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 그리고 리더십
 
지은이 : 김윤태
출판사 : 성안당
출판일 : 2023년 03월




  • 조선 왕 27명 중 시대를 이끈 9명을 선택해 그들이 시대적으로 다른 환경과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리더십의 관점에서 관찰해봅니다!


    조선 왕, 그리고 리더십


    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천재 리더, 세종

    인재를 발견하고 적재적소에서 빛을 발하게 배려하다

    ‘조선의 명재상’ 하면 대명사처럼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황희 정승이다. 그는 73년간이나 공직자로서 일했다. 6조판서(장관), 도승지(비서실장), 영의정(국무총리) 등을 모두 역임한 보기 드문 관료였다. 세종이 황희를 중용한 이유는 학문에 얽매이기보다는 실제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 학문을 가졌기 때문이다.


    세종의 오랜 파트너로 영의정만 18년을 지낸 황희는 정치인의 모습이 아닌, 실력 있는 관료 스타일이었다. 어느 한 세력에 속해 있는 정치가라면, 3명의 왕에게 발탁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고 왕에게 충성만을 다짐하는 예스맨도 아니었다. 왕에게 용기 있게 “NO!”라고 말할 줄 알았던 신하였다. 그런 그에게도 엄청난 결함이 있었다.


    1427년 신창현(현재 아산)에서 표운평이라는 아전이 종들에게 구타를 당해 사망했다. 이 사건은 은폐되어 묻힐 뻔 했지만 사건을 살펴보던 세종이 피해자의 석연찮은 죽음에 재조사를 명하면서 감춰진 비밀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바로 사건의 중심에 고위 관료들이 엮여 있었다.


    구타를 지시해 아전을 죽음에 이르게 한 서달은 좌의정 황희의 사위이자 형조판서 서선의 아들이었다. 황희는 살인자가 된 사위를 돕기 위해 신창현 출신의 우의정 맹사성에게 사건이 잘 처리될 수 있도록 부탁했다. 좌의정, 우의정, 형조판서가 관련된 사건에 주변 고을의 현감들도 발 벗고 사건 해결을 위해 나서게 되고, 표운평의 형과 합의를 통해 서달의 종이 살인한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사형에 준하는 사건에 대해서는 왕이 직접 살펴보도록 되어 있었고, 조서를 살펴본 세종의 재조사 명에 의해 사건의 전말이 밝혀진 것이다. 결국 서달은 장형 100대를 맞고 유배를 갔으며, 좌의정 황희, 우의정 맹사성, 형조판서와 대사헌, 그리고 신창현 주변 다섯 고을의 현감들이 모두 파직됐다. 조선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형 스캔들이었다.


    이렇듯 흠집이 많은 황희와 맹사성이었지만, 세종은 그들을 다시 기용한다. 세종은 사람의 흠은 작게 보고, 능력을 크게 보는 군주였다. 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그만큼 인재가 많이 필요했다. 세종은 부정이나 부패와 연결돼 파직된 공직자라도 자신의 정치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사람은 반드시 다시 등용했다. 또한 세종은 황희가 세종이 아닌, 양녕대군을 지지했던 사람이었으나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다. 오직 실력 있는 인재를 발탁해 좋은 정치로 백성을 이롭게 하고 싶었다.


    세종은 긍정적인 면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가점주의 마인드의 리더였다. 세종은 끊임없이 공부하는 리더이며, 학습을 통해 얻은 통찰력으로 국가를 경영했다. 이 시대 리더들이 본받아야 할 덕목이다.


    지식이 힘이 될 수 있음을 확신한 세종은 지식 인재 양성에 힘을 모으고 그들을 성장시키기 위해 뒷받침했다. 지식경영 프로젝트의 시작은 집현전이다. 집현전은 고려 인종 때 설치됐지만 모두가 겸직을 하는 유명무실한 명목상의 부서였다. 세종 2년(1420) 지덕을 겸비한 젊은이들을 뽑아 경전과 역사를 강론하고 임금의 자문 역할을 하는 집현전을 출범시켰다. ‘모을 집, 어질 현’을 쓰는 집현전은 현명한 사람들을 모은다는 의미를 가졌으며, 박팽년,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등 우리가 잘 아는 학자들이 집현전 학사 출신이다. 이름뿐인 집현전을 유망한 학자들을 모아 전업하게 함으로써 실질적인 학문의 보고인 집현전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 씽크탱크 덕분에 정치, 경제, 문화, 과학 모든 분야에서 조선 최고의 전성기를 이끌게 된다.


    세종은 천민일지라도 능력 있는 자를 등용해서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으려 했다. 조선의 천재 과학자로 알려진 장영실은 관노 출신이다. 출신보다 능력을 우선시하는 유연한 인재 등용의 리더십이 없었다면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장영실은 역사에서 발견되지 못했을 것이다. 세종의 평생 파트너인 황희도 역시 서얼 출신이다.


    세종은 재능을 잘 알아보는 용인술의 대가이기도 했다. 신숙주가 음운과 외국어에 능함을 알고 집현전에 배치해 훈민정음의 해설서를 만들 때 능력을 발휘하게 했다. 박연은 과거에 합격한 문신이지만, 음악에 능함을 알고 아악을 정리하도록 장학원(궁중에서 연주하는 음악과 무용에 관한 일을 담당한 관청)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그리고 그 전문성을 가지고 깊이 있게 연구하고 성과를 낼 수 있도록 긴 시간을 믿고 기다려 주는 군주였다.


    세종이 만든 ‘사가독서제’는 인재 양성을 위해 문신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한 제도이다. 재충전의 기회를 주는데 무급이 아닌, 유급휴가를 준 것이다. 이는 독서를 여가 선용으로 본 것이 아니라 업무의 연장으로 인정한 것이다.


    세종은 학습하는 군주답게 경연(임금이 신하들과 학문, 기술을 토론하고 국정을 협의하던 일)을 통해 국정 운영의 중요한 일들을 결정했다. 아버지 태종이 18년간 약 60회, 1년에 3.3회 경연을 연 것을 기준으로 할 때, 세종은 32년간 약 2,000회, 1년에 60회, 한 달에 5회 경연을 열었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토론하며 국정을 부지런히 살폈던 학습 군주였다. 또한 세종은 인재경영, 지식경영으로 성과를 일궈 낸 최초의 군주라고 해도 무방하다.


    오늘날 리더들이 세종대왕의 찬란한 성과가 학습에서 시작됐음을 깨달았으면 한다. 리더가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다양한 분야에 식견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해야만 한다. 민족의 영웅에 대해 침 튀기며 감탄만 하지 말고 그분이 보여 주고 가르쳐 준 학습의 중요성을 깨닫고 실행했으면 한다. 국가든 기업이든 공부하는 리더가 많아지길 기대하며 특히 입법을 통해 국민의 삶을 좌우하는 국회의원들이 공부하는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리더십을 보여 주기 바란다.



    열심히 일하고 신나게 놀다, 성종

    절대권력 앞에서 과감히 “NO!”를 외치다, 대간 제도

    대간은 사헌부에서 감찰 임무를 맡은 관리를 이르는 대관과 사간원에서 국왕에 대한 간쟁 임무를 맡은 관리를 뜻하는 간관의 합칭이다. 대간과 간관의 앞 글자를 따 ‘대간’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성종은 이 두 기관과 더불어 홍문관의 역할을 강화해 학문과 경연을 맡게 하면서 ‘언론삼사’를 완성시켰다.


    관리의 잘못을 비판하거나 탄핵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만든 대간의 역할은 막강한 것이었다. 왕에게 ‘아니되옵니다’를 가장 적극적으로 했던 대간들은 그것이 언론으로서 자신들의 역할이라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언로가 막히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력과 용기를 겸비한 인재들이 거치는 관직으로 직위는 낮지만 역할은 재상급이라고 할 정도였으며, 대간을 거친 사람들이 승진을 빨리 한 것으로 보아 당시의 엘리트 코스로 볼 수 있다.


    당시 대간들에게 주어진 권리 중에 ‘풍문탄핵권’이 있었다. 말 그대로 확실한 증거가 아닌, 풍문이나 소문만으로도 탄핵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도 마찬가지지만 힘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을 탄핵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나 증거나 물증이 있어야만 탄핵할 수 있다면 권력가들의 부정부패를 단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대간들에게 고위 관료를 풍문탄핵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여기에 제도의 악용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도 마련했다. 풍문탄핵을 당한 고위 관료는 바로 사직서를 내고 자리에서 물러나 제3의 사찰 기관에서 조사를 받는다. 조사 결과 혐의가 인정되면 바로 처벌하지만, 혐의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면 탄핵을 한 대간은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다시 말하면 풍문탄핵은 대간이 언론으로서의 역할을 함에 자신의 직을 걸고 하는 것이었다. 대간은 언론으로서 막강한 힘도 있었지만, 그에 따른 책임도 분명히 가졌다는 것을 보여 준다. ‘아니면 말고’ 식의 보도 형태를 보여 주는 요즘의 언론, 이 책임감과 사명 의식은 현대 언론인들이 분명 배우고 본받을 만한 것이다.


    권력의 핵심 중에 하나는 인사권이다. 성종도 인사를 통해 자신의 정치를 펼치기를 원했다. 하지만 관리를 임명할 때마다 대간들의 계속된 반대와 항의가 이어지면서 대간들과 첨예한 대립을 하게 된다.


    당시 영의정 윤필상의 탄핵을 놓고 성종과 언관들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사헌부의 탄핵을 받은 윤필상이 사직하려 하자, 성종은 이를 불허했다. 이때 홍문관 사관 유호인이 성종의 인사 조치에 항명했다. 화가 난 성종이 오히려 유호인을 국문하려 했다.


    성종을 보며 홍문관 전한 성세명이라는 신하가 이렇게 얘기했다.


    “신하의 도는 의를 따르는 것이지, 임금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성종실록』283권, 성종 24년 10월 27일


    성종에게는 뼈를 때리는 한마디였지만, 대인이었던 그는 이 신하에게 처벌이나 불이익을 주지 않았다. 최고 권력자로서 듣기 싫은 얘기지만 듣고 삭혔을 뿐이다. 성종의 성군으로서의 이미지가 이러한 것들에 의해서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또한 성종은 현명한 군주였다. 대간들의 거센 공격이 있을 때는 그들과 대립 관계에 서 있는 대신들을 이용해 정치적 해법을 찾았고, 그러면서도 대간들의 기세 또한 꺾지 않았다. 성종은 이런 논쟁이 있을 때마다 국왕의 인사권에 대한 도전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주면서, 대간들의 고유 영역인 비판 기능 역시 인정하는 균형감 있는 통치력을 보여 주었다.


    이렇듯 국왕의 인사권까지 견제할 수 있었던 대간 제도. 간쟁과 토론을 통해 임금의 정치적 보조 역할을 수행하며 왕을 끊임없이 비판하고 권력을 견제했던 대간 제도는 균형을 위한 조선의 훌륭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강국이었던 명나라는 황제 권력에 대한 직언과 견제가 약했다. 그러면서 황실의 부패가 늘어나고 국가에 대한 충성도가 떨어지면서 환관들이 또 다른 권력 집단이 돼 국정 농단을 일으켰다. 결국 300년도 못 돼 명나라 왕조는 무너졌다. 이에 비하면 조선 시대 대간들의 직언이 가진 역사적 의미는 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을 넘어 왕조를 더욱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조선 왕조가 500년을 유지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이런 균형의 힘이 밑바탕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유교적 가치 위에 수성과 계승발전으로 번영을 이어 가다

    성종 집권 시기를 조선의 최전성기로 부르는 것은 단지 외세의 침략 없이 백성들이 평안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성종의 국정 운영 능력도 매우 뛰어났다. 세조 때는 공신들의 횡포로 굶주리는 백성이 많고 나라 경제가 어려웠지만, 성종 때는 물자가 넉넉해지면서 연회도 많아지고 국가적 행사도 많아 풍족한 사회 분위기를 연출했다. 넉넉해진 국가 재정에 힘입어 성종은 창경궁을 새로 짓고 경복궁과 경회루를 화려하게 단장해 왕실의 위엄도 높였다.


    성실하고 학문에 열중한 공통점 때문에 성종을 세종과 비교하기도 하는데,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조선을 안정적으로 잘 유지했지만 국정 운영의 방향은 차이가 있다. 세종이 수많은 개혁을 통해 법과 제도를 새롭게 만들어 조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했다면, 성종은 개혁보다 수성에 중심을 두어 과거의 좋은 제도를 복구하거나 유지해 안정적인 국가 체제를 완성시켰다. 도서관 역할을 하던 홍문관은 과거 집현전이 하던 역할을 수행하게 하고 경연을 주관하도록 하는 등 경연을 활발하게 부활시켰고, 『경국대전』을 완성시키는 등의 노력이 그것이다.



    뛰어났으나 때를 잘못 만나다, 광해군

    ‘반찬 중 으뜸은 소금’이라고 말한 소년

    광해군(재위 1608~1623)의 자질은 어릴 적부터 남달랐다. 『정무록』의 기록을 보면 선조가 보물을 진열해 놓고 왕자들에게 고르도록 했다. 여러 왕자가 앞다퉈 보물을 취하는데 광해군만은 붓과 먹을 골랐다고 한다. 선조는 13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모두 후궁의 자식들이었다. 세자를 정하기 전 선조는 여러 모양으로 왕자들을 시험했다. 『공사견문록』 1권 「공사견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돼 있다.


    “선조가 왕자들에게 ‘반찬 중에서 으뜸이 무엇이냐?’하고 질문했는데, 왕자들은 고기, 생선, 꿀떡 등 자신이 좋아하는 반찬을 대답했다. 그때 광해군은 ‘소금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이유는 소금이 없으면 아무리 귀한 음식도 맛을 낼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좋아하는 반찬이 아닌, 으뜸이 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의 본질을 올바로 파악하고 답한 광해군이 왕자들 가운데 가장 총명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광해군은 품성이 바르고 학문을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토대로 광해군은 어질고 현명한 군주감으로 손색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전쟁의 상흔을 어루만지고 대화합의 장을 열다

    전후 피폐해진 조선 상황과 주변국의 위협 등 국가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에 왕위에 오른 광해군이었기에 분열보다 화합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싶었다. 강한 왕권을 바탕으로 일사분란하게 민생을 안정시키길 원한 것이다.


    광해군은 즉위하면서 탕평을 인재 등용의 원칙으로 천명했다.


    “각기 명목을 만들어 서로 배척함에 있어 전혀 꺼리는 기색이 없으니, 이는 매우 국가의 복이 아닌 것이다. 지금은 의당 피차를 막론하고 오직 인재만을 천거하고 어진 사람만을 기용하여 다함께 시대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게 하라.”

    -『광해군일기』1권, 광해 즉위년 2월 25일


    임진왜란 전 서인 정철의 옥중 처결을 두고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면서 붕당은 서인, 남인, 북인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임진왜란 이후 북인이 광해군을 지지하면서 즉위를 도왔으며, 광해군 즉위 후 북인이 조정의 모든 권한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붕당을 묻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광해군 즉위 후 첫 영의정은 남인 이원익이 맡았으며 이항복, 이덕형, 기자헌 등 붕당에 관계없이 골고루 기용했다. 경험이 많은 서인과 남인의 원로대신들이 정승과 6조에 포진돼 국정 운영을 이끌었고, 조정의 언론과 인사를 맡은 이조판서와 이조전랑, 승지, 대간 등의 주요직은 북인들이 주도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광해군의 첫 인사는 아주 균형감 있는 연립 정권이었다.


    그러나 백성들의 삶은 처참할 지경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굶주림과 무질서 속에 도시는 황폐했다. 성혼의 『우계집』을 보면 “굶어죽은 시체가 길에 가득하여 얻어먹는 자가 수천 명이고, 죽는 자가 매일 60~70명 이상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에 광해군 초기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의미로 선혜청을 두어 ‘대동법(특산물로 바치던 세금을 쌀로 통일해 내게 한 조세 제도)’를 실시했다.


    그동안은 방납업자가 세금으로 내야 할 특산물을 구해 주는 대가로 폭리를 취하면서 백성들의 삶을 고단하게 했는데, 이런 방법의 폐단을 혁파하기 위해 대동법을 실시하게 된 것이다. 지방관과 방납업자의 커넥션 문제는 이전부터 있어 왔는데, 중종 때 조광조가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 특산물 대신 쌀로 세금을 내세 해야 한다는 ‘수미법’을 처음 주장했다. 그리고 선조 때로 넘어와 율곡 이이와 류성룡이 다시 수미법을 주장했지만 기득권의 반발로 실시되지 못했다. 이러한 법안을 광해군의 용단으로 광해군 즉위년에 실시하게 된 것이다.


    광해군은 토지 1결당 12두를 거두어 재산의 정도에 따라 세금을 징수하게 했다. 한마디로 부자 증세를 단행한 것이다. 토지 1결에서 약 300두의 곡식을 수확할 수 있었으니 3.5% 정도의 세금을 징수한 것이다. 당연히 부자들과 방납업자들의 반발도 컸다.


    대동법을 우선적으로 실시한 경기도 지역의 백성들은 매우 흡족해하면서 기념비까지 세웠다. 대동법을 지지하는 신하들은 대동법의 확대를 주장했지만 광해군은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게다가 지주들의 반대가 너무 컸기 때문에 타 지역으로의 확대가 전격적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후 인조 때 강원도로 확대되고 여러 왕을 거치며 대동법이 전국으로 확대되기까지 무려 100년이 걸렸다.


    대동법이 광해군의 완전한 업적으로 보기 어렵다는 일부 역사가들이 있지만, 백성들의 요구에도 이전 왕들이 실시하지 못했던 개혁 법안을 출발시킨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대동법은 백성들을 위한 정책이었고 만족스런 결과를 얻었으므로 광해군의 업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중 불타버린 궁궐을 재건해 왕실의 위엄을 되찾으려고 했다. 1616년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합해 후금을 건국하고 전통적 강자인 명나라에 도전장을 내민다. 이에 1618년 명나라의 요청으로 조선은 13,000여 명의 군사를 파병했다. 그런 비상시국임에도 광해군은 궁궐이 언제 완성되는지 관심을 놓지 않았다.


    광해군의 궁궐 건립은 창경궁을 끝으로 멈췄어야 했지만, 인왕산 아래 왕기가 서려 있다는 얘기를 들은 광해군은 정원군의 옛집을 빼앗는 등 인왕산 아래쪽으로 인경궁과 경덕궁을 추가로 짓는다. 어렵게 왕이 된 광해군이 왕권의 위협 요소를 제거하려는 생각에 몰두하면서 냉정을 잃었고, 이로 인해 국가적 재정 압박에 시달리며 민생을 어렵게 했다.


    조선 시대에는 혼군으로 불렸지만, 1930년대가 되면서 광해군이 강대국 사이에서 중립 외교로 조선을 이끌려 했다는 긍정적 평가가 나왔다. 또한 1970년대에는 민생 안정과 국가 재정을 안정시켰다는 재평가가 이뤄지면서 긍정과 부정의 이미지를 모두 가진 왕으로 평가 받고 있다.



    누구보다 백성을 사랑한 왕, 정조

    학문을 연구하고 왕권을 강화하다, 규장각

    1776년, 드디어 왕위에 오른 정조의 첫 번째 키워드는 ‘개혁’이었다. 정조는 권력가들만 잘 먹고 잘 사는 나라가 아닌, 백성 모두가 잘 사는 행복한 나라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론이라는 권력 집단에 의해 나라가 움직이는 비정상적인 구조를 바꿔야 했다. 세손 시절부터 꿈꿔 오던 개혁을 위한 첫 걸음은 규장각 설치였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창덕궁 중심에 규장각을 설치할 것을 명했다. 학문 연구 기관으로 출발한 규장각은 정조의 개혁 정책을 뒷받침할 인재들을 길러 내게 된다. 조선 시대 연구를 위한 자료들이 이때 만들어져 오늘날까지 이어 온 유산이 많아 규장각의 존재는 그 가치가 더욱 인정된다.


    정조는 집권 초기부터 노론 외척들에 대항할 인재들이 필요했다. 이에 규장각을 왕실 도서관으로 구상한 것이 아니라, 학식과 덕망을 갖춘 엘리트층 젊은 지식인들과 서얼 출신의 인재들을 규합하고 이들을 자신의 근위(近衛) 세력으로 양성하는 곳으로 만들려 했다. 기존 승정원이나 홍문관은 이미 타성에 젖은 기득권들이 주류였기에 정조가 의도하는 혁신 정치의 중추적 역할을 하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리하여 정조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마음으로 규장각이라는 문화 정치의 본부를 만드는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정조는 재위 1년(1777), 『서류소통절목』을 반포하며 서얼들이 벼슬에 오를 수 있도록 입법화했다. 실력은 있으나 신분제의 한계로 등용되지 못했던 인재들이 드디어 쓰임 받게 된 것이다. 또한 정조는 소외된 남인 실학파와 노론 출신 북학파 등 모든 학파의 장점을 수용하고 그들을 두루 등용해 개혁을 주도해 나갔다.


    특히 정조는 젊은 지식인들이 학문에 집중할 수 있는 ‘초계문신제도’를 만들었다. 초계문신은 규장각에 소속돼 학문을 연구하는 37세 미만의 문신들을 의미하는데, 초계문신으로 선발된 이들은 자신의 직무를 놓고 학문적 연구에만 전념하게 했다. 또한 매월 2~3회의 시험을 통해 학문적 성과를 평가하고 상벌을 통해 철저히 관리했다. 초계문신제도는 1781년 시작되어 정조가 사망한 1800년까지 19년 동안 총 138명의 학자들을 배출했다. 정조는 이들의 학문적 성장과 발전을 도우며 자신의 개혁 정치를 뒷받침하는 세력으로 성장시켰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정약용을 들 수 있으며, 당대 최고의 인재라 불리는 정약전, 서유구, 김조순 등이 모두 초계문신 출신으로 19세기 정치와 문화를 주도하는 정조의 싱크탱크 역할을 했다. 세종 때 ‘사가독서제’를 통해 문신의 학문적 성장을 도운 것과 유사한 제도로 학문을 사랑하고 학습의 중요성을 아는 군주들이 선택한 의미 있는 제도이다.


    정조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다. 개혁을 위해 일을 추진할 수 있는 사람, 즉 원동력이 필요함을 알았고, 능력을 갖춘 인재의 양성이 우선 과제임을 알았다. 정조는 집권 초기부터 규장각이라는 인재 양성 기관을 가동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변화를 견인할 인프라를 구축해 나갔다. 서두른다고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힘과 실력이 있어야 변화를 이끌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결연한 군주 정조는 서서히, 그리고 꼼꼼하게 칼을 갈며 때를 기다렸다.


    또한 인적 자원 확보를 위한 정조의 판단도 옳았다. 소외된 남인 실학파와 노론 출신 북학파, 그리고 신분의 한계로 등용되지 못했던 서얼들의 등용으로 실력 있는 자원들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새로운 기회를 얻은 그들은 왕에 대한 충성심 또한 높았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정조는 실력 있는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면서 개혁을 위한 시스템 구축을 견고히 해 나갔다. 이런 흐름을 보면 정조는 목표를 향해 나갈 때 어떤 일에 먼저 힘을 써야 할지 우선순위를 알았던 현명한 군주였다.


    리더의 사명 중 하나는 후배들을 성장시키는 것이다. 실력을 갖춘 인재로 성장시켜 그 또한 리더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리더십의 한 부분이다. 오늘날 기업과 조직에서도 구성원들의 성장을 위해 얼마나 많은 교육과 훈련에 투자하는가? 정조는 초계문신제도를 통해 인재들의 성장을 위한 충분한 학습의 시간과 기회를 제공하며 개혁의 동력으로 만들어 냈다.


    또한 리더는 인재를 등용하고 적재적소에 잘 배치해야 한다. 기업은 결국 사람이 일으키고 사람이 키워 가기 때문에 인재의 선발과 기용이 매우 중요하다. 정조는 인재 등용의 원칙을 새롭게 정비하며 능력 중심의 인재 선발을 통해 인적 자원의 풀을 넓혀 성과를 이끌어 냈다. 새로운 인재 등용 원칙에 당시 적지 않은 마찰과 갈등이 야기됐지만 정파적 견해를 떠나 국익을 중심으로 판단한 정조의 결단이 19세기 문화의 르네상스를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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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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