는 것인데, 이 방법은 간병인들이 알아두면 유용하지만 자살이 증가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고통, 외로움, 우울증, 이혼, 또는 실직처럼 자살에 잠재적으로 기여하는 요인들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요인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적 변화로 인해 더 만연해진다면, 우리는 특정 국가의 자살률이 상승하고 있는 이유에 대한 개연성 있는 설명을 해 줄 수 있게 될 것이다.


    개인의 행동 배후에 숨어 있거나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원인도 있다. 우리는 이미 뒤르켐의 견해를 인용했다. 자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인만이 아니라 사회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는 주장이 담긴 그의 글은 사회학의 이정표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종종 언급되듯 경제학자들은 사람들이 자살하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지만 사회학자들은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애쓴다. 자살에 대한 설명의 경우 사회학자들이 경제학자들보다 오히려 더 성공적이었다.


    경제학자들은 나름대로 ‘효용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람들이 자살한다고 주장하는 ‘합리적’ 자살 이론을 제시했다. 우리는 이것을 “오늘은 죽기 좋은 날(Today is a good day to die)” 이론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오늘 죽는 게 나쁘지만 앞으로 고통이나 아픔을 겪게 되는 것보다는 덜 나쁠 수 있을지 모른다.


    쉽게 조롱의 대상이 되곤 하지만, 그리고 종종 그러는 게 맞지만, 그러한 설명이 종종 통찰력을 주기도 하나 우리가 보게 되듯 그것이 우리가 자살에 대해 알고 있는 많은 것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뒤르켐의 설명은 오늘날 백인 노동자 계급 미국인들의 경제, 가족, 공동체 생활에서 일어나는 것 같은 사회적 혼란을 지적한다.


    미국에서 자살률이 높은 주들은 또한 사람들이 가장 고통을 많이 호소하는 주들이다. 미국 내 수천 개의 카운티에서 같은 패턴이 나타난다. 어제 ‘하루 중 많은 시간’ 동안 육체적 고통을 겪었다고 보고하는 인구 분율이 높은 곳은 자살률이 더 높은 곳들이다. 공간적 증거에 의존하는 이러한 결과로 특정 집단이 가지는 경향 및 추세를 집단에 속하는 개개인에게 적용하는 일반화의 오류, 일명 ‘생태학적 오류(ecological fallacy)’에 빠질 수 있다.


    우리는 고통이 자살의 주요 위험 요인이라고 믿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많은 고통을 느끼는 장소에서 자살이 많이 일어나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발견은 고통이 자살률 상승의 원인이라는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한다.


    로키산맥에서 울타리를 고치거나, 동물과 함께 일하거나, 관개 관을 옮기는 사람들은 어깨가 아프거나, 무릎이 좋지 않을 수 있으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인구밀도가 낮아 자살 위험이 더 클 수 있다. 이 예에서 우리는 여러 곳에 걸쳐서 통증 수준과 자살률 사이의 정적 관계(positive correlation), 즉 두 변인이 동시에 증가하는 관계를 찾을 수 있겠지만, 이 경우 고통은 사람이 거의 없는 곳에서 농업이 주된 직업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것이므로 사회적 고립에서 오는 높은 자살 위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집계된 지리적 데이터에 기반한 분석은 이런 사실을 절대 배제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리적 증거는 우리가 다른 출처를 통해 알게 된 것에 대한 유용한 점검 수단이다. 뒤르켐은 지리적 증거에 크게 의존했는데, 분명 심문이 불가능한 사자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을 때는 어쩔 수 없었을 수 있다.


    실업자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포함한 실업률이 자살을 예측해 주는 것으로 밝혀졌다. 경제활동을 중단하는 것도 위험하다. 두 가지 모두 사회적 격변과 자살에 관한 뒤르켐의 생각과 맞아떨어진다. 실제로 뒤르켐은 ‘경제 위기’가 자살을 유발한다고 생각했다. 단, 그가 말하는 경제 위기에는 경기 둔화뿐 아니라 호황도 포함됐다. 소득 수준 자체가 아니라 소득의 기복에 따른 혼란이 중요했기 때문에 소득이 자살에 미치는 영향은 분명하지 않을 수 있다.



    다시 쓰는 자본주의의 미래

    삶을 무너뜨리는 미국의 의료 서비스

    미국인들은 의료비로 막대한 돈을 쓰고, 그것은 경제의 거의 모든 부문에 영향을 미친다. 장소 불문하고 의료비는 비싸므로 부유한 나라들이 시민의 생명을 연장하고 고통과 아픔을 줄여주기 위해 재정의 상당액을 투입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그러나 미국은 상상할 수 있을 만큼 이런 일에 서투르다.


    우리의 주장은 의료 실수나 부실한 치료나 오피오이드 과다처방이나 제때 치료하지 못하는 실수 등 의료계가 간혹 저지를 수 있는 ‘직접적인’ 피해와는 무관하다. 그보다는 터무니없이 비싸고 부적절한 의료비가 사람들의 삶과 일에 미치는 ‘간접적인’ 피해에 관한 것이다.


    2017년 국방비의 약 네 배와 교육비의 약 세 배에 이르는 미국 GDP의 18퍼센트, 1인당 1만 739달러를 소진하는 미국의 의료 시스템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불필요하게 갉아먹고 있다. 의료비 때문에 집에 가져갈 실소득뿐만 아니라 구매 가능액도 모두 감소한다.


    반면 의료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소득은 올라가고 이 산업 규모는 필요 이상으로 커진다. 종업원들의 눈에 잘 안 띄는 고용주가 지원해주는 건강 보험은 임금 상승을 막고, 특히 숙련도가 떨어지는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파괴하며, 좋은 일자리를 나쁜 일자리로 대체한다.


    사람들이 더 나쁜 직업을 가지면 그들의 임금은 하락한다. 의료비는 또한 보험에 가입하지 않았거나 보험을 부족하게 든 개인들에게 직접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고용주 부담금(copayment), 공제, 그리고 직원 본인 부담금을 통해서도 영향을 미친다.


    이 밖에도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 비용을 부담하는 주정부와 연방정부 모두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정부는 더 많은 세금을 거둬야 하고, 인프라와 빈곤한 미국인들의 의존도가 특히 높은 공교육 등 다른 서비스의 제공을 줄여야 하고, 미래의 경제 성장을 위협할 적자재정을 운용하면서 그로 인한 부담을 우리 아이들과 미래의 납세자들에게 전가한다.


    의료비 지출과 기대수명

    미국의 의료비는 세계 최고가지만, 미국인의 건강은 부유한 국가 중에서 가장 나쁜 축에 속한다. 최근 죽음이란 유행병이 일어나고 기대수명이 감소하기 훨씬 오래전부터 그래왔다. 의료 서비스 제공 비용은 경제에 큰 부담을 주고 장기적 임금 정체를 초래한다.


    그것은 또 로빈 후드 이야기에 나오는 노팅엄의 보안관식 ‘역 재분배(reverse redistribution)’의 좋은 사례다. 의료 산업은 건강 개선에 아주 뛰어나지는 않지만, 병원을 흑자 경영하는 일부 성공한 개업의를 포함한 의료 서비스 제공자들의 부를 늘려주는 데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또 제약 회사, 의료 기기 제조 업체, ‘비영리’ 보험사를 포함한 보험사 및 더 큰 규모의 독점적 병원의 소유주와 임원들에게도 막대한 부를 안겨준다.


    누가 돈을 내는가?: 거액의 의료비 지출이 초래한 결과

    우리가 의료비 청구서의 지불 주체부터 따져보기 시작한다면 개인과 연방정부가 각각 28퍼센트씩을 내고, 기업이 직원들을 대신해서 20퍼센트를 낸다. 그리고 17퍼센트는 주와 지방정부가 낸다. 기타 민간업자들이 나머지 7퍼센트를 낸다.


    2017년에는 국민의 9퍼센트, 즉 2,970만 명이 보험에 가입하지 않았고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개인은 직접 내야 하는데, 내야 할 금액은 종종 정부나 보험사에 청구되는 것보다 훨씬 더 높다. 의료비를 낼 능력이 안 되는 사람들은 저소득층을 상대로 제공되는 무료 내지 저렴한 의료 서비스를 받거나 제3자로부터 돈을 빌려 내다가 수년간 빚쟁이들에게 쫓길 수도 있다.


    건강보험은 당신의 건강이 아니라 의료 시스템으로부터 당신의 지갑을 지켜준다는 지적이 자주 제기돼왔다. 보험 가입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종종 긴급하지 않은 치료를 포기한다. 의사 진료를 받지 않는다면 그들은 항고혈압제나 스타틴처럼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예방책을 쓸 수 있는 가능성이 낮아진다. 개인은 의료비를 내느라 다른 물건을 사거나 미래를 위해 저축할 수가 없게 됨으로써 미국의 가계 저축률을 떨어뜨린다.


    고용주가 들어주는 보험은 그 혜택을 받는 사람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많은 직원들은 고용주 부담금(평균 2만 달러인 가계 보험료의 나머지 71퍼센트)이 공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회사에 공짜가 아니며, 기업들이 얼마나 많은 임금을 줄 준비가 되어 있는지와 얼마나 많은 노동자를 고용할지에 영향을 미친다.


    채용 결정을 해야 하는 고용주 입장에서는 중요한 것이 임금이 아니라 회사가 고용하기 위해 내야 하는 건강보험 및 기타 복지 혜택에 드는 돈이다. 고용주의 기여금은 임금 자체가 그렇듯 ‘임금 비용(wage cost)’이기 때문에 평균 1인당 보험료가 1999년 2,000달러에서 2017년 6,896달러로 오르는 것처럼 보험료 상승은 임금 인상 억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직원들은 그들이 선물을 받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고용주가 누구에게 돈을 주느냐가 아니라 직원들을 위해 내주는 돈의 총액이 얼마냐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거의 깨닫지 못하고 있다. 직원은 그 ‘선물’이 임금에서 일부나 전체가 공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 있다. 앞의 예에서, 고용주가 내주는 보험료가 오르지 않았다면 2009년 4인 가족은 9만 9,000달러 이상을 벌었을 것이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큰 폭의 건강보험료 인상에 직면한 고용주들은 몇몇 자리에는 더 이상 건강보험을 적용해주지 못하겠다거나, 아니면 더 극단적으로 감원을 하거나 적어도 해야 할 일 일부를 아웃소싱하기로 결정할지 모른다.


    우리가 만난 한 임원은 그의 회사가 어떤 한 해에 건강보험료를 대폭 인상하게 됐을 때 경영 컨설턴트들의 자문을 구했더니 컨설턴트들이 아예 불필요한 노동자들이나 식품 서비스, 경비, 관리, 운송 활동처럼 외주를 줄 수 있는 자리를 찾아내 ‘감원’을 도와줬다고 설명했다.


    이때 아웃소싱 회사들이 임금과 건강보험료를 제시했다면 그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지만 책임을 지지 않을 수도 있다. 아웃소싱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대기업에서 일하는 것 보다 덜 매력적이고 덜 의미 있는 선택인 경우가 많다.


    의료비는 급여가 낮은 노동자를 고용할 때 드는 총임금에서 더 큰 몫을 차지한다. 15만 달러의 급여를 받는 고소득 직원의 경우, 회사가 내줘야 할 평균 가족 보험료는 노동자를 고용하는 데 드는 비용의 10퍼센트 미만이지만, 중위소득의 절반인 저임금 근로자의 경우 이 비용이 60퍼센트에 달한다. 이것은 의료비 상승이 좋은 일자리를 더 나쁜 일자리로 바꾸고 일자리를 아예 없애게 되는 사례다.


    고용주가 내주는 건강보험료는 의료 산업의 규모뿐만 아니라 의료비 상승에도 기여한다. 고도로 숙련되고 급여가 높은 노동자들은 보험에 가입할 확률이 높기 때문에, 보험은 그들의 필요와 기호에 맞게 설계되어 있다.


    고용주가 내준 보험료는 과세 대상 소득으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에 고용주는 직원들이 세후 소득에서 보험료를 내게 하기보다는 자신이 비과세 대상인 복지 혜택을 통해 더 고급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하게 된다. 이로 인해 연방정부는 약 1,500억 달러의 세금을 덜 걷게 되지만 고용주와 직원들이 더 높은 의료 혜택을 전제로 급여 협상을 하도록 장려하게 된다.


    빅터 훅스 교수의 지적대로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예산을 고려해볼 때, ‘월마트’식 건강보험을 선호할지라도, 정부는 ‘홀푸드(Whole Foods)’식 건강보험을 권장하고 ‘월마트’식 건강보험을 단념시키고 있는 것 같다. 고용주 중심의 의료 시스템은 접근성과 제공되는 의료 서비스 측면에서 모두 고소득 노동자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