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어디에도 없었던 방법으로
 
지은이 : 테라오 겐(역:남미혜)
출판사 : 아르테
출판일 : 2019년 02월




  • 이 책은 파산 위기의 1인 회사였던 발뮤다가 사람들을 끊임없이 매료시키는 제품을 내놓는 혁신 기업이 되기까지, 창업자 테라오 겐의 특이한 인생 역정이 담겨 있다. 


    가자, 어디에도 없던 방법으로

    1부

    인생은 짧다

    이 세상 누구라도 가능성을 지니고 살아간다. 가능성,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하고 귀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가능성은 말 그대로 가능성일 뿐이다. 확실한 것은 아니라는 소리다. 예를 들어 오늘 밤에 나는 저녁 식사를 할 예정이고, 내일은 회사에 갈 것이다. 잠시 들르고 싶은 장소도 있고, 따로 계획 중인 일도 있다. 그런데 이 멋진 미래가 정말 나에게 찾아올까? 엄밀히 말하면 오늘 밤의 저녁 식사도 확실한 게 아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전거 페달을 세게 밟아 뼈가 부러져 병원에 입원하는 불상사가 생긴다면, 저녁 식사는 거르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의 인생에서 확실하게 논할 수 있는 건 누구나 죽는다는 것뿐이다. 이것만이 우리에게 약속된 미래이며 그 외에는 가능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배웠다. 반드시 죽는다는 것, 그것은 나 또한 그렇게 될 운명이라는 뜻이다. 이 확실한 사실과 마주한 우리는 앞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해야 할까?


    지금 우리가 사는 하루하루는 언젠가 끝이 난다. 인생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 수년 뒤의 멋진 날을 그리거나 장래의 계획은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이야말로 인생의 축제날이다. 다시 말해 지금이 내 인생의 절정인 것이다.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든 이루고자 하는 일이 있다면, 당장 오늘부터 시작하는 게 좋다.


    홀로서기

    나는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마음을 나눌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대신 무기력에 빠져 정오도 되기 전에 학교에서 뛰쳐나와 가까운 공원에 있는 그네를 타면서 홀로 담배를 피웠다. 어딜 가도 익숙한 풍경뿐인 류가사키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어슬렁거리다가 다시 공원 잔디 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지겨웠다. 어떤 집단에도 속할 수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혼신의 힘을 다해 가르쳐줬던 것들에 비하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대체로 평범했다. 그 어떤 것에도 몰두할 수 없었다.


    어영부영 세월만 보내고 있던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아버지가 화를 낸 게 그즈음인 것 같다. 아버지는 대체 왜 이러고 사는 거냐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궁리하라며 언성을 높였다. 열일곱 살 소년에게 삶의 목표와 보람을 찾아 거기에 몰두하며 살아가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아버지는 진심으로 내가 그렇게 살기를 바랐다. 삶을 진지하게 마주하지 않는 나에게 화를 냈고, 학교를 뭐 하러 다니냐고 소리쳤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삶을 180도 바꿔버릴 일이 일어났다. 아침에 교실로 들어가자 각 책상 위에 질문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질문지에는 2학년 전원에게 진로를 묻는 항목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앞으로 어떤 직업을 갖고 싶은지, 그걸 위해 어떤 대학의 어떤 학부로 진학하는지, 문과와 이과 중에 어느 쪽을 희망하는지에 관한 질문들이었다.


    질문지를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절대 대답해서는 안 된다고 메아리쳤다. 또 그중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 희망 직업을 묻는 거였다. 이것만큼은 절대, 죽어도 쓰고 싶지 않았다. 지금 결정해버리면 그걸로 인해 잃어버리는 것이 훨씬 많을 것 같았다.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나만의 영웅이 있다. 위험을 감수하고 세상을 위해 싸우는 슈퍼 히어로. 타이거 마스크나 스페이스 셔틀에 올라탄 우주인. 높은 산을 오르는 산악인이나 험지로 여행을 떠나는 탐험가. 헤밍웨이나 갈매기 조나단, 그리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각자의 영웅을 동경하며 언젠가 그런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우리 모두에게 있었다.


    질문지에 희망 직업만은 절대 쓰고 싶지 않다고, 만약에라도 그걸 쓰게 된다면 내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배신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진 거라고는 가능성뿐인 우리에게 이런 무신경한 질문을 하는 어른들에게 화가 났다. 그때 느낀 강렬한 거부감은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기는커녕 점차 커져만 갔고, 나는 질문지 대신 자퇴서를 제출했다.


    이렇게 결론이 난 이상 떠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떠나야 했다. 싫어도 가는 수밖에 없다. 이쯤에서 확실하게 한번 해보는 거다. 내 인생을, 내 두 손으로 움켜쥐어보자.


    떠나기로 마음먹기까지 꽤 긴 시간을 망설이고 고민했다. 언어는 물론이고,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 타지에서 홀로 지낼 수 있을까? 위험한 일은 없을까? 생각이 깊어질수록 걱정은 커져갔다. 우물쭈물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나에게 아버지가 말했다. “겐, 남자라면 황야로 향해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앞에서 바람이 불고, 구름이 흘러갔다. 멀리 산맥이 보이고, 그 앞으로 광활한 황야가 펼쳐졌다.


    헤밍웨이를 읽으며 자란 나는 그와 인이 깊은 나라, 에스파냐로 목적지를 정했다. 기간은 일 년이다. 출국하는 날, 나리타 공항까지 아버지가 함께했다. 나도 긴장하고 있었지만, 아버지 또한 굉장히 상기된 얼굴이었다. 내 눈엔 안절부절못하고 허둥대는 것처럼 보였다.


    그날 아버지의 모습이 이상했던 이유를 지금은 알 것도 같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있는 힘을 다해 돌봤던 아들이 긴 여행을 떠나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와 나의 관계는 유독 끈끈했다. 집에서 먹던 음식 대부분을 함께 만들던 시간, 우리 형제를 위해 셀 수 없이 많은 장작을 쪼개던 시간,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와 우리가 자는 모습을 숨죽여 바라보던 밤까지. 공항으로 향하는 아버지는 온갖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했을 것이다.


    나리타 공항에서 둥지를 떠난 날로부터 이십오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다양한 경험을 하고 조금이나마 어른이 됐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내 행동을 결정해왔던 가치관의 기반은 결국 어머니와 아버지를 통해 배운 것들로 만들어졌다. 언제든지 진심으로 진지하게 살아갈 것. 무엇보다 소중한 가르침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실패를 경험하고, 고민하고, 방황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가진 가치관이나 살아가는 방법을 의심한 적은 없었다.



    2부

    열일곱에 떠난 여행

    일 년간 여행을 하면서 나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수차례 목격했다. 이탈리아 산간부에 있는 작은 마을 한가운데에 교회 첨탑 주변을 날아다니던 제비들이 있었다. 파닥이는 제비들의 날갯짓이 저녁노을에 반사되면, 하늘 가득 빛의 파편이 춤을 추는 듯이 보였다. 달빛 아래로 바윗돌이 많은 산길을 홀로 걷다보면 그 순간만큼은 달빛과 별빛만으로 지구의 끝이 보일 것 같았다. 바다 위로 뜨거운 태양빛이 쏟아지던 누디스트 비치에서는 물보라를 일으키며 그 순간을 즐기는 사람들이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명체로 보였다. 전망 좋은 언덕 위에서 가스버너로 구워 먹던 초리조(에스파냐식 소시지)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세상은 아름답다. 평소엔 일상 아래 숨어 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가끔 빛과 그림자, 미세한 온도차, 염분과 지방의 절묘한 균형, 소리와 박자의 기적 같은 조합 등을 통해 그 아름다움이 명확해질 때가 있다. 이곳은 살아갈 가치가 있는 아름다운 세상이다.


    나는 서서히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발을 넓혀갔다. 여행 초반에는 경비를 아끼려고 노숙을 할 때도 많았는데, 솔직히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낮선 곳에서 그건 할 짓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지식도 장비도 없이 마을 공원에서 노숙을 한다고 치자. 이건 또 이것대로 위험하다. 야생동물도 무섭지만, 그보다 인간은 훨씬 더 무서운 존재다.


    여행이 길어질수록 불안함에 점점 적응이 되어갔다. 반년쯤 지나고 나서는 여행자로서 자신감도 붙었다. 여권과 현금은 부츠 안에 넣고, 몸에서 떨어질 가능성이 있는 가방에는 잃어버려도 크게 문제될 것 없는 물건들만 넣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어딜 가든 운 좋게 잘 지냈다. 고기가 먹고 싶을 땐 종이 위에 고기를 그려주면 될 일이다.


    여행을 통해 내가 얻은 것은 자신감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성공이나 어떤 일을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다른 종류의 거였다.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감각을 기르면서 나는 살아 있고,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가고 싶은 장소를 선택하고, 스스로를 이겨내고, 목적지까지 이동한다. 아름다운 장면을 수도 없이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일을 한 건 아니지만, 살아가고 있냐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게 됐다. 나는 살아 있다고.


    여행이 끝날 때까지 짐을 무사히 지키면 좋겠지만, 잃어버리면 잃어버린 대로 어떻게든 된다. 애당초 어머니의 죽음으로 생긴 보험금으로 시작된 여행이었다. 이것도 마찬가지다. 한순간에 무일푼이 되더라도 그런대로 또 다른 방법이 생기기 마련이다. 접시닦이로 들어갈 만한 가게는 얼마든지 있다. 설마 죽기야 할까!


    류가사키에서는 내가 속할 곳이 없다고 느꼈다. 그러나 최소한의 짐을 가지고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다. 마음이 불편한 적도 없다. 이 여행이이야말로 내가 있어야 할 자리이기 때문이다.


    원래 그랬던 게 아닐까? 어떤 장소나 집단에 정착해서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라고 생각하는 게 틀렸던 건지도 모른다. 변화가 많고 불안정해도 여행이,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하는 인생이, 우리의 자리인 것이다. 오히려 소속이나 직업 같은 것들이야말로 불안정한 것이 아닌가? 몸뚱이 하나와 발을 딛고 서 있을 지면만 있다면 인간은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 나는 여행을 통해 그 사실을 온몸으로 배웠다.


    끝나버린 꿈



    꿈이 끝났다는 건 가능성을 잃었을 때가 아니다. 애초에 우리는 가능성을 잃을 수 없으니까. 꿈은 그것의 주인이 열정을 잃었을 때 비로소 끝을 맞이한다. 인생에는 아무리 원해도 이루어지지 못하는 일이 있다. 사실은 조금 더 빨리 이 사실을 알아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어리석게도 나는 이십 대가 끝날 무렵, 겨우 깨달았다.


    창업

    십 년 가까이 해온 음악 활동이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스물여덟 살이 됐고, 결혼도 했는데 여전히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는 처지였다.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까? 아니다, 음악 활동을 하는 동안 나는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의 즐거움을 알았다. 꿈이란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있다는 사실도 배웠다. 성공도 실패도, 사람을 성장하게 한다. 그리고 실패는 사람이 더욱 단단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한다.


    음악의 꿈이 끝나버리고 다른 꿈을 찾아 한 발 내딛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 온갖 생각과 행동이 뒤엉켜 있던 시기라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한 건 ‘서서히’였다. 음악이 아닌 유형의 세계에서 내가 가진 창의력을 시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아주 서서히 들었다. 그때 왜 유형의 세계에 흥미를 갖게 됐는지, 나 자신도 의아하다. 역시 아내의 집에 있던 디자인 잡지의 영향이 컸던 모양이다. 우연히 넘겨본 잡지에 펼쳐진 건축, 인테리어, 그리고 그와 관련된 소품의 세계가 아름다웠다. 독특했고, 시대를 개척해나가려는 에너지가 느껴졌다. 나도 그 세계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나는 아키하바라에 늘어선 수많은 가전 매장을 비롯해 공구 가게, 당시 살던 집 가까이에 있던 작은 공장들, 목재 시장, 고무 가게, 베어링 가게 등을 돌며 일상생활에서 당연한 듯이 사용하고 있는 도구들이 어떤 소재로 만들어지는지 대충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거리로 나가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고, 질문하고, 필요한 정보를 수집했다.


    아르바이트가 끝나는 오후 5시, 파칭코 건물 3층 휴게실에 앉아 전화번호부를 펼쳤다. 그리고 그곳에 실린 공장에 차례로 전화를 돌렸고, 매일 두어 곳을 방문했다. 생각해보시라. 트레이닝복 차림에 머리를 샛노랗게 탈색하고, 턱수염이 덥수룩한 동네 건달이 자전거를 질질 끌고 나타나 공장 내부를 보여달라고 한다면 어떻겠는가? 보여줄 리 없다. 대부분 “안되겠는데. 지금 바빠서.” 하고 날 거절했다.


    기적의 공장을 만나게 된 건, 그 뒤로 몇 번이나 더 퇴짜를 받고 나서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공장으로 전화를 걸어 “오늘 밤에 찾아가도 될까요?”라고 물었더니 “응, 괜찮아요.”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11월 즈음이었을 거다. 시간은 오후 6시. JR중앙선 히가시코가네이역 근처 주택가에 자리한 그곳은 아무리 봐도 공장으로 보이지 않았다. 프리패브로 세운 이층집은 많이 낡아 보였고, 나무 자투리에 유성 매직으로 <가스가이 제작소>라고 휘갈겨 쓴 간판이 덜렁덜렁 매달려 있었다. 어두컴컴한 공장 안안에 있는 각종 기계들과 등유 스토브에서 나는 기름 냄새가 왠지 모르게 친숙했다.


    가스가이 제작소의 세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같은 나를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기초적인 질문에도 세심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곧장 가스가이 제작소로 달려가는 하루하루가 시작됐다. 저녁때가 되면 마치 직원이라도 된 것처럼 그곳에 있었다. 그들에게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밤이 되면 가스가이 제작소에서 일을 배우고, 낮에는 브랜드 생각에 빠져 지냈다. 우여곡절 끝에 발을 들이게 된 유형의 세계에 나는 흠뻑 빠져 있었다. 어서 빨리 회사를 세우고, 스스로 디자인한 제품을 선보이고 싶었다. 언젠가는 애플이나 버진그룹, 파타고니아와 함께 세계를 무대로 활약할 날이 기다려졌다.



    3부

    손으로 만드는 회사

    2003년 3월, 유한회사 발뮤다 디자인이 설립됐다. 정말로 내 회사가 생겨버렸다. 브랜드명 뒤에 ‘디자인’이라는 단어를 붙인 이유는 발뮤다만으로는 무슨 일을 하는 회사인지 아무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사원은 나, 하나뿐이다. 우리 부부가 살고 있던 도쿄 무사시노의 월세집은 사옥이 됐다. 곧이어 가스가이 제작소에 달려가 창업 소식을 알렸다. 다들 기뻐하면서도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앞으로 이 회사를 꾸려 가계를 책임져야 한다.


    꿈의 선풍기

    2007년, 미국에서 일어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전 세계에 금융 위기가 닥쳤다. 뉴욕이니, 주식이니, 모두 나와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일본의 경제는 급속도로 흔들렸다. 특히 가격대가 높은 상품은 시장에서 외면받기 시작했다. 멀리서 불어온 폭풍우에 유한회사 발뮤다 디자인은 당장에라도 뿌리째 뽑혀 날아가버릴 것만 같았다.


    발뮤다 디자인에는 나와 직원 한 명과 아르바이트생 한 명이 있었다. 직원이라 해봐야 총 세 명인데, 그해의 순매출은 4,500만 엔으로 전년에 비해 1,400만 엔의 적자를 봤다. 게다가 주문까지 멈췄다. 이대로라면 파산하고 말 것이다.


    울고 싶은 심정으로 차에 올라타 언제나처럼 패밀리 레스토랑 앞을 지났다. 세계적인 금융 위기라는데 식당의 손님들이 요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 우리는 매일을 살아간다. 샴푸도 사고, 양말도 사서 신는다.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소비 활동을 꾸준히 이어갔다. 그런 와중에 내 회사는 파산 위기에 직면했다.


    그제야 나는 오랜 시간 풀리지 않던 의문의 답이 보이는 듯했다. ‘발뮤다 디자인의 제품은 왜 불티나듯 팔리지 않을까?’ 나는 단순히 제품이 비싸서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이유를 드디어 알아냈다. 사람들이 발뮤다 디자인의 제품은 사지 않는 건 비싸서가 아니었다.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슬펐다. 그렇게 온 힘을 다해 만든 제품이, 회사가, 사람들에게는 필요 없는 존재였다니. 만일 내가 만든 제품이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거였다면 어땠을까?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나는 또다시 내 멋대로 살고 있었던 거다. 멋있는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게 먼저였다. 왜 그걸 몰랐을까? 이런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됐을 때, 회사는 파산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잠들지 못했던 그 한 달 동안 나는 계속해서 생각했다. 이미 늦었더라도, 지금부터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만들 수는 없을까? 창업한 이래,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한 제품을 구상해왔다. 그것이 실현 가능한 일인지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저 언젠가 회사의 규모가 커지면 이런 걸 만들어야지, 저런 것도 만들어야지, 하며 밤마다 책상에 앉아 스케치했을 뿐이다. 그중 가장 좋았던 건 ‘차세대 선풍기’였다.


    어린 시절 경험한 기분 좋은 바람을 재현한 선풍기가 완성된다면, 분명 많은 사람이 원할 것이다. 여름은 매년 변함없이 덥다. 에어컨 바람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자연 파괴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되고 있다. 곧 세상 사람들은 지금 쓰는 것과 다른 것을 찾게 될 터다.


    그때부터 일 년 반 정도, 나는 몽유병 환자처럼 하루하루를 보냈다. 인생 최대의 기회를 쥐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슬아슬한 길 위를 전속력으로 달렸다. 가끔 들어오는 주문 처리와 제품 조립은 아르바이트 직원에게 맡기고, 나머지 직원 한 명과 선풍기 설계를 진행했다. 동시에 자금 조달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은행이란 은행은 모조리 찾아가고, 낼 수 있는 조성금 신청서도 모두 제출했다. 투자해줄 사람을 찾아보려고 몇 명 안 되는 지인까지 총동원했다.


    몇 달 전만 해도 머릿속에만 들어 있던 차세대 선풍기가 세상 밖으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하얗고 세련된 선풍기는 자연에서만 느낄 수 있던 산들바람을 제공한다. 부드럽고, 오랜 시간 맞고 있어도 거부감이 없는 바람이다. 이것만 있다면, 전보다 더 시원하고 쾌적한 여름을 보낼 수 있다. 더는 누구도 선풍기가 더운 바람을 토해낸다고 불평할 수 없을 것이다.


    도쿄 간다에 위치한 모터 회사에 처음으로 찾아간 그 여름날은 무척이나 더웠다. 사장을 비롯한 회사 간부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나는 이중 날개의 특징을 설명한 뒤, 그들을 향해 바람을 보냈다. 그들 중에서 눈에 띄는 한 명이 있었다. 그곳의 사장이다. 주위가 시끄러운데도 이중 날개의 가능성을 최대한 꼼꼼하게 확인하려는 듯이 보였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그가 나지막하게 “좋은 바람이군.” 하고 말했다.


    ‘좋은 바람’이라는 마루야마 사장의 한마디로 발뮤다의 새로운 선풍기를 위한 모터 개발 지원이 결정됐다.


    만우절

    발표회가 시작되기 직전, 오랜 기간 준비한 슬라이드 자료를 버렸다. 대신 무대 위에서 내가 하는 이야기에 따라 스태프가 내용에 맞는 이미지를 스크린에 띄우기로 했다. 당연히 제대로 연결되지 않는 부분이 생길 텐데, 그럴 때는 발뮤다 로고를 스크린 가득 비추기로 했다. 이렇게 프레젠테이션 방법을 변경하고 나서야 발표회장을 둘러볼 수 있었다. 이미 만석이다.


    객석을 비추던 조명이 꺼지고, 무대만 밝게 빛났다. 커다란 스크린에 발뮤다 로고가 떠오르고, 브랜드 소개와 함께 준비한 록 밴드 U2의 곡이 크게 울려 퍼졌다. 곡이 끝나고 몸도 마음도 붕 뜬 상태로 무대 중앙까지 걸어나갔다. 눈부신 조명이 나를 비추었다. 음악을 하던 시절, 진저리칠 만큼 올라갔던 무대다. 고민도, 고통도, 즐거움도 있었던 그 무대였다.


    그제야 내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알았다. 세상 그 어떤 곳보다 나에게 익숙한 장소다. 문제없다, 이곳이라면 얼마든지 떠들 수 있다. 오늘 이 사람들에게 선보이는 건 꿈의 선풍기다. 그동안 불러왔던 어떤 노래보다 자신 있었다. 나는 물 만난 물고기마냥 무대 위를 누볐다.


    거짓말 같았던 만우절 그다음 날, 회사 전화통에 불이 났다. 모두 어제 텔레비전에서 소개된 선풍기를 취급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원했던 전국의 가전 양판점에서 빗발치듯 주문 전화가 걸려왔다.


    그해 그린팬은 1만 2,000대가 팔렸다. 내가 목표한 수량의 두 배였다. 마루야마 사장이 나를 대신해 치렀던 돈은 그해에 모두 갚을 수 있었고, 그 뒤로도 몇 년간 모터 회사 매출에도 큰 도움을 줬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로 하향 곡선을 그리던 매출이 크게 오른 것은 물론이고, 마치 마법이라도 부리듯이 이윤을 올린 마루야마 사장은 회사의 영웅이 됐다.


    인생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다. 언제나, 누구나, 그 가능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내가 가진 것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건 틀린 생각이다. 아무리 내게 불리한 상황이라 해도 역전할 기회는 늘 있다. 할 수 없을 때도 있지만, 할 수 있을 때도 있다. 그리고 나는 내 인생 전부를 걸었을 때에야 비로소 역전할 수 있었다.


    에필로그 - 그 후

    그 후 어떻게 됐냐고? ‘발뮤다’라는 회사는 아직 존재하고 있다. 유한회사 발뮤다 디자인은 ‘발뮤다 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꿨다. 당시 세 명이었던 직원도 지금은 예순 명이 훌쩍 넘었다. 그린팬은 그 뒤로도 잘 팔려서 지금까지 수십만 대를 출하했다. 파산을 코앞에 두고 있던 2009년에 연매출 4.500만 엔에 불과했던 발뮤다는 다음 해에 2억 5.000만 엔, 그다음 해는 8억 4,000만 엔이란 매출을 기록했다. 선풍기 한 대로 만들어낸 금액이다. 이어서 공기청정기와 가습기, 히터 등을 출시했고, 해외 판매도 시작했다. 2016년의 매출은 50억 엔을 넘어섰다.


    그린팬을 출시하고 칠 년이 지나 매출이 백 배 가까이 불어난 셈이다. 이렇게 말하면 무탈하게 성공가도를 밟아온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나는 순조로움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언제나 거친 바다 위에 있었고, 파산 직전보다 더 힘든 시기도 있었다. 위기는 몇 번이고 나를 다시 찾아왔다. 우쭐해져서 만든 계절 가전이 창고에 쌓여갔고, 손에 쥐고 있던 현금은 금세 사라졌다. 그린팬의 성공은 좋은 물건은 어떻게든 팔린다는 착각을 나에게 안겨줬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얼마에 물건을 파느냐, 하는 문제도 매우 중요했다.


    세계 최고의 제품을 만들려고 욕심을 부리다보면 점점 원가가 높아지기 마련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계획하고 있던 제품마다 원가가 높아 수익성이 떨어지는 상품이 돼버렸다. 지나치게 높은 원가, 넘쳐나는 재고량. 거기에 엔화 가치가 급락하면서 2014년 전후로는 정말 위험했다. 위기 속에 가까스로 견디는 상황이 이어졌고, 그때마다 회사를 살린 건 세상을 놀라게 한 단 하나의 제품이었다. 집에서 맛있는 토스트를 먹고 싶다는 생각에 개발한 ‘발뮤다 더 토스터’. 이 제품은 그린팬을 크게 뛰어넘는 대히트 상품이 됐다. 솔직히 이게 나오지 않았다면 발뮤다는 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바다는 오늘도 폭풍우가 심하다. 안주 혹은 안정. 매력적인 말이지만 그런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힘겨워도, 다시 일해야 하는 게 인생이다.


    어쨌든 아무것도 모르던 초짜가 혼자서 시작한 이 회사는 창업 십오 년째를 맞이했고, 아직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성공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 있다. 내 꿈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거다. 단지 꿈이 자리하기 위한 기초를 만들어가는 중이다.


    록 스타들의 노래는 어딘지 모르는 길목이나 고독한 사람들의 방, 달리는 자동차 라디오 등 세상 곳곳에서 울려 퍼지며 누군가의 기분을 바꾸기도 하고, 감동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도 그런 일을 하고 싶다.


    가전을 만드는 회사를 경영하면서 그런 일이 가능할까?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고 싶어서,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 아직 여기에는 적을 수 없는 미래를 위한 제품 개발과 연구를 나는 계속해가고 있다.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면, 발뮤다라는 회사는 그 노래를 부르러 세계를 향해 날갯짓을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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