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경영
 
지은이 : 창융파 외
출판사 : 오씨이오
출판일 : 2018년 11월




  • 이 책의 제목인 ‘이타경영’은 현재의 에버그린 그룹을 만든 창융파의 경영 철학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다. 경영자와 조직이 어떤 가치를 중심 삼는가,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가느냐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비단 사업의 성패만이 걸린 문제가 아니다. 하나의 조직이 업계를 좀먹고 결국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하느냐, 혹은 관련된 모두가 건강한 이익을 공유하며 보탬의 방향으로 성장하느냐가 여기에 달렸다. 


    이타경영


    마주해야 이길 수 있다 _ 선장이 꿈이었던 소년 항해사

    열여덟, 처음 배에 오르다

    1944년 초, 열여덟 살이던 나는 다음 날 키슈마루 호에 견습생 신분으로 승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난생 처음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게 된 것이다. 당시 나는 타이베이에 본사를 둔 ‘남일본기선 주식회사’의 선박부 사무원이었다. 회사 규정상 모든 사무원은 반드시 배에 올라 일정 기간 근무를 해야 했다. 해운 업무를 직접 경험하면서 더 깊이 이해하라는 의도였다.


    처음 배를 타던 그 날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지룽에서 출발해 다음 날 가오슝에 도착해 하루 정박한 후, 하이난 다오로 향하는 여정이었다. 배에 오르자마자 일본인 와타베 사무장은 내게 한 가지 명령을 내렸다. 가오슝에 도착하기 전까지 ‘적하목록’을 열여덟 부 만들라는 것이었다. 적하목록이란 배에 실은 화물의 내역을 적은 목록으로, 입항할 때 반드시 관련 부서에 제출해서 심사를 받아야 한다. 복사기가 없던 때라 먹지를 놓고 일일이 손으로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지룽에서 출발하자마자 갑자기 풍랑이 거세졌다. 크지 않은 배인 키슈마루 호는 바다 위에서 춤을 추듯 심하게 요동쳤다. 심한 뱃멀미로 머리가 빙빙 돌고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구토가 계속 나면서 나중에는 제대로 앉아 있기조차 힘든 상태가 되었다.


    하룻밤 헛고생의 교훈

    내 몸 하나 가누기도 어려운 지경에 힘을 주어 글자를 쓰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속이 메스껍고 울렁거려 계속 토하느라 진이 다 빠지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었다. 나는 괴로워도 반드시 맡은 임무를 완성하겠다는 마음으로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잠시 후, 배가 가오슝 항에 도착했다. 헌병, 이민국, 세관, 해상경찰이 화물을 검사하기 위해 우리 배에 올랐고 와타베 사무장은 내가 만든 적하목록 네 부를 제출했다. 그럼 나머지는 어디에 쓰는 건가 싶어 미심쩍은 기색으로 사무장에게 물었다. “사무장님, 나머지 열네 부는 어디에 제출할까요?” “남은 건 그냥 태워버리게!” 사무장의 대답을 들었을 때,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지고 억울해서 표정을 숨기질 못했다. 그 모습을 본 사무장은 나를 사무실로 불렀다. “그래. 기분이 엉망이지? 필요도 없는 적하목록을 뭐 하러 여러 부 만들었나 싶겠지. 이게 다 자네를 위해서야.” “저를 위해서요?” “그렇게 일에 집중해야 뱃멀미를 견딜 수 있고 앞으로 배 생활도 쉬워지거든. 괴로운 하룻밤을 지냈으니 앞으로는 훨씬 나을 걸세. 그러니 이제 그만 화 풀어. 다 자네 잘되라고 그런 거니까!” 그 말은 정말이었다. 이후 가오슝에서 하이난다오로 가는 기나긴 여정 중에 나는 크게 뱃멀미를 하지 않았다. 이후 나는 1년 정도 더 배에서 사무원으로 일하며 와타베 사무장을 롤 모델 삼아 많은 것을 배웠다. 지금도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높은 선택을 하다

    일본식 교육을 받고 자란 나는 북경어를 할 줄 몰랐다. 그래서 해방 후에는 경력이 있는데도 한동안 직장을 구하지 못해 허송세월해야 했다. 해방 후에 국민당 정부는 일본 배를 잇달아 몰수해 국유화했다. 그 바람에 대만 해운업은 외성인(外省人)인 상하이와 닝보 사람들이 장악하게 되었고, 본성(本省) 출신은 아예 배에 오를 기회조차 얻기 어려웠다.


    우여곡절 끝에 백수 생활을 마치고 일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처음부터 문제가 생겼다. 이전 경력인 ‘사무원’ 이라는 일본어를 중국어로 번역했더니 어찌된 영문인지 ‘선실 관리자’가 되었던 것이다. 선실 관리는 상업을 공부하고 행정 업무를 했던 나에게 전혀 맞지 않았다. 게다가 그 배에는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선원들도 많이 타고 있었다. 사무실에 앉아 선원을 배치하던 내가 지금은 좌천되어 선실 관리를 하고 있으니, 등 뒤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영 편치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이 상황이 그렇게 최악인가? 선실 관리자라는 게 그렇게 나쁘기만 한 일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부당하게만 느껴지던 상황을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니 완전히 새로운 측면이 펼쳐졌다. 내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이었다. 사무장 제복의 소매에는 이른바 ‘작대기’가 세 개뿐이지만 선장은 네 개다. 그렇게 나는 선원들의 비웃음을 뒤로 하고 남몰래 큰 뜻을 세웠다. 언젠가 반드시 선장이 되어 너희들 앞에 나타나리라!


    작은 선실에서 해운업계의 미래를 엿보다

    보물 같았던 그 시기에 나는 독학을 통해서 ‘동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배가 고베 항구에 들어서면 그 지역에서 가장 큰 서점인 가이분도에 가서 선박 운항, 해운 경영 등 해사(海事) 분야의 책을 구입했다. 이때 나는 미군이 ‘컨테이너’라는 것에 화물을 채워 운송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당시로서는 매우 생소한 개념이었지만 ‘컨테이너화’를 의심하지 않았고 린톈푸에게도 내 생각을 적극적으로 설명했다.


    물론 그로부터 10년 후 에버그린 해운이 세계 최대의 컨테이너 선박 회사로 성장할 줄은 나 역시 알지 못했다. 다만 내 회사를 설립할 때 주저 없이 컨테이너 운송 방식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책에서 습득한 지식 때문이었다. 책 속에는 황금으로 지은 집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책을 읽고 배워서 상황에 맞게 활용하는 능력은 무엇보다 값진 것이다.


    세상에는 좋은 학교와 훌륭한 선생님이 많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배우려는 마음’이다. 스스로 움직여 공부하겠다고 결심해야 비로소 진정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법이다. 배우려는 마음이야말로 가장 좋은 학교이자 훌륭한 선생님이다.



    사업이란 끝없는 ‘돌파’다 _ 중고선 한 척으로 에버그린 해운을 키워내다

    해운동맹과의 전면승부

    1968년에 에버그린 해운을 설립했을 때, 근해 해운업은 이미 포화상태였다. 다음 해, 우리는 중고선 한 척을 구입해서 극동과 증동을 잇는 정기 노선을 개설할 준비에 돌입했다. 하지만 이 노선을 이 지역 해운동맹이 이미 단단히 틀어쥐고 있었다. 일본, 유럽의 대형 해운업체들이 참여한 이들 동맹은 외부업체가 비집고 들어오려는 기미만 보여도 똘똘 뭉쳐 철저하게 봉쇄했다.


    그 와중에 회사 내에서도 여러 문제가 불거졌다. 운영 중인 배 세척이 돌아가며 고장 나거나 충돌, 화재 사고를 겪는 등 악재가 끊이지 않았다. 자금 유동 문제도 만만치 않아 골머리를 싸매야 했다. 해운동맹과 힘든 싸움을 계속하며 상처가 심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저 통증을 참고 버티면서 더 좋은 서비스와 합리적인 운임을 고수하는 것만이 수였다. 그렇게 우리는 험난한 전쟁터에 간신히 발을 붙이고 버텼다.


    마침내 죽기 살기로 해운동맹의 봉쇄를 뚫고 극동-중동 노선을 간신히 개척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향후 회사가 크게 성장하고 발전하는 데 마중물 역할을 했다. 그리고 어느새 새로운 파도가 가까이 다가왔음을 알아차렸다. 바로 ‘컨테이너화’였다.


    컨테이너화에 사활을 걸다

    1970년대 초반으로 접어들 무렵 ‘컨테이너화’라는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을 직감했다. 세계적인 대형 해운업체들은 이미 5년 전부터 컨테이너선을 슬슬 도입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반 선박만을 고수한다면 시대에 뒤쳐져 한발 더 나아갈 기회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당시 호황이 절정에 달한 미국 시장을 주시했다. 규모가 큰 물류 시스템이 필요할 테니 머지않은 미래에 미국 노선이 전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황금 항로’가 될 게 분명했다.


    언제나 그렇듯 문제는 돈이었다. 보유한 선박을 전부 컨테이너화하려면 엄청난 자금이 필요했기에 하는 수 없이 일본 종합상사 마루베니에 투자를 부탁했다. 하지만 그들이 보기에 에버그린 해운은 설립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작은 회사에 불과했다. 외부 투자를 담당하는 사토 부장은 만날 때마다 거만한 태도로 나를 맞았다. 치욕적인 언사도 서슴지 않았다. 나도 분을 참지 못하고 한참 언쟁을 벌이다가 결국 사무실을 박차고 나왔다. 다행히 선박부 호사카 부장이 관심을 보이며 호의적으로 나왔다. 그는 창융파를 한번 밀어줘보자고 임원들을 설득했고, 결국 마루베니 상사는 에버그린에 투자를 결정했다.


    이제 갓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작은 규모의 에버그린에게 컨테이너화는 사활을 건 투자였다. 한번 시작한 뒤에는 중도에 포기할 수 없었다. 반드시 해내야만 했다. 에버그린은 우선 600TEU급 S형 풀컨테이너선 네 척을 건조해 극동-미 동안(東岸) 정기 컨테이너 노선을 건설했다. 1975년 7월 17일, 에버그린의 풀컨테이너선 에버스프링 호가 첫 출항하면서 대만 해운 역사상 최초로 컨테이너 해운이 시작되었다.


    햇병아리 업체에서 업계의 선두주자로

    우리 직원들은 외국 무역상이 대만에 물건을 구매하러 오는 시기가 되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그들이 머무는 호텔을 수소문했다. 그리고 과일바구니나 꽃바구니에 에버그린 해운을 소개하는 자료와 명함을 넣어서 발송했다. 그렇게 고객을 유치하고 회사를 알리기 위해 애썼다. 다행히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점점 좋아졌다.


    한 일본 해운업체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마루베니 상사의 마쓰오 사장을 찾아가서 에버그린에 투자를 중단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마쓰오 사장은 크게 화를 내면서 단숨에 거절했다. “이건 내 사업입니다. 에버그린에 투자할지 말지는 당신과 관계 없어요.” 이후에도 비슷한 부탁을 몇 차례 더 받았으나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에버그린에 더 많은 자금을 투자하며 본인의 신념을 밀고 나갔다. 덕분에 우리는 컨테이너화라는 야심찬 행보를 굳건히 이어갈 수 있었다.


    100년의 카르텔을 깨고 유럽 노선을 열다

    에버그린이 유럽 노선을 준비한다는 소문이 돌자 업계 전체가 긴장했다. 이 노선을 장악한 해운동맹은 FEFC(극동운임동맹)로, 무려 100여 년에 걸쳐 형성된 탄탄한 동맹이었다. FEFC는 운임이 비싼 데다가 고압적인 자세로 일관하여 화주들의 원성을 샀다. FEFC는 일본에 특히 호의적이어서 대만 화주는 일본 화주가 먼저 선택하고 남은 공간을 어떻게든 ‘주워서’ 써야 했다. 나는 여기에서 에버그린의 기회를 엿보았다. 우리가 이 빈틈없는 해운동맹을 뚫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FEFC에 속하지 않은 업체가 노선을 비집고 들어가려면 약 세달 가량 온갖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이 세 달을 버티면 성공이고, 그 안에 무너지면 끝이었다. 실제로 이 기간에 FEFC 쪽 사람이 와서 ‘생각을 접으라’고 경고한 일도 있었다. 우리가 땅바닥에 엎드려 살려달라고 빌 때까지 몰아붙이겠다고 그들은 으름장을 놓았다. 과거에도 우리 같은 회사가 있었지만 결국 두 손을 들고 물러났으며, 앞으로도 이변은 없을 거라고 위협적으로 호언했다.


    나는 직접 직원들을 이끌고 유럽으로 날아갔다. 거의 2개월 동안 현지 상황을 샅샅이 살폈다. 또 각지의 화주들을 방문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에버그린의 도전을 반기면서도 우려하는 기색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들과 나는 동일선상에서 FEFC에 대항하는 입장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FEFC는 우리는 압박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했다. 그동안 FEFC의 횡포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온 대만 화주들은 에버그린의 등장을 크게 반기며 마음 편히 운송을 맡겼다. 덕분에 우리는 1,200TEU급 V형 컨테이너선을 가뿐히 채울 수 있었다. 이렇게 에버그린이 하루하루 힘과 몸집을 키워나가자 FEFC도 더는 어쩌지 못했다. 에버그린은 기세를 몰아 일본 해운 시장까지 점령했고 대서양 노선을 여는 데 성공했다. 일본 3대 해운업체 중 하나인 NYK라인도 이루지 못한 과업이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FEFC가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수준까지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모두의 이익은 혼자만의 이익보다 강력하다 _ ‘이타 경영’의 원칙을 확립하다

    항해와 경영의 공통점

    대만 기업가들 중에 배를 오래 탄, 선장 경력이 있는 사람은 무척 드물다. 이른바 ‘바닷바람 좀 맞아본 사람’은 내가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종 배를 모는 선장과 기업을 경영하는 회장이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을 받는데 내 대답은 늘 단순하다. “배는 작고, 기업은 크죠.” 웃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차례로 돌파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목적지까지 배를 몰아가는 과정은 하나의 기업을 이끄는 것과 일치한다.


    아주 오래전 나에게 항해를 가르쳐준 린톈푸 선장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배를 타본 사람은 도량이 넓고 깊지.” 그때는 와 닿지 않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순식간에 얼굴을 바꾸는 바다를 오랜 시간 겪은 뱃사람은 불투명한 삶 또한 현명하게 항해하는 법을 안다는 것을.


    ‘너 죽고 나 사는’ 사업이란 없다

    나는 사업에서 쌍방의 이윤을 두루 살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한쪽은 얻고, 한쪽은 잃는 방식은 성공적인 사업의 길이 아니다. 사업가는 절대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사업은 우세한 한쪽이 전부 차지하는 승자독식의 세계가 아니다. 반드시 각자의 목적을 향해 함께 손잡고 나아가는 식으로 추진해야 한다. 기억하라. 사업은 이기(利己) 가 아니라 이타(利他) 다!


    ‘모두의 이익’은 ‘혼자만의 이익’보다 강력하다

    FEFC가 장장 100년 동안 지속해온 카르텔을 에버그린이 무너뜨린 사건은 ‘원활한 통상’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사업에 관련된 모든 이들이 공동의 이익과 발전을 추구하고 유무상통(有無相通), 즉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보완해나갔다. 나는 직원들에게 수시로 말한다. 미리 최저선을 설정해두고 그만큼 달성했으면 욕심 부리지 말아야 한다고. 그래야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아갈 수 있다고 강조한다.


    계엄 시기에 대만은 법령이 무척 엄격했다. 특히 외환관리제도가 그랬다. 그래서 에버그린은 선적을 대부분 파나마에 두었다. 1995년에 우리는 파나마의 콜론 컨테이너터미널을 장기 임차했다. 지리적 위치상 이곳이 양방향 세계일주 노선을 비롯해 북미, 남미, 카리브 해 등 해운 노선 대부분의 허브 항만이 될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 장기 투자 프로젝트를 통해 우리는 파나마 정부와 더욱 돈독한 관계를 쌓을 수 있었다.


    사업을 할 때 참여하는 모두가 이익을 얻어야 하며, 이는 혼자 애써 얻는 이익보다 훨씬 크다는 나의 신념은 이 일로 더욱 공고해졌다. 이것은 곧 내가 신뢰하는 ‘이타 경영’의 핵심이기도 하다. 물론 모두의 이익을 중시하다 보면 약간의 손해를 피하기 어렵다. 하지만 장기적인 발전과 깊은 관계를 원한다면 반드시 수용하고 시도해야 하는 일이다.


    사업으로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성과

    팔순 생일날, 나는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올 때도 빈손으로 왔고, 갈 때도 그렇겠지요. 목숨이 붙어 있을 때 좋은 일을 더 많이 하고 공익을 도모해야 의미 있는 인생이라 할 것입니다.” 2010년 에버그린 그룹이 그 어느 때보다 빛난 한 해였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돈을 벌어도 기쁨과 즐거움은 이삼일이면 그만이다. 최근 몇 년간 자선사업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이것이야말로 기업가가 자산과 경험, 능력을 총괄적으로 동원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일임을 깨달았다. 돈을 버는 것은 인생의 마지막 목표가 될 수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야 돈을 효과적으로 사용해서 최대한 많은 이들과 더불어 누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블루 오션’은 디테일에서 태어난다 _ 대만 최초의 민간 항공기 ‘에바 항공’을 설립하다

    에바 항공, 이륙 준비를 완료하다

    1989년, 마침내 대만 하늘이 민간 기업에도 개방되었다. 우리 그룹은 즉각 바다에 이어 하늘에서도 사업을 펼치기로 결정하고 에바 항공 설립을 준비했다. 그때 내 나이는 이미 예순을 넘었다. 남들은 슬슬 은퇴 후 삶을 준비할 시기였다. 하지만 나는 밤낮으로 항공 분야 서적을 읽고 복잡한 항공업을 연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36억 달러(약 3조 8,844억 원)를 들여 미국 보잉사와 맥도넬더글라스에 비행기 스물여섯 대를 한꺼번에 주문했다. 애만 민간 기업 역사상 미국을 상대로 한 최대 규모의 주문이었다. 나는 계약 전후에 보잉과 맥도넬더글라스를 수차례 방문했다. 직접 작업복을 착용하고 공장 곳곳을 며칠이나 돌아다니며 비행기 제작의 실무를 확인, 또 확인했다. 비행기를 제작하는 도중에도 좌석 배열, 실내 인테리어 등을 놓고 계속 의견을 제시했다. 비행기가 최종 완성되어 납품되기 전까지 수도 없는 수정, 개선 과정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에바 항공은 이륙 준비를 완료했다.


    줄자 들고 다니는 회장님

    나는 유독 ‘디테일’에 집착한다. 지금도 사무실의 채광, 방향, 동선, 책상 배치 하나까지 전부 꼼꼼히 살핀다. 디테일을 중시하고, 완벽을 추구하며, 까다롭다는 소리마저 듣는 성격은 아마도 젊은 시절에 굳어진 것 같다. 에버그린 해운을 설립하기 전에 지인과 손잡고 연 해운회사에서 나는 일본 중고선 구입과 선박 관리를 책임졌다. 최대한 상태가 양호한 중고선을 구하기 위해 작업복을 입고 분주히 뛰어다녔다.


    성격이 이렇다보니, 항공업을 생각조차 하지 않을 때도 비행기를 타기만 하면 각 항공사의 좌석 크기나 배치 등을 비교해가며 혼자서 점수를 매겨보곤 했다. 특히 장시간 비행하며 할 일이 없을 때면 줄자를 꺼내들고 일등석, 비즈니스석, 이코노미석의 좌석 크기와 간격, 등받이의 경사도, 복도의 폭 등을 쟀다. 기내식도 사진을 찍어서 서로 비교하고 연구했다.


    보통 기업의 회장들은 꼭 필요하다면 직원이나 엔지니어에게 지시하지 나처럼 직접 줄자를 가지고 다니며 수시로 치수를 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손으로 직접 하지 않으면 혹시라도 중요한 정보를 놓치고 지나갈까 봐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러니깐 결국 나 편하자고 하는 일이다. 이렇게 열심히 치수를 재고 다닌 덕에 기발한 아이디어를 얻은 적도 있는데, 에바 항공의 자랑인 ‘프리미엄 이코노미석’이 바로 그 경우였다.


    작은 습관에서 비롯된 히트 아이디어

    에바 항공은 설립 초기에 운 없게도 불경기를 맞았다. 그 결과 좌석의 80퍼센트만 채워서 운항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 20퍼센트의 낭비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비즈니스석과 이코노미석 사이에 위치하는 완전히 새로운 좌석 등급, 프리미엄 이코노미석을 고안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프리미엄 이코노미석은 비즈니스석과 이코노미석을 결합한 좌석 등급이다. 좌석 배치를 ‘2-4-2’ 석으로 조정해서 이코노미석 대비 44퍼센트가량 공간을 넓히고 발받침, 개인 스크린과 고급 기내식 및 음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가장 중요한 점은 비즈니스석보다 저렴하고 이코노미석보다 편안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처음 이 아이디어를 이야기했을 때, 직원들 대부분이 입을 모아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좌석 등급을 추가하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말해, 단순히 큰 의자를 넣는 걸로 끝날 일이 아니라 컴퓨터 시스템을 통째로 개편해야 하는 작업이었다. 이런 이유로 직원들은 하나같이 반대했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고 꿋꿋이 밀어붙였다.


    사실 전부 만석이기는 해도 이걸로 큰돈을 벌지는 못했다. 다만 공간을 희생해 승객에게 더 좋은 탑승 경험을 제공했으니 분명히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모두 줄자를 품고 다니며 여기저기 유난스럽게 치수를 재고 다닌 덕에 이룬 성과다. 믿기 어렵겠지만 내 주머니 속의 작은 줄자 하나가 이처럼 놀라운 결과를 불러왔다.



    이타, 가장 큰 즐거움 _ 기업의 효율을 공익으로 확장하다

    왜 돈을 버는가

    동업을 접고 혼자서 15년 된 중고선 한 척으로 에버그린 해운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무실 임대료와 직원들 월급 주기도 빠듯했다. 말이 사장이지 매일 은행을 드나들며 머리를 조아리고 대출을 부탁하는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행히 일본 마루베니 상사의 도움으로 자금 유통에 숨통이 트이고 화물량이 점점 많아지면서 회사에 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돈 차제보다 돈이 벌리는 기분이 참 좋았다. 내가 느끼는 그 즐거움을 우리 직원들 역시 느꼈으면 했다. 그들도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입장이니, 회사가 잘되어 수익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느끼면 안정감이 생기고 일하는 재미도 한층 커지지 않겠는가.


    사업하는 사람이니 돈이 가장 중요한 것이어야 할 테지만, 한순간도 ‘돈만’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자부한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진정한 행복을 살 수 없음을, 때로는 돈 때문에 인간의 어두운 본성이 드러날 수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기업이 정당한 방법으로 이익을 추구해서 돈을 버는 일은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돈 자체가 아닌, 돈 버는 사람의 태도와 생각이다. 이제는 큰 뜻을 이루기 위해 돈을 벌고, 의미 있는 일에 아낌없이 쓰는 것이 나의 사명이다.


    창융파 재단을 설립하다

    “돈도 많이 벌고 성공했는데 굳이 재단을 설립한 이유가 뭔가요?”라는 질문을 자주 듣는다. 사실 처음 재단을 준비할 때 생각은 무척 단순했다. 젊어서 창업했고 운이 좋아 사업이 잘되었으니 그저 사외에 환원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사업을 하다 보면 나 자신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안 되는 영역이 분명히 있다. 이른바 ‘운’이라고 불리는, 바로 하늘의 영역이다. 보잘것없는 내게 하늘이 그렇게 많은 운을 허락했으니 조금이라도 갚아야 하지 않겠는가? 바로 이런 이유로 에버그린이 세계 1위 해운업체 자리에 오른 그해에 ‘창융파 재단’을 설립하고 의료자선 활동, 교육장려 및 예술 문화 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매일 출근할 직장이 있고, 먹고 쓰는 것이 부족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 여전히 불행을 맞닥뜨린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뜻밖의 사고나 위기를 맞은 사람도 있고, 가족이 변고를 당하는 경우도 있다. 정부나 관계 기관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했거나 자연재해를 당할 수도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머리 위로 떨어진 재앙에 속절없이 무너져 발 한 제대로 디딜 곳 없는 처지가 된 이들, 이 사람들을 돕고 끊임없이 마음을 쓰는 것은 하나의 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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