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쓸모
 
지은이 : 최태성
출판사 : 다산초당
출판일 : 2019년 11월




  •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역사에서 답을 찾았다는 저자는 삶이라는 문제에 대한 가장 완벽한 해설서는 역사라고 말한다. 도저히 풀리지 않는 문제에 부딪쳤을 때 해설에서 도움을 얻듯, 우리보다 앞서 살았던 인물들의 선택과 그 결과가 담긴 역사에서 인생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배워서 어디에 쓰냐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반박이라도 하듯, 저자는 이 책에서 역사를 철저히 실용적인 관점으로 바라본다. 한국사와 세계사를 넘나들며 우리 삶에 도움이 되는 키워드를 뽑아내고, 자신만의 궤적을 만들며 삶을 살아간 이들을 멘토로 소환한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의 쓸모』는 수백 년 전 이야기로 오늘의 고민을 해결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세상에서 가장 실용적인 역사 사용 설명서다. 외워야 할 것이 많은 골치 아픈 역사를 왜 배워야 하는지 의문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역사의 쓸모


    역사가 내게 가르쳐준 것들

    창조 : 세상을 바꾸는 생각의 조건

    창조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또 있습니다. 바로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입니다. 세종대왕은 참 대단한 분입니다. 한글을 만든 목적부터가 ‘민본’이에요. 백성들을 위해 만든 거지요. ‘훈민정음’의 뜻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입니다. 『훈민정음 언해본』서문을 보면 이렇게 나오죠.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그걸 해석하면 이래요.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서 말과 문자가 서로 맞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자기 뜻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게 안타까워서 새로 글자를 만들었으니 쉽게 익혀서 편하게 쓰라는 겁니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는 엄청난 일이에요.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까막눈이었던 백성이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죠. 그 파장은 엄청납니다. 지식의 독점은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서양의 지식인들이 라틴어로 자기들끼리 지식을 독점했듯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어요. 조선시대에 대부분의 일반 백성은 글을 읽고 쓸 수가 없었습니다. 공부는 먹고 사는 걱정에서 해방된 양반들이나 할 수 있었어요.


    지배층은 피지배층이 공부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억압된 자들이 똑똑해지는 순간 이 상황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테고, 그것을 바꾸려 할 거 아녜요? 그럼 자기들이 골치 아파지잖아요. 그래서 상민이나 여자는 공부를 시키지 않았던 거예요. 그냥 순응해서 살길 바랐으니까요.


    그런데 한글이 반포된 지 3년 만에 한글 벽서가 붙습니다. 어느 정승을 비판하는 내용이었어요. 이건 그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사건이에요. 사극을 보면 벽서 앞에서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잖아요. 그 사람들 마음이 어떻겠어요? 문제의식을 느끼겠죠? 그저 순응하고 살아가던 사람도 그런 글을 자꾸 접하면 새로운 게 보이고 몰랐던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이 사회의 모순을 깨닫고 문제의식을 공유할 때 세상이 변할 수 있어요. 지식을 쌓고 정보를 나누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일입니다.


    창조나 창의력을 말하면 사람들은 자꾸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고 해요. 그러나 아무리 새로워도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으면, 열광하지 않으면 널리 쓰이지 않습니다. 저는 소수를 위한, 소수의 권익을 대변하는 기술은 역사의 흐름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자유의 확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어요. 폭발력을 지닌 창조적 발명은 소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수를 대변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정한 창조인가 생각해봐야 할 때입니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고 하기 전에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 자유로워지고 편안해질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 고민을 바탕으로 한 창조만이 오랜 시간 생명력을 가지고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며 세상을 바꿔나갈 테니까요.


    협상 : 하나를 내어주고 둘을 얻는 협상의 달인들

    우리 역사에서 협상의 달인을 꼽는다면 저는 제일 먼저 고려의 서희를 말할 겁니다. 서희는 고려시대의 외교가인데요, 간단하게 그를 설명하자면 몇 마디 말로 전쟁을 막고 땅을 얻어낸 사람입니다.


    서희가 재상으로 있을 때 고려는 송나라와 국교를 맺고 거란을 멀리했습니다. 그런데 거란의 장군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와요. 고구려의 옛 땅은 모두 거란의 차지인데, 고려가 영토를 침범하고 있어서 토벌하러 왔다고 으르렁댑니다. 80만 병사를 이끌고 왔으니 당장 나와서 항복하라고 협박문을 보내죠.


    일단 서희는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정말 고려를 칠 생각으로 들어왔다면 거침없이 밀고 내려와야 할 텐데 소손녕은 고려 국경을 넘자마자 고구려 땅을 달라고 하면서 강화 요청을 했기 때문입니다. 보통은 당하는 쪽에서 강화 요청을 하잖아요. 먼저 공격한 사람이 우리 그만하고 화해하자 하지는 않거든요. 게다가 대군을 끌고 왔다고 큰소리를 떵떵 쳐놓고 강화를 맺자고 하니까 더 이상했던 거죠. 그래서 거란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보려 합니다. 땅을 돌려받는 게 목적은 아닐 거라고 예상한 겁니다.


    소손녕을 만나 보니 역시 분위기가 묘했어요. 고구려 땅을 달라고 하긴 합니다. "너희는 신라를 계승한 나라니까 고구려 땅은 우리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죠. "아니다. 우리야말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다. 나라 이름도 고려라고 하지 않았느냐." 서희도 이렇게 반박해요. 그런데 사실 이건 탐색전이에요. 대화의 핵심은 이게 아닙니다. 고구려 계승이니 신라 계승이니 하는 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서로가 어떤 패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는 과정일 뿐입니다.


    서희와 소손녕은 자기 패는 보여주지 않고 상대의 패를 읽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서희는 거란군이 전쟁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빨리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싸울 의도로 대군을 끌고 왔으면 얼른 공격해야 하는데 땅을 돌려달라고만 하잖아요. 그러면서 왜 가까운 거란하고는 교류하지 않고 송나라랑 친하게 지내느냐고 슬쩍 진짜 패를 드러냅니다.


    옳다, 이거였구나 서희는 소손녕의 속내를 정확히 간파합니다. 거란이 정말 싸워야 하는 나라는 송나라예요. 당을 이어 중원에 들어선 송나라를 정복해야 하는데, 거란 입장에서는 송나라와 고려가 친한 게 문제였어요. 군사를 모아 송나라에 쳐들어가면 후방이 비어버립니다. 이때 고려가 후방을 칠까봐 염려되었던 거죠.


    거란의 패를 읽은 서희는 탐색전을 끝내고 먼저 제안합니다. "우리도 너희랑 친하게 지낼 수 있어. 그런데 고려와 거란 사이에 여진족이 있잖아. 그 지역을 여진족이 다스리고 있어서 교류가 힘들어. 여진족을 몰아내고 우리가 그 땅을 관리할 수 있게만 해주면 얼마든지 거란으로 가서 왕에게 인사를 드릴 수 있어." 어떻습니까? 저는 서희의 협상력에 무릎을 쳤습니다. 고려와 거란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뜬금없이 제3자인 여진을 끌고 들어와서 완전히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어버린 겁니다. 대단하지 않나요? 소손녕은 바로 넘어옵니다. "정말 그렇게 해줄 거야?" 이에 서희가 걱정하지 말라며 긍정을 합니다. 이 회담으로 고려는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얻게 됩니다. 거란에 땅을 줘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오히려 거란한테서 땅을 받아 온 거예요.


    협상이란 이처럼 서로가 윈윈할 수 있는 조건을 찾는 일입니다. 다짜고짜 들이밀면서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떼를 써서도 안 되고 협상 테이블에 앉기도 전에 겁을 먹고 손 놓고 있어서도 안 돼요. 섬세한 감각을 발휘해서 상대의 패를 읽으며 상대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상대의 진짜 속내는 무엇인지를 알아차려 양쪽 모두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제안을 해야 합니다.


    어떤 종류의 협상 테이블이든 그 앞에 나서기 전에 서희의 외교술을 떠올려봤으면 좋겠습니다. 배짱을 가지고 섬세하게 상대를 관찰하면서 본인의 패를 놓지 않는다면 결국 원하는 것을 얻게 되리라고 역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소통 :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법

    누군가와 소통하기 위해 역사만큼 자연스러운 도구도 없습니다. 2018년 2월, 북한 고위급 인사들이 청와대를 방문했어요. 김정은의 여동생이자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을 맡은 김여정, 그리고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인 김영남입니다. 두 사람은 먼저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을 참관하고 다음 날 문재인 대통령과 오찬을 가졌습니다. 개막식에서 남북한 선수들이 단일팀으로 함께 입장하는 모습에 감격했다던 김영남 위원장은 "역사를 더듬어보면 문씨 집안에서 애국자를 많이 배출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문익점 이야기를 꺼내지요. 목화씨를 갖고 들어와서 인민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고요.


    한반도에 없던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 덕분에 백성들은 부드러운 무명옷을 입게 되었고, 겨울에는 목화솜을 넣어 솜옷도 만들어 입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의 삶의 질이 얼마나 높아졌겠어요. 우리나라 의복 문화가 문익점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김영남 위원장은 문익점이라는 인물을 내세워 문재인 대통령과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왜 그랬던 걸까요? 효과적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그랬던 거예요. 그는 바라는 것이 있었을 겁니다. 남북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더욱 활발한 교류와 경제 협력을 위해 다시 만남의 기회를 갖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겠지요. 그런데 이대로 전달하면 너무 공식적인 말이 되어버리잖아요. 지나치게 딱딱하거나 무겁지 않고 자연스럽게 언급하고 싶은데 말이지요.


    좋은 관계는 좋은 대화로 만들어집니다. 개인 간에도 그런 법인데 나라를 대표해 만나는 경우야 오죽하겠습니까. 어떤 소재를 택해야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고 원하는 바를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할 수밖에요. 나와 상대방이 관심사를 공유하고 서로의 말에 공감하면서 마음을 열어야 비로소 진정한 소통이 가능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익점 이야기는 아주 좋은 연결 고리였다고 생각합니다.


    소통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면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이라는 풀이가 나옵니다. 언뜻 보면 쉬울 것 같지만 사실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죠. 같은 문장을 보고도, 같은 말을 듣고도 서로 이해하는 바가 다른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사람마다 자라온 환경과 가치관, 지향점이 달라서 같은 말을 두고도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상대방에게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 주길 원하면 안 됩니다. 대신 찰떡같이 말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해요. 내 메시지를 찰떡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역사입니다. 한 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주제가 있는 이야기를 던지는 것이기 때문에 머리와 마음으로 이해하게 되거든요.



    한 번의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

    김육 : 삶을 던진다는 것의 의미

    이런 주제가 나올 때마다 제가 꼭 소개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김육입니다. 김육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사람도 많을 거예요. 이분에 대해서는 짧고 굵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대동법의 아버지 더 이상의 수식어는 필요하지 않아요. 그만큼 대동법 시행에 온 힘을 쏟은 인물입니다.


    대동법이란 쌀로 세금을 내는 제도예요. 당시 백성이 내는 세금은 크게 세 종류가 있었습니다. 각각 전세, 역, 공납이라고 했는데요. 전세는 토지에서 생산한 것의 일부를 내는 거니까 지금으로 치자면 소득세 같은 것입니다. 역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거예요. 요역은 국가에서 궁궐을 짓거나 길을 만들 때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이고, 군역은 군대에 가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는 거고요. 어찌 보면 지금도 존재하는 세금 형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문제는 공납입니다. 공납은 지역 특산물을 바치는 거예요. 백성들에게는 공납이 굉장히 큰 부담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제주도의 특산물은 귤이잖아요. 지금이야 마트에 가면 산처럼 쌓여 있지만, 옛날에는 귤이 무척 귀했어요. 운송 수단도 변변치 않은데 한반도의 가장 남쪽, 그것도 섬에서 가져와야 했으니 희소가치가 클 수밖에 없었죠. 왕이 공신이나 과거시험에서 일등을 한 장원에게 주는 하사품이 귤 몇 알 정도였습니다. 하사품을 받은 사람들은 귤을 가지고 와서 가족들과 한 쪽씩 나눠 먹었어요. 그 정도로 귀한 과일이었습니다.


    제주도 백성들은 당연히 귤을 공납으로 바쳐야 했습니다. 어느 마을에 귤 100상자 하는 식으로 할당량이 다 있었어요. 귤나무에 귤이 열리기 시작하면 관리들이 찾아왔습니다. 아직 콩알만 한 귤을 모조리 세어서 나중에 몇 개를 제출하라고 미리 정해줍니다. 100상자를 채우기 위해 집집마다 분배를 해주는 거죠.


    그런데 처음에 열린 귤이 모두 수확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썩는 것도 있고, 떨어지는 것도 있고, 새나 동물이 몰래 먹는 경우도 있겠죠. 게다가 제주도에는 바람이 엄청나게 많이 불잖아요. 하지만 그런 변수는 고려하지 않아요. 사정을 봐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썩은 귤을 조정에 바칠 수도 없어요. 공납용 귤을 준비하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귤나무에 뜨거운 물을 붓는 농민도 많았다고 합니다. 몰래 귤나무를 죽였던 거예요.


    대동법은 공납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개혁안이었습니다. 그냥 쌀로 세금을 내자는 거예요. 그때의 쌀은 화폐랑 똑같았어요. 조정에 바칠 양을 채우기 위해 이 집, 저 집 개수를 할당할 필요도 없어요. 백성들 입장에서는 무척 반가운 내용이죠. 그런데 대동법이 특히 혁명적이었던 건 토지에 부과된 세금이라는 점이에요. 공납은 집집마다 부과되는 것이라 누구나 다 내는 것이었다면 대동법은 토지 한 결마다 세금이 매겨져 땅을 가진 사람만 세금을 내게 하는 제도였어요. 토지가 없거나, 적게 소유하고 있던 일반 백성에게는 감세인 반면 넓은 토지를 소유한 양반 지주에게는 증세였던 셈이죠.


    이 법안이 시행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조정 대신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정책을 통과시킬 리가 없으니까요. 요즘 같아도 쉽지 않을 텐데 양반이 곧 지주인 신분제 사회에서는 더욱 어려운 일이죠. 하지만 공납으로 인한 문제가 극심해져서 결국 광해군은 경기도에서만 대동법을 시행하기로 합니다.


    경기도에서만 시해되던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 무려 100년이 걸립니다. 한 세기가 흐른 거죠. 그 긴 시간 동안 대동법 확산을 위해 인생을 바친 사람이 바로 김육이에요.

    호서대동법이 시행되고 김육이 어떤 말을 했는지가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쉽게 말해 인터뷰 같은 건데요. 기분이 어떠냐고 묻는 말에 김육은 이렇게 답합니다. “나는 학문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저 백성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이 줄어서 너무 기분이 좋다.” 백성이 배고픈데 무슨 학문이 필요하냐는 거예요. 성리학이며 양명학이 무슨 소용인가, 백성이 잘살면 최고지. 이것이 바로 그의 사상이었습니다.


    70세에 사직 상소를 올렸던 김육은 79세에 유언 상소를 올립니다. 자기가 죽으면 대동법 시행이 취소될까 봐 너무 두렵다는 겁니다. 이제 병들어 곧 죽을 몸이 되었으니 호남에도 빨리 시행해달라고, 김육은 효종에게 마지막 간청을 합니다. 그리고 며칠 뒤에 세상을 떠납니다.


    아픈 몸으로 한 글자, 한 글자를 써내려 가면서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도 끝까지 백성을 걱정했을 겁니다. 김육은 평소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일, 바로 만물을 사랑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일에 인생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애물제인이라는 목표가 있었기에 어떤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고 꾸준하게 자신의 길을 걸었을 것입니다.


    인생은 단 한 번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더욱 해답에 목말라 있는지 모릅니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기 위해 책을 읽고 조언을 듣고 때로는 직접 부딪쳐가면서 답을 구합니다. 저는 김육이 ‘한 번의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자신의 일생으로 답했다고 생각합니다. 삶을 던진다는 것의 의미를 보여주는 분이죠.


    박상진 : 꿈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여야 한다

    여러분은 학창 시절의 꿈을 기억하시나요? 교사였을 때 저는 3월에 새 학기가 시작되면 학생들에게 꿈을 물어보곤 했습니다. 대개 "제 꿈은 변호사예요", "CEO예요", "공무원이에요" 하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이건 대부분 직업이잖아요. 대한민국 학생들에게 꿈은 곧 직업이에요. 직업 이름을 대지 않는 학생들의 꿈도 출세, 성공 이런 식입니다. 원하는 직업을 얻거나 성공한다고 해서 삶이 끝나는 것도 아닌데 딱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이러니 정작 꿈을 이뤄도 더 이상 뭘 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 순간 참 많이 흔들려요. 달성해야 할 목표가 사라지니 공허하기도 하고, 내가 원했던 삶이 이런 것이었나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성공했다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제대로 이끌어 가지 못하고 도리어 망쳐버리는 모습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됩니다. 이런 일이 생기는 까닭은 그들의 꿈이 명사였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되느냐가 중요했을 뿐, 어떻게 사느냐에 대한 고민은 없었던 것이죠.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일본은 조선의 엘리트들을 앞세워 식민 통치를 하려고 했습니다.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니 말만 잘 듣는다면 이들을 통해 조선 백성을 움직이는 게 효율적이었을 테니 말이죠. 박상진은 조선 최고의 엘리트였으니 당연히 회유 대상이었겠지요. 어느 정도 협조만 하면, 그냥 눈 질끈 감고 입 뺑긋하지 않으면 잘 먹고 잘살 수 있는 길이 열렸을 겁니다. 실제로 호의호식 하는 사람들도 많았고요.


    박상진이 판사를 꿈꾼 사람이라면 그런 판단을 내리지 못했을 거예요. 판사라는 꿈을 드디어 이룬 셈인데 그걸 내던지기가 얼마나 어려웠겠어요. 하지만 박상진의 꿈은 판사가 아니었어요. 그의 꿈은 명사가 아니었습니다. 법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늘 당하고만 사는 평범한 이에게 도움을 주고, 정의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사람이 되려고 판사가 된 것입니다. 이게 그의 꿈이었어요. 명사가 아닌 동사의 꿈이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판사라는 직업이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정의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진짜 꿈이었으니까요. 그 꿈을 향해 나아간 것뿐입니다.


    판사를 포기한 박상진은 쌀가게를 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가게였지만, 사실은 독립군이 연락을 주고받는 곳이자 자금을 마련하는 장소였습니다.


    1915년 박상진은 조선국권회복단을, 곧이어 대한광복회를 조직했습니다. 박상진은 비밀, 폭동, 암살, 명령 이 네 가지를 일제 타도의 행동 강령으로 삼습니다. 대한광복회 강령을 보면 만주에 학교를 세우고 독립군을 양성해서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려고 해요. 국내외에 비밀 조직을 만들어서 일제의 통치기관을 폭파하고 일본의 주요 인사와 친일파를 사살하는 거지요.


    대한광복회 총사령으로 의열 투쟁에 앞장섰던 박상진은 결국 체포되었습니다. 그가 결심했던 대로 판사석이 아니라 피고인석에 서게 된 것이죠. 그리고 그 자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교수형에 처해집니다. 불꽃같은 인생을 살던 박상진은 그렇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살아가는 데 직업은 무척 중요합니다. 어떤 직업을 가질지 고민하는 만큼 무엇을 위해서 그 직업을 원하는지도 생각해 봐야 해요. 도전도, 용기도 좋습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위한 도전이고, 무엇을 위한 용기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 최종 종착지는 동사의 꿈이었으면 해요.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삶에서 길을 잃기 십상입니다.


    동사의 꿈을 꾸는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는 더욱 건강해질 것입니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 와 있든 동사의 꿈이 없다면 이제 진짜 꿈에 대해 생각해볼 때입니다. 여러분의 꿈은 무엇입니까?



    인생의 답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역사의 흐름 속에서 현재를 바라본다면

    미투운동이 현대에 이르러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닙니다. 100여 년 전에 이미 이런 분위기에 반기를 든 기념비적인 인물이 있었어요. 바로 나혜석입니다. 나혜석은 1896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천부적인 재능과 수려한 외모를 겸비했으며, 일본의 미술전문학교로 유학까지 다녀온 신여성이었지요.


    어린 첩을 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에게 아무 말도 못 하는 어머니를 보며 자란 나혜석은 남성과 여성이 평등하지 않은 사회에 일찍부터 반감을 가져 그림뿐 아니라 소설과 시를 통해 우리 사회에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명절은 여자에게 고단한 날이고 결혼은 여성을 억압하는 제도라는 것, 모성애는 임신하자마자 생기는 본능이 아닌데 사회가 학습을 종용하고 있다는 것, 여성 또한 개인의 성취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 등 그녀의 주장을 살펴보면 현대 여성들의 문제의식과 결을 같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20년 나혜석은 자신에게 끈질기게 구애해온 열 살 연상의 김우영이라는 외교관과 결혼을 합니다. 그는 한 번 결혼했다가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인물로 어머니와 자식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나혜석은 결혼을 약속하면서 지금 봐도 놀라운 네 가지의 결혼 조건을 내겁니다.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줄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처의 딸과 함께 살지 않도록 할 것, 그리고 자신의 첫 번째 사랑이었던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 것. 김우영은 이 모든 조건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신혼여행을 가서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줘요. 시대를 앞서가는 커플이 아니었나 싶어요.


    해피엔딩일 것 같았던 이들의 사랑에 문제가 생긴 것은 부부가 함께 떠난 세계여행에서였습니다. 이 여행에서 나혜석은 최린이라는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1919년 3·1 운동 때 나혜석은 여학생 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5개월간 투옥된 적이 있는데요, 최린은 이때 함께 투옥됐던 사람 중 한 명으로 그림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김우영은 나혜석에게 이혼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김우영에게도 이미 여자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나혜석은 어떻게든 재결합하려고 노력했지만 김우영은 그렇지 않았어요. 결국 두 사람은 이혼하고 김우영은 다른 사람과 결혼합니다. 그런데 이 일이 신문기사로 보도되자 모든 질타는 나혜석에게만 쏟아졌습니다. 남편도 외도를 했고, 나혜석의 외도 상대였던 최린도 유부남이었지만 대중에게 손가락질받은 사람은 나혜석뿐이었어요.


    어우동을 향한 질타와 나혜석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딴마음을 품었던 것도, 외도를 저지른 것도 다 같지만 누구는 여자이기 때문에 더 큰 지탄을 받고 누구는 남자라는 이유로 이해를 받았던 것이지요. 여성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는 사회의 이중성에 나혜석은 분노합니다.


    100년 전 나혜석의 외침 이후로 상황은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냉정하게 보면 크게 변한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500년 동안 내려온 여성 억압의 기제는 아직도 일상에 만연하죠. 저를 포함해 일부 사람들이 여성 해방 운동을 편안하게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도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행동하는 여성의 모습이 지금까지 우리가 규정하고 강요한 여성의 모습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낯서니까 왠지 모르게 위협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은 이런 움직임을 마치 돌발 행동처럼 유난스러운 것으로 여깁니다. 금방 꺼질 불로 보는 사람도 있지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봐도 이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봅니다. 1934년 나혜석부터, 그보다 먼저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서부터 계속 되어온 외침이기 때문이죠. 느닷없이 주장하는 요구도 아닐뿐더러 지금 당장 면피만 하면 조용해질 문제도 아니라는 겁니다. 이제는 정말 달라져야 할 우리 시대의 과제인 거죠.


    나혜석이 쓴 소설 『경희』에 이런 글이 나와요. "경희도 사람이다. 그다음에 여자다. 그러면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이제는 나혜석의 외침대로 나혜석의 후손들이 인간다운 삶을 쟁취해야 하는 때가 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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