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티파이 플레이
 
지은이 : 스벤 칼손 외(역:홍재웅)
출판사 : 비즈니스북스
출판일 : 2020년 11월




  • 전 세계 1위 오디오 스트리밍 기업인 스포티파이가 국내에 곧 진출할 것이라는 뉴스가 연일 쏟아지고 있다. 애플의 아이폰이 국내에 처음 출시될 때 지각 변동이 일어난 것처럼 국내 음원 스트리밍 시장에 커다란 변화를 몰고 올 것으로 예상되기에 관련 업계에는 긴장감이 가득하다. 삼성전자와의 파격적인 파트너십으로 이슈가 되기도 했던 스포티파이는 대체 어떤 기업이길래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뛰어넘는 콘텐츠 공룡이라 불리는 걸까?


    스포티파이 플레이


    시작_ 음악을 해방시킨다는 혁명적인 아이디어가 실행에 옮겨지기까지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를 기술로 실현시키다

    2006년 여름 내내 에크와 엔은 스포티파이의 동료를 구하려고 친구와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에크는 스타돌에서 자신을 도왔던 컨설턴트들 가운데 몇 명을 설득했다. 왕립 공과 대학교 출신의 많은 개발자가 동년배 학생들 가운데 가장 똑똑하다고 알려졌던 엔과 일하기를 원했다.


    그렇게 해서 모인 그들은 자신들의 새 출발을 축하하려고 8월에 바르셀로나로 날아갔다. 그들은 스페인식 애피타이저인 타파스를 먹고 레드 와인을 마셨다. 이 자리에서 에크와 로렌손은 음악 그리고 어쩌면 영상의 유통이 가능한 토렌트에 기반한 법적 플랫폼을 만들고 싶다고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불법 다운로드를 척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무료 서비스뿐이었다. 무료 서비스가 먼저 나오는 것이 당연했으며 상업적인 저작권은 나중 문제였다.


    대부분의 음반사 대표들은 ‘무료’라는 단어 하나만 들어도 말이 안 된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 마련이었지만, 이 창업자들은 이전에 저작권 문제로 음반사와 협상을 벌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상대가 디지털 배급과 특히 P2P 기술에는 가차 없이 반대하는 세력임을 그들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스포티파이에는 세 가지 특별한 점이 있었다. 첫째는 로렌손의 경험과 대자본, 둘째는 사업에 대한 에크의 통찰력, 셋째는 스웨덴 최고의 개발자들을 모은 엔의 능력이었다.


    버퍼링 없는 플레이어를 향한 도전

    에크가 기술 담당 이사인 엔에게 전달한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 스포티파이의 플레이어는 번개처럼 빨라야만 했다. 그리고 시장의 다른 서비스들처럼 절대로 해킹당해서도 안 되었다. 마지막으로 음악이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처럼 흘러야 했다. 리다르가탄 아파트에서는 누구나 버퍼링 때문에 발생하는 지체 현상을 참아 내기 힘들어했다. 스포티파이 초기 버전에는 “기다리는 것은 쿨하지 않다.”라는 문구가 있을 정도였다.


    플레이어는 토렌트 기술에 기반해야 했다. 사용자가 음악을 들을 때 노래 파일을 조각내어 네트워크로 접속된 컴퓨터들에서 한꺼번에 다운받게 하도록 말이다. 그리고 스포티파이는 파이러트 베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아티스트와 음반사에 광고 수익을 배분할 생각이었다. “우리 서비스는 광고 수익으로 운영되므로 사용자 여러분은 어떤 비용도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포티파이 웹 사이트에는 초창기부터 이 같은 공지가 있었다.


    0.2초 만에 플레이되게 하라

    스포티파이의 엔지니어들은 최고의 품질을 위해서 전력 질주했다. 사용자가 어떤 곡을 원하면 즉시 찾아서 들려줄 수 있어야 했다. 모든 게 속도와 관련 있었다. 그 속도는 200밀리초라는 숫자 하나로 설명이 되었다. 니에멜래는 최소 200밀리초, 즉 0.2초 안에 음악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트워크의 현재 속도(대역폭)는 곡들을 재생하는 것보다 다운로드를 받는 게 더 빠를 정도로 충분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 곡이 바로 재생되어야 하고 나머지 곡들이 완전히 다운되는 동안 그 곡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나와야 했다.

    현존하는 토렌트 시스템은 마치 토스트 된 식빵처럼 음악 파일을 수직으로 잘랐다. 일단 모든 조각이 제자리를 잡고 나면 곡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순서대로 플레이되었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서 마치 햄버거 속 재료들처럼 음악 파일을 수평으로 자르면 각각의 조각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 곡의 가로 부분을 구성하는 셈이었다. 그러면 프로토콜은 어떤 특별한 순서로 조각들을 취할 필요가 없어서 곡을 바로 듣는 것이 가능해진다. 당장에 그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팀원들은 아연실색했다. 잡동사니 방에 있는 서버에서 그 조각들을 스트리밍하자 노래가 바로 들렸다.


    그런데 인터넷 연결이 원활하지 않더라도 뮤직 플레이어는 제 기능을 해야 했기에 사용자가 다음으로 듣고 싶어 하는 곡들을 추적해 다운받거나 버퍼 기능을 하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사용자가 선택할 첫 번째 곡은 당연히 예측하기 어렵다. 하지만 플레이리스트의 곡들은 가능성 높은 후보들이므로 미리 다운받아서 컴퓨터의 캐시 메모리에 일시적으로 저장해 두었다.


    팀원들은 속도가 빠른 스포티파이의 자체 서버에서 예측이 불가능한 선택 곡들을 스트리밍하는 방법을 썼다. 먼저 어떤 곡에 대한 청취가 시작되면 네트워크에 연결된 다른 사용자를 통해 조각들을 다운로드하면서 P2P 모델로 넘어가게 조치를 취했다.


    불법 공유를 막을 수 있는 탁월한 플레이어를 위하여

    음반사는 어느 때보다도 더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음반 업계를 구하고자 하는 젊은 사업가들과 함께 매주 회의를 했으나, 어느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2003년 이래로 아이튠즈 스토어(아이튠즈 뮤직 스토어는 음악을 비롯하여 영화, 드라마, 게임 등을 판매하면서 2006년 9월에 아이튠즈 스토어로 명칭이 변경되었다.-옮긴이)에서는 노래가 20억 회나 다운로드되었다. 디지털 판매는 이렇듯 성장했지만, 추락하는 CD 판매 수입을 보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또한 파일 공유자들을 쫓는 사냥도 진행되고 있었다. 음반사의 법무 팀은 라임와이어(Limewire)와 아이메시(iMesh) 같은 불법 복제 서비스들뿐만 아니라 수만 명의 사용자를 고소했다. 그들의 목표는 누구든 불법 복제를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스웨덴 검찰은 파이러트 베이의 창업자를 상대로 기소를 준비했다.


    한편 스포티파이는 파이러트 베이를 적이 아닌 경쟁사로 보았다. 에크는 사용하기 더 수월한 압도적으로 좋은 제품을 만들고 싶었다. 사용자가 모든 곡을 무료로 듣고, 음반사와 음악 제작사는 광고 수익을 얻게 하려고 했다. 로스앤젤레스 출장에서 스포티파이 창업자들은 버뱅크에 위치한 워너 브라더스 레코드의 톰 웰리(Tom Whalley) 사장과 회의를 하게 되었다. 소문에 따르면 무료로 제공되는 음악은 음반 업계를 절대로 구하지 못할 거라고 심한 비난을 받으며 회의가 끝났다고 한다. 이 같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에크의 비전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마침내 음반사 대표들은 에크의 아이디어를 신중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굳은 신념으로 음반사를 설득하다

    에크는 전 세계 음악에 대한 저작권을 확보하는 데 6개월 정도가 걸릴 거라고 예상했다. 구글 검색을 해 본 그는 스포티파이의 연 수익 가운데 5퍼센트 정도 지불하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내 단단히 잘못 짚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라스트FM이나 판도라처럼 라디오 서비스에 기반을 둔 기업에 필요한 무선 통신 저작권과 자신이 필요로 하는 유선 통신 저작권이 다르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데이비스는 에크를 돕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분야에 뛰어들었다. 광고에 바탕을 둔 해결책은 이제 막 기반이 닦이기 시작했다. 2006년 9월에 워너 뮤직은 유튜브와 계약을 맺었다. 유튜브는 이용자들에게 뮤직비디오를 보여 주고 광고 수익의 일부를 가져가는 사업을 시작한 참이었다. 몇 주 뒤 구글은 17억 달러라는 기록적인 액수로 이 비디오 플랫폼을 사들였다.


    에크는 빨리 습득하고 거침이 없었다. 음반사와의 회의에서 그는 스포티파이가 1990년대 말에 음반사가 누렸던 전성시대를 재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스포티파이가 죽어 가는 음반 사업 분야와 수천만 소비자 사이의 연결고리로서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다. 음반사 사장들은 때때로 에크를 건방지게 여겼지만 이 말에는 귀를 기울였다.


    “인터넷에 대해 눈감아서는 절대 안 됩니다. 파일 공유자들을 끝까지 고소한다고 이길 수 있는 싸움도 아닙니다.”



    경쟁_ 애플과의 피 튀기는 전쟁이 시작되다

    모든 음악이 무료인 스트리밍 서비스

    2008년 9월 27일 스포티파이는 스톡홀름의 한 살롱에서 성대한 파티를 개최했다. 고풍스러운 파티장은 초록색 헬륨 풍선으로 장식되었다. 바 카운터들 가운데 한 곳의 안쪽에서는 손님들이 ‘기타 히어로’ 게임을 했다. 전 세계가 금융 위기라고 난리였지만 스포티파이는 탄탄한 자금줄을 확실하게 챙겨 놓은 뒤였다. 이제 동료들은 정식 출범을 기원하면서 축배를 기울일 것이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아직 서비스가 출시 전이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저작권 합의까지는 조율할 세부 사항이 몇 가지 남아 있었다.


    수개월간 한손과 이바손은 스포티파이의 저작권 협상을 도맡았다. 음반사는 서비스 대상 국가와 지불 방식에 대하여 새로운 요구 사항을 끊임없이 제시했다. 협상 흐름상 스포티파이의 수입 가운데 약 55퍼센트가 그 곡을 소유한 음반사로 갈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외에 15퍼센트가 작곡가의 저작권을 관리하는 뮤직 퍼블리셔의 몫이었다. 그러면 최대로 어림잡았을 때 스포티파이의 활동에 30퍼센트의 자금을 공급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을지도 몰랐다. 아직 수입이 보이지 않으니 음반사가 여러 종류의 보증을, 예를 들어 스트리밍당 최소 요금 같은 것을 철회할 여지가 있었다. 이렇게 따지면 스포티파이는 광고나 구독을 판매하지 않아도 돈을 벌어들이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스포티파이는 예상되는 수입을 음반사에 선불로 지급하는 계약을 했다. 스트리밍 서비스가 목표치에 도달하지 못할지라도 음반사는 그 돈을 받을 수 있었다. 사용자가 기대보다 더 적게 접속하면 스포티파이로서는 과도한 금액이 지출되는 셈이었다. 실제로 스포티파이가 서비스를 시작한 첫해에는 음반사에 지불하는 금액이 너무 커서 스포티파이의 전체 수익을 훨씬 초과해 버렸다.


    스포티파이, 애플을 흔들다

    몇 주 뒤 음반사들이 계약서에 차례로 서명을 완료했다. 10월 7일에 마케팅 담당 이사인 벤츠는 보도 자료를 만들어 기자들에게 전달하고 전화를 돌렸다. 스포티파이가 출시되었으며 매달 99크로나(약 1만 3,000원)를 지불하면 프리미엄 계정을 이용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광대역 통신사의 고객에 한해서만 스포티파이 접근이 가능했다.

    “우린 시장에서 최고의 뮤직 플레이어가 되고 싶습니다. 2년이나 3년 안에 2천만 명이 이용하게 될 겁니다.”


    사실 스포티파이가 이 목표에 도달하는 데에는 꼬박 4년이 걸렸다. 아무튼 로렌손은 인터뷰를 하면서 스포티파이가 무료 서비스라서 불같이 성장할 거라고 이야기했다.


    “사용자 가운데 2퍼센트에서 15퍼센트가 유료 계정을 사용할 겁니다. 나머지는 무료 계정을 쓰겠지요.”


    로렌손에 따르면 스포티파이는 8개국에 진출할 계획이었다. 실제로는 독일과 이탈리아 진출이 뒤로 미루어지면서 스포티파이는 초기에 6개국에 진출했다. 2008년 10월에 스웨덴에서 서비스가 시작되었고 뒤이어 2009년에 영국, 핀란드, 노르웨이,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에 서비스가 제공되었다.


    페이스북을 발판 삼아 드디어 미국으로 진출하다

    스포티파이의 판은 더욱 커졌다. 성공하기 위해 에크는 경쟁사들을 따돌려야만 했고, 미국에서 성공해야 했고,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세계 최고가 되어야 했다. 만약 성공하지 못한다면 스포티파이는 즉시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었다. 에크는 이 사실을 잘 알았다. 음반사와 투자자들도, 또한 잡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애플은 몇몇 유럽 국가의 애플 스토어에 스포티파이의 앱을 등록해 주었다. 그러나 에크가 미국에서 음악 저작권을 해결하러 다닌다는 이야기가 음악 업계에서 돌자 잡스는 방해 공작을 펼치기 시작했다.


    “왜 여러분의 음악을 무료로 줘 버리려고 하죠?”


    잡스는 음반 업계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잡스가 스포티파이의 미국 입성을 막거나 적어도 지연시키고 싶어 한다고 여겼다. 잡스와 음반사 대표들은 여러 해 동안 아이튠즈의 마케팅에 힘써 왔다. 아이튠즈는 세계 최대의 합법적인 뮤직 스토어였고, 애플은 결과적으로 아이맥, 맥북, 아이팟의 판매량까지 늘릴 수 있었다. 스포티파이라고 하는 스웨덴의 작은 기업은 애플과 음반사 사이의 이 같은 상호 작용을 파괴할 위험이 충분히 있었다.


    음반사 대표들도 애플을 아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스포티파이의 무료 서비스에 대해서는 아직 회의적이었다. 따라서 미국의 저작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에크는 어쩔 수 없이 음반사들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내놓아야만 했다.


    페이스북과는 협력을, 비츠와는 경쟁을

    페이스북의 경악스러운 요구

    저커버그의 사이트가 더페이스북 닷컴이라고 불리기 시작할 때부터 진작 그는 네트워크의 음악에 관심을 가졌다. 저커버그는 와이어호그(Wirehog)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와이어호그의 사용자들은 그림, 서류 그리고 MP3 파일을 서로에게 전송할 수 있었다. 파일 공유 서비스가 2006년에 완전히 막을 내린 뒤 당시 페이스북의 대표였던 파커는 음악 산업의 어려움을 예감했다. 그로부터 5년 뒤 저커버그는 예전의 아이디어와 새로운 아이디어를 통합할 기회를 보았다.

    2011년 초 에크와 저커버그는 친구가 되었다. 그들은 페이스북의 캠퍼스를 산책하며 음악의 미래에 대하여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이즈음에 저커버그는 오픈 그래프를 만들었다.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다양한 앱을 접목할 수 있도록 개발된 개방형 플랫폼이었다. 외부 업체는 오픈 그래프를 이용하여 자사 앱을 페이스북에 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 앱들은 사용자에 대하여 더 많은 것들을 페이스북에 알려 주었다.


    2011년 2월에 스포티파이 사람들은 팰로앨토에 있는 페이스북의 캠퍼스로 초대받았다. 특별하게 고안된 회의실에서 사람들이 일하고 있었는데 몇몇은 아예 바리케이드를 쌓고 있었다. 그들은 페이스북에 스포티파이를 노출하는 중이었다. 페이스북의 개발자는 아티스트와 곡을 위하여 태그를 만들었다. 청색과 백색이 조화를 이루는 페이스북 홈페이지의 오른쪽에는 네트워크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종류의 음악을 듣고 있는지 나타나게 했다. 링크를 클릭하면 스포티파이의 계정에 빠르게 등록할 수 있었으며, 컴퓨터에 뮤직 플레이어를 설치해서 바로 음악을 듣는 것도 가능했다.


    봄에 페이스북의 특별한 요구가 담긴 메일이 처음으로 스톡홀름에 도착했다. 스포티파이의 제품 팀은 작은 글씨가 가득한 화면을 스크롤 하다가 한 가지 요구 사항을 보고 걱정스러워했다. 저커버그는 사람들이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서 스포티파이의 서비스를 이용하기를 원했다. 이는 스포티파이가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요구였다. 음악을 듣는 것과 어떤 음악을 듣는지를 지인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별개였다. 더군다나 그렇게 하면 유럽의 여러 시장에 새로운 사용자가 유입되는 것을 가로막을 수 있었다. 페이스북이 아주 잘 알려진 스웨덴에서조차 전체 인터넷 사용자 가운데 절반 정도만 페이스북을 이용했다.


    페이스북의 요구는 스포티파이 직원들의 감정을 자극했다. 음원 서비스는 모든 사람에게 접근 가능해야만 한다. 이것은 에크의 원칙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세계에서 제일 큰 소셜 네트워크의 지원을 받으려면 타협해야만 했다. 에크는 저커버그가 원하는 대로 해 주었다.


    페이스북에 스포티파이를 입히다

    매년 페이스북이 개최하는 개발자 콘퍼런스인 F8 동안 저커버그는 넷플릭스, 훌루 그리고 스포티파이와 같은 기업과의 협력 현황을 소개했다. 한 시간여의 프레젠테이션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친구들과 함께 음악을 듣는 것이 이제 얼마나 간단해졌는지를 보여 주었다. 별도로 스포티파이를 열거나 설치할 필요가 없었다. 이 전부가 페이스북에서 한 번의 클릭으로 가능했다. 하지만 사실 그 기술은 복잡했기에 스포티파이의 동료들은 긴장하고 있었다.


    저커버그는 자신의 친구가 무슨 음악을 듣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페이스북 오른쪽의 목록을 대충 훑었다. 모니터는 그의 뒤에 걸린 거대한 스크린에 투사되었다. 친구들 가운데 한 명이 페이스북의 최고 기술 책임자인 마이크 슈뢰퍼였다. 그는 제이 지와 카니예 웨스트가 함께 부른 <웰컴 투 더 정글(Welcome to the Jungle)>을 듣는 중이었다.


    “나는 제이 지를 좋아해요. 자, 이제 갑니다!”


    저커버그가 그 곡을 클릭하자 조용해졌다.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음악이 바로 재생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필 지금 뮤직 플레이어에 버퍼링이 일어나는 듯했다. 4초가 흐르고 나서야 마침내 그 곡의 드럼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관중이 박수를 쳤다. 스톡홀름에서는 동료들이 한숨을 돌렸다. 페이스북에는 음악이 입혀졌고, 스포티파이는 그 음악의 납품 업자였다.


    스포티파이는 미국에서 페이스북 덕분에 엄청난 광고 효과를 누렸다. 2011년 3월에서 11월 사이에 스포티파이의 유료 계정 사용자는 100만 명에서 250만 명으로 급증했다. 그리고 1년 안에 스포티파이의 가치는 세 배로 뛰었다.



    실험_ 사상 최대의 위기를 넘기 위한 스포티파이의 끊임없는 실험이 계속되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기

    한계를 넘어 규모를 확장하다

    2011년 가을에 스포티파이와 페이스북의 협업은 폭풍 같은 비판을 야기했다. 많은 사용자가 페이스북에서 갑자기 자신이 선택한 음악이 공유되는 것에 분노했다. 그리고 음악을 공유하고 싶지 않을 때 그 기능을 끄는 것이 어렵다고 여겼다. 에크는 트위터로 고객 서비스에 응대했다.


    “현재 다양한 것을 시도 중입니다. 우리는 피드백을 중시합니다. 여러분이 전달하는 피드백을 기반으로 변화해 가려 합니다.”


    또한 스포티파이를 처음 사용할 때 페이스북 계정이 있어야 하는 것도 큰 논란거리였다. 에크가 사용자들에게 개선을 약속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스포티파이 입장에서는 새로운 사용자를 최대한 많이 끌어들이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에크는 페이스북과의 협업을 미국에서 입지를 확실히 다지는 큰 기회로 여겼지만 예상만큼 빠른 속도로 진행이 안 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노스트룸은 끊임없이 숫자를 살폈다. 특히 ‘둘째 날 재방문’은 특별히 중요한 수치였다. 다시 말해서 그 사용자는 스포티파이에 더 큰 신뢰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노스트룀은 매일 그리고 매달 얼마나 많은 사람이 스포티파이를 청취하는지도 살펴보았다.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사용자가 스포티파이를 더 신뢰하게 되어 결국 유료 결제에 이르는 경향이 있었다. 여러 다른 앱처럼 스포티파이는 페이스북의 사용자 데이터에 접근이 가능했기에 이러한 분석이 가능했다.


    2011년 가을에 매일 수만 명의 신규 사용자가 스포티파이에 유입되었다. 그러나 페이스북으로부터 유입되는 사용자는 수동적인 사용자라고 볼 수 있었다. 점진적으로 노스트됨과 성장 팀은 적극적인 사용자를 끌어들이는 다른 방법을 강구했다. 바로 마케팅에 좀 더 비용을 책정한 것이다. 마케팅 비용을 더 쓴다고 손해는 아니었다. 사용자가 스포티파이에 머무는 기간 동안 지니는 가치, 즉 ‘고객 생애 가치’보다 마케팅 비용이 높지 않은 이상은 스포티파이 입장에서는 수지가 맞았다.


    에크는 스포티파이를 최적화하는 동시에 새로운 국가에 진출했다. 2011년에는 오스트리아, 벨기에, 스위스에서 서비스를 시작했다. 2012년에는 독일에 진출했는데 이때 예외적인 조치를 취했다. 페이스북은 독일에서 스웨덴이나 영국처럼 인기가 높지 않아서 사용자가 페이스북을 통하지 않고도 스포티파이에 가입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몇 개월 뒤인 2012년 9월에 페이스북 계정을 거쳐 스포티파이에 접근하도록 했던 페이스북의 조치가 없던 일이 되었다. 같은 해에 스포티파이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에도 진출했다. 확장 담당 이사인 악셀 바드 브링예우스(Axel Bard Bringáus)의 노력 덕분이었다.


    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은 스포티파이

    애플이 스트리밍 시장에 다가가는 동안에 스포티파이는 설립 이래로 최대의 위기를 헤쳐 나가고 있었다. 거의 2년간 음원 서비스는 휴대 전화의 혁명과 반대편에 서 있었다. 나중에 에크는 이때를 “거의 죽을 뻔한 시기였다.”라고 묘사했다.


    위기는 2012년에 시작되었다. 잡스가 아이폰에 대하여 프레젠테이션한 지 5년이 흐른 뒤였는데, 비로소 그때 휴대 전화가 PC를 제쳤다. 노트북은 점점 저렴해졌고, 휴대 전화는 점점 빨라졌다. 스마트폰에서만 기능하는 획기적인 서비스를 내놓는 우버 같은 회사기가 등장했다. 우버는 차량 공유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타트업 기업이었다. 그러자 모바일에 대한 전략을 세우지 않은 테크 기업은 시장에서 배척당했다. 페이스북은 2012년 상반기 실적을 발표했는데 모바일 광고에서 충분한 수입을 올리지 못한 것으로 판명 났다. 이 때문에 페이스북의 주가는 후퇴했고, 스포티파이에도 악재로 돌아왔다. 스포티파이의 이사회는 우려 속에서 페이스북의 약세를 지켜보았다.


    모바일 앱, 드디어 서비스 개시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에크와 로렌손은 어쩔 수 없이 저작권 협상에서 조금 뒤로 물러나야 했다. 2013년 가을에는 저작권 협상이 진행되던 것과 별개로 유니버설 뮤직은 스포티파이와 맺었던 합의, 일명 ‘멍청이 보험’을 연장했다. 그럼으로써 두 사람은 스포티파이가 팔린다면 판매 가격의 최소 2퍼센트를 유니버설 뮤직에게 지불할 의무를 계속 지게 되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적어도 8천만 달러에 달하는 액수였다. 그 협정은 2013년 10월에 연장되었으며 키프로스에 관련 서류가 등록되었다.


    한편 소니 뮤직은 모바일 앱의 무료 사용자에 대해서 청신호를 보냈으며, 워너 뮤직은 마지막까지 버텼다. 마지막 협상은 EMI가 쪼개져서 팔리기 전까지 머물렀던 석재 빌딩에 있는 워너 뮤직의 사무실에서 또다시 이루어졌다. 소수의 법률 자문단과 제품 팀 직원들이 합의서를 한 줄 한 줄 세심하게 확인했다. 워너 뮤직의 동의를 이끌어내려고 스포티파이의 협상가인 파크스와 그러스드는 스포티파이의 더 많은 주식을 상대편에 제공했다. 며칠 뒤 워너 뮤직의 협상 대표단은 저작권 조건에 동의했다. 안도의 물결이 스포티파이 이사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


    몇 주 뒤 에크는 뉴욕에서 기자들에게 그 소식을 프레젠테이션했다. 모바일 앱의 무료 사용자는 정기적으로 광고 시청을 할 때 셔플 모드로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베타 버전의 경우에는 오프라인에서 듣는 것이 불가능했다. 에크는 스포티파이가 새롭게 라틴아메리카의 14개국과 유럽의 6개국에 진출할 계획임을 밝혔다. 그로부터 2년 이상 스포티파이는 구글과 디저처럼 멕시코의 디지털 음악 시장의 경쟁자 대다수를 물리쳤다.


    뉴욕에서 프레젠테이션을 마친 다음에 에크는 CNN과 인터뷰를 했다. 에크는 자신과 직원들이 여러 해 동안 음반사를 설득하려고 애써 왔다고 했다. 사람들이 음악을 들으면 들을수록 돈을 지불하게 될 거라는 설명은 신뢰를 얻었다.


    “그건, 궁극적으로, 우리의 사업 모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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