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연의보다 재미있는 정사 삼국지2
 
지은이 : 써에이스
출판사 : 원너스미디어
출판일 : 2020년 02월




  • 삼국지 팬이라면 단연코 빠져들 수밖에 없는, 유튜브 ‘써에이스쇼’의 오리지널 콘텐츠 ‘정사 삼국지’. 마니아층의 압도적인 선택을 받고 있는 써에이스의 삼국지는 어떻게 다를까? 많은 이들이 ‘삼국지’ 하면, 유비와 관우, 장비 세 사람의 도원결의를 시작으로 유비 중심의 세계관이 형성된 ‘삼국지연의’의 내용을 떠올린다. 하지만 삼국지연의는 역사를 바탕으로 과장과 판타지를 버무려 재밌는 이야기로 극화한 소설이다. 반면 정확한 사실과 철저한 고증을 통해 유의미함을 찾는 저자 써에이스는, 중국의 후한 말기와 위촉오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 ‘정사 삼국지’를 토대로 난세를 살았던 수많은 영웅들의 활약과 성쇠를 있는 그대로 들려주며 독자에게 새로운 시각과 유익함을 선사한다.


    삼국지연의보다 재미있는 정사 삼국지2


    적벽대전: 위촉오 삼국시대의 문이 열리다

    한중왕 유비, 관우의 죽음<
    /P>217년 유비는 하우연과 장합이 지키고 있었던 한중을 공격하기 위해 오란과 뇌동을 파견한다. 이에 맞서 조조는 조홍과 조휴에게 5만의 군을 주어 촉군을 막게 하는데, 조홍과 조휴는 하변(下辯)에서 오란과 뇌동군을 격파한다.


    장비와 마초는 조조가 군사를 보냈다는 소식을 듣고 오란과 뇌동을 구원하기 위해 출격하지만 그들이 이미 졌다는 소식을 듣자 군을 되돌린다.


    조조는 유비가 한중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9월에 직접 군을 이끌고 장안으로 출진하여 유비를 견제한다.


    이 시기에 조조는 이미 30년이라는 시간 동안 전장을 누빈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매해 직접 군을 이끌고 출진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조조가 자리를 비운 틈을 노려 반란이 일어나곤 했는데 이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허도에서는 헌제를 옹립하려는 무리들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북쪽에서는 오환족과 선비족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다.


    허도에서의 구데타 시도는 초기에 진압되고, 오환족은 조조가 파견한 조조의 넷째아들 조창과 전예(田豫)에 의해 진압된다. 전예는 유비가 공손찬에게 의탁했을 때부터 유비를 찾아서 섬겼던 인물이었지만 이후, 노모를 모시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유비와 헤어지고 당시에는 조조의 섬기고 있었다.


    조창은 도망가는 오환족을 맹렬히 추격해서 수천의 오환족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는다. 이런 조창을 활약을 보게 된 선비족의 수령 가비능은 오환족과 연합하는 대신 조조에게 귀순해버린다.


    219년에 유비는 다시 한 번 한중을 공격하고, 조조 역시 이에 맞서 직접 출진한다. 이때, 하후연은 유비군에 비해 병력이 열세였던 장합을 지원하기 위해 자신이 데리고 있던 병력의 반을 떼어 구원병으로 보내주었는데, 유비군의 황충은 오히려 이를 기회로 삼아 하후연을 공격한다.


    황충의 판단은 제대로 들어맞아 하후연에게 승리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죽이는 데까지 성공한다. 하후연은 위나라에서 큰 활약을 펼쳐온 서부의 사령관이자 조조의 맹장이었기 때문에 황충이 하후연을 죽인 일은 엄청난 공적이었다.


    황충이 하후연이라는 거물급 적장을 꺾을 수 있었던 데에는 황충의 활약뿐만 아니라 적의 약점을 파악해 공격을 조언한 법정의 공 또한 매우 컸다.


    유비가 법정을 아낀 것과 관련된 일화가 있다. 한번은 유비가 화살 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전장에 남아 있자 법정이 유비를 설득하기 위해 유비 앞에 섰다. 그러자 유비는 자신보다도 법정이 화살에 맞을 것을 걱정하여 함께 퇴각했다고 한다.


    황충이 법정과 함께 하후연을 죽이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장합은 패잔병을 이끌고 한중에서 도망친다.


    평소 장합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던 유비는 장합을 놓치자 응당 장합을 잡았어야지. 하후연은 잡아서 무엇을 하겠느냐?라면서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하후연의 죽음을 듣게 된 조조는 직접 군을 이끌고 한중을 탈환하기 위한 맹공을 시작한다. 하지만 유비는 수비를 견고히 하고 지공을 펼치며 조조의 병력을 깎아먹는 전략을 사용했고, 결국 조조는 한중에서 철수할 것을 고민하게 된다.


    이때 조조는 혼잣말로 한중이 먹음직스럽지만 실제로는 먹을 게 없다. 는 의미로 닭의 갈비뼈 부위인 계륵을 말한다. 조조는 홀로 상념에 빠져 중얼거린 말이었는데, 이 혼잣말을 들은 신하들 중 오직 양수(楊脩)만이 조조가 한중에서 철수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양수는 두뇌회전이 매우 빨라서 어렸을 때부터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줬던 인물이다. 한번은 조조가 아무 말 없이 정원의 문에 살 활(活)자를 쓰고 돌아간 적이 있었는데 아무도 이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양수가 나서서 문에다 활을 쓰면 넓을 활(闊)자가 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정원의 규모가 너무 크다는 사실을 정원사에게 알려준다.


    정원사들이 양수의 말대로 정원을 아담하게 다시 꾸몄더니 조조는 매우 만족했다고 한다. 조조는 후계자를 정하기 위해 아들들을 시험하곤 했는데, 조식이 유독 뛰어난 재능을 보인 탓에 진지하게 첫째인 조비가 아닌 조식을 정식으로 후계자로 삼을 생각을 했다고 한다.


    특히나 조식은 조조가 질문을 할 때마다 항상 청산유수처럼 답변을 내놓아서 크게 총애를 받았는데, 사실 이는 조조가 물어올 예상 질문을 양수가 미리 준비해서 조식에게 알려준 것이었다.


    양수는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겸손을 모르고 자신의 재능만을 믿고 설쳤기 때문에 조조는 시간이 흐를수록 속으로 양수를 의심하고 미워했다.


    계륵을 중얼거린 조조의 심중을 알아챈 양수는 자신이 간파한 것을 주변에 알리며 철수할 준비를 하게 한다. 그러자 이를 알게 된 조조는 결국 참던 것이 폭발하여 양수가 군의 사기를 동요시켰다는 이유로 그를 처형한다.


    조식은 양수라는 날개를 잃게 되자 후계자 싸움에서 크게 밀리게 된다. 그러나 양수가 죽은 것 외에도 후계자 선정에서 마이너스가 되는 큰 요인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조식이 술만 마시면 개가 된다는 것이었다.


    조식은 음주 문제로 여러 번 사고를 치면서 점차 조조의 눈 밖에 나게 된다. 반면에 조비는 가후의 도움을 받으며 후계자 경쟁에서 앞서나간다.


    조조는 또한 가후에게 조비와 조식 중 누구를 후계자로 삼을지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가후는 바로 답하지 않고 곰곰이 생각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에 조조가 왜 대답을 안 하는지를 묻자 가후는 “원소와 유표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돌려서 답한다.


    이는 원소와 유표가 모두 장남을 후계자로 정하지 않음으로써 멸망을 초래하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을 암시한 말이었다. 조조는 가후와의 대화를 통해 마음을 정하게 되고, 마침내 조비를 태자로 책봉한다.


    계륵 사건 이후, 조조는 결국 한중에서 철수한다. 그리고 철수하는 과정에서 한중 주민 대부분을 위나라로 이주시킨다.


    손권은 218년 즈음에 자기 아들과 관우의 딸을 혼인시킴으로써 관우와의 사이를 돈독히 하려고 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때 관우는 사신에게 모욕적인 발언을 하면서 손권의 제안을 거절했다.


    혼인 제안을 거절했던 일을 논외로 치더라도 관우는 시종일관 손권에게 거만하고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사실 손권은 겉으로는 관우의 비위를 맞춰주면서도 속으로는 이를 갈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때마침 조조가 손권에게 유비를 칠 것을 제안한 것이다. 조조의 제안을 받은 손권은 기다렸다는 듯 즉시 행동에 나선다.


    한편 관우는 우금을 상대로는 대승을 거두었지만 여전히 조인과 만총(滿寵)이 버티고 있는 번성은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조인과 만총은 서황이 이끄는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관우로부터 번성을 지켜내는 데에 성공한다. 반면에 관우 역시 유봉과 맹달에게 원군을 요청하지만 마찰이 있었던 유봉과 맹달은 서로 다투다 관우의 요청에 응하지 않는다.


    손권의 명으로 관우를 치러 나선 여몽은 번성을 함락시키지도 못하고, 원군을 받지도 못하고 있던 관우에게 일부러 자신이 병이 걸렸다는 헛소문을 퍼뜨린다. 그리고 당시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던 육손을 후임으로 내세워 관우가 방심하도록 만든다.


    여몽의 계책은 그대로 들어맞아 관우는 손권군이 위험하지 않다고 방심하여 남군을 지키고 있던 병력을 번성을 치는 쪽으로 이동시킨다. 그러나 관우는 계속 번성을 함락하지 못한 채 시간을 지체하게 되고, 마침내 여몽은 군을 이끌고 남군을 공격한다.


    당시 관우의 근거지였던 강릉과 공안(公安)은 남군태수였던 미방과 사인이 지키고 있었는데 관우는 이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을 지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질책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미방과 사인, 두 사람은 관우를 원망하게 된다.


    여몽을 보좌하고 있던 우번(虞翻)은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미방과 사인을 회유한다. 우번의 회유에 미방과 사인은 순순히 여몽에게 투항하고, 여몽은 너무나도 손쉽게 강릉과 공안을 차지하게 된다.

    손쉽게 형주를 손에 넣은 여몽은 유화정책을 펼쳐 형주의 인심을 얻어내고, 끝까지 저항하던 세력들은 육손의 활약에 무너진다.


    여몽이 공격해왔다는 소식을 들은 관우는 번성의 포위를 풀고 급히 형주로 돌아가지만 이미 자신의 근거지는 빼앗긴 뒤였다. 게다가 관우의 병사들은 오랜 싸움으로 인해 지쳐있었고, 형주에 있는 가족들로부터 여몽이 백성들을 잘 보살펴주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여 대거 이탈하게 된다.


    결국 관우는 여몽의 군사로부터 달아나다 사로잡히는데, 이때 단 10여 명의 기병만이 그를 뒤따르고 있었다고 한다.


    손권은 관우의 능력이 아까워 그를 처형하는 것을 망설인다. 손권이 관우를 죽이는 일을 망설이자 그의 가신들은 “이리 새끼는 기를 수 없는 법이니 훗날 반드시 해다 될 것입니다. 조조는 즉시 그를 제거하지 않아 스스로 큰 우환을 불러들여 도읍을 옮길 의논을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를 살려둔단 말입니까?”라고 간언했다. 결국 손권은 관우를 회유할 생각을 버리고 참수했다고 한다.


    유비군의 든든한 한축이자 만인지적이라 불리던 관우는 이렇게 최후를 맞이한다.


    조조의 죽음, 이릉대전

    220년 1월, 낙양에서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나라의 왕 조조가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조조는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못했으니 장례가 끝나면 모두 상복을 벗고 군을 이끄는 장수들은 주둔지를 떠나지 말라. 내 시신에는 평상복을 입히고 무덤에는 금은보화를 묻지 말라.”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조조가 죽자 낙양의 가신들은 우왕좌왕한다. 그리고 이 틈에 30년 가까이 조조군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던 청주병이 제멋대로 해체해 뿔뿔이 흩어짐으로써 혼란은 더욱 가중된다.


    하지만 가규와 사마의가 나서서 혼란을 진정시키고 조조의 장례를 치르자 낙양의 기강이 다시 바로잡혔다고 한다.


    220년, 관우가 죽고 형주마저 손권에게 빼앗긴 유비에게는 악재가 이어진다. 생전에 관우는 번성을 공략하던 중에 유봉과 맹달에게 지원군을 요청했지만 이들은 응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관우는 손권의 손에 사로잡혀 죽었기 때문에 유비는 유봉과 맹달을 원망하고 있었다.


    결국 유비에게 벌 받을 것이 두려운 데다 유봉과의 불화로 불만이 쌓여 있었던 맹달은 위나라로 투항한다. 유비는 맹달이라는 유능한 인재뿐만 아니라 맹달의 투항으로 방릉(房陵), 상용, 서성(西城) 3군마저 위나라에 빼앗긴다.


    맹달과 유봉을 잃은 뒤에도 유비의 불운은 끝나지 않았다. 유봉이 자결하고 얼마 후에 법정과 황충마저 세상을 떠난 것이다. 특히나 법정을 매우 아꼈던 유비는 그가 죽자 며칠 동안이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220년 10월 28일, 오랜 꼭두각시 노릇에 지친 헌제는 황제 자리를 조비에게 넘겨준다. 그리고 이로 인해 400년이라는 세월동안 이어진 한나라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된다.


    황제가 된 조비는 헌제를 산양공(山陽公)에 봉했고, 그는 조용히 남은 삶을 살다 234년에 사망한다. 하지만 조비가 황제에 오르는 과정에서 헌제를 살해했다는 거짓 소문이 퍼졌고, 이를 들은 유비는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며 촉한을 건국한다.

    스스로 황제가 된 유비였지만 익주만을 가지고는 조비, 손권과의 세력 다툼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유비는 우선 형주를 되찾기로 계획을 세운다.


    유비가 손권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자 조운은 “나라의 적은 조조이지 손권이 아닙니다. 먼저 위를 멸하면 오는 곧 스스로 굴복할 것입니다. 위를 놔두고 오와 먼저 싸운다면 싸움은 간단히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진언한다.


    유비에게는 또한 황권이라는 걸출한 인재가 있었는데 그는 자신이 선봉에 서서 적의 약점을 파악할 테니 유비에게는 후방에 머물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유비는 이들의 말을 듣지 않고 직접 선봉으로 나서며 출진을 강행한다.


    이 결정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사실 유비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아무래도 막강한 조비보다는 손권이 그나마 싸워볼 만한 상대라고 여겼을 것이고, 형주를 빼앗을 때의 일등공신이었던 여몽이 죽고 없었기 때문에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군을 진군시키기도 전에 유비에게는 또다시 악몽 같은 소식이 날아든다. 장비가 휘하 부하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장비는 휘하의 부하들에게 유독 가혹했는데, 일찍이 이를 본 유비가 “형벌로 죽이는 것만으로도 이미 지나친 상황인데 매일 채찍질까지 하면 이는 화를 취하는 길이다.”라고 장비에게 경고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장비는 유비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자신의 부하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매질을 계속한 탓에 결국 궁지에 몰린 부하들이 장비를 죽인 것이었다. 이렇게 유비는 평생을 함께 한 버팀목이었던 관우와 장비를 모두 잃게 된다.


    유비가 오를 공격할 움직임을 보이자 손권은 제갈근을 보내 유비에게 화친을 제안한다. 하지만 유비는 오의 화친 제안을 거절한다. 게다가 이 틈을 노려 북쪽의 조비 또한 손권을 공격할 기회를 노린다.


    졸지에 촉과 위, 양군의 협공을 받는 궁지에 몰리게 된 손권은 조비에게 스스로 신하가 되겠다는 뜻을 보인다. 손권이 스스로 숙이고 들어오자 조비는 공격 계획을 철회하고는 손권을 오왕에 봉한다.


    일시적으로 머리를 조아린 덕에 잠시나마 위나라의 공격에 대한 걱정을 없앤 오나라는 유비를 상대로 국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손권은 5만 병사를 지휘할 대도독으로 육손을 임명하고 한당, 주연, 반장, 서성에게 그를 보좌하게 한다.


    유비는 직접 군을 이끌고 출진했지만 이미 오랜 세월 함께 한 백전노장이었던 관우, 장비, 황충은 이미 고인이 되었으며 조운, 위연, 황권, 제갈량은 후방을 지키기 위해 남겨져 있었기 때문에 촉나라의 군대는 상대적으로 전투경험이 적은 장수들이 지휘하고 있었다.


    이때 유비 군의 병력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대략 5만에서 10만 사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비군은 선봉에 선 풍습(馮習)과 오반(嗚班)이 무현(巫縣)에서 오나라 군을 격파하면서 기선을 제압한다.


    유비 군은 기세를 늦추지 않고 장강을 따라 오나라 군을 밀어붙이고, 육손이 지휘하는 오나라 군은 이릉까지 밀리게 된다. 그리고 이릉에서 군을 재정비한 육손은 방어진을 치고 장기전에 돌입한다.


    육손은 다른 장수들로부터 유비를 공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자 유비의 진영이 험준한 곳에 있다는 것을 이유로 공격에 나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한번은 손권의 친적이었던 손환(孫桓)이 단독으로 군을 이끌고 유비의 선봉대를 공격하러 나섰다가 유비에게 포위된 적이 있었는데, 장수들은 손환이 손권을 동족이니 도와야한다고 외치지만 육손은 이마저도 거절했다.


    육손이 웅크리고만 있자 답답함을 느낀 유비는 오반에게 수천의 병사를 주며 오나라 군대를 도발하게 한다. 그러나 육손은 유비군의 이런 행동 뒤에는 반드시 음흉한 계획이 있을 것이라며 도발에 응하지 않는다.


    육손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결국 유비는 산골짜기에 숨어 있던 8,000명의 복병을 복귀시킨다. 육손은 이렇게 대략 반년 동안 지키기만 하면서 유비군의 허점을 관찰한다.


    222년 7월, 마침내 육손은 유비의 전선이 길게 형성된 것을 보고 공격할 타이밍을 잡는다.


    육손은 화공으로 유비군을 총공격하고 수군 또한 적진으로 보내 공격에 나선다. 유비군은 대혼란에 빠지고, 혼란에 빠진 유비군 덕분에 그동안 포위된 성안에 갇혀 있던 손환도 성에서 나와 유비군을 협공한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육손은 풍습을 포함한 여러 촉나라 장수들의 목을 베고, 40여 곳에 달하던 유비군의 진영을 모조리 격파해버린다.


    패퇴하던 유비는 마안산(馬鞍山)에 올라 군대를 수습한 뒤 가까스로 반격을 시도하지만 육손의 군대에 대패하여 무너진다.

    이때의 전투로 유비는 처참한 패배를 보게 된다. 기록에 따르면 죽은 병사들만 헤아려도 수만 명이 넘었으며, 그 시체들이 장강에 둥둥 떠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백미라는 고사성어로 유명한 마량 또한 이 혼란 속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릉에서 참패한 유비는 겨우 목숨만 건진 채 백제성(白帝城)으로 도망친다.


    서성과 반장 등 오나라의 장수들은 육손에게 “지금 공격하면 유비를 반드시 붙잡을 수 있다.”라면서 공격하길 권하지만 육손은 위나라가 공격해올 것을 걱정하며 군을 철수시킨다. 그리고 육손의 예측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위나라가 오나라로 침공해온다.


    유비는 이릉에서의 패배로 수많은 장수들과 병사들을 잃어 재기불능에 가까운 타격을 받게 된다. 하지만 유비의 악몽은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육손의 공격으로 퇴각로가 끊긴 황권이 위나라에 투항해버린 것이다.


    이때 황권을 따라 위나라에 투항한 촉나라 인재들의 수가 300명을 넘었다고 하니 촉나라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222년 9월, 조비는 손권이 아들을 인질로 보내지 않았다는 것을 핑계 삼아 오나라를 공격한다.


    조비가 오를 공격하려 하자 유엽(劉曄)과 가후는 ‘오를 공격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면서 이를 반대하지만 조비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조휴를 대장으로 삼아 동구(洞口)를 공격한다. 하지만 양군은 승부를 내지 못하며 조휴는 소득 없이 군은 철수시킨다.


    조휴와 조진(曹眞)은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고 조조의 배려로 조비와 함께 자랐던 인물들로 조비가 황제가 된 후 위나라 군대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게 된 인물들이다.


    한편 조휴가 동구를 공격했던 것과 같이 조진은 주연이 방어하고 있던 강릉성을 공격한다. 조진의 공격에 맞선 주연은 단 5,000명의 병력만으로 수만에 달하는 조진의 군대를 상대하여 반년 넘게 열심히 싸웠고, 결국 조진 역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군을 되돌린다.


    또한 유수구에서는 조인이 오나라의 주환과 대치하지만 주환의 활약 덕분에 조인은 공격을 포기하고 철군한다. 이처럼 동구, 강릉, 유수구에서 모두 실패한 조비의 오나라 원정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이 난다.


    한편 서쪽에서는 병으로 쓰러져 백제성에 머물고 있었던 촉한의 황제 유비가 세상을 떠난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